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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다 3남매의 긴 여름 저녁 [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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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1-08, 2017 07:16에 작성됨.

 

 “너, 왜 미오 그라비아 가지고 있었냐?”

 

 만족스러운 반응이 돌아왔다. 동생은 당황해서 형을 돌아보았고, 우즈키와 린은 서로 눈을 마주친 뒤 사건 해결을 위해선 맨 처음의 원인을 알아야 한다는 데 의견을 일치시켰다.

 

 “맞아. 미오의 수영복 그라비아를 숨기고 있었다며? 그건 뭐였어?”

 

 “누나가 나온 잡지니까 뿌듯해서 그랬던 거죠? 저희 아빠도 꼭 제가 나온 잡지들은 모두…”

 

 “그건 아니에요.”

 

 동생은 딱 잘라 대답했다. 곧 구체적인 부연이 나올 것이라 기대한 린과 우즈키는 침묵이 길어지자 얘기할 생각이 없다는 것을 알아챘다. 완강하게 이야기하기 싫어하는 그 태도에는 어쩐지 부끄러움 같은 것이 엿보였다.

 

 그런데 그런 낌새가 우즈키에게 요상한 해석을 불러일으킨 모양이다.

 

 “엣, 설마 동생분, 미오를 누나 이상의 감정으로…”

 

 “그럴 리가 없잖아요!”

 

 “우즈키…”

 

 기가 막힌 소리에 소년은 순간 옹고집도 수줍음도 잊고 소리를 질렀다. 이어서 친구의 짜식은 호명도 들려오자, 우즈키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아, 그렇죠오. 역시이! 나도 참, 아하, 에헤헤.’ 민망하게 얼버무리던 소녀는 고개를 홰홰 도리젓더니 흠흠, 하고 헛기침을 한다.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귀엽다고 생각했다.

 

 “뭔가 자세한 사연이 있다면 말해주세요. 괜찮아요. 만약 미오가 잘못한 게 있으면, 제가 혼내줄게요. 이래봬도 언니니까요!”

 

 “언…니? 언니, 구나…….”

 

 “아앗, 린! 그 눈빛은 뭐예요오~.”

 

 의도치 않은 만담 덕분에 방 안이 잠깐 웃음소리가 꽉 찼다. 혼다 오빠는 작은 창문으로 슬쩍 하늘을 보았다. 긴 여름해도 슬슬 피곤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휴대폰을 꺼내니 일곱 시 사십 분을 넘기는 시각이었다. 서둘러야겠다고 생각한 청년은 해결 속도를 올리기 위해 몇 마디 좀 더 보태기로 했다.

 

 웃음기가 조금 진정되자 그는 동생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왜 가져왔냐? 말해라.”

 

 “형!”

 

 “말해.”

 

 건방지게 째려보는 동생에게 형의 진지한 목소리가 꽂혔다.

 

 “이 형한테든 아니면 저 애들한테든, 제대로 설명을 해야 도움을 청할 자격도 있는 거야. 자기 사정은 좋을대로 숨겨놓고 제 고집대로만 하겠다고 떼를 쓰는 건 어리광을 부린다고 하는 거지. 하지만 넌 애가 아니니까, 다른 사람을 배려하기 위해 입을 다물고 있는 걸 거야. 괜찮아. 자아, 네가 애처럼 그러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저 누나들한테 보여주라고.”

 

 청년은 언어의 조리개를 조심스럽게 조절했다. 너무 꾸짖는 말투여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농담으로 치부될 만큼 가벼워서도 안 된다. 진심을 훼손하지 않는 적절한 익살이 배어 있는 어조로. 나를 항상 정직하게 대해주리라 믿는 너의 호의에 맡기겠노라는 분위기로. 내가 추궁해서가 아니라 너 스스로의 결심으로 털어놓는 것이라는 인상을 주기 위해 노력하였다.

 

 우즈키와 린은 그 말하는 방식이 어딘가 닮았다고 느꼈다.

 

 약간의 휴지가 있고, 소년은 어제 낮으로 시계바늘을 돌렸다.

 

 

 시절은 여름방학이다. 별로 할 일이 없으므로 노는 데만 부지런해지는 것이 방학 중의 중학생이다. 혼다 동생은 방학 중의 중학생답게 또래 녀석들과 패를 지어서 시내를 쏘다니며 놀고 있었다.

 

 집 안에는 같이 놀 사람이 없었다. 형은 혼자 다른 동네에서 생활하고 있으며, 누나는 작년부터 아이돌을 시작해서 한창 분주할 때면 방학이고 뭐고도 없는 모양이었다. 그 사실이 별로 아쉬울 것도 없었다. 소년도 누나 품 속에서 노는 어린애는 졸업했으니까.

 

 논다고 해도 중학생 모임이 놀 만한 장소야 거기서 거기니, 햄버거 집에서 모여 오락실에 가거나, 노래방을 가거나, 영화나 보거나 뭐 그런 것이다. 극장을 나오면서 소년과 친구들은 ‘유배온 타천사가 세라핌으로 각성하면서 정화의 빛으로 좀비가 된 친구를 구하는 결말'이 공포영화의 결말로서 납득 가능한지를 두고 열띤 난상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편의점에서 요기나 하려고 하는데 가판대에 하필 그것이 눈에 보였던 것이다. 아이돌의 그라비아 잡지. 수영복을 입은 그녀는 소년적인 스포티함이 지워지지 않은 얼굴과 여성적 곡선의 심미를 보여주는 몸매가 언밸런스한 듯 자연스레 어우러져 이루는 묘한 에로티시즘이 능히 사춘기 남학생의 흥미를 자극할 만한…

 

 ― 야, 저 잡지 네 누나지?

 

 ― 응.

 

 뭐 그랬다. 집안에 유명인사가 있으면 가끔 이런 일이 벌어지는 법이다. 이제는 주위도 익숙해졌는지 별로 자주 오르내리는 얘기는 아니지만 연예계나 가수에 대한 쪽으로 화젯거리가 넘어가면 으레 기자회견이라도 하는마냥 혼다 동생에게 질문이 쏟아지곤 했다.

 

 ― 야, 근데 너희 누나 진짜 예쁘다.

 

 ― 예쁘냐.

 

 ― 그리고 뭐냐, 이… 아니, 아니야.

 

 가슴도 엉덩이도 빵빵해서 완전 죽여, 라는 것이겠지. 어련하겠냐. 혼다 동생도 여자의 가슴에는 흥미가 지대하고, 또 누나가 몸에 지방이 잔뜩 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누나의 사진에는 도무지 흥분을 시킬 요소가 결여되어 있는 것 같았다. 미모에 대한 그의 견해는 더욱 냉엄해서, 아무리 봐도 속눈썹 긴 선머슴에 불과한 얼굴의 어디를 보고 미인이니 미소녀니 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탄식스러워라. 어쩌다 세상이 이 지경까지 이르렀단 말인가.

 

 ― 얘네 누나 노래도 잘 해. 지난번에 신곡 나왔는데 순위 막 탑 텐에 들더라.

 

 대기업의 머니 파워겠지. 이런 얘기는 이제 됐다.

 

 ― 야, 야, 그런 시력에 안 좋은 거 자꾸 보지 마. 아이스크림이나 골라라.

 

 그야 혼다 동생도 다른 아이돌의 그라비아라면 그 과실의 탐스러움이나 여기 저기 드러나 보이는 맨살의 윤기를 보면서 열정적으로 떠들어 댈 기분이 안 나지도 않는다. 그러나 친누나의 벗은 몸을 친구들과 함께 감상한다는 사실 자체가 굉장히 민망스럽기 짝이 없는 일이다.

 

 짜증나게 히죽이는 눈길로 바라보는 녀석들한테 뭐냐고 불만 있냐고 해주려고 하는데, 등 뒤 조금 높은 곳에서 조금 굵은 목소리가 들렸다. 고등학교 교복을 입은 남자 두 명이었다.

 

 ― 어, 혼다 미오다. 수영복!

 

 ― 오, 야, 보자. 크으, 완전 꼴리네. 이게 열다섯이냐? 반칙이네.

 

 살짝 눈썹이 올라갔지만 그저 언짢을 뿐이었다. 이런 식의 얘기는, 견해치고는 천박한 발언이긴 해도 혼다 미오라는 아이돌에 대해서 늘 들려오는 이야기였다. 일일이 화를 낼 수도 없고, 게다가 자신이 ‘여신님들'에 대해 품은 감상을 생각하면 소리 높여 나설만큼 청렴한 처지도 아니다.

 

 해서 소년은 안으로 들어가아이스크림을 계산해서 밖으로 나왔다. 가판대 앞에서는 여전히 남고생 둘이 누나의 그라비아를 보며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그 꽃은 향기가 아니라 썩은내가 났다.

 

   인간은 누구나 이야기꾼의 소질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코 밑에 솜털보다 진한 것이 돋을 나이가 된 남자는 예외 없이 뮤즈의 방문을 받는다. 그 뮤즈는 남자의 머릿속에 특정한 한 가지 분야에 있어서만 상상력의 감로를 부어 주는데, 덕분에 이맘때의 남자들은 하나같이 음담패설에 재능을 발휘하게 된다. 그 망상 속에서 혼다 미오는 이미 수영복 쪼가리 따윈 갈가리 찢긴 상태였다. 소년으로서는 어떻게 그런 얘기를, 큰 소리는 아니라 해도 대로에서 떠들어댈 수 있는지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들은 말은 기계적으로 소리내는 것조차 민망해서 혼자 있을 때라도 망설여지지 않을까 싶었다.

 

 망상은 더 은밀하고 더 상스럽고 더 자극적인 수위까지 올라갔다. 사용하는 어휘는 야하다 못해 추잡한 수준까지 떨어지고, 망상의 상황은 범죄적인 영역에 도달했으며 미오는, 소년의 누나는, 씩씩하고 유쾌하며 아이돌이라는 것에 자긍을 지닌 소녀는 그들의 패설에 의해 터무니없이 음란하고 굴종적이고 ‘붙어먹는 맛에 환장하는'(순화한 표현이다) 논다니가 되어 있었다.

 

 남고생 중 한 명의 헤벌죽한 입에서 어떤 행위를 표현하는 저속한 의성어가 나온 순간, 소년의 목청에서는 다른 의미로 비속한 어휘가 고함이 되어 터져나왔다. 그리고 이어서 고성이 오가고, 덤벼들고, 친구들이 말리고, 서로 주먹을 날리기 직전까지 가다가, 편의점 주인의 호통에 멈칫. 고등학생들이 욕을 뱉으며 사라진다. 씩씩거리는 소년의 손에는 빼앗을 때 힘을 줘 구겨진 잡지책 한 권. 주인 아저씨가 매서운 눈으로 보고 있다. ……제가 살게요.

 

 최악의 기분으로 귀가한 소년은 일의 근원인 잡지를 손에 든다. 살갗이 많은, 수영복 차림의 여기저기 탱글탱글한 누나가 자신을 보고 웃고 있다. 웃지 좀 마, 누나. 왜 이딴 건 찍어가지고. 그렇게 짜증을 내던 와중에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더니 “동생~ 누나 왔는데 인사 안 하냐!” “뭐, 뭐야!” 이하 생략.




 방 안은 잠시 정적.

 

 “그, 그런 사람들이… 정말 있군요.”

 

 “…뭐, 어디에나 저질스런 인간들은 있는 법이니까.”

 

 이야기를 들으면서 두 아이돌은 기분 나쁘다는 낯빛을 감추지 못했다. 그야 연예인을 그런 음담패설의 노리개로 취급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모르지 않았다. 아닌 게 아니라 회사에서도 인터넷 등에서 그런 내용을 발견할 수 있으니 가능한 에고서치는 하지 말고 어느 정도 마음의 각오를 가지고 일에 임하라는 교육을 따로 받기도 할 정도다.

 

 그러나 면전에서의 희롱은 자신들이나 프로듀서가 직접 대응할 수 있어도 전혀 모를 장소에서의 성적인 농담은 감수해야 하는 게 현실인 것이다. 불편한 이야기지만, 성적인 어필이 아이돌 사업의 주요 포인트 중 하나라는 점도 인정할 수밖에 없고. 그러니 자신들의 귀에 들리지 않는 패설이라면, 때론 들렸다 하더라도 없는 셈 치는 것도 이 업계에서 필요한 마인드다. 우즈키나 린이나 그러한 점에 대해 각오는 되어 있다.

 

 그러나, 가족들의 귀에 자신에 대한 질 나쁜 음담패설이 들린다는 가능성은 그녀들이 상정치 못한 바다.

 

 “저는 기특하다고 생각해요!” 우즈키가 드물게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저, 저도 아이돌을 가지고 그런 얘기, 많이 나온다는 건 알지만. 각오도 하고 있지만…. 엄마나 아빠가 그런 얘기를 듣게 된다면, 아으, 정말로 슬퍼하실 거예요…. 역시 미오 동생은 좋은 사람이에요! 미오가 오해했을 뿐인 거잖아요. 분명 얘기하면 미오도 사과할 거예요!”

 

 “…글쎄요.”

 

 “내 생각도 그래. 나도 길 가다가 미오를 그런 식으로 말하는 얘기가 들린다면 가만 있지 않았을 거야.”

 

 혼다 동생은 입술을 달싹이다가 말을 안으로 삼켰다. 부끄러움도 억울함도 분노도 아닌, 뭐라 한마디로 말하기 어려운 개운치 못한 감정의 침전물 같은 표정이었다. 처음부터 그 외의 다른 감정은 느껴본 적 없는 사람처럼 묵묵히 찡그린 채 아래를 바라보는 소년의 머리 위에 어른의 손이 턱 얹혔다.

 

 “잘했어. 남의 집 귀한 딸을 함부로 혀에다 굴리는 놈팽이들을 보고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되지. 멋지다.”

 

 머리에 얹힌 손을 치우지도 않고 소년은 형을 올려다보았다. 형은 진지한 표정이었다가, 갑자기 피식 하고 웃더니 “마지막까지 기특하게 끝났으면 더 멋졌을 텐데 말이지.” 라며 얄궂어했다. 동생이 샐쭉하게 입을 내밀며 뭐라 구시렁거리는 것도 무시하고 형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고개를 들고 말했다.

 

 “뭐, 이 나머지는 당사자들이 알아서 하라지.”

 

 자상하고 우렁찬 목소리는 동생과 소녀 둘을 넘어서 현관으로 향하고 있었다.

 

 형은 동생의 자기고백에 동요하지 않았다. 사실 그럴 거라는 예상에서 별로 벗어나지도 않았다. 혼다 가의 장남은 남동생에 대해서도 여동생에 대해서도 잘 알았으니까.

 

 그리고 내친 김에 말하자면 지금 고해의 장소가 된 낡아빠진 빌라가 주는 신호도 아주 잘 파악하고 있었다. 따라서 일곱 시 사십 분경에 밖에서 들려온 창창거리는 울림이 녹슨 철제 계단을 오르는 소리란 것에 이해가 닿은 사람도 그뿐이었고, 이 낡아빠진 빌라는 도무지 방음이라는 게 뭔지 모른다는 것도. 그만이 아는 사실이었다.

 

 그런 까닭에 그가 시간을 확인하는 척 휴대폰을 꺼내 짧은 메시지를 보내는 것에 주목하는 사람도 달리 없었다.

 

 ―― 열지 말고 귀만 대

 

 “미오.”

 

 “미오!”

 

 혼다 가의 둘째는 현관에 신발을 벗고, 단숨에 놀란 친구들 가운데에 섰다. 보기 드문 무표정이었다. 그 시선에서 조금 낮게, 남동생은 마뜩찮다는 기색으로 눈을 치켜떴다. 남매는 미간을 찌푸리거나 입가를 실룩이는 것으로 침묵 속에서 대화를 하고 있는 듯했다.

 

 어안이 벙벙한 린과 우즈키를 한 번 쳐다본 뒤, 장남은 클라이맥스를 감지하고 힘있게 두 팔을 벌린 카라얀처럼 격정을 채웠다. 마음 속으로만. 그리고 그는 후련한 기분으로 이렇게, 들리지 않는 선언을 하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비올라 솔로.




 당도가 높은 여름의 빛은 쉬이 상한다. 자발없이 팔팔한 여름 하늘은 어둠을 풀어서 지상의 색채와 형태를 한데 섞어 휘젓는 솜씨가 세련되지 못하다. 그래서 여덟 시가 가까워진 그날의 어둠은 끈적끈적하게 달라붙는 묵은 빛들 틈바구니에 엉성하게 끼어 있었다. 낮의 명랑함을 잃은 자리에 밤의 차분함이 들어서지도 못한, 어중간하고 무기력한 황혼녘이었다.

 

 묵은 빛이 부패한 과즙처럼 흘러나오는 방 안에서 소년과 소녀가 험악한 눈을 부딪혔다. 천둥이 치기 직전처럼 부산하면서도 무거운 기류가 흘렀다. 우즈키는 호의도 악의도 아닌 설명하기 어려운 이런 긴장감을 느낀 적이 있다. 가을 라이브를 얼마 남겨놓지 않은 지난해, 로비에서 우산을 들고 친구와 마주쳤을 때였다.

 

 침묵을 끊은 것은 말이 아니었다. 소년은 벽 쪽으로 달려서 누나를 빙 돌아 문으로 향하려 했다.

 

 그 시도가 성공하려면 소년의 운동신경이 야생 고양이처럼 날렵하거나, 소년의 형의 자취방이 충분히 널찍하거나 소년의 누나가 달아나는 동생을 신경쓰지 않거나 셋 중 하나의 조건은 들어맞아야 했을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소년은 그다지 체육계도 아니었고, 형의 자취방은 좁아터졌으며 미오는 동생을 방치하지 않았다.

 

 “여기서도 가출하면 어디로 가게?”

 

 그렇게 예리한 질문은 아니었다. 혼다 동생은 대답하지 않았다. 정말로 생각을 안 해 놨다는 게 가장 큰 까닭이고, 대화하지 않겠다는 의사 표시를 함축하기도 했다. 그러나 미오는 침묵도 대답의 일환으로 취급하기로 했다.

 

 “넌 뭐가 네 맘에 안 들면 도망치거나 틀어박히거나지?”

 

 “누나한테 보고 배웠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미오는 동요를 감추지 못했다. 독살맞은 빈정에 우즈키와 린도 당혹스러웠다. 세 사람 사이에서도 결코 함부로 나오는 화제가 아니다. 미오가 먼저 자조적으로 그때의 일을 언급하는 경우는 있지만 아주 드물다. 그 화제가 나오는 순간 분위기가 무거워진다는 것을 세 사람 모두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혼다 동생은 방외자이며, 자신이 한 발언의 파괴력을 모른다.

 

 미오는 표정을 일그러뜨렸지만 동생의 팔을 놓지 않았다.

 

 “못된 거만 배우네. 근데 누나는 그렇게 밉살맞게 말하는 버릇은 없거든?”

 

 “하긴 누나는 말보다 행동이지.”

 

 “그만해라?”

 

 “팔 놔.”

 

 “그럼 앉아.”

 

 “싫어.”

 

 짧은만큼 날선 말을 교환하는 남매는 누가 봐도 화해하는 모습 같지 않았다. 우즈키와 린이 끼어들 타이밍을 재며 눈짓을 나누는 사이 미오가 한층 진정한 어조로 말을 꺼냈다.

 

 “앉아서, 얘기하자. 계속 이럴 거야? 그럴 순 없잖아.”

 

 “그건 내 마음이지. 누가 먼저 건드렸는데.”

 

 “누군데?”

 

 “누나가 팼잖아! 난 맞았고! 이 여자 깡패야!”

 

 맞은 쪽의 울분은 인정해야 하지만 아무래도 사태를 좀 과장하는 발언이 아닐 수 없다. 누나는 동생의 도를 넘어선 발언에 따귀를 한 대 올려붙인 것뿐이니까. 그리고 비슷한 논리를 적용하면 혼다 동생 자신도 희대의 도촬마라는 악명을 겸허히 수용해야 할 처지다. 그러나 자신이 당한 일에 엄격해지는 것이 혼다 동생만의 성정은 아닐 것이다.

 

 “네가 우리 일을 가지고――”

 

 “그리고 그거!” 동생이 말을 가로챘다.

 

 “그런 말을 왜 저 누나들한테 한 건데! 치사하게 동네방네 다 떠들고 다니냐? 엿 먹어보란 거지? 제대로 쪽 좀 팔려보라고! 비겁한 건 누나잖아! 집안싸움에 친구들이나 불러내서 대타로 세우고 지는 오지도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뭐 하나 어른스럽게 한 것도 없으면서 행세야!”

 

 스스로 화를 북돋기 위해 화를 내고 있는 투였다. 소년은 아까의 비아냥 같은 고급스러운 공격이 불가능할 정도로 열이 올라 있었다. 예상대로 고함에 고함이 돌아왔다.

 

 “그래! 내가 잘못했어! 미안해!”

 

 그러나 이번 고함은 세 번째 고함을 막아버렸다. 혼다 동생은 장전한 악소리를 삼키느라 약간 우스꽝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미오는 뺨을 긁적이며 말을 이었다.

 

 “그…때 좀 욱해서 손이 먼저 나가 버렸지. 좀 차분히 생각해보니 역시 때리는 건 좀 그렇네…라고, 생각했거든. 그리고 또 뭐냐, 괜히 친구들까지 우리 싸움에 끼워넣은 건 역시 치사하지. 나도 좀 후회했어.”

 

 동생도 동생이지만 지켜보고 있던 린과 우즈키도 수줍게 사과하는 미오의 모습에 상황판단을 하느라 시간을 소모했다. 분명히 아까까지 한 판 붙을 듯한 분위기였는데, 아무런 전조 없이 이런 화해 무드가 가능한가? 그리고 미오의 저렇게 우물쭈물하는 태도도 생경한 것이었다. 그녀들이 아는 리더는 사과를 할 때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허리를 숙이고 미안하다고 말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가족인데도 저렇게 미안하다는 말을 어려워하다니.

 

 혼다 오빠는 ‘가족이라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음에 남동생이 무슨 말로 받을 지도 예상할 수 있었다. 아마도 그쪽에서 숙이고 나오니 화내기는 뭣하지만 화가 풀린 건 아니라는 의미로 퉁명스럽게,

 

 “그걸 차분히 생각해봐야 아냐.”

 

 토라진 말투로 그렇게 말했다. 아직 사과를 받은 건 아니지만 더이상 싸울 생각은 사라진 것이다. 이제 기특한 여동생은 앞으로,

 

 “그러게 말이지…. 아무래도 충동적인 게 집안내력 아닐까.”

 

 옳지. 그리고 계속해서,

 

 “내가 누나고 리더인데 말야. 이렇게 유닛 동료들한테 동생 맡겨놓고 나중에 털레털레 나오는 건 쪽 팔리는 일이지. 한심해…. 시마무, 시부린. 두 사람한테도 미안. 애초에 이런 건 경우가 아니었어.”

 

 여기서 다시 바이올린과 첼로.

 

 “아아아, 미오 탓이 아니에요! 미오는 아침부터 쭉 한 마디도 얘기 안 했어요! 우리가 계속 캐물어서, 그리고 여기도 우리가 멋대로…”

 

 “우리가 오지랖이 넓었던 거야. 아무리 친구라도 남매싸움에 중재를 서겠다느니 뭐니 무례한 일이었어. 게다가 결국 딱히 중재가 된 것 같지도 않고…. 미안해, 미오.”

 

 “괜히 두 분 다 기분만 더 상한 것 같아요. 죄송해요.”

 

 “어어? 아니아니아니! 시마무랑 시부린한테 뭐라 한 게 아니야! 오히려 고맙지! 바보같이 굴어서 걱정을 산 내가 나쁜 거야. 두 사람한테는 정말이지 고마운 정도가 아니라 감동 먹었다구! 내 컨디션 풀어주려고 이런 면 안 서는 일까지… 이렇게 멋진 친구를 둘이나 둔 나는 행복한 녀석이야아!”

 

 “미오!” “미오…!”

 

 눈물이 그렁한 채 얼싸안는 세 여자를 소년은 미묘한 눈길로 바라봤다. 왠지 모르겠지만 낯간지러운 말을 뱉고는 자기들끼리 감동에 젖기 시작했다. 대체 이 유닛의 기저에 어떤 공감대가 있는 것인가. 소년은 처음으로 누나의 직장 내 생활 모습이 궁금해졌다.

 

 아무튼 보기 흐뭇한 광경이므로 계속 보고 있자니 서로를 바라보고 있던 세 쌍의 눈길이 느닷없이 자신 쪽으로 휙 쏠리기에 소년은 흠칫했다.

 

 소녀들은 동생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 눈길의 강도는 조금씩 달랐지만 소년의 무언가를 재촉하고 있었다. “에에, 그러니까…” 우즈키와 린은 포옹을 풀고 다시 방을 남매의 공간으로 만들었다. 동생의 다음 말은 모두가 예상할 수 있었다.

 

 “누나가 장난쳤을 때, 괜히 짜증낸 거. 미안.”

 

 “아니, 누나가 미안해. 생각해보니까… 네가 셔츠 풀고 나한테 ‘오늘 밤은 돌려보내지 않겠어, 허니’ 이런 말 했으면 나라도 밥맛 떨어지겠더라.”

 

 “어, 지금 싸우자고 하는 소린 아니지?”

 

 “아니야. 역지사지해봤다는 거지.”

 

 “왜 하필 그런 기분 나쁜 상상인데. 어, 아무튼… 아이돌 직업 가지고 상스럽다느니 야하다느니 말한 것도, 미안해.”

 

 “응. 사과, 접수.” 미오는 생기 있게 미소지었다. 우즈키나 린에게도 익숙한 미소다. 안도. 다행감. 한숨. 그리고

 

 “이제부턴 감사 타임.”

 

 생각지 못한 말.

 

 “응?”

 

 “고마워. 길 가다가 누가 나 가지고 지독한… 좀 그런 얘기 떠드는 거, 화내 줬다며.”

 

 미오의 다정한 감사는 두 친구를 감동시켰지만 동생에게는 그러지 못했다. 혼다 동생은 당혹감을 느꼈다. 왜 이런 낯간지러운 얘기를 하는 건데. 어차피 사과 끝났고 그냥 못들은 셈 적당히 넘어가도 되잖아. 이렇게 당당하니까 나 혼자 민망해서 미칠 것 같아.

 

 “그 얘기 들었을 때, 역시 형제만한 아군이 없구나 생각했어. 진짜로. 누나 위해서 나서 줘서 고마워. 그치만 다음번엔 그러지 마. 진짜로 싸움 붙어서 얻어맞으면 어떡하려고.”

 

 “그만 그만 그만 그만!”

 

 감사받는 쪽의 얼굴이 시뻘개졌다. 정작 미오의 표정은 태연하기 짝이 없었다. 당연히 말해야 할 것을 말했을 뿐이라고 표정으로 주장하고 있다. 안 어울리는 짓하는 누나도 누나지만 그런 누나에게 ‘역시 미오'라는 식의 굳건한 신뢰의 눈길을 보내는 두 여자도 당혹스럽다. 이 상황의 민망함을 느끼지 못한단 말야? 대체 이 인간 일 나가서 뭔 짓을 하고 다니길래 이래?

 

 혼다 동생은 화끈거리는 얼굴로 한숨인지 신음인지 모를 것을 흘렸다.

 

 “…누나, 요즘 들어 넉살이 는 것 같아.”

 

 “이게 바로 네 누님이 일 나가서 배워온 거란다. 어때? 누나의 눈부신 성장이.”

 

 “자뻑도 늘었는데….”

 

 농담을 농담으로 받으며 남매는 개운함을 느꼈다. 그건 그들 남매의 평소의 대화였다.

 

 형광등이 켜지고 세상이 갑자기 환해졌다.

 

 “거 봐라. 작정하면 푸는 데 10분도 안 걸리잖아.”

 

 “오빠도 고생했어. 아니, 한 거 없나?”

 

 “밖에 봐라. 해 졌지? 착한 애들은 슬슬 돌아갈 시간이야.”

 

 “들었지? 오빠가 너보고 얼른 꺼지라잖아.”

 

 복수형으로 말한 건 산뜻하게 무시한다. 넉살이 는 건 확실한 모양이다. 아무튼 두 동생은 부모님이 돌아오기 전에 집에 가야 한다. 처음부터 그렇게 될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형. 알바 괜찮아? 나 때문에 오늘 쉬었잖아.”

 

 “왜 형 잘릴까 봐 걱정되냐?”

 

 혼나기는 할 거 아냐. 주눅든 동생의 목소리가 정말 이제와서다 싶다. 아냐, 땜빵할 친구는 보냈어. 아아, 그래? 다행이다. 뭐 오히려 니들 싸움 덕에 이 형아도 시간 좀 났고. 우리 칭찬 듣는 건가? 넌 저게 칭찬으로 들리니, 바보야. 여자친구나 불러 놀아야지. 그래?

 

 “………어?”



 “뭐야, 오빠! 여친 있었어?”

 

 목소리가 뒤집어진 여동생의 질문에 청년은 짧게 대꾸했다.

 

 “응.”

 

 밥 먹었냐는 질문에 대답하는 듯한 폼새였다.

 

 “못 들었는데?”

 

 “너희들한테 얘기해야 돼?”

 

 누구야? 어떤 사람인데? 이름은 뭐고 나이는? 착해? 예뻐? 가슴 커? 예비 올케 좀 만나게 해 줘! 여동생의 심문공세를 모르쇠로 일관한다. 너네, 안 가냐? 지금 그게 문제야? 그 와중에 끼어드는 앳된 목소리. 잠깐잠깐, 그러고 보니 형!

 

 “그럼 나 얼른 보내려 한 게 여친 부르려고 그랬던 거야? 어이없네!”

 

 “어차피 알바 빠져서 시간도 비고, 시간 좀 인간관계에 투자하겠다는 데 나쁠 거 없지.”

 

 미오와 동생의 목소리가 올라가기 시작한다.

 

 “이 밤늦은 시간에, 여자친구 불러서, 이 좁은 방에서, 대체 뭘 하며 놀 생각인 걸까아? 순순히 자백하시지!”

 

 “뭘 생각하는 거야. 이 음란마귀야. 넌 여고생이 좀 더 환상에 젖어 있을 순 없냐?”

 

 “오빠가 어른의 계단을 올라갔어! 평생 일 없을 줄 알았는데!”

 

 “내가 뭘 하든 내 맘이고. 넌 이 밤늦은 시간에 집에나 가라고. 저기, 그쪽 친구들?”

 

 짜식은 표정의 우즈키와 린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삼남매의 대화는 지금까지 이 일련의 사건들이 생각보다 훨씬 시시하고 일상다반사적인 해프닝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하기에 충분했다. 참 다사다난하기 짝이 없는 관계다. 형제자매라는 건.

 

 …하지만 보는 입장에선 꽤나 재미있긴 하다. 우즈키와 린은 삼남매의 다툼소리를 들으며 쿡 하고 웃는다.

 

 “있지, 우즈키. 이제 그만.”

 

 “네. 아무래도 여기 있으면 미오 또 싸울 것 같네요. 미오! 이제 그만 돌아가요.”





 “조만간 두고 보자!”

 

 “두고 두고 보려무나.”



 문 닫히는 소리. 형광등을 끈다. 인기척이 거품처럼 꺼진 방에서 청년은 냉장고를 열어 맥주를 꺼낸다. 휴대전화에 이어폰을 꽂는다. 안주인 땅콩은 이미 차려져 있다.

 

 저장된 노래를 재생한다. 청년은 오늘 밤 예정이 없다.




 여름밤은 사람을 평화롭게 하는 미덕이 없다.





 “미오의 오빠분, 참 상냥하셨어요. 다정한 분이신 거 같아요.”

 

 “그래? 뭐 확실히 사람은 좋지. 좀 어수룩하달까, 맹탕인 구석은 있지만.”

 

 미오는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적였다.

 

 “아무튼 이번엔 내 일로 두 사람한테 정말이지 폐 끼쳤어.”

 

 “뭐, 잘 마무리 됐잖아. 그리고 사실 우리 별로 한 것도 없는 거 같고.”

 

 화기애애한 뉴 제너레이션을 소년은 멍하니 바라보았다. 여전히 여신처럼 아름다운 사람들이다. 문득, 소년은 그 여신들이 자신을 만나러 여기까지 왔음을 깨닫는다. 소년은 그녀들의 목적이었다. 죄책감이나 다른 뭔가에 가로막혀 있던 실감이 부지불식간에 찾아왔다.

 

 놀라운 것은 그 사실이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두 사람은 잡지나 텔레비전에서 걸어나온 사람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우즈키와 린을 보면서 느꼈던 외경의 막이 사라졌다. 막 안쪽에서 풀려나온 은은하면서도 다채로운 빛을 소년은 멍하니 바라보았다.

 

 사진으로 봤던 미경을, 햇빛 구르는 초원과 산에 둘러싸인 호수를 육안으로 직접 볼 때의 생경함과 친근함.

 

 “야.”

 

 “어, 응?”

 

 그리고 매일 보는 활엽수길 같은 목소리.

 

 “누나 친구들한테도 사과 해야지.”

 

 “처음부터 했는데.”

 

 “그럼 다 끝났으니까 또 해.”

 

 “죄송했습니다.”

 

 응응 하며 고개를 젓는 우즈키. 은근하게 어깨를 으쓱이며 눈을 감는 린. 이걸로 되는 걸까. 고개를 돌려 보니 누나도 만족스럽게 웃고 있다. 그 웃음에 다시 깨닫는다. 소년은 지금 그녀들과 함께 길을 걷고 있다. 낡은 빌라에서 지하철역까지의 길을.

 

 “참, 린. 그러고보니 동생분께 드릴 말이 있었죠.”

 

 “…아, 그러네. 깜빡 잊고 있었어. 아니, 사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해야 하는 말이었는데 말야. 정말 번번이 이런 얘기 꺼낼 상황이 아니게 돼서.”

 

 있잖아요. 봄볕 같은 목소리가 소년의 가슴에 기대를 불어넣었다. 기대하는 이에게는 온 세상이 낭만이다. 소년은 우즈키의 목소리가 품은 따스함이, 린의 쑥스럽고 멋쩍어하는 표정이, 위대한 인연의 일진보로 통할 징조라고 느꼈다.

 

 미묘한 의식의 기류가 드러나지 않은 채 흘러간 첫만남. 오해와 갈등. 우정과 사랑의 길항. 반지. 행복과 다정함으로 포장된 어른의 길을 내딛는 두 사람. 관객이여, 이 아름다운 세상의 아름다운 남녀 주인공에게 박수를. 창문에 색색으로 맺힐 십 년 뒤 식장의 햇살을 상상하던 소년에게, 시마무라 우즈키가 수줍은 입술을 떼었다.



 “저기… 죄송한데 이름이 어떻게…?”



 소년은 이런 식으로, 세상이 자신에게 내린 알맞은 구석자리를 찾아간다.

 

 삑사리 난 하모니카 같은 누나의 웃음소리가 짜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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