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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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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1-04, 2017 22:34에 작성됨.

 

서늘한 감촉이 손가락을 깊게 파고 지나간다. 잘린 단면에서는 곧 피가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라 멍하니 그것을 보고만 있었다. 그리고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 한 방울이 아래로 툭 하고 떨어졌다.

 

피가 떨어진 곳은 달걀말이 위였다. 샛노란 표면 위에 검붉은 액체가 한 방울씩 떨어지고 있었다. 나는 황급히 휴지를 뽑아서 상처를 꾹 눌렀다. 상처가 깊지 않은지 피는 그렇게 많이 배어나오지 않았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이미 달걀말이는 피로 엉망이 되어 있었는데. 한숨을 폭 쉬었다. 그러고 보니 도마 위에도 몇 방울의 피가 묻어 있었다. 무를 썰고 있었는데 역시나 다시 썰어야 할 것 같다.

 

하트 모양의 도시락통. 오른쪽 위에 담겨 있는 달걀말이. 새빨간 색으로, 마치 소스를 뿌린 듯하지만 전혀 맛있을 리가 없는 피. 그리고 사무실에서 매일매일 일만 하는 어느 누군가를 생각한다.

 

"어제 점심에는 무엇을 드셨나요?"

"물론! 이 칼로리 메이트만 있으면 되지!"

"마유는... 프로듀서님이 열심히 일하시는 모습을 정말 좋아해요."

"...그건 다행이네."

"그런데 프로듀서님이 몸을 소중히 하지 않으신다면 저는 걱정이 된답니다?"

"아니 뭐, 칼로리메이트 같은 데에도 영양은 충분하고..."

"그게 아니에요!"

"마, 마유..."

"칼로리메이트에 영양소가 충분하지 않다는 건 둘째 치고서라도... 식사 시간은 쉬는 시간이기도 하다구요."

"...확실히, 그랬지."

 

그리고 순간 불현듯이 매일 내가 싸 오는 도시락의 양을 늘리면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또 한 걸음을 다가갈 수 있겠다는 생각에 조금 기뻤다. 매일 식사를 만들어 달라는 건... 일종의 프로포즈기도 하니까. 기합 넣고 만들어야지!

 

"그러면... 마유가 점심 도시락을 만들어 드릴까요?"

"나한테? 귀찮지 않아?"

"프로듀서님이라면 귀찮은 일은 없어요."

"...고맙구나."

"그리고 만들던 도시락의 양을 늘리면 될 뿐이니까요. 그러면 내일, 기대해 주세요♡"

 

미소를 지으며 돌아왔지만, 애써서 만든 프로듀서 님의 도시락이 이런 모양이 된 것이다.

 

지혈을 하고 반창고를 붙인 다음에 다시 반찬을 만들어야겠어. 달걀말이는 아침에 먹는 걸로 하고. 피비린내가 나는 건 아무도 먹고 싶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건 내 피였지?

 

 

프로듀서님한테 첫 눈에 반해서 스스로 프로듀스를 받게 된 뒤로 매일매일이 행복했다. 계속해서 프로듀서님한테 사랑을 전해 주고, 프로듀서님은 멋쩍어하면서도 나를 거부하지는 않으신다. 한 걸음씩 다가간다면 프로듀서님은 어쩌면 나한테 반해 주지 않을까?

 

한 걸음씩 마음 속으로 다가가고, 조금씩 서로의 일부를 공유하는 것. 얽힘이 많아져 서로를 원하게 되는 것. 사랑을 하게 된다면 프로듀서님과 더 많은 것을 공유해야 했다. 아이돌이니까, 프로듀서님한테만 보여줄 매력 포인트 같은 것도 좋을 것 같다.

 

음식을 먹는다는 것도 요리한 사람의 일부를 먹게 되는 거겠지. 마음이나 그 사람만이 고르는 식재료, 주로 가는 식료품점, 집에 있는 식기나 조리 도구 같은. 그리고 거기에 더해서 요리하는 사람의 신체에서 떨어져 나온 눈물이나 땀 같은 것도.

 

 

 

 

어쩌면 피도 그런 일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엄지손가락을 쥔 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하지만 생각이 멈추지 않았다. 가장 확실한 일부를 프로듀서님한테 전하는 거야. 그리고 맛있게 드시는 프로듀서님의 모습을 보는 거야. 프로듀서님도, 어쩌면 알아채 주시지 않을까?

 

아니면 아주 조금만, 서로의 일부를 공유한다는 마음으로만 살짝 넣는다면 조금 더 마음이 가까워질 수도 있지 않을까? 이만큼 프로듀서님을 내가 사랑한다는 증거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미움받지 않고 마음을 더 깊게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좀 더 사랑하면, 내가 좀 더 다가가면 된다. 그러면서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를 계속해 나갈 수 있다. 내가 첫 번째로 좋아하는 아이돌이었으면 좋겠어. 프로듀서님 곁에 분명한 호감을 가지고 있는 다른 애들보다 훨씬 더 첫 번째이고 싶어.

 

사랑하는 마음도 첫 번째고 싶어. 특별한 것을 서로 나누고 싶어. 조금씩 손가락을 쥔 휴지가 풀려나간다. 기분이 갑자기 좋기도 하고, 또 내일 프로듀서님의 얼굴을 기대하기도 하니까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우훗... 후후후후훗..."

 

지혈이 채 되지 않은 상처에서 피가 배어나온다. 다시 휴지로 손가락을 감싼 다음, 냉장고에서 달걀을 꺼내 온전한 오른손으로 두 개를 깨어 넣는다. 그리고 조금씩 왼손의 휴지를 풀어내자 다시 상처가 드러난다. 난 천천히 그 상처를 달걀 위로 가져갔다.

 

오른손으로 천천히 달걀을 저으며 핏방울이 달걀물 속으로 들어가는 풍경은 무척 재미있었다. 샛노란 달걀물은 결과적으로 아주 약간 진한 색이 되었고, 이 정도라면 프로듀서님이 알아보지는 못하겠지. 나만의 작은 비밀이다.

 

마지막으로 하려고 했었던 된장국도 보온병에 채워넣었다. 물론 피를 한 방울 넣는 것도 잊지 않았다. 시계를 보니까 출근 시간. 기숙사 조리실에는 여전히 아무도 없었다. 도시락 가방을 들고 사무실로 향했다.

 

사무실 안에는 역시 프로듀서님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출근하기 전이었으니까. 아침도 드시지 않았겠지. 나지막히 프로듀서님을 불러 본다.

 

"프로듀서님."

"오 마유. 오늘은 일찍 왔네."

"어제, 도시락을 만들어 드린다고 했었죠? 마유가 먹는 것과 같은 거예요."

 

마유가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은 거예요. 프로듀서 씨의 몸 한 조각이라도, 마유로 이루어질 수 있는 거예요.

 

"아침도 안 드시고 오셨죠?"

"...응."

"그러면 아침 식사로라도 드실래요? 점심은 나가서 먹고요."

"그...럴까?"

 

곧바로 도시락통을 꺼낸다. 하트 모양은 프로듀서님 것, 직사각형 모양은 내 거다.

 

뚜껑을 열자 달걀말이와 우엉조림, 닭튀김, 콜슬로와 밥이 있는 도시락이 나왔다. 전부, 전부전부, 마유의 일부가 들어가 있는 음식들이다. 마음이라던가 식기 같은 것이 아니라 정말로, 마유의 생명과도 같은 것.

 

"오. 이 달걀말이, 맛있어 보여."

"그러면 프로듀서님."

"응?"

 

 

 

 

"아~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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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질하다 손가락을 베어서 지금도 엄지에 반창고를 감고 있습니다... 마마유 귀여워요 예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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