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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데렐라 판타지] 검과 얼음이 맞닿는 곳 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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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12-27, 2016 01:52에 작성됨.

" 아고고 아파라 ~ "

 

애꾸눈에 외팔이 검사가 이마 한 쪽이 시뻘겋게 부어오른걸 올려다 보는 시늉을 하며, 손에는 시커먼데다가 투박하고 두꺼운 판자 같은것을 들고 있다. 리이나는 그 쇠 판을 쳐다보면서 좋은게 뭐가 있다고 실실거리며 걸음을 재촉한다.

지금 즈음이면 도장에 어색하게 나란히 앉아있을 둘이 어떻게 이야기가 흘러가고 있을지 대강 상상이 간다.

아나스타샤가 먼저 미안하다는 말을 꺼내고, 그 다음에 줄리아는 미안하다는 걸로 안끝난다고 할것이고...

 

톡 톡.

 

누군가가 그녀의 소매를 붙잡고 두번 당긴다. 리이나의 시선이 불판을 든 팔쪽의 소매를 붙잡고 있는 작은 손길을 따라 시선이 향한다.

 

" 응 ? "

 

한 떨기의 어린 백합이라고 해야 하는것인가. 아직 피어나지 않은 하얀 봉우리인 채로 한창 크기를 키워가는 소박한 미(美)를 갖춘 아이의 얼굴. 남루하고 허름한 천들을 엮어만든 옷과 상반되는 백옥같이 하얗고 눈처럼 깨끗해 보이는 얼굴은 순수함의 표본이었다.

작은 입에서 언제나처럼 그녀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 검사님. 코즈에.. 꽃, 사줘. "

 

얇은 팔에 걸려있는 짚으로 투박하게 만든 바구니 안에 손으로 딴 흔적이 역력한 소소한 야생화 몇송이가 담겨있었다. 그 중 자주색과 붉은색이 적절하게 배분으로 이루어 흡사 와인의 빛깔과 같이 예쁘고 희소한 야생화 한떨기를 작은 손길을 꺼내어 들이민다. 상점가의 유명인이자 그곳에서 잘 알려진 별칭 꽃 파는 소녀.. 라고 불리우는 유사 코즈에의 하루 일과는 오늘도 충실하다.

 

" 아 참, 그렇지 ? 오늘도 힘내는구나. "

 

" 응. 이거 다 팔면, 언니가 좋아해줘. "

 

머리를 쓰담쓰담 당하자 뺨이 살짝 발그레해 지는 코즈에는, 그와중에도 꿋꿋이 들이민 야생화를 거둘 줄을 모른다. 타다 리이나가 눈앞의 이 작은 아이와 처음 만났을 때와 같았다. 꽃을 사줄 때까지 꿋꿋이 그 자세를 풀지 않는다.

들판에서 아무렇게나 뽑은 것 같은 비주얼에 1쥬엘 짜리로, 다소 가격은 있는 것이지만, 사람들은 그녀의 '언니를 위해서' 라는.. 외모와 나이에 비해 실로 우애깊고 사려깊은 아이의 성심을 생각하며 기꺼이 그 꽃을 산다. 어여쁘고 귀여운 외모때문에 성 매매의 대상이 되기 쉬울 수 있으나, 그녀가 그런 비참한 꼴이 된다 라는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녀를 멀리서 응원하는 상점가의 권력자들과 큰손들이 유사 코즈에의 신변을 책임져주기 때문이다.

리이나도 그 중 한명이기도 하고.

 

" 자, 여기 1쥬엘. "

 

타다 리이나가 소매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든다. 이어서 코즈에의 야생화를 가져가고 대신 빈 손에 별 모양 보석을 쥐어주며 웃는다. 코즈에도 리이나를 따라 순진무구한 미소를 보이며 감사의 말을 전한다.

 

" 고맙습니다 - . "

" 음음 ! 열심히 해야한다 ? "

" 응. 코즈에, 힘낼게. 검사님. "

 

그녀가 어째서 홀로 야생화들을 팔며 상점가를 돌아다니는지는 잘 모른다. 코즈에를 멀리서 지켜보는 수많은 사람들도 그녀의 부모님이 뭘 하고 뭣때문에 저 어린아이를 이렇게 하고있게 두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나이에 비해 효심과 우애가 지극한 청렴한 아이 라는것은 확실하다.

 

리이나는 그녀의 부모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보려다가, 괜한 참견일 것 같아 오늘도 말을 접고 대신 1쥬엘을 주고 받은 야생화를 조심스럽게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불판을 든 채 걸음을 돌린다.

시원스레 인사를 나누고 떠나가는 리이나의 걸음을 몇걸음 따라가는 시늉을 하다 멈춰선 어린 시선은.. 불현듯 하늘을 처다봤다.

 

 

" '언니' 가 일어날 때가... 곧. "

 

 

 

 

69(로꾸)류 검술 도장.

나무문이 힘차게 열리며 자신감 있는 발걸음이 들어오면 외친다.

 

" 이리오너라 ! "

 

하지만 대답은 없고, 들어온 그녀의 눈 앞에 있는 광경은 나가기 전과 하나도 다를 바 없었다. 오히려, 자신의 제자 쪽에서 더 안좋은 눈초리로 아냐를 째려보고 있었다. 반대편의 영하의 백기사는 시선을 피하기에 바쁘고 눈 둘 바를 모르는 듯 이리저리 굴리고 있었다.

 

" 음, 이건 생각보다... "

 

" 스승님 오셨슴까 ! "

 

확실히 기운 찬 대답이긴 하지만, 노려보는 눈매와 맞물려서 어딘가 좀 험한 느낌이 든다. 찻잔의 내용물 역시 거의 비어있지 않았다. 둘은 확실히 이야기를 한 것 같긴 하나, 좋은 방향으로 풀린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줄리아 측도 고개를 획 돌리며 눈을 안마주쳐 버린다. 이런건 타다 리이나가 원한 게 아니었다. 그렇지만 한 편으론 이해가 갔다. 다짜고짜 나라를 배신하고, 부모를 죽인 원수의 나라에 들러붙었던 이가 이곳에 있는데 그걸 쉽사리 수긍하고 용서해줄 리가 없었다는 걸 안다.

 

다른 방향으로 방법이 필요하다고 골똘히 모색중이던 그녀는, 마침 손에 들고있던 불판의 무게를 실감하고 그것을 번쩍 들어올리며 외친다.

 

" 좋아 ! 불판도 새로 생겼으니 고기를 새롭게 구워볼까 ?! "

" 고기 있슴까 ? "

 

퉁명스러운 맕투로 제자는 말을 거의 토해내듯이 하였다. 아무래도 제자에게 미운털 제대로 박힌 것 같다고 그녀는 내심 걱정된다.

 

" 내가 이런 날이.. 가 아니라, 만일을 대비해서 미쿠에게 받은 두덩이 중 하나는 보관실에 온전히 남겨놨었지 ! "

" 아냐는.. 별로 식욕이... "

 

" 어허 ! 안돼안돼. 난 손님을 굶기는 취미는 없다고. 올 때 부터 어깨에 힘도 없고 축 늘어진게 아침부터 아무것도 안먹은 거잖아 ? "

" .... "

" 좋아, 줄리아. "

" ... 저 사람은 싫지만 고기는 좋으니, 별 수 없슴다. "

 

툴툴거리며 줄리아는 보관실이 있는 도장 건물 안으로 터덜터덜 걸어들어간다. 그제서야 리이나는 불판을 옆에 두고 대장간에 가기 전과 같이 아나스타샤의 옆에 앉는다. 앉자마자 그녀는 가장 궁금했던 것을 물어본다.

 

" 둘이 무슨 얘기 했었어 ? "

" .. 아냐, извинения ... 사과, 했습니다. 미안하다고. "

 

" 그랬더니 ? " 리이나는 심오한 표정으로 연이어 물었다.

 

" 저 아이. 말했습니다. 아냐는.. 사과하는걸로 용서받을 수 없다고. 엄마와 아빠가 죽은건 아냐의 탓이라고 했습니다. "

 

말을 마치고 고갤 떨군다. 리이나가 측은한 눈으로 그녀의 눈망울을 처다본다. 두 눈에는 희미하게 눈물방울이 맺힐락 말락 하고 있었다.

 

" 맞습니다. 아냐는, 너무 심한 짓. 했습니다. 아냐는.. 왕국이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냐는 어렸을 때, 왕국 사람들 때문에 가족과 헤어졌습니다. 모두 심한 고문받고 당시에 어린 아냐처럼 어린 애들이 실험됬습니다. 아직도 선명합니다. 그치만, 똑같이 갚아주겠다고 생각한.... 아냐는 바보입니다 ! 정말 미안해요... 나라에도, 나라 사람들에도 ... 미나미에게도. 아냐는.. 자기만 생각하고 말았습니다. 최저의 사람입니다... 모두.. Извините. 죄송.. 합니다.. ! 러브라이카... 미나미.. 줄리아.... 모두 미안합니다.. ! "

 

참다못해 그녀는 미안함에 눈물을 쏟아내린다. 눈물 안에 후회와 속죄가 가득 담겨 마루 앞을 적신다. 마치 바로 앞에 그녀가 버린 러브라이카의 절반과 닛타 미나미가 있는 것 처럼 진심을 다해 그녀는 고개를 깊게 숙이고 뉘우치고 있었다. 리이나는 눈물을 멈출 줄 모르며 어깨를 파르르 떠는 위에 손을 얹고 가엾어하였다. 동시에, 시선을 도장 문 쪽으로 슬며시 돌리자,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린다.

리이나는 닫힌 문을 잠시동안 보다가.. 곧바로 어깨에 얹은 손을 아래로 옮겨 등을 문질러준다.

 

잠시 동안 아무 말 없이, 그렇게 있었다.

 

조금 있다가 나무 문이 드르륵 열리고, 밧줄에 묶인 채 반 즈음 얼음이 되어있는 고깃덩어리를 주렁주렁 달고 오는 제자. 걸음이 유달리 조심스러움에 리이나는 제자를 올려다본다. 눈가에 운 흔적이 만연했고, 코도 훌쩍거리는걸 본 시선에 웃음기가 들어선다.

 

" 울었어 ? "

 

" 아, 아님다.. ! 제가 왜 움까 ! 울 일도 없는데... "

 

 

' 쎈척 하기는~ ' 리이나가 실실거리며 줄리아의 등짝을 시원하게 때린다. 어린 제자는 알면서도 오랜만에 맛보는 따끔함과 짜릿함의 하모니에 화들짝 놀라 스승에게 역정을 낸다. 아냐가 눈물을 훑어내고 무슨일이 있었냐는 듯 평이한 얼굴로 줄리아와 리이나를 번갈아보지만, 둘의 눈에는 아냐가 차마 닦아내지 못한 눈물 자국이 햇볓에 비춰 선명하게 보였다.

 

아나스타샤는 뒤늦게서야 자기 뺨에 남아있는 흔적을 알아채고 급하게 닦아낸다. 줄리아는 애써 아냐를 처다보지 않으려고, 외면해보려 하면서 불판 앞에 앉았다. 셋 이상이서 고기를 먹는것.. 마에카와 미쿠 이외의 제 3자와 함께 식사를 하는건 난생 처음이었다. 아나스타샤는 반대로, 고기를 굽는 불판.. 이라는 개념은 처음 봤다. 제국에서도 요리는 모두 완성된 상태에서 그릇에 담겨 차려져있었을 뿐, 게다가 어렸을때 희미한 기억으로도 분명히 고기는 이런 판이 아니라 거칠게 지펴놓은 불 앞에 둘러앉아 꼬챙이에 꽃아구웠었기에 이런 불로 달군 판 위에 굽는다는것은 처음 목격하는 문명이었다.

 

 

" 자, 보라구. 이것이 불판에 구워먹는 고기니까 ! "

" Да. 아냐.. 확실하게 보겠습니다. "

" 아니아니.. 불판을 노려본다고 쏙쏙 들어오는건 딱히 아니야. "

" 아... 그렇, 습니까 ? "

 

잠시 후.

 

치이이이이익 - .

 

" 핫.. ! 냄새.. 좋은 냄새입니다. "

" 이 풍성한 내음 ! 역시 미쿠언니의 고기와 스승님의 굽기실력은 대단함다 ! "

 

" 나는 그렇다 치더라도, 미쿠녀석. 자꾸 이런거 가져오니까 싫어할 수가 없다니깐? "

 

고기가 어느정도 노릇노릇 익어갈 무렵에 셋은 저도모르게 고여오는 침에 젓가락을 집었다. 다만, 아냐는 무슨 쇠꼬챙이처럼 한가닥만 딸랑 들고서 구워지는 것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리이나가 코웃음을 치며 아냐 앞에 놓여있던 마저 한가닥을 잡고 한손만으로 그녀의 젓가락 쥐어주는 법을 가르쳐준다.

 

아나스타샤는 난생 처음으로 젓가락 이라는 것을 다루는지라 생소했다. 왕국에서 살때도 닛타 가문에 입양되어 생활 할 때에도 한번도 그러간 도구를 다룬 적은 없었으니 당연한 것이다.

그것은 리이나가 가르쳐준다 해도 쉽게 적응되는 것이 아녔다.

 

" 아.. 떨어졌습니다. "

 

줄리아와 리이나가 아무렇지 않게 젓가락으로 고기를 집어먹는 와중에, 아나스타샤는 홀로 서툰 젓가락질로 고기를 상 위에 현란하게 늘어놓고 있었다. 보다못한 두 사람 중 한쪽이 고기를 집어 자기 입이 아닌 아냐쪽으로 향했다.

 

" 아 ? "

" 여.. 여기.. ! " 

 

줄리아의 젓가락 끝이 기름지게 구워진 살점을 붙들고 아냐의 입 앞에 놓인다. 아냐는 당황하면서도 쑥쓰러움에 시선을 차마 둘 줄 모른다.

그러다가 마지못하는 척 입 안에 들어가는걸 허한다. 고기가 입 안에 들어가자 씹히며 소금간을 조금 했을 뿐임에도 탁월한 고기 본연의 맛으로 입 안을 휘어잡는다.

 

" 고기, 맛있습니다 ! 고마워요, 줄리아. "

 

" .. 이, 이름은.. "

 

" 오~ 줄리아~ " 리이나가 게슴츠레 웃음지으며 흘겨본다.

" 스승님 ! "

 

제자가 역정을 내고 아냐는 한 층 풀린 얼굴로 줄리아를 보면서 희미하게 웃는다. 아직까지는 죄책감과 무안함에 당당하지 못하지만, 언젠가 둘이 완전히 갈등이 풀리고 난다면 마에카와 미쿠와 허물없듯이 아냐와도 친밀해질 수 있으리라. 타다 리이나는 그리 여긴다. 

 

 

식사를 마치고, 제자가 직접 차를 타오겠다고 자청하며 다시 부엌 안으로 들어간 무렵.

이번에는 한쪽만 쓴 맛이 심하게 타질 않길 바라며 리이나와 아나스타샤는 마루에 앉아 바람을 쐬고 있다.

아침식사를 고기로 했음에도 뒤탈없이... 한적하고, 또 한가하기 그지없는 아침. 

 

 

" 대련 한번 해볼래 ? "

 

전혀 뜻밖의 물음에 아나스타샤가 똘망똘망한 눈을 둥글게 뜨고서 리이나를 보았다.

 

 

" 대련...? 싸움 연습, 입니까 ? "

 

이어서 그녀의 비어서 펄럭이는 소매와 안대를 바라봤다. 제 아무리 청한 쪽이라고 해도 팔과 눈이 하나씩 없는 사람이 대뜸 먼저 대련같은걸 청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화의 흐름상 그 어디에서도 대련 이야기가 나올만한 건덕지가 없었던것은 당연한 전제였다. 하지만 자신은 손님. 게다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자기를 대뜸 받아준 사람의 청을 단박에 거절하기에는 그녀 안에 있는 예절에 대한 정의와 명예가 허락치 않는다.

 

아냐는 조용히 상체를 일으킨다.

 

그것을 긍정의 뜻으로 받아들인 리이나의 행동 역시 빨랐다.

두 사람이 앞마당에 나와 대략 열 보가량의 거리를 띄이고서.. 리이나 쪽에서 뒤편에 놓인 검 안착대에 손을 댄다.

그녀가 집어든 것은 걸려있는 네 개의 목도 중 각각 까만것과, 하얀 것이었다. 용케도 손가락 마디에 한자루씩 집어들고서 도의 끝부분을 바닥에 짚는다.

 

" 너, 검술 해봤지 ? "

 

" 검술, 했습니다. 왕국에서.. 제식 검술, 레이피어. 배웠습니다. "

 

" 흠... 찌르고 빠지는 속공류인가. 그러면, 이쪽으로. "

 

검은 목도를 손가락 마디에서 해방해 바닥에 눕힌 뒤 하얀 목도를 부여잡고서 아냐쪽에 가볍게 던진다.

받아드는 목도의 무게는.. 과연 이것이 나무인가 의심이 들 정도로 가벼웠다. 흡사 종이로 만들어진 장난감 칼과 비슷하다고 해도 좋을 무게였다.

 

" 그녀석은 요정나무라고 불리는 나무를 깎아서 만든거야. 빠른 연격에 탁월하지. "

 

 

요정나무. 분명 종전 후에 제국에서 일하고 있을 무렵에 들은 기억이 있었다. 천축보다 남쪽에 있는 4계절 내내 봄인 나라에서만 자라는 나무로서, 무게나 워낙 가벼운 탓에 건축 자재로서의 효용성은 높지 않지만 나무의 껍질과 속이 모두 하양 일색으로 예술작품의 소재로서는 일품.

 

제국에서 떠나오기 전에는, 무게에 비해 강도가 대단하여 일부 국가에서는 수입하여 병기의 제작소재로 연구되고 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리고 리이나가 다시 바닥에서 주워든 시커먼 목도는 바로..

 

" 이녀석은 흑철나무. 척 보면 척이려나 ? "

 

흑철나무는 얼음산맥과 인접한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목재이다. 4계절 내내 거무죽죽한 이파리를 자랑하는 침엽수로, 불에 잘 타지않고 무게와 강도가 어지간한 중금속에 맞먹는다고 하여 제국, 왕국을 불문하고 병기제작 시 뼈대로 자주 쓰이는 나무이다. 강도가 강도인지라 조각하여 목도로 만들기는 대단한 노력과 시간이 들었을 것이라 짐작된다.

 

지금 그녀가 들고있는 1미터가 조금 넘는 길이의 목도의 부피만으로 따져봐도, 무게가 몇 킬로는 나갈터인데.

결정적으로 그녀는 아이돌이 아닌 인간이다. 저것을 제대로 휘두를 수나 있을런지, 아나스타샤로선 의문이 들었다. 아무리 봐도 자신쪽이 유리한 것 아닌가.

 

 

" 휘두를 수, 있습니까 ? "

 

" 응? 아아... 다들 그거부터 물어보더라고. 걱정하지마. "

 

그래놓고선, 이를 악물고 힙겹게 하나뿐인 손으로 칼을 집어드는 모습은 아까 전의 쿨하게 질러놓은 말과는 전혀 일치하지 않는 행태였다.

무슨 꿍꿍이인가 해선 안될 의심까지 들자, 아냐는 고개를 저어 털어낸다. 우선은 청한 대련에 맞서 전력을 다해야 한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뭐가 되었던지 지금 눈앞에 목도를 들고 있는것은 왕국의 영웅 중 한명이자, '인류 최강' 이니까.

 

" 자, 언제든지 들어와도 좋아. 대신 '능력'은 쓰지않기로. "

 

 

아나스타샤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차렷자세로 선 다음 목도를 쥔 손을 앞으로 뻗는다.

칼 끝이 리이나를 향했다가, 하늘로 방향을 바꾼다. 그녀는 사양하지 않고 다리에 힘을 줬다가, 가볍게 튕기는 느낌으로 스텝을 밟아 간격을 좁힌다.

 

하얀 칼끝이 '쏘아진다' 라는 표현이 적절할정도로 맹렬하게, 리이나의 무방비 덩어리인 오른쪽 방향으로 파고들었다.

 

 

 

딱 - !

 

 

 

일순. 정말로 일순간. 뭔가 보이는 듯 하고... 그리고.

 

하얀 목도가 공중에서 돌다가 바닥에 떨어졌다.

 

 

" ....아 ? "

 

" 후우 - . "

 

망연한 신음과 안도의 날숨이 교차하고서, 정적을 틈타 바람이 한차례 불고 지나간다. 바람이 지나가자, 리이나 쪽에서 버겁겠다는 표시로 까만 목도를 내팽개치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손을 탈탈 털면서 내쉬는 숨은 다소 떨리고 있었다.

 

 

" 크하아~ 무거워 죽겠네... 너 실력이 장난아니잖아 ? 그런 정확하고 빠른 지르기는 난생 처음봤어. "

 

 

하지만 그 얼굴만큼은 10만 쥬엘짜리 미소를 지었다.

 

 

"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냐, 뭔가 쏜살같이 지나가버려서.. 지금도 파악, 안됩니다. "

 

 

벙벙한 표정인 채 하얀 목도를 줏어든다.

아냐가 리이나를 보는 눈빛이 바뀌어있었다. 이전까진 형식적인 깍듯함이었다면 지금은 약간의 경외감조차 첨가된 마음에서 나오는 예의였다.

 

 

" 졌....습니다. "

 

리이나는 대화를 이으려다 침을 삼키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검은 목도를 집어들었다.

아냐의 눈에서, 낑낑대면서 애써 끌고가는 뒷모습은, 정말로 방금 전에 전심전력으로 내지른 자신의 일격을 쳐내버린 그 인물이 맞나 싶을 정도로 괴리감이 엄청났다. 목도 두 자루를 바닥에 둘 무렵.

 

 

" 뭠까 ?! 사부님 ! "

 

문을 힘껏 열어젖히며 목도를 들고 뛰쳐나온 작은 발걸음이, 방금 대련을 끝마친 두 사람을 발견한다.

 

" 사부님! 방금 엄청 딱딱한 소리가.. ! 도둑?! "

 

" 그런거 아니야. 그냥 대련 한판 한거야. "

 

제자를 보면서 눈초리를 보내는 스승의 모습에 아냐는 아무말도 하지 못하고, 시선이 부끄러워 애써 고개를 돌린다.

목도로 사방을 겨누어보다가 끝을 아래로 내리며 줄리아의 입에서 질문이 튀어나온다.

 

 

" 이겼슴까 ? "

 

 

" 당연하지~ ! "

 

질문에 통쾌하게 대답하는 리이나의 목소리엔 자신감이 가득차있었다. 그제서야 걱정스러워하던 얼굴이 급 화색으로 바뀐다.

목검을 바닥에 내려놓고 양 손을 들썩이며 웃는다.

 

 

" 역시 스승님임다 ! "

" 크~ 그치 ? 록하지? "

 

" 네 ! 록함다 ! "

 

 

 

 

쾅 !

 

 

 

" 으앗 ?! "

 

마치 누군가 지면 자체를 들고 흔드는 것 같은 강렬한 진동에 아냐도 리이나도 순간 넘어질 뻔 한다. 

어마무시한 굉음에 그녀는 깜짝놀라 그 소리가 들려온 근원지.. 궁성 방향을 바라봤다.

 

 

거기서.. 그녀는 보았다. 마경(魔景)을.

 

 

궁성의 가장 높은 마천루를 타고 검고 요사스런 기운이 솟구쳐 하늘에 모인 먹구름 안으로 파고들어.. 그 구름조차 동화시켜가는 풍경.

 

청명했던 하늘은 탁기에 휘둘리며 소용돌이치는 구름이 들어서.. 괴물의 거대한 아가리처럼 변질되어가고, 솟구쳐 오르는 검은 기운은 칠칠치 못하게 사방에 잔해를 악의의 잔해를 흩뿌린다. 악(惡) 혹은 마(魔) 라는 이름의 검은 빗방울이 왕도의 곳곳으로 퍼져나가고, 검은 물은 웅덩이가 되어 안개처럼 가벼워보이면서도 실체하는 두발로 걷는 그림자를 만들어낸다. 그림자들은 사람과 같이 뛰며 다만, 사람의 이목구비가 있어야 할 위치에 형용할 수 없는 온갖 짐승과 괴수들의 아가리와 눈을 달고서 먹이를 찾듯 울부짖으며 주변에 살아있는 모든것을 꿰뚫고 찢어발기기에 이른다.

 

검은 액상들이 도장 앞 마당에 몇개씩 떨어지며, 액체들이 결집한 웅덩이 안에서 사람 두 명정도 덩치의 형상이 솟아나와 양 팔을 날카로운 것으로 바꾸며 달려들 기세로 으르렁댄다. 허리춤의 검을 뽑아들고 한쪽뿐인 팔과 한쪽뿐인 눈으로 마당에 솟구쳐 나타난 적을 응시한다. 명백하고 확고한 살의와 적의로 무장한 본 적 없는 미지를 상대로 그녀는 칼끝을 들이민다.

 

동시에 괴이한 것은 길쭉한 다리로 도약해 올라 지붕을 뚫고 그대로 마루까지 내리찍는다.

 

하지만 괴생물의 날붙이에 붙어있는것은 육편과 살점이 아닌 나무와 돌의 파편들 뿐.. 괴생물이 그것을 즉시 털어내고 뒤를 돌아보자마자 머리가 허공으로 떠오르며 중추잃은 몸뚱이는 비틀거리다 자기가 부순 건물의 잔해 위에 엎어진다.

 

아냐의 품에 줄리아가 안겨, 떨리는 눈으로 괴생물의 쓰러진 모습을 처다본다.

 

" 대체 뭐지 ? 이녀석들... "

 

리이나가 칼집 안으로 날을 집어넣어가고 있을 무렵.

 

" ?! "

 

들어가던 칼날이 다시 팔의 강제에 이끌려 날을 앞으로 세운다. 쓰러져있던 검은 형상의 지체가 어디선가 흘러들어온 검은 안개? 혹은 액체 라고 하기도 모호한 뭔가에 머리가 다시 구축되어 복구되며 몸을 단번에 일으키는 모습에 리이나는 경이로움을 금치 못한다.

살면서 처음 보는 난적의 등장이라고 속으로 걱정이 쌓아올려지며, 그러면서도 제자와 아냐의 앞에 선다.

 

" 아나스타샤 ! 제자를 부탁할게. "

 

" 아냐도 싸웁니다. 아냐는 아이돌입니다. "

" 스, 스승님.. ! 저도... "

 

" 시끄러 ! 가라면 가라고 ! "

 

리이나가 보기 드물게 호통치며 둘을 바짝 긴장시킨다. 아냐는 그렇다 쳐도, 줄리아조차도 거둬져서 제자로서 가르침 받은 반년에 가까운 시간동안 단 한번도 스승이 그토록 역정을 내며 큰소리로 제지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그만큼 상황은 급박하게 흘러가고 있다는것을 알리는 증거이기도 했다.

 

검은 육체가 도로 일어나는 그 사이에도 살아있는 것 같은 먹구름과 궁성 주변의 살라진 균열로부터 간헐천 처럼 검은 물질들이 왕도 사방으로 흩뿌려져 정체모를 시커먼 괴이들을 창궐해내고 있었다. 움직임이 늦으면 늦을수록 점점 빠져나가기 곤란해 질 것을 거기있는 셋 모두가 안다.

 

그치만...

 

" 싫슴다 !! "

 

" 뭐 ?! "

 

" 줄리아가, 맞습니다. 아냐, 합께 싸웁니다 ! 다 함께 움직여야 합니다 ! "

 

 

제자의 바락소리에 이어 아나스타샤도 레이피어를 뽑아들고 리이나와 나란이 서서 그 끝을 검은 그림자에게 겨눈다.

 

레이피어의 날을 따라 끼어가는 서리가 그 가느다란 날과 리이나의 칼날이 닿자 청명한 소리를 내며 흩날린다. 

 

타다 리이나가 뚱한 표정을 점차 풀어가며 진중한 무표정으로 태세를 바꾸며 그녀에게 자신의 옆을 기꺼이 용납한다.

 

그야말로 검과 얼음이 맞닿는 작은 풍경은.. 서로의 협력을 허용하는 자세와 같았다.

 

곧이어 그걸 보고있던 괴이한 형체가 포효하며 달려들자, 둘의 검격이 베기와 찌르기의 조화를 이루며 그림자를 산산조각 내어 흩어놓는다. 심지어, 거기서 끝나지 않고 아나스타샤가 검을 쥐지않은 손을 뻗자 산산히 흩뿌려지는 검은 파편들이 꽁꽁 얼어붙어 얼어붙어 마른 바닥에 힘없이 떨어진다. 

조각이 미세하게 진동하며 서로 붙으려고 발악하는 모습을 보이는걸 목격하고서 리이나는 아냐와 줄리아를 돌아본다.

 

아까전에 호통쳤던게 미안했던건지 뒷목을 살살 긁는다.

 

" 정말이지.. 내가 말하면 곧이곧대로 듣는 사람이 하나 없다니깐 ? 미쿠도 그렇고 너희도 그렇고.. "

 

꾸중하는 듯한 언사였지만 아냐와 줄리아는 희미하게 웃고있기까지 했다.

 

리이나는 금새 다시 진중한 표정을 하고 검을 낮게 들며 외쳤다.

 

" 좋아.. 정든 도장이지만, 이제 작별이다 ! 움직이자 ! "

" Да ! 줄리아, 손 주세요. "

" 으, 응 ! "

 

검은 액상에 침식되어가는 삐걱이는 나무 문을 박차고 그들은 달려나간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비명과 찢어지는 소리 사이에서 그들은 뛴다.

사방에서 검은 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실날같은 가망을 믿고서 세 사람은 혼돈에 휩싸여가는 마경(魔景)을 벗어나간다.

 

그 시도의 끝에 있는것은 과연, 희망인가 절망인가.

 

 

 

 

- [제 7장 빛이 내려오리라] 에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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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과 얼음이 맞닿는 곳 이야기는 7장의 4편으로 이어집니다 !

순식간에 사건이 팍팍 지나가버리는 것은.. 사실 제가 이 사이드 스토리를 말 그대로 사이드로서 연재하려던 의중이 중간에 변경되었기 때문인데요.

사실 이 검과 얼음이 맞닿는 곳은 줄리아와 아냐의 갈등을 더 심화시켜서 제국과 왕국의 골 깊은 앙심과 서로에 대한 견해 등등을 줄리아와 아냐를 대표인물로서 보여주려 했었으나.. 그렇게 하다보면 한도끝도 없이 아냐와 미나미가 재회 플래그가 사라져버리다보니(...) 어쩔 수 없이 노선을 변경하여 본편 7장과 연동되는 같은 사건 안에서 다른 사이드의 이야기로서 성질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셋이 무사히 탈출 하냐고요 ? 어.. 음.. (시선회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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