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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즈 담당 프로듀서는 죽을 만큼 후회했다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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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12-26, 2016 00:04에 작성됨.

원작
아이돌 마스터 신데렐라 걸즈 - 반다이 남코 엔터테인먼트/ A-1 Pictures

“사람은 왜 혼자서 살아갈 수 없을까?”
드물게도, 정말 매우 드물게도 소녀가 소년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그것도 NDS를 손에 쥔 채로.

소녀는 게임을 하는 중엔 다른 것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래서 소년은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고 그저 놀라서 소녀를 멀뚱히 보기만 했다. 소녀는 손에 쥔 NDS 화면을 뚫어지라 보면서 재차 물었다.

“왜 그럴까?”
그제야 소년은 질문을 곱씹고 고민했다. 이건 또 철학적인 주제로군. 소녀에게 어떤 답을 줘야 할까……. 소년은 지금 들고 있는 상자의 존재를 떠올리곤 입을 열었다.

“이건 아까 배달 온 건데 말이야, 이건 나 혼자서 못 옮겨. 멀리 떨어진 물류 센터에서 온 거거든. 다른 사람이 도와줘서 이 물건이 여기에 있는 거지.”
“혼자서 못 하는 일을 여럿이서 할 수 있다고?”
“응, 그런 거지.”
소녀는 얼굴에 따분함을 숨기지 않고 말했다.

“그러면 처음부터 혼자서도 멀리 있는 걸 가지고 올 수 있게 태어나면 좋잖아.”
원하는 대답이 아니었나 보다. 소년은 소녀의 불평 이상 그 이하도 아닌 말을 듣고, 자기가 한 말이 부정됐는데도
“그러게.”
소녀의 불만을 긍정했다.

“사람은 왜 쓸데없이 부모에게서 태어나는 걸까, 왜 그런 식으로 가족을 만드는 걸까. 처음부터 혼자 태어나거나, 아니면…….”
소녀는 말을 하다 입을 다물었다. 소녀가 생각하기에도 마음에 걸리는, 입에 올려놓기엔 가시가 너무 돋쳐서 아픈 말이었기에. 그러나 소녀는 이내 결심했는지 입 안을 살짝 깨물고서 말을 이었다.

“태어나지 않는 게 좋을 텐데.”
소년은 그 말을 긍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부정하지도 않았다. 소년이 어떻게 답해야 하나. 소년은 소녀보다 나이가 많다. 수 년 정도의 세월을 더 살아왔다. 어떻게 보면 인생의 선배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소년은 그 자신도 아직 미숙한 아이였다. 그래서 소녀에게 답을 줄 수가, 소녀에게 줄 답을 낼 수 없었다.

어쩌면 소년이 어른이 되어도, 죽기 직전에도 답을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 소녀가 투정으로 내뱉은 말은 소년이 살아오면서 몇 번이고, 몇십 번이고, 몇백 번이고 떠올린 의문이니까.

답이 보일 것 같으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고, 전제 조건을 바꿔서 생각하면 위상이 크게 벌어지는 악질적인 문제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문제와 동떨어졌으면서 밀접하게 관련되어있는 전혀 다른 답만이 소년의 머릿속을 휘젓는다.

인생에 if란 없다.

만약을 생각할 순 있어도, 그게 현실이 되진 않는다.
만약 다른 세계에서 다른 형식으로 살아가는 나 자신이 있어도, 지금 여기서 살아가는 자신과는 다른 존재다.

하지만 한때는 소녀의 투정을, 정답이라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면 괴롭지 않았을 텐데.

지금은 이 말을 정답으로 확정 짓지 않는다. 하지만 정답에서 한 단계 아래로 밀어놓았을 뿐, 아직 손에서 놓지 않았다. 지금도 여전히 후보에 있다.

소년은 이번에도 고민했지만, 결국 소녀에게 답을 주지 못했다.

-
문득 옛날 생각이 들었다. 세면대에서 이를 닦는 3분간 스쳐 지나간 옛 기억. 다락방에 넣어둔 상자를 우연히 발견한 것처럼 오래전에 의식에서 치워둔 기억이 떠올랐다.

상자에 쌓인 먼지를 입으로 후 불고, 안에 수납된 물건을 감상.

아, 이런 게 있었구나. 이건 뭐였지. 이건 그때 그거였지.

보통 이런 경우엔 다른 물건을 찾다가 얼떨결에 우연히 발견하는 게 태반일 테지. 지금 프로듀서가 옛 기억을 떠올린 것도 따지고 보면 비슷한 이치다.

오늘은 안즈의 부모와 만나기로 한 날. 그것에 관해 생각하고 있으려니 생각의 타래가 다른 타래와 엮여 옛날에 묻어둔 기억을 파헤쳤다. 프로듀서는 입 안을 헹구고 입 주변을 닦았다.
거울을 본다. 거울 속 프로듀서가 거울 밖 프로듀서를 못마땅한 얼굴로 보고 있다.

오늘 괜찮겠냐?

프로듀서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11월 30일.

346 프로덕션 여자 기숙사는 안즈가 원래 살았던 방보다 좁지만, 좁지만……. 좁지만……. 심하게 좁지만 익숙해지니 나름 지내기 쾌적했다. 사람 하나 누울 공간만 있으면 최선을 다해 늘어지는 게 바로 니트라는 족속이다. 안즈는 오히려 좁은 공간이 주는 안정감이 마음에 들었다.

현관 바로 앞에 부엌, 그리고 거기서 한두 걸음 걸으면 바로 안방이다. 침대 하나에 좌식 테이블, 그리고 TV. 샤워실 겸 화장실. 346 프로덕션 여자 기숙사의 기본 구성이다. 이것보다 넓은 방도 존재하지만, 지금은 자리가 다 찬 모양이다.

프로듀서는 여기서 가까운 346 사원 입주 맨션에서 살고 있다. 안즈도 기숙사보다 맨션이 더 좋았지만, 맨션 방값이 기숙사 방값보다 훨씬 더 비싸서 어쩔 수 없었다.

“기숙사가 더 좋은 점도 있어. 식당이 있으니까.”
프로듀서가 말한 기숙사의 장점. 확실히 식당에 가면 밥이 나오니 그건 좋다. 문제는 식당까지 가기 귀찮은 점이지만.

안즈가 받은 방은 안즈의 짐을 전부 놓기엔 너무 좁았다. 그래서 짐 일부는 프로듀서가 창고 보관 서비스를 찾아서 그곳에 맡겼다. 생필품을 제외한 애니메이션 굿즈와 피규어는 전부 창고행. 여가 물품은 PC와 게임 종류만 방에 들여놓을 수 있었다. 여기에 토끼 인형까지가 고작. 그나마 게임기도 일부 기기만 들였다.

PC야 현대 니트 생활엔 뺄 수 없는 물건이고, 게임도 여가를 보내기 쏠쏠한 친구다.

그 증거로 안즈는 지금 휴대 게임기 닌텐도 DS의 버튼을 빠른 속도로 연타했다. 안즈는 침대에서 뒹굴거리면서 손가락을 놀렸다. 안즈의 손가락이 버튼을 현란하게 두들긴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침대 옆에 앉은 미쿠가 게임 효과음에 맞추어 비명을 질렀다.

-무언가를 느껴. 왔어. 왔다 왔어! 인그레스! 루미너리! 왔어. 왔다 왔어! 키에엣! 인그레스! 스텔리움! 키에엣! 인그레스! 인그레스! 프 프 프 프린시펄 스타!

안즈가 든 DS 스피커에서 효과음이 정신없이 이어진다. 이는 미쿠의 DS에서도 마찬가지인데, 그럴 때마다 미쿠의 안색이 점점 새하얗게 변했다. 둘의 DS에서 마지막으로 흘러나온 음성은 이러하다.

-운명이니까.
-무, 무슨 착오일 거야!

“아아, 쉽네 쉬워.”
“우아아아! 무, 무슨 착오일 거야냐!”
안즈는 거들먹거리면서 침대 시트를 밀쳐냈고, 미쿠는 반쯤 울상으로 바닥에 엎어졌다.
심심풀이로 열린 안즈와 미쿠의 뿌요뿌요! 대전은 안즈의 12연승으로 끝을 맺었다.

“하아, 역시 안즈 쨩이네. 미요시 사나 쨩을 이기고 우승한 건 진짜 실력이었구나.”
“아, 전에 찍은 게임 방송 말이야? 만만찮은 상대였지. 내가 더 뛰어났지만.”
미쿠는 NDS를 접어 좌식 테이블에 올렸다.

“엉망진창으로 당했지만, 재밌었어. 냥.”
“재밌었다니 다행이네. 원래 접대용으로는 Wii U가 좋긴 한데, 지금 창고에 있거든.”
“그러고 보니 이건 나온 지 좀 오래된 게임기지? 저기 있는 다른 게임기들은 최신 게임기 같아 보이는데, 이것만 옛날 거에다가 두 대씩이나 있는 건 애착이 있어서 그런 거야?”
“응, 전에 아마 미쿠 쨩도 들었던 거로 알고 있는데, 내가 제일 처음 잡은 게임기가 NDS였거든. 그래서 묘하게 애착이 가서. 자주 플레이는 안 해도 보통은 방구석에 박아둬.”
안즈는 NDS를 접어 아무렇게나 집어 던졌다. NDS가 침대 스프링에 튕겨 공중제비를 돌고 시트에 착지.

“애착이 있는 것 치곤 험하게 다루네.”
“괜찮아. 이거 튼튼하니까.”
안즈는 몸을 쭉 펴 기지개를 켜곤 고양이처럼 몸을 웅크렸다. 안즈의 발에 걸려 NDS가 굴러다닌다.

“아, 슬슬 저녁 먹을 시간이네. 냐.”
미쿠가 스마트폰을 확인한다. 시간은 6시 37분. 게임을 시작한 게 5시 40분이었으니까 벌써 1시간 가까이 지났다. 안즈는 스마트폰 대신 배를 문질러 시간을 확인했다. 뱃속이 텅텅 비었다. 슬슬 저녁 먹을 시간이다.

“미쿠 쨩, 큰일 났어.”
“뭔데?”
“일어나기 귀찮아. 나 좀 일으켜줘.”
“스스로 해라 냥!”
“이렇게 된 거 그거 써볼까 그거. 기숙사 창고에 있잖아.”
“뭔데?”
“그거 있잖아. 짐 옮기는 용으로 쓰는 그거. 바퀴 달린 거. 아, 맞아. 이름이 핸드카였지. 거기에 안즈가 올라타고 미쿠 쨩이 미는 거야.”
“싫어. 냥.”
“체엣, 쩨쩨해…….”
안즈는 뭉그적거리면서 침대에서 일어났다.

안즈는 아직은 익숙하지 않은 길을 앞장선 미쿠를 의지해 걸었다. 계단을 내려가고 복도를 지나 문 몇 개를 지나면 바로 식당이다.

오늘 저녁 메뉴는 튀김 우동과 스파이시 비프 카레와 치킨 샐러드. 안즈는 치킨 샐러드를, 미쿠는 튀김 우동을 골랐다. 저녁 먹을 시간이 한창이라서 그런지 식당에는 사람들이 제법 붐비었다. 둘은 구석진 테이블로 자리를 잡았다.

미쿠가 면을 후후 불어 식히고, 안즈는 치킨과 양상추를 포크로 꿰뚫는다. 둘은 입에 음식을 넣고 턱을 열심히 움직였다. 씹을 때마다 입 안 전체에 만족감이 감돈다.

“오늘 것도 맛있네.”
“우리 기숙사 음식은 맛있기로 유명하니까. 게다가 가격도 싸고! 냥!”
식당 이용료는 따로 없다. 기숙사 방값에 포함되어있는 거로 치고 있다.

“기숙사 생활도 할 만하네.”
“괜찮지? 적응한 것 같아서 다행이야. 냐.”
“그래도 딱 하나 아쉬운 게 있어…….”
안즈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미쿠는 젓가락질을 멈췄다.

“뭔데? 혹시 미쿠가 도와줄 수 있으면…….”
“근처에 게임 센터가 없어.”
“아, 그러셔.”
미쿠는 안즈 그릇에서 닭 가슴살 한 조각을 집었다.

“가끔 아케이드 게임이 끌린단 말이야. 심각한 문제라고……. 다른 동네까지 나가긴 싫어.”
안즈가 포크로 미쿠가 집은 가슴살을 찔렀다. 그러자 미쿠가 순순히 젓가락을 치웠다.
“뭐, 반쯤 농담이고, 전반적으로 괜찮은 거 같아. 기숙사 생활.”
안즈는 닭 가슴살을 한입에 넣고 지금 먹은 것보다 큰 닭 다리살을 미쿠 그릇에 슬그머니 올렸다.
“땡큐냥.”
미쿠가 닭 다리살을 우물우물 씹는다.

“아, 기숙사 생활에 관한 건 아니지만 하나 상담해도 될까?”
미쿠가 닭을 급하게 삼키고 고개를 끄덕였다.
“게헥, 으음, 말해봐!”
안즈는 미쿠가 물을 한 모금 마실 때까지 기다리고 말을 이었다.

“이런 거 기숙사에서 미쿠 쨩이나 미호 쨩 정도밖에 상담할 만한 사람이 없어서 그런데……. 미쿠 쨩은 친구 생일 파티에 자주 가봤어?”
“남들 가는 만큼은 가봤지. 냥.”
“며칠 후에 같은 반 아이의 생일 파티에 초대받았거든. 가는 거야 어렵지 않은데, 선물로 뭐가 좋을까 해서.”
“선물은 받을 사람이 가지고 싶어 하는 게 좋겠지?”
“공교롭게도 친한 아이는 아니야. 걔가 가지고 싶어 할 만한 거라…….”
안즈는 머리를 굴렸다. 생일 파티의 주인공에 관해 머릿속에 저장된 기억을 뒤져 최대한 떠올려봤다. 그 아이에 관한 인상. 친하지도 않고 말을 섞은 적조차 그다지 없는 그냥 같은 반 아이. 당연히 성격도 모르고, 취향도 모르고, 좋아하는 것도 모른다.

“아니면 안즈 쨩이 가지고 싶은 것 중에 추려서 다른 사람도 갖고 싶어 할 만한 걸 고르거나…….”
“지금 갖고 싶은 건 오큘러스 리프트 정도인데……. 그건 아직 안 나왔어…….”
“그, 그러니. 냥…….”
“아, 지금 떠올랐다!”
“그 오큘러스 리프트라는 건 게임을 안 하는 사람한텐 필요 없지 않을까?”
“아니, 그게 아니라…….”
안즈가 반 아이들과 사진을 찍은 날. 점심시간에 안즈에게 달려온 아이들 무리에 그 아이가 있었다. 안즈는 그걸 떠올렸다.

“걔 아마 내 팬일 거야. 그래서 같이 사진도 찍어줬거든.”
“그렇구나. 그럼 잘됐네. 앨범에 사인해서 선물하는 건 어때? 냥. 글귀 하나 넣어서 주면 좋아할 거야냐.”
“전에 사무소 방침 어쩌고 하면서 사인을 거절했거든. 해도 되나?”
“상관없을 거야. 냥. 강제성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애초에 사인 요구에 휘말리지 말라고 있는 사생활 보호용 조항이니까냐.”
“그럼 이거로 결정. 하아, 너무 귀찮네. 머리 굴리느라 에너지를 너무 많이 썼어. 충전하자…….”
안즈는 치킨 샐러드를 다시 입에 채워 넣었다.

미쿠는 그런 안즈를 보고 살짝 웃었다. 안즈가 겉으로는 투덜댔지만, 한편으로는 기대감이 한껏 오른 게 눈에 보였기 때문이다. 안즈가 묘한 리듬을 타면서 치킨을 우물거린다.

“저기, 왜 웃어?”
안즈가 미쿠의 표정을 눈치챘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냥. 후후…….”
“아, 또 웃었다.”
미쿠는 적당히 식은 국물을 순식간에 들이켰다.

-
프로듀서는 시내의 어느 레스토랑으로 차를 몰았다. 프로듀서의 차와 같은 도로를 달리는 차들이 저마다 번쩍이는 로고 엠블럼으로 인간으로 치면 혈통 같은, 출신 브랜드를 과시한다. 도로 근처에 늘어선 건물들은 하나같이 누가 더 높은가 경쟁하고 있었으며, 그중 낡은 건물은 한 채도 존재하지 않았다.

프로듀서의 차는 그런 풍경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물 흐르듯이 도로를 탔다. 프로듀서는 레스토랑에 도착해 차를 그곳 직원에게 맡겼다. 프로듀서가 다른 직원의 안내를 받아 따라가던 중에 프로듀서의 주머니에서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아, 잠시만요.”
프로듀서는 레스토랑 직원에게 양해를 구했다. 직원은 레스토랑의 교육이 촘촘히 배어든 미소를 짓더니 프로듀서에게서 몇 걸음 떨어져 대기했다.

“여보세요. 무슨 일이야? 지금부터 중요한 만남이 있는 거 알잖아.”
프로듀서는 전화기를 귀에 대고 쏘아붙이듯 말했다. 그러나 프로듀서가 쏘든 말든 상대편은 주저하지 않고 그저 자기 용무부터 전했다. 정말 중요한 이야기였기에.

-후타바 안즈가 살던 맨션이 갑자기 매물로 올라왔다.
제련된 금속처럼 불순물 없이 단단하고 차분한 어투로, 프로듀서의 변호사 친구가 용건을 전했다. 그리고 그게 철문처럼 프로듀서의 앞을 딱 가로막았다. 프로듀서는 앞이 막히기라도 한 것처럼 딱 굳어서 서 있었다.

-이상한 점은 두 가지 있어. 우선 첫째로 이 정보는 그 녀석한테 익명의 제보자가 전한 정보다……만, 정보를 받은 본인도 누구한테 받았는지 모른다.
그 녀석이란 표현은 프로듀서의 조사원 친구를 뜻한다.

-둘째로 현 시세와 비교하면 헐값이다. 급매물이지. 후타바 가가 아무리 돈이 궁하지 않아도 이렇게 급하게 처분하는 건 이상해.
프로듀서는 귀에서 핸드폰을 떼고, 핸드폰의 액정을 뚫어지라 쳐다보았다. 약속 시간까진 아직 여유가 있다. 하지만 지금 이 일에 관해 충분히 고민할 만한 시간은 아니다.

이렇게 위험하고 아슬아슬한 타이밍에 절묘한 정보가 넘어오는 건 단순히 운이 좋거나, 아니면 누군가가 주사위를 굴리면서 판을 조종할 준비를 하거나 둘 중 하나다.

전자라고 순순히 믿기엔 아쉽게도 세상은 험난하다. 후자면 판을 달리는 말로 전락하기에 십상이다. 충분히 경계하고 판을 누가 흔드는지 주의 깊고 신중하게 판단하는 게 바람직하다.

“그거…….”
프로듀서는 손가락으로 미간을 짓눌렀다.
프로듀서는 안즈가 맨션을 떠난 날, 쓸쓸히 짐을 정리하는 안즈의 등을 떠올렸다. 프로듀서는 다시 핸드폰을 귀에 가져갔다.

“살게. 계약해줘.”
프로듀서는 마른 침을 삼켰다.
-알았다.
즉답. 그리고 바로 통화 종료. 프로듀서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 일은 이제 프로듀서의 손에서 떠났다. 프로듀서가 이제 곧 다른 것에 시간을 쓸 수 없는, 중요한 용무를 보러 가기 때문이다. 속이 쓰리지만 쓰린 속을 부여잡고서라도 약속 장소로 향해야 한다. 그만큼 오늘 자리는 중요하다.

“통화 끝났습니다.”
“네, 그럼 안내해드리겠습니다.”
프로듀서는 레스토랑 직원의 뒤를 따랐다.

프로듀서는 실은 이곳을 세 번째로 방문한다. 첫 번째는 친구들과 함께 사적으로. 두 번째는 업무로. 그래서 식당 위치나 분위기는 어느 정도 꿰고 있지만, 지금 프로듀서가 걷는 길은 처음 걷는 길이다.

레스토랑 직원은 프로듀서를 VVIP실로 안내했다. 일반 식당과 VIP실은 한 층에 같이 있지만 VVIP실은 그 두 곳과 연결되어 있지 않다. 이곳은 그곳들의 바로 위층에 있는 곳으로, 주방과 출입구를 제외하면 외부 접촉이 철저하게 차단된 공간이다. 그래서 외부로 새면 곤란한 은밀한 이야기를 털어놓기 적합한 장소다.

실제로 그런 용도로 사회 각 분야 고위급 인사들이 애용하고, 오늘 프로듀서와 안즈 부모도 그래서 이곳을 예약했다.

VVIP실은 별다른 장식 없이 모던한 가구로만 이루어져 있었다.

평범한 사람이 으레 이런 곳에 대해 떠올리면 꼭 입에 올릴, 세상의 온갖 사치를 형상화한 장식물은 어디에도 없다. 금 촛대도 없고, 사슴 머리 박제도 없고, 크리스털 샹들리에도 없고,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무슨 무슨 시대의 그림도 없다.

그런 건 이곳에선 사치의 상징이 될 수 없다. 그것들을 이 방에 들이면 순식간에 촌스러움의 상징으로 전락할 테지. 이 방에 존재하는 건 고급 소재로 제작된 테이블과 의자, 그리고 식기 정도. 그러나 단 한 군데도 삭막해 보이지 않는다. 방 안 그 모든 인테리어 구성이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세련미를 한껏 뽐냈다.

그리고 안즈의 교육 담당이 테이블에 앉아 싱글벙글 웃는 얼굴로 프로듀서를 맞이한다. 다른 이는 없었다. 교육 담당 혼자서 자리에 앉아 있었다. 프로듀서가 의아해하자 교육 담당이 입을 열었다.

“오늘 아가씨 부모님께선 급한 용무 때문에 못 오십니다.”
“그런 이야기는 못 들었습니다만…….”
“직전에 용무가 생겨서요. 전할 타이밍이 없었답니다.”
교육 담당은 맞은편 자리를 가리켰다.

“앉으시죠. 모든 사항에 관해 인계받았으므로, 제가 응대해드리겠습니다. 오늘은 제가 아가씨 부모님 대행이니, 저를 아가씨 부모님 역할이라고 생각하시고 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프로듀서는 조금 머뭇거렸으나 별수가 없단 걸 인지하고 순순히 자리에 앉았다.

“후후, 죄송합니다. 폐를 끼치게 되었네요.”
말에 웃음이 섞여서 전혀 미안해 보이지 않지만…….
“아뇨, 괜찮습니다.”
프로듀서는 사과를 받아들였다.

“우선 식사부터 정하죠. 전 이곳에 처음 와서 뭘 먹어야 할지 고민되네요.”
교육 담당이 태연하게 말을 꺼냈다. 어조는 여전히 부드럽고 뭉실뭉실하게. 이런 점은 여전히 미우라 아즈사 같다.

“이곳은 해산물이 맛있어요. 전채는 관자를 추천하고, 본식은 농어를 추천해요. 디저트는 뭘 먹어도 맛있으니 끌리는 걸 드시길 추천합니다. 저는 전채로 관자, 본식 농어, 디저트는 몰튼 라바 케이크로 하겠습니다.”
“그럼 저도 같은 거로 주문할게요.”
웨이터가 둘의 주문을 받았다.
“자아, 그럼…….”
웨이터가 물러가자 교육 담당이 양손을 깍지 끼고 테이블에 올렸다.

“요리가 나올 때까지 이야기를 진행해볼까요?”
가늘게 웃으면서.
교육 담당의 분위기가 변했다.

“그럼, 안즈 아가씨를 언제 돌려주실 건가요?”
미우라 아즈사 같은 나긋한 분위기는 순식간에 싹 걷혀 사라졌다. 남은 건 닿는 걸 전부 모조리 태워버릴 기세로 활활 불타는 적대감. 뜨겁지만 오히려 지나치게 뜨거워서 서늘함이 느껴진다.

프로듀서가 교육 담당의 이런 면을 접한 건 전화를 포함해 이번이 세 번째. 두 번째까지는 나긋함이 교육 담당의 원래 성격이고 서늘함은 교섭을 주도하기 위한 가장이라고 생각했으나, 세 번째 와서 프로듀서의 생각이 바뀌었다.

교육 담당의 이런 성격 변화는 가면을 쓰는 행위라기보다 본질을 드러내는 것에 더 가까웠다. 서늘함을 입는 게 아니라, 여태까지 나긋함을 입고 있었다고 보는 게 옳다.

연예계에도 성격이나 어투가 자리나 사람에 맞춰 휙휙 바뀌는 사람들이 있다. 프로듀서는 사람을 만나며 쌓은 경험을 토대로 교육 담당의 변화를 그렇게 분석했다.

“그건 곤란합니다.”
프로듀서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즉 후타바와 전면전으로 갈 거란 말씀이죠?”
“아니요, 그건 결단코 아닙니다. 저는 최악의 상황을 피하고 싶을 뿐입니다.”
교육 담당은 헛웃음 소리를 냈다. 아주 노골적으로. 그러고 나선 프로듀서를 살벌하게 노려보았다.
“이미 지겹도록 말씀드렸잖아요. 주든가 싸우든가. 둘 중에 하나만 하라고.”
“저는……. 안즈를 슬프게 하고 싶지 않아요.”
“재미없는 농담은 그쯤 하세요.”
교육 담당은 혀를 찼다. 프로듀서를 노려보는 눈동자에 어느덧 경멸이 서렸다.
교육 담당의 신랄한 말이 이어진다.

“안즈 아가씨를 슬프게 하고 싶지 않다? 그래서, 어떻게 슬프지 않게 하겠다는 겁니까? 당신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떻게 성장했는지 압니다. 네, 이해도 해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신이 지금 안즈 아가씨를 통해 대리만족해도 되는 건 아닙니다.”
프로듀서는 반박하지 못했다. 그저 묵묵히 참고 견딜 뿐이다. 프로듀서는 마치 폭포수 아래에서 참선이라도 하는 것처럼 교육 담당의 말을 가만히 들었다. 하지만 참선과 달리 마음이 깨끗해지기는커녕 점점 탁하고 메말라간다.

“까놓고 말하죠. 전 당신 같은 사람이 싫습니다. 남을 위하는 척하면서 실은 자기를 위하는 사람. 정말 역겨워요. 다시 말하죠. 선택지는 두 가지. 주느냐, 싸우느냐.”
마음이 갈라질 것 같다.
“당신이 빨리 정하지 않으면 이쪽이 귀찮아진다고요. 빨리 끝냅시다. 네? 안즈 아가씨는 후타바의 미래를 짊어져야 하는 사람. 아니, 후타바의 재산입니다.”
프로듀서는 그저 숨을 삼켰다.

“당신이 안즈 아가씨의 어떤 면을 보았는지는 대강 알겠어요. 아가씨의 그건 천성이죠. 사람을 끌어들이고 매료하고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재능. 그건 바로 군중 위에 군림할 수 있는 재능. 즉……. 카리스마입니다.”
프로듀서는 부정하지 않았다. 프로듀서가 안즈에게서 본 재능은 ‘사람들에게 주목받는 재능’. 안즈를 주목한 사람은 안즈를 더더욱 보고 싶어지게 된다. 이건 아이돌……. 우상에게 있어 더할 나위 없는 재능이다.

우상. 숭배받고, 추종받는 사람.

“아가씨는 그걸 천성적으로 타고났지만, 결국 마음이 부러지고 말았죠. 그래서 쫓겨났고요. 지금 후타바 내부도 상당히 불안정한 상태입니다. 공들여 키운 후계자를 내쫓았으니 그 틈을 노리는 세력이 나오기 마련이죠. 아가씨 부모님께서 애쓰셔도, 그분들도 언젠간 늙어요. 다음 세대가 문제죠. 그러던 중에……. 설마 했던 아가씨가 다시 일어선 겁니다.”
꺼져 있던 안즈의 마음속 엔진에 프로듀서가 불을 붙였다. 안즈는 순식간에 인기 아이돌이 되었다. 숭배받고 추종받는 사람, 군중 위에 군림하는 사람이 되었다.

“아가씨는 짧은 기간에 정말 굉장한 성과를 이루셨죠. 그분의 재능을 증명하셨어요. 아가씨에게 가치가 있다는 게 증명된 이상, 계속 버려두는 건 말도 안 되죠.”
“안즈는…….”
프로듀서는 마른 입술을 적시고 다시 말했다.

“안즈는 지금 자기 의지로 아이돌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 의지로 일어선 거라고요.”
“그래서요?”
교육 담당은 프로듀서의 말을 시원하리만치 딱 잘라 받아쳤다.

“아가씨도 참 불쌍하시지. 이런 사람한테 걸려선……. 아가씨 부모님께 정을 바라지 마세요. 당신이 아가씨 부모님께 어떤 환상을 품고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그분들은 아가씨를 물렁하게 대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분들이 안즈 아가씨를 물렁하게 대했던 적은 딱 한 번입니다. 이건 저도 전임자한테 들은 건데, 안즈 아가씨가 고열로 드러누웠을 때 딱 한 번이래요. 왜 그랬겠어요?”
“자기 자식이라서…….”
“그럴 리가요. 공들여 만든 물건이 부서질까 그런 겁니다. 조금만 생각해도 알잖아요. 이봐요. 전 당신이 말귀를 잘 알아듣는 영리한 사람일 거로 생각했어요. 직접 만나기 전까지요. 혹시 현실 도피입니까?”
웨이터가 음식을 가지고 왔다.

접시가 테이블에 올라가기 전까지 대화가 잠깐 끊긴다. 웨이터가 나가자 이야기가 재개되었다. 교육 담당은 뱃속에 차오른 헛바람을 남김없이 뱉었다. 그는 비웃으면서 말했다.

“부모 없는 놈들은 이래서 안 된다니까.”
교육 담당은 프로듀서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분수를 알려줄 부모가 없으니까 자기 주제를 모르고 헛된 망상이나 하지.”
교육 담당은 프로듀서의 눈에 맞추어 고개를 좀 더 들었다. 어느새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쥐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프로듀서의 눈에 맞추어서.

지금까지 프로듀서를 노려본 교육 담당 이상으로 프로듀서는 교육 담당을 살벌하게 노려보았다. 지금 당장 테이블을 엎고 교육 담당의 얼굴에 주먹을 때려 박을 기세로.

교육 담당이 입에 올린 말은 프로듀서에게 있어 금기였기에.

“당신은 안즈 아가씨가 물건 취급을 받을 땐 가만히 있었으면서, 지금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셨군요?”
교육 담당의 말을 듣고 프로듀서는 눈초리에 힘을 빼고 급하게 자리에 앉았다. 프로듀서의 손이 테이블을 치고 나이프 하나를 바닥에 떨어트렸다. 명백한 당황의 표시. 나이프를 새로 가져온 웨이터가 다시 자리를 뜰 때쯤 돼서야 프로듀서는 가까스로 당황을 떨쳐냈다. 그런 프로듀서를 교육 담당이 태연하게 평한다.

“사람은 경험에 의지해서 살아가는 생물이라서 자기 경험에 빗대어 생각하는 건 당연합니다. 하지만 지금 당신이 하는 건 그냥 과잉 이입입니다. 그냥 이기적인 행동입니다. 게다가 당신은 아가씨를 향한 도발엔 침묵했으면서 자기를 향한 도발엔 그냥 넘어왔죠.”
교육 담당은 포크로 관자 하나를 통째로 찔러 관자를 살펴보았다.

“잘 익었네요. 맛있겠어요. 색도 잘 나왔고, 소스도 맛있을 것 같군요. 이걸 주문하길 잘했어요.”
“당신의 목적이 뭡니까…….”
프로듀서는 나지막이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저를 들었다 놓았다 하면서 간을 보는 목적이 뭡니까?”
“전 그저 할 일을 할 뿐입니다. 그보다 이것 보세요. 관자가 참 잘 나왔어요. 분명 셰프가 정성스레 만든 일품이겠죠. 그런데 말입니다.”
교육 담당은 포크를 내려놓았다.

“다른 거……. 대강 샐러드나 리조또 같은 걸 주문했는데 이렇게 맛있어 보이는 관자가 나온다면 어떻게 할까요?”
프로듀서는 입술을 잘근 씹었다. 그리곤 숨을 괴롭게 내쉬면서 말했다.
“반품하겠죠.”
“잘 아시네요.”
교육 담당은 접시를 손등으로 밀어 테이블 구석으로 치웠다.

“답은 정해진 것만 들고 와야 합니다.”
교육 담당은 품에서 명함을 한 장 꺼내 조금 전까지 관자 접시가 있던 자리에 올렸다. 그건 교육 담당 본인의 명함이 아니었다.

“아가씨의 이사는 저지하신 것 같은데, 조만간……. 며칠 안 남았네요. 후타바 가에서 아가씨의 전학 수속을 밟을 예정입니다. 후타바 본가와 가까운 명문 학교예요. 거긴 시스템도 좋고 학생들 수준도 높은 곳이죠.”
교육 담당은 자리에서 일어나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그리곤 망설임 없이 걸음을 떼었다. 그렇게 몇 걸음 걷다가 멈춰 섰다. 교육 담당은 프로듀서를 슬쩍 돌아보면서 한 마디를 뱉었다.

“지금 아가씨께 가장 가까이 있는 건 당신입니다.”
교육 담당은 그 말을 끝으로 VVIP룸에서 깔끔하게 퇴장했다.

테이블에서 관자 두 접시가 서서히 식어간다. 빛깔도 좋고 향도 좋아 먹음직스러웠지만, 프로듀서는 접시에 손도 대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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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늦어졌습니다. 적어도 저번 주에는 올렸어야 했는데 말입니다... 결국 크리스마스가 지나서야 올리네요.
여담으로 원래 설정상 프로듀서는 원래 사원 기숙사에서 살고 있었습니다만, 어차피 여태까지 언급한 적 없으니 346 사원 맨션에서 살고 있다는 설정으로 바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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