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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플레이서 - "대체자"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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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12-17, 2016 22:39에 작성됨.

“···와버렸지.”

 

여섯 시 삼십분. 스마트 폰을 흘끗 바라본 그는 가만히 그렇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딱딱한 쇼파에 앉아 있는 그는 꽤 무료했다. 약속시간은 여섯 시하고도 40분쯤이었기에 자업자득이었지만. 그는 문득 주변을 바라보았다. 깨끗하게 비어있는 화이트보드. 창문에 붙어있는 노란색의 테이프. 765. 765 프로덕션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비좁았다.

 

관련 대학을 좋은 성적으로 졸업한 그에게 초대장을 보낸 프로덕션은 많았다. 961 프로덕션이나 346 프로덕션과 같은, 규모로만 따지자면 765 프로덕션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큰 회사에서 고용의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헌데, 그는 어째서인지, 자신을 고용하겠다는 의사조차 밝히지 않은 765 프로덕션의 쇼파에 앉아서 면접을 기다리고 있었다.

 

설립일은 오래되었지만, 프로덕션 소속 아이돌이 TV에 출연하게 된 것은 기껏해야 반년 전. 그나마도 최근에는 전혀 활동이 없는, 업계에서는 “죽은” 프로덕션이라고 불리는 그런 프로덕션이었다. 바꿔 말하자면 능력있는-비록 경험은 일천하지만-프로듀서인 그가 갈 만한 곳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졸업장을 받고나서 바로 765 프로덕션으로 향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가 공연에 반했기 때문이었다. 소속 아이돌들의 개성은 살리면서, 서로 겉돌지 않는다. 공연 자체의 규모는 보잘것없었지만, 그 공연을 본 이후 그는 그 프로듀싱에 감명을 받았다. 어떤 사람이기에 저 정도의 프로듀싱을 할 수 있을까, 하는 궁금증과 더불어서 동경의 감정을, 765 프로덕션의 프로듀서에게 품게 된 것이었다.

 

이윽고, 낡은 문이 흔들거리며 열렸다. 그는 쇼파에서 일어나서, 출입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막 문을 연 검은 머리의 중년은 그가 프로덕션 내에 있을 거라는 것을 예상하지 못했는지, 얼굴에는 다소간의 낭패가 드러나 있었다.

 

“저······ 연락을 드렸었는데요······.”

“아, 그래, 그렇지. 미안하네, 저어······”

“키리기리입니다. 키리기리 료.”

“그래. 키리기리 군. 거기에 앉아있게. 아이돌 제군들의 출근은 조금 늦으니까.”

 

료는 머쓱한 표정으로 다시 원래의 쇼파에 앉았다. 피곤한 표정의 중년 남성, 765 프로덕션의 사장 타카기 준지로는 가볍게 외투를 벗어 의자에 걸어놓은 다음 료가 앉아 있는 쇼파의 맞은 편에 앉았다.

 

“······그래서, 굳이 765 프로덕션에 찾아왔다는 건가?”

“예. 사실, 765 프로덕션의 공연에 큰 감명을 받아서, 대학 시절부터 여기에 오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자네는 충분히 우수하다고 생각하네. 우리 765 프로덕션의 프로듀서는 한 명 뿐이기 때문에, 자네가 있다면 큰 도움이 될 거라고도 생각하고. 하지만······ 나는 다시 고려해보라고 말하고 싶네.”

“예? 그건······ 어째서죠?”

“그건······.”

 

막 타카기 사장이 입을 열려 했던 순간이었다. 덜컹거리는 소리와 함께, 출입문이 다시 한 번 흔들리면서 열렸다. 마치 방금 전의 타카기 사장이 그랬던 것처럼, 문 너머에 있는 소녀 역시도 적지 않게 당황한 표정이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금발. 맑은 청록빛의 눈동자를 가진, 중학생 정도의 소녀였다. 녹색과 흰색의 줄무늬가 그려져 있는 반팔 티 사이로 보이는 새하얀 피부와 봉긋하게 솟은 가슴은 물론이고, 깨끗한 다리는 그녀가 일본인이 아니라 외국인, 최소한 혼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게 했다. 그러나 료는 그녀를 알고 있었다. 호시이 미키. 765 프로덕션의 아이돌 중 한 명이었다. 그녀의 퍼포먼스는 765 프로덕션의 아이돌 중 최고였었다.

 

그러나 료는 당황했다. 갑작스럽게도, 미키가 그에게로 걸어왔기 때문이었다. 더 정확히는, 그와 타카기 사장이 앉아있는 테이블로. 타카기 사장은 가볍게 한숨을 머금었다.

 

미키의 표정은 무서우리만큼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 TV 너머로 보았던, 미소짓는 아이돌의 모습과는 180도 달랐다. 몇 살이나 연상인 료도 그 표정을 본 순간 이상한 두려움이 들어서 무어라 말을 꺼내기 어려웠다.

 

“거기 있는 사람은 누구인 거야?”

“아, 저, 그게······.”

“거기 있는 사람에게 안 물었어. 타카기 씨, 누구인 거야?”

“새 프로듀서가 될 지도 모르는 사람이라네, 호시이 군.”

“새 프로듀서?” 그것으로 미키의 표정은 더더욱 얼어붙었다. “새 프로듀서 같은 거, 필요 없는 거야.”

“호시이 군, 하지만······.”

“미키에게는······ 미키에게는, 허니 뿐인 거야! 새 프로듀서 같은 건, 인정할 수 없는 거야!”

“허니····· 라는 건?” 료가 물었다.

“······.”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미키는 다만 원망 섞인 눈초리만을 그에게 보내고는 수면실이라고 쓰인 방으로 들어갔을 뿐. 료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타카기 사장을 바라보았다.

“그런 이유라네.”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765 프로덕션에 소속된 프로듀서는 두 명이 있었다네. 한 명은 아키즈키 군. 지금은 류구코마치의 프로듀싱을 위해 방송국에 나가 있지. 다른 한 명은, 아카바네 군. 류구코마치를 제외한 모두의 프로듀싱을 맡았었다네.”

“과거형····· 인가요? 그만둔 겁니까?”

“그만둘 수밖에 없었지. 교통사고를······ 당해서 죽어버렸으니.”

“······.”

“765 프로덕션의 활동이 극도로 줄어든 이유는 바로 그것이네. 아카바네 군은 좋은 프로듀서였어.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모두들 좋아했지. 무언가 띵, 하고 오는 느낌도 있었고 말이야. 그러나 이제 그는 없네. 하지만 그의 그림자는 아직도 아이돌 제군들에게 서려있어. 호시이····· 군도, 그렇다네.”

“‘허니’라는 건······”

“그래. 아카바네 군의 별명이라네. 호시이 군은 아카바네 군과 특히 친밀했었지. 하지만 이젠 그는 없네. 아이돌 제군들을 위해서라도, 새 프로듀서가 필요한 시점이야. 자네는······ 솔직히 말해서 우리에게 과분하기까지 하다네. 아카바네 군에게 느꼈던 느낌도 내게는 느껴지고. 하지만······ 아이돌 제군들은 아카바네 군을 잊지 못하고 있어. 자네의 존재로 말미암아 아카바네 프로듀서의 존재가 지워질까 모두 두려워하고 있어. 단순히 자네가 존재하기 때문에, 그가 죽었다는 생각까지도 품을 수 있단 말이네. 그래서 프로듀싱은 극도로 어려울 걸세. 그래도······ 괜찮겠나?”

“······.”

 

료는 가만히 고개를 떨어트렸다. 그가 동경했던 사람-프로듀서-이 죽었다는 소식은 충격이었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료에게 충격을 가져다 준 것은 미키의 싸늘한 표정이었다. 아이돌로서 환한 미소를 보여주었던 그녀. 그런 그녀의 얼굴에서는 미소가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역시 무리인가. 알겠네. 다른 프로덕션의 추천서를······”

“아뇨, 하겠습니다. 제가 하겠습니다.”

 

그 날이, 765 프로덕션의 세 번째 프로듀서가 생기는 날이었다.

--

“그런 관계로, 새로운 프로듀서를 소개하겠네.”

“아, 네. 나는 키리기리 료, 라고 해. 잘 부탁해.”

 

얼어붙을 것 같은 싸늘한 침묵이 이내 이어졌다. 아이돌들을 포함해서 총 열 여섯 명이나 있는 사무소였건만, 몇 시간 전, 아침 일찍 있었던 사장님과의 일종의 “입사 면접” 때보다도 훨씬 더 조용한 것 같았다. 나는 머쓱한 기분으로 뒷머리를 훑으며, 소녀들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붉은 기가 도는 머리카락에 리본을 맨, 어색한 미소를 지어주고 있는 소녀.

그 소녀의 팔을 붙잡은 채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푸른 머리의 소녀.

나에게는 관심조차 보여주지 않고 쇼파에 누워서 잠을 자고 있는 미키.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어트리고 있는 쌍둥이 소녀.

겁에 질린 표정으로 내게로부터 멀찌감찌 떨어져 있는 갈색 머리의 소녀.

몇 시간 전의 미키 만큼이나 적대적인 시선을 보내고 있는 꼬마 같은 소녀.

바로 옆에서, 그 소녀와는 대조적으로 밝은 미소를 보여주고 있는 소녀.

나와 크게 나이차이가 나는 것 같지 않은, 역시 어색한 미소를 지어주고 있는 여성.

팔짱을 껸 채로, 복잡한 표정으로 날 응시하는 안경 낀 소녀.

내 시선을 가만히 피하고 있는, 단발 머리의 소녀.

푸른색 체크무늬 리본으로 머리를 올려 묶은 소녀.

무표정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는 신비로운 분위기의 소녀.


이렇게 열 셋. 그것이 765 프로덕션의 소속 아이돌들이었다. 미키를 제외한 나머지는 이름은 잘 몰랐지만, 개성은 확실해서 알아보는 것이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아, 아아. 네. 저, 잘 부탁드립니다, 프, 프로듀서. 저는······ 아마미 하루카라고 해요.”

“응. 잘 부탁해, 아마미 양. 그리고······”

 

다른 이들의 이름을 알고 싶다. 그런 의도를 내비친 말 흐림이었건만, 그것에 호응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죽을 만큼 무거운 침묵이 그대로 사무소를 짓누르고 있었다. 예상은 했지만, 예상 이상의 위압감이었다. 그러한 침묵에 당황한 것은 나 혼자만이 아니었는지, 말을 더듬으면서 하루카는 서둘러 소개를 시작했다.

 

“아, 아아, 그, 그러니까······ 저, 이 애는 키사라기 치하야, 라고 하구요. 쇼파에 누워서 자는 애는 호시이 미키. 저, 쌍둥이는 마, 마미와 아미, 라고 하고, 그러니까, 그러니까······”

“인정할 수 없어.” 시종일관 따가운 눈초리를 보내고 있던 소녀가, 그렇게 운을 띄웠다.

“으, 응?”

“새 프로듀서라는 이야기, 난 들은 적 없어.”

“이오리······.”

“리츠코는 조용히 있어! 하루카도! 뭐야, 아무렇지도 않게······ 실실 웃으면서······ 그, 그 녀석이, 없어져버린지 얼마나 되었다고?”

“미나세 군······.”

“프로듀싱이라면 리츠코가 있어. 영업도 노래도 댄스도 레슨도 우리가 알아서 하면 돼. 뭐야······ 이게······ 마치, 마치, 교체해버리는 것처럼······ 그 녀석을 지워버리는 것처럼······ 나, 나는, 이, 인정 못해. 아니, 인정하지 않을 거야!”

 

쾅!

 

그 말을 남기고, 이오리라고 불린 소녀는 성큼성큼 걸어서 사무소의 문을 박찼다. 그것이 신호라도 되는 것처럼, 그 뒤를 따라서 리츠코와 쌍둥이 소녀 중 한 명, 그리고 아직은 이름을 모르는 어른스러운 분위기의 여성이 따라서 사무소를 떠났다. 그것으로 나의 소개는 끝이 났다. 아마도 최악의 형태로······.

 

아카바네. 그것이 나 이전의 프로듀서의 이름이었다. 아이돌들과 만나기 이전, 타카기 사장님과 얘기를 나누었었다. 떠나가버린, 내가 큰 감명을 받고, 어떤 의미에서는 동경하기도 했던 아카바네 프로듀서의 모습을. 그는 그리 완벽한 프로듀서는 아니었다고 했다. 그러나 아이돌들에게는 절대적인 정신적 지주로 위치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의 프로듀싱 덕택에 765 프로덕션은 서서히 명성을 키워나가고 있었고, 이윽고는 라이브 무대를 가져왔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알리려던 프로듀서는, 교통사고를 당해 죽어버렸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이 정도로, 그녀들의 마음을 지탱해주고 있었다. 내가, 그를 대체할 수 있을까? 그 자리에 대신 들어갈 수 있을까? 그래도 옳을까?

 

“···프로듀서. 저는 노래 연습이 있습니다만.” 그런 차가운 목소리가, 멍하니 생각에 빠져있던 나를 끄집어냈다.

“아, 그, 치하야······ 라고 했지?”

“키사라기, 라고 불러주세요. 그럼, 저는 이만.”

“아, 저, 프로듀서······ 저, 저희도, 그, 레슨이 있어서······ 아, 저, 저는 타카츠키 야요이에요.”

 

치하야를 시작으로, 야요이의 그 말이 끝난 뒤, 다른 소녀들도 제각각 자신의 이름을 내게 알려주고는 각각의 할일을 향해 떠났다. 타카기 사장 역시도 가만히 한숨을 머금은 뒤, 사장실로 떠나, 사무소에는 세 명만이 남아 있었다. 쇼파에 누워서 잠을 자고 있는 미키. 쭈뼛쭈뼛 서 있는 하루카. 그리고 나. 사장님의 말로는 오토나시 코토리라는 사무원 분도 있다고는 하는데, 아직 출근하지 않은 것 같았다.

 

“······저어, 프로듀서······?”

“아, 하루······ 아마미 양, 이라고 했었지?”

“···죄, 죄송해요. 이오리도, 다른 아이들도, 모두 착한 아이인데······”

“아냐, 괜찮아. 아마미 양이 사과할 일도 아니고. 그러고보니, 오늘은 아마미 양의 프로듀싱, 이었나······.”

“에, 엑. 제, 제 프로듀싱······이요?”

“응. 결과적으로는 모두를 프로듀싱하게 되겠지만, 사장님께서 먼저 한 명 한 명씩 담당해보라고 하셨거든. 얼굴이라도 익혀라······ 같은 느낌인 것 같은데. 뭐, 이렇게 미움받아서야, 아하하······.”

 

웃고 있었지만, 솔직한 감정으로는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었다. 각오는 했지만, 이 정도로 미움 받는다면 쉽게 내가 꺾여버릴지도 모른다.

 

“······다, 다들 차, 착한 아이들이예요. 다, 단지······.” 하루카는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애써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그녀의 얼굴에도 슬픔이 드러나 있었다.

“···뭐, 부족할지도 모르겠지만, 오늘, 잘 부탁할게, 아마미 양.”

“네, 네, 프로듀서 씨······ 아, 그리고, 프로듀서.”

“?”

“하루카, 라고 불러도 괜찮아요.”

“아, 아하하. 그, 그래? 아, 알았어, 하루카. 일단 레슨장으로 가자. 다음 스케쥴은 댄스 레슨이었지?”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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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아라에서 연재하고 있는 글입니다. 관련 커뮤니티를 찾다가 어찌저찌 여기에 흘러들어오게 되었네요.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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