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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하야와 방 청소하기

댓글: 6 / 조회: 1053 / 추천: 8



본문 - 12-13, 2016 14:31에 작성됨.

키사라기 치하야 - 자신한텐 노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아이돌
 
 
 
 
"응. 알았어. 응. 그럼 그 때 봐."
 
전화기를 내려놓자 내가 결국은 저질러 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 이제 어떻게 할까.
 
남은 시간은 여섯 시간. 나는 방을 천천히 돌아다본다. 어제 산 CD들에서 벗겨낸 비닐들이 방바닥을 뒹굴고 있었고 악보집은 흐트러져 먼지 쌓인 바닥을 장식하고 있었고 오랫동안 설거지가 없었던 개수대에는 면 가닥들이 말라붙어 있었다.
 
하루카가 그러면 안 된다고 몇 번을 말했지만 잠만 자고 일어날 수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깨끗한 곳은 침대 위와 옷장, 그리고 세탁실을 겸한 화장실밖에 없었다. 어제도 아침 조깅이 끝나고 바닥에 널브러진 물건들을 피해 샤워를 하러 갔었고.
 
그러니 이제 와서 치우려고 하자니 막막하기 그지없었다. 내가 어떻게 사는지는 이미 하루카한테 전부 밝힌 상태니까 그냥 신경쓰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손님한테 더러운 집을 보이는 건 실례가 될 테니. 하루카가 이걸 보면 할 말은 뻔하다.
 
'이 대로는 안 되겠어! 아마미 하루카, 대청소 작전을 실시합니닷!'
 
하면서 온 집을 헤집어 놓을 게 뻔하다. 내 물건들은 언제나 최적의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 평화를 깨놓는 것은 아무리 하루카라도 허용할 수 없다.
 
그러니 나만의 작은 대청소 작전을 할 시간이다. 작은 대청소라니 이상한 말이지만 어쨌든 해야 한다. 우선 CD를 싸고 있던 비닐을 전부 주워낸다. 비닐에 붙어 있는 스티커는 조심스럽게 떼어내서 CD 케이스 안쪽에 붙이는 것도 잊지 않는다.
 
CD 케이스들을 전부 침대에 얹어놓은 다음 먼지와 함께 굴러다니는 머리카락들을 쓸어내려 하였지만 생각해 보니 방에는 빗자루도 없었다. 급한 대로 매일 도시락과 에너지바로 신세를 지던 편의점에서 작은 빗자루를 샀다.
 
점장 아저씨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가씨가 웬 일이냐고 말씀하셨다. 별일 아니라고 대답하면서도 편의점 아저씨가 나를 기억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조금은 놀랐다. 무언가 부끄러워져서 빠르게 집으로 돌아왔다. 문이 닫히는 바람에 머리카락이 더 잘 굴러다닌다.
 
빗자루를 들고 바닥을 살살 쓸어내려니 바닥에는 CD 비닐만 있는 게 아니었다. 우선 CDP를 아무 데나 던져놓은 다음에 어제 먹은 도시락 틀을 현관에 있는 쓰레기봉투에 집어넣는다. 보고 있던 악보들도 대충 쓸어서 책상 위에 얹어놓았다. 이어 음악 잡지들도 집어들었다.
 
 
잡지 사이에서 사진 하나가 툭 떨어졌다. 그제서야 이 잡지가 아직 발간되지 않은 상태의 잡지라는 것을 깨달았다. 얼마 전에 잡지 인터뷰를 했었고, 우리 쪽에서 검토를 해 달라고 보내 온 수정 전의 잡지였다.
 
3회독 정도를 하면서 내용에 문제가 없다는 것은 확인했지만, 역시나 신경쓰이는 것은 하루카와의 관계를 묻는 질문이었다. 나, 그렇게나 하루카와 가깝게 지냈던 걸까. 다시 휑한 거실을 바라본다. 여전히 먼지는 많았고 치울 것도 많았다.
 
가깝게 지낸 것도 사실이었다. 우선 지금 내가 치우고 있는 팬레터들도 처음에 몇 개는 하루카가 대신 답장을 해 줬으니까. 덕분에 하루카와 비슷한 아이돌로 취급을 받은 적도 있었다. 모두가 나의 노래를 칭찬하는 내용. 또는 귀여웠다는 내용.
 
...감상에 젖을 시간이 아니다. 답장은 나중에 하는 걸로 하고, 일단은 팬레터들을 책상에 얹어놓는다. 편의점에서 사온 빗자루로 바닥을 슥슥 쓸어낸다. 생각보다 내 머리는 길었고 먼지들이 많이 꼬여서 차마 두 눈으로 보지 못할 풍경을 만들었다.
 
거실 전부를 쓸어내는 데에는 제법 많은 시간이 걸렸고 하루카가 오기까지는 네 시간 정도 남았음을 깨달았다. 무엇에 두 시간 정도를 썼는가 되돌아보니 생각보다 음악 잡지를 보는 데 시간을 많이 소비했었다. 그럼 이대로 청소를 끝내도 괜찮은가.
 
다시 침대에 앉았다. 잠은 제대로 자야 하니 피곤해도 버텨야 했다. 커피를 타 마실까. 자연스럽게 개수대 쪽에 시선이 갔고 거기엔 커피 포트며 이전에 먹은 접시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여전히 하루카가 보기에는 만족스럽지 못할 부분이었다.
 
요며칠 커피를 못 마신 이유도 머그컵이 전부 개수대에 가 버렸기 때문이다. 수세미를 찾아 봤지만 애초에 구입한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또 다시 편의점에 갔고 아저씨는 이전보다 훨씬 더 기뻐하는 모습이었다. 생필품을 살 뿐인데 말이다.
 
수세미와 주방세제를 들고 가는 길에 생각해 보니 그냥 바닥에 쌓아 놓았던 CD도 정리할 필요가 느껴졌다. 역시나 하루카가 싫어하려나. 그렇게 생각하고 편의점 봉투를 든 채로 상점가의 가구점에 가 버렸고 순간 그냥 입구에서 멈춰 버렸다.
 
단순히 집이 더러운 실례를 범하기 싫었다면 바닥만 쓸어도 될 일이었다. 적당하게 뜨거운 물로 개수대를 씻어낸다면 딱히 집에서 저녁을 먹는 것도 아닐 테고 이렇게 시간을 쓸 일도 없었을 텐데 말이다. 그러니까 하루카가 싫어할까봐라는 가정은 옳지 않다.
 
커피 전문점에서 아메리카노 한 잔을 사서 집에 들어온다. 남은 시간은 세 시간 반. 커피를 홀짝이자 다시 정신이 맑아진다. 트레이닝은 언제나 해도 부족하니까 적당하게 방도 깨끗하겠다, 다시 운동을 좀 하다 올 수도 있을 것이다.
 
책상 위에 널브러져 있는 음악 잡지가 눈에 들어온다. 그러고 보니 이 책상은 하루카가 처음 내 집을 보고서는 첫 월급으로 사 준 책장 딸린 책상이었다. 노트북을 침대 위에서 사용하기도 하고 음악 감상을 할 때도 침대에 앉아서 하는지라 원래의 용도로는 거의 사용된 적이 없지만 책 같은 걸 쌓아 놓는 용도로는 제격이었다.
 
'...난 이대로가 좋은데.'
'치하야 쨩, 이대로 살면 일단 폐부터 나빠진다구!'
'...폐?'
'치하야 쨩은 먼지를 잔뜩 마셔도 좋아?'
'먼지가 많으면, 역시 노래에도 안 좋으려나.'
'응응! 그러니까 제 때 청소해 줘야 해!'
'그럼 물건들은 왜 제자리에 놓아야 하는 거야?'
'...찾느라 고생하니까?'
'전부 기억하고 있으니까 괜찮아.'
'으음... 전부 기억하고 있으니까 문제려나?'
'응?'
'그거야 나는 다른 걸 기억하기도 바쁘니까!'
'...다른 것?'
 
요리를 한다는 것. 노래 말고도 춤이나 비주얼도 신경써야 한다는 것. 팬레터에 짧은 문장으로나마 답해 주어야 한다는 것. 모든 것이 부담이고 귀찮은 것이다. 말하자면 하루카에게 나는, 바닥에 있는 악보의 위치가 아이돌 활동보다 중요한 사람일지도.
 
물론 하루카가 한 말은 거기까진 아니겠지. 상냥한 애니까, 친구들이라던가 학교 생활이라던가 동아리 활동이라던가... 765의 동료들이라던가 하는 것들을 모두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전부 기억하기 위해 주변의 일들을 신경쓰지 않아도 될 정도로 정리해 놓는다. 나와는 다른 종류의, 어떻게 보면 닮고 싶은 성실함이기도 하다. 인간의 기억력이 무한하지 않다면 당연히 그래야 하는 일이다.
 
다시 말해 단순히 하루카만을 위해 이 방을 정리하는 건 아니게 된다. 제대로 중요한 것들을 기억하기 위해서는 다른 것들을 신경 쓰지 않게 할 정도로 정리해 놓을 필요가 있다. 그러니까 CD 케이스는 따로 쌓아 놔야 할 것 같다.
 
집을 나선다. 가구점에 가서 플라스틱제 CD 정리함을 산다. 어림잡아 CD가 수백 장이니 심미적인 요소는 최대한 없애야 한다. 한아름 정리함을 껴안고 힘겹게 현관문을 열자 여전히 개수대의 그릇들이 눈에 띈다.
 
밖에 자주 나가다보니 방의 냄새도 신경이 쓰인다. 냄새는 분명 쓰레기 봉투와 개수대에서 나오는 냄새일 것이다. 몸 냄새를 맡아 봐도 매일 두 번 샤워하니까 그럴 리가 없었다. 터질 듯이 넘쳐나온 쓰레기봉투를 꾹꾹 눌러 묶고 집 밖에 내놓는다.
 
그제야 마지막으로, 개수대가 눈에 들어온다. 자세히 보니 주방에는 설거지거리 뿐만이 아니라 끓어넘친 인스턴트 라면 국물이 말라붙어 있기도 했고, 간장병이나 소금통 같은 게 여기저기 쓰러져 있기도 했다. 우선은 수세미를 꺼내 주방부터 닦는다.
 
수세미에 물을 너무 많이 묻혔는지 곧 주방은 물바다가 되었지만 일단 겉으로 보기에는 조금은 깨끗해진 기분이다. 이제는 정말로 설거지를 할 때이다.
 
대부분은 인스턴트 라면을 덜어먹었던 면 그릇이다. 요리도 노력해 보겠다고 하루카한테 자신 있게 말했지만 살짝 달콤한 맛을 더하려고 대파를 넣은 것이 전부였다. 코를 찌르진 않지만 명백히 좋지 않은 냄새가 개수대에서 올라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대파는 찔끔 잘라서 넣고는 말라비틀어져서 방금 묶어서 버린 쓰레기봉투에 있고 말이다. 이런 게 폐에 안 좋은 건 아니겠지만 역시나 기억의 문제일까나. 하지만 이건 기억 공간을 차지해 버리는걸. 수세미에 주방세제를 짜서 거품을 내었다.
 
하나하나 닦을 때마다 언제 이것을 먹었는지 기억이 났고 딱히 그 기억이 쓸모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대부분이 혼자 먹은 것이었고 딱히 충실한 식사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하루카가 별로 좋아하지 않으려나.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전적으로 나를 위한다는 말은 거짓말이었다. 손님을 위한다는 말도, 거짓말이었다. 하루카가 없었다면 이삿짐 상자에서 냄비를 꺼내는 일도, 그걸로 무엇을 요리해 먹는다는 일도 없었을 테니까. 잡지 더미에 파묻혀 있지만 동료와 찍은 사진을 책상 위에 놓을 일도 없었을 것이다. 책장도 없었을 것이고 매트리스의 비닐을 벗겨내어 침대에서 자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말하자면 하루카는 내가 생활하는 데에 있어서 아주 약간의 기준이 되어 주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조금은 얼굴이 화끈거린다.
 
남은 시간은 한 시간 가량. 가구를 사는 데 시간을 너무 많이 썼다. 빠르게 그릇과 냄비들을 닦아낸다. 다행히 식기 건조대는 빌라의 기본 옵션으로 있었다. 잔뜩 아래에 깔려 있는 숟가락과 젓가락을 씻고 나서야 설거지가 끝나 버렸다.
 
시간이 없으니 CD의 순서를 생각할 겨를도 없다. 일단 다 들었던 것 같은 CD를 정리함에 끼워넣는다. 다행히 CD를 들었는지 듣지 않았는지는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들은 CD는 전부 정리함에 넣고 듣지 않은 CD는 책장의 빈 공간에 쑤셔 넣는다.
 
그리고 남은 것은 하루카가 사 준 책상이다. 책상은 청소하면서 던져 놓은 온갖 팬래터와 이미 끝난 기획의 기획서, 잡지로 난잡했다. 기획서의 날짜를 하나하나 확인한다. 파쇄해서 버려야 하니까 나중에 회사로 들고 가야 할 것이다. 리츠코의 집에는 파쇄기가 있다고 했나.
 
생각보다 기획서가 많다. 언제 다 정리를...
 
-치하야 쨩!
 
인터폰 너머로 여섯 시간 내내 생각했던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 집을 검사해 줄, 아니 생각해 보면 꽤나 여섯 시간을 알차게 채워 준 사람.
 
"하, 하루카?! 왜 벌써?"
-에에~ 하루카 씨는 빨리 오면 안 되는 거였나요?
"아니, 아니야! 문 열어줄게!"
 
현관문을 열자 양손에 봉지를 가득 든 하루카의 모습이 모였다.
 
"...이건 다 뭐야?"
"그거야 치하야 쨩, 요리 한다면서 전부 인스턴트만 먹고 있었으니까!"
"...대파는 넣어 먹었어."
"그러니까 오늘은 요리 선생 아마미 하루카입니다! 실례합니다~"
 
하루카는 내가 전화를 받은 뒤로 계속해서 자기 생각만 했다는 걸 알고 있을까. 하루카는 신발을 벗고 집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오오! 치하야쨩, 집에서 빛이 나!"
"...알아 줬구나."
"......혹시 내가 온다고 전화를 받고 어마어마하게 청소를 했다던가?!"
"...했습니다."
"그러면 안 되지 치하야 쨩! 제때제때 해야 해!"
"...후훗."
"아아! 비웃었겠다!"
"정말 아닌데."
"치하야 쨩... 성장했어... 벌써 이 하루카 씨를 놀리다니..."
"아 참 하루카."
"응 왜?"
 
다시 거실을 돌아본다. 주방을 돌아본다. 먼지도 비닐도 냄새도, 없다. 기억해야 할 것도 없다. 단지 하루카가 있을 뿐이다.
 
"고마워. 덕분에 청소할 때 도움 많이 됐어."
"아하하... 나도 야요이한테 많이 배운 거라..."
"타카츠키 씨는 뭔가 더 알고 있어?"
"음... 다다미가 깔린 방 기준이라서 빌라엔 맞지 않으려나..."
"후훗, 나중에 물어봐야겠는걸."
"그럼그럼! 아마미 하루카의 요리 교실, 시작합니다!"
"에에, 벌써?"
"벌써라니, 벌써 7시인데?"
 
그러고 보니 여섯 시간이나 청소를 했었지.
 
"...그러네. 그럼 잘 부탁합니다, 하루카 선생님."
"네네! 잘 지도하겠습니다 치하야 쨩!"
 
 
 
끝.
 
 
 
 
 
 
 
 
후일담 1.
 
 
 
 
 
"아니 글쎄, 그 아가씨가 갑자기 수세미를 사 가더라니까?"
"맨날 칼로리메이트만 사 가던 사람이요?"
"그래. 무슨 바람이 불었나 몰라. 하지만 좋은 일이야."
"그렇네요. 집안일을 시작했다는 증거려나요?"
 
딸랑 딸랑
 
"어서 오세... 아앗!"
"......"
'아까 말한 그 사람이에요?'
'응. 그래!'
"오늘도 도시락이야?"
"아, 아뇨... 그... 어묵을 조금..."
"해가 서쪽에서 뜨겠구먼. 아가씨가 칼로리메이트를 안 사 가는 날이 있다니."
"그, 부끄럽지만... 요리를 시작해서요."
"요리! 요리 좋지. 정가제라서 깎아 주지는 못하겠지만, 아저씨 응원할 테니까. 자 거스름돈 346엔."
"...감사합니다."
 
딸랑 딸랑
 
"예쁘장한 아가씨인데 어쩌다가 도시락만 먹게 됐을꼬."
"뭐 우리가 신경 쓸 일이 아니긴 하죠."
"그런가..."
"그나저나 저 아가씨,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말이죠."
"어디서?"
"TV라던가..."
"나 TV 안 보는데."
"...아아아아아!!!"
 
이후에 치하야의 사인이 편의점에 걸리게 된 건 다른 이야기.
 
 
 
 
 
후일담 2.
 
 
 
 
 
"수고하셨습니다."
"응! 치하야도 수고했어!"
"...저기 프로듀서."
"응?"
"매번 도시락을 싸 오시던데, 누군가가 싸 주시는 건가요?"
"하하, 아니. 저녁에 반찬을 해 놨다가 아침에 다시 데워서 담아 오는 거야."
"그, 그 얘기를 조금만 더 자세히!"
"치, 치하야... 눈이 무서운데..."
 
 
 
 
 
 
 
 
 
 
 
진짜 끝. 뭔가 초창기의 치하야는 방 청소도 안 할 것 같아서 저의 경험과 주변의 증언들을 섞어서 써 봤습니다. 근데 또 기승전하루치하가 된 느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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