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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스널리티P 시리즈] 방랑자라고 다 길 잃은 것은 아니다. (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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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12-12, 2016 03:05에 작성됨.

방랑자라고 다 길 잃은 것은 아니다(上) 에서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걸까?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지금 내 눈 앞에서 펼쳐지는 광경은, 야구를 배경으로 하는 만화나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흐읍!”

 

낮은 기합과 함께 그의 왼손을 떠난 공은 타자의 바로 앞에서 급격하게 속도를 잃어버리며 아래로 뚝 떨어졌다. 원래라면 공이 지나갔어야 할 허공을 자신의 모든 힘을 쏟아 부은 타자의 방망이가 거칠게 쓸고 지나갔다. 배트의 원심력을 이기지 못해 자세가 휘청거리는 타자를 놀리기라도 하듯, 여유롭게 아래로 툭 떨어지던 공은 웹(주 : 글러브의 검지와 엄지 사이, 공을 붙잡는 그물)을 아래로 하고 있던 포수의 미트 속으로 툭, 하고 떨어졌다. 그야말로 만화에서나 볼 수 있을 만한, 자로 잰 듯한 완벽한 변화구였다.

 

“헛스윙! 타자 아웃!”

“아아~! 맞았다고 생각했는데!”

“하하하! 맞긴 뭘 맞아? 완전히 넘어갔던데.”

“야, 니가 한번 받아 봐라. 저거에 안 속으면 사람이 아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덕아웃으로 돌아가는 타자를 바라보면서 나는 들고 있는 기록지에 획 하나를 추가하여 바를 정(正)자 하나를 더 완성했다. 이걸로 여섯 개 째. 기록지 위쪽의 스코어는 여전히 3:0을 가리키고 있었다.

 

“다음!”

“네!”

 

상대 선수의 호령에 대기타석에서 몸을 풀고 있던 타자가 타석으로 들어섰다. 플레이볼이 선언되고, 포수와 사인을 교환한 상대 선수가 와인드업을 시작했다. 쐐액!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손을 떠난 공이 포수의 글러브 속으로 파고 들어갔다. 타자의 몸쪽 구석을 찌르는 빠른 직구였다. 무엇을 노리고 있었던 것인지, 허를 찔린 듯 크게 움찔한 타자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스트라이크! 3-1!”

 

‘저 사람, 정말로 자신이 있어서 제시한 룰이었구나.’

기록지에 서른 한 번째 타석과 첫 번째 스트라이크를 추가하며, 나는 경기를 시작하기 직전의 일을 떠올렸다.

  


 

“오늘 연습경기의 상대를 맡게 된 P입니다. 잘 부탁해요.”

 

모자를 벗으면서 자신을 P라고 소개한 그가 꾸벅, 허리를 숙였다. 그의 옆에 서 있던 감독님이 부가 설명을 하듯 부원들을 돌아보았다.

 

“에에, P씨는 내가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분이시다. 전직 프로 출신이시니까, 너희들도 가벼이 보지 않는 게 좋을 거다.”

“아하하, 너무 띄워주시는데요. 여러분들은 전국대회 3위의 강호라고 들었습니다. 오히려 제가 잘 봐 달라고 부탁해야 할 것 같아요.”

 

멋쩍은 듯 뒷머리를 긁는 P씨를 바라보며, 덕아웃에 앉아 있던 부원들이 자기들끼리만 들릴 정도로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P라는 이름은 처음 들어보는데? 너 들어 본 적 있어?”

“아니, 처음 들어보는데. 프로 출신이라면서 저런 유니폼도 처음 봐. 무슨 팀이지?”

 

하지만, 그 중에서 단 한 사람. 흥분한 황소처럼 거친 콧김을 뿜으며 반짝이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아니, 그는 눈을 반짝이는 수준이 아니라, 입에서 침이 떨어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입을 헤 벌린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부원들 중 유일하게 등번호가 적힌 유니폼을 입고 있는 사람. 31번이라는 등번호를 가지고 있는 그는 다름아닌 T대학 야구부의 주장이었다.

 

“주장은 저 유니폼 무슨 팀인지 알고 있어요?”

“뉴욕 메트로. 5년 전까지 쓰던 구형 유니폼이지.”

“뉴욕……? 그런 팀도 있었나? 뉴욕엔 브롱스만 있는거 아니었어요?”

“뭐, 지금은 별로 유명한 팀은 아니니까 모를 만도 하지. 그런 팀이 있어. 브롱스랑 같은 연고지를 쓰는 팀이.”

 

그 때, 이야기를 마친 두 사람이 덕아웃을 향해 다가왔다.

 

“규칙은 어떻게 할래요?”

 

감독님의 질문에 그는 부원들을 돌아보며 머릿수를 헤아리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넷……열다섯 명이네요? 그러면, 1인당 4타석 정도면 되겠죠?”

“……네?”

“뭐?”

 

내가 뭘 잘못 들었나? 라고 생각하며 나는 감독님을 바라보았다. 감독님 또한 어안이벙벙한 표정인 걸 보아, 아무래도 내가 잘못 듣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우리 두 사람이 그러던가 말던가, 그는 덕아웃에 앉아 있는 학생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1인당 4타석, 총 60타석을 진행하겠습니다. 상황 설정은 제가 3점을 가진 3:0으로 시작하고, 가상의 주자 만루에서 9회말 마지막 공격. 타자에 상관없이 무조건 볼카운트는 3-0(3볼 0스트라이크)에서 시작합니다. 60타석을 전부 마칠 때까지, 저에게서 3점 이상을 뽑아내면 여러분들이 이기는 걸로 하겠습니다.”

 

너무도 당당하게 말하는 그를 바라보며, 감독님과 나를 포함한 모두들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었다. 그 때, 주장이 번쩍 손을 들었다.

 

“질문 있습니다. 가상의 주자 만루라면 득점조건은 어떻게 되나요?”

“수비가 없으니 내야안타는 인정하지 않겠습니다. 인플레이 타구는 무조건 외야로 보내야만 하고, 외야로 날아간 타구는 무조건 홈런으로 가정하여 본인의 타석이 끝나면서 4점을 얻습니다. 그리고 다음 타자가 들어오면 다시 가상의 주자 만루, 3-0에서 시작하게 되는거죠. 뭐, 3:0이니까 외야로 하나 보내면 만루홈런으로 바로 게임 끝이지만 말이죠.”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씨익 웃었다.

3:0스코어, 외야로 공을 보내면 알아서 홈런. 즉, 외야로 공을 보내기만 하면 무조건 거기서 경기가 끝난다는 소리였다. 이 무슨 자신감이란 말인가?

감독님 또한 나와 같은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저, 저기, P씨. 아무리 선출(선수 출신)이고 우리 애들이 아마추어라지만, 그건 좀…….”

“괜찮아요. 빨리 끝나면 빨리 끝나서 좋죠. 아, 감독님? 저 왼손 쓸 건데 그래도 되죠?”

……뭐, P씨만 괜찮다면야. 그렇지 않아도 우리 애들 좌완 경험이 필요하던 참이에요. 저번 대회에서도 좌완한테 매번 깨졌거든.”

“그렇군요. 그러면, 교육의 의미를 포함해서 해야겠네요.”

 

“물론, 그렇다고 해서 살살 하지는 않을 겁니다.”라고 말하며 그는 손가락을 풀던 오른손을 글러브에 끼워 넣었다. 그가 사용하는 글러브는 마치 부채를 크게 확장시켜 놓은 듯한, 다소 특이한 디자인의 글러브였다.

왼손으로 글러브를 팡팡 두드리며 그는 우리들을 돌아보았다.

 

“자, 뭘 그렇게 멀뚱멀뚱 앉아 있어요? 어서 시작합시다!”

 


 

 

처음 그가 정한 규칙을 들었을 때는 저 사람이 경기를 할 마음이 있기는 한 건가? 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그때뿐. 첫 번째 타석에서 15명을 줄줄이 삼진으로 돌려세우는 것을 보고 나는 생각을 어느 정도는 고쳤다. 그는 경기를 할 마음이 없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자신의 모든 것을 보여주고자 하고 있었던 것이다.

 

“스트라이크!”

 

3-2 풀카운트. 기록지에 스트라이크를 추가하며 나는 기록을 다시 훑어보았다. 지금까지 30명의 타자를 상대하면서 삼진 28개, 그리고 2개는 투수 앞 땅볼로 기록되어 있었다. 두 바퀴의 타석이 돌았지만, 그의 공에는 여전히 손끝도 건드리지 못하고 있었다.

 

“우아악!”

“헛스윙! 타자 아웃!”

“야, 어떻게 세 번이나 같은 공에 넘어가냐?”

“야야, 모르면 말을 하지 마라."

 

풀카운트라는 긴장감 때문이었는지, 눈높이에서 뚝 떨어지는 커브에 잔뜩 얼어 있던 타자의 방망이가 크게 헛돌았다. 헛스윙 삼진아웃. 이걸로 31번째 타석이 끝났다.

 

“다음!”

“넵!!”

 

우렁찬 대답과 함께, 다음 타자가 타석으로 올라갔다. 아까 전부터 대기타석에서 전전긍긍, 마치 뭐 마려운 강아지마냥 안절부절 못하던 주장이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와, 기운이 넘치네요.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플레이볼 사인이 떨어지고, 마운드의 P씨가 투구모션을 취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주장의 표정이 바뀌었다. 경기에 임할 때나 보이는 진지한 표정이었지만, 지금의 그의 얼굴에는 그 이외의 다른 감정도 함께 떠올라 있었다

 

“스트라이크!”

 

그의 손을 떠난 공이 스트라이크 존의 정 중앙에 틀어박혔다. 주장은 움찔, 하고 배트를 움직였지만 그것이 끝이었다. 손을 들어 타임을 요청한 그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심호흡을 시작했다. 헬멧을 벗고, 줄줄 흘러내리는 땀을 손목의 밴드로 닦아낸 그는 네댓 번 심호흡을 반복한 뒤 다시 타석에 섰다.

 

“플레이볼!”

 

P씨의 손을 떠난 야구공이 홈플레이트를 향해 날아들었다. 자신의 얼굴 높이로 높이 날아오는 공을 바라보던 주장은 이를 악물고 공의 예상 착탄점을 향해 배트를 휘둘렀다. 부웅! 하는 묵직한 소리를 내며 알루미늄 배트가 허공을 훑고, 그의 얼굴까지 떠올랐던 공은 언제 그랬냐는 듯 태연하게 포수의 글러브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번에도 스트라이크 존의 정 중앙이었다.

 

“스트라이크!”

“큭!”

 

몸이 배트에 끌려갈 정도로 힘껏 배트를 휘두르며 비틀거린 그는 이를 악물며 다시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를 바라보던 P씨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포수와 사인을 교환하고, 그가 다시 투구자세를 취했다. 타석에 서서, 땀을 비오듯이 흘리면서 배트를 쥐고 있던 주장은 배트를 강하게 움켜쥐고, 앞으로 나간 왼발을 살짝 들어 올렸다.

와인드업을 하고, 무거운 기합소리와 함께 그의 왼손을 떠난 공은 마치 프리스비처럼 크게 횡으로 꺾이며, 스트라이크 존의 안쪽으로 깊숙히 파고 들어갔다. 공이 자신의 타격범위 안에 들어온 것을 놓치지 않고, 주장은 이를 악물고는 배트를 크게 돌렸다.

 

 ***

 

“경기 종료! 상호간에 경례!”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한낮에 시작했던 연습경기였지만, 경기가 끝날 무렵에는 하늘에 시뻘겋게 석양이 저물고 있었다.

경기 결과는 60타석 0안타 0볼넷으로 P씨의 3:0 승리. 아무리 왼손투수에게 약하다지만, ‘설마 장타 하나를 못 치겠어’라고 생각하고 있던 부원들은 적잖이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감독님 또한 마지막 타자를 보란듯이 삼진으로 잡아내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못 당하겠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가로저었을 정도였으니.

물론 아예 삼진만 당한 것은 아니었다. 전국대회 3위라는 명성은 거저 얻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듯 부원들이 대여섯 번 정도 그의 공을 건드리기는 했지만, 공에 무슨 마술이라도 걸어놓은 것인지 알루미늄 배트를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내야를 빠져나간 타구는 단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모두들 잠시 주목! P씨가 너희에게 해 줄 말씀이 있으시다고 한다!”

 

경기를 마치고, 심판과 포수를 먼저 돌려 보낸 뒤, 감독님과 P씨는 다시 덕아웃으로 돌아와 장비를 정리하던 부원들을 불러 모았다. 벤치에 모여앉은 부원들을 돌아보던 그는 대뜸 모자를 벗고 고개를 숙였다.

 

“우선, 여러분들께 사과를 드려야겠네요. 죄송합니다.”

“……?”

 

뜬금없는 사과에 부원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아, 이게 무슨 얘기냐면 지금부터 설명해드릴게요. 으음……거기, 둘째 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 학생.”

“네!”

”세 번째 타석에서 투수 앞 땅볼로 아웃당했죠? 왜 그렇게 됐는지 알고 있어요?”

“……타구가 배트 손잡이 부분에 맞았어요.”

“외야로 보내야 한다는 부분을 의식해서 배트를 길게 잡고 있었죠? 당겨치려는 생각으로.”

 

그의 질문에 지목당한 학생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얼굴에는 ‘어떻게 알았지?’라는 생각이 얼굴에 다 드러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렇게 배트를 크게 쥐고 있으면 아마추어 수준의 스윙속도로는 당겨서 장타를 만들 수가 없어요. 제 자랑을 하려는 건 아니지만, 저도 변화구에는 일가견이 있는 몸이라서 말이죠.”

“그, 그렇구나…….”

“그렇다면, 여기서 생각을 조금 연장해서 제가 내건 규칙을 한번 생각해봅시다. 장타 한 방이면 경기가 끝나는 룰이었죠? 얼핏 보면 제가 불리한 것처럼 보이는 조건이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건 저에게 굉장히 유리한 조건입니다.”

 

P씨는 부원들을 돌아보았다.

 

“처음부터 3볼을 주고 시작한다는 부분에서, 저는 초구 스트라이크를 무조건 넣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제가 가장 먼저 선택하는 공은 어떤 공일까요? 거기, 완장 달고 있는 학생?”

“몸 쪽으로 붙인 스트라이크입니다.”

 

거침없이 대답하는 주장을 바라보며 P씨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렇습니다. 몸쪽으로 바짝 붙인 스트라이크죠. 그렇다면, 학생은 반대손 투수가 자신의 몸 쪽으로 던지는 커터나 투심을 당겨서 장타로 만들 수 있습니까?”

“……불가능합니다. 적어도 지금의 저에게는.”

“그렇죠. 그것이 제 노림수입니다. 3볼을 주고 시작하는 상황이면, 저는 무조건 스트라이크를 던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제가 스트라이크를 던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요. 이 상황에서, 맞히기 쉬워’보이는’ 공을 살짝 밀어 넣어주면, 거기서 끝입니다.”

 

그제서야 깨달았다는 듯 주장이 납득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하, 외야 타구를 강제하면서 당겨치기를, 3볼이라는 조건을 걸어서 적극적으로 방망이를 돌리도록 상황을 만드셨던 거였네요.”

”정확합니다. 만약 수비를 넣고 내야 플레이까지 허용했다면 여러분들은 기습번트나 스퀴즈, 도루를 시도하면서 내야를 흔들 수 있었어요. 포수 분과의 호흡이 좋지 않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그렇게 나오고자 했다면 저는 속수무책이었을 겁니다.”

 

그 말을 듣고, 말도 안 되는 패배 앞에서 뚱해있던 나머지 부원들 또한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감독님의 옆에서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나 역시 내심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심 탄성이 절로 나올 정도로, 무척이나 수준 높은 이야기였다.

 

“아마추어라고 해서 100마일을 못 던지라는 법은 없고, 세상에는 90마일도 못 던지는 프로가 널리고 널렸습니다. 하지만, 프로와 아마추어는 마인드에서 차이가 벌어집니다. 아마추어에서 투수는 자신이 무엇을 노려야 하는지 모르고, 타자는 자신이 무엇을 숨겨야 하는지를 모르는 것뿐이죠.”

 

그는 덕아웃을 향해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왔다. 멀리서 봤을 때는 멀쩡하게 서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가까이에서 보니 역시나 그의 얼굴에도 피로감이 짙게 떠올라 있었다. 아무리 아마추어가 상대라지만 190개에 가까운 공을 던지고도 멀쩡하면 정말로 사람이 아닐 것이다. 뭐, 경기 결과만 봐도 충분히 사람이 아닌 수준이었지만.

 

“100마일을 던지는 투수라도 수가 읽히면 얻어맞습니다. 변화구를 아무리 잘 던지는 투수라도 타자가 무엇을 던질 지 알고 있다면 그저 배팅볼을 던져주는 기계에 불과하죠. 명심하십시오. 투수를 위대하게 만드는 것은 공을 던지는 팔이 아닙니다.”

 

”진정으로 투수를 위대하게 만들어 주는 것은”그는 손을 들어 자신의 관자놀이를 톡톡 두드리며 말을 이어갔다.

 

“여기에 있는 ’뇌’라고 불리는 물건입니다. 생각하세요. 교활해지세요. 타격은 타이밍이고, 피칭은 타이밍을 빼앗는 것입니다. 타자가 무엇을 노리고 있는지를 생각하세요. 모르겠다면, 타자가 어떤 것을 노리도록 상황을 만드세요. 제가 여러분께 플레이를 강요한 것처럼.”

 

그가 입을 다물었다. 조용한 그라운드 위를 해질녘의 싸늘한 가을바람이 스산하게 훑고 지나갔다.

 

“……제가 해 드릴 말은 여기까지입니다. 여러분, 오늘 하루 고생하셨습니다. 그리고, 제 억지에 어울려주셔서 정말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벌떡 일어서서 그의 인사에 우렁차게 대답하며, 부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그에게 갈채를 보냈다. 그 갈채에 거듭 고개를 꾸벅이며 그는 감독님에게 다가갔다. 감독님과 뭐라 이야기를 나누며 마지막으로 악수를 나눈 그는 자신의 짐을 챙겨 운동장의 출구를 향해 터덜터덜 걸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덕아웃의 난간에 기대어 멍하게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주장에게 다가갔다.

 

“뭘 그렇게 보고 있어요?”

 

“뒷모습.” 그렇게 대답하며 주장은 자신의 턱을 괴었다.

 

”뭐랄까, 쓸쓸해 보인다 싶어서.”

 

쓸쓸하다니?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주장은 운동장을 바라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내 기억 속의 그는 언제나 사람들한테 둘러싸여 있었어. 슈퍼스타였지. 경기가 끝나면 항상 팬들이 몰려들었고, 카메라는 언제나 그를 쫓아다닐 정도였어.”

 

마침내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그는 턱을 괴고 있던 손을 풀고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참, 사람 인생이란 거 모르겠네. 저 사람이 저렇게 쓸쓸하게 걸어가는 모습을 난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거든.”

“저기, 선배, 뭐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요?”

“응, 말해봐.”

“P씨를 왠지 잘 아는 눈치던데, 아는 사람이에요?”

“뭐? 너 몰랐어?”

“네.”

“저 사람, 이거 주인이야.”

 

그렇게 말하면서 그는 자신의 등을 가리켰다. 거기에 있는 것은 31이라는 숫자였다. 그제서야 나는 P씨의 유니폼에도 마찬가지로 같은 숫자가 적혀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어쩐지, 4번이나 아웃 당해놓고도 묘하게 멀쩡해 보인다 싶더라니, 그런 속셈이었군요?”

“속셈은 무슨. 그냥 그 사람이랑 같은 그라운드를 밟았다는 사실 자체로도 영광인걸. 거기다, 왠지 안심했어.”

“안심……하다뇨?”

 

그는 나를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뭐, 그런 일이 있다. 자, 마저 정리하고 얼른 가자. 배고프다.”

“잠깐만요! 선배! 가르쳐줘요!”

 


 

 

“아이고, 폼 잡았더니 힘들어 죽겠네…….”

 

P는 왼팔을 빙글빙글 돌리는 한편,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대학교의 교정을 빠져 나오고 있었다. 그런 그의 앞을 어떤 그림자가 가로막았다. 그의 발걸음이 우뚝, 멈추었다.

 

“경기 잘 봤어요. 역시 전설은 뭔가 다르네요.”

“……?”

 

고개를 들어 그림자의 주인을 알아본 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여기는 또 어떻게 알고 온 것인지, 선글라스를 쓰고, 머리를 묶어 틀어올린 카에데가 그의 앞에 서 있었던 것이다.

 

“타카가키 씨? 여긴 또 어떻게 알고 왔습니까?”

 

카에데는 빙그레 웃으며 손가락으로 옆을 가리켰다. 그녀가 가리킨 방향을 바라보던 프로듀서의 표정이 또 한번 굳었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들고 있던 가방으로 수줍게 얼굴을 가리고 있는 후미카가 있었다. 아무래도 숨을 장소를 찾지 못한 모양이었다.

 

“사기사와…….”

“죄, 죄송해요……비밀로 하려고 했는데, 카에데 씨한테 넘어가서 그만…….”

“정말, 이런 게 있었으면 미리 말을 해 주셨어야죠. 맥주라도 사서 오는 거였는데.”

“아니, 이런 거 보는 게 뭐가 재밌어요?”

“저는 재밌어요. 자아, 이렇게 되었으니, 프로듀서는 얼른 제게 맥주를 사 주셔야겠습니다.”

“아니 무슨 맥주를.”

“학생들을 맥을 못 추게 했으니 맥주를 마셔야죠? 후훗. 오늘은 술이 술술 넘어가겠네요.”

 

그녀의 얼토당토않은 말장난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자신이 처한 상황 때문이었을까? 후미카와 카에데를 번갈아 바라보던 그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별 수 없죠. 두 분 모두 갑시다. 저도 배가 고프던 참이니까요.”

“앗싸♬”

“가, 감사합니다…….”

 

못 이긴 척, 쓴웃음을 지으며 걸어가는 그였지만, 그의 입에 걸린 미소는 어쩐지 무척이나 기쁜 듯이 보였다.

 


 

 

경기가 끝난 그 날 저녁.

다른 부원들이 모두 돌아간 뒤, 주장과 나는 창고에 남아 경기에서 사용했던 비품을 정리하고 있었다. 어디까지나 임시로 맡은 매니저역할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매니저로써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기에, 나는 돌아가도 된다는 감독님의 말에도 남아서 일을 거들기로 했다.

 

“어디, 이 정도면 충분하겠다. 나머지는 월요일에 애들 불러서 할게.”

“네, 알았어요.”

“그냥 보내면 미안하니까 씻고 나올 때까지 기다려주라. 내가 커피 살게.”

“자판기 아니죠?”

“넌 나를 뭐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야…….”

“후훗, 농담이에요. 그럼 전 휴게실 가 있을게요.”

 

*** 

 

잠시 후, 재빨리 샤워를 마치고 나온 주장과 나는 학교 앞에 있는 작은 카페로 향했다. 주문한 커피를 앞에 두고, 나는 여전히 싱글벙글 웃고 있는 주장을 바라보았다.

 

“선배, P씨 말인데요.”

“응, 왜?”

“선수 시절에는 어떤 사람이었어요?”

“음, 뭐……말하자면 긴데, 간단히 표현하자면 리그를 자기 혼자서 쥐락펴락했던 사람이라고나 할까……?”

“그게 무슨 뜻이에요?”

 

“으음, 잠깐만.”이라고 말하며 주장은 자신의 휴대전화를 꺼내 무언가를 조작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그는 자신의 휴대전화에 떠오른 화면을 나에게 보여주었다. 그것은 다름아닌, 2000년부터 2010년까지의 메이저리그의 기록이었다.

 

“자, 봐. 2004년까지 리그 평균 타율이 3할 2푼이지?”

“네.”

”그 사람이 풀타임으로 뛰기 시작한게 2004~2007년이거든? 이 때의 기록을 봐.”

“……2할8푼……?”

“그래. 그 한 사람이, 리그 전체의 타율을 4푼이나 깎아먹은거야. 봐, 그 사람이 없는 2008년부터는 다시 3할 위로 올라갔지?”

“그, 그렇네요…….”

“뭐, 그 시절에는 메이저리그에 대해서 지금처럼 관심도 크게 없었고, 해외중계가 활성화된 것도 아니었으니까. 나처럼 아는 사람만 아는 전설이라는 거지. 만약 그 사람이 일본인이었다면 주목을 받았겠지만, 그는 교포도 아니고 완전히 이민을 간 경우였거든.”

 

자랑스러운 듯 눈을 반짝이며 그는 자신의 휴대전화를 다시 주머니로 되돌렸다. 마침 적당한 타이밍이라고 생각한 나는 경기를 치르는 내내 머릿속에 떠올리고 있던 것을 조심스레 밖으로 꺼냈다

 

”그럼……P씨는 어째서 은퇴를 하게 된 건가요? 오늘 보니까 현역이라고 해도 믿겠던데요.”

“……그 사람, 한번 죽었다가 살아나서 그래.”

 

뜻밖의 이야기가 들려왔다. 나는 커피잔을 빙글빙글 돌리던 손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았다.

 

“……네?”

“자세한 내막은 모르지만, 헤드샷을 맞고 혼수상태로 쓰러졌다가 반년 뒤에 의식을 되찾은 거야. 깨어났다는 소식 이후로는 한동안 이야기가 없었는데, 며칠 뒤에 보니까 은퇴한다는 기사가 떴더라고. 뇌질환 기록으로 메디컬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했다더라.”

“그렇군요…….”

 

정말로 뜻밖의 이야기였다. 나는 그 스스로가 자신의 길에서 물러난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 사람이 연습경기의 상대라는 걸 알았을 때 나는 무척이나 기뻤지만 동시에 그만큼 불안했어. 그런 일을 겪었는데, 혹시 내가 알던 그 사람이 아니게 되어버렸으면 어쩌나……하고 말이야.”

 

“만약 그렇게 되어버리면, 내 이정표가 하루아침에 사라져버리는 셈이잖아?”라고 말하며 그는 씨익 웃었다.

 

그제서야 나는 첫 번째 타석 이후, 연습경기 내내 계속해서 안절부절못하던 그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 때는 단순한 흥분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전혀 아니더라. 너도 들었지? 경기 끝나고 그 사람이 해설해주던 거.”

“네.”

“말이야 쉽지, 실제로 해보면 터무니없는 조건이야. 생각해봐? 최소 180구를 모두 스트라이크 존 안에, 원하는 곳에 던져 넣는다는 게 쉬운 일처럼 보여? 볼 하나만 줘도 바로 실점인데.”

“그러고 보니 확실히…….”

”그건 실력도 실력이지만, 그 이전에 자기 자신에 대한 엄청난 자신감이 있어야 가능해. 내 공은 아무도 못 건드린다는 자신감이.”

“그렇네요…….”

”아아, 정말 감동했다니까. 경기하는 내내 너무 감동해서, 눈물 참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넌 모를거야.”

 

그렇게나 좋았단 것일까. 또다시 눈을 반짝이며 말하는 그를 바라보던 내 마음 속에서는 P라는 사람에 대한 궁금증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자신의 목적지를 한 번 잃어버린 사람에게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힘을 넣어준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런 그의 자취를 따라가면, 혹시 나도 해답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꼭 한번, 그 사람과 직접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었다.

  


 

 

1주일이 지난 11월의 세 번째 금요일 오후. 시내의 한 카페에서 나는 그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마운드가 아닌 장소에서 만난 P라는 사람의 첫 인상은, ‘크다’라는 것이었다. 키가 크다거나, 덩치가 큰 것은 아니었다. 물론 일반적인 사람의 기준에서는 까마득히 크고, 운동부의 학생들에 견주어도 그는 충분히 큰 사람이었지만, 내가 느낀 ‘크다’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어떻게 딱 집어서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그의 존재 자체가 어딘가 크다고 느껴졌다.

 

“아, 이쪽입니다.”

 

카페 안으로 들어서자, 안경을 쓰고 있는 단정한 정장 차림의 남성이 나를 발견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들었다. 그가 있는 자리로 종종걸음으로 다가간 나는 그의 앞에서 꾸벅, 허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서클 미팅이 조금 늦게 끝나는 바람에……오래 기다리셨죠?”

“아뇨, 저도 막 온 참입니다. 주문도 안 했잖아요?”

 

그의 말에 나는 테이블 위를 바라보았다. 정말로 방금 온 참인지, 반으로 접혀 있는 메뉴판이 테이블 위에 올라와 있었다.

 

“소개가 늦었네요. T대학에 재학중인 닛타 미나미라고 합니다. 올해로 열아홉이구요.”

“반가워요, 닛타 양. P라고 합니다. 평범한 샐러리맨이고 올해로 스물아홉이에요. 아, 서 있지 말고 앉으시죠.”

 

미리 약간 빼 놓은 것인지, 딱 앉기 좋을 정도로 나와있는 의자에 앉자 그제서야 P씨도 자신의 자리로 다시 돌아갔다. 은은한 카페의 불빛 아래로 드러나는 그의 모습은 어쩐지 조금은 피곤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사회인이니까 역시 금요일이 가장 피곤한 날인 걸까?

자리에 앉아, 멀뚱멀뚱 그를 바라보고 있자 그는 나를 향해 메뉴판을 살짝 밀었다.

 

“마시고 싶으신 거 주문하세요. 저는 미리 생각해뒀으니까요.”

 

나는 그가 내민 메뉴판을 받아 훑어보는 시늉을 했다. 나 역시 메뉴는 이미 생각해두고 있었다. 다른 사람과 만날 때는 곧잘 먹는 메뉴가 있다. 화려해 보이지 않도록, 상대방이 부담스럽지 않도록.

내가 메뉴판을 덮은 것을 보고 그는 곧바로 벨을 눌러 종업원을 불렀다.

 

“메뉴는 정하셨나요?”

“네, 저는 카페오레로…….”

“저는 에스프레소 더블샷으로 해주세요. 디저트는 필요하신가요?”

“음……아뇨, 괜찮습니다. 곧 저녁 먹을 시간이라서요.”

“하하, 그렇죠. 그럼 그 두 개만 부탁드립니다.”

“카페오레 하나랑 더블샷 하나. 알겠습니다.”

 

종업원이 돌아가고, 그와 나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불러내 놓고 가만히 앉아 있자니 예의가 아닌 것 같지만,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 나는 안절부절못하며 앉아 있었다. 그런 내 기분을 눈치챈 것인지, P씨가 먼저 말을 걸어 주었다.

 

“감독님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대단히 성실하고, 또 우수한 학생이시라고.”

“과, 과찬이세요…….”

“뭐, 제 자랑이라곤 그저 조금 오래 살았다는 사실 뿐이지만요. 제 이야기가 닛타 양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네요.”

 

그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편안하게 의자의 등받이에 등을 기대어 자세를 곧게 펴고,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던 두 손은 가볍게 깍지를 낀다. 카페의 조명을 반사하는 뿔테 안경 너머로 차분하게 가라앉은, 바둑돌처럼 무겁게 반짝이는 검은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 이야기를 시작합시다. 저에게서 무슨 이야기가 듣고 싶으신건가요?”

 

나는 말을 망설였다. 지금 내가 하려는 이야기는, 어찌보면 당사자에게 있어서는 아픈 과거를 자극하는 것이 될 수도 있었다. 더 이상 돌아갈 수 없는 자신의 길, 빛나는 로얄로드를 곁에서 바라봐야만 하는 그의 마음을 자극하는 것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라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죄송합니다. 마음 속으로 거듭 사과하며 나는 이야기를 꺼냈다.

 

“예전에는 대단한 선수셨다고 들었어요.”

“어떻게 알았어요? 이 나라는 노모 씨를 제외하면 메이저에 별로 관심이 없었을 텐데.”

“저, 그게……아는 사람이 당신의 광팬이라서요.”

“아는 사람이라……아아, 그렇군. 그쪽의 완장을 차고 있던 학생이었네요.”

 

처음에는 놀란 듯한 그였지만, 내 말을 듣고는 잠시 생각에 빠지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계셨나요?”

“당연히 기억합니다. 9년 전……인가요? 세계 선수권 대회 결승전에서 잠깐 이야기를 나눈 기억이 있어요. 앞날이 밝은 학생이었는데……실력이 많이 좋아졌더군요.”

 

“뭐, 아무튼. 그 학생이야 그렇다 치고.” 가볍게 웃으면서 그는 자신의 앞에 놓인 자그마한 잔을 들었다.

 

“그 학생이 있었다는 말은……제 선수 생활에 대해서 대강은 들어서 알고 계시겠군요. 어떻게 끝이 났는지에 대해서도.”

“그, 그……실례되는 주제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만…….”

“아, 괜찮아요. 이미 지나간 일이니까요. 뭐, 털어낸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언제까지 붙잡고만 있을만한 일도 아니고.”

 

뜻밖의 반응이었다. 눈을 꿈벅이는 내 앞에서, 태연하게 말하며 자그마한 잔을 다시 앞에 내려놓은 그는 자세를 구부정하게 낮추어 나와 비슷한 높이로 눈높이를 낮추었다.

 

“그럼, 지금 닛타 양의 눈에 비치는 저는 어떤 사람으로 보이시나요?”

“제가 생각하는……말인가요?”

“네. 가감 없이, 머리에 떠오르는 그대로 말해주세요.”

 

나는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단정한 옷차림, 뿔테 안경, 마치 닭의 벼슬처럼 위로 뻗어 올라간 짧은 머리카락……그리고, 자신감. 바람 가는 대로, 거침없이 다음 걸음을 내디디는 자신감이 느껴졌다. 자신의 이정표를 잃어버린 사람이라고는 도무지 생각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제가 생각했던 모습과는, 조금 많이 다르세요.”

“어떤 부분이요?”

”선수 시절 이야기를 꺼냈을 때, 분명히 언짢아하시거나, 불편해하실 거라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생각보다 너무 태연하셔서…….”

“……뭐, 반은 맞는 말이에요. 방금 말씀드렸다시피, 아직 저는 완전하게 그걸 잊어버린 게 아니에요. 매번 생각할 때마다 불편하죠. 미련도 잔뜩 남아있고. 하지만 말입니다.”

 

다시 자세를 곧게 펴고 그는 나를 바라보았다.

 

“저는 아직 젊잖아요? 내가 얼마나 걸어왔는가를 돌아보기에는 앞으로 가야 할 길이 너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중요한 건 내가 걸어온 길이 아니에요. 앞으로 걸어가야 할 길이죠. 어떤 길을 걸어갈 것인가, 어디를 보고 걸어갈 것인가.”

“아…….”

“한때는 저도 망연자실하게 뒤를 돌아보고만 있었습니다. 저 길이 더 이상 나의 길이 아니라는 것을 납득하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했어요. 하지만, 어떻게든 되더군요.”

 

거기까지 말하고 그는 말을 멈추었다. 잠시 대화가 멈춘 틈을 타, 우리는 각자의 앞에 놓인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딱 먹기 좋을 정도로 적당히 식은 커피가 건조해진 목을 축였다.

 

“조금 전의 질문에서 닛타 양이 제게 무슨 이야기를 듣고 싶으셨던 것인지 어렴풋이 예상은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은퇴하고 난 뒤 어떻게 다시 일어설 수 있었는가. 그게 궁금하셨겠죠?

“……예, 예리하시네요…….”

“투수의 기본 소양이죠. 눈치.”

 

자신의 관자놀이를 두드리면서 가볍게 웃은 그는 자신의 안경을 한번 고쳐 썼다.

 

“죄송하지만,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못 해드릴 것 같습니다. 직접적으로 물어보셨더라도 저는 같은 대답을 드렸을거예요. 지금의 당신은 이 대답을 듣기에는 너무 이르니까요.“

“어리다는 말씀인가요?”

“네. 조금 과격하게 말하면, 당신 같은 아이는 몰라도 되는 이야기입니다.”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하는 그를 바라보며 나는 테이블 아래로 내려놓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내 속을 읽고 있던 것인지, 그가 한 걸음 먼저 선수를 쳤다.

 

“오해하지 마세요. 당신을 무시하려는 게 아닙니다. 당신은 아직 출발선도 통과하지 않은 사람이에요. 어디를 보고 달려야 할지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기에, 저는 지금 이 자리에서 경솔하게 실패를 이야기할 수는 없습니다. 자칫하면 도전을 해야 하는 사람이, 도전이라는 것에 두려움을 갖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아…….”

 

그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나는 내 생각이 짧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역시 사람의 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한다는 것이구나. 내 기세가 누그러진 것을 눈치챈 것인지, 그의 입술이 부드러운 호를 그렸다.

 

“그 이야기는……그래요. 다음에, 언젠가 닛타 양이 벽에 부딪혔을 때, 장애물을 만났을 때 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래봬도 반면교사 역할엔 아주 자신이 있는 몸이거든요.”

“죄, 죄송합니다. 제 생각이 짧았어요. 저는 제가 어리다고 무시하시는 것인가 싶어서…….”

“하하, 그럴리가요. 저도 개인적으로 닛타 양에게 꽤 관심이 있었거든요. 이 약속을 받아들인 것도 그 일환이었고 말이죠.”

 

관심이 있었다니?

그의 말에 나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깍지를 낀 두 손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감독님께 들은 이야깁니다만……닛타 양은 자신의 진로를 찾아서 이것저것 많이 시도하고 계신다면서요?”

“네. 대학교에 진학한 것도, 저에게 맞는 게 무엇인지를 알고 싶어서였거든요. 어쩌다 보니까 자격증 따는 것도 취미가 되어 버렸고요.”

“와, 그럼 혹시 세미나 같은 것도 막 가고 그래요? 영화처럼?”

“아, 아뇨! 그렇게 적극적으로 나서는 건 아니지만요, 그래도 세미나 같은 데는 꾸준히……”

“굉장하네요. 저는 대학교란 델 가 본 적이 없어서 닛타 양이 말하는 게 무척이나 신기하게 들려요.”

 

거기서 P씨는 표정을 바꾸었다. 가벼운 웃음기를 지우고, 진지한 표정이 되어 나를 바라보았다.

 

”여기서, 그런 당신에게 저는 제안을 하나 하고 싶습니다.”

“제안……이요?”

 

그는 자신의 품속에서 작은 종이 하나를 꺼내 나에게 내밀었다. 그것은 다름아닌 자그마한 명함이었다.

 

“아이돌에 관심은 없으십니까?”

“네?”

 

나를 향해 쭉 내민 손을 거두지 않고, 그는 내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의 눈빛에 이끌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나도 모르게 손을 내밀어 그의 명함을 받아 들었다.

 

CG프로덕션, 신데렐라 걸즈 총괄 프로듀서.

 

“저는 사람들을 찾고 있어요. 자신의 길을 찾지 못하고 방랑하는 사람. 자신의 손에 들린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무작정 앞사람을 따라 걷기만 하는 사람, 그리고, 한 번 넘어져, 좀처럼 다시 일어설 줄 모르는 사람. 그들 중에서는, 빛나는 별을 품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빛나는 별……인가요?”

“그래요. 사람들에게 웃음과 희망을 주는 별. 저는, 당신을 처음 본 순간부터 당신에게 그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순간, 끼릭, 하는 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왔다. 아니, 들려온 것이 아니라 들려왔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내가 서 있는 수많은 길이 교차되어 있는 교차로에 세워진, 좀처럼 방향을 잡지 못하고 핑글핑글 돌기만 하던 이정표가 마침내 천천히, 그 회전속도를 줄여가는 소리였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두려워하고 있었다. 정말로 이 길을 가면 되는 것인가, 이 길이 나의 길이 맞기는 한 것인가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P씨는, ‘모라토리엄 증후군’이라는 단어를 알고 계신가요?”

 

그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사실 계속 무서웠어요. 비록 지금은 길을 찾는다는 핑계로 이것저것 하고는 있지만, 결국에는 내가 가야 할 길을 잃어버린 채 언제까지고 이렇게 이것저것 손만 뻗다가 끝나 버리는 건 아닐까, 하고 말이에요. 그래서 지금도 망설여져요. 내가 이 길을 가도 되는 것인가……하고요.”

 

그의 명함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이제는 완전히 식어버린 머그잔을 움켜쥐고 있자니 맞은편에서 크흠, 하는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자, 그는 쓰고 있던 안경을 검지로 한번 쓰윽 밀어 올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금이라고 모두 반짝이는 것은 아니고, 방랑자라고 해서 모두 다 길을 잃은 사람은 아니다.”

 

그는 테이블에 올린 팔에 몸을 기대듯이, 나를 향해서 약간 자세를 기울였다.

 

“제가 즐겨 읽는 책에 나오는 구절이죠. 닛타 양은 지금 뭔가를 오해하고 있어요. 당신은 길을 잃은 게 아닙니다. 자신의 길을 찾고 있을 뿐이에요. 자신의 앞에 펼쳐진 수많은 갈림길 앞에서 그저 쉬이 손을 뻗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저는 그 기분을 알아요. 무수하게 갈라진 갈림길에서, 그 갈림길만큼이나 갈래갈래 갈라진 이정표는 그 자체만으로도 사람을 주눅들게 하기 마련이죠.”

 

그는 내가 테이블 위에 올려둔 명함을 다시 집어 나를 향해 내밀었다. 특수한 잉크로 적혀 있는 것인지 명함의 문구가 카페의 불빛을 받아 반짝였다.

 

Cinderella.

 

“흔히들 신데렐라를 무도회장으로 데려다 준 것은 마법사의 덕이라고들 생각하죠. 하지만 그건 절반만 맞는 이야기입니다. 마법사의 손을 잡은 것이 그녀 스스로의 선택임을, 그 길이 그녀가 선택한 길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요. 당신은 어떻습니까?”

 

그는 명함을 쥐고 있던 오른손을 내게 내밀었다. 악수를 하듯 손바닥을 옆으로 내민 것이 아니라, 손바닥을 위로 한 채, 마치 에스코트를 하는 것처럼 내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마법사는 신데렐레에게 옷을 주고, 마차를 주고, 유리구두를 주었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그것을 입기로 선택한 것은 신데렐라 본인의 선택이었으니까.

명함을 받아 들고 나는 눈 앞의 사람과 명함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 명함의 주인은 한 때는 누구보다도 빛나는 길을 걸었지만 이제는 그 누구도 알아보지 못하는 음지에서 서는 것을 선택한 사람이었다. 비록 자의는 아니었지만, 눈부시게 빛나는 로얄로드를 등지고, 험난한 길을 택한 사람이었다.

‘이제부터 인생을 살면서 이처럼 멋진 길잡이를 만날 일이 얼마나 있을까?’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명함에서 반짝이는 글자들이 조금은 다른 모습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방랑자에게 방향을 인도하는 북극성의 반짝임이 떠오르는, 그런 종류의 반짝임이었다.

그래, 더 이상은 망설이지 말자. 그렇게 결심하자 단번에 머리가 상쾌해졌다. 나는 나를 향해 내민 그의 손에 조심스레 손을 얹었다.

 

“좋아요. 한번 따라가볼게요. 기왕 길을 선택한다면 길잡이가 있는 쪽이 더 좋을 테니까요.”

 

그러자 그는 지금까지 본 것 중에서 가장 밝은 미소를 지으며 내 손을 가볍게 감싸 쥐었다. 전직이 전직이었던 탓일까, 샐러리맨 치고는 거친 촉감이 느껴지는 손의 촉감을 느끼면서, 나는 그를 따라 가볍게 웃었다.

 

“좋아요. 좋은 미소입니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월요일부터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닛타 양.” 

 

'월요일부터'라는 말에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역시 프로야. 챙길 건 확실하게 챙기는구나.

 

 

 < END >


 

 

안녕하세요, 낮에는 뭘 하는지 매번 새벽에만 글을 올리는 작가입니다.

아시는 분은 다 아셨을 테지만, 이번 주제는 P와 미나미의 첫만남입니다.

 

미나미는 사실 매사에 진지한 아이입니다만, 매사에 너무 진지한 나머지 진짜 자신의 마음을 깨닫지 못하는 구석이 있다고 생각해요. 물론 이후 나오는 카드들. 아니, 노멀카드 특훈만 시켜줘도 얘가 아이돌이 자기 적성이라는 걸 알았는지 바로 말이 바뀌긴 합니다만. 어쨌든 초기의 이러한 모습은 이 아이를 어둡게 해석하자면 얼마든지 어두운 해석이 가능하다고 여기는 이유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그쪽을 한번 주제로 삼아봤습니다.

만약 이 글을 읽으면서, 수많은 갈림길이 시작되는 교차로에 서서 망연자실하게 주위를 둘러보는 미나미의 모습이 떠오르셨다면, 제 의도가 어느정도 전달 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금이라고 해서 모두 반짝이는 것은 아니며 방랑자라 하여 모두가 길 잃은 사람은 아니다."

어디서 들어 본 것 같다고 생각하시는 분도 계실겁니다. 네, 저거 반지의 제왕에서 빌보가 아라곤(아라고른 2세)한테 불러 준 시의 두 소절이에요. 개인적으로는 이 주제에 상당히 어울리는 시구라 생각합니다만, 읽어주시는 분들의 생각은 또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살짝 언급되고 넘어간, 거의 사기 캐릭터를 넘어 치트에 가까운 P의 선수시절에 대해서도 한번쯤 더 자세하게 다룰 예정입니다. 뭐가 중요하기에 계속 다루느냐고 생각하실 수도 있지만, 이 시리즈의 '프로듀서'라는 캐릭터의 근간에는 '왕년에는 정말 잘 나갔던 사람'이라는 기반이 있거든요. 프로의 무대를 먼저 밟아 보았고, 누릴 수 있는 모든 영광을 누려 보았고, 가장 씁쓸한 퇴장을 겪어 보기도 한, 아이돌들에게는 그야말로 인생의 선배 격의 인물입니다.

그런 P의 인생도 돌이켜보면 참 기구하죠. 저런 어마어마한 스탯을 찍으면서 리그를 폭격하고 있었는데 하필 공 하나를 잘못 맞는 바람에 그대로 선수생활이 물 건너 갔으니....... 뭐 어쩌겠습니까, 주인공이니까 굴러야지.

아, 그리고 전편에서 언급된 그의 성장과정은 꽤나 막장이었는데, 그런 가정에서 자란 것 치곤 가치관이 너무 올바르게 박힌 게 아닌가 싶으실겁니다. 그 부분은 다다음 이야기나 다음다음다음 이야기 즈음에서 그 내용을 밝힐 계획이에요.

키워드를 말씀드리자면, '죽었다 살아났다'입니다.

 

그럼 다음 이야기에서 뵙겠습니다.

다음 히로인은 누가 될까.....

 

 

P.S.  ??? : 와 연기실력 10오지는각 1따봉드립니다.

P.S. 2  개인적으로 P와 달리기하다가 지쳐서 헥헥거리는 아카네를 보고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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