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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스널리티P 시리즈] 방랑자라고 다 길 잃은 것은 아니다(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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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12-06, 2016 03:52에 작성됨.

타카가키 카에데 <밤 바다의 이정표>

사기사와 후미카 <First Step>

P <인내의 삶> 

<신데렐라 걸스> 

센카와 치히로 <함께 걷는 길> 

<'어제'가 '오늘'과 함께 할 '내일'에게> 에서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가을 치고는 따뜻한 햇볕이 내리쬐는 대학교의 교정을, 양 손으로 커다란 깃발을 든 여성이 가로지르고 있었다. 선선한 가을 바람에 어깨 아래로 길게 늘어뜨린 아마색 머리카락을 찰랑이며 그녀는 운동장 한 켠에 세워진 자그마한 건물로 향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간 그녀가 향한 곳은 ‘휴게실’이라고 적혀 있는 문이었다.

문 앞에 서서, 몇 번인가 노크를 하던 그녀는 대답이 없자 고개를 갸웃거리며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이거 감독님께서……아아, 선배!!”

“우왓?!”

 

부실 내부를 가득 채우는 날카로운 고함소리에, 책상 위에 앉아 정신없이 TV를 보고 있던 체육복 차림의 남자가 화들짝 놀라며 올라타고 있던 책상에서 내려왔다. 막 문을 열고 들어온 여성은 야구용품이나 스포츠 잡지, 체육복 등이 사방에 비산해 있는 방 안을 돌아보며 두 눈에 쌍심지를 켰다.

 

“아우, 깜짝 놀랐네.”

“부실이 이게 뭐에요!?”

“미안해, 이것만 보고 금방 치울게.”

 

”아, 그게 감독님이 말씀하신거구나. 이리 줘.” 라고 말하며 여성의 손에서 깃발을 받아든 그는 휘익, 하고 가볍게 휘파람을 불었다.

 

“이거 꽤 무겁네? 들고오느라 힘들었겠다.”

“그런가요? 그럭저럭 들만 하던걸요.”

”하하, 역시 라크로스가 취미인 사람은 뭔가 다른걸. 고생했는데 뭐 마실 거라도 줄까?”

“마음만 받을게요. 저 바로 수업이 있어서요. 아, 그리고 이거, 감독님이 대신 전해달라고 하셔서요.”

“어디보자……연습경기? 헤에, 2주 뒤네?”

 

그녀가 내민 쪽지를 받은 그가 읽는 사이, 그녀는 슬쩍 고개를 돌려 일시정지 상태로 멈춰 있는 TV의 화면을 바라보았다.

 

“또 그 비디오 보고 계세요?”

“야야, 이 경기가 아주 끝내준단 말이야 그러니까…….”

“알아요. 실책이 13개, 9점이나 내주고도 결국 선발이 자기 완투로 끝낸 경기잖아요? 투수 자책점은 0점이고.”

“……잘 아네?”

“제가 저걸 몇 번이나 봤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슬슬 질릴 때도 됐다고 생각하는데요.”

“그게 참, 별 수 없단 말이지……내 우상이거든!”

 

캐비닛에 걸어 둔 자신의 유니폼을 가리키며 말하는 그의 말에 그녀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의 유니폼에 적혀 있는 것은 영상 속의 남자와 똑같은 31번이라는 숫자였다. 조금 더 살펴보면, 방 안 여기저기에는 잡지의 표지를 잘라 붙인 것이나, 사진을 인쇄한 것이 붙어 있었다. 물론 그 속의 주인공 또한 비디오 속의 선수와 같은 유니폼을 입고, 같은 등번호를 달고 있었다.

 

“은퇴한 지 벌써 7년이나 지난 사람인데 그렇게 좋아요?”

“하하하, 뭘 모르는구나? 저 사람이 진짜 대단한 건, 7년이나 지나서도 저렇게 선명하게 자신의 자취가 남아 있다는 거야. 그래서 전설이라는 거고.”

 

”나도 저렇게 되고 싶어. 아니, 저렇게 될 거야.”라고 가슴을 두드리면서 당당하게 말하는 그를 바라보던 그녀는 풋, 하고 작게 웃었다. 그녀의 눈 앞에서, 마치 어린아이처럼 자랑스럽게 무용담을 늘어놓는 남자야말로 본선에는 발도 붙이지 못하던 자신의 학교를 거의 혼자서 이끌다시피 하며 결국에는 지역연맹 우승, 전국대회에서 3위라는 뛰어난 성적을 거두게 한, 대학야구 최강의 에이스라고 불리는 선수였기 때문이다.

 

“정말……아무튼, 부실 꼭 치우셔야 해요?”

“알았어. 매번 고맙다, 닛타.”

“별 말씀을요. 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닛타’라고 불린 여성은 꾸벅, 인사를 하고는 부실을 나갔다. 그녀가 나간 자리를 한동안 바라보던 남자는 훗, 하고 작게 웃으며 그녀가 가져 온 깃발을 바라보았다.

 

“연습경기라……대회 끝나고 쉴 만큼 쉬었으니, 슬슬 한번 움직일 때가 됐나.”

 

3이라는 숫자와 함께 한자 三이 적혀 있는 깃발을 TV가 올라선 선반의 옆에 세워두고, 그는 고개를 돌려 반쯤 열려 있는 자신의 캐비닛을 바라보았다. 부실의 문이 닫히면서 일으킨 바람에 끼익, 하고 캐비닛의 문이 조금 더 열렸다. 문의 안쪽, 캐비닛을 열지 않으면 볼 수 없는 장소에는 유니폼 차림의 남자와 함께 다소 독특한 모양새의 글러브를 들고 있는 남자아이의 사진이 테이프로 붙어 있었다. 이제는 약간 빛이 바래려고 하는 그 사진의 아래쪽에는 유성매직으로 짧은 문구가 적혀 있었다.

 

[2006년 세계 유소년 야구대회에서, W.Johnson과 함께.]

 

 

 


 

 

 

11월의 첫 번째 월요일, 사무실에는 분주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단 한 사람만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센카와 씨, 저 외근이 있어서 그런데 이거 좀 대신 전달해주실래요?”

“네, 어떤 건가요?”

 

마치 치히로의 대답을 기다렸다는 듯, 그녀의 책상 위로 위로 쿵, 쿵, 쿵, 하는 소리를 내며 종이뭉치들이 하나 둘씩 올라타기 시작했다.

 

“……헤?”

“이건 인사팀, 요건 총무팀, 그리고 요거는 사장실에 올릴 보고서, 그리고 이거는 트레이닝 파트…….”

“자, 잠깐, 잠깐만요! 프로듀서 씨!”

“왜요?”

“너무 많으니까, 조금만 살살 해주세요…….”

“으으, 지금 바로 나가야되는데……그럼 쪽지 남겨두고 갈게요. 결재도 해놨고 그쪽에 미리 연락도 해 뒀으니까, 적어놓은 곳에다 갖다 주면 그 다음엔 거기서 알아서 할 거에요.”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프로듀서는 자신의 품 속에서 꺼낸 수첩에 무언가를 적어 넣고는 그것을 북북 찢어다가 서류뭉치의 위에 착착 얹어두었다.

 

“자, 그럼 저는 나가보겠습니다! 회의시간 전까진 돌아올 테니까 걱정 마시구요!”

 

뭐라 말을 꺼낼 틈도 없이, 서둘러 자신의 외투와 가방을 챙겨 사무실을 뛰쳐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치히로는 자신의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서류들을 바라보았다.

11월이 되자, 프로듀서는 마치 잔뜩 쌓아놓았던 마일리지를 한 번에 터뜨리듯 의욕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프로듀서 혼자만 날뛰는 것이라면 다행이겠지만, 사무실의 유일한 사무원인 센카와 치히로 또한 고삐 풀린 말처럼 미쳐 날뛰기 시작하는 프로듀서를 따라가느라 매일매일 진땀을 빼고 있었다. 그 정도란 것이 보다 못한 미즈키와 카에데가 자신들의 일정이 비는 시간에는 자진해서 일을 도와줄 정도였으니.

 

“으아아……인사팀에 총무팀에 사장실에 미디어제작부에…...아직도 처리할 서류가 산더미인데……!”

 

프로듀서가 쌓아 놓고 간 무더기들을 살펴보던 치히로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세상에 이걸 다 언제 해 놓은 거지……? 분명 저 사람은 저랑 다른 시간축에서 살고 있는 게 틀림없어…….”

“고난이네요. 힘 내세요?”

“그렇게 강 건너 불구경 하듯 말하지 말아주세요…….”

“나랑 카에데도 도와줄 테니까 너무 처져 있지 마.”

“으으~감사합니다…….”

 

소파에 앉아 있던 카에데와 미즈키는 자리에서 일어나 치히로를 향해 다가왔다. ‘총무팀’, ‘인사팀’. ‘미디어제작실’ 등, 자그마한 쪽지로 행선지가 적혀 있는 서류들을 뒤적이던 두 사람은 혀를 내두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와, 이거 진짜 장난 아니네. 우리랑 맨날 놀고먹기만 하는 줄 알았는데.”

“그렇죠? 미즈키 씨도 그렇게 생각하죠? 사람이 아니에요, 사람이…….”

 

두드리던 키보드에서 손을 떼고, 치히로는 책상 위에 푹 엎드렸다.

 

“으으……죄책감이 무거워……왠지 나만 놀고 쉬었던 것 같아요…….”

 

“옳지, 옳지”라고 말하며 치히로의 머리를 쓰다듬는 미즈키의 옆에서 카에데는 고개를 돌려 이제는 11월로 갱신된 스케줄 보드를 바라보았다. ‘다음 달의 계획’자리에 있던 모든 것이 이제는 코앞으로 한 걸음씩 다가오고 있었다.

 

“아, 슬슬 레슨 가야겠네. 이거, 우리가 내려가는 길에 갖다주고 갈게. 인사팀은 뭐 조금만 돌아가면 되니까.”

“그럼 저는 이 트레이닝 파트로 해야겠군요.”

“감사합니다…….”

 

서류를 챙긴 두 사람은 치히로에게 손을 흔들며 사무실을 나갔다. 한결 줄어든 자신의 짐을 바라보던 치히로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다시 키보드 위로 손을 가져갔다.

 

 

오후의 마지막 일과를 마치고, 추가레슨이 남아 있던 미즈키와 카에데를 제외한 아이돌 부서의 모든 사람들은 집으로 가는 대신, 본관의 대회의실로 향했다. 회의에 들어가기 전, 프로듀서가 그들에게 중요한 이야기가 있다고 하며 집에 가지 말고 모여달라는 부탁을 했기 때문이다.

 

“치히로 씨, 혹시 프로듀서한테 뭔가 이야기라도 들었어요?”

“으응, 글쎄요……저도 딱히 들은 건 없어서……그냥, 여러분들 일과 끝나거든 여기로 모아 달라고만 들었거든요.”

 

린의 질문에 치히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이돌 부서의 인원이 워낙 작기 때문에, 지금까지는 별관의 회의실로도 미팅이나 브리핑을 진행하는데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우리 다섯 명에다가, 카에데 씨, 미즈키 씨, 트레이너 네 사람. 합쳐도 별관 회의실이면 충분했잖아?”

“그렇죠. 그런데 프로듀서 씨가 대회의실을 고집하셨다는건, 분명히 뭔가 생각이 있으시기 때문일거에요. 일단 기다려보죠.”

 

그 때, 회의실의 두터운 방음문을 열고 카에데와 미즈키, 그리고 트레이너 네 사람이 함께 들어왔다.

 

“아앗, 지각! ……은 아니구나”

 

치히로는 자신의 옆에 앉으며 한숨을 내쉬는 미즈키와 카에데를 바라보았다.

 

“수고하셨어요, 두 분 모두.”

“아휴, 이거 죽겠다. 내일 근육통 장난 아닐 것 같아…….”

“프로듀서는 아직 안 왔나요?”

“네. 조금 전에 메시지 온 게 마지막이었어요. 금방 간다는 메시지였는데……잠시만요?”

 

그 때, 치히로의 휴대전화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휴대전화의 액정에 떠오른 것은 프로듀서의 번호였다.

 

“여보세요? 프로듀서 씨? 네, 치히로예요.”

 

그녀가 통화를 시작하기가 무섭게, 제각각 이야기를 나누던 회의실의 분위기가 삽시간에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아……지금 도착하셨다구요? 네. 저희는 지금 트레이너 분들까지 다 모여 있어요. 네. 주위가 조금 소란스러운데,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라디오 소리라구요? 아아, 그렇구나. 알겠습니다. 네.”

 

휴대전화를 닫고, 치히로는 자신을 바라보는 일행들을 돌아보았다.

 

“이제 주차장에 도착하셨대요. 금방 올라온다고 하셨으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프로듀서가 도착한 것은 그 전화를 마지막으로 5분 정도가 지난 시각이었다. 이미 해가 저문 바깥에는 꽤나 쌀쌀한 바람이 불고 있었지만, 뛰어다니기라도 한 모양인지 땀을 뻘뻘 흘리던 프로듀서는 코트는 물론, 정장 재킷까지 벗어서 팔에 걸치고 있었다.

 

“이거 늦어서 죄송합니다. 많이 기다렸죠?

“5분 늦었어요, 프로듀서.”

“아하하……출입증 뽑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걸려가지고요. 죄송합니다.”

 

팔에 걸치고 있던 코트를 단상 위에 올려두고, 단상 앞에 서서 프로듀서는 단상 쪽 자리에 앉아 있는 일행들을 바라보았다.

 

“오늘 여러분들을 이렇게 모이라고 한 것은, 여러분들께 소개해주고 싶은 사람들이 있어서입니다.”

“사람들? 손님이야?”

 

프로듀서는 대답 대신 미소를 지으며 다시 단상에서 내려왔다. 그런 그의 모습에 마유와 후미카, 그리고 트라이어드 프리무스의 세 사람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지만, 서류작업을 거들면서 약간이지만 그 내용을 알고 있던 카에데와 미즈키, 그리고 그 서류를 작성한 당사자인 치히로는 ‘소개’라고 하는 부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대강 예측하고 있었다.

어느 정도 호흡이 가라앉은 것인지, 단상에서 내려온 그는 다시 자신이 들어온 회의실의 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어 밖을 바라보았다.

 

“자, 들어오세요.”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프로듀서는 회의실의 방음문이 닫히지 않도록 노루발을 내려 문을 고정했다. 그 뒤로, 제각각 사복을 입고 있는 소녀들이 우르르 들어오기 시작했다.

방 안으로 들어온 소녀들은 프로듀서의 인솔을 받아 회의실의 단상 쪽으로 향했다. 잔뜩 경직된 표정을 짓고 있던 그들이었지만, 회의실 안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한 번씩 살펴보곤 곧바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막 들어온 사람들 중, 이미 몇몇은 구면이었던 사람들도 있었기에 아이돌 부서의 사람들 또한 눈을 동그랗게 뜨기는 마찬가지였다.

미리 언질을 받은 것인지, 아니면 그저 낯을 가리는 것인지, 회의실 안으로 들어온 그들은 꼼지락대며 서로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고개를 내밀어 누가 남은 사람은 없는지 확인한 뒤, 프로듀서는 노루발을 올리고 다시 회의실의 문을 닫았다. 그리고는 단상에 늘어선 일곱 명의 소녀들의 곁에 서서,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소개할게요. 이제부터 여러분들과 함께하게 될, 신데렐라 걸스의 새 얼굴들입니다. 여러분, 선배이자 동료 분들에게 인사!”

“”안녕하세요!!””

 

고개를 숙이며 힘차게 인사를 한 뒤, 그녀들 중 가장 왼쪽에 서 있던 아이부터 자기 소개를 하기 시작했다. 마치 고양이의 털처럼 푹신한 느낌을 주는 웨이브가 들어간, 다갈색 머리카락의 소녀가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시마무라 우즈키입니다! 여기 계신 분들과는 구면이지만, 이제는 라이벌이 아닌 같은 목표를 가진 동료로써, 잘 부탁드립니다! 저, 열심히 할게요!”

 

우즈키의 옆에 서 있는, 활발한 인상을 가진 단발머리의 소녀가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혼다 미오입니다! 아이돌 같은 건 처음이지만, 활력이라면 자신 있어요! 잘 부탁드립니다!”

 

다음 차례로 나선 것은 미오와는 정 반대의 분위기를 두르고 있는 소녀였다. 후미카와도 비슷하면서도 다른 듯한 느낌의 소녀가 한 걸음 앞으로 나와 꾸벅, 인사를 했다.

 

“타카모리 아이코입니다. 팬 모두가 아름다운 기분이 될 수 있도록, 미소를 줄 수 있는 아이돌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잘 부탁드려요.”

 

아이코가 말을 마치는 것을 기다렸다는 듯, 그녀의 옆에 서 있던 자그마한 체구의 소녀가 풍성한 포니테일을 흔들며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처음 뵙겠습니다!! 히노 아카네입니다!! 생일은 8월 4일, 지금은 열일곱, 좋아하는 음식은 녹차입니다!!”

“아니, 녹차는 음료지.”

”맞아, 그랬지요! 그럼 좋아하는 음료는 녹차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를 거침없이 파고드는 프로듀서의 자로 잰 듯한 태클에 회의실에 웃음소리가 퍼졌다. 한결 가벼워진 분위기 속에서, 아카네의 옆에 서 있던, 검은 단발머리의 소녀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아, 아, 아, 안녕하세요! 코, 코, 코히나타 미호입니다! 죄, 죄송해요, 조금, 긴장이 돼서……저, 서, 선배님들처럼, 팬들께 사, 사랑받는 아이돌이 될 수 있도록 여, 열심히 하겠습니다!”

 

인사를 마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미호의 옆에서, 이번에는 다갈색 머리카락을 한 쪽으로 묶은 소녀가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돗토리에서 온 이가라시 쿄코입니다. 가사 전반이 취미이구요. 아이돌이라는 일, 잘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열심히 하겠습니다!”

 

나머지 사람들이 인사를 마친 것을 확인한 뒤, 가장 끝에 서 있던 소녀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녀의 얼굴을 알고 있던 카에데는 놀란 듯 두 눈을 조금 크게 떴다. 카에데가 고개를 돌려 프로듀서를 바라보자, 그녀의 시선을 눈치 챈 것인지 프로듀서는 그녀를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손목에 요란한 장신구를 차고, 분홍색이라는 눈에 띄는 색으로 머리를 물들인 소녀였다. 약간 움츠린 듯한 다른 아이들과는 대조적으로 그녀는 당당한 자세로 한 걸음 앞으로 나와, 방 안의 일행을 돌아보며 말했다.

 

“죠가사키 미카야★.우즈키처럼 나랑도 구면인 사람들이 있겠지만, 앞으로는 모델로서의 내가 아닌 아이돌로서의 나로 봐줬으면 좋겠어★.앞으로 잘 부탁할게!”

 

미카의 인사를 마지막으로, 옆으로 물러나 있던 프로듀서는 다시 단상으로 돌아왔다.

 

“이 일곱 명이 앞으로 여러분과 함께 할 동료이자, 후배들이 될 사람들입니다. 사실 몇 명 더 있는데 개인적인 문제로 따로 합류하기로 했어요. 최종적으로는 11월 말까지 계속해서 인원을 확충할 예정이니, 그 점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네!”

“자, 그러면 딱딱한 소개는 여기까지 하고…….”

 

잠시 말을 멈춘 프로듀서는 자신을 바라보는 일행을 돌아보았다.

 

“밥 먹으러 갑시다. 배고프죠? 오늘은 제가 쏩니다!”

 

기다렸다는 듯 터져나오는 커다란 환호성이 대회의실 안을 가득 채웠다.

 

 


 

 

 

서녘 하늘에서 번지기 시작하는 석양이 점차 그 붉음을 더해가는 시각, 텅 빈 운동장에서 두 사람이 캐치볼을 하고 있었다. 한 명은 흙먼지투성이인 유니폼을 입고 있는 젊은 청년이었고, 나머지 한 명은 서서히 이마의 경계가 후퇴하기 시작하는 중년의 남성이었다. 유니폼의 위에 코팅된 31번이라는 번호가 석양빛을 반사시키며 반짝거렸다.

 

“감독님. 갑자기 연습시합이라니, 무슨 일입니까?”

“별 의미는 없다. 너희들 실력을 보고자 함이니까.”

“전국대회 3위로는 모자란다는 뜻입니까?”

“……아니, 그런 건 아니다.”

“그럼 무슨 의미인가요……!”

 

펑! 하는 우렁찬 소리와 함께 남성의 미트에 공이 틀어박혔다. 뜬금없는 전력투구를 받고 손이 얼얼했던 모양인지, 다시 청년에게 공을 던져준 남성은 미트에서 손을 뺀 뒤, 손가락을 쥐었다 폈다 하기를 반복했다.

 

“너희는 아직 프로의 벽이 얼마나 높은지를 몰라. 대학까지 와서 이 길을 선택한 너희들이기에, 나는 너희들이 반드시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갔으면 하는 바램이 있다.”

“……그럼, 그 상대라는 사람은, 저희들에게 그 벽을 보여줄 만한 사람입니까?”

“물론. 이번의 연습경기는 분명히 너희들에게도 도움이 될 거다. 내가 장담하지.”

“……알겠습니다. 감독님의 말씀이 틀린 적은 없으니까요.”

 

다시 캐치볼을 시작되고, 남성의 입가에는 만족스러운 듯한 웃음이 걸렸다.

 

“그나저나, 이번 매니저는 어떻게 할 거냐?”

“……닛타한테 부탁했어요. 밥 두 끼 사준다고…….”

“매번 그 아이에게 신세만 지는구나.”

 

남자는 허헛, 하고 헛웃음을 터뜨렸다.

 

”매니저는 언제 뽑을 거냐? 언제까지고 그 아이한테 임시 매니저를 부탁할 수도 없는 노릇이야. 지금이야 학점을 미끼로 어떻게든 되고 있지만.”

“모집 중이에요. 언젠가는 들어오겠죠, 뭐.”

“그래, 그랬으면 좋겠다.”

 

두 사람이 입을 다물고, 다시 고요해진 운동장에는 야구공이 글러브 속으로 들어가는 팡, 팡, 하는 소리만이 이따금씩 울려 퍼졌다.

 

 


 

 

 

신규 연습생들이 들어오고, 그들의 간단한 서류수속이 끝난 그 주의 금요일.

 

시내에서 버스로 30분 정도 이동하면 나오는 교외에는 CG프로덕션이 소유하고 있는 운동장이 있었다. 어지간한 학교의 운동장에 버금가는 크기로 세워진 운동장에는 육상용 트랙은 물론 간단한 체육대회를 열 수 있을 정도의 시설이 구비되어 있었는데, 실제로 운동장은 필요하지만 자리가 마땅찮은 다른 회사에서도 종종 이곳을 대여하여 사내 체육대회를 열 정도이니 그 시설의 충실함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 운동장에 보기 드물게 아이돌 부서의 사람들. 아니, ‘신데렐라 걸스’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보기 드물게’라는 표현이 사용된 것은 정말로 그들이 이 운동장을 사용한 적이 몇 번 없었기 때문이다. 2년남짓한 시간을 보내면서 그들이 이 운동장을 사용한 것이라고는 비교적 최근의 일로, 마유와 후미카가 들어오면서 모두들 함께 러닝을 할 때나 잠깐 사용하던 것이 전부였던 것이다.

그런 그들이 이렇게 운동장에 모인 것은, 다름아닌 새로 들어온 연습생들의 체력과 운동능력을 평가하기 위해서였다. 루키 트레이너와 트레이너는 폭증한 사무업무를 어떻게든 돕기 위해 치히로의 보조를 맡았기에 지금 운동장에 있는 것은 마스터 트레이너와 베테랑 트레이너, 두 사람뿐이었다.

 

“자, 마지막 한 바퀴!”

“으에엑……나 더는 못 뛰어……!”

“하아, 하아……!”

“힘내라! 이제 거의 다 왔어!”

 

트랙 위를 달리던 아이들의 선두와 발을 맞추어 달리던 베테랑 트레이너가 하얀 금이 그어진 곳에서 발을 멈추었다.

 

“여기를 지나가면 쉬어도 좋다!”

 

도착 지점을 통과한 아이들은 하나 둘씩 트랙 옆의 잔디밭으로 걸어가 털썩 주저앉았다. 비교적 편안해 보이는 기존 아이돌 부서의 사람들과 달리, 새로 들어온 연습생들은 그야말로 초주검이 된 모습이었다.

 

“으아아, 죽겠다…….”

“……역시, 여러분들은 체력이 굉장히 좋으시네요…….”

“우리도 처음에는 다 그랬어. 열심히 트레이닝 하다 보니까 어느 샌가 체력이 는 거지. 저기 카렌만 봐도, 예전엔 이거 반도 못 뛰었어?”

 

린의 손가락이 가리킨 곳에는 정신없이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 카렌과 후미카가 있었다. 아이스박스에 들어 있는 드링크를 마시던 나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뭐, 우리도 꽤나 체력이 좋아진 건 사실이지만 말이지. 그래도, 저 괴물만큼은 아니라고 생각해?”

 

나오는 그렇게 말하며 드링크를 들고 있지 않은 손으로 조금 전, 자신들이 달리고 있던 트랙 위를 가리켰다. 그녀의 손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본 연습생 아이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죽도를 짚고 늠름하게 서서 트랙 위를 바라보고 있는 마스터 트레이너와, 트랙 위를 말 그대로 전력으로 질주하고 있는 프로듀서의 모습이 있었던 것이다.

 

“템포가 늦다! 다리에 힘 넣어!”

”전력질주 20초! 이후 100%피칭 20회!”

“좌우 반복 뛰기 30회! 이후 80%피칭 20회!”

“전력질주 30초! 이후 좌우 반복 뛰기 20회!”

 

이를 악물고, 눈썹이 휘날릴 정도로 트랙 위를 질주하던 그는 땡, 하는 소리가 들리자 잽싸게 운동장의 한 구석으로 뛰어가 글러브를 끼고, 통 안에 담긴 야구공을 집어 그물을 향해 집어 던졌다. 그의 억누른 기합소리와 함께 퍽, 퍽, 하는 둔탁한 소리가 고요한 운동장에 울려 퍼졌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그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던 그녀들의 표정이 점차 새파랗게 질리기 시작했다. 그런 그들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린과 나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저런 모양새니까 말이지.”

“굉장하네, 역시 젊음이란…….”

 

미즈키의 말을 듣고 그제서야 호흡이 정상으로 돌아온 카렌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P씨, 미즈키 씨보다 한 살 연상 아니었어요?”

“아?”

“에엑?! 미즈키 씨보다 연상이었어요?!”

 

카렌은 깜짝 놀라는 연습생들을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몰랐어? 우리 프로듀서 스물 아홉이야. 사무실 최연장자고.”

“모, 몰랐어요…….”

“마, 맞아. 그랬었지…….”

 

카렌의 말에 한 방 먹은 표정을 짓던 미즈키는 쓴웃음을 지으며 좌우 반복 뛰기를 하고 있는 프로듀서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저런 모습을 보여주니까 가끔 잊어버린단 말이야. 나보다 P군이 한 걸음 더 빠르다는 걸.”

 

잠시 후, 호루라기 소리가 운동장에 울려 퍼지고, 온 몸에 흙먼지를 뒤집어 쓴 프로듀서가 그늘에 앉아서 쉬고 있는 그들을 향해 다가왔다. 그렇게 격렬하게 움직였음에도 불구하고 놀랍게도 그는 땀을 조금 많이 흘렸을 뿐, 그다지 힘들어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프로듀서. 수고하셨어요. 드링크 드실래요?”

“감사합니다.”

 

카에데가 건넨 드링크를 한 모금 마시며 그는 카에데와 미즈키를 돌아보았다.

 

”두 분 모두, 이렇게 뛴 건 오랜만일텐데 버틸 만 해요?”

“네, 그럭저럭이요.”

“나, 나도 아직은 할만 해!”

“아하하, 그거 다행이네요.”

 

자신의 땀냄새를 의식한 탓인지 아이들에게서 약간 떨어진 곳에 서서, 프로듀서는 흘러내리는 땀을 자신의 암슬리브로 닦아내며 고개를 돌려 널브러져 있는 연습생들을 바라보았다. 그와 시선을 마주친 미호가 당황한 듯, 자세를 고쳐 앉았다.

 

“아, 저, 수, 수고하셨습니다!”

“내가 뭘. 너희들이 고생이지. 그나저나 너희는 좀 어때? 할만 해?

“아하하……오랜만이라 그런지 조금 힘드네요……양성소나 전 사무소에서 받은 훈련이랑은 전혀 다른 것 같아요.”

“뭐, 시마무라 같으면 잠깐 쉬었던 거니까 금방 익숙해지겠지.”

“에이, 이런 거 가지고 우는 소리 하면 곤란하죠. 오늘은 그냥 체력 측정하는 날인데.”

 

언제 다가온 것인지, 프로듀서의 등 뒤에 서 있던 베테랑 트레이너가 그의 질문에 대신 대답했다. 프로듀서가 고개를 돌리자, 그녀는 자신이 조금 전까지 작성하고 있던 차트를 그에게 내밀었다.

 

“한번 보실래요? 아직 몇 종목 남아있긴 하지만요.”

“감사합니다……역시, 몇몇을 빼곤 다들 비슷하네요..”

 

베테랑 트레이너가 건넨 차트를 이리저리 살펴보던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차트를 그녀에게 돌려 주었다. 그리고는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연습생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뭐, 다들 힘 내.”

““네에에…….””

 

그 미소의 의미를 파악한 것인지, 아이들은 축 늘어지는 대답을 돌려주었다.

 

 

“휴우, 남 운동 시키는게 이렇게 힘들긴 오랜만이군.”

 

한편, 약간 떨어진 곳에 앉아 프로듀서와 연습생들을 바라보던 카에데의 곁으로 마스터 트레이너가 다가왔다. 그녀는 프로듀서의 모습을 바라보더니 가볍게 혀를 내둘렀다.

 

“정말 신기하군. 저렇게 뛰고도 어떻게 하면 저리 멀쩡하게 서 있을 수가 있지?”

“암만 그렇다지만 너무 세게 굴리는 거 아니에요? 며칠 전에 쓰러졌던 사람인데.”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저게 다 본인이 해달라고 해서 하는 거라고. 나는 그저 여기에 적힌 걸 그대로 읊어줄 뿐이야.”

 

그렇게 말하며 마스터 트레이너는 카에데에게 옆구리에 끼고 있던 파일을 내밀었다. 그 내용을 읽어보던 카에데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거 정말로 본인이 요청한 거 맞아요?”

“본인이 요청 안 했으면 나도 안 시켰어. 솔직히 말하자면 단합대회 때보다 훨씬 강도가 높아. 마치 서두르는 것 같은 모양새라고나 할까. 뭐가 그렇게 급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그 때, 마스터 트레이너의 목에 걸려 있던 스톱워치에서 삑, 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프로듀서는 그 소리에 반응하여 그녀를 바라보았다..

 

“시간 됐나요?”

“……다음 루틴 시작할까?”

“네, 바로 시작하죠.”

“알았어. 세이! 애들 부탁한다!”

“네, 언니. 맡겨주세요.”

 

그녀는 드링크를 한 모금 마시고, 통을 다시 아이스박스 안으로 되돌리며 프로듀서와 함께 조금 전 자신들이 있던 곳으로 향했다.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베테랑 트레이너는 자신의 목에 걸고 있는 스톱워치를 한번 바라보았다.

 

“자, 휴식은 여기서 끝! 다음 테스트 준비하도록!”

 

저마다 이야기를 나누며 웃음꽃을 피우던 아이들의 얼굴에 일제히 그늘이 드리워지는 순간이었다.

 

 


 

 

다시 시간이 흘러, 11월의 두 번째 화요일이 되었다.

연습생 아이들은 트레이닝을, 그리고 라이브를 2주 정도 앞둔 기존 멤버들은 레슨을 하러 내려가고 프로듀서마저 외근을 나간 시각, 사무실에 혼자 남은 치히로가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만이 울려퍼지는 와중에 사무실의 문을 누군가가 두드렸다.

 

“네, 나갑니다. 잠시만요!”

“안녕하세요, 우체국에서 왔습니다.”

 

사무실의 문을 연 치히로를 맞이한 것은 우체국의 마크가 적혀 있는 작업복을 입고 있는 남자였다. 그가 입고 있는 작업복의 가슴 쪽에는 정문의 보안실에서 발급하는 임시 출입증이 걸려 있었다.

 

“혹시 여기에 P라는 분 계신가요?”

“아, 지금 출장 가셨는데요……무슨 일인가요?”

“택배 왔거든요. 괜찮으시다면, 대리수령을 부탁 드려도 될까요? 귀중품은 아니라고 들었습니다만.”

“네, 그 정도쯤이야 얼마든지요.”

“감사합니다. 그럼 여기에다가 서명을 해주세요.”

“어디……이거면 되나요?”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건 같은 분께 오신 우편물이에요. 그럼, 수고하십시오!”

“네, 수고하세요~.”

 

집배원이 돌아가고 난 다음, 치히로는 프로듀서의 이름이 적힌 우편물을 그의 책상 위로 갖다 놓고는 다시 돌아와 커다란 상자를 살펴보았다. 상자의 배송장에는 해외우표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던 탓에 수취인의 주소 부분을 제외하면 글자라고 할 만한 것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크기에 비해 가벼운데……뭐가 들어있는 거지?”

 

박스를 들고 흔들어 보기도 하고, 이리저리 살펴보기도 하던 치히로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상자를 프로듀서의 자리에 갖다 놓았다. 상자의 내용물에 대해서는 나중에 프로듀서에게 직접 물어보면 되겠다고 생각한 그녀는 곧바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업무를 시작했다.

사실 수취인의 주소 아랫부분에는 꼬불꼬불한 필기체로 수취인의 이름이 적혀 있었지만, 영어에는 그다지 조예가 깊지 못한 그녀였기에 차마 거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

 

 

약 한 시간 정도가 지나서, 외근을 마친 프로듀서가 사무실로 돌아왔다.

 

“다녀왔습니다.”

“수고하셨어요. 조금 전에 택배랑 우편물 왔거든요? 책상에 올려두었으니 확인해보세요.”

“네.”

 

자신의 자리로 향한 프로듀서는 커다란 상자를 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라, 이게 이쪽으로 왔네? 내가 기숙사 주소를 안 말해 줬던가…….”

“뭐 들어 있어요? 크기에 비해서 꽤나 가볍던데…….”

“네, 아마 그리 값나가는 물건은 아닐 거에요.”

 

그렇게 말하며 프로듀서는 커터칼로 박스의 밀봉을 뜯기 시작했다. 잠시 후, 활짝 열린 박스의 뚜껑 너머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치히로에게는 무척이나 낯선 물건이었다.

 

“유니폼이랑……글러브? 야구장비네요?”

“네. 제가 한창 야구할 때 쓰던 겁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건 왜요?

 

프로듀서는 박스 안에서 글러브를 꺼내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글러브에 새겨진 31이라는 숫자가 형광등의 불빛을 받아 주황빛으로 번쩍거렸다.

 

“이번 주말에 연습경기를 하거든요. 그런데 상대방에서 꼭 제대로 된 유니폼을 입고 와 달라고 하는 바람에 말이죠.”

“아하하……번거롭게 됐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왼손과 오른손으로 한번씩 번갈아가며 글러브를 착용해 본 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글러브와 유니폼을 다시 박스 안으로 대충 던져 넣었다.

 

“저 잠깐 주차장좀 다녀올게요. 이거 좀 실어놔야겠어요.”

“네, 다녀오세요.”

 

프로듀서가 나간 뒤, 가만히 사무실의 문을 바라보던 치히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저 유니폼, 어디서 몇 번 본 것 같은데……? 고시엔에서 봤나……?’

 

 


 

 

11월의 두 번째 주말, 도쿄 도내에 위치한 T대학의 야구장.

 

 

“으음, 늦네. 벌써 10분이나 지났어.”

“연습시합이라더니, 겁먹고 짼 거 아닐까?”

“에이, 감독님이 직접 고른 상대랬잖아.”

“이 전.국.대.회. 3.위.팀이 빠따 맛 좀 보여줄까! 막 이래.” 

“야, 누가 들으면 3등이 뭔 벼슬인줄 알겠다.”

 

자신의 옆에서 동료들이 잡담을 나누거나 말거나, 덕아웃에 앉아 유니폼을 입은 청년은 팔짱을 낀 채, 조용히 그라운드를 쏘아보고 있었다. 그 때, 외야 쪽에서 자신들이 앉아 있는 홈플레이트를 향해 걸어오는 두 사람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 저기 감독님 아냐? 옆에는 누구지?”

“연습시합 상대인가보네. 투수라고 하더니, 혼자서 왔나보다.”

 

한 사람은 수년간 봐온 사람이었기에 멀리서 보더라도 한 눈에 알 수 있을 정도로 낯이 익은 그들의 감독이었지만, 감독의 옆에 서 있는 사람. 감독보다 적어도 머리 두 개는 더 커 보이는 남자는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청년은 그가 낯설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낯익은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잠시 후, 감독과 함께 나타난 그 남자가 홈플레이트를 지나 덕아웃 바로 앞까지 도착했을 때, 그의 모습을 확인한 청년은 소스라지게 놀라는 한편, 어째서 자신이 그에게서 낯익은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았는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가 쓰고 있는 모자에 새겨진 N과 Y가 겹쳐진 듯한 로고와, METS라는 글자가 새겨진 블루 스트라이프 유니폼. 그리고 그의 가슴에 새겨진 감청색 번호와 그의 손에 들린 특이한 디자인의 글러브.

그 네 가지 모두가 청년의 뇌리에 깊숙하게 새겨져 있는 물건들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도 눈 앞의 저 사람이 가짜가 아닐 때, 누군가의 흉내를 내는 것이 아닐 때의 말이지만, 청년은 직감하고 있었다. 눈 앞의 남자가 진짜라는 것을.

 

“정말 미안합니다. 오는 길에 차가 좀 막혀가지고……많이 기다렸죠?”

 

정말로 미안하다는 듯, 뒷머리를 긁적이며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남자를 바라보던 청년의 가슴의 고동이 점차 그 피치를 올리기 시작했다.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오늘 연습경기의 상대를 맡게 된 P입니다. 잘 부탁해요.”

 

메이저리그를 꿈꾸는 투수라면, 그리고 약물의 시대로 얼룩진 메이저리그의 흑역사를 아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나 동경해 마지않는 뉴욕의 전설이, 자신의 눈 앞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방랑자라고 다 길 잃은 것은 아니다(下)> 로 계속됩니다.


 

이번엔 누구의 이야기일까요?

아 정말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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