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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스널리티 P 시리즈] '어제'가 '오늘'과 함께 할 '내일'에게 (4-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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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11-28, 2016 04:13에 작성됨.

 '어제'가 '오늘'과 함께 할 '내일'에게(3) 에서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같은 날, 11시 40분 경.

 

“좋아, 오늘 연습은 여기까지! 다들 식사 맛있게 하도록!”

“수고하셨습니다!”

 

오전 연습이 끝나고, 탈의실로 돌아온 아이들은 곧바로 자신들의 도시락을 챙겨 식사를 하러 나갔다. 물론 성인이 아닌 아이돌이라도 엄연한 회사의 직원이기에 사내 식당을 사용할 수 있었지만, 회사의 규모가 규모이다 보니 상대적으로 연령대가 낮은 아이들이 사용하기에는 부담스러운 장소이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이들에게는 그들의 뒷바라지를 해 주는 부모님이 있었으니, 부모님의 정성이 들어간 도시락을 두고 굳이 식당을 이용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좋겠다, 나도 부모님이랑 살았으면 도시락 싸 줬을까?”

“지금보다 두 시간은 일찍 일어나서 직접 싸야 될걸요?”

“역시 그렇겠지?”

”자, 치히로 씨가 기다리겠어요. 얼른 가죠.”

 

아이들이 먼저 자리를 떠나고, 남아 있던 미즈키와 카에데는 식당이 문을 여는 시간에 맞춰 곧바로 식당으로 향했다. 아무래도 타이밍을 제대로 맞춘 듯, 그들은 막 식당으로 들어오던 치히로와 만날 수 있었다.

 

“치히로 씨 혼자 뿐이에요? 프로듀서는요?”

“휴게실에 계세요. 좀처럼 배가 안 고프다고 하셔서…….”

“오늘 메뉴 스파게티던데? P군 면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사람 아니었어?”

 

신기하다는 듯 말하는 미즈키의 말에 카에데는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프로듀서는 아무리 일단 면이 들어가기만 하면, 설령 그것이 딸기 파스타라 하더라도 환장하며 달려들 정도로 면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치히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게, 도저히 식욕이 안 올라오나봐요. 머리가 아파서 그런가……드링크도 좀처럼 못 드시구요.”

 

잔뜩 처진 그녀의 표정에서 답답함이 느껴졌다.

 

“정말 저러다가 쓰러질 것 같아서 불안해 죽겠단 말이에요. 예전에 2주일 내내 철야하실 때도 먹을 거 하나는 굉장히 잘 챙겨 드셨던 분인데…….”

“……별 수 없어. 이럴 때일수록 우리가 힘 내야지. 혹시나 P군이 쓰러지더라도 그 빈자리를 금방 메울 수 있도록 말이야.”

“그런 걸까요…….”

“그래, 그런 거라고. 그러니까 얼른 밥 먹으러 가자. 배고파 죽겠어.”

 

미즈키는 치히로와 카에데의 어깨를 팡팡 두드리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식사를 마치고, 카에데는 사내 카페로 향하는 두 사람과 헤어져 곧바로 휴게실로 향했다. 지금이라면, 단 둘만이 있는 시간을 어떻게든 낼 수만 있다면, 이야기는 무리더라도 최소한 자신의  무례했던 행동에 대한 사과라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휴게실 앞에 멈춰 서서, 그녀는 잠시 머릿속을 정리했다. 만약 프로듀서가 안에 있다면,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를 정했다.

 

“프로듀서, 몸은 좀 괜찮……?”

 

휴게실의 문을 열고 들어간 카에데를 반기는 것은 소파에 누워 눈을 감고 있는 프로듀서의 모습이었다. 아니, 그 혼자만이 아니었다. 한 사람이 더 있었다.

사쿠마 마유가 있었던 것이다. 점심식사는 아직 하지 않은 듯, 그녀의 옆에는 열지 않은 도시락이 놓여 있었다. 프로듀서의 옆에서 그녀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하면, 소위 ‘무릎베게’라는 것으로 자신의 허벅다리에 그의 머리를 받치고, 그의 이마를 쓰다듬으며 끊임없이 무언가를 속삭이던 마유는 슬며시 고개를 들어 막 문을 닫고 들어오던 카에데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입술에 검지를 갖다 대었다.

 

“쉿……프로듀서 씨는 주무시고 계세요.”

“아……미안해요. 그런데 마유는 무슨 일로 여기에……?”

“프로듀서 씨가 힘들어하시니까요.”

 

혹여나 소리가 들릴세라 카에데는 조심스레 휴게실의 문을 닫고 들어왔다.

 

“프로듀서 씨의 얼굴, 보이시나요?”

“네, 아주 잘.”

“아주 힘들어하고 계세요. 제가 본 그 어느 때보다도.”

“그냥 단순히 아픈 게 아닐까요?”

 

카에데가 그 말을 꺼낸 순간, 지금껏 한 번도 본 적 없는 따뜻한 표정을 짓고 있던 마유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실망이네요. 다른 사람도 아닌 카에데 씨가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어요.”

“네……?”

“마유는 알 수 있어요. 프로듀서 씨가 무엇 때문에 괴로워하는지, 어디에, 어떻게 상처를 입었는지.”

 

다시 표정을 원래대로 되돌린 마유는 자신을 바라보는 카에데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부드러운 손놀림으로 규칙적인 숨을 내쉬고 있는 프로듀서의 이마를 쓰다듬었다. 그 때, 얌전히 누워 있던 그의 표정이 일그러지면서 낮은 신음소리를 흘리기 시작했다. 그것을 본 마유는 자세를 기울여 프로듀서의 귓가에 작은 목소리로 무언가를 속삭였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프로듀서의 표정이 곧바로 편안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 광경을 바라보던 카에데는 가슴 한 켠이 아릿하게 저려 오는 것을 느꼈다. 낯익은 듯 낯선 감각. 그것은, 지난 수요일, 캐서린과 프로듀서의 모습을 본 직후 느꼈던 것과 비슷한 감각이었다.

 

“……마유는 이게 한계에요. 마유의 손은 너무 작고, 너무 짧기 때문이죠. 분하지만 마유는 아직까지 이 사람의 상처를 어루만질 수가 없어요. 그저 더 이상 힘들어하지 않도록 그 손을 잡아줄 수 밖에 없어요.”

 

프로듀서의 표정이 원래대로 돌아오는 것을 확인한 뒤 마유는 다시 자세를 원래대로 되돌렸다.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은 왠지 모르게 서글퍼 보이는 듯한 표정이었다.

 

“확신하는 듯한 말투구나. 프로듀서에 대해서…….”

“네, 마유는 프로듀서 씨에 대한 거라면, 뭐든지 알고 있으니까요.”

“아니, 마유도 모르는 건 있어.”

“그 말은, 마치 카에데 씨는 알고 계신다는 말처럼 들리는군요.”

 

어쩐지 발끈한 듯 자신에게 대꾸하는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마유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카에데를 바라보았다. 16살이라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터무니없이 깊은 어둠을 품고 있는 눈동자가 자신을 응시하자, 카에데는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뒷걸음질을 치고 말았다.

 

“그걸 아는 사람이, 이 사람을 이 꼴로 만들었나요?”

 

정곡을 찔린 것인지, 말문이 막힌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고, 마유는 프로듀서의 머리를 들어올린 뒤, 조심스럽게 그 아래에서 자신의 다리를 빼내어 소파에서 일어나, 카에데를 향해 다가왔다.

 

“……뻔뻔한 것도 정도가 있어요. ’그냥 단순히 아픈 게 아닐까?’라는 그 말씀, 저는 적어도 카에데 씨에게서만큼은 듣고 싶지 않았어요.”

“……읏.”

“……마유가 아무리 닿고자 해도 닿을 수 없는 자리에 서 있으면서, 정작 본인은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신세 좋은……사람이네요.”

“……마유?”

“……죄송해요. 마유도 조금, 감정적이 되어 버린 것 같아요. 정말로 죄송해요.”

 

마유는 그 말을 남긴 채 자신의 도시락을 들고  휴게실을 나갔다. 서서히 닫히는 휴게실의 문 너머로 그녀의 자그마한 등을 눈으로 좇으면서, 홀로 우두커니 서 있던 카에데는 휴게실이라는 작은 공간에 자신과 프로듀서, 단 둘 만이 남아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마치 도망치듯 휴게실을 나왔다.

 

“……나라고 해서, 좋아서 이러고 있는 게 아니란 말이야…….”

 

복도에 기대어 말하는, 듣는 사람 하나 없는 그녀의 독백이 산산이 부서져 싸늘한 복도로 퍼져나갔다.

 

 


 

 

 

오후 4시.

눈부신 섬광을 연신 펑펑 터뜨리던 카메라가 움직임을 멈추었다고 생각한 순간, 카메라맨 씨가 카메라에서 눈을 떼고 저를 바라보았습니다.

 

“오케이, 여기까지! 수고하셨습니다!”

 

저는 제 귀를 의심했습니다.

벌써 끝이라구요?

 

”이야, 카에데 씨, 정말 멋진 표정이었어요!”

“그, 그랬나요……?”

“그럼요! 상상 이상으로 권태로운 분위기였다구요? 남자라면 한눈에 불타오를 겁니다. 최고였어요!”

“가, 감사합니다.”

“샘플 완성되는대로 사무실로 보내드릴게요. 수고하셨습니다!”

“네, 수고하셨어요.”

 

 

예정되어 있던 인터뷰를 마치고, 이어지는 촬영까지 마친 저에게 치히로 씨의 연락이 온 것은 때마침 옷을 다 갈아입은 제가 사무실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던 그 때였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전혀 집중을 하지 못했다고 생각했지만 겉으로 드러난 모습은 그게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예상 밖으로 쏟아지는 칭찬에 몸 둘 바를 모르고 저는 쓴웃음을 지으며 급히 촬영장을 나왔습니다.

의상실에서 의상을 반납하고, 화장을 지운 뒤 다시 사무실로 돌아가려던 찰나, 진동으로 맞춰 두었던 휴대전화가 가방 속에서 붕붕 우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휴대전화를 꺼내자, 화면에는 치히로 씨의 번호가 떠올라 있었습니다.

 

“네, 카에데입니다.”

[카에데 씨? 저 치히로인데요, 지금 어디 계세요?]

“촬영장소에요. 그러니까……본관 스튜디오네요. 무슨 일인가요?”

 

어쩐지 다급해 보이는 치히로 씨의 목소리를 들으며 저는 문득 불길한 예감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예감은 어김없이 적중했습니다.

 

[마스터 트레이너 씨에게서 연락이 왔어요. 회의 도중에 프로듀서 씨가 갑자기 쓰러지셨다고. 그러니까…….]

 

오늘은 레슨이 많았기에 일정이 없는 다른 사람들은 먼저 퇴근했고,  우리 부서에서 남아 있는 것은 스케줄이 있는 저와 치히로 씨, 그리고 프로듀서 세 사람 뿐이었습니다.

프로듀서가 쓰러졌다는 그 소식 자체는 그다지 놀랄만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평소에는 강철같은 체력과 근성을 자랑하던 그였지만 그도 결국은 인간인 이상 철야나 무리한 일정을 강행하다 보면 피로가 쌓이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고, 그러다 보면 쓰러질 수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것이 ‘오늘의 프로듀서’라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어디에 있나요.”

[……네?]

“프로듀서는 지금, 어디에 있나요?”

[아, 네……그러니까, 의무실로 데려가서, 의사 선생님한테 진료를 받았다고…….]

“알겠습니다. 저 잠시 의무실 들렀다 갈 테니까,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주세요.”

 

전화를 끊고, 전화기를 가방에 집어 넣은 뒤, 저는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본관에서 제2별관까지의 거리는 그리 먼 거리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조금이라도 늦고 싶지 않았기에, 저는 달렸습니다.

 

 

 

제2별관의 1층에 위치한 의무실에 도착해, 저는 굳게 닫힌 의무실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우리 회사의 의무실은 일개 회사의 의무실이라고 보기에는 그 규모가 상당한 수준이라고 들었습니다만, 실제로 와 보는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실례합니다…….”

 

역시나 명불허전. 분위기에 압도되어 저는 목소리를 낮추며 의무실 안으로 발걸음을 내디뎠습니다. 병원 특유의 소독약 냄새로 가득 찬, 사무실보다 약간 큰 규모의 의무실의 절반은 환자용 병동이, 그리고 나머지 절반은 선생님이 근무하시는 사무실과 응급처치가 이루어지는 처치실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삑, 삑, 하는 의료장비 특유의 규칙적인 소리가 새어 나오는 병동의 문 틈으로 그 안을 슬쩍 엿보던 제 귓가에 사무실의 안쪽에서부터 걸어나오는 발소리가 들렸습니다. 발소리의 주인은 하얀 가운을 걸친 의사 선생님이었습니다.

 

“어서오세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안녕하세요, 여기 우리 프로듀서가 있다고 해서 왔는데요…….”

“아아, 네, 있습니다. 따라오시죠.”

 

선생님은 성큼성큼, 하지만 발소리를 죽이며 병동 가장 안쪽에 위치한 커튼으로 가려진 자리로 향했습니다. 선생님은 조심스레 커튼을 걷어, 한 사람이 지나갈 정도의 길을 열었습니다. 커튼 너머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침상 위에 누워 양 팔에 두 개씩, 수액을 꽂은 채 잠들어 있는 프로듀서의 모습이었습니다. 아까부터 들려오던 삑, 삑, 하는 소리는 그의 가슴에 붙어 있는 전극이 연결된 기계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였던 모양입니다.

 

“영양실조에 피로누적이 겹쳐 일어난 일시적인 저혈당 쇼크입니다. 응급처치도 제때 이루어졌으니 목숨에는 지장이 없을 겁니다..

“다행이다…….”

 

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습니다. 그런 저의 곁에서 선생님은 침대에 걸어둔 차트를 한번 쓱 훑어본 뒤, 다시 프로듀서의 가슴에 붙어 있는 기계의 화면을 바라보더니 차트에 무언가를 기록하고는 다시 그것을 제자리로 돌려놓았습니다.

 

“……바이탈도 안정되었으니 곧 눈을 뜰 거에요. 쇼크로 인한 블랙아웃이니 환자분을 위해 여기서는 잠시 자리를 비켜줍시다. 어느 정도 안정을 찾을 시간이 필요할거에요.”

“네.”

 

저는 곧바로 병동의 입구쪽에 설치된 의자로 향했습니다. 선생님은 그런 저를 한번 슬쩍 바라보더니 싱긋 미소지으며 병동을 나가 사무실로 돌아갔습니다.

그 때, 별안간 땡, 땡 땡, 하는 가느다란 종소리 같은 것이 들려왔습니다. 그것은 저에게도 매우 낯이 익은 소리였습니다. 어디서 들었던 것인가 잠시 생각을 하는 사이에, 그 소리는 자신의 역할을 마쳤다는 듯, 틱, 하는 소리를 마지막으로 조용히 잦아들었습니다. 틱, 하고 헛치는 듯한 소리. 그 마지막 소리를 듣고서야 저는 그것이 어디서 나는 소리였는지를 눈치챘습니다. 그것은 프로듀서가 항상 차고 다니던 시계에서 나는 소리였어요.

 

“으음…….”

 

시계소리에 반응한 것일까요? 주기적으로 들려오는 비프음 사이로 프로듀서의 낮은 신음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열린 커튼 사이로 그가 몸을 일으키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으으, 머리야……여기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그를 향해 달려가려던 저를 가로막은 것은, 언제 들어온 것인지 모를 선생님의 커다란 손이었습니다.

 

“말씀드렸죠? 절대안정. 조금만 있다가 오세요.”

 

선생님은 옷매무새를 고치면서 그가 누워 있는 침상으로 향했습니다. 저는 약간 떨어진 곳에 서서 두 사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정신을 차린 프로듀서의 눈에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새하얀 천장이었다.

삐그덕거리며 이제야 머리에 피가 돌기 시작하는 그의 곁으로 천장처럼 새하얀 가운을 걸친 남자가 다가왔다. 의무실에서 근무하는 의사로, 프로듀서 또한 몇 번인가 신세를 진 적이 있는 사람이었다.

 

“정신이 좀 드십니까?”

“여기는……의무실인가요?”

“네. 아오키 씨가 데리고 오셨어요. 회의 도중에 갑자기 쓰러지셨다고.”

“아, 아아……그랬었죠. 죄송합니다. 폐를 끼쳤네요.”

“폐는요. 이러려고 제가 월급 받고 일하는겁니다. 몸은 좀 어떠세요?”

 

프로듀서는 수액관이 꽂혀 있는 자신의 두 팔을 내려다보았다.

 

“조금……가벼워진 것 같네요. 힘도 좀 나는 것 같고.”

“다행이네요. 뭐, 쓰러지신 건 별 다른 문젠 아니고, 그냥 스트레스성 저혈당 쇼크에 피로가 겹친 겁니다.”

“저혈당에 피로……인가요.”

“신기하네요. 이런 건 보통 감량중인 격투기 선수들한테나 나타나는 건데……최근에 식사는 언제 하셨습니까?”

 

뭐라고 말해야 할 지, 망설이던 그는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목요일 점심이었을 겁니다.”

 

커튼과 의사의 몸에 가려져 프로듀서의 얼굴은 볼 수 없었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 카에데는 크게 움찔거렸다. 목요일 오후. 그 날에 있었던 일을, 그녀는 확실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 할 말 없으시면 돌아가 주세요. 저는 옷을 갈아입어야 하니.’

 

카에데는 자신의 가슴을 꾸욱, 하고 눌렀다. 점차 강해지는 가슴의 고동에 맞추어, 투명한 물에 물감이 번지듯, 그녀의 가슴 속에 죄책감이라는 감정이 퍼져 나가고 있었다.

 

“세상에, 그럼 5일이나 아무것도 안 드셨어요? 물 빼고는 아무것도?”

“그게……좀처럼 뭐가 안 넘어가더라구요. 하하…….”

“거 참……지금까지 버틴 게 대단하네요. 명성대로군요.”

“명성까지야……그냥 죽지 못해 살아있던거죠.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하하, 인사는 저 말고 아오키 씨한테 하세요. 주사 다 들어갈 때까지는 가만히 누워 계시구요. 동료분 병문안도 오셨겠다, 푹 쉬다 가세요?”

 

그렇게 말하며 카에데의 앞을 가리듯이 서 있던 의사는 크게 한 걸음 옆으로 비켜섰다. 의사를 바라보고 있던 프로듀서는 순간적으로, 눈을 피할 틈도 없이 그의 등 뒤에 서 있던 카에데와 눈을 마주치고 말았다.

‘헛’하고 헛숨을 들이쉬는 프로듀서의 눈썹이 꿈틀거리는 것을 카에데는 놓치지 않았다.

 

“아 참, 손은 처치 잘 돼 있길래 그냥 뒀습니다. 약 다 들어가면 옆에 벨 눌러주시구요. 그럼, 푹 쉬시길.”

“네, 감사합니다.”

 

그렇게 말하며 의사는 병동을 나갔다. 의사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던 프로듀서는 이윽고 병동의 문이 닫히고, 병동 안에 카에데와 자신, 단 둘만이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고는 재빨리 눈을 내리깔았다.

잠시간의 침묵을 깨고, 프로듀서가 먼저 입을 열었다.

 

“……몸이 이런 꼴이니, 이제는 도망도 못 치겠군요.”

 

씁쓸한 목소리로 말하며 그는 체념한 듯 침대에 몸을 파묻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카에데의 눈꺼풀이 아주 약간이지만 가늘게 떨리기 시작했다.

 

“……뭐든 하세요. 욕을 하셔도 좋고, 때리셔도 좋습니다.”

 

체념한 듯 그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주르륵, 감긴 그의 눈꺼풀 아래로, 그의 뺨을 타고 흐르는 한 줄기의 물방울은 감정이 담긴 눈물일까, 아니면 그저 맺혀 있던 물방울이었을까?

카에데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병동의 조명 아래로 드러난 그의 얼굴은 오늘 아침에 보았던 것보다 훨씬 더 수척해 보였고, 훨씬 더 무언가에 짓눌려 괴로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지금 그녀의 눈 앞에 있는 것은, 더 이상 그녀와 그녀의 동료들이 알던 그 철인이 아니었다. ‘그녀’가 말하던 백조도 아니었다. 그저, 쓰러지기 직전의, 더는 자신을 지탱하기 힘들 정도로 그 줄기가 썩어 들어간, 병든 느티나무처럼 보였다.

 

-그걸 아는 사람이, 이 사람을 이 꼴로 만들었나요?

-뻔뻔한 것도 정도가 있어요. ’그냥 단순히 아픈 게 아닐까?’라는 그 말씀, 저는 적어도 카에데 씨에게서만큼은 듣고 싶지 않았어요

-……마유가 아무리 닿고자 해도 닿을 수 없는 자리에 서 있으면서, 정작 본인은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신세 좋은 사람이네요.

 

그 때 떠오른 마유의 이야기가, 아랫입술을 깨물고 있던 카에데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마유의 말대로, 그녀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약간 시간을 거슬러, 지난 8월의 어느 날, 그녀는 그에게서 몇 가지의 이야기를 들었다. 비록 그 과정이 반쯤은 협박이 들어간 것이기는 했지만, 그는 그녀를 믿었고, 그랬기에 가슴 깊은 곳에 숨겨둔 자신의 비밀스러운 약점을 그녀에게만 특별히 보여주었던 것이다.

 

-저는 성격장애가 있어요. 강박성 성격장애라고 하죠. 남들에게 완벽한 자신이 되도록 나 자신을 연기하는. 그래서 무서워요. 남들에게 완벽하지 않은 내가 되는 것이, 약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그것은 그에 대해서라면 거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자신하던 캐서린조차도 의심하던 사실이었다.

물론 캐서린 역시 그 내용이 적혀 있는 기사를 읽기는 했지만, 그의 성장과정을 알고 있는 그녀의 입장에서 그 기사는 그저 가십용 헛소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녀가 알고 있는 그는 이 세상의 그 누구보다도 강하고, 그 누구보다도 반짝이던 다이아몬드였을 테니까. 하지만 카에데는 그것이 사실임을 본인에게서 직접 들었다.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녀 스스로가 알고 있다고 생각한 만큼 그녀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가능한 모든 것을 나누고, 교감했던 둘 사이의 관계이기에 오히려 그녀가 한 행동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이었다는 사실을, 그가 품고 있는 “강박성 성격장애”라는 끔찍한 시한폭탄을 터뜨리는 기폭제가 어느 틈엔가 자기 자신이 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그녀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때마침 땡, 땡, 땡……하고 울린 가느다란 종소리가 카에데를 현실로 되돌렸다.

카에데가 선택한 대답은, 침대 옆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 바늘이 꽂혀 있는 그의 오른손을 조심스레 감싸 쥐는 것이었다. 그녀의 손길이 닿는 순간 그의 몸이, 오른손이 크게 움찔거렸지만, 주삿바늘이 꽂혀 있었던 덕분에 손을 빼거나 손을 치우는 하는 행동은 하지 못했다. 그의 손을 감싸쥐던 카에데는 그의 손바닥에서 느껴지던 이질적인 감촉에 흠칫 놀랐다.

 

‘이건……물집……?’

 

바늘이 꽂혀 있었기에 손바닥을 직접 볼 수는 없었지만, 그녀의 손끝으로 전해지는 그 촉감. 마치 물풍선처럼 빵빵하게 비정상적으로 부풀어 있는 그 촉감은 물집이라는 단어 말고는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그녀는 황급히 시선을 내려 그의 손을 자세히 바라보았다. 주말간 대체 뭘 한 것인지, 그의 손에는 피부와 비슷한 색으로 된 특수 반창고가 여기저기 붙어 있었다. 의사가 말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마도 나름대로 처치가 잘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슬쩍 고개를 돌려 바라본 프로듀서는 어느새 눈을 뜨고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만, 그 얼굴에 걸려 있는 표정을 본 카에데는 또다시 목구멍 너머로 씁쓸한 것이 넘어가는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그의 얼굴에 걸려 있던 그것은, 누가 보더라도 한 눈에 알 수 있을 정도로 두려워하는 표정이었던 것이다. 무엇을 두려워하는 것인지는, 구태여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녀를 바라보던 그가 입을 열었다. 긴장한 것일까, 그답지 않게 갈라진 목소리가 삐그덕삐그덕 새어 나왔다.

 

“……왜 가만히 계세요. 뭐라도 말씀하세요.”

“미안해요.”

“……잘못은 제가 했잖아요. 그거 말고.”

“미안해요……저, P씨에 대해서는 뭐든지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실은 하나도 모르고 있었어요……미안해요.”

 

차마 그를 마주볼 용기가 나지 않았던 카에데는 고개를 푹 숙인 채,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그러자 자신이 감싸쥐고 있던 그의 손에서 전해지던 떨림이 가라앉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그녀가 아닌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30초 정도 침묵이 흐르고, 천장을 바라보고 있던 그가 입을 열었다. 묵묵히, 마치 댐처럼, 자신의 감정을 틀어막고 있던 그가 자신의 수문(水門)을 열기 시작했다.

 

“……계속, 계속 생각했습니다. 약한 모습 보이지 말자, 약해지지 말자, 나는 어른이니까, 프로듀서니까.”

 

프로듀서는 고개를 돌려 카에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먼저 움직인 만큼, 이번에는 그는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제대로 초점을 잡지 못하고 이리저리 흔들리는 눈으로, 그는 그녀를 바라고자 애쓰고 있었다.

 

“……힘들더군요. 각오는 했지만, 훨씬 더 힘들었어요. 아마도 당신을 포함한 여러분께는 보이지 않았을 겁니다. 저는 원래부터 그런 사람이니까. 그렇게 자라 왔으니까.”

 

그의 목소리가 조금 흔들렸다. 라고 생각한 순간, 그는 가볍게 헛기침을 하며 자신의 목을 가다듬었다.

 

“제가 일본에 와서 제일 처음 만난 사람에게 들은 이야기가 있어요. 조언이라고 해야 할까, 노하우랄까.”

“……어떤 건가요?”

“’프로듀스란 마음과 마음을 맞부딪히는 교감이다’……말로만 들어도 어려워 보인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해보니 훨씬 더 어렵더군요. 훨씬 더 무서운 것이기도 하고요.”

 

그는 미소를 지었다. 씁쓸함이 뚝뚝 떨어지는 웃음. 그것은 차라리 짓지 않은 것만 못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가슴이 미어지게 하는 웃음이었다.

 

“……저는, 여러분과, 특히 당신과 함께하면서, 충분히 강해졌다고 생각했습니다. 진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은 무서웠지만, 여러분들은 그런 저를 잘 따라 주었고, 또한 허물없이 대해 주었어요. 그래서 저는 그만 착각을 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내가 강하다고. 나는 강해졌다고.”

 

그런 그의 모습을 지켜보던 카에데는 숨을 삼켰다. ‘아니에요’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내려가기를 반복했다.

 

“……하지만 아니었어요. 저는 여전히 약했습니다. 이도 저도 아닌 모습으로 어정쩡하게 변해서, 예전처럼 단단한 껍데기 안에 숨지도 못하고, 스치기만 해도 상처를 입는 부드러운 속살을 내놓은 꼴이 되어 버렸어요.”

 

그의 목소리가 다시 떨리기 시작했다. 호흡이 흔들리고, 삑, 삑, 삑, 하고 들려오던 그의 맥박이 점차 빨라지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얼굴을 가리려는 듯 팔을 들어올리려 했지만, 아쉽게도 그의 팔에 꽂혀있는 주삿바늘이 그의 그러한 행동을 원천봉쇄하고 있었다.

 

“아니에요. 당신은 약하지 않아요. 변하려고 한다는 그 사실 자체로도 당신은 충분히 강한 사람이라고, 당신이 제게 가르쳐 주었잖아요?”

“……그랬던가요…….”

“그랬어요. 제가 똑똑히 기억하고 있어요.”

 

그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의 호흡과 맥박이 다시 천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저는 사실 굉장히 무서웠습니다.”

“무서웠다니요? 뭐가요?”

“저를 노려보던 당신의 눈빛이, 저를 향해 쏘아붙이던 당신의 말이, 저에게서 멀어지려 하던 당신의 그 모든 것이 말이죠…...다시 그 때로 돌아가버리는 것은 아닐까, 내가 한 행동이 모두 헛수고가 되어 버리는 것은 아닐까, 그게 정말로 무서웠어요.”

“아니에요……제가 그럴 리가 없잖아요.”

“그럴 리가 없다……라.”

 

프로듀서는 씁쓸함이 뚝뚝 떨어지는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타카가키 씨, 당신은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죠? ‘처음으로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한 상대‘였다고.”

“그랬었죠.”

“저 또한 마찬가지였어요. 당신이 저를 통해 느낀 것을, 저 또한 당신을 통해 느끼고 있었습니다. 저는, 당신에게만큼은 아무 것도 숨기지 않았어요.”

 

“그 반대도 마찬가지에요.”라고 덧붙이며, 그는 잠시 숨을 돌리듯 크게 심호흡을 했다.

 

“설령 당신의 말이 참이 아닌 거짓이라 해도 저는 그걸 분간할 능력이 없어요. 저는 좋다 싫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다른 사람과 가까이 지낸 적도 없으니까요. 당신은, 타카가키 카에데는, 제가 처음으로 마음을 열었던 나의 첫 번째 파트너였습니다. 당신이 하는 말은, 적어도 저에게 있어서는 항상 참이었습니다.”

“…….”

“그래서 참아내고자 했습니다. 웃는 일이 있다면, 찡그릴 일도 있으리라고 생각하면서……실제로 겪어보니 내 생각보다는 훨씬 더 괴롭고, 무섭더군요. 다 부질없는 짓이었죠.“

 

카에데는 마치 소중한 물건을 다루듯 그의 오른손을 가볍게 움켜쥐었다. 손가락 끝으로 그의 맥박이 전해져왔다. 하지만, 비교적 부드러워진 그의 분위기에 안심한 것인지, 아니면 별 생각 없이 툭 내던진 것이었는지, 그녀는 또다시 실언을 하고 말았다.

 

“그렇게 힘들었으면 말씀을 하지 그랬어요.”

“말하라고요? 어떻게?”

 

갑자기 책망하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신이 무슨 소리를 했는가를 뒤늦게 눈치챈 카에데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지금은 명백한 분노의 빛을 띠고 있었다.

 

“아, 저, 그게…….”

“보세요, 타카가키 씨. [강박성 성격장애]라구요. 정신병입니다, 당신 앞에 서 있는 사람은, 정상인이 아니라 정신병자에요.”

“……죄, 죄송…….”

“저는 실낱 같은 희망 하나로 서 있었습니다. 내 모든 것을 보여준 당신이니까, 당신이기에, 언젠가는 나를 이해해 줄 수 있을 것이라고. 만약 그런 소리를 사정조차 모르는 다른 모든 사람들 앞에서 했다가 그들이 저를 보는 시선이 바뀐다면! 내가 ‘연기’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들통난다면……!”

 

그녀의 사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쥐어짜내듯, 절규하듯 말을 이어가던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는 이를 악물었다.

 

”……저는, 못 버텨요…….”

 

‘내가 대체 무슨 소리를 한 거지?’

그녀는 또다시 뒤통수에 무언가를 얻어 맞은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조금 전에 느낀 죄책감은 다 어딜 가고, 또다시 이런 생각 없는 소리를 내뱉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죄송합니다. 제가 쓸데없이 거친 소리를 했네요. 기분 상하셨다면 사과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프로듀서의 눈시울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주사바늘 때문에 도저히 손을 들어올릴 수 없었기 때문일까, 그는 얼굴을 가리는 대신 그녀에게서 고개를 돌려, 맞은편의 벽을 바라보며 눈을 질끈 감았다. 눈가에 맺혀있던 눈물 한 방울이 주르륵 흘러내려, 그가 베고 있던 베개에 작은 자국을 만들었다.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카에데는 몇 번째일지 모를 정도로 자신의 입술을 깨물었다.

‘더는 안 돼.’

그녀는 생각했다. 이제는 앞뒤 가릴 처지가 아니라고. 따지고 보면 처음부터 그에게 ‘모든 것을 보여주었다’라고 말한 것은, 그 말을 꺼내 그를 흔들어놓은 것은 그녀 쪽이었다. 모든 일의 시작은 그녀였던 것이다. 이제는 움직여야 한다. 움직이지 않으면, 그에게 더 큰 상처를 안겨 줄 것이다.

 

“프로듀서……아니, P씨.”

“……?”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프로듀서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제와서 이런 말을 하기엔 늦었다고 생각됩니다만, 당신께는 실컷 안 좋은 말만을 던졌지만……그렇지만, 저도 변명을 하게 해 주세요.”

 

항상 쓰고 다니던 안경이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기에 의무실의 은은한 조명 아래로 드러난 그의 검고 검붉은 눈동자에 비치는 그녀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며칠 뒤, 10월의 마지막 주. 교토로 로케이션 출장을 떠나게 된 우리는 신칸센에 몸을 싣고 있었습니다. 원래라면 혼자 가야 하는 일이었지만, 함께가 아니면 싫다고 억지를 부렸어요. 그에게는 말하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것도 잔뜩 있었으니까요. 다행히 그는 허락해 주었습니다. 자기도 마침 볼 일이 있었다고 하면서.

 

읽고 있던 잡지를 잠시 내려놓고 차창 너머로 휙휙 지나가는 풍경을 보고 있자니, 툭, 하고 무언가가 저의 어깨에 닿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고개를 돌리자, 정신없이 자고 있는 프로듀서의 어깨가 닿아 있었습니다.

 

“정말로 세상 모르고 잘 자네요.”

  

P는 자기가 운전하는 게 아닌 이상, 뭔가 탈것에 타면 금방 곯아떨어져요. 그게 멈추기 전까지는 말이죠. 뭔 짓을 해도 안 일어난다니까요?

 

캐서린에게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저는 제 쪽으로 머리를 기울인 채, 입을 헤 벌린 모습으로 세상 모르고 잠들어 있는 그의 볼을 가볍게 잡아당겼습니다. 그러자 그것에 반응한 것인지,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므아아앍”하고, 겨울잠에서 막 깨어난 개구리가 낼 법한 이상한 소리를 내는 것이었습니다.

잡아당기거나 콕콕 찌르던 것을 그만두고, 이번에는 그의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었습니다. 손 끝으로 느껴지는 까슬한 수염뿌리의 감촉이 느껴집니다. 제 손길을 느낀 것인지, 잔뜩 찡그리고 있던 표정이 금세 풀어졌습니다.

 

 

그 날의 일은 어떻게 되었냐구요?

부끄럽게도 “변명을 하게 해 주세요”라는 말을 하기는 했지만 결국 저도 제대로 된 변명을 하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어째서 '같습니다'이냐면……사실, 그날의 대화내용도 거의 기억이 안 나요. 머리에 열이 가득 차서, 핑핑 돌아버려서, 뭐라도 어떻게 해야겠다 싶어서, 아둥바둥 그에게 달려든 생각 뿐이었어요. 변명이랍시고 내뱉은 게.

 

“저도 제 감정을 잘 모르겠어요”라던가,

“서로에게 처음으로 마음을 연 상대에요. 특별한 것을 바라지는 않겠습니다. 저와, 친구가 되어주시지 않겠어요?”

 

같은 얼토당토않은 소리뿐이었던 것 같습니다. 고개를 갸웃거릴 만한 내용이죠? 사실 말하는 제 입장에서도 절로 고개가 갸웃거려지는 내용이었습니다만, 어찌되었든 프로듀서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습니다. 약간은 거리를 두고 다시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고. 그리고, 참으로 부끄럽지만, 저는 그의 앞에서 펑펑 울고 말았어요. 미안하다고 말하면서요.

……분명 부끄러운 일이었습니다만 그 날 이후로 그의 미소가 다시 돌아왔고, 사무실도 활기를 되찾았습니다. 며칠간 저를 괴롭히던 갈증도, 제 가슴을 옥죄던 시커먼 무언가도 함께 사라졌으니 이제 이 정도면 좋게 끝난 게 아닐까 하네요.

아, 캐서린을 만났다는 이야기도 했습니다. 프로듀서는 그 말을 듣더니 “그럼 별의 별 얘기 다 들으셨겠네요”라면서 한숨을 푹푹 내쉬었어요. 그녀에게 제 이야기를 했을 때부터 곧 만나게 될 거라는 사실을 직감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사라지지 않은 것도 있었어요.

친구가 되어 달라고는 했지만, 고작 그런 것으로는 이 가슴의 두근거림이 좀처럼 가라앉지를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날의 ‘변명’을 한 이후로, 내 마음은 둔해빠진 내가 조금 더 알아듣기 쉽도록 내 감정을 조금씩 풀어 말해 주었습니다. 그가 곁에 있으면 ‘조금만 더 보고 싶어, 조금만 더 옆에 있고 싶어’라고  두근거리는 식으로 말이죠. 그와 함께 있으면 설령 밤을 새더라도 힘이 솟아났지만, 그와 떨어져 있으면 아무리 맛있는 술이라도 약처럼 쓰게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그게……부끄럽지만, 저는 이 지경이 되어서야 ‘그것’을 알 수 있었어요. 그래요. 남들에 비하면 한참이나 늦었지만, 저도 이제 알아낸 것입니다. 이 마음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그리고 캐서린을 처음 본 그날, 그에게 스스럼없이 대하던 캐서린을 보면서 느꼈던 시커먼 것이 무엇이었는지도, 이제야 확실하게 알 수 있었습니다.

 

 

저는 살며시 눈을 감고, 세상 모르고 잠들어 있는 프로듀서의 머리에 살짝, 아주 살짝 내 머리를 기대었습니다. 불과 수 Cm 앞에서 그의 체온이 느껴졌습니다. 그의 숨결이 느껴졌습니다. 문자 그대로의 그를 느끼면서, 저는 속삭이듯 자그마한 혼잣말을 그의 귓가에 풀어놓았습니다.

 

“……그래요. 저, 실은 사랑을 하고 있었네요.”

 

그 말을 하는 것과 동시에, 마침내 형상화된 언어의 따스한 울림을 느낄 새도 없이, 열차의 도착을 알리는 방송이 객실 내부에 울려퍼졌습니다. 저의 자그마한 목소리는 그 방송에 묻혀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아니, 사라졌지만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자, 일어나세요. 프로듀서. 이제 다 왔다구요?”

“으응……벌써요……? 좀만 더…….”

“이거 종점 아니에요! 경유지니까 얼른 내려야 한다구요!”

 

언젠가 당신의 앞에서 이 말을 당당하게 할 수 있는 그 날까지, 언제까지고 가슴 속에 담아둘 테니까요.

 

 

 

그러고 보면, 프로듀서는 “캐서린도 저더러 친구 해달라고 할 때 그런 식이었어요.”라고 말했습니다. 캐서린, 당신의 친구는 처음부터 모든 걸 알고 있었던 걸지도 모르겠네요.

 

 

<END>


 

 

우선, 제 억지로 인해 여러분들께 지루함을 안겨드린 점 굉장히 죄송합니다. 3편은 봤던 거 다시 보려니까 되게 재미없으셨을거에요.

아니, 그렇다고 4편이 재밌다는 소린 아니고.......

 

아무튼, 이건 저의 고집으로 인해 가지치기로 날아갔던 약 15p 분량을 집어넣은 이른바 '감독판'이라고 할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다시 쓰기 전에는 하편만 58kb였는데, 다시 쓰고 나니까 3, 4편 합쳐서 92kb가 나왔네요. 대단하다 대단해.

사실 잘려나간 쪽의 대부분은 프로듀서의 심리 서술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 자체가 프로듀서의 인물상을 구체화시키기 위해서 나온 이야기였고, 또 처음에 내용구상 또한 그 쪽을 위주로 구상되었기 때문에 사실 잘라서는 안 되는 내용이었어요. 또다시 저의 분량조절 능력에 많은 회의감을 들게 하는 에피소드였습니다.

잘하자, 나.

 

내용에 대해서 조금 이야기를 하자면..

카에데와 프로듀서. 다른 것 같지만 비슷한 두 인물의 이야기입니다. 두 사람 모두, 사람을 대하기 어려워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카에데의 경우는 말수가 적고 쿨한 모습으로 자신도 모르게 벽을 쌓는 타입, 프로듀서의 경우는 남들에게 이상적으로 보일 수 있도록 자기 주위에 벽을 치고, 그 안으로는 아무도 들어올 수 없도록 문을 꽁꽁 걸어 잠그는 타입이죠. 물론 성향이 비슷하다는 것이지, 그 기반이 성장배경부터 기인한 성격장애에 기인하는 프로듀서와 살아가는 방식에 불과한 카에데의 경우는 그 깊이에서 어마어마한 차이가 납니다. 이번 이야기에서 두 사람 모두 서로에게 배신감을 느꼈지만, 그 두 사람이 처한 결과가 깊이의 차이를 말해줍니다.

하지만, 프로듀서는 '어떤 사람'의 조언으로, 자기 주위의 벽을 모조리 허물어 버렸습니다. 벽 안에 갇혀 살던 사람이 밖으로 나간다면 당연히 무섭겠죠, 두렵기도 할 겁니다. 그래도 그는 멀쩡한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자신감 넘치는 모습'을 연기한 거죠.

마유 역시 그의 이러한 모습을 알고 있습니다. 확실하게 아는 것은 아니고 그저 직감 수준일 뿐이지만요. 하지만 그 직감이라는 것이 꽤나 정확해서, 이번에는 카에데에게 일격을 가하는 원동력이 됩니다.

카에데는 이번 에피소드에서는 본의가 아니게 트롤링만 하는 포지션이 되어버렸습니다. 하지만 별 수 있나요, 트롤링도 히로인이나 되야 할 수 있는 것인데(?).

 

 

 

사실 이번 이야기는 리메이크 이전 "진짜와 가짜의 경계"를 약간 확장한 이야기에요. 리메이크 이전의 저 스토리가 연말의 "외로움"에서 파생된 폭탄이었다면, 이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나온 폭탄이라는 차이가 있죠. 어쨌든 한 번은 터져야 될 물건이었습니다,

아무튼, 프로듀서가 약한 모습을 보이는 건 여기까지입니다. 이제부터 펼쳐질 이야기는 또다시 초 유능한 슈퍼 프로듀서의 무쌍이 시작되겠지요. 그럼, 다음 이야기에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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