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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섞인 그림자 - 7 (카나데 X 린 SS)

November 27, 2016 (일) 15:56에 작성함.

20321

  한 해의 마지막 달인 12월이 시작을 나지막이 알리는 차디찬 공기. 벌써부터 크리스마스가 다가온 것처럼, 백화점 복도에 여러 장식물이 설치되어 있다. 반짝이는 장식이 풍성하게 붙은 나무는 쇼핑을 하러 온 수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가족과 커플들은 아름드리 장식된 나무를 뒤로하며 사진을 찍고, 홀로 온 남녀는 그 인파를 쳐다보거나, 쳐다보지도 않고 고개를 숙인 채 묵묵히 곁을 지나갔다. 나도 별다른 말 없이 그 곁을 지나갔다. 손에 쥔 종이가방 두 개가 무릎에 맞부딪힌다. 밖으로 나오자, 이르게 지는 해가 사거리 앞 빌딩에 걸려 4차선 도로를 거의 가리는 그림자를 만들었다. 그림자가 발끝에 닿았다. 따뜻한 해가 찬 바람에 실려 머리를 날리고, 두 눈엔 햇빛이 들어온다.

  초록색 택시가 눈에 띄었다. 주머니에 들어있는 스이카 카드를 만지작거린다. 얇고 탄력 있는 플라스틱의 질감을 손가락으로 느낀다. 손목에 찬 시계를 보았다. 아직 4시도 안됐어. 왠지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택시, 혹은 전철, 버스, 뭐든지. 발을 천천히 움직여 인도를 걸었다. 낮이 짧아져, 이제는 잠시만 돌아다니면 주홍빛 석양이 건물의 옥상에 걸린다.

 

  어디로 돌아가야 할까? 오사키로 돌아가면 된다. 기자회견도 끝났고, 오늘 할 일은 없다. 하지만, 왠지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약간 심란한 마음을 진정하기 위해 찬 공기를 쉼호흡한다. 단풍이 든 나뭇잎이 가로수에서 떨어져 정차된 택시 지붕에 내려앉았다. 지금 돌아가도 집에는 아무도 없다. 고층 빌딩에 드리우는 석양 아래서 간단히 점심을 먹고, 홀로 있다 잠들 뿐이다.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지만, 동시에 바로 근처에 누군가 있기를 바란다.

  서풍이 불어 노란 단풍을 택시 지붕에서 날려버린다. 늙은 택시 기사의 시선이 나뭇잎을 따라 움직인다. 아이가 뜀박질을 멈추고 같이 나뭇잎을 바라본다. 아이의 어머니가 걱정이라도 든 건지 갑작스레 멈춘 아이에게 뛰어 다가갔다. 카나데는 오늘 이르면 밤에, 늦으면 오늘 새벽에 들어오겠지. 누군가 옆에서, 내 감정을 받아줄 사람이 필요하다. 집에는 누구도 없다. 기쁜 감정인지, 슬픈 감정인지 모르겠지만, 혼자서는 우즈키에 대한 행방이 담긴 그 서류를 읽을 수가 없다.

 

  단출하게 금방 끝나리라고 생각했던 기자회견은, 30분이 지나서야 끝이 났다. 아마 카나데의 프로듀서가 함께 있어서이겠지. 나 말고도 카나데에 대해 무언가 콩고물이라도 떨어지지 않을까 싶어 군침을 다셨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맹렬하게 내 잠적에 대해서 물어뜯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처음 두 세 질문을 빼고는 아무도 내 은둔생활에 대해서 묻지 않았다. 아마 사장이 손을 써뒀을 것이다. 프로듀서가 능숙하게 회견을 진행해 주어서 나는 기자들의 가벼운 질문에 간단히 미소를 짓거나, 짤막하게 프로듀서의 말에 맞장구 정도만 쳤다. 하지만 대본에 써있는 대로, 최대한 말을 고르고 표정을 차갑게 했다. 그녀가 항상 추구하던 쿨하고 멋진 이미지를 살리기 위해 나름 애를 썼다. 프로듀서는 내가 카나데가 찍고 있는 드라마의 새 시즌에 참여할 거라고 말했다. 상류층의 곪은 면모를 잘 표현해 나름 수작으로 인정받았던 드라마였기에, 내가 그 드라마에서 어떤 배정을 맡게 되는지 질문이 곧바로 들어왔다. 대본에 써있는 대로, 프로듀서가 말하려는 것을 내가 낚아채어 대신 말했다. 약간 유치한 연극 같지만, 사장은 이걸 필요로 한다. 거래에 응한 만큼, 언제나 최선을 다해야 한다.

  나는 그 드라마에서 카나데의 배다른 동생이자, 조력자인지 적인지 알 수 없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아무리 같은 기업에서 만든다고 해도 이렇게 막무가내로 집어넣는 게 괜찮은 건가 싶었다. 단순한 카메오나 찬조출연이면 모를까, 한 켠을 차지하는 역할을 갑작스레 내어 주는 건 당혹스러웠다. 사장은 대체 나를 어떻게 사용하려는 건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기자들의 플래시 소리가 멈추지 않는다. 의문점이 얼굴에 드러나지 않게 미소에 들어간 힘을 적당히 뺀다. 예쁜 미소는 언제나 내가 쉽게 하지 못하는 행동이었다.

 

  프로듀서는 기자가 전부 빠져나가는 것을 확인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어줍잖은 연기가 고되다며, 생수병을 따고 물을 벌컥였다. 그런 것 치고는 꽤나 자연스럽다고 말하자 재수없이 능글맞은 미소가 나타났다. 이유 없이 뺨을 한대 치고 싶은 미소. 그가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수고하셨습니다. 뭐, 보여주기 같은 겁니다."

  "알아요."

그가 기지개를 크게 폈다.

  "그나저나, 사장님이 꽤나 공들이는 것 같네요. 시부야 씨 라면 뭐, 당연한 걸까요?"

그가 전화기를 주머니에서 꺼냈다. 질문에 대한 대답은 하지 않았다. 반쯤 빈 생수병의 뚜껑을 열고 한 모금 마셨다.

  "조금 늦었는데, 감사합니다."

생수병의 뚜껑을 돌려 닫았다. 텅 빈 회견장에 빈 뚜껑을 닫는 소리가 퍼졌다.

  "하야미 씨, 아까 봤는데 괜찮아 보이더군요. 기침을 좀 하기는 했지만, 스케줄엔 문제 없어 보이더라고요. 감사합니다. 시부야 씨 덕분이에요."

  "감기 정도는 금방 나으니까요."

  "그렇습니까. 뭐, 간병인이 옆에 있으면 더 빨리 낫기도 하죠."

저 입, 누구 꿰멜 사람 없을까. 카나데에게 당한 장난을 내게 전부 푸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카나데한테 어지간히 장난을 당하나 보죠? 장난의 수위도 꽤 높던데."

  "아, 글쎄요. 장난이 지나치다 보니 뭐, 가끔 화가 나기도 합니다만. 장난인 걸 아니까 금방금방 잊습니다. 그리고."

그가 쓴 미소를 지었다. 살짝 떨군 고개에 조명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어둡지 않은 그림자여서, 그의 얼굴에 진 체념이 희미하게 보였다.

  "하야미 씨는 저 같은 사람에 만족할 사람도 아니고, 저도 제가 하야미 씨를 감당할 수 있는 그릇이 아닌 건 압니다."

왠지 미안해졌다. 만약, 그가 나 대신에 이 자리에 들어선다면,

  "자, 그럼 하나 일단락 되었고, 늦은 점심이라도 먹어야겠네요."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다시 한 번 크게 기지개를 폈다. 두 팔을 번쩍 들어서 벨트 위로 셔츠 밑단이 빠져 나왔다. 나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기자용 탁자에 어지러이 올려진 대외용 자료를 일일이 걷으며 말했다.

  "아, 시부야 씨는 지금 사장님께 가시면 됩니다. 사장님이 찾으세요."

  "지금요?"

그는 나를 보지도 않고 자료를 한데 모았다.

  "네. 중간 보고라고 말하면 알아들을 거라고 하시던데요."

그의 말이 끝나기 전에 방 밖으로 나갔다.

 

 

 

  신주쿠 역에 들어가 개찰구에 스이카 카드를 댔다. 개찰구를 지나 플랫폼으로 걸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열차가 들어왔고, 목에 걸은 목도리의 끝자락이 들어오는 열차가 밀친 바람에 날렸다. 요요기 역을 지나 빈자리가 생겨 자리에 앉았다. 역을 출발해 조금 지나자, 요요기 공원의 숲이 보였다. 황혼으로 물든 하늘에 퍼진 얇은 구름 아래, 초록색이 거의 바랜 요요기 공원은 울긋불긋하게 단풍이 들어 있었다. 수많은 카메라가 아름다운 단풍을 담아내고 있겠지. 하라주쿠 역에 멈춰서 있는 동안, 요요기 공원을 계속 응시했다. 완연한 한 해의 끝이 단풍 속에 담겨있는 것 같았다. 신주쿠 역에서 내려 도큐 덴엔토시선으로 갈아탔다. 이번에는 사람이 꽤 있어 선 채로 갔다. 어두운 터널을 지나는 동안 가끔 푸른 빛 선과 흰 빛 선이 창가에 빠르게 스쳐갔다. 산겐자야 역에서 내려, 밖으로 나왔다. 캐럿 타워의 주홍색 판넬에 햇빛이 꺾이는 게 보였다. 캐럿 타워를 등지고 걸어 바로 앞 사거리에서 오른쪽으로 꺾었다. 익숙한 길. 집으로 가는 길.

 

  "빨리 왔군. 점심이라도 먹고 올 줄 알았는데."

사장은 자리에 앉아있었다. 작은 접시에 담긴 반쯤 베어물은, 대각선으로 가른 BLT 샌드위치가 눈에 띄었다. 약간 거친 쉼호흡을 의식했는지, 사장이 책상에 놓인 약간 두툼한 서류봉투를 손가락으로 밀었다. 블라인드의 틈새에서 몇 가닥 빛의 실선이 바닥에 그어졌다. 실선 사이로 작은 먼지가 부유했다.

  "대본과 설정자료다. 이르지만 10일부터 촬영이니, 미리 외워두길 바란다."

거친 숨이 진정되었다. 나는 사장이 말을 더 꺼낼 때까지 기다렸다. 하지만 사장은 아무런 말 없이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거 하나 전해주려고 사장실에서 블라인드를 치고 기다리고 있던 건 아닐 터였다. 조심스럽게 입을 연다.

  "그거 외는?"

  "아아."

사장은 언제쯤 그 질문이 올까 기다렸다는 듯,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책상 서랍에 꽂고 돌린 뒤 손을 서랍에 내밀었다. 다이얼 돌리는 소리가 몇 번 들려오고, 전자음 소리가 세 번쯤 들렸다.

  "346 프로덕션, 사장 미시로."

짤막한 전자음 소리가 마지막으로 들리고, 무언가 달칵거리며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사장은 서랍에서 얇은 서류봉투를 꺼냈다.

  "시마무라 우즈키의 행방의 단서를 찾은 것 같더군. 중간결산 자료다."

사장이 서류봉투를 내게 건넸다. 봉투 안에 서류 몇 장이 들어있는 게 느껴졌다.

  "요약본이다. 돌아가서 읽어보도록."

그녀는 빈 손을 깍지 낀 채로 나를 응시했다. 어떤 반응을 바라는 듯한 표정이 입꼬리에 살짝 걸려 있었다. 하지만 아무 말 없이 서류에 집중하는 내 얼굴을 보고 금방 체념한 듯, 두 눈을 감고 살짝 한숨을 뱉었다.

  "필요하다면 원본을 줄 수도 있다만."

  "괜찮아. 이거면 충분하겠지?"

  "물론. 나머지 자료는 자네 혼자서 읽기는 버거운 양이야. 요약본 자체에 잘 정리되어 있다. 걱정할 것 없다."

사장은 작은 리모컨을 눌렀다. 블라인드가 자동으로 올라갔다. 방에 가득히 햇빛이 담겼다. 슬슬 주홍빛을 띄려 하고 있었다. 몇 분 후면 3시다. 사장의 얼굴에 가득 담긴 햇빛 때문에, 그녀의 눈가가 어두워진 것과, 두 눈이 살짝 충혈된 것이 보였다. 적잖이 피곤에 지칠 나이일 텐데. 멈추지도 않는다. 여기 프로덕션 사람들은 전부 워커홀릭인 걸까?

  "고마워."

아마 은근히 기대했을 말을 입 밖으로 꺼냈다. 사장이 의외라는 듯 살짝 놀라더니, 이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신경 쓰지 마라."

 

  근처 도토루에 들어가 카페 라테를 시켰다. 한산한 매장엔 별로 사람이 많지 않았다. 책 읽는 남자가 작게 기침을 하는 소리가 들렸다. 창가에 앉아 인도를 걸어가는 사람들이 흘러가는 모습을 천천히 바라보았다. 우유 맛이 진하게 느껴지는 커피를 조용히 홀짝이고 있으려니, 웃으며 지나가는 가족이 보였다. 작은 남자아이가 아버지의 등에 올라탄 채로 고개 숙여 아버지의 얼굴을 바라보자, 아이의 아버지는 웃으며 얼굴을 들어 눈을 맞추었다. 어머니가 그 둘을 따라가며 얌전하게 웃었다. 화목한 가족. 두 종이가방을 테이블에 올려놓고 내용물을 꺼냈다. 작은 위스키 병과 다크 초콜릿. 다른 가방에는 사장에게서 건네받은 두 서류봉투와 커피원두. 대체 왜 이런 물건을 구매한 걸까? 얇은 서류봉투의 질감이 익숙지 않았다. 여기서 당장 뜯어볼 수도 있지만, 그러고 싶지 않다. 어떤 내용일지 짐작이 가지 않기에 더욱 더 뜯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애초에 사장은, 그 자리에서 알려줄 수도 있었을 텐데, 번거롭게 요약본을 따로 복사해서 넘겨주었다. 혼자서 읽도록 배려해 준걸까? 마음이 점점 심란해졌다.

  30분 가까이 창가를 바라보았다. 반절 정도 마신 라테는 완전히 식었다. 주머니에서 전화기를 꺼내 연락처에서 익숙한 번호를 눌렀다. 귓가에 대자 더욱 익숙한 연결음이 들린다. 숨을 약간, 깊게 들이마쉰다.

  "안녕, 엄마."

  <린?>

아주 잠깐의 침묵.

  <왜 이렇게 전화를 안했어?>

목소리에 걱정이 가득 묻어있다. 최근에 거의 연락을 하지 않았던 게 마음에 걸렸다.

  <반년 가깝게 어떻게 연락을 한 번도 안>

  "오늘 집에 가도 돼?"

아주 갑작스럽게 질문을 던진다. 질문이 아니라 통지라고 해야할까? 뭐든간에 정말 예의 없고, 기분 나쁜 행동이다. 갑작스러운 질문이 당혹스러운 걸까, 아니면 염치없어 화가 난 걸까. 엄마는 아무런 대답이 없다.

 

 

 

  "가게 문, 마음대로 닫아도 돼?"

  "그이는 지금 후쿠오카에 출장 나갔고, 하루 정도는 개인 사정으로 일찍 닫아도 괜찮잖아?"

  "그런가."

창가에 서서히 석양이 빛을 잃어가는 게 보였다. 주홍빛에 금빛이 섞여, 흰 창틀의 색을 덧칠했다. 그 색 한 켠에 암청빛이 섞여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마 저 빛은 그대로 떠 내어 벽에 칠해도 본 색을 잃지 않는 완연한 석양의 색이겠지.

  "엄마."

  "응?"

엄마는 뒤돌아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부드럽게 들리는 피아노의 음색이 따뜻해졌다. 냄비 속 물이 끓는 소리도 같이 따뜻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왜일까. 머그잔에 담긴 홍차의 바닥이 어렴풋이 보였다.

  "비밀을 끌어안은 사람과 함께 있으려면, 어떻게 대해야 하는걸까?"

  "글쎄~."

칼로 쪽파를 써는 소리가 들려온다. 식칼이 도마를 규칙적으로 두드리는 소리. 팔짱을 낀 채 엎드려, 팔짱 사이에 생긴 작은 공간에 머리를 파묻는다. 비밀을 끌어안은 사람과 함께 있으려면, 어떻게 대해야 하는걸까. 카나데와 후미카, 그 사이에 낀 나. '글쎄' 라는 대답은 너무 두루뭉실해서, 아무런 해답을 전해주지 않는다.

  "비밀이라는 건, 누구에게도 쉽게 말할 수 없는 것 이잖니?"

물 끓는 소리와 피아노 소리가 서로 맞닿아 들려온다. 두 눈을 감았다.

  "비밀을 끌어안은 사람은 보통 상처를 입은 사람들이란다."

엄마가 냄비의 뚜껑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주걱으로 냄비를 휘젓는 소리가 들린다. 된장을 풀고 있는 걸까. 된장국 냄새가 살며시 퍼진다.

  "상처가 어느 정도 아물고, 비밀의 무게에 짓눌리기 시작하면 가까운 누군가에게 덜어내려 해."

칼로 도마를 두드리는 소리. 무언가 된장국에 빠지는 소리가 이어 들려온다. 두부겠지, 아마.

  "그 때까지 가만히 안아주면 되는 거야."

비밀을 끌어안은 사람을, 가만히 안아준다.

  "물론, 비밀을 듣고 싶지 않다면 거절할 수도 있지만."

경쾌한 종소리가 들린다. 오븐이 꺼졌나 보다.

  "자, 생선도 다 익었고. 저녁 먹자."

팔짱을 풀고 몸을 일으킨다. 잠깐 동안 감은 두 눈은 벌써 어둠에 적응해서인지, 약간 눈이 부셨다. 엄마는 오븐에서 생선을 꺼내 각 접시에 담았다. 누카즈케와 간단한 양배추 샐러드, 오버이지로 익힌 계란후라이. 간단하게 인사를 했다.

  "잘 먹겠습니다."

우리는 젓가락을 들었다. 여러 이야기를 했다. 꽃집 근황, 하나코의 새끼가 또 새끼를 밴 이야기, 몇 일 전 근처 마트에서 장을 보고 오다 깜빡하고 간장을 두고 온 이야기. 연어는 적당히 익어 속이 촉촉했고, 엄마는 시간이 괜찮으면 하코네에서 하루 이틀 정도 자고 오는 게 어떠냐고 물어봤다.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고, 누카즈케의 아삭한 식감이 입을 씻었다. 다다음주 즘에는 시간이 빌까? 된장국이 맛있게 끓어 무심코 밥을 더 달라고 했다.

 

  "맨션 정리했어. 혼자서 살기에 너무 크고, 비용도 많이 들어서."

엄마가 차를 홀짝였다. 약간 눅눅한 쿠키가 입으로 들어오는 커피에 녹았다. 묽은 커피가 약간 달달해졌다.

  "언제? 저번에는 별말 없더니."

  "2주 좀 지났어.

  "그럼 지금은 어디서 자고 있어?"

  "오사키 근처. 그렇게 멀지는 않아."

  "그래? 오사키는 혼자 살기에 좀 어떠려나. 약간 멀지 않니?"

무언가 찔리는 느낌이 들었다. 머그잔을 들었다. 커피가 살짝 식었다.

  "혼자는 아니야."

  "어머, 그럼 누구랑? 연인이야?"

  "정말, 아니거든. 남자 아니야."

약간의 안심과 실망이 겹친 미소가 얼굴에 그려진다. 얕은 팔자주름.

  "그래? 다행인 건지, 걱정인 건지. 그럼 누구니?"

  어떤 말로 규정해야 하는걸까. 카나데는, 내게 있어 뭘까. 10년 전 면식의 관계가 이렇게 가까워 지리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적 없었고, 그 외의 다른 관계가 이렇게 희미해지리라고는 더더욱 생각해 본적 없다. 하지만 카나데는 지금 나와 가장 오래 시간을 겹치는 사람이 되었다. 레슨을 받으러 가거나, 저녁을 먹고 잠자리에 들고 아침을 먹을 때, 언제나 카나데와 함께 한다. 관계의 테두리가 점점 겹쳐가면서 우리는 깊숙하게 서로의 핵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는데, 아직까지 나는 한 번도 우리의 관계를 어떤 정형화된 단어로 규정해보지 않았다. 단어를 하나 생각해낸다.

  "직장동료랑."

나와 카나데는, 직장동료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 단어가 우리의 관계를 대변할 수 있을까? 누가 이 단어의 선을 끊고 상대를 밀쳐낼까. 커피가 식어 쓴맛이 올라왔다.

  "미안. 역시 자고가는 건 무리같아."

 

  말끔하게 접힌 이불과 베개를 한 번 쓸어본다. 자고 가라는 성화를 이기지 못하고, 결국 씻고 말았다. 딸이 언젠가 돌아올 날이 있으리라 생각하신 걸까? 부드러운 천에 희미한 세제 냄새가 났다. 침대에 누워 창가를 바라보았다. 바깥 도로의 빛이 창틀을 넘어 천장에 비쳤다. 약간의 소음이 창틀에 걸려 들려온다. 즐거운 웃음소리가 섞인 사람들의 목소리와 메아리 치듯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차 소리. 닫혀있는 옷장을 슬며시 바라보다 오른팔을 올려 두 눈을 가렸다. 왠지 교복이 그대로 걸려 있을 것 같아. 두 눈을 감았다. 집에 들어오기 전에 카나데에게 짤막히 메일을 넣어놓은 게 생각났다. 지금쯤이면 아마 읽었으려나. 아직 별다른 답장이 오지 않은 걸로 보니 아무래도 바쁜 것 같다. 아침에 약간 기침을 하며 밖을 나가던데, 기침약은 제대로 챙겨 먹었을까. 프로듀서의 말대로라면 아마 기침도 금방 낫겠지. 두 눈을 감으니 머리 속 상상이 더욱 선명해졌다. 내 코트에 감긴 카나데의 머리카락. 청빛 머리카락 사이에 희미하게 느껴지는 땀 냄새와 샴푸 향. 어깨에 느껴지는 적당한 무게감이 자동차의 진동에 따라 흔들리고, 나는 내 코트의 체취를 걱정한다. 바들거리며 떨던 가는 팔과 허리와 흰 피부와 대비되던 검정 브래지어. 안쪽 허벅지를 닦는 수건의 차가운 감촉과 차가고 딱딱한 발가락. 가느다란 눈가에 어린 눈물. 눈물. 울음. 우즈키가 울음을 터뜨린다.

  미소따위는, 웃는 것쯤은 누구도 할 수 있는걸.

  침대에서 일어났다. 살짝 잠들기라도 한 걸까, 몸이 약간 몽롱했다. 책상에 있는 시계 바늘이 9시를 넘었다. 우즈키. 스탠드를 켜고 책상에 앉아, 종이가방에서 사장에게서 건네받았던 서류봉투를 꺼냈다. 서류봉투 속에 든 서류가 흔들린 봉투를 치는 게 느껴졌다. 봉투의 봉을 뜯어 몇 장 되지 않는 서류를 꺼냈다. 왼쪽 귀퉁이에 박힌 스테이플러, 서류 한가운데에 작게 적힌 '중간결산'이라는 글씨와 용지 아랫켠에 더 작게 '우시카와 사무소'라고 적힌 게 보였다. 왜 346 프로덕션이 아니라 다른 사무소의 이름이? 잠시 생각했다. 아무래도 사장은 따로 사립 탐정이나 흥신소를 사용한 것 같았다. 물론 잠적한 사람을 찾는 일은 일반적인 회사 내에서 공공연히 벌일 일은 아니다. 그건 알지만, 과연 법의 선을 위험하게 넘나드는 방법을 택해야만 했을까? 왠지 서류를 넘기는 게 불안해졌다. 서류에서 손을 떼고 크게 쉼호흡을 했다.

  우즈키의 행방에 대한 단서가, 이 몇 장 되지 않는 서류에 적혀있다.

  남의 손을 진창에 집어넣게 하고, 나 혼자서 깨끗한 척을 하고 있다니. 이 모든 일을 만든 건 나인데. 그렇게 생각하자 주저하는 마음이 일순간에 사라졌다. 서류를 넘겨 읽었다.

 

 

 

  우즈키는 은퇴 후, 세 달간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고 집에 틀어박혀 있던 것 같다. 그 기간 동안의 CCTV 분석 자료나 카드 사용 내역 등의 자료에서 우즈키의 흔적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그 이후로 항 우울제를 처방받기 시작해, 급기야는 반 년 동안 심료내과를 거의 매일 들락날락 거렸다. 마음속 한 켠에서만 혹시 하고 여기던 생각이 사실로 나타남에, 너무나도 충격을 받았다. 심료내과를 마지막으로 간 날 이후, 우즈키와 가족은 집을 처분하고 사라졌다. 주인이 바뀐 토지대장과 등기필증이 믿기지 않는 이 내용이 사실임을 강조했다. 서류의 내용은 여기에서 끊겼다. 아마 혼슈에서 떠나 홋카이도나 큐슈로 이사한 것 같다는 짤막한 담당자의 코멘트가 서류 마지막 장에 적혀있었다. 읽으면서 나는 몇 번이고 두 눈을 질끈 감고, 내가 읽은 게 정말 맞는 건지, 글씨를 잘못 읽은 것은 아닌지, 마음 속으로 계속 되뇌며 다시 읽었다. 다섯 번을 다시 읽었다. 표에 적힌 숫자가 프린트가 열악하게 인쇄되어 잘못 기재된 건 아닐까 생각했다. 어쩌면 다른 사람과 착각한 게 아닐까 싶어 첨부된 영수증에 적힌 이름을 다시 확인했다. CCTV 영상에 흐릿하게 잡힌 우즈키의 실루엣이, 절대 우즈키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라고 생각할 수록, 실루엣의 형체에서 우즈키의 선명한 모습이 떠올랐다. 우즈키가 맞았다. 서류에 적힌 모든 내용은 분명하게 진실인 우즈키의 행방이다. 믿고 싶은 거짓은 한 줌도 없이, 오로지 진실만 적혀있다. 갑작스럽게 눈이 뜨겁고, 서류에 작은 물방울이 떨어져 잉크가 번지는 게 보였다.

어째서?

  알 수 없었다. 어째서 우즈키가? 입을 벌려서 그 이름을 말해보려고 하지만, 입에서는 이상한 웅얼거림과 아랫턱을 지그시 누르는 먹먹한 압력만이 느껴진다. 뺨에 자꾸 무언가 그어지고, 웅얼거림이 작은 비명으로 바뀌어 간다. 어째서 우즈키가? 울음이 두 눈에서 어깨로 퍼져, 책상에 엎드린 채로 울었다. 두 눈을 감자 눈물샘이 더 자극을 받아 끝없이 눈물을 흘렸다. 코가 막혀서, 질끈 악물은 이빨 사이로 숨결이 들락거린다. 어째서 우즈키가. 스탠드 전등의 선명한 빛이 두 눈에 가득한 눈물에 산란되어 무수한 파편으로 흩어졌다. 오로지 한 생각과, 한 감정이 온 몸과 온 마음에서 생겨난다. 어째서, 우즈키가.

  울음소리에 가려, 창가의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우즈키의 이마에 맺힌 땀이 보였다. 그녀가 손을 들어 손수건으로 닦아냈다. 저 뒤에 미쿠와 미나미, 미리아가 기쁘게 손을 잡고 이야기하는 게 보였다. 키라리와 리카, 미오와 카나코도 웃고 있고, 리이나와 안즈, 치에리는 소파에 앉아서 조용하게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하고 있었다. 란코와 아나스타샤는 자신들의 어휘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둘 다 얼굴에 미소가 가득하다. 문이 열리고, 프로듀서가 손에 든 비닐봉지를 들어올리며 수고했다고, 오늘도 멋진 모습이었다고 우리를 칭찬한다. 다들 기쁨으로 아직 남은 라이브의 열기를 식힌다. 프로듀서 앞에서 삼삼오오 모여 오늘은 어땠냐고 묻고, 그는 봉지에 담긴 음료와 간식을 건네주며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밝은 미소로 끝없는 질문에 대답했다. 지친 다리를 이끌고 그 사이에 들어간다. 정말로 기쁜 얼굴이다. 그런데, 질문 속에 우즈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고개를 돌렸다. 우즈키는 다른 사람들과 혼자 떨어져, 작은 가죽 의자에 앉아서 아직 진정되지 않은 숨을 고르고 있다. 얼굴이 약간 찡그려진 채, 숨을 고르고 있다. 한풀 꺾여 지친 얼굴. 왜일까, 너무나도 힘든 얼굴. 우리 모두가 라이브의 열기에 지쳤다. 하지만 우즈키의 얼굴엔, 모두가 지금 느끼고 있을 기쁨은 단 한줌도 보이지 않는다. 왜. 우즈키. 왜 그런 얼굴인 거야. 왜 양성소에서 다시금 외로이 있을 때처럼, 그런 얼굴을 하고 있는 거야. 지친 얼굴에 그림자가 살짝 진 우즈키의 두 눈이 내 눈과 맞춰졌다. 우즈키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오른다. 예쁜 미소. 프로듀서가 칭찬하던 그 미소.

 

왜. 우즈키, 왜 그런 얼굴인 거야.

 

  잠결을 떨쳐내며 잠에서 깨었다. 감긴 두 눈에 약한 빛의 커튼이 드리워 진 것 같았다. 스탠드 등이 이렇게 약하지는 않은데. 팔짱 낀 손등에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진다. 이 감촉은 뭐지? 뻑뻑한 두 눈을 뜨고, 눈물이 마른 눈동자를 움직였다. 그림자가 얼굴에 드리워져 있다. 그림자가? 고개를 들었다. 카나데가 책상에 허리를 걸친 채 내 옆에 서 있다.

  "일어났어?"

  "카나데...?"

카나데가 왜, 내 방에 있는 거지? 창가에 비쳐 들어오는 달빛을 등에 업은 카나데가, 왜 내 방에. 구부정한 허리를 피자 척추에서 뼈가 맞물리는 소리가 들렸다. 잘 울리지 않는 목을 들어 카나데를 바라보았다. 달빛이 감긴 그녀의 실루엣에 미려하게 깎은 두 눈동자가 빛났다. 달보다도 더 노란 투명한 빛이 무한하게 감긴 두 눈. 작게 빛나는, 아름다운 토파즈.

  "카나데, 어떻게..."

카나데가 엄지를 입술에 가져다 댄다.

  "비밀은 숨겨져 있기에 가치가 있는 거야."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질 않는다. 카나데가 그런 내 표정을 보고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달빛이 걸친 오똑한 코에서 작은 한숨이 나오는 소리가 들린다. 카나데와 나 사이에 쳐져 있던 비밀로 짠 희미한 베일이 걷히고, 청빛 머리카락이 그 베일을 따라 살랑거렸다. 카나데가 입을 벌렸다.

  "어머님께 말씀 드렸어. 동거인인 거."

  아아. 말 했구나. 하긴, 갑작스럽게 늦은 밤에 연예인이 다짜고짜 찾아온다면 누구라도 놀라겠지. 카나데가 엉거주춤하게 일어나는 나를 부축해준다. 카나데와 나는 침대에 앉았다. 카나데의 그림자가 내 얼굴에 드리워 밝은 달빛을 가려준다. 그림자 덕분에 어둠에 익숙해진 눈이 한결 편하다. 눈가에 약간 서늘한 감촉이 닿았다. 카나데가 내 눈가에 생긴 눈곱을 건드렸다. 마른 눈가가 약간 창피해서 고개를 돌렸다. 침대 매트리스의 장력이 약해지는 게 느껴졌다. 이렇게 울은 흔적이 적나라한 채로 카나데 옆에 있다는 게, 아까 전의 엄마와의 대화에서 생긴 질문을 떠오르게 했다. 카나데는 내게 있어 뭘까? 단순한 직장동료? 동거인? 우연하게 서로 뒤섞여버린, 그저 서먹서먹했던 지인? 침대에 갑작스럽게 장력이 걸리는 게 느껴지고, 턱이 따뜻해진다. 약한 힘을 따라 목이 돌아갔다. 카나데는 오른손으로 내 뺨을 살짝 감싸고, 왼손에 든 물티슈로 내 눈가를 닦았다. 서늘하고 부드러운 천의 질감이, 까끌거리는 눈곱과 각질을 닦아냈다.

  "린."

부드러운 손길이 약한 기침에 흔들렸다.

  "미안해."

아니, 미안해 해야하는 건 나야. 비밀을 끌어안고 있는 건, 너뿐만이 아닌데. 너를 향한 질문은 나를 향한 것이기도 했는데. 마른 줄 알았던 눈물이 다시 속눈썹에 방울졌다. 숨이 다시 불안해졌다. 해답을 알 수 없었던 이유는, 나도 그 질문이었기 때문이었다.

  "미안해, 미안해."

카나데가 나를 안는 게 느껴진다. '미안해'라는 말은 그저 웅얼거림이 되어, 울음과 슬픔 속에 섞여버렸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내 귀에 감겼다. 부드럽고 따뜻해서, 서늘하고 거친 내 머리카락이 미워졌다.

 

나는 카나데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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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피나렐로입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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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바르고 고운 말을 사용 합시다.
  • 아키하나 (@akih***)

    이제야 떡밥이...!
    1November 27, 2016 (일) 17:04_75
  • 포틴P (@howo***)

    윽...역시 우즈키는...
    우즈키와 린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가 궁금해지네요. 카나린적으로는 이번에 카나데가 린에게 다가온 것이 더 중요한 일이지만
    2November 27, 2016 (일) 17:08_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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