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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코가 걷는 가을산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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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11-21, 2016 20:44에 작성됨.

현재 얻을 수 있는 소재만으로는 적절한 방어력을 낼 수 없다고 사치코와 마유가 말했다. 총알은 얇은 돌판이나 나무판 정도는 가볍게 뚫어버릴 게 분명하고, 그걸 막는답시고 두툼하게 만들면 우리가 움직일 수 없다. 지금은 폭발이 멈췄지만, 갑자기 또 터지기라도 한다면, 그 땐 무거운 옷 같은 건 거추장스러운 장애물에 불과하다.

 

"그래도 없는 것 보단 나아요. 입어요"

 

"이, 이건?"

 

"곰 가죽을 적당히 처리한 거에요. 나름 갑옷처럼 쓸 수 있고, 아래엔 곰털이랑 식물섬유들을 채워넣어서 권총까진 어찌어찌 안 죽고 넘어갈 수 있을 거에요."

 

......아이돌 일을 하면서 체력이 많이 붙었다고 생각했는데, 저 둘에 비하자면 엄마 젖 먹는 애송이 수준에 불과했다. 곰을 잡고, 그걸 또 현장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해체해서 가져오는 전투력 만땅 생존왕이 여기 있었다.

 

"어디 보자.... 잘 삶아졌네. 이 정도면 충분해?"

 

"예. 고마워요, 미레이."

 

"이 정도야 뭐, 난 내 옷도 스스로 만들어 입는데. 갓 잡은 생가죽은 처음 다뤄보는 물건이긴 했지만."

 

게다가, 털이랑 지방이 덕지덕지 묻어있는 곰 가죽을 무두질하고 구부려서 가죽 갑옷을 만들 줄 아는 능력자까지 있다. 치수도 안 재고 '이쯤이면 되겠지' 라고 말한 미레이가 만든 가죽갑옷은 모두의 몸에 약간 여유로울 정도로 잘 맞는 훌륭한 물건이었다. 약간의 여유 공간엔 질긴 섬유들을 집어넣을 수 있다.

코스프레 좀 한답시고 미싱 돌리다가 미싱도 지갑도 엄마 등골도 망가트리는 오타쿠들과는 차원이 다른 수준이다. 패션이 속성이 아닌 취미라는 걸로 유명한 프레데리카가 감탄할 정도의 실력이다. 프레데리카는 큐트 타입입니다. 저희 패션과는 일절 관계 없습니다.

 

"가능하면 크롬 세탁기에서 무두질을 하고 싶었지만..... 여긴 크롬은 커녕 쇠도 부족하니."

 

"모리쿠보는 환경을 생각하면 크롬을 쓰는 건 좀 피했으면 해요......"

 

"그래서 삶은 후 다시 옻칠이라는 식으로 타협을 본 거지. 마지막에 옻칠 좀 해놔야 하니까 그 갑옷들은 일단 벗어둬. 민감하면 옻독 오를 수도 있는데, 잠깐만 참아줘."

 

그렇게 말하곤, 미레이는 갑옷에 진득한 검은 수액을 칠하기 시작했다. 옻 진액에 들어있는 우루시올은 지독한 알레르기를 일으키기로 유명한 성분이다. 칠이 끝나고 잘 마른 옻 진액에선 알레르기 반응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지만, 진짜 민감한 사람들은 독이 오를 수 있다고 미레이가 부연설명을 했다.

우르시올의 우르시가 일본어의 우루시(漆、うるし)에서 유래한 거라는 설명은 덤이었다. 크롬 무두질이 어째서 환경에 악영향을 끼치는지는 설명해주지 않았다.

 

"내장 기름... 다 섞어놨어...."

 

미레이가 보호구를 만드는 동안, 코우메는 선혈과 창자가 넘쳐흐르는 스플래터 호러같은 작업을 하고 있었다. 머리에 묻은 피와 지방이 떡져선, 몇 번이고 떼어내려 해도 떨어지지 않은 건지 머리카락과 함께 보기 흉하게 엉켜있다. 게다가, 옷에 쓸데없이 피를 묻히고 싶진 않았던 건지 전라다. 속옷도 안 입었다. 불 가까이서 작업했기 때문에 춥진 않았다곤 해도, 쓰레기같은 변태 로리콘들이나 좋아할 법 한 차림으로 다닐 필요가 있던 걸까. 전라에 피칠갑이라니, 너무 마이너하잖아. 로리콘에 마조히스트라는 조합을 가진 쓰레기는 대체 어딜 가야 만날 수 있는거야.

 

"곰고기는 잘 말랐나요?"

 

"사막에 방치된 미이라처럼.... 뻣뻣하게 잘 말랐어."

 

"잘게 부순 다음에 기름이랑 섞어주세요. 노노가 따 온 열매들이랑 같이요."

 

온 몸에 붉은 피를 뒤집어 쓴 코우메가, 손만 깨끗하게 씻고선 부숴진 곰고기와 곰지방, 그리고 으깨서 건조시킨 석류를 뒤섞고 있다. 잘 섞어서 쵸코바 같은 모양으로 만든 다음 밤새 불 위에서 꾸덕꾸덕 말리면 훌륭한 페미컨이 될 거다.

며칠 동안 동굴을 거닐게 될 지도 모른다, 그 동안 먹을 비상식은 필수라고 할 수 있겠지. 꾸덕꾸덕 말린 페미컨은 일본의 환경에서도 몇 년 동안은 버텨줄 게 분명하다.

 

"비위 상하는 작업을 맡겨서 미안해요. 원래는 마유가 했어야 했는데....."

 

"괜찮아.... 피랑 내장 같은 거.... 좋아하니까... 우후후후후후후후후.... 고통스럽게 죽은 곰의 원령이 느껴져.... 마유도 해볼래?"

 

"히익! 마, 마유는 총기랑 탄약 점검하러 가 볼께요!!"

 

마유는 무력 담당이다. 대체 무슨 짓을 해왔길래 더블배럴 샷건을 아무렇지도 않게 다룰 수 있는 걸까. 과거 같은 건 잘 모르겠고 알려 했다간 저기서 해체당하고 있는 곰처럼 내가 산채로 해체당하겠지. 내 시체로 버섯을 길러주는 정도의 배려도 받지 못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 하지만 지금은 없어선 안 될 사람이다. 위험한 사람과 맞서싸울 수 있는 건 그녀 뿐이니까. 그러면서 코우메가 하는 이야기는 무서워하는 게 이게 또 갭모에지만 저것조차 잘 짜인 연기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듬직하다.

 

"페미컨만 먹는 건가요? 모리쿠보는 물도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아요. 그래도 챙길 수 있을 만큼은 챙겨가죠."

 

사치코 대장님의 분석에 의하면, 근처에 계곡도 있고 땅도 습해서 동굴 바닥을 파면 물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고 한다. 안쪽에 물이 흘렀던 흔적까지 있다고 하니, 그 점은 걱정 안 해도 된다는 거겠지. 최악의 경우엔 박쥐 피라도 마시겠다는 흉흉한 말씀을 하셨지만.... 그럴 일은 없겠지? 없길 바란다.

박쥐 피를 마셨다간, 이 크고 아름다운 송이버섯들을 고작 구충제로 쓰게 된단 말이야.....

 

"예상되는 이동 거리를 생각해 봤을 때, 물이나 식량이 부족할 것 같진 않아요. 그것보다 중요한 건 따로 있죠. 쇼코, 노노, 잘 되가고 있어요?"

 

"후, 후히..... 잘 돼가고 있어.... 조금만 더 하면, 필요한 약은 만들 수 있어..... 치, 치, 치마버섯~ 송이버섯~"

 

치마버섯은 화장품의 원료로 자주 이용되는 버섯이다. 안에 들은 베타-글루킨이 피부 세포 성장인자의 생산을 촉진하고 재생 능력을 증가시키기 때문이다. 혹시 동굴 안에서 돌에 긁혀 상처를 입어도, 금방 흉터 없이 치료할 수 있다. 그 뿐만이 아니다. 신경을 이완시켜 자극을 감소시키는 진통제의 역할에다가 여러 균을 죽이는 항균성능까지 뛰어나, 동굴 속에서 다친 곳이 감염되어 버리는 최악의 사태를 막을 수 있다. 피부에 있어선 이 만큼 좋은 생약도 찾아보기 힘들 정도다. 아베 아주머니랑 카와시마 씨가 오이팩 대신 치마버섯을 추천했을 정도로 뛰어나다. 게다가 급하면 먹어도 되고. 쑥 따위와는 비교하지 말라고.

 

"치마버섯은 잘 모르겠지만.... 송이를 구충제로... 아우우... 아까워요...."

 

"나, 나도 아까워.... 지금이라도 핫하! 하고 싶은 걸.... 억누르는 중이야....."

 

마유가 찾은 크고 굵고 아름다운 송이버섯은 예로부터 구충제로 쓰였다. 임상은 거쳤다고 하니 쓰지 못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표고버섯 재배법 확립 전에는 표고보다 격이 아래였던 게 송이버섯이라고 하지만 이런 식으로 쓰는 건 현대인의 감각에선 매우 아깝다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뭐 잘못 먹으면 기생충에 감염될 수 있고, 기생충을 방치하면 죽을 수도 있으니 쓸어내려면 구충제를 먹는 수 밖에. 매실이 있었으면 그걸 썼을 거라고 사치코 대장님이 위로해주긴 했지만, 아까운 건 아까운 거라고. 이 크고 아름다운 송이님을, 구충제로 바꾸어서 써야 한다니. 프로듀서의 크고 아름다운 물건이라고 좋아하던 마유가 지금 울고 있다고. 코우메 때문에 무서워서 우는 거 아니냐고? 그런 거 아니야. 왜냐하면 나도 울고 싶을 정도니까!

 

"햣하아아아!!! 왜 쓸만한 구충제가 안 보이는 거야?!?!?!?"

 

"시끄러워요. 그 작업 끝나면 영지버섯 조각내서 불쏘시개나 만들어요."

 

"앗예...."

 

내 외침은 생존이라는 명목 아래 짓밟혔다. 생존독재 OUT! 하지만 원시 인류는 의외로 평등한 공동체를 이루었다던가 아니던가. 장 자크 루소께선 자유롭고 평등하지 못한 문명 사회의 부조리를 보며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일갈했지만, 자유와 평등은 자연 속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장 자크 루소는 인류 문명은 자유와 평등을 발전시키는 방향으로 움직였다는 걸 몰랐나 보다. 알았으면 이제라도 참회록에 적으란 말이야. 뭐? 벌써 죽었다고? 그 자손의 자손까지 영원히 진실로 참회하리라던가 말던가.

아, 영지버섯은 코르크질이라 좋은 불쏘시개가 된다. 그리고 영지버섯은 양식이 가능하니까 그리 아깝지는 않다. 저기 말이지, 나 이 산을 나가면 영지버섯을 길러볼꺼야. 하지만 입 바깥에 내면 사망플래그지 이거?

 

"이, 이거 타거나 하지 않을까요... 모리쿠보는 걱정인데요...."

 

"괜찮아요. 알코올램프랑 원리는 같으니 도중에 타들어갈 일은 없어요."

 

노노는 걱정스러운 눈치로 등잔을 만들고 있다. 시커먼 동굴 속에서 시야를 어떻게 확보하냐는 치명적이고도 중요한 문제를 두고 모두가 고민하고 있을 때, 노노가 내놓은 해결책은 알코올 램프였다. 학교를 제대로 나오고 있는 친구들이라면 알콜램프의 존재는 알고 있겠지? 히키코모리라고? 축하한다 넌 내 영업 대상이다. 자, 다 같이 사회를 향해 불만을 터트려보자고! 내 콘서트는 단돈 몇만 엔.... 아, 잠깐 치히로 씨가 빙의했었다.

아무튼, 섬유를 연료(이 경우엔 알코올이 아니라 기름)에 적시고 심지만 바깥으로 빼놓으면 훌륭한 램프다. 삼투압 과정을 통해 빨려올라간 기름이 천천히 타면서, 꽤 오랜 시간 동안 빛을 제공해 주겠지.

 

"손잡이 부분은 덩쿨인데요....."

 

"그 정도 화력으론 불 안붙어요. 나무라는 건 의외로 끈질기다고요. 그리고, 출발 전에 물에 한 번 적셔둘 거니까 괜찮아요."

 

"아우으......"

 

마치, 보스전에 돌입하기 위해 포션과 장비를 점검하는 것 같은 느낌이다. 지금까지 안 쓰고 쌓아놓은 여러 포션들과, 상점에 매각하지도 않아서 찾기조차 어려운 주무기를 발굴해낸 후에 몇 번이고 정비해가면서 도전하는 것만 같다. 램프로 쓴 유리병 같은 건 별장 뒤쪽에 묻혀 있던 걸 발굴해낸 거니, 조합 아이템까지 가득 챙겨가는 거라고 봐도 될까.

차이점이 있다면, 여긴 세이브와 로드가 없다는 점이다.

 

".....가방은?"

 

"가방 대신 쓸 지게를 제가 만들었어요. 여기에 필요한 짐을 다 얹고 갈 거에요."

 

"바쁘게 움직였네."

 

"지시할 틈도 없을 정도로 말이죠. 자, 이제 장기전이 되지 않길 바라죠."

 

준비는 몇 번을 해도 부족하지 않다, 사치코는 그렇게 말하곤 마지막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출발은.... 내일?'

 

"가능하면 내일이 좋겠네요. 가능하면....."

 

저 쪽이 계획대로 움직여준다면요, 라는 말을 덧붙이며.

 

 

 

---

 

 

 

밤.

어디에선가 비명 소리가 들렸다. 굵은 목소리로 보아선 남성.

동굴 입구에 있는 함정을 밟은 것 같다. 함정이라곤 해도 고전적인, 레이나가 생각할 법 한 물건이다. 땅을 파고 위를 덮는다는 기초적이고 고전적인 형태다.

......다만, 안쪽에 똥을 바른 못과 유리 조각을 심어뒀지만. 아이돌님의 똥이다, 기쁘게 받으라고.

 

"......사치코쨩의 예상대로네요."

 

".....분화가 멈추면 바로 올라온다, 라고 제가 말했죠? 만일 어제 바로 움직였다면 지금쯤 저 사람을 동굴에서 마주했을 수도 있죠."

 

이걸로, 저쪽의 경계도가 확 올랐을 게 분명하다. 함정 밑에 몇개 더 발굴해낸 두개골과 손뼈를 꽂아두었으니, 일이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걸 깨달았겠지.

 

"어두워서 어디쯤 있는 지 보이질 않네요. 조준하기 힘들어요."

 

마유가 말했다. 샷건으로 원거리에 있는 표적을 맞추는 게 가능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숲의 밤은 사격을 하기엔 너무 어둡다.

 

"귀를 잘 기울여봐요......"

 

그래서, 가는 길목 전체에 마른 나뭇잎과 가지를 뿌려두었다. 사치코가. 이걸로 대략적인 위치를 추적할 수 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다가오고 있었다. 발을 찔려,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것이리라.

 

"......목표 지점 도달. 마유."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마유가 허공을 향해 총을 쏘았다. 총구의 화염이 비치지 않도록 집 안에서 발사했지만, 소리는 바깥까지 퍼져나간다.

 

".....기 누....야?!"

 

"두려워하기 시작했네요."

 

때마침, 총소리를 들은 산짐승들이 울부짖기 시작한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정체모를 짐승의 울음소리가 이 함정을 마련한 우리마저 공포에 휩싸이게 만든다.

 

"왜 남의 인생...... 방해..... 내가 뭘 잘못....."

 

"미레이."

 

"꺄아아아아아아아악!!!! 그만해!!!! 살려줘!!!! 제발 부탁이야!!! 쏘지마!!!"

 

불을 끈 집 안에서, 창문에 얼굴만 빼꼼 내밀고 소리쳤다. 죽기 전의 단말마 같은 비명을 내지르자, 발소리가 눈에 띄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소리에 눈에 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도 좀 이상하지만, 음악계 짬밥 좀 먹으면 소리를 보인다는 표현 정도는 써 줘야 한다.

 

"당장 나오라고!! 벌써 수십 년 전에 끝난 일이라고!! 난 멀쩡히 잘 살고 있단 말이다!! 재혼도 했고!!"

 

이제 목소리가 제대로 들릴 정도로 가까워졌다,

라고 생각한 순간, 굉음이 귀를 때린다.

 

"히읍읍....."

 

노노가 비명을 지르려다, 마유에게 저지당한다. 모든 것은 계획대로 진행되야 한다. 저쪽이 총을 가지고 있는 것 정도는 이미 예상 내의 범주다.

 

"......소리로 봤을 땐 권총 같네요. 아마 토카레프 계열."

 

"샷건이나 리볼버가 아니어서 다행이에요. 그런데 토카레프면..... 야쿠자 계열일까요?"

 

"글쎄요..... 아, 이번엔 덫을 밟았네요. 가능하면 손도 못 쓰게 만들고 싶지만....."

 

"모, 모리쿠보는 동료들이 이렇게 무서운 사람인 줄 몰랐어요오......"

 

응, 나도 그 마음 동의해. 설마 버라이어티의 퀸이 헌팅까지 할 줄 아는 진짜 퀸이었을 줄이야.

 

"그런 소리 하지 마세요. 귀여운 저한테도 어쩔 수 없는 일은 있다고요. 그리고, 나름 온건하게 대처하는 중이에요. 구체적으로는 보츠나와에 다큐멘터리를 찍으러 갔을 때, 밀렵꾼들이 우리 캠프를 위협했던 때 보다. 아, 코우메쨩 그거 댕겨요. 그리고 미레이 비명 다시 한 번."

 

조용히 숨죽이고 있던 코우메가 '씨익' 하고선 웃었다. 줄로 당겨서 발동시키는 트랩을 작동시킬 정도로 가까운 거리까지 다가온 사람을 느끼고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듯 하다. 오히려, 저 공포의 도래를 바라는 것 처럼 보인다. 역시 제정신이 아니야. 이 녀석은 남을 괴롭히는 걸 좋아하는 선천적인 사디스트라고. 아이돌 일이나 호러영화가 아니었다면, 지금쯤 역사에 남을 엽기살인마로 유명해졌을 거야. 왜 거기까지 매도하는 거냐고?

 

"왜, 왜 갑자기 기어나오는 거냐고!! 시발 뒤졌으면 좀 뒤져!! 쓰레기같은 새끼들아!! 어차피 니들도 다 쓰레기였잖아!! 난 살아남았을 뿌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저거, 인화성 트랩이라고. 낙엽 더미에 불을 붙이는 간단한 트랩이지만, 자칫하다간 사람도 태울 수 있는 물건이야.....

 

"후후후.... 곰 사냥.... 함정으로 잡은 거지? 즐거웠겠다아..... 우후후....."

 

"정말 애석하게도, 귀여운 저는 사냥감에게 불필요한 고통을 주는 걸 원치 않아서요."

 

"마유는 좋았어요. 오랬만에 피를 봐서."

 

"아, 모리쿠보는 언더 더 데스크를 탈퇴합니다. 이제부터 인디비쥬얼로만 활동할께요. 그리고 코우메씨 마유씨 사치코씨 돌아가면 저한테 말걸지 말아주세요."

 

손이 불타고 있는 사람을 배경으로 참 멋진 회화가 오간다. 극한 상황에 몰리면 인간은 본성을 드러낸다던데 설마 셋의 본성이 저랬을 줄이야. 내 친구를 돌려내란 말이다 이 망할 산장아. 그래, 모든 건 저 사람이 나쁜 거야.

 

"그래, 오늘 다시 묻어줄께. 시발 니들 같은 쓰레기보다, 내가 더 잘났다고. 알아? 난 시발 손 씻었다고! 성격도 좋다고들 하고!! 그러니까 여기서 즐길 것 좀 즐기겠다는데 그게 그렇게 불만이야?! 아이돌들을 실종시킬 정도로?!"

 

"......들어와요. 모두 위치에서 대기."

 

총을 몇 발 더 난사하고 나서, 그 사람이 문을 열고 걸어 들어온다. 타다 남은 옷과 손목엔 아직 잔불이 붙어있어, 총을 잡는 것 조차 힘들어보인다. 유리 조각과 못에 난신창이가 된 발은, 걸음걸이조차 힘들어 보인다. 예상대로, 문 앞에 잔뜩 칠해진 기름을 밟고 넘어져버렸다.

......입구에 짐승 기름 칠해둔 게 바로 나다 이 자식아. 너 때문에 친구들의 어두운 면을 보게 되버렸단 말이다. 그래, 뭐 산장을 마련해 준 건 고마워. 덕분에 편하게 서바이벌을 즐겼으니까. 그런데 말이야, 니가 여기서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는 모르겠지만 뭔갈 저질러 준 덕분에 이쪽은 지금 공포에 떨고 있거든요?

 

".....크윽....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이것만 아니라면, 이것만 아니면 여기 올 일도 없는데.... 한심하다고 하지 마 시발..... 나도 안다고...."

 

"사격."

 

쾅, 굉음이 들린다. 무섭다. 내 머리를 가볍게 날릴 수 있는 샷건의 총알이, 이젠 남자의 오른쪽 손을 반절 정도 날려버렸다. 마유는 손이 아니라 총을 날려버릴 생각이었겠지만, 샷건이란 건 총알이 맞은 곳 근처까지 날려버린다.

손이 반쯤 날아가는 건 얼마나 아플까? 발에 못이랑 유리가 박히는 건? 상처가 더러운 무언가에 감염되는 기분은? 옷 째로 손이 불타버린 고통은? 이런 고통을 지금, 우리가 주고 있는 건가? 마치 사냥감을 대하는 사냥꾼들처럼? 왜 이런 꼴을 당해야 하지? 아아, 그래. 니 잘못이 아닌 건 알아. 넌 여기 뭔 일 없는지 보려고 왔을 뿐이니까. 그리고 우린 살고 싶을 뿐이고. 후쿠시마에서 말이야, 검은 바다가 내 앞에 있던 걸 다 삼켜버리더라고. 그 땐 정말로 살고 싶다고 생각했어. 그리고 좀 시간이 지나니까, 왜 시발 내가 이 꼴을 당해야 하는지 불만이 쌓이더라고. 응? 나쁜 건 내가 아니잖아. 바다라고, 화산이라고, 너라고. 그런데 난 왜 이 고생을 하는 것인가. 왜 언제나 불합리한 상황에 던져져선, 그걸 극복하는 것을 강요당해야 하는가. 누가 좀 대답해 줄래?

 

"뿌릴께....."

 

아, 코우메가 받아놓은 짐승 피를 뒤집어써서 말을 못하는구나? 피 속에서 허우적거리기 바빠? 미안하지만 내가 알던 세상은 검은 물속에서 허우적거리다 익사했다고. 그 정도로 불만 가지지 마.

 

".....어풉! 히풉, 히익!! 살려줘!! 잘못했어!!"

 

아, 무서운 거야? 공포는 좋은 거라고. 그게 없으면 살아남을 수 없어. 나쁜 건 상처지. 그럼 결코 잊을 수 없는 목소리를 들려줄까. 마유의 총성을 박자 삼아 말이야. 샷건 비트 들어왔다고! 볼륨 높여서! 목소리 최대로!! 감정 잔뜩 담아서!! 이 똥 같은 모든 것을 향해!! 피해망상은 현실이라는 것을 알리라고!!

 

"히-------얏하아아아아아아!!!! 네놈이!!! 우릴!!!! 죽여버렸어!!!! 이 산에 영원히 묻어버렸다고!!! 혼자 살아남고선!!! 시커먼 바다 속에 가라앉아버렸단 말이다!!!"

 

"호, 호시노?! 아, 아니야!! 널 쏜건 내가 아니라고!!! 널 쏜건 이시가미라고!!! 애초에 너도 먹고 튀려 한 주제에" "닥쳐!!!! 네놈도!!! 이 지옥으로 끌고가주마!!! 네 모든 걸, 다 부숴버리겠어!!!"

 

뭐라 반박을 하려고 했던 것 같은데, 뒤에서 달려든 마유와 사치코에 의해 제압당해 묶이는 동안 기절해 버렸다.

......하아, 하아...

역시 집 바깥으로 나오는 게 아니야.

분노를 바깥에 나와서 건전하게 푸는 건, 아무것도 모르는 쓰레기 새끼들이나 입에 담는 저열한 망상에 불과하잖아. 취미고 뭐고, 결국 내게 어울리는 건 방 한 구석의 인터넷 세상이라고.

 

 

 

-----

 

 

 

여기서부턴, 후일담이 된다.

 

기절한 그 사람에게 필요한 응급처치는 모두 다 해놓은 후, 우리는 동굴을 따라 내려갔다. 동굴은 산 근처의 폐광 비슷한 곳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그 길을 따라 조금만 올라가자 빛을 볼 수 있었다.

 

".....이동 시간, 총 3시간. 나, 왜 이런 옷을 만드느라 고생한 거지....."

 

미레이가 달빛을 받고서 가장 먼저 한 말이 그거였다. 묻지마. 나도 이 짐들 싹 다 버리고 싶단 말이다.

사람이 다니는 것 같은 가파른 흙길을, 그 가을산을 조심해서 내려간 그곳엔 휴계소가 있었다. 그것도 24시간동안 영업하는. 폐광을 통해 내려간 산길 끝에서 도로와 휴계소라니. 접근성은 나쁘지 않다고 해 둘까.

 

"정기적으로 산을 찾아와서, 휴계소에 차를 대고, 그 다음에 산길을 올라간 것 같네요."

 

야근하던 점원이 황급히 차려준 밥을 먹으면서, 젓가락으론 검은 차를 가리키며 사치코가 말했었다. 주차장에는 점원의 차를 제외하곤 저 차 밖에 없었다.

.....점원도 얼굴을 아는 사람이었고, 예의 바르고 점잖은 성격이라 괜찮은 사람으로 보고 있었다.

 

"이 길은 관광루트는 아니지만, 근처 주민이 정기적으로 놀러오기엔 나쁘지 않은 곳이겠죠. 그러니까 의심받지 않고 폐광을 들락날락 할 수 있던 거고."

 

"거기에, 산 깊은 곳에 있는 폐광을 누군가 감시할 리도 없고 말이야."

 

이 근처 출신인 점원의 이야기에 따르면, 광산은 전쟁 이전에 폐광이 되어버렸다고 한다. 나중에 지질조사를 통해 연결된 굴이 하나 더 있다는 결과가 나왔지만 이 광산이 쓰이는 일은 없었다. 그 땐 이미 전쟁중이었고, 유용한 광물이 없는 광산을 개발할 여유 따윈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잊혀진 광산에 대한 정보를 어디서 입수했는지, 범인과 그의 옛 동료들은 저곳에 산장을 세웠다. 자재는 뭐.... 근처 통나무를 자른 다음 어찌어찌 만든 거겠지.

 

그럼, 그곳에 산장을 짓고 살인극을 벌인 이유는 대체 무어란 말인가?

.....그에 대한 해답은 바로 나오진 않았다. 범인이 자살해버렸기 때문이다. 정신을 차린 후, 결박을 푼 다음 목을 메었다고 했다. 피로 '죄송합니다'라는 글자만을 남긴 채.

샷건은 나올 때 망가트렸기 때문에, 그걸 자살에 이용할 수는 없었다. 현장에서 토카레프 조각과 유골들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우리에겐 정당방위가 적용되어 기소유예로 끝났다. 그리고 해답은, 기소유예가 판결이 나올 때 즈음 경찰에게서 듣게 되었다.

 

".....마약?"

 

"예. 가해자인 마츠하라 유우잔은 과거 야쿠자였습니다. 다만, 몇십년 전 자기를 죽이려 든다는 이유로 조직을 배신하고 경찰에 정보를 넘겼죠. 약 5년간의 수감 생활 후 자유를 찾은 그는, 시내에 건물을 사서 월세 수익으로 먹고살았다고 합니다. 그 당시 돈의 출처가 어디였는지 저희 경찰에서 밝히려 했지만, 본인은 입을 다물고 증거도 없어서 수사를 종결했습니다. 야쿠자 관둘 때 조금 챙기고 나왔다.... 정도로만 추측하고 있었죠."

 

"그럼, 그 산장은....."

 

"관광지 개발 사업에 손 대던 도중, 폐광에 관한 정보를 듣고 찾아낸 길이겠죠. 그곳에 대충 산장을 짓고 나서 그곳을 비밀 아지트 겸 거래지점으로 삼은 듯 합니다."

 

그리고, 중간에 일이 틀어졌다. 아마 어디선가, 누군가 돈을 먹고 튀어버린 거겠지. 높은 확률로 그 마츠하라인가 뭔가 하는 사람일 거다.

 

"땅을 파 본 결과, 몇십년 전의 물품으로 추정되는 대량의 마약과 금고가 발견되었습니다. 금고는 억지로 연 다음 깨부순 흔적이 있었고 안쪽은 텅 비어있었습니다."

 

"돈 먹고 다 쏴죽인 다음 째버린 거네요. 흔히 있는 일이에요."

 

마유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담담히 말하자, 경찰의 인상이 조금 찌푸려졌다. 저런 일을 보고 '흔히 있는 일'이라고 말하는 사람의 과거 따윈 알고 싶지도 않다는 듯 한 인상이었다.

 

".....그럼, 하나 물어봐도.... 될까.... 요?"

 

".....아, 예. 얼마든지."

 

이걸로 다 해결되었다, 라고 생각하기엔 아직 찜찜한 게 남아있다. 동기다.

사람을 왜 죽였는지에 대한 동기가 아니다. 사람이 살의를 품는 이유는 다양하다. 쌔고 쌧다. 넘쳐흐를 정도다.

 

"그.... 왜 거길 주기적으로... 간 거에요....?"

 

자기가 죽인 동료들에 대한 사죄라도 빌러 간 걸까. 어쩌면, 그런 사람에게도 인간성의 조각은 남아있는 게 아닐까?

.....라는 기대는, 경찰의 대답에 의해 허망하게 무너져내렸다.

 

"주기적으로 마약을 하고 있었으니까요. 거기 쌓아둔 약을, 몇십 년에 걸쳐 천천히 녹여가며 쓴 거에요."

 

역시 이 세상은 개똥이라니까.

 

 

 

 

 

 

 

 

 

 

"그런데 말이야....."

 

".....응? 무슨 일이야?"

 

"왜, 마지막에 죄송하다고 유서를 남긴 걸까?"

 

"혐오."

 

"?"

 

"자기혐오."

 

의미도 없이 태양빛 아래를 걸어다니며 시간을 소모하는 양아치와, 그냥 조용히 집 안에서 자기 할 일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 음침한 인도어파. 둘 중 어느 존재가 인간 사회에 도움이 되는지는 질문할 필요도 없고 대답힐 필요도 없다. 아니, 애초에 이런 지리멸렬한 독버섯 같은 사고 자체가 먹물버섯보다 더 허망하게 질 순간의 상념에 불구하다.

....순간의 상념이 되지 않고, 끝없는 자문자답으로 이어진다면 그것은 진짜 독버섯으로 자라나게 된다. 숙주를 좀먹어가는 독버섯이 되어버린다. 마약을 퍼먹는 자는, 약에서 깬 후 깊은 자괴감에 휩싸인다고 한다. 그리고, 끔찍한 자신을 감추기 위해 어떠한 가면을 만들게 된다. 저 사람의 경우, 금전적인 여유가 있어서 좀 괜찮은 가면을 만든 거겠지. 차도 비싼 거 타고 다니더만. 

그러니까, 그렇게 말하고 싶었던 거다. 난 니새끼들보단 존나 잘난 인간이라고 이 좆같은 새끼들아! 라고.

그걸 부정당하고, 부정할 수 없어지자 세상에 대고 죄송합니다 한 마디 싸지르고 뒤진 거지.

 

 

.....내가, 어울리지 않게 산행을 선택한 것 처럼 말이다.

잘 나가는 아이돌이라는 건 가면이고, 그걸 사실로 만들고 싶어서 일부러 나왔다. 취미를 명분으로 삼아, 조금은 방구석을 벗어나고 싶었던 거다. 

'음침한 인도어파, 라고 분류할 수 있는 녀석들은 대부분 상종 못 할 히키코모리나 그에 준하는 사람들이다. 그곳에 서서 숨 쉬는 것 만으로도 독버섯의 포자 같은 감염물질을 내뿜어 충만한 리얼을 만끽하고 있는 사람들의 공간을 썩혀버린다. 남녀노소, 크든작든마르든뚱뚱하든 그 음침함은 태양 아래에 내놓아선 안 될 더러운 것이다' 라는 말에 반박하고 싶던 거다. 불가능할 걸 알면서. 산 한 번 올라갔다 오는 것 정도로, 스스로를 뒤집어엎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가끔씩은 그런다고, 도망칠 길도 파놓은 다음에.

......어둠 속에 홀로 숨어, 빛을 저주하며 모든 것을 원망한다. 너희들이 나빠, 라고 몇 번이고 되뇌이며 책임전가의 바닥을 한 번이라도 핥아본 사람은 그것이 얼마나 쓰고 차가운 지 안다. 그걸 자기합리화라는 마약으로 속이고 있던 것 뿐.

 

"......나, 잠깐 집으로 갈래."

 

"괜찮아....? 파파라치, 잔뜩 깔려있을 거야....."

 

"아이돌 관두려고."

 

".......모두, 슬퍼할 거야. 나도, 친구들도, 팬들도."

 

그러고보니, 인기 아이돌이었지. 이 내가.

휴계소로 내려와서 점원 다음으로 만난 사람들은 몰려드는 기자들이었다. 지금도 집 근처엔, 그리고 기숙사 주변엔 파파라치들이 깔려 있다. 어울리지 않는 스포트라이트였다.

이제 돌아가자. 내가 있어야 할 곳, 어두운 구석으로

 

 

 

 

 

 

 

 

 

 

"......난, 괜찮다고 생각해."

 

"뭐가."

 

"쇼코쨩이, 모두를 모아서 어딘가로 가자고 한 거. 손 쓸 도리 없는 개성파들을 모아서 간 거잖아....? 기적 같은 게 아니라, 쇼코가 열심히 발버둥친 결과야."

 

"......핫, 새디스트 변태가 좋은 소리 하긴."

 

"우후후.... 귀엽다니까. 그러면, 아이돌 조금만 더 해 보자. 나도, 쇼코쨩이 아니면 모이지 않았을 거니까."

 

......그럴까.

아직 난, 구제할 수 없는 것들의 우상인가 보다. 또 한번 가을산을 걸어야 하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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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안에서 가을은 9, 10, 11월입니다. 그러므로 아직 가을입니다. 가을산이라고!

 

이걸로 쇼코가 걷는 가을산은 완결입니다. 우와, 처음 구상한 거랑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되어버렸어.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지? 이래서 사람이 우물쭈물 하면 안 됩니다. 완결이 좀 깔끔하지 못한 느낌이네요. 약간 급전개라고 해야 하나? 구성 자체가 영 아닌 듯한 느낌. 사실 빨리 끝내고 싶었습니다. 초장편이랑 단편은 다룰 수 있는데 중편은 좀 어렵네요. 아아 힘들어라. 머리아파. 뇌활동으로 칼로리를 소모하고 심장박동이 묵직하게 느껴집니다. 좋았어 오늘 운동은 가지말자. JTBC가 꿀잼이구나.

 

사실 진지한 기분으로 쓴 소설도 아니라, 이렇게 길어진 것 자체가 예상 외입니다. 쓸데없이 늘어트리는 버릇은 좀 고쳐야 하는데.....

 

그럼 이만 줄입니다. 지금 뉴스룸을 보고 있어서 좋은 하루가 될 것 같진 않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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