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카테고리.

  1. 전체목록

  2. 그림

  3. 미디어



[신데렐라 판타지] 편광렌즈 (3)

댓글: 13 / 조회: 612 / 추천: 3


관련링크


본문 - 11-19, 2016 14:25에 작성됨.

감자, 메밀, 도토리, 무, 그리고 콩나물. 모두 깊은 곳의 교단에서 신성시하는 작물들이다.

 

"여기 식사 받아가세요~"

 

지부나 종파 별로 조금의 차이는 있지만, 이들이 중시 여기는 작물엔 공통점이 존재한다. 힘들고 배고픈 때를 버틸 수 있는 구황작물들이라는 점이다. 배고프면 이도 저도 안 된다는 그들의 종교적, 혹은 의학적 신념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이 흔해빠지고 값싼 작물들은 천금보다도 귀중하고 만금보다도 고귀한 것일 수 밖에 없다.

 

"마, 퍼뜩 받아가래이! 피죽도 못 묵었나?"

 

"주, 죽 먹어본 지도 오래라.... 감사합니다...."

 

빈민가의 걸인들이 깊은 곳의 교단이 차린 구호소 앞에 몰려들었다. 미소 지으며 빈민들을 맞이하는 카나코는, 속으로 몰래 한숨을 쉬었다. 그것도 몇 번이나. 남바 에미 역시 마찬가지였다. 상황이 심하다는 말은 들었지만, 이 정도로 심할 줄이야. 지금까지 여러 극단적인 지역을 돌아본 베테랑들도 고개를 젓고 한숨을 쉴 수 밖에 없었다.

저 멀리, 스모그 너머 높이 솟아있는 화려한 상류층 거주지를 보며 둘은 마음 속으로 고개를 저을 수 밖에 없었다. 미무라 카나코가 돌아다니던 극단적인 지역은, 이 정도로 극단적인 격차를 보여주진 않았다.

 

"메밀 수프에요."

 

"메밀..... 수프?"

 

"원래는 소바가키라고 하는 건디, 우리 동네에서 더 멀리 떨어진 곳 음식이다카이. 메밀은 쉽게 자라니께 팍팍 먹고 후딱 기운 차리라."

 

잡뼈와 무를 고아 국물을 내고, 감자와 메밀을 적절히 익혀 끓인 걸쭉하고 따스한 수프. 머리를 떼지 않은 콩나물을 고명처럼 위에 얹은 물건이다. 향신료로 양념을 할 정도의 여유는 없어 상당히 투박한 맛이지만, 그런대로 먹고서 배를 채우고 기운을 내기엔 충분한 음식이다.

 

"좀 더 기름을 넉넉히 쓸 수 있었으면 하지만....."

 

"아닙니다... 이걸로도 괜찮습니다...."

 

뭐가 그리 급한지, 아이들도 어른들도 너나 할 것 없이 수프를 받곤 제대로 식히지도 않고 입에 들이붓는다. 식히지도 않고 제 자리에 가져가지도 않고 즉석에서 마셔버리려 하는 절박함, 중간중간 들어있는 뼛조각마저 씹어먹으려 하는 굶주림, 그리고 행여나 이 식사조차 빼앗길 까봐 주변의 눈치를 보며 세상 모든 것을 경계하는 듯 한 불신. 미무라 카나코에게는 익숙한 광경이지만, 이런 광경은 언제나 익숙해지지 않았다. 안돼, 긍정적으로 보자. 그녀는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생각했다. 우려낼 뼛조각이 있는 걸 다행으로 여기자고. 잘만 하면 짐승의 피도 받아쓸 수 있으니 식량 사정은 오히려 좋은 편이라고.

하지만,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는다. 미무라 카나코는 몸의 근육과 지방 밑의 신경이 잘려 조각나는 그 끔찍한 감각이, 다시 자신을 덮쳐오는 것을 느꼈다. 도저히 그 기원을 찾을 수 없는 그 환상통은, 왕국에 온 뒤로 오래간만에 자신의 존재를 다시 알리고 있었다.

 

".......심박수 증가."

 

"......아, 에에? 아아. 괜찮아. 먹는 게 좀 부족해서 현기증이 있던 거야."

 

"방금 전의 식사량, 내 6배. 부족하다곤 볼 수 없" "보고도 모르것나? 우리 카나코 배는 꼬마 아가씨의 10배는 된다카이." "납득." "잠깐! 그건 무슨 소리야?!"

 

난바 에미가 상황을 개그로 만들었다. 카나코는 덮쳐오던 통증이 점점 물러감을 느끼며 속으로 그녀에게 감사했다. 그녀의 마음을 안 건지, 에미는 걱정 말라는 듯 한쪽 눈을 찡그렸다. 유키미는 눈치채지 못한 건지, 카나코의 배를 주무르고 있었다.

 

"아, 수프는 다 끓였어?"

 

"페로가 옮겨올 거야."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로브를 뒤집어 쓴 인간 형태의 무언가가 커다란 냄비를 들고 나왔다. 옷을 두껍게 입고, 조금이라도 드러나는 부분은 붕대를 감아 최대한 사람에 가깝게 위장한 페로였다. 척 봐도 수상해 보이는 모습이지만, 깊은 곳의 교단을 돕고 있어서 그런지 아무도 수상함을 느끼지 못했다.

 

"엄마, 저 사람 왜 온몸에 붕대를 감고 있어?"

 

"쉿! 저 사람은 온 몸이 독에 당한 거란다. 아빠 죽기 전에 어땠는지 알지?"

 

"그럼 우리도....."

 

어쩌면, 저 정도의 부상은 이곳에선 일상적인 모습인지도 모르겠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유독성 화학 물질에 오래 노출되다 보면, 그야 피부가 썩어 타들어가는 게 당연하겠지. 실제로 성기사단 중 몇몇은 벌써 호흡곤란과 피부염을 호소하고 있었다.

저 구석에서, 남은 수프를 가지고 다투며 불평하는 붕대 맨 사람들처럼 되기 전에 왕국을 떠나고 싶은 게 미무라 카나코의 본심이었다. 왕국을 거부하고 있던 자신도 모를 이유가, 드디어 적당한 변명거리를 찾았다는 데에 검고 칙칙한 기쁨을 얻을 정도였다.

 

"내놔!"

 

"여기 더 달라고! 맛대가리도 없는 거 가지고 버티라는 거야?!"

 

"제발.... 제발 부탁이에요.... 아이가 3일동안 아무 것도 못 먹었어요....."

 

"하아....."

 

항상 보는 참상을 앞에 두고, 드디어 한숨이 나와버린다. 평소보다 훨씬 빠르게 정신적 한계가 다가오고 있다. 다 내팽개쳐버리고 싶다. 차라리 저 옛날, 태양의 젤러시교가 그랬던 것 처럼 이단심문을 명분으로 구획 째로 싹 태워버리는 것도....

 

".....종교인, 이런 광경은 안 익숙해?"

 

.....그런 생각이 솟아오르려 하는 찰나, 유키미가 카나코에게 말을 걸어왔다.

 

"....에? 아, 아니.... 조금 몸이 안 좋아서."

 

"여기 공기... 몸에 안 좋아... 마법약을 만들어줄께, 당분간은 마스크 하고 다니고...."

 

"고, 고마워..... 그런데 유키미 쨩은 괜찮아?"

 

"익숙해. 이런 광경은. 화학물질도, 제국이 뿌린 것 보단..... 버틸만하고...."

 

"마, 그건 오래 쑀다간 뼈도 안 남기고 죽어버링께...."

 

그래, 저런 아이도 버티고 있다. 고작 이런 곳에서 쓰러지기엔, 깊은 곳의 전도사의 이름이 아깝다. 깊은 곳의 성기사로서 이런 곳에서 쓰러질 수는 없다. 깊은 곳의 사명은, 깊은 곳에서 허우적대는 중생들을 돌보고 구제하는 것. 천축의 옛 이야기에 나오는, 지옥의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스스로를 지옥에 던진 잡신도 하는 일을, 위대한 사명을 진 자가 거부해선 안 되는 것이다.

 

"열심이네."

 

"아씨도 좀 도우쇼."

 

깊은 곳의 사명이 어쩌건 말건, 태양의 젤러시교에서 나온 이단심문관 아이카와 치나츠는 정리를 시작한 구호소에 나타났다. 육체 노동의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쪽은 조사에 바쁘다고. 어제 한숨도 못 잔 나한테 육체노동을 시킬 생각이야?"

 

"좀 주무쇼."

 

대신 심각한 정신적 피로에 시달리는 듯 했다.

 

"바빠. 일 다 끝났으면 유키미 좀 데려갈께."

 

"행선지랑 목적은?"

 

"쓰다듬으면 치유받을 것 같아서."

 

"잘갔다와~ 아, 우리쪽 사람도 필요허면 좀 쓰든지."

 

마지막 메밀 반죽을 휘젂이던 유키미가 천막에서 나왔다. 일을 도와주던 페로가, 모습을 바꿔 그녀의 옷 안으로 스며들어가 단단한 보디슈트가 되었다. 조금 조여드는 안정감을 확인한 유키미의 눈빛이 바뀌었다.

지금부턴, 진짜 일을 할 시간이다.

 

 

 

----

 

 

 

"구호소에 대한 지원이요? 얼마든지요. 어떤 걸 드리면 되죠? 안경? 어떤 안경이죠? 아, 혹시 고양이인가요? 미리 말씀드리지만 고양이 고기는 역시....."

 

사람은 깊은 곳의 말씀만으론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이 깊은 곳의 말씀이자 가르침이다. 남바 에미는 거기에 한가지 구절을 더 추가하고픈 충동을 받았다. 그 구절이란 '사람은 안경만으론 살아갈 수 없다' 라는 지극히 당연한 상식이다.

그래도 선의는 충분하고, 말은 통하는 사람이다. 백성들이 굶어죽든 말든 신경도 안 쓰는 다른 왕국의 귀족들과는 차원이 다른 인격자다.

 

"아.... 적당한 간이 시설이랑, 도축하고 남은 뼈나 피 같은 부산물들 정도요. 그리고 여러 야채들."

 

"어려울 건 없죠. 그런데, 왜 그런 게 필요한가요? 아니, 수프를 끓일 생각인 건 저도 알겠는데, 뼈와 피는......"

 

카미죠 하루나가 내키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왕국에선 뼈와 피를 요리에 쓰지 않는다. 당연히 뼈와 피를 사용하는 요리법은 존재하지 않으며, 그러한 것에 거부감을 보인다.

 

".....그걸, 사람들이 먹으려 할까요? 전쟁에서도 밥이 입에 안 맞으면 병사들이 배식을 거부하거나 기피하는 사태가 종종 발생하는데......"

 

그러한 것을 혐오스럽게 여기니, 그러한 걸로 만든 요리를 먹을 리가 없다는 카미죠 하루나의 지적은 타당하다. 남바 에미와 미무라 카나코는, 이 오타쿠 영주가 의외로 말이 통하고 상식을 갖춘 사람이란 점을 보고 깊은 곳에 다시 한 번 감사를 올렸다.

 

"잡고기나 내장이라면 드릴 수 있어요. 사실, 이 동네의 잘사는 사람들... 저 포함해서지만, 그런 사람들이 가축을 도축하고 남은 부산물을 보면 충분히 먹을 수 있는 부위도 버리는 경우가 많아요."

 

"잡고기가 있으면 좋죠. 고기를 대충 뼈째로 썰어던졌다는 식으로 얼버무릴 수 있으니까."

 

"피는요?"

 

"반죽에 섞은 다음 익히면 의외로 눈치채기 어려워요. 재료에 관해선 비밀이라는 걸로 해 주시면 감사하겠어요."

 

"좋아요. 곧 준비해 드릴게요. 다만 피를 몰래 받아오려면 좀 시간이 걸릴 거에요."

 

카미죠 하루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승낙의 뜻이자, 다음 의제로 넘어가자는 의사표현이었다. 진짜 갈등의 서막이었다.

 

".....그래서, 이게 구호소라고요?"

 

그녀가 테이블 위에 있던 도면을 가리켰다. 흔한 재료료 값싸게, 하지만 최고의 효율을 보장하도록 설계된 구호소였다. 깊은 곳의 교단이 쌓아온 경험과 지식이 축적된 물건인 것이어야 했다.

 

"아무리 봐도, 이건 임시 사령부인데요. 이 폐건물을 중심으로 쓰는."

 

카미죠 하루나가 의문을 품은 건, 이 도면에 그려진 구조는 구호소보다 사령부에 가까운 물건이었다는 거다. 그것도, 군용 자재의 사용을 기본으로 하는 물건이다.

 

"영주님 .거기서부턴 제가 설명해드려도 되겠습니까?"

 

"말씀하세요, 이단심문관."

 

'오타쿠인 줄만 알았는데, 여간내기가 아니네' 아이카와 치나츠는, 마음 속 어딘가에서 이 어린 영주를 앝보고 있었다는 걸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치나츠가 안경을 쓰고 있지 않았다면, 하루나의 경계심은 지금보다 더 했을 것이리라.

 

".....저희 태양의 젤러시교에선, 이 빈민가를 지속적으로 관찰할 계획입니다."

 

"그 '오니기리 교'인지 하는 걸 핑계로 말이죠. 뭐, 종교인이 들어오는 건 상관없어요. 이단심문관이나 성기사가 들어와서 치안을 안정시켜 준다면 저야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이에요. 문제는 다른 곳이지. 두캇 쪽 사정이 요즘 좀 많이 어렵죠?"

 

아이카와 치나츠는 두캇 공화국 출신이며, 두캇 공화국은 최근 가니슈카와 제국간의 무역 경쟁에서 밀리고 있다. 그리고 미시로 왕국은 세계 여러 나라의 주목을 받는 중이다. 당장 제국 군인들이 들어와 군사학 강의를 해 주고 있을 정도의 혼돈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 나라가 어디 있을까. 스파이를 색출하려 해도, 그것조차 제대로 할 수 없는 게 현 왕국의 현실이다.

 

".....전 어디까지나 이단심문관으로서 온 것입니다. 타 국에서 공작을 벌일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시겠죠. 영주이자 이단심문관이었던 제 아버지가 그랬던 것 처럼."

 

부패한 귀족들조차 배신하는 나라와 애초부터 친 제국파였던 카미죠 가.

이 작전은 기본적으로 비밀 작전이고, 자칫하다간 카미죠 하루나는 두캇에 왕국의 정보를 몰래 팔아먹은 배신자로 찍힐 수 있다. 그녀는, 자기 아버지만큼 부패한 쓰레기들에게 빌미를 주고 싶지 않았다. 두캇 공화국에 공짜로 정보를 넘길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오토노키자카 제국의 하라다 미요가 이번 작전에 참가한다고 들었습니다. 제국을 견제할 만한 장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다른 곳 알아보시죠. 이 계획은 지원해드릴 수 없습니다. 태양의 젤러시교 쪽에 요청해서 다른 이단심문관을 요청하겠습니다. 아, 깊은 곳의 교회 분들은 남으셔도 되요. 당분간 입이 좀 줄어들 테니까 지원도 더 많이 할 수 있을 것 같고."

 

두캇 공화국의 스파이를 남겨두면, 발 밑에서 쇠꼬챙이가 언제 올라올 지 모른다. 아이카와 치나츠 같은 유능한 스파이를 경계하는 것은 위정자로서 당연한 일이다.

......최악의, 정말 최악의 경우, 전임 영주인 하루나의 아버지처럼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이단심문을 벌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새하얀 그릇을 구워내기 위해선 잘 태운 뼛가루가 필요하다. 새하얀 도자기로 만들어진 태양의 형상을 띤 조각. 카미죠 하루나의 눈에서 떨어지지 않는 그 조각. 전쟁이 일어나기 전, 제국에 가서 살겠다고 마음먹게 만들어버린 이단심문. 화형. 불바다. 뼛가루.

사람 뼛가루를 반죽해서 구워낸 문양은, 예술가로서의 카미죠 하루나를 유명하게 만든 최고의 걸작이라고 칭송받았다. 아마 그녀의 아버지가, 자신의 명성을 위해 권력을 휘둘러 평가를 끌어올렸던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 끔찍한 결정이.....

 

"혹시, 제가 두캇 공화국의 스파이라고 의심하는 거라면 걱정 안 하셔도 괜찮습니다. 전 이 일이 끝나면 미시로 왕국을 떠날 생각이니까요. 사실 이단심문관 자체를 관둘 생각입니다. 고향에 괜찮은 자리가 나왔더라고요. 제 후임으론 이단심문관이 아닌, 평범한 사람이 올 예정입니다."

 

".......잠깐 손 좀 씻고 와도 됄까요?"

 

"? 아, 예. 괜찮습니다."

 

카미죠 하루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작스러운 퇴실에 모두 당황했지만, 그녀 치곤 상당히 예의를 갖춘 행동이었다. 매끄럽게 흘러내리는, 곱게 빻인 골회(骨灰)의 감촉과 처덕거리던 백토(白土)의 감촉. 손에서 도저히 떨어지질 않았다.

 

 

 

---

 

 

 

"툇, 종교쟁이 놈들..... 영주 고년도 결국 지 애비랑 같은 종교쟁이었구만."

 

"이, 이봐?! 말 조심해! 성기사 앞에서...."

 

"죽여보라고 해! 어차피 부모도 부인도 자식도 저 새끼들이 다 태워죽였단 말이다! 어이! 들리냐?! 죽여봐!!"

 

태양의 젤러시교의 문양은 의도적으로 배제했다. 깊은 곳의 교단의 문장 뿐이다. 하지만 이곳의 사람들은 그것조차 혐오하고 있었다. 수사가 어려워질 것 같은 예감에 아이카와 치나츠가 한숨을 쉬었다.

 

".....제압?"

 

"됐어. 상대했다간 괜히 정체만 드러내는 꼴이 될 거야. 일부러 종교인 행세를 하면서 반응을 보고 있는 거라고."

 

"이단심문관 복장.... 아마 유효..."

 

"죄인들이 숨어버리면 못 잡잖아. 뭐, 이 분위기를 보니 굳이 숨을 필요도 없을 것 같네."

 

"사람 속에 숨은 게릴라.... 매우 유효...."

 

사죠 유키미는 은밀, 위장, 기습에 능한 전문가다. 아이카와 치나츠가 처음 그녀를 소개받았을 땐 반신반의했지만, 이 어린 아가씨는 전문가가 맞았다. 단순 수사관일 뿐인 그녀가 발견하지 못했던 여러 점들을 지적하는 모습에선, 믿음직스러운 프로의 그림자가 비치고 있었다.

 

"....왼쪽 건물 3층, 피해."

 

"에? 꺄악?!"

 

그녀가 말을 마치자마자, 왼쪽 건물 3층에서 오물이 쏟아져 내렸다.

 

"......위험했어. 좀 더, 빠르게 행동해. 여긴.... 적진 한가운데..."

 

"적에게 오물을 부어버리는 거야.....?"

 

"상처 감염 목적..... 발 묶기엔 매우 적합...."

 

유키미가 끌어당기지 않았다면 그녀는 오물을 그대로 뒤집어썻을 게 분명하다. 유키미가 치나츠를 한심하다는 눈으로 쳐다보았지만, 그녀는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골목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마땅히 피할 곳도 없겠네."

 

"함정 주의. 골목은 매복기습에 최적. 진입은 추천하지 않음."

 

그녀 주변의 성기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골목길이란 불로 쓸어버리는 게 가장 안전하다. 그들은 무의식적으로 허리춤으로 손을 옮겨 몰래 숨겨둔 화염병들을 확인하였다.

 

"정찰이야, 정찰. 광신도들은 언제나 문양을 남긴다고. 대로변보단 골목길 같은 곳에. 그 문양을 보면, 대충 이 근처 어디쯤이다라는 걸 알 수 있어."

 

".....아무나, 다 잡아 죽일 생각?"

 

대충 이 근처 어디쯤이라는 말은, 정확한 위치는 모른다는 뜻이다. 유키미는 학살에 협력할 생각은 없었다.

 

"그럴 생각이 없으니까, 깊은 곳의 교단을 대동한 거지."

 

그렇게 말하곤, 그녀는 골목길을 향해 주저없이 발을 뻗었다. 그 안을 얼마간 헤메이다, 어느 문 앞에 도착했다.

 

"어제 밤새 이 동네 세력권과 유력자들에 대해 조사했지. 지금부턴 탐문조사.... 가 아니라, 전도의 시간이야."

 

노크 후 문을 열고 들어가자, 한 눈에 보기에도 험악해 보이는 사람들이 여럿 있었다.

 

"어서오슈, 종교인 여러분들. 고귀한 몸으로 이런 누추한 곳까지 걸어오느라 수고 많았수다. 깊은 곳의 교단이라고 했었나? 정말 맛있어 보이는구만."

 

낄낄대는 천박한 웃음소리.

이런 슬럼가엔, 언제나 폭력을 업으로 삼는 기생충들이 꼬인다. 이런 천박한 자들이 힘을 얻는다는 건, 의외로 귀족 사회와 큰 차이가 없을지도 모른다.

 

 

----

 

[소바가키]

메밀수제비국 비슷한 느낌. 현실의 메밀소바와는 좀 다른 음식.

메밀은 빨리 자라고 수확량도 좋고 맛도 영양도 좋아, 예로부터 구황작물로 많이 이용되었다. 깊은 곳의 교단에서 이에 주목한 것도 당연하다. 본산지인 천축 너머에선 국수의 형태로 만들어 먹는다지만, 위급상황에서 그럴 여유는 없으므로 대충 반죽해 만들다 보니 탄생한 음식이다. 고명이나 다른 야채를 푸짐하게 넣으면 맛있지만, 굶어죽기 직전에 그럴 여유가 있을까.

 

[왕국의 식문화 일부]

뼈와 피는 기피당한다. 얄류트족은 뼈도 피도 잘 먹었다는 듯 하다.

참고로 제국은 뼈 육수를 요리에 종종 사용한다. 피는 호불호가 심하게 갈리는 음식이라 소비량이 많은 편은 아니다.

 

 

 

 

 

 

카미조령에서 있던 사건은 나중에 다룰 기회가 있으....려나? 사실 별 거 없습니다. 그냥 마녀사냥 이단심문 하다 무고한 사람 여럿 태워죽였다고 생각하시면 되요.

 

그리고 참 오래간만에 잡는다 신데렐라 판타지! 늦어서 죄송합니다!!

3 여길 눌러 추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