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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스널리티 P 시리즈] '어제'가 '오늘'과 함께 할 '내일'에게 (2)

댓글: 8 / 조회: 689 / 추천: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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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11-13, 2016 04:01에 작성됨.

'어제'가 '오늘'과 함께 할 '내일'에게 (1) 에서 이어집니다.

 

 


 

윌리엄. P. 존슨.

전(前) 뉴욕 메트로 소속 선발 투수.

양투우타.

데뷔 직후 마이너로 강등되었다가 다시 메이저로 돌아와 ‘사고’로 마운드를 내려오기까지 3년 4개월간 마운드를 지배했던 괴물. 타 팀에게는 공공의 적이자, 뉴욕의 시민, 그 중에서도 메트로의 팬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뉴욕의 연인.

그리고 나의 가장 오래 된 우상.

 

 

팀 창단 최초 퍼펙트 게임, 3년 연속 내셔널리그 MVP, 4년 연속 월드 시리즈 MVP, 4년 연속 사이 영 위너, 4년 연속 골드 글러브 등등. 프로라면 누구나 꿈꾸는 온갖 화려한 전적으로 점철된 삶을 살았지만, 그는 선수로써 살아가던 내내 결코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다. 남들의 눈치를 살폈고, 그렇기에 몇몇 경우를 제외하면 자신의 생각을 철저하게 감추었으며, 자연스럽게 타인에 대한 이야기도 거의 꺼내지 않았다.

겸손의 미덕이 아닌가, 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렇게 멋들어진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모난 돌이 정을 맞는다고 하던가? 그가 선택한 것은, 자신이 모난 돌이라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최대한 땅 속으로 파고들어가는 것이었다.

어린 시절에 겪은 두 번의 커다란 이별이, 소년이었던 그의 가슴에 지워지지 않을 흉터를 남겼기 때문이다.

 

‘그 사고’를 겪고 난 이후, 의식을 되찾은 뒤에도 그의 성격은 꽤나 크게 바뀌었지만,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지 않고,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고, 남들의 평가를 의식하는 점은 그다지 바뀌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심해져 있었다. 남의 평가에 더욱 민감해졌고, 자신을 드러내는 것에 더욱 조심스러워졌으니까.

 

하지만 2년만에 만난 ‘나의 우상’은 절반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함께 저녁밥을 먹으면서도, 그는 쉴 새 없이, 그리고 정말로 즐거운 듯이, 자신이 담당하고 있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시부야 린이라는 아이에 대해서.

호죠 카렌이라는 아이에 대해서.

카미야 나오라는 아이에 대해서.

사기사와 후미카라는 아이에 대해서.

사쿠마 마유라는 아이에 대해서.

카와시마 미즈키라는 여성에 대해서.

 

그리고, 타카가키 카에데라는 사람에 대해서.

 

음식이 식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로서는 드물게 침까지 튀겨 가며 자랑스럽게 그들과 함께했던 이야기를 늘어놓는 그 모습을 보고 있자면, 마치 자식 자랑을 하고 있는 부모님의 모습이 떠올라 나는 그만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왜 웃어?”

 

그렇게 묻는 그에게,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대꾸하며 그의 이야기를 계속해서 들었다.

세상에, 사람이 이렇게 바뀌기도 하는구나, 라고 생각하면서.

 

내가 알고 있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바뀌어버린 그를 보면서, 나는 대체 무엇이 그를 이렇게 바꾸어 놓았는지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17년이라는 세월 동안 내가 하지 못한 것을 단 2년만에 이루어낸 그것이 무엇인지, 내 눈으로 한번 확인해보고 싶었다.

특히나, 그의 이야기에서 유달리 많이 언급되는 그 이름, 타카가키 카에데라는 이름에 대해서는 더더욱 그러한 마음이 강하게 들었다.

 

‘타카가키 카에데. 어떤 사람이지?’

 

……그래. 이 감정은, 분명히 질투였다.

 

 

 

 

************

 

 

 

저녁식사를 마친 우리는 소화도 시킬 겸, 다시 거리로 나와 걷기 시작했다.

 

“아까 가게 주인이 묘하게 너랑 친한 눈치더라? 너 밥 혼자서 먹어?”

“그게 편하잖아.”

“사람들이랑 좀 같이 다녀라. 프로듀서라며?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밥줄 아냐?”

“일은 알아서 할 테니까 걱정 마셔. 응?”

 

레코드 가게 앞을 지나가던 중, 갑자기 그가 발걸음을 멈추었다.

 

“왜? CD라도 사려고?”

“아니, 그런 건 아니고. 너 우리 애들 노래 들어볼래?”

“오호, 이런 작은 매장에도 있는 건가? 어디 솜씨 좀 볼까?”

“듣고 반하지나 마라. 장난 아니니까.”

 

가게로 들어서기가 무섭게, 그는 곧장 샘플이 쌓여 있는 곳으로 달려가 CD더미를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어디보자, 샘플이 여기 어디 있을건데…….”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또 다시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다. 조금 전부터 간헐적으로 느껴지던 기척은, 파파라치들이 풍기는 끈적한 시선이 아닌 문자 그대로 나를 보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나는 가능한 자연스럽게, 주위를 둘러보는 관광객처럼, 최대한 시야를 넓게 하면서 천천히 주위를 돌아보기 시작했다. 그 때, 길 건너편의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아니, 정말로 눈이 마주친 것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이쪽도 안경을 쓰고 있고, 저쪽 또한 안경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두 가지 확실한 것은, 우연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서로의 시선이 겹친 순간, 그 사람이 부자연스러운 동작으로 재빨리 자리를 벗어났다는 점, 그리고 그 사람이 여자였다는 점이었다.

 

“저기, 윌리.”

 

나는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샘플용 CD를 이리저리 뒤집으며 샘플을 찾고 있는 그의 등을 톡톡 두드렸다.

 

“응? 왜……?”

“에잇.”

 

그가 자세를 일으키며 뒤를 돌아보는 바로 그 때, 기다렸다는 듯 나는 손을 뻗어 그의 뺨을 콕, 하고 찔렀다. 가볍게 정전기가 튀고, 약간 얼굴을 찌푸린 그는 곧바로 내게 응징을 가했다.

 

“무슨 짓이야.”

 

손날을 세워 모자를 눌러 쓴 내 정수리를 가볍게 내리친다. 이번에는 이쪽에서 “아얏”하고 과장된 비명을 지르며 목을 움츠렸다.

 

“안 하던 짓을 다 하고 그래.”

“아니, 너랑 같이 서 있는데 아까부터 누가 계속 보고 있었단 말이야.”

“뭐? 누가 계속 보고 있었다고? 너를?”

“응.”

 

고개를 끄덕이자 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거 파파라치 아니야?”

“아니야. 파파라치라기엔 카메라도 없고, 너무 당당하게 쳐다보고 있었어. 거기다 별 다른 수상한 행동도 없었고, 그냥 계속 바라보기만 하더라. 뚫어져라.”

“그래? 그래서 장난을 쳤다?”

“그렇지. 뭐, 커플 처음 보는 건가? 싶어서.”

“커플은 무슨. 그래서, 어떻게 생긴 사람인지는 기억나?”

 

으음, 그러니까……어떻게 생겼더라?

나는 미간을 좁히면서 조금 전에 본 여자의 이미지를 다시 떠올렸다

 

“팔다리가 길었고, 호리호리하고, 머리는 풍성한 단발에……”

“뭐?”

“으음……그러니까, 어떻게 생긴 사람이었냐면.”

 

가게 안을 두리번거리던 나는 마침내 내가 찾던 이미지와 똑같은 분위기를 가진 포스터를 찾을 수 있었다. 푸른 초원을 배경으로 촬영한 사진으로, 녹색을 기조로 한, 하늘거리는 드레스를 걸친 올리브색 머리카락을 가진 여성의 포스터였다. ‘Coming Soon’이라는 글자 위로 한자로 무언가가 적혀 있었지만, 아쉽게도 벼락치기로 다져진 내 일본어 실력은 더듬더듬 말하는 것이 전부였다.

한자 너무 어려워Yo.

 

“아, 이 사람처럼 생겼어.”

“……진짜로?”

“응! 진짜로.”

 

내가 가리킨 포스터를 바라보던 그의 표정이 한쪽 눈썹을 치켜 올린 미묘한 것으로 바뀌었다. 그가 이런 표정을 짓는 것은 보통은 뭔가 꺼림직한 일이 있을 때뿐이었다.

 

“아는 사람이야? 누군데?”

“너도 아는 사람이야. 타카가키 카에데.”

“……엑.”

 

깜짝 놀랐다. 설마하니 조금 전까지 열심히 자랑을 듣던 사람이 눈 앞에 있었을 줄이야. 그는 팔짱을 끼며 아쉽다는 듯 입맛을 쩝쩝 다셨다.

 

“으음, 일찍 자리 끝날 것 같았으면 소개라도 시켜드릴 걸 그랬나…….”

 

그런 그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다년간 다져진 배우로써의 감각이, 여자로써의 감각이 내게 경종을 울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곧 닥쳐올 트러블의 전조를 알리는 경종이었다.

여기서는 조용히 있는 게 더 재미있어지겠지.

 

“열심히 해봐? 프로듀서.”

 

싱글싱글 웃으면서 옆구리를 쿡쿡 찌르자, 나를 바라보는 그의 표정이 확 구겨졌다.

 

“때려도 되지?”

“아잉♥”

“역시 너밖에 없구나. 어금니 꽉 깨물어.”

“어, 뭐야? 프로가 민간인 때려도 되는 거야?”

“응, 지금은 프로 아니야.”

 

 

 

**********

 

 

 

눈꺼풀을 간질이는 햇살에 저는 눈을 떴습니다. 익숙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으응…….”

 

악몽이라도 꾼 것인지, 온 몸에는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저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다가, 문득, 입고 있던 옷이 어제 저녁에 입었던 것 그대로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옷도 갈아입지 않고 그대로 잠들었던 모양입니다. 반쯤 눈을 뜬 채로 침대에 걸터앉아 잠이 깨기를 기다리고 있던 저는 머리맡에 대충 던져놓은 휴대전화를 발견했습니다.

그러고 보면 어제 메일이 왔었지요.

휴대전화의 액정을 켜자, 메일이 두 통 도착해 있었습니다. 하나는 프로듀서에게,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치히로 씨에게서 도착한 메일이었습니다. 아마도 예약발송으로 보이는 듯, 30분 전에 수신된 치히로 씨의 메일은 오늘 오후에 출근하면 된다는 별 의미 없는 내용이었습니다. 어느샌가 잠이 확 깬 저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어제 밤에 수신된 두 번째의 메일을 열었습니다.

 

제 친구에게 타카가키 씨를 봤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자리 일찍 끝났으면 연락이라도 주시지 그러셨어요. 소개해드리려고 했는데.

 

“흥.”

 

코웃음이 나왔습니다. ‘지금 자기 여자친구 소개라도 하려는 거야, 뭐야?’

 

 

……미안해요. 거짓말입니다.

사실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어제 밤, 제가 본 것이 꿈이 아닌 현실이었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습니다. 두근거리던 마음이 순식간에 차갑게 가라앉았습니다. 휴대전화의 메일을 끄고 액정화면에 떠오른 시계를 보았습니다. 오전 10시. 평소에 비하면 약간 늦게 일어난 셈이지만, 오늘은 오전에는 오프이니 느긋하게 준비할 수 있겠네요.

 

“우선 좀 씻어야겠네…….”

 

술 냄새가 진동하는 옷을 벗어 세탁기에 던져넣고 욕실로 들어갔습니다. 탈의실을 지나 욕실에 들어가면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저는 타카가키 카에데. 전직 프로 모델, 현직 아이돌입니다. 그것도 그냥 아이돌이 아닌, A랭크에 랭크된 전국구급 인기 아이돌입니다. 지금의 저는 전국 어디에 가더라도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는다고 자신할 수 있었습니다.

 

“……하아…….”

 

그런데 어째서일까요. 계속해서 어제 밤의 광경이 눈 앞에 떠오릅니다. 그의 옆에 서 있던 여자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비록 얼굴도, 목소리도, 아무것도 제대로 본 것은 없지만, 그래도 그녀의 그 모습이 자꾸만 눈 앞에 아른거립니다.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우리는 수많은 '처음'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가장 가까운 파트너로써, 우리는 수많은 언덕을 함께 넘어 왔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그는 그런 표정을 지어 보이는 것일까요? 지금 그의 옆에 있는 것은, 제가 아닌 다른 사람인데.

당신이 제게 그러셨죠. 저는 이 곳에서 처음으로 만난 파트너라면서……처음으로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한 사람이었다면서……

……거짓말쟁이.

 

‘그 자리는 원래 내 것이어야 했어요.’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뜨거운 물을 뒤집어쓰면서, 저는 아랫입술을 깨물었습니다.

 

 

 

**********

 

 

 

점심시간을 막 넘긴 시각, 한낮의 사무실에는 식후의 나른함이 감돌고 있었다. 치히로는 휴식시간을 이용해 소파에 앉아 커피를 홀짝이며 잡지를 읽고 있었고, 미즈키는 그녀 나름대로 탁자 위에 책을 펼쳐놓고, 장갑을 낀 손으로 얼굴을 이리저리 문지르고 있었다.

 

“P군은 뭐 한대?”

“편집부에서 편집부장님이 급히 찾으셔서, 거기 갔다가 오신대요.”

“고생하네. 밥 먹고 쉬지도 못하고.”

“그러게요…….”

 

대화의 흐름이 멈추고, 째깍, 째깍, 벽걸이 시계에서 초침이 달리는 소리가 주기적으로 울려 퍼졌다. 그 침묵을 깨듯, 찰칵, 하는 소리를 내며 사무실의 문을 열고 프로듀서가 나타났다.

 

“저 왔습니다.”

“수고하셨어요. 차 드릴까요?”

“네. 커피로 부탁드릴게요.”

 

분명히 갈 때는 맨손이었을 그의 옆구리에는 결재판 하나가 끼워져 있었다. 결재판을 자기 책상 위에 올려놓고, 프로듀서는 크게 한숨을 내쉬면서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무슨 일이래요?”

“편집부에서 크리스마스 특집호에 들어갈 사진을 찍고 싶다고 해서요. 모델 출신 두 사람을 빌리고 싶다고 하시네요.”

“두 사람이면, 마유랑 카에데?”

“네. 두 사람 모두 경력도 있고, 어느 정도 고정 소비자도 있으니까요.”

“여기, 커피요.”

“감사합니다.”

 

프로듀서의 앞에 머그잔을 내려놓고, 치히로는 그의 건너편 자리에 다시 앉았다.

 

“나는? 나는 뭐 없어?”

“네. 뭐 딱히 없지요. 심심하세요?”

“응!”

“그럼 체력을 기릅시다. 요즘 계속 방송이랑 라디오 뛰느라 운동 별로 못했죠?”

“응, 생각해보니까 여유를 즐기는 것도 좋은 것 같아.”

“아니죠. 이제 곧 라이브인데 슬슬 체력 길러놔야죠.”

“그건 좀 봐주라……레슨만으로도 힘들단 말이야.”

“사람은 움직일수록 튼튼해지는 법이에요. 그럼 내일 러닝 코스는……”

“치히로! P군이 나 괴롭혀!”

 

그 때, 사무실의 문이 강하게 열렸다. 세 사람의 시선이 일제히 사무실의 입구로 향했다.

 

“타카가키 씨,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사무실로 들어온 카에데는 평소처럼 웃으며 인사를 건네는 프로듀서를 곁눈질로 힐끗 바라보며 까딱, 가볍게 목례를 건넸다.

 

“타카가키 씨, 오늘 일정은…….”

“이따 14시부터 레슨이죠? 알고 있어요.”

“네? 아아, 네……정확합니다.”

”저는 옷 갈아입고 휴게실에 가 있을게요. 시간 되면 알아서 내려갈 테니 걱정 마시고요.”

 

자신을 바라보는 프로듀서를 향해 차가운 말투로 쏘아붙이듯 말한 뒤 카에데는 곧바로 사무실을 나갔다. 쾅, 하는 소리에 이어, 하이힐의 밑창이 바닥을 또각또각 울리는 소리가 멀어져 갔다.

 

“……프로듀서 씨, 카에데 씨한테 뭐 잘못 한 거 있어요?”

 

그녀가 나가는 것을 기다렸다는 듯, 곧바로 자신을 돌아보는 치히로의 시선을 받으면서 프로듀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요……뭐 딱히 생각나는 건 없는데…….”

“이건 냄새가 나는군. 트러블의 냄새야.”

 

미즈키는 정말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연거푸 고개를 갸우뚱하는 프로듀서를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아, 그러고보니 전달사항이 있었는데……잠시 다녀오겠습니다.”

“메일로 보내지 그래? 꼭 직접 전달해야 하는 거야?”

 

미즈키의 말을 듣고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던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 휴대전화가 배터리가 다 됐거든요.”

“그래? 그럼 별 수 없지. 눈치 없이 탈의실 들어가지 말고.”

“그 정도는 안 합니다.”

 

사무실을 나온 프로듀서는 천천히 탈의실로 향하는 복도를 걸으면서 조금 전, 카에데의 표정을 떠올렸다.

 

‘……처음이었지, 그런 표정.’

 

그는 지금까지 그 나름대로 그녀의 여러 가지 얼굴을 봐 왔다고 생각했다. 즐거워하는 표정, 분해 하는 표정, 화가 난 표정, 심통이 난 표정……하지만, 오늘처럼 그녀가 노골적으로 자신에게 분노를 표출한 것은 처음이었다. 처음이었지만, 익숙한 표정이었다.

제대로 말하자면 그녀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서 본 것이지만.

 

‘……아니, 그럴 일은 없겠지.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말자. 그럴 리 없어.’

 

불현듯 떠오른 옛 기억을 부정하듯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느닷없이 심박수가 빨라지면서 이마에 작은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크게 심호흡을 반복한 그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탈의실 앞에 도착하자, 호흡을 가다듬은 뒤 그는 가볍게 문을 두드렸다. 텅 빈 복도에 금속재질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실례합니다. 프로듀서입니다.”

-……무슨 일이시죠?

 

혹시나 싶었지만,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의 통통 튀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프로듀서는 자신의 아랫입술을 지긋이 깨물었다.

 

“미처 말씀 드리지 못한 전달사항이 있어서 왔습니다. 문을 열어주실 수 있으세요?”

-아뇨, 안 돼요. 지금 옷을 갈아입고 있는 중이라서요. 거기서 말씀해주세요.

“……죄송합니다. 그러면, 이대로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네.

 

두터운 철제 문을 사이에 두고, 프로듀서는 품 속에서 수첩을 꺼내어 가장 뒤 페이지에 적혀 있는 내용을 읽기 시작했다. 내일 있을 촬영에 대한 내용으로, 카에데는 오전에, 마유는 오후에 각자 따로 촬영이 진행된다는 내용이었다.

 

“……이상입니다.”

-알았어요. 이 다음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거면 됐죠?

“네.”

-더 할 말씀 없으시면 돌아가 주세요. 옷을 마저 갈아입어야 하니.

“네……실례했습니다.”

 

말과는 달리 뭔가를 말하려는 듯, 입을 달싹이던 그는 단념하듯 고개를 떨어뜨리며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사무실로 돌아가는 프로듀서의 표정은, 비록 자세히 쳐다보지 않으면 눈치채기 힘든 정도였지만, 분명히 일그러져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그는 어린아이가 아니다.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어떤 부분이 잘못되었는지를 알고 있다면 충분히 납득하고, 또 그것을 고칠 만한 능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더욱 답답한 것이다.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알 방법이 없기 때문에. 어디서부터 엇나갔는지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심박수가 더욱 빨라졌다. 그저 맺혀있기만 했던 식은땀은 이제 줄줄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프로듀서는 잠시 발걸음을 멈추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최악의 가정, 그리고 만약 그 가정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자신이 해야 할 대응이 그의 머릿속에서 마치 시나리오처럼 떠오르고 있었다.

 

‘설마……또 이렇게 끝나는 걸까?’

 

쓸데없는 생각이라는 것은 알고 있다. 해서는 안 될 생각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가 살아온 인생이, 그가 겪었던 쓰라린 경험이, 그 자신으로 하여금 부정적인 생각들을 떨쳐내지 못하도록 그를 옭아매고 있었다.

 

“망할!”

 

그 순간, 쾅! 하는 소리가 벽을 타고 울려 퍼졌다. 번개처럼 내지른 그의 오른손이 복도를 두들긴 것이다. 오른손에서 시작되는 격통이 빠르게 치고 올라와 대뇌를 능욕하던 잡념을 재빨리 밀어냈다.

 

“……운동을 안 하니 잡생각만 늘어나는군. 오늘은 땀 좀 빼야지.”

 

가슴 속의 한껏 가열된 숨을 크게 내뱉은 프로듀서는 빨갛게 부어올라 사시나무처럼 바들바들 떨리는 오른손을 주머니 속으로 집어 넣으며 터벅터벅, 사무실을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아이고, 아파라…….”

 

 

 

*************

 

 

 

“더 할 말씀 없으시면 돌아가 주세요. 옷을 마저 갈아입어야 하니.”

 

‘앗……!’

 

저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저 스스로가 들으면서도 깜짝 놀랄 정도로 바짝 날이 서 있었습니다. 이렇게 말하려던 것이 아니었는데.

 

-네, 실례했습니다.

 

지금 무슨 말을 내뱉은 것인지, 저의 머리가 그것을 인식하기도 전에, 문 너머에서 대답이 들려왔습니다.

 

“아, 아뇨, 저기, 이건, 프로듀…….”

 

황급히 문을 열기 위해 문고리를 쥔 순간, 저는 지금 제가 속옷 차림이라는 사실을 떠올렸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 망설이는 그 사이에 뚜벅뚜벅, 발소리가 점차 멀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아아…….”

 

저는 문에 몸을 기대면서 바닥에 주저앉았습니다. 옷을 갈아입던 중이었기에 훤히 드러난 맨살에 닿은 탈의실의 문은 무척이나 차가웠지만, 지금은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저는 대체 무슨 소리를 한 걸까요.

 

‘더 할 말씀 없으시면 돌아가 주세요. 옷을 마저 갈아입어야 하니’? 웃기네. 차라리 그냥 꺼지라고 하지 그랬어?

 

머릿속에서 저를 꾸짖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나 왜 이러는 거지…….”

 

프로듀서는 잘못한 것이 없어요. 고작 친구를 만나러 간 것 뿐입니다. 그래요. 친구일 뿐이에요. 그런데, 그의 얼굴만 보면, 가슴에서 뭉게뭉게 넘쳐흐르는 시커먼 무언가가 제 가슴을 꾸욱, 조여왔습니다.

가슴이 또다시 아릿하게 저려오기 시작했습니다. 그 원인조차도 알 수 없는 가슴의 통증에 연신 한숨을 내쉬면서, 저는 감싸안은 무릎 사이로 얼굴을 파묻었습니다.

 

“엣취!”

 

……얼른 옷부터 입어야겠어요.

 

 

 

일과를 마치고, 평소처럼 미즈키 씨와 치히로 씨의 손에 이끌린 저는 평소에 가던 골목길의 이자카야가 아닌, 번화가의 지하에 위치한 고급 바(Bar)로 향했습니다. 주위를 둘러보면 고급스러운 인테리어와 은은한 조명, 그리고 잔잔한 클래식이 흐르는 환경이 저를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어때, 이자카야도 좋지만 이런 곳도 좋지?”

“예전에 갔던 곳이랑은 또 느낌이 색다르네요. 인테리어는 비슷한데.”

“그게 바의 매력 아니겠어?”

 

우리 세 사람은 꼬치구이나 은행 대신 짭쪼름한 치즈를 안주 삼아, 일본주 대신 와인을 나누었습니다. 과일주이기 때문일까요? 몇 잔 마시지 않았지만 금세 취기가 올라오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그 점은 치히로 씨나 미즈키 씨 또한 마찬가지인 듯, 은은한 백열등에 미치는 두 사람의 얼굴이 다소 발갛게 상기되어 보였습니다.

 

“자, 그럼……취기도 적당히 돌겠다, 본론으로 넘어가 볼까?

“네?”

“말해 봐. 어제 저녁에, 우리랑 헤어지고 나서 무슨 일 있었어?”

 

은은한 조명 아래로 미즈키 씨의 날카로운 시선이 꽂힙니다. 고개를 돌려 치히로 씨를 바라보면, 그녀 또한 같은 눈으로 저를 응시하고 있었습니다. 그 두 사람의 시선을 차마 마주보지 못하고, 저는 붉은 와인이 담긴 잔을 들고 빙글빙글 돌릴 뿐이었습니다.

오늘은 트레이너 씨와 미즈키 씨에게는 민폐만 끼쳤습니다. 레슨은 레슨대로 끊어먹고, 베테랑 트레이너 씨에게는 집중 안 하냐며 호되게 혼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저도 어쩔 수 없었어요. 머릿속이 온통 먹구름으로 가득 차서,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술 기운 때문일까요, 아니면 약간 흥분했기 때문일까요? 저를 쏘아보던 미즈키 씨는 탕, 하고 테이블을 가볍게 두드렸습니다.

 

“카에데가 P군을 대하는 태도, 나는 하루 아침에 사람 대접이 그렇게 바뀌는 건 태어나서 처음 봤어. 그렇다고 P군이 그런 대접을 받아도 될 정도로 막 나가는 사람이었나 하면 그것도 아니잖아?”

“……그렇지요.”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P군한테 물어봐도 모르겠다는 대답만 돌아왔고. 그 사람이 뭐 숨기는 거에 서툴다는 건 알고 있잖아?”

 

“그래요”라고 말하며 치히로 씨가 말을 받았습니다.

 

“프로듀서 씨도 장난 아니었어요? 전달사항 있다면서 카에데 씨한테 다녀오고 나서, 오후에만 서류에서 몇 번이나 미스를 냈는지 알고 계세요? 제가 업무 시작하고 나서 그 사람이 그렇게 흔들리는 건 처음 봤어요. 완전히 정신이 나가 있었다구요.”

 

저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습니다. 두 사람의 말은 송곳처럼 저의 가슴을 파고들었고, 단도처럼 예리하게 제 마음을 찔러대었습니다.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지. 알고 있어?”

“네…….”

“말해 봐,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이야?”

 

추궁하듯 저를 쏘아보는 미즈키 씨의 눈빛을 받으며 저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미즈키 씨가 말씀하신 건 분명 몇 달 전, 프로듀서가 휴가를 받았던 그 날의 일이겠지요.

 

“그게…….”

 

저는 망설였습니다. 고의로 숨기거나, 거짓말을 하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지금 제 감정을, 저의 생각을, 저의 마음을, 저도 전혀 알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왜 이러는 건지.”

“카에데?”

“……죄송해요. 조금,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주세요.”

 

거듭 사과의 말을 전하면서, 저는 자리에서 일어나 제 가방을 챙겼습니다.

 

“죄송해요, 저 몸이 조금 안 좋아서……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대답도 듣지 않고, 두 사람을 자리에 놔둔 채 도망치듯 자리를 벗어났습니다.

죄송해요, 두 분 모두. 하지만, 저도 제 자신을 도저히 알 수가 없는걸요…….

 

 

 

 

다음 날, 아침 일찍 출근한 저를 프로듀서는 평소와 똑같이 맞이했습니다.

“안녕하세요”라며, 평소대로의 웃음과 함께 다가오는 평소대로의 인사. 예전만 하더라도 무척이나 반가웠을 일상의 한 장면이었지만, 그 웃음을 마주하는 순간 제 안에서 또다시 시커먼 무언가가 뭉게뭉게 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신경 쓰다 보면, 저도 모르게 그만.

 

“네, 안녕하세요.”

 

이렇게 저 자신조차 깜짝 놀랄 정도로, 차가운 어조로 말이 튀어나오고 마는 것입니다. 저는 화들짝 놀라 프로듀서의 눈치를 살폈습니다. 혹시 화를 내는 것은 아닐까, 하고 말이에요.

 

“……사무실 거북하시면 휴게실 쓰셔도 되요. 난방 넣어놨으니까.”

 

하지만, 프로듀서는 제 눈을 바라봐 주지 않았습니다. 제 쪽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는 스케줄 보드에만 시선을 주었습니다. 저는 보드마커를 쥐고 있는 그의 오른손에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을까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거린 저는 결국 그에게 말을 거는 것을 단념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도망치기 위해 사무실의 입구로 다가가려는 순간, 프로듀서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시간 되면 연락 드리겠습니다. 휴대전화 꼭 들고 계세요.”

“……알았어요.”

 

저는 사무실을 나왔습니다. 그런 저의 눈에, 손수건으로 손을 닦으면서 사무실로 걸어오는 치히로 씨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아, 카에데 씨! 어서오세요!”

“안녕하세요. 저, 휴게실 좀 쓸게요.”

“네? 프로듀서 씨 안에 없어요? 좀 전 까지만 해도 분명히 계셨는데?”

 

저는 고개를 가로저었습니다.

 

“……죄송해요.”

 

고개를 갸웃거리는 치히로 씨를 뒤로 한 채, 저는 곧바로 휴게실로 들어가, 구석에 설치된 소파에 무릎을 세워 쪼그려 앉았습니다. 프로듀서의 연락이 올 때까지 계속.

 

 

마유는 오후에 따로 촬영을 하기로 되어 있었기에, 저는 프로듀서와 함께 촬영이 진행되는 본관의 실내 스튜디오로 향했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혼자 가고 싶었다는 제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인지, 프로듀서는 “죄송합니다. 저쪽에서 저도 꼭 와달라고 하는 바람에.”라고 저에게 먼저 양해를 구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니, 또다시 마음이 무거워졌습니다.

언제부터 우리가 서로 양해를 구하는 사이가 된 것이었을까요?

 

스튜디오에 도착하자, 이상하리만치 소란스러운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습니다.

 

“……이상하게 촬영장이 소란스럽네요. 손님이라도 왔나?”

 

잠시만 기다리라는 말을 남기고, 프로듀서는 곧바로 스태프에게 다가가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쪽을 가리키며 몇 마디 대화를 나누더니 다시 돌아와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습니다.

 

“영화배우 인터뷰를 하고 있다는군요. 뭐 우리는 이쪽 일만 진행하면 되니까 바로 준비합시다.”

 

프로듀서의 지시에 따라, 대기하고 있던 스타일리스트들이 저희들을 대기실로 안내했습니다. 잠시 후 메이크업을 마치고, 의상까지 갖춰 입은 뒤 촬영장에 들어선 저는 한 순간 제 눈을 의심했습니다.

촬영장의 한 켠에서, 기자분과 함께 인터뷰를 하고 있는 여배우의 모습이 보였던 것입니다. 눈부시게 반짝이는 금발을 늘어뜨리고, 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육감적인 몸을 드레스로 감싼 그녀는, 비록 영화에는 딱히 조예가 깊지 않은 저라도 얼굴을 보면 이름 정도는 곧바로 나올 정도로 유명한 배우였습니다.

네, 영화배우는 영화배우네요. 할리우드 스타라는 부분만 빼면 말이죠.

그제서야 스튜디오의 분위기가 이렇게 어수선한 것이 납득이 갔습니다. 저 정도의 거물이 왔다면 그야 당연히 어수선해질 만 하죠. 이쪽도 톱 아이돌로써의 자존심이란 것이 있지만, 뱀의 머리와 용의 머리는 비교할 것이 못 됩니다.

 

“……?”

“카에데 씨, 준비 됐어요?”

“아, 네! 시작하죠.”

 

카메라맨 씨가 자리를 잡는 사이, 인터뷰 현장을 곁눈질로 바라보던 저는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사람들 사이로 살짝살짝 드러나는 그녀의 모습이, 어제 저녁 저에게 그토록 깊은 패배감을 안겼던 그녀와 같은 사람처럼 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확신은 할 수 없습니다. 눈 앞의 사람이 워낙 유명인이다 보니, 금발만 보고 무심결에 사람을 대입해버린 것일수도 있어요. 심증은 있지만 어디까지나 그것 뿐. 저는 제가 너무 과민반응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 직후, 저의 눈 앞에서 펼쳐지는 광경에 저는 생각을 고쳐야 했습니다. 잠시 휴식을 위한 것인지, 그녀가 그녀의 매니저로 추측되는 사람들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난 그 순간의 모습이, 저에게는 틀림없이 보였던 것입니다.

 

그녀는 활짝 웃으며 카메라의 뒤편, 약간 떨어진 곳에서 인터뷰 현장을 바라보던 프로듀서를 향해 손을 흔들었습니다.

프로듀서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향해 가볍게 목례를 하는 것으로 그녀의 인사를 받았습니다.

 

‘아……아아…….’

 

그 두 사람이 풍기는 분위기. 그것은 2일 전날 밤 번화가에서 본 그것과 완전히 똑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로 인해 저는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그녀가 바로 그녀였다는 사실을 말이에요.

 

‘그랬구나…….’

 

혼란스럽던 머리가 단번에 차갑게 가라앉았습니다. 펄펄 끓는 냄비에 얼음물을 끼얹은 것처럼, 저는 순식간에 평정을 되찾은 것입니다. 저를 향해 렌즈를 번뜩이는 카메라를 바라보며, 저는 마음을 굳혔습니다.

 

‘나도 어른이야. 더 이상 도망 다니지는 않겠어.’

 

그렇게 결심하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후련해졌습니다. 이제 저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오직 단 하나. 좀처럼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그 남자를 어떻게 추궁할 것인지, 그 방법만이 계속해서 떠오르고 있었습니다.

 

 

 

**********

 

 

땡, 땡, 땡.

조용한 사무실 안에 가느다란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틱, 하고 약간 어긋난 소리를 마지막으로 멎은 종소리는 프로듀서가 차고 있는 손목시계에서 새어나오는 것이었다. 가만히 앉아 모니터와 눈싸움을 하던 프로듀서는 늘어지게 하품을 하면서 왼팔의 시계를 바라보았다. 시계는 어느덧 밤 8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어제 잠을 제대로 못 자서 그런가……더럽게 피곤하네.”

 

부실한 조명 때문인지, 중얼거리며 이리저리 몸을 푸는 프로듀서의 얼굴에는 피로한 기색이 역력했다.

마무리만 하면 된다고 하면서 같이 남겠다는 치히로를 먼저 퇴근시킨 것이 오후 6시였으니, 자리에 앉은 지 벌써 두 시간이나 지난 것이다. 평소같았으면 순식간에 끝내고 집에 갔을 시간이었지만, 오늘은 좀처럼 집중이 되질 않았다. 간단한 서류작업에도 몇 번이나 미스가 발생하는 것인지, 그걸 수정하는데만도 어마어마한 시간이 소요되었다.

비록 그 원인은 알 수 없었지만, 그는 자신을 이렇게 흔들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에 대한 대책도 머릿속으로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움직일 수 없었다. 그것을 확인하려 할 때마다, 그의 가슴이 그것을 거부하고 있었다.

두려웠던 것이다. 그 뒤에 일어날 일들이. 그 자신이 가장 두려워하는, 보고 싶어하지 않는 최악의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었으니까.

 

“시간 정말 빠르구나……뭐, 이 정도면 내일 마저 나와서 정리하면 되겠군.”

 

순식간에 지나간 시간에 한숨 뒤섞인 말을 내뱉으며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퇴근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그 때, 사무실의 문이 조용히 열렸다. 경비원인가 싶어 사무실의 입구를 바라본 프로듀서는 뜻밖의 인물의 등장에 놀랐다는 듯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타카가키 씨? 아직도 계셨습니까?”

“네에. 프로듀서한테 묻고 싶은 게 있어서요. 그러는 프로듀서야말로 아직 안 갔네요?”

“네, 뭐……조금 볼 일이 있어서요. 타카가키 씨는 무슨 일입니까?”

 

프로듀서의 말에 대꾸하는 대신, 카에데는 조용히 문을 닫고, 팔을 뒤로 돌려 찰칵, 하고 잠금 장치를 잠갔다. 퇴근 시간이 지났기에, 사무실 내부에는 프로듀서의 자리 근처에만 불이 켜져 있었다. 사무실의 입구 근처까지 어렴풋이 비치는 불빛으로는 사람의 윤곽은 볼 수 있었지만, 그 사람의 표정까지는 보이지 않았다.

카에데는 한 걸음씩, 천천히 그를 향해 다가가기 시작했다. 한 걸음씩 그를 향해 다가가던 카에데는 마침내 전등의 불빛이 닿는 곳까지 도달했다. 그녀의 얼굴을 바라본 프로듀서는 흠칫 놀라며 반 걸음, 뒷걸음질을 쳤다. 카에데가, 평소의 그녀라고는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째서 물러서시는 건가요?”

“……타카가키 씨.”

“프로듀서, 저,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어요.”

“왜 이러세요……?”

“왜냐구요? 그건 프로듀서가 잘 알지 않나요?”

“……모르겠습니다.”

 

천천히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카에데를 피하듯 프로듀서는 그녀의 발걸음에 맞추어 한 걸음씩 뒷걸음질을 쳤다. 그런 그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카에데는 한 걸음씩, 한 걸음씩, 프로듀서와의 거리를 조였다.

두 사람이 같은 극의 자석처럼 가까워졌다 멀어지기를 반복하던 그 때, 툭, 하고, 프로듀서의 등이 사무실의 벽에 닿았다. 당황하며 그가 몸을 옆으로 빼려는 순간, 카에데가 그를 향해 달려들어 그의 옷깃을 강하게 붙들었다. 그의 뒤통수가 벽에 부딪히며 쿵, 하는 소리를 냈다.

 

“윽……!”

 

툭, 하고 그의 안경이 떨어졌다. 전등 아래로 드러난 검고 붉은 그의 눈동자를, 녹색과 푸른색의 눈동자가 바라보고 있었다.

뇌를 울리는 충격에 신음을 흘리는 프로듀서를 쏘아보며 그녀는 차가운 말투로 그를 추궁하기 시작했다.

 

“……그 여자는, 누구에요?”

“그 여자라뇨……?”

“3일 전, 밤에 같이 있었던 여자. 오늘 아침, 스튜디오에서 당신에게 인사를 건넨 그 여자요.”

 

그의 옷깃을 강하게 붙들고, 카에데는 계속해서 식은땀을 흘리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냥 친구입니다. 오래 된 친구요.”

“거짓말.”

“정말이에요.”

“거짓말!”

“거짓말 아닙니다.”

 

그의 눈을 바라보던 카에데는 고개를 푹 숙였다. 옷깃을 잡고 있던 그녀의 손이 스르륵, 떨어져 나갔다. 아니, 떨어져 나가는가 싶었던 그녀의 두 손은 이내 주먹을 쥐어 그의 가슴을 통통 두드리기 시작했다.

 

“거짓말이잖아요……왜 자꾸 속이시는거에요……?”

“거짓말 아니라고 하잖아요. 그냥 친구에요. 오래 된 친구.”

 

프로듀서는 자신의 가슴을 콩콩 두드리는 카에데의 두 손을 붙잡았다. 그러자 그녀는 고개를 들어 프로듀서를 올려다 보았다. 마침내 드러난 그녀의 표정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뜨릴 듯 울먹이고 있었다.

 

“친구라구요? 그럼, 어째서 그런 행복한 표정을 짓는 건가요?”

“타카가키 씨…….”

“당신, 나에게는 그런 표정 지어주지 않았잖아요……그런 얼굴도 보여주지 않았어요……!”

 

금방이라도 넘칠 듯 차오르던 그녀의 눈에서 마침내 한 방울, 빛나는 구슬이 굴러 떨어졌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프로듀서는 숨을 삼켰다.

 

“P씨는, 저에게 있어 처음으로 사귄 친구였어요. 처음으로 만난 파트너였어요. 처음으로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를 한 상대였어요……당신에게 저는 어떤 존재였죠? 그냥 아이돌이었나요? 판매용 상품이었나요?”

“……아닙니다.”

“제가, 그녀보다도 못한 사람인가요? 그런거에요?”

“아닙니다.”

“그럼 가르쳐주세요. 그 여자가 누구인지. 당신과는 어떤 관계인지!”

 

또 다시 또르르, 조명을 받아 은빛으로 반짝이는 구슬이 떨어졌다. 사무실 바닥에 떨어진 그것은 찰박, 하는 미미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작은 물방울 자국을 만들었다.

 

“그건…….”

“아니에요.”

 

프로듀서가 뭐라 말하기 위해 입을 열려는 순간, 그녀는 그의 몸을 강하게 밀쳐냈다.

 

“아뇨, 말하지 마세요. 듣고 싶지 않아요.”

“타카가키 씨. 잠시만, 잠시만요.”

“……돌아갈게요. 듣고 싶지 않아요. 아무것도, 말하지 마세요!”

“크윽, 타카가키 씨!”

“……최악이야.”

 

거세게 밀려난 프로듀서가 잠시 휘청거리는 틈을 타, 카에데는 재빨리 사무실을 뛰쳐나갔다. 그녀의 옷깃이라도 잡기 위해 프로듀서는 손을 뻗었지만, 간발의 차이로 그의 손은 허공을 휘저었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사무실의 문이 닫히고, 또 다시 사무실에 혼자 남게 된 프로듀서는 안경을 주울 생각도 하지 않고 그저 멍하게, 닫혀버린 사무실의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무실을 뛰쳐나온 카에데는 회사 밖으로 나와서야 달리던 발걸음을 멈추고 한껏 거칠어진 호흡을 가다듬었다. 잠시 후, 어느 정도 호흡이 정리되자 그녀는 고개를 들어 사무실이 있는 별관을 바라보았다. 2층의 한 구석, 아이돌 부서의 사무실에는 아직까지도 불이 켜져 있었다.

 

“하아…….”

 

가방 속에서 손수건을 꺼내, 말라붙은 눈물 자국을 닦아낸 카에데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환멸이나 그에 대한 원망 등, 여러가지가 담겨 있는 한숨이었다.

 

 

 

**********

 

 

 

결국 도망치는 것을 선택한 댓가로 아무것도 결착을 짓지 못하고, 아무것도 끝내지 못한 어정쩡한 상태로 저는 주말을 맞이했습니다.

치히로 씨, 미즈키 씨와 함께 시사회를 보러 가기로 한 날이었기에, 저는 늦잠을 자고 싶었던 마음을 억누르고 두 사람을 만나러 나왔습니다. 아픈 것도 아니고 고작 그런 이유로 약속을 깰 수는 없으니까요.

 

시사회가 열리는 곳은 도쿄 시내의 커다란 영화관이었습니다. 1층에는 포토존과 함께 레드카펫이 깔려 있었고, 가장 큰 상영관에는 시사회를 기념하는 플랜카드나 화환 등이 걸려 있었습니다.

 

“와……끝내주네. 라인업 봐. 제작비만 어마어마하게 때려박았겠는데.”

 

상영관으로 향하는 복도에는 배우들의 이름, 인사말이 적혀 있는 스틸컷이 든 액자가 걸려 있었습니다. 그것들 하나하나를 바라보던 미즈키 씨와 치히로 씨는 탄성을 질렀습니다.

입구에 있던 직원에게 티켓을 제출하고, 티켓에 적혀 있던 우리들의 자리로 향하면서 저는 내심 감탄했습니다. 하나같이 가벼운 변장을 하고는 있었지만, 업계에서 내노라 하는 사람들이 여기저기 객석에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시사회의 첫 날에는 VIP들을 위주로 초청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설마하니 우리가 그런 입장이 될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못 했어요.

우리가 자리에 앉자, 기다렸다는 듯 불이 꺼지고 영화가 시작되었습니다.

 

영화의 내용은 여자 주인공의 시점에서 진행되는 평범한 로맨스 영화였습니다. 낯을 가리는 소심한 성격의 여자 주인공은 마찬가지로 혼자서 외롭게 지내오던 남자 주인공을 만나게 되고, 두 사람은 함께 여러 가지 일을 겪으면서 두 사람의 인연이 점차 깊어지게 되는 내용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의견 차이로 싸우기도 하고, 중간에는 남자 주인공의 소꿉친구인 여자가 등장해 갈등을 빚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두 사람은 영원히 함께 할 파트너로써 서로를 지지해주기로 맹세하는 결말로 영화는 끝을 맺었습니다.

영화 관람을 마치고, 우리는 잠시 후 배우들이 나오게 될 레드카펫이 깔린 포토존을 향해 이동했습니다.

 

“음, 영화 자체는 그럭저럭이네요. 내가 너무 큰 기대를 했나?”

“그러게. 배우들 연기력이 먹여 살렸지, 안 그랬으면 재미 없었을 것 같아. 카에데는 어땠어? 굉장히 집중해서 보는 것 같던데.”

“네…...네? 아, 저요?”

 

저를 부르는 미즈키 씨의 목소리에 저는 퍼뜩 정신을 차렸습니다. 미즈키 씨의 말대로, 아무래도 영화에 너무 몰입했던 것 같네요. 눈을 감으면, 금세 영화의 클라이맥스 부분에서 소꿉친구였던 여자가 여주인공에게 했던 대사가 떠오르는 것만 같았습니다.

 

명심하도록 해. 절대로 잊지 마. 그가 당신을 바꿔놓은 만큼 당신도 그를 바꿔 놓았다는 사실을. 너희는 결국 동류야. 사람은 같은 처지의 사람에게 끌리는 법이니까.

 

그래요. 멋진 영화였습니다. 두 사람의 인연의 발전을 그린 아름다운 영화였어요. 다만, 여자 주인공이 하필이면 그 여자였다는 게 문제였지만요.

 

“아, 시작한다.”

 

미즈키 씨의 목소리가 저를 다시 현실로 불러왔습니다. 정신을 차려 보니, 제 눈 앞에는 영화의 제목과 스폰서의 로고가 박혀 있는 포토존이 있었습니다. 그 때, 장내 스피커를 통해 사회자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잠시 후, 배우 분들과 간단한 포토타임을 갖겠습니다. 희망하시는 분들은 포토라인 앞으로 모여 주시기 바랍니다.]

 

방송이 나오고 잠시 후, 연미복과 드레스 차림의 배우들이 우르르 나와 포토라인에 도열하기 시작했습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그녀 또한 그곳에 있었습니다. 하나 둘씩 모여들기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지지 않도록, 저는 손을 들며 포토라인 앞으로 한 걸음 다가갔습니다..

 

“어? 카에데 씨, 사진 찍으려고요?”

“네. 기왕 온 김에 한 장 찍어보려구요. 이런 곳에 온 건 처음이기도 하고.”

 

치히로 씨에게는 그렇게 둘러댔지만, 사실은 다른 뜻이 있었습니다. 저의 시선은 아까부터 단 한 사람에게 못박혀 있었어요. 그녀는 바로 포토라인의 한쪽 끝자락에 서 있는 사람. 정열적인 붉은 색의 드레스를 걸치고 있는 금발의 여배우입니다.

……그래요. 저의 타겟은, 처음부터 그녀밖에 없었습니다.

잠시 후, 마침내 포토타임이 시작되었습니다. 대열의 가장 앞쪽에 서 있던 저는 곧바로 레드카펫 위로 올라갈 수 있었습니다. 거침없이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저를 바라보던 그녀는 약간 놀란 듯, 푸른 벽안을 동그랗게 떴습니다.

 

“Hi! 우리 본 적 있죠? 3일 전에.”

 

그 순간, 저는 등줄기를 타고 전류가 흐르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본격적인 변장 까지는 아니더라도 가벼운 변장 정도는 하고 있었는데 말이에요. 혹시, 이 여자도 눈치채고 있었던 것일까요? 제가 멍하게 굳어 있는 모습을 본, 그녀는 씨익 웃으면서 저를 가볍게 끌어안으며 우리들을 바라보고 있는 카메라의 렌즈를 가리켰습니다.

 

“Oh, It’s a joke, 농담이에요. 자, Smile~!”

 

찰칵, 하고 셔터가 닫혔습니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끝나버린 촬영이었습니다. 그렇게 몇 장을 더 찍은 뒤, 저는 “Thanks for watching”이라고 말하는 그녀와 가볍게 포옹을 하고, 악수를 나누었습니다.

 

‘응……?’

 

그 때, 맞잡은 손아귀 속으로 무언가 작은 이물질이 비집고 들어왔습니다. 제가 그것의 정체를 확인할 겨를도 없이, 그녀는 다시 한번 저를 가볍게 끌어안았습니다.

 

“혼자서 열어봐요.”

“……?”

 

저의 등을 가볍게 두드리며, 그녀는 약간 어눌한 일본어로 저의 귓가에 속삭였습니다. 포옹을 풀고,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들면서 그녀는 저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See you later, Buddy.”

 

포토라인을 내려온 뒤, 저는 곧바로 화장실로 향했습니다. 손아귀에 꼭 쥐고 있던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말이지요.

 

“이건…….”

 

그녀가 내 손에 쥐어준 것은 작게 접힌 쪽지였습니다. 저는 그 쪽지를 펼쳤습니다.

 

[오늘 저녁 7시~9시 사이, K호텔, 1620호, 혼자 올 것.]

 

 

-------------- <'어제'가 '오늘'과 함께할 '내일'에게(3)>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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