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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섞인 그림자 - 5 (카나데 X 린 SS)

November 05, 2016 (토) 22:48에 작성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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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쯤 젖혀진 머리카락을 두 손으로 모아 묶었다. 머리끈이 보이지 않아, 한 결로 모은 머리카락을 오른손으로 고정하고 왼손으로 묶인 머리카락의 끝자락을 쥐어 머리를 한 번 매듭지었다. 스포츠 브라 어깨끈 사이에 살짝 끼어있던 머리카락이 피부와 브라 사이를 빠져나간다. 치골을 넘던 머리카락이 배꼽 높이의 등에 닿았다. 묶던 과정에서 빠져나온 앞 머리카락 몇 가닥이 이마에 닿았다. 이마에 맺혀있던 땀방울에 닿아, 머리카락이 부드러운 탄력을 잃고 이마에 들러붙었다. 세면대의 수전을 틀어 손으로 쏟아지는 수돗물을 받아 이마를 훔쳤다. 늘러붙은 앞머리는 여전히 이마에 붙어있지만, 이마 정 가운데에서 모근 가까이 외곽으로 밀려 쓸 데 없는 감촉을 유발하지 않는다. 오랜만에 하는 댄스가 몸 안의 물러진 근육을 놀라게 만든 건지, 다리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다. 화장실 변기에 앉아서 10분이라도 잠시 쉬고싶은 생각이 간절해진다.

  "하나, 둘, 스텝, 시부야!"

트레이너가 박자에 맞추어 말을 끊었다. 스텝이 반 박자 느려지고 자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카나데의 댄스를 베껴 따라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발에 들어가는 힘을 잘못 조절해서 무릎이 충격을 과하게 받았다. 어깨 근육이 계속 당긴다. 숨이 급박하게 차올라 이제 따라가기 힘들다. 네 번째로 듣는 반주음악의 끝이 들린다. 조금만 더, 조금만.

  "그만!"

밀려 있던 숨이 한꺼번에 폐 속으로 밀려 들어온다. 목구멍에 화약이라도 뿌린 것 마냥, 코 끝과 목구멍이 알싸하다. 한 두 번 기침을 하다 입을 질끈 다물고 침을 삼키자, 얼마 없던 침이 사라져 입 안이 메마르고 귀 속이 멍하다. 삼킨 침은 목구멍이 자신의 자리가 아니라고 외치며 눈가로 탈출한 것인지, 눈가에 눈물이 살짝 돌았다. 레슨 룸 구석에 놓은 물통을 낚아채듯 집어 물을 삼켰다. 숨 대신 삼키는 물은 입 속과 몸 속 갈증을 없애주었지만, 폐는 물을 마시는 짤막한 시간 동안 숨이 끊기는 것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찌부러진 폐를 어떻게든 부풀려 본다. 

  "여전하네, 베테트레 씨."

  "이젠 마스터 트레이너다."

입가를 훔치고 바닥에 쓰러지듯 앉았다. 카나데는 물통을 손에 쥐고 숨을 들이마쉬고 있었다. 나와는 달리 고르게 마쉬는 숨과 꼿꼿이 뻗은 다리, 무너지지 않은 균형이 그녀가 현직으로 라이브를 뛰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게 만들었다. 분명 20대 후반일 텐데, 대단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시부야, 아까 스텝이 느려졌다. 그리고 자세도 불안정하고. 턴 할때 무제중심이 무너져서 느려진 거 알지?"

  "알고 있어."

숨을 크게 들이마쉬고, 내뱉는다. 숨을 천천히 고르며 목에 남은 알싸한 감각이 사라질 때까지 물을 마신다.

  "그런데 아오키 씨, 왜 피트니스 대신 댄스 레슨을 받는거지?"

심장박동이 안정적으로 느려지는 게 느껴지고, 숨을 고르게 들이마쉰다. 등에 맺힌 땀이 식어간다,

  "글쎄, 사장의 지시이니, 나에게 물어보아도 할 말은 없다만."

  "굳이 댄스 레슨을 받을 필요가 있는지 가볍게 의문이 든다는 거야."

  "내가 생각하기에도, 갑작스러운 피트니스 보다는 조금이라도 익숙한 댄스 레슨이 맞을 것 같군. 댄스도 상당히 강한 운동이니까."

  "문제는, 내가 무대 위에서 춤을 출 일은 없다는 거지."

  "댄스 레슨이 오로지 스테이지 위에서 만을 위한 건 아니다. 연기를 할 때도, 연기의 자세의 안정성을 늘려주고 정확성을 높여주지. 아무 이유없는 행위가 아니라고."

  "그런가..."

물통을 비우자, 트레이너가 박수를 쳤다. 5분이 너무 빠르게 지나갔다.

  "휴식 끝, 다시 1회 반복! 시부야는 아까 말한 대로 움직임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하야미는 가사 생각하며 호흡 고르고!"

발을 박차고 스텝을 다시 시작했다. 피아노로 편곡된 '호텔 문사이드'의 멜로디가 레슨 룸을 채운다. 박자가 잘 드러나지 않아 스텝을 밟는게 어렵다.

  

카나데가 택시를 잡았다. 택시의 문이 열리고 카나데가 먼저 들어갔다. 택시기사가 짤막하게 인사를 하며 어디를 가느냐고 물었다. 

  "간단하게 뭐라도 먹고 들어갈까?"

  "아니, 좀 피곤해."

  "그럼 집으로 가는 걸로."

카나데는 택시기사에게 주소를 알려주었다. 택시기사는 주소를 정확히 몰라 오사키 역에서 따로 설명을 부탁드린다고 말하며 택시를 출발했다. 관성이 부드럽게 몸에 감기며, 몸에 얕은 진동이 퍼진다. 바퀴가 도로를 읽는 게 느껴진다.

10년만에 댄스 레슨을 했다. 그것도 5시간이나. 너무나도 오랜만에 댄스레슨을 했더니, 몸 여기저기가 갑작스러운 격렬한 운동에 자못 놀랐다. 내일이면 온 몸이 비명을 지르며 눈을 뜨겠지. 침대에서 일어날 수는 있을까? 눈을 감고 좌석의 머리받침에 목을 고정했다. 부드러운 진동이 의자에서 느껴졌다. 택시의 진동이 점점 멀리 떨어진 파장처럼 부드러워질 때쯤, 주머니에서 반복되는 진동이 느껴졌다. 전화기를 주머니에서 꺼냈다. 미시로 사장이라는 글자가 화면에 떠 있는 게 보인다. 받을까, 말까 하는 두 가지 생각이 머리에 짤막히 스친다. 하지만 사장과의 거래를 생각하면, 그녀의 연락을 무시할 수 없다. 무시한 연락에 우즈키의 행방이 적혀 있을지도 모르니까.

  <시부야인가.>

당신이 전화를 걸었으니, 누구인지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되잖아.

  "왜?"

  <언급하기 늦었지만, 잡지 촬영 수고가 많았군. 매우 호조다.>

  "몰라. 신경 안 쓰고 있었어."

  <잡지나 TV도 보지 않는 건가?>

그런 개인적인 사생활에 신경 쓸 만큼, 당신은 바쁜 사람이 아닌 가봐 하고 묻고 싶은 것을 참았다.

  <뭐, 상관 없다.>

일방적으로 질문하고 일방적으로 결론 내리기. 사장의 간판격인 행동이자, 고질적인 이 여자의 단점.

  <그나저나 하야미와 같이 거주 중이라고 들었다만.>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재확인 하는 것 같은 무기질적인 목소리가, 오히려 짜증나는 호들갑이나 이상한 의미가 담긴 말꼬리보다 한 결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나데가 무엇 때문인지는 몰라도 사장에게 내 동거를 말한 것 같았다. 굳이 말할 필요 없는 말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녀는 내 무언을 긍정으로 받아 들인 듯 일방적으로 말을 꺼냈다. 

  <하야미의 건의 대로, 주거비 지원과 차량 대절을 해 주지.>

  "카나데가?"

카나데가 창가에서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봤다. 나도 카나데를 쳐다봤다. 전화기를 든 손이 얼굴을 가려 내 표정은 아마 보이지 않는 것 같다. 카나데가 무심히 고개를 돌려 다시 창가를 바라봤다. 아마 내 입가를 봤으면, 어이가 없는 듯 벌려진 입가를 봤으면 저렇게 무심하게 고개를 돌리진 않았을 텐데.

  <그리고 네 공식적인 재 데뷰 브리핑 날짜가 잡혔다. 다음주 수요일이다.>

사장은 자신의 말이 끝나지 않았다는 듯 계속해서 이야기를 했다. 브리핑이라. 기자 떼 앞에서 플래시 세례를 받으며 뭘 말하는 것은 늘 기분 나쁘다. 자신들 앞에 서 있는 모든 것은 죄인인 것마냥, 받아적고 찍어대는 그런 모습. 기분 나쁜 모습.

  "알았어. 그럼 뭘 하면 되지?"

  <기자회견에 맞추어 대본을 체크하기만 하면 된다. 나머지는 우리 측이 준비하니.>

  "알았어."

  <급여에 대한 논의는 데뷰 후에 이야기 하기로 하지. 일시금을 지급했으니 확인해 보고, 문제가 생기거든 재무부에 연락하도록.>

자신의 할 말이 끝났는지, 사장으로부터 전화가 끊겼다. 질문을 물을 상대가 옆에 있다는 것을 알기라도 하는 걸까. 아니면 자세한 내용은 자신의 아랫사람이 알려줄 거라며 고압스럽게 영화 속 주인공을 내쫓는 비호감적인 상사같은 캐릭터 임을 강조하려는 걸까. 나는 전화기를 주머니에 집어 넣고 카나데를 향해 입을 떼었다.

  "카나데. 사장한테 내가 동거하는 거 말했어?"

카나데가 나를 바라보며 짧은 미소를 지었다.

  "아, 사장이었어?"

볼멘섞인 눈초리를 눈치 챈 듯, 카나데는 지체없이 말을 꺼냈다.

  "저번 주에. 린도 같이 주거비 지원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차량 대절은?"

  "그건 사장 생각. 아무래도 우리 둘의 스캔들이나, 안전을 위해서 직접 관리하는 게 좋다고 생각하는 거 같아."

  "카나데는 그렇다 쳐도, 나는 굳이 그럴 필요까지 없다고 생각이 드는데."

  "사장 나름의 배려, 같은 거 아닐까."

가벼운 한숨이 나왔다.

  "말할 거라면, 나한테도 알려주면 좋았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말하지 않은 점은 미안해. 미처 생각을 못 했어."

카나데가 미안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이래서는 마치 내가 추궁하는 듯한 모양새 같잖아. 

  "카나데도 나를 위해서 말한 거니까."

  

  

  

나와 카나데는 집으로 돌아와 간단하게 이른 저녁을 먹었다. 카나데가 연어를 소금으로 간해 살짝 구워내 접시에 담고, 양파와 당근, 브로콜리를 작게 썰어 볶아내 연어 옆에 놓았다. 나는 식탁을 닦고 냉장고에서 주먹 크기의 호밀빵을 두 개 꺼내 오븐에 살짝 굽고 각각 반으로 갈라 일반적인 수프 볼보다 좀 더 큰 수프 볼에 담았다. 스튜를 담을 때 쓰는 그릇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넓어서, 별로 크지 않던 빵이 한결 작아 보였다. 간장에 와사비를 덜은 종지를연어가 담긴 그릇옆에 곁들여 놓았다. 화려하거나 풍부한 맛은 아니지만, 재료 본연의 맛과 정갈함이 잘 살아났다. 식감도 꽤 좋았다. 연어는 약간 설익혀 퍽퍽하지 않고 부드러웠고 야채볶음도 각 본연의 향취가 섞이지 않은 채 아삭함이 적당히 남아있었다. 빵 속 약간 거친 호밀조각은 씹을 때마다 고소함이 느껴졌다. 양은 일반적인 사람들의 눈에는 허기를 약간 가실 정도로 적은 양이었지만 우리에게는 적절한 양이었다. 나와 카나데는 별다른 말 없이 묵묵히 저녁을 먹었다.

저녁을 먹고 난 뒤, 나는 서재에서 책을 한 권 골라 거실에 나왔고 카나데는 소파에 놓았던 태블릿을 집어 영화를 보았다. 검은 원목으로 만든 스칸디나비아 스타일의 커피 테이블에 커피를 담은 머그잔을 올려 놓고 허리 뒷켠에 작은 베개를 놓아 자세를 단단하게 고정했다. 손바닥보다 조금 큰 하드커버의 중량감은 한 손으로 책을 보기에는 약간 무거웠다. 다리를 꼬고 책등을 무릎에 얹었다. 나와 카나데는 한 시간을 조금 넘게 소파에 앉아 책과 영화를 보았다. 책을 절반 정도 읽어, 목을 스트레칭하며 시계를 보았다. 시계초침이 8시 가까이를 가리켰다. 목을 스트레칭 하는 겸 고개를 돌려 카나데를 보았다. 꽤 큰 헤드폰을 착용한 카나데는 태블릿에 집중하고 있었다. 걸친 무테 안경에 스크린의 빛이 반사되었다.

태블릿 스크린의 빛은 그닥 강하지 않고 거실에는 얕은 주광빛 긴 스탠드 조명만 켜져 있는데다 시나가와의 야경 또한 오늘은 별로 밝지 않음에도, 카나데의 눈은 이유없이 유난히 빛나는 것 같았다. 카나데의 눈을 보고 있자니 왠지 모르게 책에 흥미를 잃어, 나도 책을 읽는 것을 관두고 카나데의 손에 걸린 영화를 보았다. 스크린에서 흐르는 각양각색의 빛이 카나데의 손가락에 닿아 얇고 선명한 빛의 감촉을 그려 넣었다. 여주인공이 남주인공의 뺨을 두어 번 치고 깊게 키스를 하는 장면을 마지막으로 하며 영화는 끝났다. 나는 고개를 살짝 들어 물끄러미 카나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카나데의 눈 속에 담긴 빛은 아까 전보다 훨씬 더 다채롭고, 한층 더 깊게 담겨 있었다. 눈물은 한데 뭉쳐 뺨을 타고 흐르는 대신, 그녀의 눈동자에 조용히 감싸여 빛을 한층 더 아름답게 깎아주었다. 카나데는 헤드폰을 벗고, 그제서야 내 기척을 느꼈는지 얼굴을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린도 보고 있었어? 알려주었다면 헤드폰 벗었을 텐데."

  "아니, 괜찮아. 집중하는 것 같았고."

카나데는 소파에서 일어나 식탁에서 전기주전자의 전원을 올리고 머그잔에 인스턴트 커피를 따 부었다. 나도 한 잔 타달라고 말하려다 관뒀다.

  "음향기기에 관심이 많은가 봐?"

  "무슨 말?"

  "스피커도 그렇고, 헤드폰도. 꽤 비싸 보여서."

소파에 놓인 헤드폰을 집어 이리저리 만져보았다. 헤드폰 몸통에는 위에서 아래로  'Bowers & Wilkins'라는 영어가 음각되어 있다. 브랜드 이름인 걸까? 무게도 약간 나가는 편이고, 아마 꽤 비싼 모델인 것 같았다. 헤드폰을 머리에 쓰고 전화기에 꼽은 뒤 음악을 하나 틀어 코러스 부분으로 당겼다. 음의 분리도 깨끗하고, 해상력도 좋은 편. 모든 음역대를 적절히 잘 받아준다. 좋은 헤드폰이다.

  "아, 그거. 제작년에 아리스에게 생일선물로 받았어."

아리스라. 아리스가 선택한 물건이라면 분명 좋은 물건이겠지. 전기주전자의 전원이 끊기는 소리가 들리자, 카나데는 주전자의 손잡이를 잡고 머그잔에 물을 부었다. 잔잔하게 물붓는 소리가 들렸다.

  "스피커는, 음. 집들이 선물 같은 거랄까?"

  "미시로 사장이 보낸 거네."

생각할 시간도 없이 바로 답이 떠올랐다.

  "정답. 그래도 음악을 업으로 삼았으니. 괜찮은 제품인 것 같아서 거절하지 않고 받았어."

  "흐응."

  "네버 세이 네버 라도 들을래?"

그거, 놀리는 거지?

  

읽다 만 책의 막바지에 다다르자, 카나데가 샤워를 마치고 화장실의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린."

  "응."

책을 덮고 커피테이블에 놓았다. 소파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고개를 돌리자 카나데의 반라가 보였다. 목욕가운이 어깨에서 흘러 허리에서 반쯤 감겨진 채로 그녀의 오른쪽 가슴이, 살짝 벌려진 앞섬에는 그녀의 오른쪽 허벅지와 치골이 살짝 보인다.

  "카나데, 가운!"

고개를 돌린다. 이게 뭐야, 대체...

  "아, 미안해."

카나데는 그제서야 어깨에 걸린 옷깃을 정리하고 허리띠를 묶었다. 이미 볼 건 다 봐버렸다.

  "후훗, 그래도 상관없지 않아? 더 이상 고등학생은 아니잖아."

속옷과 티셔츠를 집어 카나데를 제치고 화장실에 들어갔다. 카나데의 몸에 감긴 석류 향이 화장실의 뜨거운 김에도 담겨 있다. 

  "가운, 화장실에 걸어 놨어. 후미카가 쓰던 거라 약간 클지도 모르지만."

아무리 성인이라도, 너무 무방비하잖아.

 

몸을 감싸던 거품이 샤워 헤드에서 나오는 온수에 닿아 스러졌다. 약간 열어놓은 창문에 서늘한 겨울바람이 새어 들어와 몸에 닿는다. 바람의 촉감에 오른 닭살이 뜨거운 세례에 노곤하게 풀린다. 보디워시의 석류 향이 은은하게 느껴진다. 갑자기 아까 전 카나데의 반라가 떠올랐다. 카나데의 밝고 큰 가슴이 떠오른다. 겨드랑이 사이에 걸려 있던 가운의 앞섬이 접혀 부드러운 밑가슴에 끼어있던 모습이. 젖은 머리카락 속 드러나던 붉은 귀와, 물기를 머금었는지 아까 전처럼 빛나던 두 눈동자. 남자였다면, 아마 참기 어려웠을 것이다. 아니, 여자라도 참기 어려웠겠지.카나데는 그런 무방비함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후미카와 같이 동거하고 있었기 때문인 걸까. 두 사람 사이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도 딱히 이상하지 않은 관계였으니까.

어떠한 삶의 형태이던, 그것이 끝나도 삶 속 버릇은 남는다.

내가 오랜 독거를 끝내고 카나데의 맨션에 들어와서, 홀로 사는 삶의 버릇이 두 사람의 생활과 부딪혀 생기는 사소한 차이를 느끼는 것처럼, 최근 혼자 살면서 아마 카나데는 버릇이 불러오는 후미카의 소실감을 느껴 외로웠을 거다. 그랬기에 아마 나에게 이런 호의를 베푸는 걸 테고. 갑자기 후미카가 무책임하다고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 포기하고 떠나버렸기 때문에, 카나데는 자꾸 틀린 방향으로 후미카가 말하는 절박, 내가 말하는 외로움을 해결하려 호의와 감정을 쏟아 넣고 있다. 문제는, 그 방향에 서 있는 건.

  "나, 인걸까."

받아서는 안되는 선물을 억지로 받아 난처해 하는 아이처럼, 풀지 못하는 답을 누군가 알려주지 않을까 하고 초조해 하는 아이처럼, 카나데와 함께 있으면 가끔씩 무언가 잘못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여긴 내가 있을 곳이 아니라고, 어서 모든 걸 거절하고 그녀에게서 멀어지라고, 마음 한 켠에서 작은 외침이 들린다. 하지만 그 호의를 거절하기에는 지금 내 상황은 난처하다. 우즈키를 찾는 동안 잠깐 동안만 이 호의를 입지만, 어떻게든 이 호의에 오래 있을 수는 없어. 후미카가 더 늦기 전에 카나데에게 돌아가기 위해서 나도 무언가를 해야 한다.후미카와 카나데 사이에 무언가 있었는지, 거북한 질문을 해야 할 때다.  울어버리면 누가 와서 달래주는 때는 오래 전에 지났고, 물어보지 않는 질문에 친절하게 답하는 사람들은 이제 없다.

  

  "카나데."

소파에 앉은 채로 무감정하게 그녀의 이름을 부른다. 카나데는 졸음이 느껴지는지 소파 등받이에 머리를 기대고 두 눈을 감은 채 내 말에 응했다. 시계가 10시 반을 가리킨다.

  "응, 린. 왜."

갑작스럽겠지만, 그래도 해야 할 질문이다.

  "후미카 말인데."

카나데는 여전히 소파에 머리를 기대고 있다. 잠이 점점 그녀를 감싸고 있는게 눈으로도 보인다. 하지만 이 질문은 그녀를 감싸며 잠식하는 저 은은한 잠을 깨부수어 내쫓아버리겠지.

  "무슨 일 있었어?"

분명 무언가 반응이 있을거라고 생각했는데, 카나데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이젠 완전히 잠들어 버린 것 같았다. 

  "카나데. 일어나 봐."

소파에서 일어나 카나데의 몸을 살짝 흔들었다. 

  "응. 후미카."

 

카나데는 반쯤 뜬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잠이 그녀의 눈동자에 섞여있었지만, 여전히 그 황옥빛 광채는 생기를 잃지 않았다.

  "아아. 저번에 말했던 대로, 책 때문에 갔겠지."

잠이 섞인 그녀의 나긋한 목소리엔 어떤 감정도 거짓도 없었다. 자신이 아는 한의 사실을 고백하는 카나데의 입술에, 거실 창을 넘어 비쳐오는 야경의 빛이 약간 닿았다. 카나데는 두 눈을 손으로 닦아내고 짤막하게 하품을 내쉬었다.

  "이제 자야겠어. 하마터면 소파에서."

다시 하품을 했다. 그녀를 따라 하품의 기운이 올라와서, 나도 하마터면 같이 하품을 할 뻔했다. 

  "잠들 뻔 했어."

카나데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자신의 방으로 걸어갔다. 걸음에 이미 잠이 서려있어서, 아무래도 침대에 다가가자 마자 쓰러질 것 같다. 질문의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린, 잘 자."

아무런 소득도, 흔적도 없이 질문은 싱겁게 끝이 났다. 잠자리에 들자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이불은 부드럽고 따뜻했다.

  

  

  

우즈키가 이마에 맺힌 땀을 손수건으로 닦아낸다. 다들 라이브를 마무리하고 난 여운에 들떠있다. 프로듀서가 간단한 음료와 간식을 들고 와서 수고했다는 말을 전한다. 모두가 라이브를 성황리에 끝낸 것을 기뻐한다. 다들 일어나서 프로듀서 앞에서 각자 이야기를 꺼낸다. 나도 그 사이에 끼어서 프로듀서의 여러 이야기를 듣는다. 고개를 돌렸다. 우즈키는 홀로 의자에 앉아서 숨을 고른다. 지친 얼굴. 왜일까, 힘든 얼굴. 다들 라이브에 지쳤다. 하지만 저 얼굴은 지금 모두가 느끼는 기쁨은, 없다. 왜. 우즈키, 왜 그런 얼굴인 거야. 왜 양성소에서 다시금 외로이 있을 때처럼, 그런 얼굴을 하고 있는 거야. 우즈키가 나를 바라본다. 미소를 짓는다. 예쁜 미소. 프로듀서가 칭찬하던 그 미소.

왜. 우즈키, 왜 그런 얼굴인 거야.

  

잠에서 깨어나 두 눈을 떴다. 전화기의 화면에 3시 5분임을 알리는 숫자가 뜬다. 무언가를 꿨지만, 꿈의 흔적은 아무것도 없다. 무언가를 꿨다는 작은 기억뿐이다. 아무리 파고들고 찾아보아도, 가위로 잘라내 뜯은 흔적도 없는 종이 끈처럼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갈증이 느껴졌다.사라지지 않는 잠기운이 두 발의 감각을 몽롱하게 가려, 몸을 가누는 게 약간 어려웠다. 감긴 두 눈을 뜨는 게 이렇게 어려운 일이었나. 거실로 나가기 위해 잠기운을 쫓아내고 몸을 일으킨다. 몸은 그닥 뻐근하지 않다.

 

거실로 나가려고 살짝 열린 방문을 조금 젖히는 순간, 카나데가 거실 창가에 서 있는 게 보였다. 달빛이 매우 밝아서, 그림자와 어둠을 내쫓고 명확한 빛의 공간을 만들었다. 밝고 노란 달빛을 받아 흐릿해진 창가에 카나데의 굳은 얼굴이 비쳤다. 어두운 곳에서도 빛을 잃지 않았던 두 눈은 달을 바라보고 있었다. 공허하게 열린 황옥빛 눈동자는 평소의 빛을 거의 잃고, 눈 속에 담긴 달빛마저 색채가 바랜 것 같았다. 카나데의 얼굴은 처음과 하나도 변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두 눈을 보고 나니 굳어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머리 속에서 생각의 끈을 끊어버린 듯 멍한 얼굴처럼 보였다. 사고나 감정을 완전히 잃어버린 얼굴 속, 빛을 잃어버려 달빛마저 그 색채가 바래는 두 눈동자.

아직 몽롱함이 가시지 않은 머리 속에서, 일주일 전 후미카의 말이 생각났다. 쓸쓸하게 달을 바라보고 있는 카나데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라는 개념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카나데의 마음에 담긴 절박을 내가 도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 반대가 될 수도.

새벽 세시에 잠에서 깨어 몽유병에 걸린 듯 멀거니 달을 바라보는 카나데의 모습을 보니 후미카의 말을 절반은 이해 할 수 있었다. 카나데가 가진 문제가 무엇이든, 내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는 무력감과, 후미카가 느꼈을 슬픔의 크기가. 이해되지 않은 나머지 절반은 내가 그 절박을 도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후미카의 생각이다. 나보고 뭘 어쩌라는 걸까. 나는 그저 갑작스런 어려움을 거절하기 어려웠던 주변인일 뿐인데.

하지만 왜일까? 카나데의 문제를 내버려두자던 이전의 생각은 몽롱함과 함께 스러지고, 작은 것이라도 카나데를 위해 무언가 방법이 없을까 하는 생각이 생겨났다. 괜한 동정심인 걸까? 하지만 마음 한 켠에서 울리는 이 슬픈 감정은 대체 뭐인 걸까. 동정심 이라기엔 아프고, 따스하고, 한층 더 가까운 감정이. 마치 이건, 동질감에 가까운 게 아닐까? 대체 왜 이런 감정이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걸까. 이해할 수 없어 멈춰버린 이성 대신 감정이 대신 나서서, 뺨에 약간 따뜻한 눈물이 그어진다.

  

카나데는 계속 달을 바라본다. 창에 비친 얼굴은 여전히 굳어있다. 하지만 눈과 뺨에 희미하게, 점점 스러져가는 눈물 흔적의 끝자락이 보인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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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에 피는 벛꽃 - 1027개월전
2월에 피는 벛꽃 - 917개월전

2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바르고 고운 말을 사용 합시다.
  • 포틴P (@howo***)

    아아 이거 정말 재밌습니다...다음화가 필요하다..
    카나데랑 린 동거하는거 보는것도 마냥 좋긴 하지만 스토리도 흥미롭고...
    1November 06, 2016 (일) 10:34_72
  • 잉여유P (@wjh4***)

    묘사부분이 역시 엄청나네요. 굉장히 몰입하면서 읽었습니다! 그러니 다음화를 빨리주세요!
    2November 07, 2016 (월) 09:42_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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