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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스널리티 P 시리즈] '어제'가 '오늘'과 함께 할 '내일'에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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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11-05, 2016 04:18에 작성됨.

타카가키 카에데 <밤 바다의 이정표>

사기사와 후미카 <First Step>

P <인내의 삶> 

<신데렐라 걸스> 

센카와 치히로 <함께 걷는 길> 에서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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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일본 간다.”

처음으로 내가 주연을 맡은 영화의 촬영이 끝나던 날. 간단한 뒷풀이 겸 촬영 기념 파티가 끝나고, 제각각 삼삼오오 모여서 웃고 떠들기 시작할 무렵, 뒤풀이 장소로 사용하는 호텔 정원의 테이블에서 그는 내게 대뜸 이렇게 말했다.

“일본으로 간다고?”

“응. 짐도 대강 싸 놨고, 다음 주에 여권 나오는 대로 바로 갈 거야.”

테이블 위에 자신의 몫과 내 몫의 샴페인 잔 두 개를 올려놓고 그는 내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바로 전까지 야외 현장에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듯, 그의 어깨와 머리카락에는 뽀얗게 모래먼지가 앉아 있었다.

“일본에 가서 뭐 하게? 부모님이라도 찾으려고?”

“에이, 설마. 그게 말이지…….”

“저기……실례합니다.”

그가 뭔가를 말하려는 순간, 한창 건배를 외치던 옆 테이블에서 다섯 명의 사람들이 우리가 앉아 있는 테이블로 다가왔다. 대체 누군가 싶어 그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스태프 완장을 차고 있는 스태프가 세 명, 그리고 조금 전까지 나와 함께 필름을 장식하던 배우가 두 명이었다. 스태프 완장을 차고 있던 세 명 중에서 가장 앞에 있던 사람이 쑥쓰러운듯한 웃음을 지으면서 그에게 약간 다가섰다.

“무슨 일이세요? 아, 감독님이 저 찾던가요?”

“아뇨, 그런 건 아니고……저기……윌 존슨 선수, 맞나요? 뉴욕 메트로에서 뛰었던…….”

아아, 그게 목적이었구나.

별 일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 챈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다섯 명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러더니 그들은 곧장 주머니에서 야구공과 유성매직 하나씩을 꺼내 그에게 건네었다.

“초면에 실례합니다만, 사인 하나만 부탁해도 될까요?”

“……저보다는 얘 사인이 더 좋지 않을까요? 이제부터 잘 나갈 사람인데.”

“얘가 또 큰일 날 소리를 하네. 네 거 필요하다고 하시잖아? 어서 해 드려.”

엄지로 나를 가리키는 그를 향해 나는 손사래를 쳤다. 이제 첫 주연인 사람한테 못 하는 말이 없어요.

“으음…...진짜 제 사인 필요한 거 맞아요?”

“네!”

크게 고개를 끄덕이는 다섯 사람을 돌아보며, 그는 신기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말 감사합니다. 저 같이 은퇴한 지 5년 넘는 퇴물도 기억해주고.”

“퇴물은요. 저희들은 아마 죽을 때까지 당신을 기억하고 있을 겁니다.”

“그래 주신다면야 제가 영광이죠……어디, 이 정도면 됐나요? 다른 것도 필요하세요?”

“아, 아뇨! 이거면 됐어요!”

”감사합니다! 평생 보물로 간직할게요!”

“평생은 무슨……저 부담스럽게 그러지 말고 저보다 잘난 사람 나오면 후딱 갈아타세요.”

입고 있던 티셔츠에 하나, 그리고 들고 있던 야구공에 하나. 선수 시절 그의 상징이었던, 그리고 이제는 뉴욕 시민의 8할이 추억하는 숫자 31을 데포르메한 사인을 받은 다섯 사람은 싱글벙글한 미소를 지으면서 숙소로 돌아갔다. 나는 그들에게 손을 흔들어준 뒤 다시 자리에 앉는 그를 살짝 흘겨보았다.

“너보다 잘난 사람이 나오긴 하겠어? 겸손도 과하면 기만이다?”

“뭘, 나도 있는데 나보다 더한 사람 없으리라는 법도 없지.”

“얼씨구? 3년동안 타자들 개박살내는 바람에 리그 수준 떨어졌다는 소리가 누구 때문에 나왔는데?”

“노력부족이야, 노력부족.”

“아무튼 어디까지 말했더라?”라면서 그는 절반 정도 남은 자신의 샴페인을 마저 마셨다.

“일본에 간다는 얘기. 그래서, 뭐 때문에 간다고?”

“아아, 맞아. 거기까지 말했지. 실은, 요전에 스카우트를 받았어. 재미있는 아저씨한테서. 아이돌 프로듀서를 한번 해 보지 않겠냐고 하더라고.”

“헤에, 아이돌 프로듀서? 혹시 그 연수생이랑 관련 있는 건가?”

그러고 보면, 최근까지 저 녀석에게 딱 붙어 다니던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일본에서 왔다고 하던 일본인 연수생이었는데, 그나마 말이 통하는 사람을 만난 덕분인지 연수기간인 1년 내내 그의 곁에 찰싹 달라붙어 도무지 떨어질 기색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한 달 전쯤에 연수기간이 끝나 일본으로 돌아갔다고는 들었지만.

“뭐……없다고는 말 못 하겠다. 재밌는 사람이었으니까.”

재밌는 사람이었던가. 내 기억 속에서는 매번 혼나는 것 밖에 안 떠오르는데.

그는 품 속에서 명함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나는 그것을 집어 들어 대문짝만한 크기로 적혀 있는 회사의 이름을 살펴보았다.

 

CG프로덕션.

 

“회사 이름 독특하네. CG? 무슨 약자인가?”

“몰라. 사장 이름인가보지.”

나는 명함을 다시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는 이제는 텅 빈 글래스를 만지작거리는 그를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기대돼?”

“그래, 두근거리는군.”

그가 명함을 다시 품 속에 집어넣는 것을 보고, 나는 내 앞에 놓인 글래스를 한번에 쭉 들이켰다.

“갈 때 작별인사라도 하고 가.”

“무슨, 영영 못 볼 것도 아닌데. 집이나 잘 봐 줘.”

“그래도.”

“……알았어. 간다는 말은 하고 갈게.”

저 멀리, 스태프들이 모여 있는 장소에서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미안”하고 사과의 제스쳐를 취하며, 그는 자신의 글래스를 들고 소리가 들려온 곳을 향해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혼자 앉아 있기도 뭐하다 싶었기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휘적휘적, 내 방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입안을 감도는 달콤하면서도 쌉싸름한 샴페인의 뒷맛을 곱씹으면서, 나는 조금 전에 보았던 그의 얼굴을 떠올렸다. 최근 몇 년간, 타고 남은 재밖에 남아있지 않던 그의 눈에는 나도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미세한 불씨가 맥박치고 있었다. ‘열정’이라고도 불리는 불씨가.

그 때, 적당히 취기가 오른 내 눈 앞에 자그마한 남자 아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땅딸막한 소년은, 자신의 손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큰, 두 손으로 들기도 버거워 보이는 양손잡이용 글러브를 들고 있었다.

 

나, 야구선수가 될 거야.

 

“……그래. 17년 만이구나. 너의 그런 표정을 본 것이.”

그가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들었던 것인지에 대해서는, 유감스럽게도 나는 그 대답을 들을 수는 없었다. 여기서의 짧은 대화가 그와의 마지막 대화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시간이 흘러, 그의 이름과 내 이름이 동시에 걸린 그 영화가 스크린에 나타날 무렵, 그는 마치 바람처럼 홀연히 모습을 감추었다. 명함의 사본이 든 편지봉투 하나만을 달랑 놔둔 채.

 

 

그리고 2년의 세월이 흘렀다. 

입국수속을 마치고, 게이트를 통과하기 전 나는 곧바로 화장실로 달려가 휴대전화를 열었다.

“응, 방금 도착했어. 내일이지? 그래. 시간 맞춰서 데리러 와. 응? 아아, 대역 썼으니까 괜찮아. 응. 그럼 나는 볼일 좀 보고 갈게. 오케이~수고~!”

변장은 충분히 했다. 짙은 밤색의 가발로 금발을 덮고, 야구모자 아래에 맥아더가 쓸 법한 커다란 선글라스까지 끼고 있으니 쉽사리 들키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관광 나온 외국인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공항 구석의 기둥으로 잽싸게 다가갔다. 고개를 돌려 게이트 쪽을 바라보자, 게이트를 둘러싸고 있는 기자들의 모습이 보인다.

‘슬슬 나올 때가 됐는데…….’

내 기대에 답하듯, 곧바로 게이트의 자동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기자들의 플래시가 정신없이 터지기 시작했다. 게이트를 빠져나오는 대열의 가운데에서 플래시 세례를 받고 있는 것은 얇은 자켓을 걸치고 선글라스를 낀 금발의 여성이었다.

공항 내부의 사람들의 이목이 모두 그 쪽으로 쏠린 틈을 타, 나는 재빨리 내 가방을 챙겨 로비를 나왔다. 유명해지고 나서 느낀 거지만, 무엇보다도 비행기 탈 때가 제일 피곤하다. 왜 선배들이 죄다 공항만 갔다 하면 학을 떼는지 이제는 이해할 수 있었다.

“2년……곧 3년째인가? 어디, 얼굴 얼마나 좋아졌는지 한번 보자.”

휴대전화를 가방 속으로 던져 넣고, 나는 공항 앞에 주차된 택시에 올라타 곧바로 미리 예약해 둔 호텔의 이름을 말했다.

  

 

**************

 

  

센카와 치히로의 정규직 채용에 대한 자그마한 소동이 끝나고, 아이돌 부서는 오랜만의 여유를 만끽하고 있었다. 연말이 다가오면서 소속 아이돌들이 참가하던 대부분의 프로그램이 하나 둘씩 마무리되어 가는 것에 더해, 프로듀서 또한 영업보다는 지금까지 모인 신인들을 관리하고 앞으로의 계획을 짜는 쪽에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으음…….”

 

하지만 그 여유와는 별개로, 프로듀서는 모니터에 떠오른 보고서와의 눈싸움을 계속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기획은 마무리되었지만, 아직까지도 기숙사 배정에 대한 문제가 골머리를 썩이고 있었던 것이다.

무거운 신음을 흘리면서 볼펜으로 관자놀이를 톡톡 두드리는 프로듀서를 바라보던 치히로는 자리에서 일어나 프로듀서의 근처로 다가갔다.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눈의 피로에 좋은 연녹색 유니폼을 입고 있는 그녀였지만, 그녀가 입고 있는 유니폼의 가슴 주머니에 걸려 있는 것은 이전까지의 이름만 적혀 있던 간이 명찰이 아닌, 출입증과 보안 카드 기능을 함께 가지고 있는 회사의 사원증이었다.

 

“프로듀서 씨, 차 한 잔 드실래요?”

“차요? 으음…….”

“잘 안 풀릴 때는 잠시 쉬어 가는 것도 좋다고 생각해요?”

“그것도 그렇네요. 그럼 저는 커피로 부탁드립니다.”

 

고개를 끄덕인 치히로가 급탕실로 들어가는 것을 보면서, 그는 크게 기지개를 펴고 자리에서 일어나 목을 주무르며 사무실의 한 켠에 마련된 소파로 향했다. 급탕실로 들어간 치히로는 잠시 후,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머그잔이 두 개 들어 있는 쟁반을 들고 나왔다.

 

“여기, 주문하신 커피에요.”

“아, 감사합니다.”

 

평소 같았으면 컵을 받아 곧바로 홀짝였을 그였지만, 오늘은 어째서인지 커피를 마시기에 앞서 컵을 쥔 채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냄새라던가…….”

“아뇨, 그런 건 아닌데…….”

 

한동안 컵을 바라보던 프로듀서는 자신의 옆에 서 있는 치히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혹시 설탕 남은 거 있나요?

“어디 보자……스틱이 남아 있네요. 몇 개나 필요하세요?”

“……네. 두 개만요.”

“네? 두 개나요?”

“아무래도 머리가 잘 안 돌아가는 게, 당이 부족한가 싶어서 말이에요.”

“어디보자……여기요.”

“감사합니다.”

 

프로듀서의 건너편 소파에 앉은 치히로는 설탕을 받기가 무섭게 곧장 커피 속으로 그것을 털어넣는 프로듀서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테이블 위에 놓여진 서류를 바라보았다. 몇 번이나 수정을 한 듯, 사방팔방에 빨갛고 까만 줄이 죽죽 그어져 있는 그것은 다름아닌 11월부터 프로젝트에 소속되는 아이들의 기숙사 배정에 관한 기획서 초안이었다.

 

“기숙사 문제 때문에 그러세요?”

“네. 하필이면 이 때 수도가 터져가지고……못해도 반 년 정도는 걸린다고 하네요.”

“남자 기숙사 쪽은 어떻게 안 되나요? 빈 방 많다고 들었는데.”

“아, 거기는 올해 지나면 철거할 거라서요. 저도 슬슬 방 뺄 준비 하고 있어요.”

“진짜 철거 한대요? 그럼 거기에 뭐 새로 짓는대요?”

“글쎄요……아직은 정해진 게 없으니까 한동안은 공터로 두지 싶네요.”

 

프로듀서는 팔짱을 끼며 가볍게 한숨을 토해 냈다.

 

“어차피 고작 반 년, 여차하면 제 사비 털어서 원룸이라도 하나 잡아주고는 싶은데 말이죠. 총무팀에서 도무지 허가를 안 해준단 말이에요.”

“아하하, 아무리 그래도 프로듀서 씨 사비까지 사용하실 필요는…….”

“투자죠, 투자. 어차피 돈 쓸 데도 딱히 없고요.”

“으음…….”

 

치히로가 서류를 내려놓는 것을 바라보며 프로듀서는 팔짱을 풀고는 자신의 앞에 놓인 커피를 홀짝였다.

 

“그러고 보면, 센카와 씨는 좀 어떠세요? 정직원, 할 만 해요?”

“……솔직하게 말해도 되나요?”

“네.”

“……다시 어시스턴트 하고 싶어요오…….”

“아하하하, 잔업도 하다 보니까 재밌죠?”

“재미 없어요!”

“아하하하!”

 

치히로는 자신의 무릎을 팡팡 두드리며 싱글벙글 웃는 프로듀서를 샐쭉한 눈으로 흘겨보았다.

 

“으으……저는 프로듀서 씨가 일부러 저만 먼저 퇴근시킨 줄 알았는데……완전히 속아넘어갔어요.”

“계약직한테 어떻게 초과근무를 시킵니까?”

“그건 그렇지요…….”

 

두 사람의 이야기가 잠시 멈춘 그 때, 프로듀서가 왼손에 차고 있던 시계가 땡땡, 하고 종소리와도 비슷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치히로는 자신의 손목시계를 내려다보던 그의 눈썹이 꿈틀거리는 것을 눈치챘다.

 

“왜 그러세요?”

“아, 아뇨. 방금 전에 소리가 조금 튄 것 같아서요. 슬슬 한번 열어 볼 때가 됐나…….”

 

자신의 시계를 검지로 톡톡 두드리던 그는 가볍게 한숨을 폭 내쉬었다.

 

“뭐, 어쨌든, 오늘은 여기까지 합시다.”

“네?!”

 

그렇게 말하면서 남은 커피를 쭉 들이마시는 프로듀서를 치히로는 신기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왜요?”

“아, 아뇨…….프로듀서 씨가 정시퇴근 하는 거, 굉장히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아서요.”

 

치히로가 정직원이 되고 난 이후로 프로듀서가 야근을 하는 빈도나 야근의 정도가 크게 줄어들기는 했지만, 오늘처럼 칼퇴근을 하는 경우는 올해 들어 처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프로듀서는 그녀를 향해 씨익 웃으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간만에 찾아온 여유잖아요? 야근은 앞으로 실컷 하게 될 건데, 지금은 좀 느긋하게 가자구요.”

 

자신의 컵을 급탕실에 다시 갖다놓고, 프로듀서는 곧바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책상 위에 흩어놓은 서류를 갈무리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그의 눈에 우표가 덕지덕지 붙은 어떤 편지봉투가 눈에 띄었다.

 

“……참, 그러고보니 이게 있었지.”

 

영어인지 뭔지 모를 지렁이가 기어가는 듯한 글자가 적혀 있는 편지봉투를 바라보던 프로듀서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편지봉투의 입구를 열어 그것을 거꾸로 뒤집어 들었다. 그러자 작은 쪽지와 함께 세 장의 티켓이 밖으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그는 봉투에 적혀있던 것과 마찬가지로 꼬불거리는 글씨가 적혀 있는 쪽지를 대충 읽고는 그것을 외투 주머니에 집어 넣은 뒤,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마찬가지로 퇴근 준비를 하고 있는 치히로를 바라보았다.

 

“센카와 씨, 혹시 주말에 약속 있어요?”

“저요? 별 일 없는데요. 왜요?”

“혹시 영화 시사회 가 볼 생각 없으세요? 이번 주말에 하는건데.”

“시사회요?”

“네. 아는 사람한테서 표를 몇 장 받았는데, 저는 주말에 일이 있어서 못 갈 것 같거든요. 어떠세요?”

 

치히로는 프로듀서가 내민 티켓을 받아 그것을 살펴보았다.

 

“와, 이거 TV에서 광고하던 그거잖아요? 미국에서 엄청 인기있는 작품이라던데. 어떻게 구했어요?”

“미국에 있는 제 친구가 이렇게 가끔 표도 보내주곤 해요. 좀처럼 보러 갈 시간이 안 나서 문제지……어때요, 생각 있어요?”

“주신다면야 제가 고맙죠!”

 

치히로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티켓을 다시 봉투에 집어넣고 그녀에게 내밀었다.

 

“여기요. 세 장 들어 있으니까 친구분들이랑 같이 보러 가세요.”

“감사합니다! 아, 프로듀서 씨, 혹시 오늘 저녁에 일 있으세요?”

“네. 저녁에 개인적으로 누굴 좀 만날 일이 있어요.”

“누구 만나세요? 친구라던가…...?”

“네, 친구 맞습니다.”

“그렇구나……아쉽네요.”

 

치히로의 반응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던 그는 곧바로 무언가가 떠오른 듯, “아아, 그거구나”라고 말하며 자신의 오른손으로 왼손바닥을 가볍게 때렸다.

 

“오늘 뒷풀이 있죠? 타카가키 씨랑 카와시마 씨.”

“아, 아하하……들켰네요.”

“두 분 출연 끝나는 날이잖아요. 그 분들 성격에 뒷풀이를 안 할 리가 없죠. 늘 가던 가게에 제가 술 몇 개 맡겨뒀으니까 이상한 곳에서 엄한 거 먹지 말고 그거 드세요.”

“어, 그래도 되요?”

“네. 제가 못 가는 벌금 대신이라고 생각하고 맘껏 먹어요.”

 

“참가 못 해서 미안하다는 말도 같이요.”라고 덧붙이며, 프로듀서는 곧바로 옷걸이에 걸어 둔 자신의 외투를 걸쳤다.

 

”그럼 저는 사기사와랑 사쿠마 픽업해서 먼저 가보겠습니다. 너무 과음하지 마시고요. 문 단속 부탁드릴게요.”

“네, 수고하셨어요.”

“수고하셨습니다.”

 

프로듀서가 사무실을 나간 뒤, 서서히 닫히는 사무실의 문을 바라보며 치히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프로듀서 씨가 친구도 있었나……? 처음 듣는 이야기인데…….”

 

본인이 들으면 실례라고 투덜거릴 듯 한 혼잣말을 중얼거리면서.

 

 

 

**************

 

 

 

별관 지하에 위치한 트레이닝 파트의 댄스 연습실에서, 마유와 후미카는 11월에 있을 합동 라이브에서 공개할 신곡의 안무를 연습하고 있었다.

 

“하나! 둘! 셋! 거기서 돌고! 찍고! 표정관리!”

“넷!”

“네……!”

 

똑딱거리는 메트로놈에 맞춰 우렁차게 외치는 트레이너의 구령에 맞춰, 신발의 밑창이 내는 마찰음이 연습실 내부에 쉴 새 없이 울려펴졌다.

 

“마무리 준비! 스텝! 하나, 둘, 셋, 돌고! 마무리!”

 

띵, 하고 메트로놈이 멈추는 소리와 함께, 트레이너의 구령도 함께 멈추었다. 들고 있던 차트에 무언가를 기입한 뒤, 트레이너는 자신의 옆에 놓인 아이스백에서 물병을 집어 두 사람에게 내밀었다.

 

“수고했어.”

“수, 수고, 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물병을 받아 들고 바로 자리에 주저앉아 가쁜 호흡을 몰아쉬는 두 사람에게, 트레이너는 목을 가다듬듯이 작게 헛기침을 했다.

 

“후미카는 동작이 너무 작게 나오고 있어. 적극적으로 나서라는 말은 하지 않을 테니까, 네게 주어진 동작은 확실하게 할 수 있도록 연습해둬.”

“네…….”

“그리고 마유, 낯선 동작들이 많은 건 알겠지만, 다음 동작으로 넘어가는 게 한 박자씩 늦어지고 있어. 머릿속에 그린 걸 곧바로 몸으로 표현할 수 있도록 연습해둘 것. 알겠지?”

“네, 알겠어요.”

“그래도 고작 열흘 만에 이 정도까지 온 건 대단하긴 하네. 후미카도 체력이 많이 좋아졌고. 반년 전에 비하면, 동일인물인가 싶을 정도야.”

“가, 감사합니다…….”

 

“아하, 그건가?”라고 중얼거린 트레이너는 꿀꺽꿀꺽 목을 울리며 드링크를 마시는 후미카를 슬쩍 바라보았다.

 

“프로듀서 씨랑 자주 같이 운동하던 게 효과가 있긴 있었다?”

“……네?”

“그, 그건……콜록, 콜록!”

“아앗, 미안! 농담으로 한 말이었는데. 괜찮아?”

“괘, 괜찮아요……그냥 사레가 든 것 뿐이라…….”

“후미카 씨……? 프로듀서 씨와 함께 운동을 했다는 건 무슨 뜻인가요……?”

 

마유는 스르륵 고개를 돌려 마른 기침을 하는 후미카를 바라보았다. 쏘아본다거나 노려보는 것은 아니었지만, 흐릿한 표정으로 자신을 지긋이 바라보는 마유의 눈을 마주친 후미카는 자신도 모르게 움찔, 하고 어깨를 움츠렸다.

 

“저, 그, 그게…….”

“하하, 그리 큰 일은 아니고. 후미카는 처음 왔을 때부터 체력이 굉장히 약했거든? 그래서 어떻게든 체력부터 길러야겠다고, 한동안 프로듀서 씨랑 같이 뛰곤 했어. 카렌도 같이 뛰었지?”

“네……카렌 씨도, 제게 많이 맞춰 주셔서……많이 도움을 받았어요.”

“......그런 뜻이었군요. 저도 참, 괜한 오해를 한 것 같네요. 죄송해요.”

 

잠시 자신의 휴대전화를 확인하던 트레이너는 휴대전화를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고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뭐, 아무튼 두 사람 모두 스트레칭 제대로 하고, 오늘은 프로듀서 씨가 직접 픽업하러 오신다고 했으니 옷 갈아입고 복도에서 기다리도록. 알겠지?”

“네, 알겠습니다.”

“네.”

”그래, 그럼 나도 이만 가볼게. 오늘도 수고하셨습니다.”

“네……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팔랑팔랑, 손을 흔들며 연습장을 나서는 트레이너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두 사람은 잠시 후 어느 정도 호흡이 진정되자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재빨리 탈의실로 향했다.

 

 

잠시 후, 샤워를 마치고 운동복에서 사복으로 옷을 갈아입은 두 사람이 탈의실을 나올 무렵, 고요한 복도에 울려 퍼지는 한 남자의 목소리가 두 사람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프로듀서 씨……?”

“프로듀서 씨의 목소리네요.”

 

잠시 서로를 마주 본 뒤,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곧바로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향해 걸어 갔다. 엘리베이터 근처, 자판기가 설치된 소파에 앉아서, 프로듀서는 누군가와 휴대전화를 통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다만 평소와 다른 점이라면, 그가 개인용 휴대전화를 통해 전화를 하고 있었다는 점. 그리고.

 

“지금 프로듀서 씨, 영어로 통화하고 계신 거죠?”

“네……”

 

사실을 확인하려는 듯, 자신을 올려다보며 되묻는 마유에게 후미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약간 떨어져 있는 거리였기에 통화 내용이 모두 들리지는 않았지만, 중간중간 들려오는 단어들은 확실히 일본어라고는 보기 힘든 단어들이었다.

 

“세상에, 영어도 저렇게 능숙하게 하실 줄이야…….”

 

프로듀서가 누군가와 영어로 이야기하는 모습을 처음 보는 듯, 눈을 반짝이는 마유와는 달리 후미카는 프로듀서가 외국에서 살다가 왔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지금 그의 모습이 무척이나 새롭게 보이는 것은, 아마도 휴대전화를 들고 있는 그의 표정 때문일 것이다.

 

‘굉장히 편안해 보이는 표정…….’

 

이제 1년이 조금 넘어가는 인연. 그것은 그녀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그다지 길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인연이었지만, 후미카는 그 나름대로 그의 여러 모습들을 보아 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지금의 프로듀서가 짓고 있는 표정은 그런 그녀조차도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영어로 대화하시는 것도 그렇고……가족일까……?’

 

때마침 통화가 끝난 듯 프로듀서는 귀에 대고 있던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마유와 후미카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를 향해 다가갔다. 두 사람의 모습을 발견한 프로듀서는 약간 비뚤어진 안경을 고쳐 쓰며 빙긋 웃었다.

 

“레슨 받느라 고생했다. 트레이너한테 이야기 들었지?”

“네.”

“바로 출발하면 될까? 짐은 다 챙겼어?”

“저는 괜찮아요.”

“마유도 괜찮답니다.”

“좋아, 그럼 바로 출발하자.”

 

 

퇴근 시간을 약간 넘겼을 뿐인데도 바깥에서는 어두워져 가는 밤하늘의 색채에 비례하여 가로등이 하나 둘씩 그 밝기를 더해가고 있었다. 내려오기 전에 따로 빼 놓은 것인지, 프로듀서의 자동차는 별관의 입구에 서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저……프로듀서 씨……?”

“응?”

 

여자 기숙사를 향하는 승용차의 조수석에 앉아 있던 후미카의 목소리에, 뒷좌석에 가만히 앉아서 창 밖을 바라보던 마유의 시선이 그녀를 향해 움직였다. 하지만 후미카는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 듯, 그녀의 시선은 여전히 운전에 집중하고 있는 프로듀서에 못박혀 있었다.

 

“어제, 숙부님께서 가게에 한번 방문해달라고 하셨습니다……개인적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시다고…….”

“사기사와 씨가? 으음, 오늘은 조금 곤란한데……혹시 급한 일이야?”

“아니요……그다지 급한 일처럼 보이지는 않았습니다만……프로듀서 씨께서 정시에 퇴근하시는 일은 좀처럼 드문 일이니까요.”

 

은근히 정곡을 찌르는 후미카의 말에 프로듀서는 쓴웃음을 지었다.

 

“뭐, 그건 그렇긴 하지. 그럼 가까운 시일 내에 꼭 한번 찾아뵐게. 이번 주……는 조금 힘들겠고, 다음 주중에는 반드시.”

“네. 그럼 그렇게 전해드릴게요…….”

“찾아뵙기 전에 내가 따로 연락드릴 테니까, 그렇게만 말씀드리면 될 거야.”

“네, 알겠습니다.”

 

이야기가 멈추고, 정적이 흐르는 자동차의 실내를 규칙적으로 증감을 반복하는 자동차의 엔진 소리가 가득 메웠다. 조수석에 앉아 프로듀서의 눈치를 살피던 후미카는 교차로의 신호에 걸려 자동차가 멈춘 틈을 타 조심스레 머릿속에 떠오른 물음표를 내밀었다.

 

“저기, 프로듀서 씨……?”

“응?”

“저……혹시……오늘 특별한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어? 나 지금 들뜬 것처럼 보여?”

“아, 아니요. 그저……조금 전에 어떤 분과 영어로 통화를 하시는 것 같아서요…….”

 

가속페달을 밟으면서 프로듀서는 “아아, 그거 말이구나?”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 특별하다면 특별한 일인가……그냥, 멀리 살던 친구를 좀 만날 일이 있어서.”

 

후미카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프로듀서가 자신을 대상으로 ‘친구’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처음 들어보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그녀의 기억 안에서는 그랬다.

 

“친구……인가요?”

“그래, 친구. 오래된 친구야.”

 

또 다시 맞이한 정지 신호에 맞추어 자동차를 정지시킨 프로듀서는 상체를 기울여 스티어링에 몸을 기대었다. 후미카의 눈에 비친, 이제는 완전히 밝아진 가로등의 주황색 불빛을 반사시키는 그의 눈빛은, 조금 전 전화통화를 나누던 그 때의 눈빛과도 비슷한, 아련한 무언가를 품고 있었다.

 

“……그래, 정말로, 오래 된 친구지…….”

“…….”

“프로듀서 씨?”

 

그 때, 잠자코 뒷좌석에 앉아 있던 마유가 입을 열었다. 룸미러 너머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눈을 마주보며, 마유는 지금까지 조용히 가슴 속에 묻어 두었던 것을 조심스레 밖으로 끄집어 냈다.

 

“혹시 그 친구라는 분, 여성 분이신가요?”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라도 있어?”

“그냥, 마유의 감이에요.”

 

그 순간, 덜컥, 하고 차 안의 공기가 멈추었다. 룸미러를 바라보며 안경 너머로 눈을 깜박이는 프로듀서와, 거울에 비치는 그의 얼굴에 시선을 못박은 채 꼼짝도 하지 않고 있는 마유를 번갈아 바라보며, 후미카는 안절부절,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맞아. 여자야.”

“……그런가요…….”

 

누가 보더라도 풀이 죽었다는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을 정도로 마유의 어깨가 축 처졌다. 곧바로 신호가 녹색 신호로 바뀌었기에 프로듀서는 곧장 스티어링을 다시 움켜쥐었다. 정적이 흐르는 차 안을 또다시 낮게 울리는 엔진소리가 가득 메웠다.

 

“변명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네……?”

”사쿠마가 생각하는 그런 관계는 아니야. 그냥 오랫동안 같이 지낸 친구지. 말 그대로 친구일 뿐이야.”

“그런가요…….”

“그래, 그런 거야. 그러니까 크게 신경 쓰지 마. 쓸데없는 생각도 하지 말고. 알겠지?”

“네. 마유는 프로듀서 씨를 믿으니까요.”

“고맙다.”

 

조수석에 앉아, 마치 바늘방석에 앉은 것처럼 안절부절 못하던 후미카는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커다란 교차로에서 방향을 틀자, 저 멀리, 커다란 기숙사 건물이 보였다.

 

 

 

**************

 

 

 

진행자의 클로징 멘트가 끝나고, 공중에 둥실둥실 떠 있는 메인 카메라가 크게 회전하며 스튜디오 전체를 넓게 비춥니다.

 

“컷!”

 

감독님의 사인이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램프가 꺼졌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기다렸다는 듯, 잔뜩 굳어있던 촬영장의 공기가 순식간에 탁 풀어지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휴우…….”

“수고했어, 카에데.”

“미즈키 씨도요. 수고하셨어요.”

 

진행자의 양 옆에 앉아서, 미즈키 씨와 저는 곧은 자세를 유지하느라 가슴 속에 가두어 두었던 숨을 풀어놓았습니다. 자연스럽게 한숨이 새어나오면서, 빳빳했던 자세가 다소 둥글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촬영장을 벗어나, 영상을 마지막으로 점검하는 감독님의 곁으로 다가갔습니다.

 

“감독님, 저희 먼저 가 봐도 될까요? 이 다음에 스케줄이 있어서 그런데…….”

“응? 그야 물론이지. 그쪽 프로듀서한테 연락해둘 테니, 걱정 말고 들어가요. 그간 고생 많았어요.”

“네. 수고하셨습니다, 여러분.”

 

마지막으로 주변 스태프 여러분들께 인사를 건네는 그 짧은 사이를 참지 못하고, 미즈키 씨는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습니다. 의상실로 향하는 와중에도 촬영장 여기저기서 수고하셨습니다, 라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그 중 몇 가지는 우리들을 향하는 것이었기에, 우리는 싱긋 웃으면서 그들에게 인사를 되돌려주었습니다. 아직은 긴장을 풀어서는 안 됩니다. 스태프들의 일은 카메라가 꺼지면 끝나는 것이지만, 우리들의 일은 그들과 헤어지기 전까지 계속되는 것이라고 배웠으니까요.

 

 

의상실에 도착하자 이미 스타일리스트 두 사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함께 메이크업을 정리하고, 미즈키 씨가 의상을 정리하는 동안 저는 자리에 앉아서 미즈키 씨가 나오는 것을 기다렸습니다. 가만히 앉아서 오늘 촬영 내용을 복기하던 그 때, 책상 위에 펼쳐져 있는 잡지의 헤드라인이 문득 저의 눈에 띄었습니다.

 

사람은 자신과 비슷한 환경의 사람과 어울리려 한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이야기였지만, 굳이 저런 당연한 말을 헤드라인에 적어 놓았다는 것은 내용에도 무언가 알맹이가 있다는 뜻이겠지요. 문득 흥미가 동한 제가 잡지를 향해 손을 뻗으려는 순간, 탈의실의 커튼을 열어젖히고 미즈키 씨가 저를 불렀습니다.

 

“나 다 갈아입었어! 카에데, 얼른 들어와!”

“네, 알았어요.”

 

저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탈의실로 향했습니다.

뭐, 별 거 아니겠죠.

 

 

 

미즈키 씨와 제가 평소의 사복으로 갈아입고 대기실로 돌아가자, 언제 도착한 것인지 사복 차림의 치히로 씨가 우리를 반겨주었습니다.

 

“두 분, 모두 수고하셨어요.”

“에에, 치히로 혼자야? P군은?”

“개인적인 일이 있어서 못 온대요.”

“뭐어~? 오늘같이 중요한 날에 불참이라니, 벌금이라도 때려야겠네.”

”그렇지 않아도 가게에다가 술 맡겨놨으니 그걸로 봐달라고 하시던걸요?”

“그래?”

 

치히로 씨의 말을 듣고, 미즈키 씨의 표정이 단번에 밝아졌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프로듀서 씨가 맡겨놓은 술들은 대체로 고급 브랜드의 물건인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어디서 받은 것인지, 아니면 본인이 직접 사서 마시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요. 프로듀서는 평소에는 술을 잘 먹지 않기에 마시러 가더라도 음료수로 때우는 것이 보통이지만, 특별한 일이 있는 날에는 그 사람도 곧장 술잔을 기울이곤 합니다. ‘특별한 일’의 기준이 매우 관대하다는 것이 그 사람답다면 그 사람 답지요.

 

“카에데, 아직 멀었어?”

“다 됐어요.”

“조아쓰, 치히로! 얼른 가자! 시간은 금이야! 그 무엇으로도 살 수 없다구!”

“이럴 때만 금이겠죠…….”

 

치히로 씨와 눈이 마주쳤습니다. 쓴웃음을 짓는 그녀를 보니, 아마 저도 미즈키 씨와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늘 향하던 골목길 깊숙한 곳의 이자카야. 노렌을 걷고 들어간 우리를 가장 먼저 반기는 것은, 가게의 천장에 닿을 듯 거대한 사장님의 모습이었습니다.

 

“어서옵……뭐야, 또 당신들이야?”

“접대가 시원찮네요? 끝내주는 미인 셋이서 친히 마시러 와 주셨는데.”

“그야 일주일이 멀다 하고 마시러 오는데 안 익숙해지겠어?”

 

얼마 전에 안 사실이지만, 이 가게의 사장님은 미즈키 씨보다 두 살이 많은 동향 출신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미즈키 씨는 그 얼굴에 서른이냐며 배꼽이 빠질 듯 웃어댔었지요. 그 앙갚음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날의 안주는 몹시 싱거워서, 술보다도 안주 배가 먼저 차 버렸던 기억이 나네요.

 

“오늘은 몇 사람? 네 명?”

“아뇨, 세 명이에요. P군은 오늘 결석.”

“망할, 올 거면 네 명 다 채워서 오던가 할 것이지……따라와요.”

 

사장님은 툴툴거리면서도 앞치마에 손을 닦으면서 가게 구석의, 우리들이 항상 앉던 자리로 저희를 안내해주셨습니다. 커다란 손아귀에 들린 쟁반에서 메뉴판과 손을 닦을 물수건, 그리고 물컵이 척척, 테이블 위에 놓여집니다.

 

“그나저나 별일이군, 그 녀석이 결석이라니. 어디 아픈가?”

“아뇨, 그런 건 아니고요. 친구 만나러 간다고 하던걸요?”

“친구?”

 

친구라니, 처음 듣는 이야기네요.

치히로 씨의 이야기는 저로써도 처음 듣는 이야기였기에 사장님과 저는 동시에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그 녀석, 친구도 있었나?”

“있을 수도 있죠! 사람을 무슨 왕따로 만들고 있어.”

“으음, 뭐, 그럴 수도 있겠지만. 내가 그 녀석이랑 안면을 튼 이래로 당신네들 말고 다른 사람이랑 다니는 걸 본 적이 없어서 말이야. 뭐, 아무튼. 안주는 늘 먹던 걸로 하면 되지?”

“네. 그걸로 부탁해요.”

 

고개를 끄덕이며 사장님은 처음에 서 계시던 카운터로 돌아갔습니다.

 

 

“건배!”

“건배~!”

 

쨍, 하는 높은 소리를 울리면서, 제 손보다 약간 작은 크기의 술잔 안에 든 술이 찰랑, 하고 흔들립니다. 그것을 곧장 입으로 가져와 약간 기울이면, 안에 들어있는 푸근한 향을 풍기는 투명한 액체가 목을 타고 내려가며 식도를 뜨겁게 불태우는 것이 느껴집니다.

 

“크으~역시 일본주가 제일 잘 맞아!”

“이것도 꽤나 고급 브랜드……프로듀서 씨, 대체 이런 걸 어디서 구하는 걸까요.”

“그러게 말이다. 나도 정말 궁금하다니까.”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굵은 목소리를 듣고 저는 몸을 약간 옆으로 비켰습니다. 술병과 술잔밖에 없는 테이블 위에 사장님의 솥뚜껑만한 손이 나타나더니, 하나 둘씩 안주가 담긴 그릇들을 늘어놓기 시작했습니다.

 

“더 필요한 거 있으면 말씀하시고. 술도 더 있으니까 필요하면 부르시고. 알겠지?”

“아하하하, 고마워요!”

 

다시 카운터로 돌아가는 사장님을 향해 꺄르륵 웃으면서 미즈키 씨가 손을 붕붕 흔드는 것을 바라보며, 저는 또다시 술잔을 기울였습니다.

술은 향으로 마시는 것이라며 안주도 나오기 전부터 대작을 시작한 것이 문제였을까요. 이제 반 병 정도를 나누었을 뿐인데, 어쩐지 얼굴이 화끈한 것이 벌써부터 취기가 올라오는 모양입니다.

 

“프로그램 끝까지 마감한 건 처음이죠? 기분 어때요?”

“아아, 계속 할 때는 언제 끝나나 싶었는데……끝나고 나니까 시원섭섭하네. 그보다도 카에데?”

 

미즈키 씨는 술잔을 기울이다 말고 옆자리에 앉은 저를 바라보았습니다.

 

“네, 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있어?”

“네? 아, 아아……티가 많이 났나요?”

“카에데 씨가 술을 앞에 두고 멍하게 앉아 있는 건 그다지 보기 쉬운 광경은 아니니까요.”

 

치히로 씨의 대답에 쓴웃음을 지으면서 저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아까 전, 의상실에서부터 계속 머릿속을 뒤덮고 있는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의 정체를 확실하게 알 수 없었기에, 저는 귀로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한편, 손과 눈은 애꿎은 술잔을 만지작거리면서 필사적으로 머릿속을 헤집고 있었습니다.

 

“실은, 녹화 중에 나온 이야기 때문이에요.”

“오늘 주제가……기념일이었던가?”

“네. 뭔가 중요한 걸 하나 놓치고 지나간 것 같은데……그게 뭔지 잘 기억이 안 난단 말이에요.”

”그러고 보면 P군도 기념일 참 잘 챙겼지. 애들이나 너희들 생일 같은 거 챙겨주는 거 보면 좀 부럽긴 하더라.”

“미즈키 씨도 곧 생일이잖아요?”

“그렇긴 하지. 이제 한 달쯤 남았나……뭐, 나도 크리스마스부터 해서 이것저것 받기도 했지만 말이야.”

 

안주로 나온 구운 은행알을 입 안으로 던져 넣으며 미즈키 씨는 작게 웃었습니다.

돌이켜보면 프로듀서는 단 한번도 기념일을 허투루 보낸 적이 없었습니다. 각자의 생일이나 크리스마스 같은 공식적인 기념일은 물론, 음반 발매 1주년이라던가, 데뷔 1주년 같은 개인적인 기념일까지 번거롭다 싶을 정도로 확실하게 챙겼습니다. 귀찮지 않느냐고 물어보면, 그 사람은 언제나 “이럴 때가 아니면 언제 챙기겠어요?”라며 씨익 웃곤 했습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별안간 머릿속에 벽력이 내려치듯 어떤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앗.”

 

제가 낸 소리를 들은 것인지, 안주를 집어먹던 두 사람의 동작이 멈추었습니다. 그야 얌전히 술잔을 만지작거리던 사람이 뜬금없이 비명소리 비슷한 소리를 냈으니, 시선을 잡아 끌 만도 하겠죠.

 

“카에데 씨?”

“왜 그래? 뭐 생각났어?”

 

약간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저를 바라보는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면서, 저는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었습니다.

 

“그게……프로듀서의 생일……알고 계세요?”

“……아!”

 

치히로 씨의 표정이 아차, 하는 듯한 표정으로 바뀌었습니다. 급히 휴대전화를 꺼내 달력을 확인하던 치히로 씨는 한숨을 푹 내쉬면서 휴대전화를 다시 내려놓았습니다.

 

“9월 24일……3주 전…….”

“왜? 왜?? P군 생일 때 뭐 하기로 했어? 파티라도 하려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미즈키 씨의 옆에 앉아 있던 치히로 씨가 저를 대신해 말을 받았습니다.

 

“그게, 프로듀서 씨에게 너무 받기만 하는 것 같아서요. 이번에야말로 뭐라도 챙겨 드려야겠다 싶었는데, 엇나가 버렸네요.”

 

치히로 씨의 이야기를 들으며 저는 한숨을 토해냈습니다. 프로듀서의 생일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 것이 생일을 1주일 앞둔 시점이었지요. 치히로 씨야 물론, 이런저런 일이 있었기에 신경을 쓰지 못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저는 아니었습니다.

 

”죄송해요. 저라도 신경을 썼어야 하는 건데…….”

“아, 아뇨! 사무 담당은 저였는데, 당연히 제가 신경을 썼어야죠……그랬어야 했는데.”

 

아무리 일이 바빴다고는 하지만 결국 그것도 핑계에 불과합니다. 아니, 솔직하게 실토하자면 신경을 쓰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실은 신경조차 쓰지 않았던 것이지요. ‘호의가 계속되면 그것이 당연한 것처럼 여겨진다’고 하던가요? 언제부터인가 저는 기념일이란 것은 언제나 받기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부모님을 제외하고 이렇게까지 저에게 무언가를 챙겨 준 사람은 그 사람이 유일했음에도 말이지요.

이기적인 여자네요. 저란 사람은.

 

“치히로는 어때?”

“에, 저, 저요?”

“뭐 생각해 둔 거라도 있나 싶어서.”

“아, 아하하……저야 뭐, 요 며칠간 하도 정신이 없어서…….”

“아 참, 맞아……그랬지.”

 

미즈키 씨는 멋쩍은 듯 웃음을 지었습니다. 대화의 흐름이 잠시 멈추고, 저희 세 사람 사이를 어색한 공기가 뒤덮기 시작합니다. 그것을 어떻게든 떨쳐내려는 듯, 치히로 씨는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어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습니다.

 

“아, 맞다! 이거 한번 보실래요?”

 

치히로 씨가 꺼낸 것은 표준규격보다 조금 작은 편지봉투였습니다. 다만, 팬레터는 아닌 듯, 봉투의 표지에는 우표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습니다. 우표의 아래쪽으로 드러난 꼬불꼬불한 글자를 알아본 미즈키 씨가 봉투를 집어 들었습니다.

 

“뭐야? 국제우편이네? 어디……윌리엄 P 존슨? 누구 거야?”

“프로듀서 씨 거에요. 친구한테서 받았다고 하셨는데……한번 열어보실래요?”

“P군꺼? 그럼 윌리엄 어쩌고는 친구 이름인가……?”

 

미즈키 씨가 봉투를 열어 그것을 거꾸로 뒤집자, 툭, 하고 봉투 속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왔습니다.

 

“입장권?”

“영화……는 아니고, 상영회 입장권이네요?”

 

티켓에 적혀 있는 영화의 제목을 보더니 미즈키 씨는 갑자기 손을 가볍게 마주쳤습니다.

 

“아, 이거! 요즘 유명한 로맨스 영화잖아? 나도 알아.”

“어때요? 재밌대요? 저는 광고하는 것만 봐서…….”

“히로인이 굉장히 연기를 잘 한다고 하더라. 감독이 자기 페르소나라고 공인하고 다니기도 하고. 치히로, 혹시 따로 보러 갈 사람 있어?”

“그랬으면 좋겠는데……그런 사람이 있었으면 여러분께 안 보여드렸겠죠?”

“아하하, 맞아, 맞아.”

 

치히로 씨의 대답을 듣고 미즈키 씨는 깔깔거리면서 술잔에 남은 술을 마저 들이켰습니다.

 

“그럼, 나랑 카에데도 같이 보러 가면 안 될까?”

“에, 저, 저두요?”

“카에데도 주말에 할 일 없다고 했잖아? 프로듀서도 이번 주말엔 오프라고 했고.”

“그렇기는 한데……제가 같이 가도 될런지…….”

“괜찮아, 괜찮아. 이런 기회 흔치 않다구? 잘하면 배우들이랑 만날 수도 있어!”

“그렇군요……그럼, 신세를 져도 괜찮을까요?”

“물론이죠!”

 

 

 

 

프로듀서가 맡겨놓은 두 병을 모두 마실 무렵, 저희들의 뒷풀이도 짤막하게 끝을 맺었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좀 더 마시고 싶었지만, 방송이 마무리되었으니 이제는 11월에 있을 합동 라이브를 대비해야 할 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어린 아이들의 체력을 따라가려면 지금부터 서서히 준비를 해 둬야만 하죠.

 

“잘 먹었습니다!”

“조심해서 가. 그 녀석한테도 안부 전해주고.”

“네~!”

 

사장님의 배웅을 받으며 우리는 가게 밖으로 나왔습니다. 가을 밤의 서늘한 공기가 폐부를 찔러, 둥실둥실 취기에 헤매던 정신을 어느 정도 일깨워 주었습니다.

 

“그럼, 나 먼저 들어갈게.”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저희와는 방향이 정 반대편인 미즈키 씨를 택시에 태워 보낸 뒤, 저는 치히로 씨와 함께 그녀의 집을 향해 걷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원룸은 치히로 씨의 원룸과 같은 방향이었고, 거리도 그다지 멀지 않기에 평소에도 술기운을 깰 겸, 이렇게 자주 걸어서 돌아가곤 했습니다.

 

“……치히로 씨.”

“네?”

 

서서히 할로윈 장식이 하나 둘씩 걸리기 시작하는 번화가를 지나, 고요해진 주택가를 지나가면서 저는 조심스레, 가슴 속에 담고 있던 물음표를 꺼냈습니다.

 

“그……프로듀서가 만난다고 하는 친구, 혹시 누구인지 알고 계시나요?”

“글쎄요……저도 잘 모르겠어요. 아무런 언질도 없이 그냥 친구라고만 하시는 바람에…….”

“그렇군요…….”

“왜 그러세요?”

 

저는 대답을 망설였습니다. 이것을 대체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취기를 연료 삼아, 마치 촛불처럼 마음 속에서 일렁이는 이 감정을 대체 무엇이라고 정의해야 할지, 저 자신조차 몰랐기 때문입니다.

 

“카에데 씨?

“……아, 아니에요. 그냥, 조금……궁금해져서요.”

 

결국, 이렇게 대답을 얼버무리고 말았습니다. 그 뒤로는 치히로 씨와 함께 정직원 생활이나, 차후 사무실의 일정에 대해서 등, 별 영양가 없는 잡담을 주고 받기만 했습니다. 귀는 이야기를 듣고, 입은 대화를 하고 있었지만, 머릿속에서는 계속해서 조금 전, 내가 떠올렸던 감정을 곱씹고 있었습니다.

 

“그럼, 저는 여기서 들어가볼게요. 카에데 씨, 오늘 어울려주셔서 고마워요.”

“별 말씀을요. 피곤하실 텐데 얼른 들어가서 쉬세요.”

“네. 그럼 내일 뵈어요.”

 

치히로 씨의 배웅을 받으면서, 저는 천천히 저의 집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습니다. 머릿속에는 아직까지도 한 가지 생각뿐이었지만요. 1년 8개월. 길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짧은 것도 아닌 시간입니다. 그런 시간을 함께하면서, 서로에 대해서 이제는 어느 정도 알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

 

갑자기 밝아진 눈 앞의 풍경에 저는 잠시 발걸음을 멈추었습니다. 멍하게 걷고 있는 사이에 길을 잘못 든 모양입니다. 곧바로 되돌아가기 위해 몸을 돌리려는 찰나, 귓가에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 목소리는……?’

 

저는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분명 낯익은 목소리이긴 했지만, 그 목소리가 말하는 언어는 전혀 낯익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모델 시절, 지방 로케이션은 몇 번인가 다녀온 적이 있지만 해외로 나가 본 경험은 없습니다. 평범한 일본 사람에게 영어라는 언어는, 학생 시절에나 몇 번 접해본 것이 전부인 것이 보통이지요. 하지만 저의 귓가에 들려오는, 유창하게 영어로 말하는 목소리는 분명히 매우 낯익은 목소리였습니다. 눈을 감고 들으면, 당장에라도 어떤 사람의 얼굴이 떠오를 정도로요. 네. 그 목소리는, 다름아닌 프로듀서의 목소리였습니다.

저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바라보았습니다. 저도 모르게 목소리의 주인을 찾아 두리번거렸습니다. 그리고, 눈 앞에 펼쳐지는 광경에, 저는 얼어붙은 듯, 제 자리에 서 있었습니다. 

그 곳에는 청바지 위에 가디건을 걸치고, 야구 모자를 쓰고 있는 프로듀서가 있었습니다. 어째서 그 사람이라는 것을 확신하는가 묻는다면, 지금 그가 입고 있는 옷이 단 한 벌 밖에 없는 그의 사복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도쿄 시내를 이 잡듯이 뒤진다면 저것과 비슷한 패션을 입은 사람은 얼마든지 찾을 수 있겠지요. 하지만, 그 사람이 190cm가 넘는 장신이냐고 묻는다면 그 조건을 만족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점은 그 사람이 혼자가 아니라는 점이지요. 또 한 사람. 그의 옆에는, 한 사람이 더 있었습니다.

 

‘누구지……?’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그와 비슷할 정도로 커다란 키였습니다. 그 다음으로 눈에 띄는 것은 깊게 눌러쓴 야구모자 아래로 넘쳐흐르는, 불야성의 조명을 받아 반짝이는 금발이었습니다. 얇은 코트를 걸쳤음에도 드러나는 신체 라인은 그 사람이 여성이라는 것을 말해주었습니다.

저는 저도 모르게 꺼내 들었던 휴대전화를 조용히 다시 집어 넣었습니다. 그녀의 옆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으며, 때때로 어깨동무를 하기도 하고, 팔짱을 끼기도 하면서 그녀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그가 마치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듯이 편안해 보이는 표정을 짓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농담을 주고 받는 듯 짓궂게 웃으면서 그녀의 이마를 살짝 쥐어박는 얼굴, 그녀의 장난에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의 콧잔등을 꼬집는 표정.

그것은 1년 8개월이라는 세월을 함께 보냈던, 둘도 없는 파트너로써 함께 시간을 보냈던 저에게는 단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던 표정이었습니다.

그 때였습니다.

 

“앗……?!”

 

그의 옆에 서 있는 여자와 눈이 마주친 것 같았습니다. 아무것도 잘못한 것이 없었음에도, 무언가에 쫒기듯 저는 급히 자리를 벗어나 집으로 향하는 길을 내달리기 시작했습니다.

두근, 두근. 평소보다도 심장이 무겁게 뛰었습니다. 취기로 적당히 붕 떠올라 있던 머리가 한 순간에 땅으로 떨어져 짓눌렸습니다. 그에게 무관심했던 자신에게 하늘이 벌을 내리는 것일까요?

꾸욱, 하고 짓눌려오는 가슴이 너무나도 답답했지만, 저는 이를 악물고 정신 없이 달렸습니다.

얼마나 달렸을까요? 정신을 차려 보니 저는 현관문 앞에서 거친 숨을 몰아 쉬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싸늘하다고 느꼈던 가을 밤의 공기였지만, 기분 탓인지 지금은 전혀 싸늘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한 여름의 더위처럼 끈끈하게 달라붙는 끈적한 공기에 뒤섞여, 검고 불쾌한 무언가가, 마치 거머리처럼 끈끈하게 저의 몸을 옭아매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간 저는 신발조차 벗지 않고, 그대로 현관문에 기대어 바닥에 주저앉았습니다. 가쁜 숨을 몰아 쉬면서, 저는 아까 전보다도 더욱 더 강하게 조여오는 가슴을 꾸욱 눌렀습니다.

지금의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고작 이런 것뿐이었습니다. 

 

“으읏……!”

 

어째서…….

어째서, 나는 이렇게 괴로운 걸까요.

 

“프로듀서……!”

 

바닥에 떨어뜨린 가방에서 살짝 빠져나온 휴대전화가 깜박깜박, 메일 수신을 알리는 신호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 <'어제'가 '오늘'과 함께할 '내일'에게(2)> 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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