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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섞인 그림자 - 4 (카나데 X 린 SS)

October 27, 2016 (목) 02:09에 작성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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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바깥을 바라봤다. JR 동일본 도쿄 종합 차량 시설에 열차 세 대가 천천히 플랫폼에 들어오는 게 보였다. 긴 열차들은 느릿하게 플랫폼의 끝에 멈추어 서서 지난 몇 일, 혹은 몇 주, 아니면 몇 달 동안의 피로를 풀어줄 정비공을 기다렸다. 하늘이 무척 맑았다. 얇게 벼려진 구름이 바람을 타고 흩어졌다. 전화가 울렸다.

  "네. 시부야 입니다."

  <안녕하세요, 시부야 씨. 이삿짐 센터입니다.>

  "아, 네. 바로 내려가죠."

  <아니요, 감사합니다만 아직 가는 길입니다. 주소는, 오사키 웨스트 시티 W 건물 34층 맞으신 가요?>

  "네."

  <감사합니다. 30분 후에 도착합니다.>

  "네, 알겠습니다."

짤막하게 말을 꺼내고 전화를 끊은 뒤,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컵에 따라 마셨다. 작은 리모컨을 눌러 라디오를 틀었다. 바깥의 소음은 전혀 들리지 않고, 잔잔한 기타소리 만이 들렸다. 방음이 너무 잘 되어 있어 이상하게도 삭막한 느낌이 들었다. 조용한 사람들이 살던 곳이라서 그런 걸까? 카나데도 시끄러운 편은 아니고, 후미카 씨는, 음. 카나데가 없으면 과연 입을 열고 살기는 할까 의문스러운 사람이니까. 별 이유도 없이 머리 속에서 후미카 씨의 식사장면이 떠올랐다. 입을 벌리거나 턱을 움직여 씹는 것도 아닌데 포만감을 느끼고, 음식을 젓가락이나 포크 같은 집기로 집는 것도 아닌데 음식이 사라지는 장면. 점점 내 머리 속에서 후미카 씨는 슈르한 사람으로 변모하고 있었다. 전화기가 울렸다. 카나데다.

  "카나데."

  <짐은 다 옮겼어?>

  "아니, 아직. 30분 후에 올 거야."

  <짐이 많아?>

  "아니. 굳이 이삿짐 센터를 부를 필요가 있었나 싶을 정도로 없어. 옷 두 상자랑 식기나, 잡화같은거 한 상자. 그 정도?"

  <그래? 정말 없네.>

  "가전제품이야 살 일도 없고, 전자기기 같은 거 안 사니까."

  <후훗, 린이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 모습, 상상하기 어려워.>

  "흐응. 뭐. 요즘은 태블릿이면 전부 가능하니까. 더 이상 알면 복잡하고."

  <아리스 따라한거야?>

  "뭐? 아, 음. 아니."

  <아참, 오늘 저녁에 아리스와 후미카랑 만나기로 했는데. 린은 어때?>

  "아리스와 후미카 씨?"

식탁에서 일어나 물잔을 들고 창가 앞에 섰다. 바람이 구름을 찢었다.

  "글쎄, 몇 시에?"

  <아마 6시 반 넘을 거 같아. 아리스는 조금 늦게 오고.>

  "흐응. 대학생이라 그러려나. 후미카 씨는, 음."

  <후미카는 밀린 책 절반쯤 읽었다고 하니까. 잠깐 쉬기로 했어.>

  "후미카 씨 언제부터 쉬었지?"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카나데가 잠깐 생각을 하느라 입을 다물어 전화기에 주변의 잡음이 들렸다.

  <아마 두 달쯤?>

60일 만에 500권을 읽다니 대체 뭘까, 그 여자. 

  <그거 절대로 1년 간 밀린 거 아니니까. 실례되는 상상은 하지 말아줄래?>

전화기 너머로 마음 읽는 거, 진짜 치사하다고 생각해. 물을 한 모금 더 들이켰다. 기타 소리가 천천히 잦아들었다.

  "그래, 그래. 뭐 1년은 나도 무리 아니려나, 하고 생각했어."

  <3년이야.>

아니, 3년도 충분히 이상하니까.

  

이삿짐 센터 직원들은 5 분 정도 늦게 도착해 30 분 만에 짐을 정리하고 사라졌다. 비어 있는 방에 세 상자밖에 되지 않는 짐을 옮겨 넣는 일은, 아마 나 혼자서 해도 한 시간 안에는 끝나지 않을까. 차량을 주차할 공간을 찾고 엘레베이터를 타고 상자를 옮긴 시간이 아마 더 걸렸을 정도로 이사는 싱겁게 끝이 났다. 괜히 이삿짐 센터를 부른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번거롭지 않게 끝났으니, 나쁘지는 않으려나. 짐이 워낙 적어서 없어진 것도 없고, 파손된 것도 없다. 장롱을 열어 코트에 살짝 간 구김을 손바닥으로 털었다. 옛 집의 먼지가 코트에서 나왔다. 이삿짐 센터 직원이 곱게 집어넣은 장롱 속 옷들을 전부 꺼냈다. 스커트 세 벌, 셔츠 다섯 벌, 코트 두 벌. 간단한 저지 한 벌과 반바지 두 벌, 티셔츠 세 벌, 구두를 포함해 신발 세 켤레. 아이돌 때 입었던 의상의 숫자가 이 옷들의 수보다 더 많지 않을까. 그나마도 스커트 한 벌과 셔츠 두 벌은 낡아서 보풀이 일고, 단춧구멍이 헐어 있었다. 언제 이렇게 낡아버린걸까.

  "하아..."

지난 한 달 동안, 모든 일이 너무 빠르게 돌아가서 실감이 잘 나지 않았다. 10년 만에 다시 연예계에 복귀하고, 2 주만에 10 년 가까이 박혀 살던 맨션을 정리하고, 이제는 오사키 역 앞 초고층 빌딩의 끝자락에 짐을 풀었다. 당사자인 나도 놀랍게도, 10 년의 시간 동안 남은 짐은 단 세 박스 뿐이다. 언제 들켜 도망칠 지 모르는 첩보원의 안전가옥에도 아마 이것보단 많은 짐이 나올 것 같았다. 다시 옷을 정리해 장롱에 집어넣고 거실로 나왔다. TV 위에 걸린 시계가 3 시를 가리켰다. 햇빛의 각도가 완만해지고, 노란 빛을 머금은 게 보였다. 건물의 지평선 틈새에 도쿄 만이 살짝 보이는 것 같았다. 

  

  

  

오차노미즈 역 히지리바시 입구엔 슬슬 사람이 몰리기 시작했다. 도쿄는 어디를 가든 낮이건 밤이건 항상 붐빈다. 아침엔 출근객이 붐빈다면 점심엔 갈 곳을 읽고 당황하는 관광객이, 저녁에는 퇴근하는 샐러리맨과 당황하는 점심의 관광객이. 오차노미즈 역도 자신이 어엿한 도쿄의 역 중 하나라는 것을 알리려는 듯 몰려오는 인파를 꾸역꾸역 받아냈다. 이미 역 앞 작은 음식점은 사람이 다 차 있다. 가로등이 완전히 드리운 역청빛 어둠을 내쫓고, 자동차 후미등의 붉은 빛이 도로를 물들였다. 비가 오지 않았는데도 도로의 아스팔트는 붉은 빛을 생각 외로 잘 머금었다. 전화기를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6시 34분. 이제 슬슬 올 때가 되지 않았으려나. 갑자기 불어오는 초겨울의 바람에 머리가 눈가에 엉켜 손으로 정돈하는 동안, 검정 크라운 택시 한 대가 오차노미즈 역 앞에 섰다. 1 차선의 일방통행 길이라 택시 뒤꽁무니에 줄줄이 달린 차량들이 멈춰 섰다. 택시의 문이 열리고 네이비 매킨토시 트렌치 코트를 걸친 카나데가 나왔다.

  "빨리 왔어?"

  "아니, 한 5 분 전쯤?"

  "일이 아슬아슬하게 끝났거든. 미안해."

  "5 분 정도야 괜찮지 않으려나."

카나데는 전화기를 흑갈색 버킨 백에서 꺼내 메세지를 보냈다. 아마 후미카 씨나 아리스일 것이다. 카나데가 고개를 찡그렸다.

  "린, 미안한데 후미카 쪽에서 잠깐 일이 생겼나 봐. 8시쯤에나 올 수 있을 거 같대."

  "그럼 꽤 시간이 남네."

카나데는 버킨 백을 바닥에 내려놓고 인도 가장자리 펜스에 몸을 기댔다. 가로등의 빛이 비스듬하게 그녀의 머리칼에 떨어졌다. 약간 걸음을 떼어 카나데 앞에 섰다. 바람이 꽤 차서, 코트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러게. 음. 뭐 할까?"

  "나한테 물어봐도..."

그녀가 살짝 미소를 지었다. 가로등이 빛이 입술 끝자락에 살짝 걸쳤다. 나와 카나데는 오차노미즈 역 옆의 성교로 걸어갔다. 거의 카나데의 발걸음을 따라 걸어갔을 뿐이지만. 1 시간 반 동안 방향성을 잃고 도쿄를 포류하는 나와 카나데의 모습을 생각했다. 카나데가 몇 년 전에 찍었던 영화 속 장면의 데자뷰를 느꼈다. 그 영화에서처럼, 우리는 택시를 잡아타고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고 창가에서 흐르는 세상의 장면을 눈에 흘리기라도 하는 걸까. 

  "도쿄는 이렇게 넓은데, 우리는 아무 것도 찾지 못하네."

나와 카나데는 난간에 기댔다. 저 앞, 칸다 강 위에 살짝 떠있는 마루노우치 선의 터널에서 열차가 나왔다. 운이 좋은 건지, 바로 위 강가에 맞닿는 주오선에 열차가 달려가는 것과, 저 뒤쪽 소부 본선의 녹색 아치 다리에서 열차가 달려 나오는, 철도 마니아라면 당장 카메라를 들이 댈 세 열차가 마주 달리는 모습이 보였다.

  "저 열차들은 내일 이맘때쯤이면 또 다시 자신들도 모를 엇갈림을 겪겠지?"

신기하게도, 도로를 지나는 자동차의 소음은 잘 들리지 않았다. 열차 소리가 대신 그 빈 공간을 채워버리는 건지, 철도를 달리며 덜컹거리는 기나긴 열차의 빛이 눈에 담겼다. 다리 밑 칸다 강에 미처 담기지 않은 빛이 떨어졌다. 수면 위 작은 파장이 떨어진 빛을 부수어 흩뜨렸다.

  "따분해졌어."

  "왠지 미안."

카나데가 싱긋 미소를 지었다.

  "린의 잘못이 아니니까."

카나데는 나를 바라보았다. 바람이 불어 코트 자락이 작게 휘날렸다. 단추를 채우지 않아 코트의 앞섬이 활짝 벌어졌다. 셔츠 틈새로 초겨울의 바람이 살짝 새 들어왔다.

  "린, 그 스커트 좀 낡지 않았어?"

카나데가 방금 내 스커트를 본 모양이다.

  "아, 응. 좀 낡았지."

  "린은 오래 물건을 써서 몸에 맞추는 타입?"

  "아니, 꼭 그런 건 아니지만."

카나데는 무언가 잠깐 생각을 하다 어떤 묘안이라도 생각이 난 듯 싱긋 웃었다.

  "생각났어. 이 짧지만 긴 공백을 메꿀 유희."

카나데는 난간에서 몸을 뗐다. 바로 옆 오차노미즈 역에서 수많은 사람이 빠져나오고, 그 인원을 채우기 위해 택시가 몰려오는 것이 보였다. 

  "린의 새 옷, 사러 갈까?"

  

나와 카나데는 성도를 건너 아키하바라 방향으로 걸었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지만, 오차노미즈에서 악기와 책을 빼고 다른 물건을 사러 간다는 말은 들어본적이 없기에 무의식적으로 방향을 돌린 것 아닐까? 유시마 성도를 끼고 돌아 천천히 내리막길을 걸었다. 후드와 패딩 조끼를 입고 등에 메신저 백을 맨 자전거 라이더들이 자동차의 사이사이를 재빠르게 치고 지나갔다. 큰 트럭이 코너를 돌기 위해 거의 멈추어 서듯 움직여 짧은 정체가 일어났다. 5분 정도 걷자, 소부 본선 열차가 지나는 녹색 아치 다리가 눈에 보였다. 벌써부터 아키하바라의 인파가 시작되고 있었다. 애니메이션 캐릭터가 그려진 큰 종이 백을 들고 다니거나, 검정 비닐 봉투 안에서 삐져나온 전선, 혹은 커다란 백팩과 비싸보이는 카메라. 아니면 저녁길에 또다시 방향성을 잃고 밤에서마저 길을 서성이며 당황하는 관광객. 골목 구석 작은 가게마다 사람이 줄지어 기다리는 게 보였다. 프릴이 달린 메이드 복 위에 얇은 패딩을 덧입은 여성들이 전단지를 들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수줍게, 혹은 대담하게 웃으며 전단지를 건넸다. 라멘가게나 카레가게에 앉은 손님은 저마다 짐을 한두 개는 꼭 의자 밑에 두고 있었고, 면세점이나 전자기기 가게에는 뭐든지 수십 개씩 집어가는 중국인 관광객과 이것저것 비교하며 재기만 하는 한국인 관광객, 무슨 공간인지도 모르고 연신 카메라 셔텨만 누르는 서양인 관광객이 한데 모여 어지러웠다. 나와 카나데는 별다른 말도 하지 않고 계속 걸어가, 러브 메르시를 끼고 돌아 남쪽으로 향했다. 카나데는 내게 어디로 가는지도, 얼마나 가야 하는지도 알려주지 않고 앞장서 계속 걸어갔다. 아키하바라에서 점점 멀어져 빅 애플과 라옥스를 지나 칸다 강을 막 건넜을 때, 카나데는 손가락으로 다리 입구의 바로 옆 붉은 벽돌 건물을 가리켰다. 1층으로 된 건물 위에는 철도가 깔려 있었다.

  "여기야."

카나데가 회색 콘크리트로 테두리 친 입구를 가리켰다. 입구 위에 흰 빛을 내뿜는 간판이 걸려 있었다.

  "마치 에큐트?"

  "오차노미즈 쪽에는 쇼핑하기에 적당한 곳이 없으니까. 후미카와 가끔 오곤 해."

  "흐응."

  "흐응, 뭐 나쁘지 않으려나?"

카나데가 웃었다. 내 말투를 따라 한 게 그닥 기분 나쁘지는 않지만, 약간 창피한 느낌이 들었다.

  "카나데."

  "미안, 장난이야. 들어가자."

나와 카나데는 마치 에큐트의 입구로 들어갔다. 만세이바시라는 역을 개조해 만들어진 복합공간, 이라는 설명이 작은 팜플렛에 적혀 있다. 건물 안 입구 쪽에는 작은 가게가 있었다. 음식점인지, 카페인지 둘 다일지도 모를 인테리어다. 가게 입구에 프린트 된 로고가 보인다.

  "히타치노 브루잉 랩."

로고 속 붉은 털의 부엉이는 당장 이리 와서 한 잔 하고 가지 않으면 계속 노려보겠다고 선언하듯,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건물의 구조는 약간 생소해서, 복도 대신 각자의 방을 이어주는 길이 벽을 뚫고 나 있었다. 긴 벽 속 복도 사이로 방들이 차례대로 보였다. 손님이 그 작은 복도의 틈새를 꾸역꾸역 메꿨다. 카나데는 그 길을 따라 앞으로 나갔다. 각자의 방 앞에 칸다 강의 전경이 보였다. 테라스에서는 손님들이 입김을 내뿜으며 간단한 식사를 하거나 맥주, 혹은 와인을 마시고 있었다. 아직 본격적인 추위가 다가온 것은 아니지만, 어떻게 이 초겨울 날씨에 밖에서 맥주를 마실 생각을 하는지. 두 번째 방은 테라스 반대쪽으로 쭉 뻗어 건물이 앞으로만 긴 구조가 아님을 드러냈다. 아마 길쭉하게 뻗은 コ자 모양의 구조가 아닐까?

  "린, 이거 어때?"

카나데는 전시대에서 스커트를 한 벌 집어 내게 펼쳤다. 진회색 부드러운 울로 지어진, 적당한 길이의 스커트. 어림잡아 무릎을 살짝 가릴 정도인 것 같다. 카나데에게서 스커트를 받아 이리저리 만듦새를 확인했다. 천은 부드럽고 따뜻하다. 재단은 칼로 잰 듯 말끔하며 박음질이나 여타 마감 또한 꽤 좋다. 웬만한 스파 브랜드보다는 질이 배는 좋았다.

  "흐응, 괜찮은걸."

스커트의 허릿께에 달린 작은 상품표기라벨을 보았다. 재질은, 50% 캐시미어, 50% 울. 옆에 딸린 태그를 보았다. 브랜드는 생소하지만, 가격은 생소하지 않은 가격. 3만 4900엔. 비싸.

  "다른 걸 볼까."

카나데가 짧은 미소를 지었다. 나와 카나데는 가게 안을 천천히 돌았다. 아까 전의 스커트의 가격표를 보고 나니, 무엇 하나 집기가 쉽지 않았다. 저 꽤 괜찮아 보이는 진청색 스커트는 아마 6만 4700엔, 저 수수해 보이는 스트라이프 스커트는 아마 5만 8400엔, 저 보는 것만으로도 폭신거리는 흰색 카디건은 아마 8만 8200엔. 재정이 좋지 않은 지금이 아니라, 한창 바빴을 예전이라도 함부로 사기 어려운 가격이다. 맨 처음 카나데가 보여준 스커트가 가장 현명한 선택이라고 생각하며 그 스커트를 집었다.

  "이거면 될 거 같아."

  "다른 물건도 많은데. 꽤나 괜찮은 제품을 취급하니까."

  "아니, 이거면 돼."

내 통장이 이것만을 바라고 있어, 카나데.

  "그래? 그럼 이번엔 외투를 볼까?"

  "왜?"

  "왜냐니. 린의 코트, 단춧구멍도 헐었고 주머니 끝도 해졌잖아."

그렇긴 하지만, 코트를 살 여력은 아직 아니다. 톱 클래스 연예인과 이제 재 데뷔하는 연예인의 자산 차이는, 비교하는 것이 실례일 정도로 넓으니까. 후미카 씨와 아카네의 차이와 비견될 정도 아닐까?

  "괜찮아. 찢어진 것도 아니고, 이게 편해."

  "한번 입어보기만 해도 좋으니까."

카나데가 코트를 하나 집어 내 어깨에 멋대로 걸쳤다. 어쩔 수 없이 그녀가 걸쳐준 코트를 입었다. 품새가 약간 남았지만 어깨는 잘 맞았다. 팔도 편하고, 재질도 따뜻했다. 좋은 옷이다.

  "응, 잘 어울리네."

  "괜찮기는 한데, 굳이 사지 않아도 되니까. 정말이야."

  "괜찮아. 마음 가는 대로 골라."

카나데가 미소를 지었다. 

  "린의 재 데뷰를 위한 내 작은 선물, 정도 일까나."

  "딱히 축하 받고 싶지는 않은데."

카나데가 전시대에 걸린 여러 코트의 매무새를 만졌다.

  "그럼 집들이 선물 정도는 어떨까?"

  "초대받은 손님은 집들이가 끝나도 바로 옆에서 살고 있지만?"

카나데가 전시대에서 코트를 집었다.

  "그리고 어디에 사는 M 씨가 블랙 카드를 떨어뜨리고 갔으니까."

  "그거 절대 법인카드지?"

  "아름다운 성에는 그게 어울리는... 후훗."

  "놀리는 게 노골적이잖아, 너무."

카나데는 짧게 미소를 지으며 계속해서 옷을 골랐다. 스커트 한 벌이 코트 두 벌, 카디건 세 벌, 스커트 두 벌, 슬랙스 두 벌, 구두 한 켤레로 늘어났다. 4 만 엔도 안되던 가격도 열 배 넘게 늘어났다. 아마 사장이 영수증을 보면 예전 크로네 시절의 두통을 잠깐이라도 다시 맛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쇼핑도 끝났고, 이제 오차노미즈로 돌아갈까."

벌써 시간은 7시 45분을 가리켰다. 나와 카나데는 마치 에큐트에서 나왔다. 여기서 오차노미즈 역까지는 걸어서 15분도 안 되는 거리지만, 손이 무거워 택시를 잡았다.

  "괜찮은 유희였어."

  "이렇게 아무렇게나 사도 되는 건지 모르겠지만."

택시가 출발했다. 라디오에서 조용한 재즈가 들려왔다.

  

  

  

오차노미즈 역 입구에서 내려 5분 정도 기다리자, 후미카 씨와 아리스가 입구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멈춘 노란색 크라운 택시에서 나오는 게 보였다.후미카 씨는 남색 두꺼운 카디건 위에 남색 스트라이프가 그어진 밝은 회색 숄을 둘렀고 아리스는 카멜색 더플코트에 청색 목도리를 둘렀다. 아리스가 두른 목도리의 각 끝자락이 그녀의 배에서 덜렁거렸다.

  "늦어서 죄송해요, 카나데 씨."

  "아니, 괜찮아. 나름 즐겁게 보내고 있었으니까."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후미카 씨가 카나데에게 고개를 살짝 숙였다. 앞머리가 드리워 그녀의 턱 끝까지 가렸다.

  "아앗, 후미카 씨, 굳이 따지자면 제가 새로운 서점에 데려가서..."

아리스의 약간 당황한 표정을 보고 카나데가 짧은 미소를 지었다. 후미카 씨가 나를 보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린 씨. 오래간 연락이 없었습니다."

  "안녕, 후미카 씨. 그 점은 미안."

손을 살짝 들어 그녀의 인사에 답했다. 10년이나 연락을 하지 않아서 그런지, 약간 어색한 태가 났다.

  "굳이 경칭을 붙이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고마워."

다행스럽게도 후미카는 나를 그리 어색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누구와도 제대로 눈을 못마주치던 예전의 모습과 많이 달라 보였다.

  "오랜만이에요, 린 씨. 어떻게 지내셨나요."

  "안녕, 아리스. 이제 완전히 어른이구나."

아리스는 이제 후미카와 키가 같았다. 아마 나와 2센티미터 정도의 차이이지 아닐까. 차분한 얼굴엔 그녀가 어릴 적부터 항상 바라오던 성숙함이 가득 배여 있었다.

  "성인식을 치른 지도 벌써 2년이 지났으므로. 굳이 그 점을 강조하시지 않아도 돼요."

 "그나저나, 이 짐은."

후미카가 발 언저리에 있는 쇼핑백들을 보고 물었다.

  "린의 재 데뷰 기념, 이자 사장의 명령으로. 잠깐이지만 괜찮은 유희였지?"

  "역시, 사장이 시킨 일이구나."

  "헤에. 린 씨 다시 재 데뷰 하시나요?"

  "에, 아아. 어쩌다 보니."

  "자, 오랜만의 인사는 이 정도로 하고. 아리스, 앞장 서 줄래?"

  "아, 네. 이쪽이에요."

후미카가 친절하게도 쇼핑 백 두 개를 들어주었다. 아리스가 태블릿으로 길을 찾고, 카나데와 나, 후미카는 짤막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아리스는 길이 약간 헷갈렸는지, 태블릿을 열심히 건드렸다.

  "아리스, 이쪽 같은데요."

후미카가 아리스의 태블릿을 건네 받아 몇 번 두드리며 말했다. 전가기기에 문외한이던 후미카가 태블릿을 집고 있는 장면은 상당히 어색해 보였지만, 그녀는 능숙하게 태블릿을 조작해 아리스의 실수를 바로잡았다.

  "절간 앞 아이가 배우지도 않은 경전을 읊는 걸까."

후미카가 내 혼잣말을 듣고 고개를 살짝 숙였다.

  "꼭 그런 건 아니에요. 아리스가 열심히 가르쳐 주었으므로..."

  "사실상 강요에 가까운 특훈이었지만 말이지."

카나데의 상큼한 일침을 아리스는 논파하지 못한 채, 별다른 말을 하지 못했다.

  

"뭘로 주문하시겠습니까?"

점원이 녹차를 가져다 주어, 아리스는 후미카의 잔에 녹차를 따랐다.

  "린은 뭘 주문할래?"

카나데가 메뉴판을 덮으며 물었다.

  "생선회 모둠이 괜찮으려나." 

  "이 나고야 코친순계히키즈리 나베 3인분과, 럭셔리 계란 감자샐러드, 지골로 모듬 구이를 부탁 드립니다."

  "아, 이 수량 한정인 대자 새우튀김을 먹어보고 싶어요."

아리스가 메뉴판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그래 그래, 그것도 주문하고 생맥주 4잔 부탁 드려요."

점원은 어지러운 주문을 빠짐없이 받아 적고 테이블을 떠났다.

  "아차, 계란말이도 같이 부탁 드립니다!"

아리스가 복도에 대고 살짝 소리쳤다. 시끌시끌한 가게 안 소음에 묻힐 줄 알았는데, 점원은 능숙하게 아리스의 외침을 알아듣고 용지에 적었다. 아리스가 방문을 닫고 자리에 앉았다.

  "나베와 맥주라. 예상을 못했어."

  "그건 무슨 뜻이죠?"

아리스가 내 독백을 듣고 물었다.

  "셋의 이미지와 많이 떨어진 거 아닌가 생각이 들어서."

  "글쎄, 이미지 만으로 우리를 판단하는 건 그만두지 않을래?"

  "린 씨, 실례에요. 카나데 씨는 이런 곳을 싫어하지 않는다구요. 오히려 약간 호감을 가진 편이죠."

  "잠깐만, 아리스. 장소 섭외는 네 역할 이었잖니?"

  "이번엔 카나데 씨의 새로운 취향을 적극 반영하기로 했어요. 그러니 부담 갖지 마시고 부디."

아리스가 새침하게 말했다.

  "후미카?"

둘은 카나데를 놀려보고 싶었던 것 같았다. 카나데가 후미카를 바라봤다. 후미카는 물잔을 들어 따뜻한 녹차를 홀짝였다.

  "...나베가 기대되네요."

아리스와 후미카는 약간 당황한 카나데를 보고 서로 싱긋 웃었다. 보기 좋게 한방 먹은 카나데의 얼굴에 서투른 미소가 퍼졌다.

  "둘이서 이렇게 사람을 일방적으로 몰아가는 거, 조금 분한걸."

 

  아리스가 위스키 하이볼을 벌컥거렸다. 카나데가 국자로 나베에서 건더기를 퍼 아리스의 그릇에 담았다. 아리스는 벌겋게 취해 카나데와 후미카에게 삿대질을 했다. 손가락의 방향이 어긋나서 가끔 카나데를 향한 삿대질이 나를 향했다.

  "그러니까, 분명 안 된다고 했었는데, 카나데 언니나 후미카 언니는!"

후미카는 아리스의 손을 꼭 잡고 아리스의 푸념인지, 힐난인지 모를 술주정을 받아주었다. 카나데도 약간 취했는지, 아리스가 마구 몸을 흔들어댈 때마다 박수를 치며 웃었다. 나와 후미카는 아리스가 더 술을 마시지 못하게 막으려고 했지만 벌써 네 번째 하이볼이 아리스의 앞에 놓였다.

  "아, 닭날개 튀김도 같이 주세요."

  카나데는 맥주를 살짝 홀짝이며, 꼬치를 하나 집어 뜯었다.

  "너무 주문하는 거 아냐?"

  "괜찮아, 내일 오프니까. 그리고."

카나데가 엄지를 들고 내 입술에 대려고 했다. 하지만 취한 것인지, 입술 대신 내 콧구멍에 대었다. 카나데는 무방비하게 미소를 지었다.

  "취해버려도, 누군가 데려가지 않을까나."

  "신뢰받고 있군요..."

  "그런 신뢰 별로 원하지 않으니까, 카나데, 적당히 좀 마셔."

아리스와 카나데는 서로 통하지 않는 대화를 나누며 술을 마셨다. 나는 화장실에 간다고 말하며, 셋을 뒤로 하고 잠시 가게 밖을 나갔다. 바깥 바람이 매우 쌀쌀했다. 취기 때문이려나, 피부에 닿는 바람의 촉감이 약간 따가웠다. 빌딩 1층으로 내려가 편의점에 들러 칫솔을 하나 샀다. 더 취하기 전에 잊지 않고 사 둬야 번거롭지 않을 것 같았다. 편의점에서 나와 손목을 들어 시계를 보니 시계바늘이 11시 반을 넘어가고 있었다. 바람이 쌀쌀했다. 누가 더 취해버리기 전에 끝날 수 있을까? 아리스와 카나데는 이미 완전히 취해버린 게 아닐까? 오차노미즈에서 네 연예인이 기절하듯 취한 모습이 찍힌 사진은 과연 얼마에 팔릴까? 빌딩 입구의 계단을 오르려고 고개를 돌리자, 후미카가 계단 맨 위에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후미카?"

계단을 마저 올라 그녀 옆에 섰다. 잠깐 찬 바람이라도 맞으려 나온 걸까. 남겨 놓은 둘이 어떤 상황일지 궁금해졌다.

  "린 씨, 오늘부터 카나데 씨의 권유로 같이 거주하게 되셨다고..."

  "아, 응. 덕분에. 서재에는 들어가지 않을 거니까."

  "아뇨, 부디. 읽고 싶은 게 있으시면 읽으셔도 무방합니다."

  "그래? 고마워. 나, 읽는 건 조금 서투르니까. 많이 읽어야 다섯 권도 안될 거야. 책 상하지 않도록 조심할게."

  "린 씨, 너무 갑작스러울지도 모릅니다만, 하나 말씀 드려야 할 것 같아서..."

  "응?"

후미카는 두 손을 마주 모은 채, 나를 정면으로 쳐다 보았다. 머리칼에 가린 푸른 눈동자 안에 담긴, 영문을 모를 힘에 광택이 하나도 묻지 않았다. 그림자에 가린 눈매에는 약간의 공허함이 담긴 것 같았다. 평소 생각하는 후미카의 모습이 아니다.

  "후미카?"

  "카나데 씨의 호의는, 가볍게 쓸어 넘길 만한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라면 그러지 않으리라 생각하지만..."

전혀 예상하지 못한 질문에 무슨 말인가, 하고 생각했다. 카나데의 호의를 가볍게 쓸어 넘긴다니?

  "분명 무언가를 숨기고 있죠? 당신의 얼굴 속 작은 틈새에서 주변과 어울리지 못하는 감정이 보여요."

당황스러운 마음이 뒤통수에 저릿하게 퍼진다.

  "무슨, 말이야?"

  "카나데 씨는, 당신은 모르겠지만 마음 속에 절박을 담고 있어요."

절박? 갑작스러운 호의에서 대체 무슨 절박감을 읽어내라는 건지, 후미카는 듣는 사람은 신경 쓰지도 않은 채 계속 말을 꺼냈다.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는데."

  "저도 모르겠습니다. 저도..."

후미카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이 그녀의 입에서 조용하게 흘러나온다.

  "하지만 제가 다룰 수 없었기에, 더 악화시킬 수 없어 잠시 카나데 씨에게서 떨어졌습니다."

  "잠깐, 당신. 일부러 카나데에게서 떨어졌다는 거야?"

  "일부러, 일수도 있겠군요. 분명한 건, 저는 카나데 씨를 걱정하고 있어요. 그 점은 절대에요."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이 뒤죽박죽 섞여, 풀기 어렵게 한 덩어리로 뭉쳐버렸다. 걱정하기에 떠났다. 그녀는 절박하다. 거짓말을 품은 채 호의를 쓸어 넘기지 마라. 분명히 후미카의 말은 명확하고 어떤 핵심을 찌르는 듯 했지만, 전후의 설명이 전혀 없어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다만 그녀가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을 알아챘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침대에서 일어날 때마다, 그녀가 쓸쓸하게 달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라는 개념을 이해할 수 있게 되죠.”

후미카가 무감정하게 내 눈에 자신의 눈을 맞추어서, 나는 그녀가 일방적인 통보에 가까운 자신의 말이 내게 잘 닿는지 확인하려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 절박을 린 씨가 도울 수도 있을 거라 생각하지만, 그 반대가 될 수도 있기에."

이상하리만치 냉정함이 담긴 그녀의 말이 차곡차곡 마음에 쌓였다. 한편으로는 화가 났다.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내게 떠밀어버리고 사과는커녕 어쩌면 유일한 해결책인 나에게 경고를 날리고 있다. 너무나도 뻔뻔하다. 나는 그저 갑작스런 호의를 거절하기 어려웠던 주변인일 뿐이다. 나 자신의 문제만으로도 이미 어지러워, 더 이상의 타인의 문제를 품어줄 여력 따위 없다.

  "지금 내게 경고라도 하는 거야?"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한 것일 뿐... 제가 도울 수 없는 이야기는, 어쩔 수 없습니다."

  "무례해. 들어가겠어."

까딱하면 밀쳐버릴 요량으로,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부디 그녀의 마음을 가볍게 여기지 않아주시길. 단지 그것 뿐입니다..."

후미카의 말이 바깥의 차 소리에 묻혀 희미하게 들렸다. 엘레베이터 앞으로 걸어가 단추를 눌렀다.

  "만약, 당신으로 인해 그녀가 더 망가진다면."

엘레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저로서는 당신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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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피나렐로입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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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바르고 고운 말을 사용 합시다.
  • 아키하나 (@akih***)

    어라라;;;; 점점더 꼬여만 가네요
    1October 27, 2016 (목) 02:38_93
  • 포틴P (@howo***)

    어우....즐거운 해후인지 알았는데 갑자기 무시무시하게 무겁게...
    카나데가 어떻게,인지는 모르겠지만 상태가 좋지 않다는 거군요. 으으음....
    2October 27, 2016 (목) 18:41_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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