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그림미디어

뒤섞인 그림자 - 2 (카나데 X 린 SS)

October 21, 2016 (금) 02:17에 작성함.

13631

눈을 뜨고 가볍게 몸을 씻었다. 휑뎅그렁하기만 한 방 안을 채우는 건 가린 커튼을 투과하며 들어오는 햇살과 몸과 화장실에서 흘러나오는 뿌연 수증기뿐이다. 아침은, 먹을 기분이 아니다. 어차피 먹지 않은지도 몇 년이나 지났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걸.

속옷을 입고 셔츠를 입는다. 흰 셔츠 아래 검은색 브래지어가 아주 희미하게 비친다. 비닐포장에 담긴 드립 커피 봉투의 밀봉된 입구를 가위로 자른 뒤, 머그잔에 걸치고 봉투 안 커피가루 위에 물을 부었다. 뜨거운 물을 만나 부풀어오르는 커피가루가 커피 봉을 넘지 않도록 천천히 물을 붓는다. 점점 커피가 진해진다. 좀 더 진하게, 좀 더 진하게. 흰 머그잔의 반절을 넘을 정도만 물을 붓고 커피가 우러나오도록 놔 두었다. 커피 향이 집 안에 퍼진다. 눈가를 가리는 젖은 머리카락을 옆으로 넘기며 화장실에 들어갔다. 뿌옇게 뜨거운 김이 서렸던 거울이 김을 잃고 다시금 화장실을 비춘다. 세면대 위에는 화장실 안 그 어떤 물건보다도 차갑고, 무기질적인, 미용가위가 놓여있다.


  <시마무라 우즈키를 찾아주지.>

나 혼자서도 찾을 수 있다, 라고 2일 전까지 생각했다. 잊어버린 우즈키의 전화번호를 옛 전화기에서 찾아 연락을 해 보았다. 우즈키의 집 주소로 알음알음 찾아 가 보았다. 우즈키가 다니던 학교를 찾아 다짜고짜 물어 보았다. 하지만 그 어떤 방법도 아무런 소득을 얻지 못했다. 지난 몇 년간 이렇게 바쁘게 움직인 적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일주일의 시간 동안 나는 최대한 알차게 우즈키의 흔적을 쫓았고, 그 어떤 의미 있는 흔적도 찾지 못했다. 오전 8시부터 저녁 11시까지 바깥을 돌아다니느라 지친 몸이 예전 같지 않다는 것과 내가 가진 모든 끈이 오래 전에 끊어져 이제는 해진 실오라기도 남지 않았다는 먹먹한 사실을 재 확인했을 뿐이다. 이틀 전에는 너무나도 답답해서 탐정사무소 같은 데라도 부탁해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그건, 아닌 것 같아. 만약 우즈키라면, 그런 행동은 안 할거야. 그저 기다리겠지.
바보같이, 주저앉아서, 바스러지는 것도 모르는 채로.
침대에 누워 옛 전화기를 다시 켜 마지막으로 받은 우즈키의 메일을 읽었다. 머리카락이 귀에 감겼다.
  <린, 분명 힘들겠지만, 힘을 내세요! 저도 힘낼게요!>
우즈키가 은퇴하기 1년 전, 마지막으로 짤막하게 주고받은 문자. 우즈키에게 항상 받기만 했는데, 나는 제대로 해준 게 아무것도 없었다. 마지막까지 나는 받기만 했는데, 이제 돌려줄 방법도 없다.
하루 빨리 우즈키를 찾아야만 한다는 생각이, 가위를 드는 것을 주저하게 했다. 마음을 먹었다.
우즈키를 찾으면, 머리를 자르겠어.

커피는 너무 써서, 도저히 마실 수 없었다.

 

밖으로 나오자 쌀쌀함이 담긴 가을 바람이 골목을 타고 세차게 불어왔다.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려 얼굴에 감겼다. 골반 가까이까지 기른 머리카락이 자꾸 번거롭게 시야를 가려, 코트 주머니를 뒤져 굵은 검정 머리끈을 꺼내어 머리를 묶었다. 바로 옆 차 유리를 거울 삼아서 머리를 정돈했다. 엄마가 곧잘 묶곤 했던 포니테일이다. 앞머리마저 똑같다. 카멜 코트의 품새를 정리하고 택시를 잡았다. 검정색 도요타 크라운 로얄 살롱이 천천히 내 앞에서 멈추고 뒷문이 열렸다. 꽤나 클래식한 차체에 흐르는, 흠잡을 데 없는 맑은 광택이 가지는 품위는 말쑥한 차림새의 노인이 건네는 친절한 인사를 거쳐 확실하게 느껴졌다. 푹신한 소파와 잔잔한 재즈와 함께, 시부야를 지났다. 하네다 공항으로 넘어가기를 기다리는 택시기사들이 정류장 한 켠 흡연 부스에 모여 담배와 잡담을 즐기는 게 눈에 들었다. 프레쉬니스, 툴리즈, 모스, 스타벅스, 도토루, 버거킹. 멍하니 창가를 흐르는 전경 안 가게를 바라보고 있더니, 어느 샌가 346 프로덕션 구 사옥에 도착했다. 번잡한 교통체증을 운 좋게 피해서 그런 지 금액은 생각보다 적게 나왔다. 고풍스러운 돔을 얹은 건물은, 이제 벚꽃 대신 단풍을 지닌 채 쓸데 없는 노스텔지어를 자꾸 자극하려는 듯 바람을 자기 품으로 안았다. 품은 바람을 타고 단풍이 떨어진다. 앞으로 더 이상 볼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예상이 빗나갈 줄이야.

마음을 다시 다잡는다. 단지 우즈키를 찾기 위해서야.
프론트에 가자 정장 차림의 여성이 내게 인사를 건네며 다가왔다. 아마 사장이 배치한 사람이겠지. 그녀를 따라 신 사옥으로 넘어갔다. 엘레베이터 안에서도 별다른 말 없이, 나와 그녀는 5 초 마다 점멸하는 디스플레이를 바라봤다. 딱히 할 말도 없고 할 이유도 없기에, 엘레베이터가 10층을 가르키며 문이 열리자 나와 그녀는 미리 합을 맞춘 듯 엘레베이터를 순서를 맞춰 나가 복도를 걸었다. 사장만큼이나 싸늘한 사람이다. 아마 그렇기에 그녀가 고용한 거겠지. 아마 업무를 시킬 때도 칼같이 허리를 숙이며 서류를 받아 들고, 보고서 같은걸 제출할 때도 로봇마냥 합을 맞추며 건네지 않을까? 회로가 엉켜버린 로봇처럼 실수로 넘어지는 모습을 생각하니, 얼굴 한 번 돌리지 않고 똑바로 걸어가는 저 여성이 왠지 이질적이면서도 이곳에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문을 열자, 카메라 플래시에서 터진 빛이 열린 문 틈을 넘어서 빠져나온다. 스탭 두 사람이 바쁘게 소품을 날라 카메라 앞에 배치했다. 풍성하게 핀 푸른 붓꽃과 흰 백합 앞에, 하야미 카나데가 푸른 싱글 코트를 걸친 모습이 눈에 띈다. 목에 흰 실크 스카프를 감은 그녀가 약간의 미소를 머금고 카메라를 응시하자, 카메라는 그 시선에 응하듯 셔터 박스를 닫으며 플래시를 터트린다. 감독이 크게 감탄한다. 그녀가 카메라를 향하던 시선을 내게 향했다. 플래시를 아직 머금은 황옥빛 두 눈이 내 눈과 마주한다. 미려한 토파즈를 깎아 만든 듯, 그저 바라 보고만 있어도 눈의 모든 면이 빛을 받아 밝게 빛나는 것 같았다. 감독이 그녀의 시선을 보고 내 존재를 눈치챘다. 방 안에 들어가자 프로듀서로 보이는 남성이 내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시부야 린 씨.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괜찮습니다. 그 쪽은?"
  "하야미 카나데 양의 프로듀서입니다."
묘하게 그 사람을 닮았다, 고 생각하면 지나친 착각이려나. 키나 덩치는, 엇비슷하다고 생각이 든다. 약한 웨이브가 들어간 앞머리가 이마를 반쯤 가렸다. 쟈니즈 계열과는 멀리 떨어진 나름 준수한 남자다운 용모. 말주변은 훨씬 나았다. 카메라 플래시가 다시 터진다.
  "오늘은 제가 뭘 하면 되죠?"
  "사장님께 말씀을 들으셨을 테니, 거두절미하고 메이크업부터 부탁 드립니다."
방 한 켠에 메이크업을 위한 화장대와 스탭이 눈에 띄었다. 긴 말 없이 화장대 앞에 앉자, 스탭이 화장을 시작했다. 아무런 화장 없이 왔기에 별도로 지울 필요도 없었다. 스탭이 피부를 만지면서 몇 번 감탄사를 내뱉는다. 괜히 부담감이 느껴진다.
  "따로 베이스를 할 필요가 없어요. 피부가 너무나도 좋아요."
굳이 말할 필요까지는 없는데. 그녀는 베이스를 아주 가볍게 하고 색조를 올리기 시작했다. 아이라인과 입술에 색을 올리는 것이 눈두덩이와 입술에 느껴졌다. 아이라이너가 눈매를 만지고, 섀도를 묻힌 붓이 눈두덩을 간지럽히는게 느껴졌다. 입술에도 촉촉한 립스틱의 감촉이 느껴진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메이크업은 끝이 났다. 눈을 뜨자 거울에는 아침에 집 안 화장실에서 잠을 쫓던 심란함이 담긴 얼굴 대신, 차갑고 날카로운 얼굴이 보였다. 다가오는 모든 것은 이유도 묻지 않고 찔러버릴 것 같이, 화장대 조명이 눈동자 안에서 날카롭게 부숴졌다. 옅은 화장만으로 이미지가 이렇게 바뀌다니. 아니, 원래 차가운 얼굴이었잖아.
  "촬영 컨셉은 청과 백으로, 꽃의 이미지를 쿨하게 어레인지 하는 방향으로 진행합니다."
듣는 것만으로도 사장이 추구하는 이미지가 눈에 선하다.
  "카나데 양은 청의 이미지를 가지니, 시부야 양은 백의 이미지를 연출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청이면 오히려 나 아닌가? 라고 물으려다 관뒀다. 예전처럼 열심히 하지 않아도 된다고, 이 일을 종용한 본인이 말했다. 그저 하라는 대로만 하고 원하는 것만 챙기면 된다. 다른 건 몰라도 그것만은 철저히 따를 의향이 있다.
  "백의 이미지라면, 정확히 어떤 이미지를 말하는 거죠?"
  "무결한 순수, 정도일까요. 아마 시부야 씨의 평소대로 이미지 정도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말해도, 어떻게 해야 할지."
순수는 나보다는, 우즈키에게 어울리던 단어였으니까. 나에게는 별로 어울리지 않던 단어다.
  "의상도 백색 베이스에 청색 악세서리로 포인트가 들어가는 의상입니다. 서로 대비되는 이미지죠."
그에게서 백색 드레스를 건네 받아 전신 거울 앞에서 옷을 몸에 대었다. 셔츠 목깃에 리본 타이가 걸쳐진 백색 드레스 허리께에 걸린, 손가락 마디 두께의 얇은 청색 천 허리띠가 보였다. 대충 묶어서 허리를 맞추는 용도려나. 옷 사이즈는 맞는 것 같다. 파티션으로 간단히 막아놓은 간이탈의실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었다. 아무거나 집어 걸친 스커트의 올이 나간 게 보인다. 면을 만져보니 까끌거리게 보풀이 일었다. 언제 이렇게 낡아 버린걸까.
  "하아..."
됐어, 쓸데 없는 자기연민 따위는 그만 두자. 나는 여기에 일을 하러 온 거야. 프로정신, 아직 남아있기를. 백색 드레스의 부드러운 천의 감촉이 무릎에 아슬아슬하게 닿았다. 목가의 단추를 잠그고 손가락 마디 두께의 청색 리본 타이를 목에 감았다. 탈의실 안에 있는 전신거울에 몸을 비춘다. 겨드랑이가 약간 헐렁해서 브래지어가 아슬하게 보인다. 작년에 분명 몸무게를 쟀을 때는 몸에 맞았었는데, 또 살이 빠져 버린 것 같았다. 드레스의 천을 문질러 질감과 두께를 가늠한다. 이정도 두께면, 아마 브래지어를 벗어도 비치지 않겠지.
  "하아..."
  "시부야 씨,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아니, 없어요."
탈의실의 얇은 간이 파티션을 뚫고 카나데의 프로듀서의 목소리가 들렸다. 옷의 사이즈가 조금 크다고 말하려다 관뒀다. 번거롭게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 최대한 빨리 끝내버리고 싶어.
드레스 목가의 단추를 풀고 드레스를 벗었다. 약간 서늘한 공기가 배에 닿았다. 브래지어를 벗어 코트 안주머니에 집어 넣고 다시 드레스를 입었다. 가슴을 잡아주던 브래지어가 없어도 별로 불편함은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어깨에 걸린 끈의 촉감이 없어져서, 더 편하다고 하는 게 맞으려나. 허리는 폭이 많이 남아서 허리끈을 묶어도 무릎 언저리까지 폭이 남았다. 코트와 벗어놓은 옷을 집어 한 덩이로 말아 탈의실 구석에 놓고 펌프스를 다시 신었다. 전화기는, 코트 안에 두고 간다. 연락이 올 사람 따위 없다.

 

  "안녕 ,린. 오랜만이네."
감독의 지시를 따라 카메라 앞에 섰다. 카나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녕, 카나데."
  "놀랐어. 정말로 올 거라고는 몰랐는데."
  "전무도 똑같이 말하던데."
  "그 사람은 언제나 필사적이니까. 나쁘게 보지 않았으면 해."
나쁘게 보지는 않는다. 더 나빠질 일이 없으니까. 이미 최악이거든. 하고 입 안에서 말이 머문다. 카나데가 자리에서 일어나 카메라의 렌즈 시야 밖으로 나간다. 스탭이 다가와 붓꽃을 치우고, 빈자리에 백합 꽃을 더 놓는다. 백합의 향이 느껴진다.
  "찍습니다!"
감독의 하나 둘 하는 소리가 이해되려는 순간 카메라 플래시가 눈에 가득 담긴다. 멍청한 실수가 카메라의 센서에 데이터로 남는다.
  "다시 찍습니다. 긴장하지 마시고!"
숨을 한번 들이마쉰다. 그래, 이건 일이야. 감독이 숫자를 다시 센다. 다시 플래시.
  "좋습니다! 그 표정 그대로!"
카메라맨의 오케이 사인과 함께 얼굴을 굳힌다. 플래시가 몇 번 더 터진다. 카메라맨이 고개를 돌려보라고 해서, 고개를 돌려 옆의 벽을 바라봤다. 작은 점이 찍혀있다. 시선 처리용으로 붙여놓은 건지 아니면 그저 우연히 거기에 붙어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 작은 점에 두 눈을 응시했다. 두 눈에 알맞은 높이에 붙어 있어서, 목을 피고 턱을 약간 숙여 약간 당당한 이미지를 만들어보려고 시도한다.
  "좋습니다! 이번엔 고개를 숙여보죠!"
고개를 숙이고 아래를 쳐다본다. 눈을 내리깔고 꽃이 공백을 채울 수 있도록 텅 빈 시선을 통해 여지를 남긴다. 플래시가 다시금 터지고, 다시 플래시가 터지기 전 짧은 시간 동안 어깨를 살짝 돌아 카메라를 향한다. 시선을 내리깔고 노골적인 카메라의 시선을 피하려는 듯한 수동적인 모습을 연출하자마자 플래시가 터진다. 아슬아슬하다.
  "좋습니다! 이 자세 그대로 유지해주세요!"
저 사람은 좋습니다, 말고는 할 줄 아는 감탄사가 없는 걸까. 남자들은 자신만의 표현을 만들고 평생 그 표현만을 쓰는 걸까. 감독이 카메라맨 옆에 설치된 컴퓨터 앞에 앉아 카나데의 프로듀서와 무어라 상의하는 것이 보였다. 저 사람들도 각자의 표현을 가지고 그것만을 쓰는 걸까. 타성으로 굳어 다른 표현을 쓰는 건 겁이나 엄두도 못 내는걸까.
  "잠시만 쉬도록 합시다."
스물 세 번의 플래시가 더 터진 후, 감독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손뼉을 쳤다. 감독이 스탭에게 무어라 지시하자 두 스탭이 붓꽃을 전부 가져와 백합 사이사이에 놓았다. 나는 카메라 앞에서 벗어나와 카나데가 앉은 간이의자 옆 자리에 앉았다. 넓지 않은 방에 7명의 사람이 각자 분주하게 움직이느라 공기가 한결 탁해졌다.
  "키, 더 컸네."
  "카나데야말로."
아까 역할을 교체할 때 흘긋 본 기억으로는, 카나데의 키는 이제 내 키를 살짝 넘어있었다. 그녀의 다리에 걸린 펌프스의 낮은 굽이 내 펌프스의 굽과 똑같다면.
  "169센티미터일까."
  "어머, 더 클 거라고 생각했는데."
  "카나데는?"
  "네 키에서 2센티미터만 더해봐."
  "카에데 씨와 같네."
그녀가 전화기를 주머니에서 꺼내 메신저에 몇 마디 짧은 메세지를 보낸다.
  "요즘 어때?"
최악이야. 모든 게 뒤엉킨 거 같아, 라고 말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그저 그래. 누구의 말처럼 즐거운 인세생활, 까지는 아니더라도 나름 지내고 있어."
  "재밌는 표현이네."
  "카나데는?"
  "올해 초엔 영화를 한 편 찍었어. 가끔 짧게 라이브도 해."
희미한 기억이 조금씩 살아난다.
  "영화라면 올해 4 월쯤에 개봉했던 거, 맞지?"
  "맞아. 봤어?"
  "아니, 뉴스로만. 해외에서 유명한 상도 받았다고 들었어. 무슨 꽃 이름이었었지?"
  "붉은 수국. 시원하게 망해버려서, 어떻게든 벌충하고 있어."
  "망했다고?"
카나데는 내 얼굴을 보더니 가볍게 눈웃음을 지었다. 예전보다 더 미려한 용모가, 조명의 반사광이 그녀의 실루엣에 비추어 진 채, 얼굴은 그림자에 가려져 신비롭게 느껴졌다. 그림자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은 두 눈이 계속 나를 바라봤다.
  "랄까, 손익분기점에 약간 못 미쳤다는 게 정확하겠지. 그래서 요즘에는 조금 바빠졌어.
  "그런가, 그 하야미가 실패를 하다니."
  "어머, 나도 실패 정도는 하는 사람인걸."
그녀의 입술에 살짝 씁슬한 미소가 걸린다.
  "그리고 바쁘면 그것 대로 좋은 거니까."
바쁘면 그것 대로 좋은 것, 일까. 그때의 나라면, 아마도 지금 카나데처럼 똑같이 말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지금은, 뭔가를 하는 것에 자꾸 주저함이 느껴진다. 못 하겠다는 건 아니다. 하게 된다면 어떻게든 해낼 수 있다. 다만 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들지 않는다. 누군가 등을 떠밀지 않는 이상, 지금의 나는 어떤 것도 할 수 없다.
  "좋은, 건가. 바쁜 게."
그녀는 의외라는 듯 나를 쳐다봤다. 얼굴표정, 이제야 생각났다.
  "린?"
바로 옆 카나데의 눈매에 걱정이 서리는 모습이 머리 속에 그려진다. 아,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말걸. 눈을 피해 고개를 살짝 숙이며 오른손으로 얼굴을 살짝 가린다.
  "아무 것도 아냐, 오랜만에 일을 해서 그래."
감독이 손뼉을 치며 촬영을 재개하자고 외쳤다. 쓸 데 없이 적절해서, 별다른 감사함도 없이 그의 시류에 편승해 자리에서 일어난다.
  "갈까, 이제?"
그녀가 아직도 나를 바라보는 게 느껴진다. 제발, 그런 눈으로 바라보지 말아줘. 10년이 넘어도, 그런 눈에는 결코 익숙해지지 못하겠어.
  "그래, 알았어."
카나데는 자리에서 일어나 감독 앞으로 걸어갔다. 카나데의 프로듀서가 감독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나도 그들 사이로 다가갔다. 프로듀서가 카나데에게 말을 꺼냈다.
  "컨셉을 변경하기로 했습니다."
  "갑작스러운걸. 당신, 그런 중요한 이야기에 왜 우리는 쏙 빼버린 거야?"
  "아니 뭐, 하야미 양이야 언제나 무리없이 소화하니까 때론 심술도 부리고 싶어서요."
카나데는 프로듀서의 광대를 손가락으로 지그시 쓸었다.
  "후훗, 치졸한 변명이네. 당당해서 오히려 나름의 매력이 있는 걸."
그녀는 감독의 테이블 위에 놓인 생수병을 따서 한 모금 들이켰다. 물이 목을 넘어가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들려 되려 민망함이 느껴졌다.
  "당신의 심술, 얼마나 짖궂은지 알려줘."
  "미리 말하지만, 사장님께 이미 보고했습니다. 하지 마세요."
  "어머, 나는 그저 궁금해서 그랬던 것 뿐인데."
그녀의 입술 실루엣에 빛이 감싸져 미려한 굴곡이 드러났다. 카나데는 테이블에 살짝 걸터앉아 그의 입술에 손가락을 살짝 얹었다. 얼굴에 헛된 기대감과 묘한 화가 섞인 표정이 가득 담긴 채, 그는 카나데의 손을 보았다. 카나데는 그가 당황하는 것을 보자 가볍게 웃으며 손을 거두고 엄지를 펼쳐 자신의 입술에 대었다.
  "랄까, 재미없는 장난이었어. 미안해."
카나데도 전혀 변하지 않았네. 유일하게 변해버린 건, 오직 나 뿐이려나.

 

  "그래서."
카나데가 손에 살짝 힘을 주는 게 느껴진다. 약간 차갑던 손목에 따뜻한 카나데의 손의 촉감이 가시질 않는다.
  "대체 뭐야, 이게..."
카나데의 프로듀서가 입을 가리고 웃는 게 보인다. 왠지 한대 때려주고 싶은, 짜증을 불러 일으키는 웃음. 카나데의 얼굴은 내 얼굴 뒤에 있어 보이지는 않지만, 나랑 똑같은 표정이 아닐까. 대체 왜 아주 오랜만에 하는 일에 이런 바보같은 요구가 포함되어 있는 거지?
  "아, 시부야 씨. 좀 더 밀착하셔야죠. 건전한 수요층이 기다리고 있다구요."
카나데가 그 말을 듣고 내 허리를 감싸던 팔을 좀더 안으로 휘감았다. 그녀의 오른쪽 가슴이 내 오른쪽 가슴에 닿아 눌렸다. 저 프로듀서, 자신의 가학적인 복수심을 위해서 무고한 희생양인 나를 끌어들이면서도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않고 있잖아.
  "하아..."
20만 엔만 아니었으면. 카메라맨이 카메라 앞에 섰다. 젠장, 이건 일이야.
  "찍습니다!"
카메라를 응시한다. 얼굴을 굳히고, 눈에 힘을 약간 푼다. 플래시가 눈 속에 들어온다. 카메라맨이 오케이 사인을 날리지만, 자세는 그대로 유지한다. 플래시가 다시 터진다. 감독이 손을 들어 카나데에게 지시하자, 카나데는 내 손목을 쥐던 손을 놓고 내 턱에 손을 놓았다. 고개를 살짝 돌리면, 그녀의 코가 내 뺨에 닿을 정도로 가깝게 얼굴을 밀착한다. 자동적으로 그녀의 몸이 내 몸 위로 다가와, 나는 엉덩이를 붓꽃과 백합이 전부 놓여있는 탁상에 걸쳤다. 플래시가 터진다.
  "아주 좋습니다! 한 번 더 갈게요!"
그래, 빨리 찍었으면 해. 슬슬 무겁고, 숨이 자꾸 뺨에 닿아서 간지럽거든. 플래시가 터진다. 이제 오케이 사인을 내려도 되는데, 감독은 무엇이 불만인지 계속 자세를 유지하라고 지시했다. 슬슬 짜증이 나려고 한다. 아니, 이건 일이야. 일.
  "이건 일이야..."
아주 작게 중얼거리는 걸 들었는지 카나데의 갑작스런 콧김이 뺨을 스친다. 간지러워서 작게 흠칫했다. 팔꿈치가 탁상에 닿는다. 이제는 완전히 카나데가 나를 덮치는 듯한 모양새가 되어, 목 뒷가가 무리해서 머리를 지탱하는 게 느껴진다. 턱에서 시작된 카나데의 손길은 이제 쇄골 끝자락과 어깨뼈의 경계에 걸쳤다. 평소에는 브래지어 끈이 눌려있어야 할 자리에, 그녀의 가는 손가락이 그 공간을 차지한다. 그녀의 손가락이 닿은 부분에서 따스한 감각이 퍼진다.
  "감독님, 이제 슬슬 괜찮지 않나요?"
  "아, 시부야 씨. 지금 이대로 괜찮은데요, 시장의 수요가 폭발할 수도 있어요."
  "당신은 시끄럽네!"
항의를 담아 말꼬리에 힘을 주었다.
  "어머."
갑작스럽게 소리를 높이느라 상체를 움직여서 그런지, 카나데의 무게중심이 그 영향으로 흐트러졌다. 팔꿈치가 미끄려져 탁상으로 몸이 넘어지고, 카나데도 갑작스레 무너진 내 몸 위로 무게중심을 잃고 무너졌다. 어깨에 닿았던 카나데의 손은, 갑작스럽게 무너진 무게중심을 맞추려는 무의식적인 움직임으로 인해, 내 왼 가슴을 본의 아니게 눌렀다. 그녀의 손가락이 내 유두를 건드려, 당혹스러움과 오싹함이 어지러운 파장이 가슴에서 퍼져 허리에 닿는다. 손가락 끝자락에 따뜻한 피가 흐르는 게 느껴진다. 나와 카나데는 서로 놀라, 거의 동시에 서로를 바라봤다. 초점이 맞지 않아 흐릿한 그녀의 얼굴에 당황스러움이 담긴 게 보인다. 코 끝자락이 살짝 닿았다. 그리고 플래시.
  "괜찮아요?"
카나데의 프로듀서가 놀란 기색으로 늦은 질문을 던진다.
  "읏."
  "괜찮아. 무게중심을 잃은 것뿐이니까."
카나데가 허리를 피면서 내게서 떨어진다. 전혀 괜찮지 않거든.
  "린, 괜찮아?"
  "안 괜찮아..."
카나데는 무엇이 재미있는지, 살짝 웃는다. 미려하게 눈매에 눈웃음이 담긴다.

 

정확히 14번의 플래시가 더 터지고 촬영은 끝이 났다. 마지막으로 찍은 사진엔 카나데가 꽃 사이로 나를 눕힌 채 뺨을 살짝 깨물고 있는 장면이 담겼다. 탈의실에 들어가 드레스를 거칠게 벗어던지고 코트 안주머니에서 브래지어를 꺼내 걸쳤다. 아까 전의 오싹함이 약간 남아있어 왠지, 불쾌했다. 하아, 20만 엔만 아니었으면. 옷의 구김따위 신경쓰지 않고 아무렇게나 걸쳤다. 셔츠 단추가 하나 비뚤어진 게 보였지만 고쳐입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대로 엇박으로 채워진 단추를 내민 채, 탈의실을 나가 간이의자에 앉았다. 스탭들은 바쁘게 주변을 정리하고, 카메라맨과 감독은 모니터를 바라보여 찍은 사진의 B컷을 걸러내는 중이었고, 카나데의 프로듀서는 어디엔가 전화를 걸고 있었다. 오랜만에 하는 일이라 그런지, 갑작스럽게 몸이 피곤해졌다. 등에 힘을 빼고 의자에 기댔다. 아까 전 일이 떠올라서 그런지 아니면 방 안의 공기가 차가워서 그런지 윗팔에 서늘하게 닭살이 돋았다. 카나데가 탈의실에서 나와 내 바로 옆자리에 앉았다. 괜히 아까 전 일이 생각이 나,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프로듀서가 우리 앞에 와서 약간 난처함이 섞인 얼굴로 말을 꺼낸다.
  "이거 일이 꼬여버렸네요. 인터뷰어가 갑작스럽게 일이 생겼다네요."
  "네?"
  "죄송합니다만, 시부야 씨. 혹시 이번 주에 언제쯤 시간이 비시나요?"
어줍잖게 마무리 되어 다시 이곳에 와야 한다니, 짜증이 갑작스레 솟는다. 짜증이 빠르게 화로 바뀌어, 튀어나오듯 몸을 일으켰다.
  "대체 뭐죠, 그 인터뷰어는? 약속 하나 못 지킨다니, 어이가 없네!"
되는 대로 입에서 튀어나온다. 아니, 차곡차곡 쌓인 게 차례대로 튀어 나오는 거다. 왜 내가 여기에 있는 건지, 이젠 신경 쓰고 싶지 않아.
  "린, 진정해."
  "시, 시부야 씨. 잠시만"
  "애초에, 이딴 인터뷰어를 컨택한 게 누구죠? 당신이야?"
당장이라도 주먹이 날아갈 것 같이, 애꿎은 그를 향해서 주먹을 쥔 왼손이 그의 얼굴에 손가락도 없이 삿대질을 한다. 20만 엔, 이제 별로 신경 쓰이지 않는다. 상무고 뭐고, 이제 다 꺼져버렸으면.
  "린!"
갑작스럽게 어깨를 잡혀 몸의 밸런스가 무너져 내리는 것을 카나데가 뒤에서 받았다. 나도 모르게 몇 번 뒷걸음질을 해서, 나와 카나데는 일어났던 의자에 몸을 부딪혔다. 의자가 그 충격에 형태가 무너지며 바닥에 쓰러지고, 카나데가 나를 안은 채 벽에 부딪혔다. 순간적으로 일어난 감정이, 순간적인 소음에 잦아든다.
  "아."

 

꼬마 아이 두 명이 시소를 타고 놀다, 위를 쳐다봤다. 아이들의 시선을 따라가자, 저 멀리 빌딩 옥상에 세워진 커다란 광고판에 346 프로덕션의 새 아이돌의 프로모션 영상이 나오고 있었다. 뒤에서 카나데가 커피 캔을 들고 와 내 옆자리에 앉았다. 바람이 불어왔다.
  "린."
벌써 일곱 번째. 대답은, 할 마음이 나질 않는다. 하지만 이대로 가다간 스무 번이 넘어도 계속 부를 거 같아 입을 작게 열었다.
  "왜."
  "어때, 오랜만에 하는 일은?"
  "그저 그래."
그리고 네 프로듀서, 진짜 짜증나는 사람이네. 너가 나 대신에 복수해줬으면 해. 카나데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예전처럼 다시 익숙해질거야. 오늘은, 시차적응이라고 해둘까."
그런 것처럼 간단하고 시덥잖은 거라면 얼마나 좋을까. 다음 번에 만나면 어떻게 사과를 해야 할지.
  "미안, 카나데."
  "괜찮아. 내 프로듀서가 좀 지나쳤어. 자업자득, 이랄까."
커피 캔을 따서 한 모금 마셨다. 너무 써. 두 모금을 마시고 옆에 두었다.
  "슬슬 배가 고프네. 늦은 점심이라도 먹을까?"
코트 안에서 전화기를 꺼내 버튼을 눌렀다. 1시 58분. 슬슬 가게에서 점심 손님이 빠질 시간이다. 점심 인파에 지친 직원들이 느린 손동작으로 빈 자리에 놓인 접시를 치울 시간. 나와 카나데는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까마귀 몇 마리가 울음도 내지 않고 날개를 펼쳐 날아갔다. 꼬마 아이 두 명은 그게 신기한 듯 감탄사를 외쳤다.
  "그리고."
카나데가 몸을 돌려 나를 바라봤다. 관성을 타고 청빛 머리칼이 그녀의 뺨에 스친다. 희미하게 미소가 스치는 것 같다.
  "대담하네, 린은."


읏. 그 프로듀서, 다음에 만나면 진짜로 뺨을 후려 쳐버리겠어.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카나데 X 린은 비주얼적으로 가장 우수한 커플링이며, 이는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다.

28.8KB
안녕하세요. 피나렐로입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

피나렐로님의 최신글

뒤섞인 그림자 - 926일전
뒤섞인 그림자 - 8226일전
뒤섞인 그림자 - 7 (카나데 X 린 SS)21개월전
뒤섞인 그림자 - 6 (카나데 X 린 SS)21개월전
뒤섞인 그림자 - 5 (카나데 X 린 SS)22개월전
뒤섞인 그림자 - 4 (카나데 X 린 SS)22개월전
뒤섞인 그림자 - 3 (카나데 X 린 SS)42개월전
뒤섞인 그림자 - 1 (카나데 X 린 SS)22개월전
2월에 피는 벛꽃 - 1023개월전
2월에 피는 벛꽃 - 913개월전

3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바르고 고운 말을 사용 합시다.
  • VINO (@zmfk****)

    ?!?!?! 이...이런 묘사로 괜찮은가...? 아니 사고니까 어쩔 수 없지, 응.
    20대 후반이 된 카나데라... 역대급 팜므파탈일 것 같습니다.
    1October 21, 2016 (금) 09:04_57
  • 아키하나 (@akih***)

    어허 어허.... 무슨속셈이냐 미시로.....
    2October 21, 2016 (금) 10:36_9
  • 포틴P (@howo***)

    시장의 수요=백합인 것입니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으흠으흠...의외로 묘사가...후후후
    3October 21, 2016 (금) 19:14_10
댓글 작성창 원상복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