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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에 피는 벛꽃 - 9

October 07, 2016 (금) 03:11에 작성함.

13810

바람에 약간의 염분이 섞여 들어왔다. 해가 이제 반쯤 지기 시작해 나무의 자락에 걸쳐 앉았다. 맑고 투명한 햇빛이 색채를 서서히 띄기 시작하더니, 조금 지나자 주황빛을 머금고 검푸른 시모다의 바다에 자신의 색채를 조금씩 나누어 주기 시작했다. 카메라맨이 무언가 문제가 있는 듯 보조스탭에게 무어라 지시하고, 감독이 우리에게 찾아와 장비에 사소한 문제가 생겨 30분 정도 휴식을 가지는 게 어떻냐고 물어왔다.

  "그런가요? 어쩔 수 없네요."

키무라의 담당 프로듀서는 가슴팍에서 수첩을 꺼내어 스케줄을 확인했다. 나는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5시 47분. 마치 서로가 역할을 분담하기라도 한 듯이 나름의 팀워크가 갖추어졌다. 말끔하게 깎은 수염과 약간 날카로운 인상. 유능함이 몸에 밴 듯한 행동거지. 무엇보다, 차가운 금속 무테 안경. 손으로 내 턱을 슥 어루만져 본다. 수염을 사흘 전에 깎았던가?

  "그럼 사진촬영을 내일까지 연장하고 오늘은 이쯤에서 촬영을 끝내는 것으로 어떻습니까?"

감독은 잠깐 생각하더니 알겠다고 하고 스탭에게 돌아갔다. 키무라의 프로듀서는 수첩에 뭔가를 적고 서로 잡담을 나누는 아이돌들에게 가서 무어라 설명했다. 거리가 있어 들리지 않지만, 아이돌들의 태도에 기쁨이 섞여있는 게 보였다. 미루어진 일은 어차피 내일이면 다시 해야 하는 건 똑같지만, 저물어가는 노을이 가득히 담긴 바다에서 휴식을 가지는 건 쉽게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아니다. 사선으로 떨어지는 햇빛의 각도는 점점 완만해져서, 이제는 도로 옆에 세워진 건물의 그림자가 도로를 완전히 가릴 정도로 뉘였다. 약간의 현기증이 나서 플라스틱 의자에 앉았다.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기 위해 손을 넣었다.

담배가 없다. 왜 담배가 없지?

더위에 지친 건지, 니코틴이 부족한 건지,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평소보다 더 노력을 기울여 기억의 실을 천천히 더듬어갔다. 희미한 촉감 속, 성기게 엉킨 기억이 집혔다. 정장 상의 안주머니에 담배를 넣어둔 것이 떠올랐다. 그리고 정장 상의는 걸어서 10분 거리의 주차장에 대 놓은 코롤라 안에 있다. 또 한 가지가 기억났다. 가까운 가게도 걸어서 10분이 넘게 걸린다.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한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왜 바보같이 담배를 챙기는 걸 잊은 걸까. 약간의 자책감을 품고 과거의 기억을 더듬다 보니 니코틴 패치를 샀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것도 걸어서 10분 거리의 주차장에 대 놓은 코롤라 안에 있다. 아무것도 바뀌는 건 없다. 무력함이 느껴져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지만, 지금이 아니면 두 시간은 족히 더 담배없이 기다려야 하기에 나는 다리에 힘을 주었다. 다리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다. 아니, 다리뿐만이 아니라 몸 자체에 힘이 잘 들어가질 않는다. 그냥 앉아있는 자세를 유지했다. 저 멀리 호시 양의 프로듀서가 호시 양에게 저지를 감싸 주는 게 보인다. 이 더운 날에 무릎까지 덮는 스커트를 입고, 정장 상의까지 걸치고 있다. 프로페셔널하고, 훌륭한 직업정신이다. 초점이 잘 안 맞아 눈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키무라의 프로듀서는 벌써 감독에게-.

  "프로듀서 씨?"

힘이 빠진 채 고개를 돌리자 그 아이가 앞에 서 있었다. 흰 스트라이프 패턴이 가장자리에 포인트로 존재하는 커다란 타월을 감싸고 있어 맨살이 보이는 부분은 종아리와 목선뿐이다. 얇은 목선 위에는 군더더기가 하나도 없다. 나이살이나 주름, 기미 같은 것들. 믿기 어렵다. 왜냐하면, 그 아이의 목선이 정말로, 아름답다고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잠깐 쉬는 길에 근처 가게에 들를건데, 괜찮을까요?"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멍한 사고를 깨웠다. 머리는 약간 맑아졌지만, 눈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목선에, 바닷물에 젖었던 염분의 흐름이 눈에 보인다. 바다에서 반사된 빛이 그 흐름에 닿아 밋밋한 광택이 난다.

  "아아, 괜찮아."

옆을 보니 마츠나가 양과 키무라가 대화를 나누는 게 보였다. 근처 파라솔에 호시 양이 저지를 뒤집어 쓰고 무릎을 모은 채 뭔가를 열심히 관찰하고 있었다. 내가 다시 승낙의 의미를 담아 손을 두어 번 흔들자 그 아이는 마츠나가 양과 키무라에게 걸어갔다. 셋이서 무언가 사러 가려는 모양인 것 같다. 무언가를 사러 가려는 모양인 것 같다.

아-. 무언가를 사러 가려는 모양인가-.

  "아.... 무언가를 사러 가려는 모양인가...."

 

유난하게도 바다에서 반사되는 빛이 밝다. 아니, 밝은 게 아니고 오히려 더 빛나는 거 같은데. 원래의 햇빛보다 더. 작은 점으로 갈라진 수많은 빛이 그 본래의 눈부심을 잃으며 원으로 점점 커지는 게 보인다. 어지러움이 느껴진다. 지금에 와서?

이건, 일사병 같은데.

  "이건... 일사병.... 같은데...."

들을 사람이 근처에 있던가. 고개가 겨우 돌아간다. 아, 나츠키의 프로듀서인가. 이봐, 뭐하고 있어. 감독이 귀찮게는 하지 않는건가. 유능한걸.

  "유능한걸.... 유능...."

마지막으로 들린 소리는 그가 무어라 외치는 소리였다. 아, 이상한걸. 가벼워. 누가 나를 부축하기라도 하나? 다리가 휘저어지는 것 같다.

 

 

 

눈을 뜨니 어두웠다. 손가락과 발가락 끝마디를 제외하고는 촉감이 느껴지질 않는다. 몸이 뜨거운 것은 느껴진다. 여기는 어디지? 눈의 초점이 맞아가기 시작한다.

저건, 전등이다. 여기는 그럼 방인데, 아, 그럼 여긴 호텔 방인가. 그럼 나는 침대에 누워 있는건가.

목에 힘을 주어 고개를 든다. 평소보다 네 배는 더 힘이 들어간다. 벽에 걸린 시계가 10시 14분을 가리키는 게 보인다. 촉감이 되돌아오기 시작한다. 처음엔 손가락과 발가락 마디에서 점점 돌아오기 시작해, 손등과 발등, 복사뼈와 손목, 아랫팔과 종아리, 무릎과 팔꿈치, 윗팔과 허벅지, 골반과 어깨, 마침내 등과 배에 이르기까지 촉감이 서서히 돌아왔다. 전신마비에서 깰 때의 뚱하고 무거운 느낌은 아니다.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구름같은 느낌이다.

아, 이제야 느껴지는군. 물수건이 촉촉해.

나는 이마에 얹혀있는 물수건을 집어 침대 옆 탁자에 놓았다. 허리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다. 몸을 일으켜 세워 침대 옆에 두 다리를 내려놓고 고개를 숙였다. 현기증이 완전히 가시지는 않았다. 몸 속 뜨거운 기운도 아직 남아있다. 물.

  "물이...."

고개를 들어 주변을 돌아본다. 고개에 힘이 너무 많이 들어간다. 물은 없다. 에어컨에서 찬 바람이 나지막히 불어온다. 일단 몸을 닦아 열을 빼내는 게 좋을 것 같아 몸을 일으켜 세웠다. 힘이 잘 안들어가지만, 부축을 받을 정도는 아니다. 나름 회복된 것 같다. 탁상에 두었던 물수건을 집어 화장실에 들어가 세면대를 잠그고 물을 세차게 틀었다. 어지러운 고주파와 무언가를 때리는 듯한 무거운 저음이 경쾌한 물소리로 바뀌는 걸 느낀다. 수전을 닫고 물수건을 받아놓은 물에 담그고 짜지도 않은 채로 몸에 문질렀다. 차가운 감촉이 갑작스레 느껴져 소름이 돋았다. 동시에 흐리멍덩한 정신이 무언가에 낚아채인 듯 바로 돌아왔다. 현실감각이 회복된 게 느껴졌다. 숨이 막히는 느낌도 한결 가벼워졌다. 숨을 두어 번 크게 들이쉬었다. 폐가 넓어지는 게 느껴진다. 폐포 하나하나가 부풀어오른다. 갈비뼈가 폐가 터져버리려는 것을 막는 중이다. 생각이 점점 구체적으로 나열되기 시작한다.

촬영은 어떻게 됐지?

나는 성기게 뻗친 머리를 대충 손질하고 셔츠의 단추를 잠그며 아이폰을 찾으려 침대를 뒤졌다. 베게 밑에 깔려있는 아이폰을 주머니에 집어넣고 방문을 열었다. 먼 복도 끝 엘레베이터의 문이 열리며 술에 진탕 취한 커플이 서로에게 엉긴 채 걸어 나왔다. 얼싸안은 채 진하게 키스하는 두 남녀를 제치고 엘레베이터에 탔다. 프로듀서들이 어디에 있을 거라고 짐작은 되지 않지만, 방에 없다면 라운지에 있지 않을까 싶어 1층 버튼을 눌렀다. 라운지에 없다고 하더라도 호텔 내 바에 있겠지. 못 찾으면 전화라도 하면 된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고 몸이 살짝 가벼워졌다 다시 원래의 중력이 느껴진다. 쉼호흡을 크게 두 번 하고 눈을 여러 번 껌벅이며 제대로 초점이 맞도록 준비를 갖췄다. 엘레베이터의 문이 열리자 희미한 바닷바람의 내음이 났다. 바람이 꽤 불어오는지 엘레베이터 옆 창가에 쳐진 흰 커튼이 일렁인다. 나는 발걸음을 라운지로 향했다. 라운지에는 40대쯤 되어 보이는 카운터 직원만 있었다. 라운지에 놓인 안락의자 중 하나에 근방의 여행책자가 놓여있는 것 빼고는 아무런 사람의 흔적도 없다. 백사장에서 묻어나온 젖은 모래나, 타지에서 쉽게 느낄 수 있는 무언가 다른 아우라를 지닌 공기도 없다. 카운터 직원이 하품을 작게 내 쉬며 키보드를 두드리는 작은 소리가, 열려있는 정문에서 불어오는 미지근한 바닷바람에 쓸려 작게 들려왔다.

  "호텔 바는 어디에 있습니까?"

직원은 키보드를 두드리는 것을 멈추고 하품을 작게 내쉬었다.

  "식당 옆에 바로 있습니다만 10시면 문을 닫습니다. 호텔 근처에 작은 바가 있으니 그곳을 이용하시면 됩니다."

  "바깥에요?"

  "네. 사실 바라기 보다는, 태번이죠. 더 웃긴 건, 보모어도 없고, 아드벡도 없어요. 글렌피딕이랑 맥켈란, 글렌리벳, 카일라 뿐이죠. 아참, 아일라 출신은 카일라 뿐이군."

그는 크게 코웃음을 쳤다. 자부심과 경멸감이 반반쯤 섞인 인상이다.

  "앞으로 나가셔서 왼쪽으로 10분쯤 걸으면 모래사장 근처에 있습니다. 전망이 좋아서 아, 저 가게구나 하고 단박에 아실 겁니다."

그는 의자에서 살짝 일어나 손가락으로 대략적인 방향과 거리를 표현했다. 경험이 섞인 추상적인 움직임은 어줍잖은 약도보다 훨씬 직관적이다.

  "감사합니다."

  "아, 그래도 꼴에 술집이라고, 가게에서 직접 만드는 에일 하나는 그나마 마실 만 합니다. 나머지는 입만 버려요."

나는 짤막히 인사를 하고 밖을 나왔다. 맥주를 아주 잘 알지는 못한다. 라거와 에일이 무슨 차이가 있는지 자세히는 모른다. 옛 지인이 목이 마를 땐 라거, 뭔가 아는 체를 할 때는 에일을 마시곤 했다는 것 빼고는.

 

도로 옆 인도를 따라 걷고 있자니, 지나가는 차들도 바다경치를 한창 구경하는지 천천히 지나갔다. 모래사장에는 몇몇 아이와 어른이 선향불꽃을 들고 작은 불꽃놀이를 즐기고 있었다. 붉고 노랗고, 때로는 흰 불꽃이 얌전하게 튀어오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평소보다 걸음에 힘이 빠져 발걸음이 느렸지만 바닷바람이 얼굴에 닿자 정신이 추스러지는 것 같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1층짜리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가게 외장을 진갈색 목재 패널로 꾸민 가게에 작은 간판이 걸려 있다.

  "바 아일라."

아까 직원이 마구 비웃어댔던 게 생각났다. 아일라 산 위스키가 없다고 비아냥대었던 게 완전히 근거없는 비방은 아닌 듯 했다. 가게 벽은 완전히 통유리로 되어있어 확실히 바다 전경이 매우 훌륭해 보였다. 가게 안에 들어가지 않고도 그럴 것이라는 게 직관적으로 느껴졌다. 두 프로듀서는 아마 여기에 있을 것이다. 어제 밤에 둘이서 호텔 바에서 한 잔 하고 들어오면서, 호시 양의 프로듀서가 바가 너무 일찍 닫는다고 불평을 했던 게 기억났다. 오늘도 아마 나를 어떻게든 방에 데려다 놓고 한잔 마시기 위해 호텔 바에 내려갔다가, 카운터 직원의 안내를 받고 이곳으로 왔으리라. 문을 열었다.

건물 안은 그리 격조있지는 않은 바였다. 나름의 구색은 갖추어져 있지만, 본격적인 몰트를 취급하는, 으레 한잔에 3천엔 4천엔 하는 그런 모습은 아니고, 바닷가 마을로선 나름 격식있는 모양새다. 약간 어두운 조명이 바와 테이블 위에 쳐져 있는데, 그 덕에 바다에 떠 있는 노란 달과 달빛이 닿은 푸른 하늘, 달을 반사하는 잔잔한 바다가 잘 보였다. 나는 두 프로듀서를 찾아 바 안의 테이블을 일일히 확인했다. 바다 전망이 보이는 유리창 끝쪽 자리에서 호시 양의 프로듀서가 손을 흔드는 게 보였다.

  "아, 이리노 씨, 괜찮으세요? 주무시는 줄 알았는데 열이 엄청나서요! 정말 놀랐어요!"

술이 벌써 두세 잔은 들어 갔는지 텐션이 높았다. 담당 아이돌과 프로듀서는 닮는다는 말이 정말 사실인걸까. 그녀는 키무라의 프로듀서의 어깨를 쿡쿡 찔렀다.

  "요 사이토 씨가 흔드니까 스르륵 쓰러져서는! 아, 놀랐어요!"

  "아디치 씨, 위험했던 상황을 그렇게 왜곡하지 마세요." 

약간 헐렁한 티셔츠 가슴팍에 버섯 모양의 작은 뱃지가 달려 있는 게 눈에 띄었다. 말투에 따라 몸을 움직일 때마다 꽤 큰 가슴이 흔들렸다. 

  "괜찮으신가요? 일단 해열제를 챙겨오긴 했습니다만."

키무라의 프로듀서가 남색 피케 셔츠의 주머니에서 알약 두 개가 담긴 작은 용기를 꺼냈다.

  "아니, 괜찮아요. 좀 나아졌어요."

침대 옆 탁상에 빈 알약 포장지가 있었던 게 생각났다. 차가운 인상과 다르게 의외로 또 세심한 면도 있다고 생각했다.

바의 음악이 부드럽게 흘러간다. 콜트레인, 나이마. 피아노와 색소폰의 듀엣. 두 프로듀서는 서로 웃고 떠든다. 대개는 호시 양의 프로듀서가 키무라의 프로듀서를 놀리고 그가 어떻게든 받아주다 역정을 내는 역할이지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바 카운터에 가서 무언가 주문하기 위해 메뉴를 바라보았다. 맥주 리스트가 위스키 리스트에 비해 5배는 많은 게 눈에 띄었다. 엄청나게 많았지만 무언가 이거다 싶은 건 없었다. 애초에 특정한 브랜드나 맛을 즐겨 마시는 것도 아니었으므로. 아까 전 호텔 직원이 추천한 게 떠올랐다.

  "에일 한잔과 믹스드 넛츠 부탁합니다."

  "에일? 벨지엄 아니면 포터? IPA? 에일이라고만 하면 잘 모르겠는데요."

구불거리는 긴 머리칼이 인상적인 30대 중, 후반쯤 되어 보이는 여자가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해적이 연상되는 질끈 묶어 이마를 반 쯤 가린 붉은 손수건, 서핑이나 태닝으로 탄 구릿빛 피부, 에스닉한 패션의 헐렁한 셔츠. 일본어 대신 스페인어를 외치며 럼주와 시가를 당장이라도 꺼내어 마시고 피울 것 같은 모습이다.

  "에일이 좋다고 들어서. 정확히는 잘 모르겠습니다."

  "에일? 아, 당신, 그 저 앞의 호텔에서 왔죠?"

  "아, 네. 그렇습니다만."

그녀는 골치 아픈 자식을 찾아 온 선생님을 마주친 부모라도 되는 양 혀를 끌끌 찼다.

  "그 머저리가. 또 한창 험담 늘어놨겠네."

나는 목을 약간 가다듬었다.

  "위스키가 카일라밖에 없다고는 했습니다만, 에일이 괜찮다고도 하더군요."

  "그 머저리가 카일라라고 했어요?"

그녀는 혀를 끌끌 찼다.

  "카일라가 아니고 쿨일라! 쿨. 일. 라! 그 머저리는 매번 에일 마시고 추가로 주문하면서 왜 매번 틀리지?"

그녀는 호텔 직원의 험담을 마구 늘어놓으며 잔을 집고 능숙한 솜씨로 생맥주를 따랐다. 맥주가 잔에 차오르는 만큼 그녀의 험담의 수위도 마구 올라갔다. 그녀가 탭을 닫고 능숙한 손놀림으로 맥주잔을 건넸다. 그 와중에도 험담은 끊기지 않아 나는 거짓 미소를 살짝 흘렸다. 맥주잔의 거품은 나를 바라보면서 험담을 토해내는 동안 따랐는데도 아주 깔끔하게 끊겨 있었다. 맥주 광고에서 나올 법한 완벽한 거품이다. 

  "있다가 보거든 확실하게 전해줘요. 쿨일라라고! 알지도 못하면 닥치고 와서 술이나 마시라고!"

그녀의 외침에는 화보다는 애증 같은 게 섞여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그러겠노라 하고 맥주잔과 믹스드 넛츠를 들고 두 프로듀서에게 돌아갔다.

 

일사병을 앓고 술을 마시는 게 과연 괜찮은 걸까 하고 생각이 들었지만, 첫 모금을 마시고 나자 그런 걱정은 깨끗이 씻겨나갔다. 위장에 자리한 미열의 기운이 차디찬 맥주에 휩쓸려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가라앉은 먼지를 내쫓는 바람같이. 풍부한 꽃내음과 은은한 단맛 끝에 묵직하게 걸린 씁쓸한 홉 향. 믹스드 넛츠를 몇 조각 집어 입에 넣었다. 호두와 잣, 아몬드, 크랜베리. 호두 속 껍질의 떫은 맛을 잣의 진한 기름기가 잠재워 주더니, 크랜베리의 상큼한 맛이 아몬드와 잣의 기름기를 깔끔하게 닦아주었다. 달이 아까보다 조금 더 바다에 다가갔다. 바다에는 이지러진 달의 그림자가 바다 위에 수많은 조각으로 깨진 채 희고 노란 빛을 뿌리고 있었다. 몇몇 별자리가 보였다. 거문고자리와 백조자리, 베가와 데네브. 문득 가게를 돌아보니 중년의 커플과, 나와 두 프로듀서를 빼고는 아무도 없었다. 마치 모두가 약속한 듯 일시에 자리를 비운 것처럼, 가게 안은 텅 비어있었다. 음악도 그들과 함께 떠나버린 것 마냥, 스피커에서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고개를 돌리자 두 프로듀서도 가게를 나갈 채비를 하는 게 보였다. 언제 마셨는지 내 잔은 바닥을 보이고 있다. 방금 한 모금 마신 것 밖에 기억이 나질 않는데, 언제 다 마신걸까. 창가에 붙은 긴 바가 노랗게 물들기 시작했다. 건물의 조명이 반절은 꺼져 있어 달이 한층 밝게 빛났다.

사이토 씨가 계산을 하고, 나와 아다치 씨는 밖에 나왔다. 계절과 어울리지 않는 살짝 서늘한 바람이 셔츠 안으로 새어 들어왔다. 어지러움이 느껴져 가게 정문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아다치 씨는 아무래도 호시 양에게 전화를 하는 것 같았다. 아까 전과는 다르게 다정한 목소리로 아이를 달래듯 대화를 나누고 있다.가게 문이 열리고 사이토 씨가 나왔다. 아다치 씨도 전화를 끊었다. 우리 셋은 희미하게 들리는 파도 소리와 가끔 지나가는 자동차의 엔진과 타이어 소리를 들으며 호텔로 걸어갔다. 두 사람은 각자가 담당하는 아이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할 말이 없었다. 말하고 싶지 않다는 게 맞는 표현이리라. 공과 사의 짧은 간극 사이에서, 이야기는 흥미로운 에피소드와 번뜩이는 사이드 스토리를 연결하며 이어지고 있다. 아이돌의 신변잡기에서 다음 업무에 대한 회의로 넘어가다 담당 아이돌의 자랑으로 이어지고, 지난주 회의내역에서 시작해서 아이돌과 보낸 시간을 이야기하다 또 다시 연말 콘서트에 대한 업무회의로 이어졌다. 둘의 이야기는 자신의 꼬리를 문 뱀처럼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유일하게 그들의 이야기를 끝낼 수 있는 건 오로지 시간인 것처럼.

둘의 이야기를 경청하다 보니 어느 샌가 호텔 로비에 도착해 있었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자 문이 바로 열렸다. 문을 닫아도 이야기는 멈추지 않았다. 둘 다 열정이 대단했다. 그들의 자신의 아이돌에 대한 지나치게 열정적인 태도를 목도하고 있자니 왠지 스스로 부끄러움과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비록 말하고 싶지도 않은 인연이었어도, 한때는 매우 가까운 관계였는데. 어째서 이렇게 틀어진 채로 나는 불편하게 마주하고 있는걸까.

둘 사이의 시간은 완전히 깨어진 채로, 더 이상 다가가면 깨진 유리창 파편에 찔리게 되고, 깊숙이 손을 넣으면 부러진 톱니의 날에 베이게 되는, 손 쓰기 두려운 우리의 사이는, 어쩌다 이렇게 가까이 붙게 되어서, 서로가 찌른 덜 아문 상처에서 너무나도 아프게 감정을 흘리고 있는걸까.

 

  “저는 그만 들어갈게요.”

어느 샌가 우리는 호시 양의 호텔 방 앞에 서 있었다. 가장 어린 만큼 보호자가 필요하기에 따로 잡은 방이었다. 오늘은 정말 자신도 모르게 시간이 빨리 지나가 버린다. 나는 두 프로듀서에게 오늘은 갑작스럽게 쓰러져서 죄송한 마음이라고 말했다.

  “네? 오늘이요?”

그녀의 말꼬리에 의아함이 묻어나왔다. 그녀의 표정이 내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이리노 씨, 무슨 말씀이세요. 어떤 착오가 있으신 건 아닌가요.

  “이리노 씨는 어제 기절하셨는걸요?”

나는 무슨 소린지 이해하지 못해 오도카니 서 있다 그녀가 핸드폰을 꺼내 내게 날짜를 보여주어서야 정신이 차려졌다. 정말이다. 날짜는 하루가 더 지나가 있다. 꼬박 이틀을 이렇게 쓰러진 채로 업무를 엉망으로 망쳐버렸다. 미안한 마음에 갑절이 곱해진다. 내가 만든 구멍을 메우려 동분서주하는 둘의 모습이 의식하지도 않고 머리에 스친다.

  “일사병 때문에 아마 그랬던 것 같습니다. 까딱하면 위험했기 때문에 약간의 착오도 무리는 아닙니다.”

  “그리고 별로 바쁘지도 않았어요. 카메라맨이, 아 진짜. 카메라가 결국은 고장나서 근처에서 렌탈 한다고 반나절 동안 아무것도 안 했거든요!”

미소를 짓던 그녀가 술로 마저 풀지 못한 짜증을 입 밖으로 내보냈다.

  “아다치 씨, 소리지르지 마세요! 호텔 복도에요!”

  “뭐 어때, 사이토 씨, 여기 5성호텔 아냐? 그 정도 방음도 안됐을라고!”

나는 약간의 어지러움이 느껴져 둘의 실랑이를 뒤로 하고 방에 들어갔다. 침대 옆자락에 앉아 셔츠 윗단추를 하나 풀었다. 에어컨의 찬 바람이 불어왔다. 사이토 씨는 아다치 씨를 방에 구겨 넣느라 진이 빠진 듯 지친 얼굴로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업무는 그럼 다 끝난 건가요?”

  “내일 오전에 마무리 촬영만 하면 끝납니다. 원래는 넉넉하게 오늘 마무리하고 내일 복귀하는 것으로 예상했었는데, 문제가 터져서 빠듯하게 맞추어 질 줄은 몰랐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힘이 잘 들어가질 않는다. 그가 걱정하듯 내게 해열제가 든 작은 통을 건넨다.

  “아마 하루 더 자면 나을 겁니다. 상태도 많이 호전됐구요.”

꽤나 상태가 안 좋은 채 있었나 보다. 지금의 상태가 호전이라고 하는 걸 보면. 생각해보면 하루 넘게 쓰러져 있었으니, 호전이라는 표현이 맞는 것 같다. 나는 통을 건네 받고 알약을 하나 꺼냈다. 그가 때 좋게 물잔을 건네주었다. 물잔을 받아 알약을 입에 털어넣고 물을 거칠게 삼켰다. 까딱하면 기침이 날 뻔할 정도로. 아까 전 맥주와는 다른, 말끔한 차가움이 위장에 닿았다.

  "바쁘셨을 텐데,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이가 이렇게 발목을 잡을 줄은."

  "아뇨, 괜찮습니다. 딱히 저희가 한 것도 없는 걸요."

  "아니, 그래도. 때맞춰 손수건도 바꿔 주시고. 감사합니다."

  "손수건이요?"

그가 아까 전의 아다치 씨처럼, 의아함이 얼굴에 밴 표정을 지었다. 왜 오늘은 다들 저런 표정만을 짓는 거지. 뭐가 그렇게 이해가 가지 않고, 뭐가 그렇게 의문스러운 것인지. 짤막하게 밀려오는 어지러움과 함께 나 자신의 의문감도 피어올라 서로 뒤엉켰다.

  "저와 아다치 씨는 점심 이후로 호텔에 들어온 적이 없습니다만."

그는 셔츠와 바지를 벗고 편한 티셔츠와 반바지로 갈아입었다. 나는 그의 대답이 이해가 잘 가질 않아 멍하니 그가 자신의 수트케이스에서 갈아입을 속옷을 꺼내는 것을 바라보았다. 주인이 쥔 공을 던져주기를 기다리는 멍청한 강아지마냥. 그가 무어라도 더 이해가 갈만한 설명을 해주지는 않을까 하며 기다리며.

  "아마 나나일 겁니다. 그렇다면.”

  “나나가요?”

  “네. 쉴 때마다 호텔로 들낙날락 했습니다. 방 키도 제게서 빌려갔죠."

  "쉴 때마다."

  "네. 4시 이후부터는 결국 카메라가 고장 나서, 아마 쭉 호텔에 있었을 겁니다. 다른 아이들은 바다에서 노느라 7시 넘어서 들어왔구요."

  "7시 넘어서."

  “네. 저와 아다치씨는 스탭과 촬영을 어떻게 할 건지 회의가 있었구요. 9시 넘어서야 끝났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호텔에 돌아온 적이 없다."

  "네. 어제야 저와 아디치 씨와 나나 셋이서 같이 있었지만, 오늘은 아침 이후부터는 나나 혼자서 이리노 씨를 간호한 게 되는 거죠.”

사실대로 말하건대, 고마운 마음보다 왜? 하고 의심이 먼저 들었다. 어째서 그 아이는 그렇게까지 오랫동안 이 방에 있었던 걸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나나한테 이렇게 폐만 끼치게 되어버리니. 프로듀서로서 면목이 없네요."

  “오늘은 하루가 지났으니 괜찮았지만, 어제는 정말 하루 종일 옆에서 이리노 씨만 보고 있었습니다. 마치 자신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난 것처럼 걱정하더군요.”

그가 짧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이러나 저러나, 우리가 아이돌을 돕는 게 아니라, 아이돌이 우리를 돕는 거죠.”

그가 화장실에 들어가며 방의 불을 껐다. 나도 식은땀과 바닷바람에 절은 후줄근한 옷을 벗고 편한 티셔츠와 얇고 헐렁한 리넨 바지로 갈아입었다. 커튼이 쳐진 유리창의 작은 틈새에서 달빛이 새어들어와 천장에 가느다란 선 하나를 그었다. 나는 아까보다는 덜한 어지럼증과 약간의 졸음, 끝없는 의문을 안고 침대에 누웠다.

 

4시 이후부터 그 아이는 쭉 나와 함께 있었다. 다른 아이돌은 7시가 넘어서야 돌아왔다. 그 3시간동안, 나와 그 아이는 단 둘이서 이 방에 있었고, 3시간 정도면 무슨 일이 일어나도 아무도 모를 시간이다. 함부로 재단할 수 없는 내용이지만, 그 3시간동안 무슨 일이 있었을까, 하고 머리 속에서 잡다한 생각이 스친다. 생각의 흐름 속에는 멋대로 입에 담을 수 없는 생각도 들어있어, 넓지도 않은 머리 속에서 세찬 흐름을 이어가고 있다. 이윽고 그 세찬 흐름은 거대한 생각의 파도가 되어 작은 머리 속에서 휘몰아치고, 알 수 없는 사실의 파편을 어떻게든 끼워 맞추고, 감정해내고, 규명하려고 미약한 상상과 무력한 추론이 작은 뗏목을 타고 폭풍을 헤친다. 어떻게 연결해도 말이 안되고, 어떻게 이어도 논리가 안 맞는다. 유일하게 아는 사실은 4시부터 7시까지의 빈 3시간. 그리고 촉촉한 물수건. 

무언가 일어났다는 건 알 수 없지만, 무언가 충분히 일어났으리라는 건 알 수 있다. 하지만 상상과 추론이 힘들게 가져온 희미한 가설들은 그 어떤 것도 논리적이던, 감정적이던 제대로 된 근거가 없어 머리 속에서 하나 하나 간단하게 논파될 뿐이다. 어지럽다. 이상하게도 미열이 느껴지는 것 같다. 약은 분명 아까 먹었는데. 화장실에서 들려 오는 세찬 물소리는 멈출 기미도 없고. 빈 3시간. 빈 3시간. 이해할 수가 없다. 4시부터 7시까지. 무언가 일어났다. 무언가 일어났나. 유일하게 아는 건 빈 3시간. 물수건이 촉촉해. 어떻게 연결해도 말이 안되고, 어떻게 이어도 논리가 안 맞는다. 빈 3시간. 빈 3시간. 무언가 일어났다. 물수건이 촉촉해. 4시부터 7시까지. 이해할 수가 없다. 유일하게 아는 건 빈 3시간. 무언가 일어났다. 무언가 일어났나.

 

무언가 일어나긴 한건가?

 

어지럼증이 서서히 세차게 불어온다. 거대한 허리케인 앞에 선 사람이 이런 기분일까. 무언가 일어나긴 한 건가? 허리가 붕 뜬다. 아, 골반도. 어깨도 이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 무감각이 느껴지는 기묘한 느낌. 무언가 일어나긴 한 건가? 팔꿈치와 무릎을 거쳐서, 종아리와 아랫팔, 손목과 복사뼈로 내려가는 이 느낌. 멍하고, 공허한 느낌. 이젠 발등과 손등을 넘어, 모든 발가락과 손가락 마디를 덮어버린다. 무언가 일어나긴 한 건가? 두 눈을 감지 않았는데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무언가 일어나긴 한 건가? 세차게 들려오던 물소리도 이젠 들리지 않는다. 무언가 일어나긴 한 건가? 조용하게 고동치던 심장박동도 느껴지질 않는다. 무언가 일어나긴 한 건가? 이윽고, 가느다란 생각의 끈이 끊어지며 짤막한 생각의 마디가 머리 속에서 스치듯 사라진다.

 

그 아이와 나 사이에 무언가 일어나긴 한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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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피나렐로입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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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바르고 고운 말을 사용 합시다.
  • 포틴P (@howo***)

    묘사가 이상해진다 했더니 일사병 때문이었나
    마지막 의식의 흐름을 보니 뭔가... 생각해보니 아직까지도 "P와 나나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는 정확히 모르는군요..
    1October 07, 2016 (금) 08:55_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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