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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스널리티P 시리즈] 메모리얼 <사쿠마 마유의 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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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7-21, 2016 03:02에 작성됨.

 

 

**************

 

초여름에서 한여름으로 넘어가는 6월 말의 어느 날.

 

 

“수고하셨습니다!”

“여러분,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사내 스튜디오에서 진행된 그라비아 촬영을 마치고, 잡지의 권말 부록에 들어갈 짤막한 인터뷰가 이어졌다. 기자가 들어올 때까지 약간 시간이 남아 있었기에, 메이크업을 정리하고 사복으로 갈아입은 마유는 대기실에서 프로듀서와 함께 기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저기……프로듀서 씨?”

“응? 왜?”

“괜찮으세요?”

“괜찮고말고. 컨디션 관리는 제대로 하고 있으니까 신경 쓰지 마.”

 

프로듀서는 걱정 말라는 듯 씨익 웃어 보였지만, 그를 바라보는 마유는 생기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그의 웃음을 걱정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거울 너머로 보이는, 마유의 눈에 비치는 프로듀서는 한 눈에 보더라도 피로가 뚝뚝 떨어지는 모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원인은 이제 곧 다가오는 단합대회 때문이었다.

매년 7월 말에 열리는 단합대회에 프로듀서는 기업 팀 소속으로 출장하기로 되어 있었고, 그에 대비하여 몸을 만드는 중이었다. 원래대로라면 타 부서에서 업무 보조가 들어와야 하지만, 아직까지는 부서의 규모가 그다지 크지 않아 그다지 발언권이 없었던 탓에 프로듀서는 일과 시간에는 업무를, 일과를 마치는 저녁에는 체력 단련에 집중하고 있었다.

오전에는 아이돌의 이동, 오후에는 영업, 저녁에는 트레이닝, 밤에는 낮에 하지 못한 서류작업. 그러한 살인적인 스케줄을 시작한 것이 5월 말이었으니, 어느덧 한 달 가까이나 프로듀서는 그렇게 살아 온 셈이다.

 

“그건 둘째치고, 사쿠마.”

“인터뷰의 기본은 수동적인 자세. 앞서나가지 말고, 먼저 말하지 말 것.”

 

기자를 기다리며 조언이라도 할 겸 말을 꺼낸 프로듀서에게, 마유는 또박또박하게 자신이 배운 것들을 늘어놓았다. “잘 알고 있구나”라며 쓴웃음을 짓는 프로듀서를 향해, 몇 번째일지 모를 화사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계속 교육받았으니까요. 프로듀서 씨에게.”

“그래도, 조심해야 해. 갓 데뷔한 지금이 가장 위험할 때니까.”

“네, 명심할게요. 우후후…….”

“……..”

 

몇 번이나 다짐을 받았지만, 프로듀서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마유를 바라보았다.

물론 그녀 또한 프로이고, 할 때는 하는 사람이기에 큰 걱정은 하지 않고 있었지만, 유독 자기 자신과 있을 때만 되면 맹목적이 되는 그녀의 태도를 보다 보면 그의 후각이 이따금씩 어떤 냄새를 감지했다. 좋지 않은 사건을 부르는 그 냄새는, 그 뿐만 아니라 나름 잔뼈가 굵은 이 업계의 기자들 또한 맡을 수 있는 그런 종류의 것이었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그 때, 대기실의 문을 누군가 두드린다. “누구세요?”라고 물으며 프로듀서가 다가가자, 문 너머에서 “연락드린 기자입니다!”라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프로듀서가 문을 여니, 문 너머에는 안경을 쓰고, 목에는 CG프로덕션의 명찰을 걸고 있는 여성이 있었다. 3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그녀는 방 안의 두 사람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미안해요, 엘리베이터가 사용 중이라서 시간이 좀 걸렸네요. 오래 기다렸죠?”

“아니요, 괜찮아요.”

 

프로듀서는 가쁜 호흡을 정리하는 그녀를 마유가 앉아 있는 테이블의 맞은 편 자리로 안내했다. 프로듀서가 마유의 등 뒤에 서는 것을 보고, 기자는 옆에 매고 있는 가방에서 프로듀서의 것과 같은 로고가 새겨진 명함을 꺼내어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반갑습니다. 오늘 인터뷰를 담당하게 된 CG프로덕션 보도부 소속의 기자 K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사쿠마 마유입니다.”

“사쿠마 양, 실제로 보니까 사진보다 훨씬 더 귀엽네요. 내 여동생 삼고 싶다.”

“우후후, 고마워요.”

 

평소와 같은 웃음으로 대답하는 마유와 대조적으로, 그녀의 뒤에 서 있는 프로듀서는 단호한 표정으로 기자를 향해 손목에 찬 시계를 톡톡 두드려 보인다. 시간이 없다는 제스쳐였다.

사실 오늘의 스케줄은 이걸로 끝이지만, 기자라는 직종은 이렇게 하지 않으면 쓸데없는 이야기가 많아진다. 그리고 기자의 앞에서 쓸데없는 이야기가 늘어난다는 것은, 그만큼 이쪽이 실수를 범할 가능성도 늘어난다는 것이다. 눈 앞의 여기자가 과연 그 정도의 후각을 가지고 있을 지는 불명이지만, 일단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같은 회사에서 일하는 기자라 하더라도 특종 앞에서는 같은 회사고 나발이고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기자 특유의 하이에나 같은 습성을 프로듀서 또한 사무칠 정도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차, 그랬었죠. 그럼 이제 시작해도 될까요?”

 

그녀는 외투 주머니에서 작은 녹음기와 수첩을 꺼냈다. 기자들이 흔히들 사용하는 것으로 지금부터 인터뷰를 시작한다는 신호였다. 마유는 고개를 돌려 프로듀서를 바라보았다. 프로듀서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작게 심호흡을 한 뒤, 기자에게 “좋아요”라고 대답했다.

 

“좋습니다. 인터뷰라고는 해도 간단한 독자 질의응답을 포함한 몇 가지 질문뿐이니까, 그렇게 부담 갖지 않으셔도 좋아요.”

 

찰칵, 하고 녹음기의 전원이 들어간다.

 

“인터뷰를 시작하기에 앞서 간단한 자기소개를 부탁 드릴게요.”

“사쿠마 마유입니다. 센다이 출신이고, 올해로 열 여섯 살이에요.”

“마유 양은 이전에는 센다이 지역 잡지에서 모델로 활동했었죠?”

“맞아요. 비록 회사에 소속된 건 아니었지만, 독자 모델로 활동하고 있었답니다.”

“어쩐지, 촬영장의 분위기나 촬영하는 요령에 익숙하다 했어요. 혹시 주로 활동하던 분야를 물어봐도 될까요?”

“로리타 패션 쪽이었어요.”

“호오, 로리타 패션! 특별한 이유라도 있었나요?”

“로리타 패션에는 리본이 어색하지 않으니까요.”

“리본이요?”

“네, 이런 것 말이에요.”

 

기자에게 마유는 왼쪽 팔을 들어 보였다. 촬영이 끝나고 사복을 입고 있는 지금도 그녀의 왼손에는 붉은 색을 띤 리본 액세서리가 매어져 있었다.

 

“아하, 리본 액세서리 말이군요. 그러고 보면, 마유 양의 데뷔 무대도 그렇고, 화보에도 늘 리본이 들어가 있었네요? 리본에 특별한 의미라도 있나요?”

“이 리본은……그래요, 운명의 리본이에요.”

“운명?”

“네에, 마유와 운명의 그이를 이어주는, 운명의 붉은 리본이에요.”

“운명의 리본이라……그럼, 그 한쪽 끝은 어디를 향해 있나요?”

“그것은…….”

 

마유의 대답을 들으면서 기자는 어떤 리액션을 원하는 듯 곁눈질로 프로듀서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그녀의 바람과는 달리, 프로듀서는 팔짱을 낀 채 담담하게 그녀의 시선을 받아내고 있었다. 고작 이 정도의 함정에 걸릴 정도로 사쿠마 마유는 단순한 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팬 여러분들을 향해 있지요. 우후후.”

“그렇군요. 마유 양의 팬 분들은 참 행복하겠어요. 그럼 다음 질문입니다…….”

 

그 뒤로도 짤막한 질문 몇 가지가 더 나왔다. 데뷔 무대에서 느꼈던 소감이라던가, 앞으로의 활동 방향에 대한 개인적인 계획 등등, 마유 혼자서도 충분히 대답할 수 있을 만한 답변들이었기에, 프로듀서는 간섭할 생각을 완전히 접고, 한 걸음 떨어진 곳에서 그들의 문답을 방관하고 있었다.

 

“자 이제 마지막으로, 팬 여러분들께 한 마디 해주세요.”

“신인이지만 아끼고 사랑해주시는 팬 여러분들께 정말로 감사 드립니다. 곧 발매될 싱글CD로 찾아 뵐 수 있도록 열심히 하겠습니다.”

 

마유의 이야기가 끝나자 기자는 녹음기를 정지시키고 수첩과 함께 그것을 다시 주머니 속으로 되돌렸다.

 

“시간 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저는 이만…….”

“수고하셨어요.”

“수고하셨습니다.”

 

프로듀서와 마유에게 꾸벅, 하고 허리를 숙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한 그녀는 조용히 대기실의 문을 닫고 나갔다. 자신의 뒤에 서 있는 프로듀서를 향해, 마유는 잔뜩 기대한다는 눈초리를 하고는 그를 돌아보았다.

 

“어떤가요, 당신의 마유는 제대로 인터뷰를 했나요?”

“그래, 잘 했다, 훌륭했어.”

 

“‘당신의’는 빼라니까 그러네”라고 말하며 프로듀서는 커다란 손으로 마유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그 순간 그녀의 얼굴에는 실망한 듯한 표정이 떠올랐지만, 이내 평소의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되돌아왔다.

 

“자, 그럼 돌아가자.”

“네.”

 

대기실을 나와 사무실로 돌아가는 길에서 마유는 자신보다 반 걸음 정도 앞서서 걷고 있는 프로듀서에게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프로듀서 씨, 시간 되시면 지금 퇴근하시는 길에 동행해도 괜찮을까요?”

“미안해. 난 지금 바로 업무회의가 있어서 또 나가봐야 하거든.”

“그런가요……그렇다면 별 수 없죠.”

 

사무실에 도착하자 프로듀서는 사무실 구석의 소파에 그녀의 짐을 올려두고, 자리를 비운 치히로에게 쪽지를 남긴 뒤 자신의 자리로 가서 외근가방과 외투를 챙겼다. 다소 시무룩한 표정으로 소파에 앉아서 평소처럼 뜨개질을 시작하는 마유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프로듀서는 시선을 돌려 벽걸이 시계를 한번 본 뒤 다시 그녀를 쳐다보았다.

 

“저기, 사쿠마.”

“네?”

“괜찮다면, 이따가 협의회 끝나거든 기숙사로 데려다 줄까?”

“정말인가요?”

“뭐, 한 시간 정도 걸리긴 할 텐데, 싫으면 먼저 돌아가도 좋아.”

“그럴 리가요! 마유는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어요. 아니, 기다릴게요.”

“하하, 그래. 그럼 금방 끝내고 돌아올게.”

 

마치 꽃이 피어나는 듯한, 환하게 만개하는 그녀의 미소를 본 프로듀서는 빙그레 웃으면서 사무실의 문을 열고 나갔다. 마유는 뜨개질을 하던 손을 멈추고, 조용히 눈을 감은 채 마치 기분 좋은 음악을 감상하는 것처럼 멀어져 가는 그의 발소리를 듣고 있었다. 프로듀서의 발소리가 잦아들 때 즈음, 다른 방향에서 또각거리는 구두소리가 들려왔다. 그 구두소리는 사무실의 문 앞에서 잦아들었다.

사무실의 문이 열리고, 연녹색 옷차림의 사무원, 센카와 치히로가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안녕? 촬영은 끝났어?”

“네.”

“프로듀서 씨는……아차, 오늘 협의회 있다고 하셨지. 그럼 별 수 없네……”

“무슨 일인가요?”

 

마유가 앉아 있는 소파로 다가온 치히로는 품에 안고 있던 파일을 소파의 앞에 있는 탁자 위에 올려두었다. 파일의 표지에는 ‘샘플’이라는 단어가 적혀 있었다.

 

“저번에 촬영한 잡지의 샘플을 받아 왔거든. 프로듀서 씨가 같이 보자고 하셨는데……어라, 잠시만. 메시지가 왔네.”

“네.”

 

치히로는 휴대전화를 꺼내어 메시지를 확인했다. 그 메시지는 프로듀서가 발신한 것으로, 협의회가 끝나면 후미카와 함께 돌아갈테니, 시간 되면 먼저 퇴근하라는 말이 적혀 있었다. 휴대전화를 다시 집어넣는 치히로의 옆에서, 뜨개질을 내려놓은 마유는 천천히 잡지를 한 페이지씩 넘겨보기 시작했다.

 

“이번 컨셉도 빨간색이구나.”

“그럼요. 마유에게는 가장 어울리는 색인걸요. 프로듀서 씨는 보라색도 좋을 거라고 하셨지만…….”

“하셨지만?”

“그래도, 아직은 빨간색이 제일 좋아요. 그것도 아주 새빨간, 선홍색이…….”

 

그렇게 말하면서 마유는 왼손에 매어진 리본을 슬쩍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면, 마유는 프로듀서 씨랑 어떻게 알게 됐어?”

“프로듀서 씨가 말씀해주지 않으셨나요?”

“물어봤는데 계속 안 가르쳐 주셔서.”

“그런가요…….”

 

한 순간, 마유는 매우 흡족해 보이는 미소를 띄웠다. 하지만 그것을 이내 거두어들이곤, 평소와 같은 은은한 미소를 머금은 표정으로 되돌아온 그녀는 약간 들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운명……이라고나 할까요, 우후후…….”

“운명?”

“네에, 프로듀서 씨와 저는, 분명히 운명으로 엮여 있었던 게 틀림없어요. 왜냐하면…….”

 

마유가 막 이야기를 시작하려는 찰나, 시끌벅적한 말소리와 함께 트레이닝복 차림의 세 사람이 사무실로 우르르 들어왔다. 지금은 ‘트라이어드 프리무스’라는 3인 유닛으로 활동 중인 시부야 린, 호죠 카렌, 카미야 나오였다.

 

“수고하셨습니다~!”

“프로듀서……는 아직 없나?”

“프로듀서 씨는 협의회 가셨어요.”

“쳇. 아깝네.”

 

소파에 앉아 있는 마유의 대답을 듣자 린과 나오는 정말로 아쉬운 듯 짧게 혀를 찼다. 그 때, 잠자코 있던 카렌이 마유의 맞은 편 자리에 앉으며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 무슨 재미있는 이야기 하고 있었어? 나도 들어도 돼?”

“별 일은 아니에요. 그냥 자그마한 추억팔이 랍니다. 듣고 싶나요?”

 

그 이야기를 듣고, 카렌을 제외한 나머지 두 사람도 고개를 끄덕이며 소파로 다가와 앉았다.

 

“마유, 괜찮겠어?”

“괜찮아요, 딱히 숨길 만한 이야기도 아니고”

 

마유는 싱긋 웃으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읽고 있던 잡지를 다시 테이블 위로 되돌리고, 옆으로 치워 두었던, 절반 정도 완성된 목도리를 자신의 무릎 위에 올려두며 그녀는 작게 목을 가다듬었다.

 

“그러니까, 마유가 프로듀서 씨를 만난 건, 작년 12월쯤이었어요.”

“작년 12월이면……아아, 센다이 지역 오디션으로 출장가셨을 때구나.”

 

사무실의 벽에 걸린 달력을 바라보며 치히로가 중얼거리자, 옆에서 잠자고 듣고 있던 나오가 한 마디를 덧붙였다.

 

“우린 한창 데뷔 준비하고 있었을 때네.”

“그게 벌써 반년 전인가……그 땐 마스터 트레이너한테 죽는구나, 싶었는데 말이야.”

“아하하, 맞아, 맞아.”

“저기, 슬슬 이야기를 시작할까 하는데요?”

“아, 응. 미안해.”

 

사과하는 카렌에게 미소로 대답하며 마유는 아련한 눈빛으로 천장을 바라보았다.

 

 

*********

 

 

작년 12월, 센다이 시내의 모 잡지사.

 

 

언제나처럼 휴게실의 한 켠에 앉아서, 조용히 대바늘을 놀리고 있는 저의 귓가에 옆자리에 삼삼오오 모여서 떠드는 동료들의 이야기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저는 독자 모델. 아마추어이기 때문에, 우리들의 연령대는 매우 다양합니다. 이제 막 초등학교 5학년이 된 아이도 있지만, 내년이면 수험을 준비해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기, 그 얘기 들었어?”

“무슨 얘긴데?”

“내일 우리 사무실에 그 사람이 온대.”

“그 사람?”

”아, 나도 들었어. CG프로덕션의 프로듀서지?”

“응! 안 그래도 요새 신인을 구하느라 바쁘다고 들었는데, 혹시 스카우트?”

“그럼 나도 타카가키 카에데처럼 될 수 있는 거야?”

 

저는 손이 멈춘 것을 깨닫고 곧바로 다시 뜨개질을 시작했습니다. 저도 모르게 그들의 이야기에 정신이 쏠린 모양입니다.

타카가키 카에데. 업계 굴지의 대기업인 CG프로덕션 소속이며, 그 중에서도 당당히 간판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스타 모델입니다. 저희들 같은, 아직 정식 소속사를 찾지 못한 아마추어 모델에게 있어서는 우상에 가까운 사람입니다. 아니죠, 우상에 가까웠던 사람이라는 것이 맞겠네요.

그렇게 뭇 여자아이들의 우상이 되어있던 타카가키 카에데는, 어느날 갑자기 업종 전환을 선언했습니다. 선언이라고나 할까요, 한동안 잠잠하던 사람이, 모델이라면 기겁할만한 팔랑팔랑한 의상을 입고, 온갖 장치가 반짝이는 무대에 올라서서, 근사한 노래를 부르는 것을 TV에서 보았을 때, 저는 제 눈이 잘못되었는가 의심했을 정도였습니다.

 

“자, 여러분, 주목!”

 

한쪽 귀로는 꺄아꺄아거리는 동료들의 수다소리를, 그리고 눈과 손은 뜨개질에 집중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자니 휴게실의 문을 열고 편집부 소속 매니저님이 들어오셨습니다. 저는 손을 멈추고, 시선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습니다.

 

“오늘 이렇게 여러분을 부른 이유는, 내일과 모레 있을 촬영에 대한 사전 미팅 때문이에요. 다들 필기구 가져오셨죠?”

“네!”

 

우렁차게 대답하는 아이들 가운데서, 저 역시 손을 멈추고, 짜고 있던 머플러를 다시 말아 가방에 집어넣었습니다.

 

 

 

다음 날.

 

평소보다 약간 이른 시간인 오전 여덟 시.

어제 들었던 내용에 따르면, 오늘은 오전부터 시작해서 오후까지 촬영이 계속된다고 합니다.

저는 학교에 결석계를 제출하고, 교실로 향하는 대신 곧바로 교외에 위치한 스튜디오로 향했습니다.

오늘의 일은 크리스마스 전후로 발행되는 특집 화보의 촬영입니다.

특집 촬영에 참가한다는 것은, 저희들 아마추어 모델 입장에서는 ‘프로’로 데뷔할 수 있는 가장 큰 기회이기도 합니다. 특집이라 함은 말 그대로 어느 정도 팔리는 잡지라는 것을 상징하는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정도 팔리는 잡지이면, 그만큼 ‘관계자’의 눈에도 띄기 마련이죠.

 

“아, 사쿠마 양, 어서 와.”

“안녕하세요.”

 

인적이 뜸해지는 교외로 나와, 버스에서 내려 10분 정도를 걸어가면 스튜디오가 있습니다. 큰 회사라면 회사 내부, 혹은 근처에 스튜디오를 장만하지만, 아쉽게도 제가 소속한 사무소는 영세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시내 한복판에 스튜디오를 운영할 정도로 여유가 있는 회사도 아니었습니다.

스튜디오에 도착하자, 로비에 스태프 한 분이 있었습니다.

 

“안녕, 마유 양.”

“안녕하세요. 혹시 마유가 늦지는 않았나요?”

“아아, 충분히 여유 있는 시간이야. 오히려 일찍 온 편인걸. 자, 먼저 대기실에라도 가 있을래?”

“네, 그렇게 할게요.”

 

어찌되었든 저랑은 관계없는 일이겠죠. 저는 그저 카메라 앞에서 공허한 표정을 짓기만 하면 되니까요.

스태프 씨의 말은 어느새 뒷전으로 밀려나고, 제 머릿속에는 어제 짜다가 남은 머플러 생각이 가득 찼습니다. 조금 서두르면, 올해가 지나가기 전에 완성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저는 대기실로 향하는 발걸음을 조금 서둘렀습니다.

 

평소대로 대기실의 구석에 앉아, 가방 속에서 새빨간 머플러와 대바늘이 끼워진 털실뭉치를 꺼내 뜨개질을 시작했습니다.

저는 빨간색을 좋아합니다. 빨간색이 주는 그 강렬한 생동감을, 저는 무척이나 좋아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세상은 온통 새까맣잖아요?

저는 사람의 특징을 잘 파악하지 못합니다. 어릴 적에는 그저 사람을 보는 눈이 어두워서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나이를 먹고, 점차 생각이 많아지면서, 저는 그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제 눈에는, 무언가가 씌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마치 짙은 선글라스를 쓴 것처럼, 세상은 온통 새까맣게 만들어버리는, 아주 악질적인 무언가가 씌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새까만 정도는 모두 제각각입니다. 부모님은 연한 회색으로, 초등학교 시절 같이 놀았던 소꿉친구는 그보다 조금 진한 회색으로, 중학교 시절 함께 어울렸던 친구들은 짙은 잿빛으로 말이에요.

저는 잠시 손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주위를 돌아보았습니다. 시간이 꽤나 흐른 듯, 주위에는 함께 촬영을 하는 아이들이 도착해서 제각각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주위 동료들과 이야기를 섞는 아이, 휴대전화를 만지고 있는 아이, 조용히 책을 꺼내어 읽고 있는 아이. 제각각 시간을 보내는 저의 동료들입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색채를 띠지 못하고 온 얼굴에 시커먼 먹칠을 하고 있는 얼굴들이기도 합니다.

저는 다시 시선을 내려, 대바늘을 쥔 손을 다시 놀리기 시작했습니다.

 

 

 

***********

 

 

 

나오가 손을 들고, 잠시 이야기가 멈추었다.

 

“저기, 마유?”

“네?”

“온통 새까맣다니, 혹시 우리들도 그렇게 보여?”

 

불안한 듯 자신을 가리키며 말하는 나오에게 마유는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대답했다.

 

“아뇨, 지금의 마유는 여러분의 얼굴, 목소리, 생김새, 모두를 똑똑히 기억한답니다.”

“으응, 그거 다행이네. 정말로.”

“정말~나오는 이런 데서 감수성이 예민하다니까. 귀여워 죽겠네!”

“시, 시끄러워!”

 

옆구리를 쿡쿡 찌르는 카렌에게 와악!하고 달려드는 나오를 바라보던 마유는 작게 헛기침을 하고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

 

 

 

특집이라는 타이틀이 무색하게, 촬영은 너무나도 싱겁게 끝났습니다.

평소처럼 의상을 걸치고, 평소처럼 공허한 표정을 지으며 렌즈를 바라보고 있자니, 평소처럼 셔터가 터지면서 제 차례의 촬영이 끝난 것입니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쉬는 시간 조차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촬영은 너무도 빨리 끝나버렸습니다.

샘플은 내일 촬영을 마친 뒤에 확인하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의상을 반납하고, 메이크업 매니저 씨와 함께 화장을 정리한 저는 곧장 짐을 싸서 스튜디오를 나왔습니다.

 

‘생각보다 시간이 비었는데……이제 뭘 하면 될까요…….”

 

그 때였습니다.

잰걸음으로 대기실을 나와서 스튜디오의 출구로 향하는 복도의 모퉁이를 꺾는 바로 그 순간. 모퉁이의 맞은편에서 돌아 나온 그 사람을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저는 그만 전력으로 그의 몸에 부딪히고 말았습니다.

 

“꺄악!”

“어엇!”

 

분명히 사람과 부딪혔을 것인데, 텅 하고 마치 벽에 부딪힌 듯한 단단한 충격이 덮쳐왔습니다. 가방을 떨어뜨리고, 중심을 잃은 제가 뒤로 넘어지려는 순간 저와 부딪힌 그 사람은 재빨리 손을 뻗어 허공을 휘젓는 제 왼팔을 낚아챘습니다.

그 순간.

-두근, 하고.

그의 손 밖에 본 것이 없었지만.

-두근, 하고.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느꼈던, 그 어느 때보다도 빠르고 강하게, 저의 가슴이 뛰기 시작했습니다.

그 사람의 손은, 무채색으로 가득 찬 온통 새까만 세상 속에서 부모님에 이어서 두 번째로 만난, 너무도 선명하게 자신의 색을 가지고 있는 손이었기 때문입니다.

 

“괜찮으세요?”

 

붙잡은 제 왼팔을 잡아당겨, 저를 다시 일으켜 세워 준 그 사람은 곧바로 제 뒤로 돌아가 바닥에 떨어진 제 가방을 주워 먼지를 툭툭 털어내고는 제게 내밀었습니다.

 

“여기, 가방 떨어뜨리셨어요.”

“네, 네……괜찮아요. 고맙습니다.”

 

지금껏 느껴보지 못한 감정에 너무도 당황한 나머지, 저는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서둘러 그의 앞을 지나쳐 스튜디오를 벗어났습니다. 그의 앞을 지나치면서 곁눈질로 바라본 그는 마치 머리 위에 물음표를 띄우고 있는 듯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그 순간 바라본 그의 얼굴은 제 눈. 아니, 제 눈꺼풀의 뒷면에도 확실하게 각인되기 시작했습니다.

 

 

 

**********

 

 

 

“그게 첫 만남이었어요. 마유와 프로듀서 씨의.”

“에에, 그게 끝이야?”

“네, 이게 끝이랍니다. 운명이란 건, 존재를 확인하기만 하면 그 다음은 일사천리니까요.”

“뭐야~ 난 또 뭔가 거창한 거라도 있는 줄 알았는데.”

“우후후, 미안해요.”

 

실망한 듯 입을 삐죽이는 나오와 카렌에게 싱긋 웃으면서 마유는 린을 바라보았다.

 

“린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응? 어, 나? 나, 나는, 뭐……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응, 운명이잖아? 말로는 설명하지 못할 무언가가 또 있을 거 아냐?”

“헤에, 린은 그렇게 생각하나보네요~?”

“역시, 그렇게 쿨한 린이라 해도 여자아이는 여자아이네요~?”

“후훗, 린 귀여워.”

 

치히로와 카렌, 나오의 공격에 린이 속수무책으로 새빨갛게 달아오르고 있을 무렵, 사무실의 문이 열리고 두 사람이 들어왔다.

 

“다녀왔습니다.”

“안녕하세요…….”

 

프로듀서의 등 뒤에서, 지친 기색이 역력한 후미카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소파로 다가와 털썩 주저앉았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마유의 눈빛이 순간적이지만 날카롭게 번뜩였다.

하지만 트라이어드 프리무스의 셋은 저마다 노느라, 그리고 프로듀서는 책상을 정리하느라 자신의 자리를 바라보고 있었기에 그 사실을 눈치 챈 사람은 없었다.

 

“다들 집에 안 가고 뭐 해요?”

“저는 마유랑 샘플을 보고 있었어요. 저번 촬영에 실린 건데, 데뷔 무대의 사진도 같이 올라갔거든요.”

“아아, 그거 말이죠? 안 그래도 한번 물어보려고 했는데. 그거 언제까지 결정해야 되죠?”

“이번 주 안으로 보내달래요.”

“그럼 내일 함께 살펴봅시다.”

 

그렇게 말하고 프로듀서는 소파에 앉아 있는 아이들을 돌아보았다.

 

“자, 너희들도 얼른 짐 싸. 집에 가자.”

“네!”

 

사무실을 나가는 아이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프로듀서는 테이블 위에 늘어놓은 샘플을 주섬주섬 챙겨 자신의 자리에 올려놓았다.

 

“센카와 씨는 퇴근 안 하십니까?”

“저도 이제 막 가려는 참인데요. 프로듀서 씨도 퇴근인가요?”

“어……아마도요?”

“’아마도’가 뭔가요, ‘아마도’가…….”

“일단 애들 데려다 주고, 저녁에는 카와시마 씨랑 타카가키 씨 토크쇼 녹화가 있어서요.”

 

태연한 얼굴로 이야기하는 프로듀서를 치히로는 기가 차다는 듯 바라보았다.

 

“그건 퇴근이 아니잖아요. 그럼 또 저녁에 들어와서 잔업 처리하실 거죠?”

“어……아뇨? 집에 가서 잘 건데요?”

“……프로듀서 씨는 자기가 거짓말 할 때 오른쪽 입꼬리가 내려가는 거, 알고 계세요?”

 

그녀의 말에 프로듀서는 당황하며 자신의 오른쪽 뺨을 잡아당긴다. 그러자 치히로의 표정이 단박에 샐쭉하게 바뀌며 그를 흘겨보았다.

 

“거짓말이군요.”

“아하하…….”

 

치히로의 눈빛을 웃음으로 대충 넘기면서 프로듀서는 슬금슬금 소파로 걸어가 이리저리 흐트러진 소파의 쿠션을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뭐……컨디션 배분은 알아서 잘 하고 있으니까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여차하면 에너지 드링크도 있고 말이에요.”

“그러니까, 그거는 그렇게 복용하면 건강에 정말 안 좋다니까요…….”

“괜찮아요, 괜찮아. 남는 게 건강이고 체력이니까.”

“정말, 그런 뜻이 아니라니까…….”

“괜찮아요, 괜찮아.”

 

치히로는 입술을 삐죽이면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퇴근 준비를 시작했다. 잠시 후, 트레이닝 복에서 사복으로 갈아입은 아이들이 사무실 앞에 모이자, 프로듀서는 마지막으로 사무실 안을 돌아보고는 불을 끈 뒤 사무실의 문을 걸어 잠갔다.

 

 

린 일행과 치히로는 각자 걸어서 돌아가기로 했기에 프로듀서의 차에 탑승한 것은 여자 기숙사에 머물고 있는 후미카와 마유밖에 없었다. 도심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여자 기숙사 까지는 자가용으로 약 10분 정도 걸리는 거리. 기숙사로 돌아가는 프로듀서의 차 안에서 마유는 창 밖으로 휙휙 지나가는 불야성의 풍경을 바라보며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 보면, 그 때도 이렇게 창 밖을 보고만 있었죠.’

 

 

**********

 

 

이따금씩 시간이 비면, 저는 집 밖에서는 뜨개질을, 그리고 집 안에서는 요리를 하곤 합니다. 두 가지 모두 혼자서 하는 것이 더 편하고, 그 일을 하는 동안에는 다른 생각들이 나지 않는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날의 저는 스튜디오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텅 빈 버스에 앉아서 조용히 창 밖을 바라보고만 있었습니다. 가방 안에 있는, 언제나 제 머릿속의 일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미완성된 목도리의 존재는, 지금 한 순간만큼은 흔적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사라져 있었습니다.

그렇게 멍하게 창 밖을 바라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 지금은 잘 떠오르지 않습니다. 한 가지 기억나는 것은, 창 밖을 지나가는 풍경이 교외에서 도심의 시가지로 바뀌고, 버스에 타는 사람이 서서히 늘어나기 시작할 무렵이 되어서야 저는 창문에서 시선을 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제 왼쪽 손목을 바라보았습니다. 그의 손길이 닿았던 자리, 항상 매고 다니던, 새빨간 리본 장식이 매어져 있는 그 자리에는 아직도 후끈거리는 그의 체온이 남아있는 듯 했습니다.

어느 새, 버스는 저의 집 근처에 가까이 도착해 있었습니다.

 

“하아……?!”

 

하마터면 정류장을 지나칠 뻔 한 저는 버스에서 내려 작게 한숨을 내뱉었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자신이 내쉰 한숨에 담긴 열기를 깨닫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가슴 속에서, 따뜻한 불씨가 타오르는 듯한 느낌. 저로써는 처음으로 느껴보는 감정이었습니다.

아, 이제 기억이 났어요. 왜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는지.

그것은 지금까지 온통 새까맣게만 보였던 세상이, 이제는 너무나도 아름다운 빛으로 반짝이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무채색으로, 새까맣게만 보였던 세상이, 드디어 자신의 색으로, 자신의 빛으로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다녀왔습니다.”

 

듣는 이가 없는 인사는 공허하게 집 안을 헤엄치고 다닙니다.

점심시간을 약간 넘긴 시간이라 그런지 집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제 방으로 돌아가서도, 저는 침대에 멍하게 앉아서 그 사람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머릿속을 가득 뒤덮은 그의 목소리, 그의 손길, 그의 온기가 아직까지도 생생하게 느껴집니다. 그의 체온이 닿았던 왼손의 리본이 마치 낙인처럼 아직도 화끈거리는 것 같습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그 자리를 성급하게 피한 저 자신이 너무도 한심했습니다.

 

‘적어도 그 사람의 이름이라도 물어보았으면…….’

 

창 밖을 스쳐 지나가는 까마귀 소리에 정신을 차려 보면 어느새 하늘이 붉게 물들기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꽤나 지난 모양입니다. 혹시 부모님께서 돌아오셨을까 싶어서 저는 조심스레 방을 나와 1층의 거실로 향했습니다. 그러자 그제서야, 식탁 위에 올려진 작은 쪽지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무슨 내용인지는 안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오늘은 저녁 늦게 올 테니까 식사는 알아서 하라는 뜻이겠죠.

이런 집에 더 있어봤자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한 저는 저는 무작정 집을 나섰습니다. 목적지는 정해두지 않았습니다. 그저 발 가는 대로 걸어갈 뿐입니다. 다만, 제 머릿속에는 단 한 가지 생각만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 사람을 만나고 싶어.

만약 이것이 운명이라면, 신님께서 정하신 인연이라면, 나를 인도해 주세요.

 

 

 

저는 온 세상이 색조를 되찾았다고 생각했지만, 안타깝게도 모든 색깔이 다 돌아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버스에서 내려서 자주 다니는 번화가로 향하자, 여전히 시커멓게, 우중충하게 온 몸에 먹칠을 하고 있는 인간들이 거리를 돌아다니고 있었습니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절로 눈살이 찌푸려지는 역겨운 광경이었기에, 저는 시선을 낮추고, 오직 제 발 앞을 보면서 걷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직후 일어나게 될 사고를 미처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눈앞에 구두를 신은 다리가 나타났다고 생각한 순간, 쿵, 하고 묵직한 충격이 저를 덮친 것입니다.

 

“꺅!”

 

그것이 지나가던 사람과 부딪힌 것이라는 사실을 파악하는 데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보다도 더욱 더 놀라운 것은, 그 직후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제가 길 가운데를 막고 있었네요.”

 

보도블럭 위로 쓰러진 저의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저를 향해 내밀어진, 감색 정장을 걸치고 있는 커다란 손에서 강렬한 기시감이 느껴졌습니다. 집에서, 버스 안에서, 그를 떠올리던 때는 어렴풋이 느껴지기만 하던 그의 향기가 이제는 확실하게 자기 존재감을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고개를 들어 목소리의 진원지를 바라보니, 저의 머리보다 한참 더 높은 곳에 있는 그의 얼굴이 저를 내려다 보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과 저의 시선이 겹치자 안경을 쓰고 있는 그가 놀란 듯 한 표정을 짓습니다. 안경 너머로 보이는, 바둑돌처럼 광택이 흐르는 까만 눈동자가 동그랗게 뜨였습니다.

그것을 보는 순간, 저는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내가 찾던 바로 그 사람이라는 사실을!

아아, 신님, 정말로 감사합니다. 이 사람이, 저의 운명의 그 사람이었군요!

 

“안녕하세요! 이거 또 뵙네요.”

“저, 저기, 당신은…….”

“오늘 낮에 저랑 부딪혔던 그 분이죠? 반갑습니다. 이야, 이런 우연이 있을 줄이야……자, 우선은 일어나시죠.”

 

저를 기억하고 있었던 것일까요. 감격에 겨워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있는 저에게 그 사람은 두 손을 내밀어 길 위에 주저앉아 있는 저를 손수 일으켜 주었습니다.

 

“아아, 소개가 늦었네요. 저는 이런 사람입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우리는 길의 한쪽으로 비켜 섰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단정하게 차려 입은 양복의 가슴 주머니에서 명함 하나를 꺼내 저에게 내밀었습니다. 눈이 부실 정도로 하얗게 빛나는 그 명함을 쭈뼛쭈뼛 받아 들자, 거기에 새겨진 글귀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CG 프로덕션 아이돌 부서 소속, 프로듀서 P.

그 이름을 보는 순간, 어제 사무소의 대기실에서 들었던 동료들의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그렇군요. 화제의 프로듀서는 이 사람이었습니다.

“P씨……라고 부르면 되나요?”라고 묻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P씨, P씨……아아, 이름도 어찌 이렇게나 아름다운 울림일까요.

그 때, 저는 P씨에게 제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렸습니다.

 

“저는 마유. 사쿠마 마유에요.”

 

 

그 사람. 아니, 이제 이름을 알았으니, 더 이상은 이렇게 부를 필요가 없겠지요.

P씨와 저는 번화가를 함께 걷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이 몰려 다니는 거리를 피하면서 말이에요.

 

“시장 조사……인가요?”

“네. 제가 하는 일 중에 하나거든요. 요즘 젊은 사람들은 어느 쪽을 좋아하는가, 싶어서 말이죠.”

 

잠시 걸음을 멈추고, 그는 “혹시 아는 거라도 있어요?”라고 말하며 반짝이는 검은 눈동자로 저를 바라봅니다. 타인의 시선에 익숙하지 않은 저이지만, 이상하리만치 그의 시선은 피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니, 피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 사람에게, 좀 더 나를 보여주고 싶어.

아무도 모르는, 나 자신만이 알고 있는 나를 보여주고 싶어.

이러한 욕망이 부글부글,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마그마처럼 끈적하게 끓어오르고 있었습니다.

 

 

 

************

 

 

‘우후후, 아쉽게도 그 날엔 그냥 헤어져야 했지만 말이지요…….’

 

“사쿠마?”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마유의 의식이 현실로 돌아왔다. 그새 도착한 것인지, 자동차는 여자 기숙사의 주차장에 멈추어 있고, 운전석에 앉아 있어야 할 프로듀서는 마유가 앉아 있는 뒷좌석의 문을 열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자신의 옆자리에 앉아 있는 후미카를 바라보았다. 꽤나 피곤했던 모양인지, 후미카는 차 문에 반쯤 기댄 자세로 곯아떨어져 있었다.

 

“죄, 죄송해요. 잠시 생각을 하느라…….”

“무얼, 죄송할 것 까지야.”

 

마유가 차에서 내리자, 프로듀서는 그녀가 있던 쪽의 문을 닫고 반대편으로 가서 문을 열었다. 문에 체중을 기대고 있었던 모양인지, 차 문을 열기가 무섭게 후미카의 몸이 풀썩, 하고 밖으로 쓰러진다. “어이쿠!”하는 신음소리를 내며 축 늘어진 그녀의 몸을 가볍게 받아 들고 그는 발끝으로 자동차의 문을 닫았다.

 

“많이 피곤했나보네. 자, 가자.”

 

기숙사로 향하는 내내 마유는 규칙적인 호흡을 하면서 프로듀서에게 매달리듯 업혀 있는 후미카를 부러움이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후미카와 마유가 같은 부서 소속이었기 때문에, 두 사람은 기숙사에서도 같은 방을 사용했다. 다만 여자 기숙사는 같은 방이라고는 해도 커다란 다용도실 겸 거실 하나에 개인 방이 딸린 구조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사생활은 각자 격리된 공간에서 보낼 수 있었다.

마유의 안내를 받아 들어간 후미카의 방에 그녀를 눕혀놓고, 프로듀서는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 내일의 일정을 적은 다음, 그 부분을 찢어 후미카의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여름치고는 추운 날씨였지만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을 손수건을 꺼내어 훔치면서, 프로듀서는 곧장 현관으로 향했다. 비록 프로듀서라는 직책 상의 특권이 있긴 하지만, 여자 기숙사라는 금남의 구역에 오래 있어서 좋을 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마유는 현관까지 프로듀서를 배웅하기 위해 그의 뒤를 따라 나왔다.

 

“오늘 하루도 수고했어.”

“프로듀서 씨도 고생하셨어요.”

“그래, 푹 쉬고 내일 다시 만나자.”

“네.”

 

마유는 구두를 고쳐 신은 그를 향해 꾸벅, 허리를 숙여 작별인사를 했다. 프로듀서가 몸을 돌리려는 순간, 그는 자신의 소매를 잡아당기는 가녀린 손길에 멈칫, 하고 동작을 멈추었다. 마유의 작은 손이 그의 소맷자락을 꼬옥, 쥐고 있었다.

 

“……사쿠마.”

“네…….”

“내 이야기, 아직 안 잊어버렸지?”

 

마유는 고개를 들어 프로듀서와 시선을 맞추었다. 그 시선에서 무엇을 느낀 것인지, 그녀는 다시 시선을 내리깔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스르륵, 하고 그의 소맷자락을 잡았던 손이 내려간다. 프로듀서는 기특하다는 듯 그녀의 어깨를 한 번 두드려준 다음, “그럼, 내일 만나자.”라는 말을 다시 한번 남기곤 몸을 돌려 성큼성큼 걸어갔다.

마유는 복도 너머로 멀어져가는 프로듀서의 뒷모습을 사라질 때까지 조용히 바라보았다.

 

 

*************

 

 

 

도쿄는, 생각보다 훨씬 크고, 훨씬 멋진 곳이었습니다.

그 사람과 같은 하늘 아래에 서 있다는 사실이, 지금 내가 걷고 있는 길이 그 사람이 걸었던 길이라는 사실이 너무나도 황홀합니다.

지하철 역에서 나오자, 센다이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마천루의 숲이 저를 압도했습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위압감을 느낄 만한 풍경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저는 이런 콘크리트 덩어리 따위를 보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닙니다.

곧바로 손을 들어 택시를 잡은 저는, 기사님께 가지고 있던 P씨의 명함을 내밀었습니다.

 

“이 곳으로 가고 싶어요.”

 

 

 

P씨의 회사는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있었습니다. 사전에 연락도 하지 않고 막무가내로 찾아온 것이기에, 택시에서 내린 뒤 저는 지금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를 잠시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전혀 쓸데없는 고민이었어요.

왜냐하면, 저는 여기서 운명을 한번 더 마주했기 때문입니다.

 

“아…….”

 

택시에서 내린 저는 무언가에 이끌리듯 선글라스를 쓴 검은 양복의 남자들이 우글우글대는 회사의 정문을 지나쳐, 커다란 건물의 주위를 감싸고 있는 자그마한 정원으로 향했습니다. 어째서 이곳에 온 것일까요, 같은 생각을 하며 화단의 사이를 걷고 있자니, 삭막한 도시의 바람을 타고 코 끝을 간질이는 향기가 느껴졌습니다. 저는 무심코, 고개를 돌려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을 바라보았습니다.

제 시선이 향한 그 곳에는, 벤치에 앉아서 캔커피를 마시고 있는 P씨의 모습이 있었어요. 그 순간, 심장이 멎었다고 느꼈을 정도로, 저는 너무나도 기뻤습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한달음에 그에게 다가가 꾸벅, 인사를 했습니다. 저의 등장이 상당히 놀라웠던 모양인지, P씨는 캔을 입에 댄 채, 두 눈을 꿈벅거리며 저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의 모습이 어쩐지 귀여워 보였기에, 저는 속으로 웃음을 삼키면서 지금까지 제가 생각했던 것을 말의 형태로 꺼내놓았습니다.

 

“어, 사쿠마 마유……양?”

“네, 당신의 마유랍니다! 기억해 주셨군요!”

“이 곳까지는 무슨 일이신가요?”

“저, 아이돌이 되고 싶어서 찾아왔어요. 부모님께 허락도 제대로 받았고, 전에 다니던 사무소도 확실하게 정리했어요. 그러니…….”

“잠시, 잠시만요.”

 

P씨는 마시던 캔 커피를 내려놓고, 쉴 새 없이 말을 쏟아내던 저를 잠시 멈추도록 했습니다. 그리고는 주위를 한번 살펴보더니, 자리를 옮기자며 제 왼 손목을 가볍게 쥐고 걸음을 옮겼습니다.

물론, P씨의 손길이 직접 닿았던 그 리본은 지금도 액자에 넣어서 곱게 보관해두고 있습니다. 그렇게 보관한 리본이 벌써 두 개나 되는군요.

 

그의 손길에 이끌려 도착한 곳은, 커다란 건물의 옆에 딸린, 부속 건물의 1층에 위치한 커다란 카페였습니다. 한산한 시간대인 듯, 카페 안에는 사람이 그다지 없는 편이었습니다.

 

“좀 전의 이야기는 잘 들었습니다. 그 이외에, 좀 더 구체적인 동기가 있으신가요?”

“……당신이 여기에 있으니까요.”

“네?”

 

제 대답이 의외였던 것일까요, P씨는 제가 처음 듣는 얼빠진 소리를 내었습니다.

이런 P씨도 귀엽네요, 우후후…….

 

“마유는, 당신께 운명을 느꼈어요. 당신의 아이돌이 되어 당신께 프로듀스를 받고 싶어요. 그래서 이 곳까지, 당신을 찾아 온 거랍니다.”

“그렇군요…….”

“혹시 안……되나요?”

“아뇨. 거절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제 입장에서는 환영이죠.”

“그러면……?”

“단,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이라는 말에, 저는 모든 감각을 곧추세워 그의 다음 이야기에 집중했습니다.

 

“어떤 조건인가요?”

”당신이 이 길을 걷겠다면, 당신은 태양이 되어야 합니다. 미소라는 빛을 평등하게 뿌릴 수 있는 태양 말이에요.”

 

그 말을 듣고, 저는 잠시 생각에 잠겼습니다.

그러니까, P씨가 아닌 다른 사람을 향해서 웃을 수 있어야 하고, P씨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아양을 떨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인가요?

아아, 이 얼마나…….

이 얼마나 가소로운 조건인가요.

 

“사쿠마 양이 이렇게 직접 찾아와 주신 것은 정말로, 대단히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생각이 정리되면 다시 연락주세요. 수락이든 거절이든, 저는 당신의 대답을 기다리고 또 존중하겠…….”

 

그렇다면, 내가 최고로 빛나는, 당신만의 아이돌이 되면.

 

 “……마유가 최고의 아이돌이 되면.”

“……네?”

“열심히 힘내고, 열심히 노력해서, 마유가 최고의 아이돌이 되면, 그 때는, 마유가 당신만을 바라보아도 괜찮을까요? 당신은 저만을 바라봐 줄 수 있으신가요?”

“……이 길은, 고작 의지만 가지고 어떻게 할 수 있을 정도로 쉬운 길이 아닙니다.”

“’고작 의지’가 아니에요. 마유는, 당신이 마유의 손을 잡아주기만 한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어요. 무엇이든 될 수 있어요. 그러니 마유의 손을 잡아주세요.”

 

그 때, 프로듀서가 저를 바라보던 그 눈빛을, 저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

 

 

 

‘그 날, 당신은 마유에게 아이돌이 되기 위해서는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죠. 작게는 자신의 일상부터, 크게는 자신의 마음까지도.’

 

“네, 프로듀서 씨가 말씀하신 대로, 아직은 이 마음을 숨기겠어요.”

 

이윽고, 그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졌을 무렵, 마유는 조금 더 힘을 주어, 하지만 자신에게만 들릴 정도의 목소리로, 다시 한번 되새기듯 중얼거렸다.

 

”……마유가 아이돌로 있는 동안에는 말이에요. 우후후.”

 

 

 

메모리얼 – 사쿠마 마유의 회상 끝.

 

 

 

이 이야기는 리메이크 이전에 마지막으로 올린 <검정을 가로지르는 빨강>을 약간 뜯어고쳐 보았습니다.

몇몇 내용에서 크게 칼질이 들어가 분량이 반토막이 나긴 했지만......

그래도 리메이크 전보다는 조금 더 즐기기에 편하게 되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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