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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정을 가로지르는 빨강(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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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7-07, 2016 03:58에 작성됨.

 

* [퍼스널리티P 시리즈] 검정을 가로지르는 빨강(上) 에서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

 

 

다음 날, 저는 평소보다 일찍 눈을 떴습니다.

일 때문은 아닙니다. 물론, 어제에 이어서 촬영이 있기는 하지만 결석계는 어제 제출했으니, 오늘은 오후에 바로 스튜디오로 향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저는 왜 일찍 일어났을까요? 그것은 바로, 어제 저녁 잠들기 전부터 계속 고민했던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무시하고 지나가기에는 생각보다 근본적인 문제였습니다.

저는 그 사람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어요.

 

지금껏 맞이했던 그 어떤 아침보다도 맑게 개인 시야로 천장을 바라보면서, 저는 곰곰히 어제의 일을 떠올렸습니다. 복도에서 마주쳤을 때, 그에게서 느꼈던 느낌을.

“키가 크고, 안경을 쓰고…….”

천천히 그에게서 느꼈던 감상들을 단어의 형태로 형상화시켜 늘어놓아 보았습니다. 하지만 곧 그것들이 모두 의미 없는 행동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침대에서 일어나서, 저는 이불 속에서 왼팔을 꺼냈습니다. 잠옷의 소매 아래로 삐죽이 튀어나온 새빨간 리본이 보입니다.

 

그래요, 그 사람과 저는 운명으로 이어진 사이.

운명의 붉은 리본으로 이어진 사이. 그러니, 그것이 정말이라면.

정말로 운명의 만남이라는 것이 있다면, 오늘도 저는 그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거에요.

 

 

 

***********

 

 

 

평소처럼 눈을 뜬다.

눈 앞에 펼쳐진 낯선 천장에 잠시 당황하며 나는 머리맡에 올려둔 시계를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오전 다섯 시. 평소보다 조금 이른 기상이었다.

이불 속에서 크게 기지개를 펴고 과도하게 푹신한 이불을 걷어내고 침대에서 일어난다. 공조기를 꺼 놓았던 탓에 한껏 싸늘해진 방 안의 공기를 가득 들이마셔 약간 잠 기운이 남아 있는 머리를 두들겨 깨웠다.

간단하게 샤워를 마치고, 물기를 털어내면서 욕실을 나오자 테이블 위에 올려둔 업무용 휴대전화의 액정화면이 깜박거리는 것이 보였다.

‘자고 있을 때 전화라도 온 건가.’

그렇게 생각하며 휴대전화의 화면을 켜자, 액정화면에 떠오른 것은 잡지사에서 새벽 2시에 보냈던 메시지였다. 촬영분에 변동이 생겨 오늘 일정을 약간 변경한다는 내용의 메시지를 읽고 나는 곧바로 카운터로 전화를 걸어 6시로 되어 있었던 카에데의 모닝콜을 7시 30분으로 연기시켰다.

“흠, 의외로 여유가 생겨버렸네.”

여유가 생겼다면 내가 할 일은 단 하나.

나는 곧바로 방의 조명을 켜고,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내 전원을 켰다.

 

어제 밀린 업무를 처리하자 어느덧 2시간이 지나 있었다.

카에데에게 일어나면 로비에 있는 카페로 오라는 메시지를 보내두고, 나는 간단하게 짐을 챙겨 카페로 향했다. 씁쓸한 에스프레소를 한 잔 주문하고, 그것을 홀짝이며 최근 재미가 붙은 판타지 소설의 문고판을 꺼내 펼쳐 들었다.

한 시간 정도 지나서, 머그잔에 담긴 것이 커피에서 맹물로 바뀌었을 때, 등 뒤에서 카에데의 목소리가 들렸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마침 챕터가 끝나는 지점이었기에, 나는 책갈피를 걸치지 않고 그대로 책을 덮었다. 책을 덮고 몸을 뒤로 돌리는 바로 그 순간, 책의 뒤쪽 커버에서 작은 쪽지 하나가 툭 떨어졌다.

“어? 이게 뭐지?”

그 쪽지를 줍는 사이, 목소리의 주인은 뚜벅뚜벅 걸어가 내 맞은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하아~”하고 무겁게 한숨을 내쉬는 맞은편의 그녀를 향해, 나는 쪽지를 품 속에 집어넣으면서 아침 인사를 건네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잘 잤어요?”

“네에……그럭저럭이요.”

몽롱한 듯 눈을 깜박거리면서 그녀, 카에데는 힘없이 대꾸한다. 그런 그녀에게 메뉴판을 내밀자, 카에데는 “괜찮아요”라면서 그것을 다시 이쪽으로 되돌렸다.

“잠자리가 불편했습니까?”

그러자 그녀는 고개를 가로젓는다.

‘그러면 뭐가 문제였을까? 혹시 옆 방에서 이상한 소리라도?’

그런 생각을 하는 내 표정을 읽은 것인지, 그녀는 또다시 하품을 하면서 말을 꺼냈다.

“침대가 너무 편한 거 있죠……푹신푹신, 둥실둥실, 몇 번이나 잠을 설쳤는지 모르겠어요.”

“하하, 그런 거였군요. 뭐, 차차 익숙해지겠죠.”

“누워있을 때의 감촉이 너무 좋아서 말이죠. 잠을 깨고서도 한참이나 이불에서 못 나왔어요.”

“이해합니다, 그 기분.”

“으으, 프로듀서는 이상하게 여유만만하네요.”

“뭐, 저야 왕년에 이런 곳에 자주 다녔으니까요. 적응 못 하면 안 될 정도였죠.”

나는 그녀의 등 뒤로 보이는 디지털 시계를 확인했다. 시각은 오전 8시 10분을 막 지나가고 있었다.

“아침식사는 어떻게 하실래요? 일단은 일정이 조금 바뀌긴 했습니다만.”

“어떻게 바뀌었나요?”

“오전 추가분 촬영이 없어지고, 곧바로 오후에 샘플 확인하고 마무리하는 쪽으로 변경됐어요. 어제 촬영분이 생각보다 많았다고 하더라구요.”

“어쩐지, 어제 너무 많이 찍었다 싶었어요.”

잠시 말을 멈추고 그녀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조심스러운 말투로 내게 이렇게 제안했다.

“그럼, 아침은 넘기고 점심을 조금 이르게 먹어도 될까요?”

“뭐, 오늘은 일단 촬영은 없을 테니 괜찮습니다만, 타카가키 씨는 괜찮겠어요? 배 안 고픕니까?”

“네. 어제 조금 과하게 먹은 것 같아서요…….”

“그랬나요……?”

나는 어제 저녁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번화가에서는 그녀가 딱히 뭔가를 먹거나 마셨던 적은 없었다. 그렇다면 호텔에서의 석식이 그녀의 배에 안 맞았던 것일까.

“그런가요. 그럼 다음부터는 식사장소도 조금 고려를 해야겠네…….”

“아, 아뇨! 식사 자체는 굉장히 좋았는데요!”

“……네?”

“정말 좋았거든요? 그, 맛이라던가, 적당하게 나오는 양이라던가…….”

“그런가요? 그럼 식재료 쪽 문제인가……혹시 속이 안 좋거나 하는 증상은 없습니까?”

“아, 아뇨. 그런 것도 아니고……그, 그러니까, 분위기의 차이라고나 할까…....”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뭔가 설명하기 힘드네요”라고 덧붙이며 내게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어째서인지 다소 횡설수설하는 듯 한 그녀의 태도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테이블 위에 늘어놓았던 내 물건들을 가방 안으로 다시 집어넣기 시작했다.

“뭐, 그 부분은 다음 협의에서 처리하도록 하죠. 그럼 일단 밖으로 나갈까요?”

“네.”

호텔을 나와서, 우리는 가장 가까이에 있는 공원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도심을 흐르는 새벽의 싸늘한 공기가 떠오르는 햇빛에 서서히 가열되는 것이 느껴졌다.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러시아워의 공기를 느끼면서, 마치 세상에서 격리된 것처럼 나와 카에데는 느긋한 발걸음으로 인파(人波)의 격류를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했다.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면서, 내 옆에 서 있던 카에데가 먼저 말을 꺼냈다.

“그러고 보면, 프로듀서가 책을 읽는 건 처음 본 것 같아요.”

“그런가요?”

“네. 지금까지는 계속 노트북이나 휴대전화만 보고 계셨으니까요.”

그녀의 말을 듣고, 나는 지금까지 그녀와 만날 때 내가 어떻게 지내왔는지를 곰곰히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정말로 사적으로 만날 때를 제외하곤 언제나 일거리를 붙잡고 있었던 것 같다.

“……주의하겠습니다.”

“후훗, 앞으로 기대할게요.”

“네…….”

“그런데, 그 책은 무슨 내용인가요? 문고판 치고는 꽤나 낡은 것 같던데.”

나는 가방 속에서 책을 꺼내어 그녀에게 보여주었다. 처음 보는 제목인 듯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린다.

“표지만만 봐서는 판타지 소설 같은데……맞나요?”

나는 그녀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저번에 영업 나갔을 때, 그 근처에 고서점이 하나 있었어요. 골목길 안쪽에.”

“고서점이요?”

“네. 처음에는 그런 가게가 있는 줄도 몰랐는데, 몇 번 왔다갔다 하다 보니까 보이더라구요. 거기서 건졌어요. 정말 운이 좋았죠.”

“후훗, 프로듀서는 그런 걸 잘 찾는 것 같네요. 자주 가는 술집도 그렇고.”

”그런가요? 이거 이래봬도 미국에선 엄청 유명한 책이에요. 초기에 인쇄된 몇 판을 제외하면 대부분 다 하드커버가 있는 양장본으로 출판되서, 문고판으로 편집된 건 본토에서도 어지간해선 구하기 힘들거든요.”

“저도 한번 봐도 될까요?”라며 그녀는 내게 손을 내민다. 그녀의 손에 책을 쥐어주자, 책을 펼치고 페이지를 주르륵 넘겨보던 그녀는 눈살을 찌푸렸다.

“제목만 영어인 줄 알았는데…….”

“하하하.”

횡단보도의 신호가 바뀌고, 나는 그녀에게서 책을 받아 다시 가방 안으로 집어넣었다. 횡단보도의 건너편으로, 공원의 입구를 가리키는 표지판의 모습이 어렴풋이 보였다.

 

 

*******

 

 

집을 나와서, 저는 어제 스튜디오에서 집까지 걸어왔던 길을 그대로 거슬러 걷고 있었습니다.

옷차림은 어제와 똑같은 차림새로 갖춰 입었습니다. 저는 그 사람을 알아볼 수 있지만, 그 사람이 저를 알아보지 못하면 곤란하니까요.

원래대로라면 오늘은 오전부터 실내 스튜디오에서 촬영이 있었지만, 어찌 된 일인지 오늘 아침, 갑자기 연락이 와서 일정이 오후로 밀렸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운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 사람을 찾아갈 시간이 생겼으니까요.

지금, 저는 어제 저녁에 그 사람의 기척을 느꼈던 거리를 지나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이따금씩 왼팔을 살펴보지만, 왼팔에 있어야 할 그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에는 그 사람이 없다는 뜻이겠지요. 저는 제 ‘운명’을 믿고 있으니까요.

실망은 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기대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곧바로 제 마음이 가리키는 다음 장소를 향해 걷기 시작했습니다.

 

어느덧 저는 스튜디오 근처에 있는, 센다이 시내에서 가장 큰 공원에 도착해 있었습니다. 어째서, 하필이면 이 곳으로 온 것일까요? 그 이유는 아마도 제가 모르는 자신만이 알고 있을 것입니다.

공원의 입구를 들어가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등줄기를 따라 짜릿한 전류가 흐르고, 온 몸에 소름이 돋았습니다. 마치 아무도 없는 곳에서 숨겨진 보물상자를 여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그리고 천천히, 저는 저의 왼손을 바라보았습니다.

있어요!

새빨간, 이 새까만 세상에서 그 어느 것보다도 강렬한 빨강으로 빛나는 그것이, 온통 새까만 세상을 가로질러 제 팔에 닿아 있었어요!

저는 그 빨간 것을 따라서 천천히 공원 안을 거닐기 시작했습니다. 서두를 필요는 없어요. 이 세상이, 내 감각이, 그 사람과 내가 같은 공기를 맡고 있고, 같은 하늘 아래를 걷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니 전혀 서두를 필요가 없어요.

이윽고, 저는 그 빨간 것의 시작점에 도착했습니다. 그것의 끝에는,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그 사람이 서 있었습니다. 공원 가운데 있는 호수의 울타리에 기대어 서서, 물 위를 태평하게 떠다니는 오리떼를 바라보는 그는 어제와 똑같은 양복 차림새였습니다. 다만, 차이점이라고 한다면 그 사람의 가슴께에 달려 있는 사원증의 존재였습니다.

그 사람을 향해서 저는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보도블럭에서 나무판자로 바닥의 재질이 바뀌면서 나무와 나무가 뒤틀리는 소리가 끼익, 하고 들렸습니다. 그러자, 그 소리에 반응하여 그 사람은 저를 돌아보았습니다.

“아, 당신은……!”

“우후후, 안녕하세요. 저, 기억하시나요?”

그 사람은 저를 바라보더니, 놀란 듯한 표정을 지어 보입니다. 안경 너머로 저를 내려다보는 까만 눈동자에는 온통 제 얼굴이 비치고 있었습니다.

“어, 그러니까. 사쿠마 마유 씨죠?”

제 이름을 알고 있었어요! 아아, 이 얼마나 운명적인 만남인가요!

너무나도 기쁩니다. 마치 날아갈 듯한 기분에 기쁘고 또 황홀해서, 화악, 하고 얼굴이 뜨거워집니다. 저는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미소를 지으면서 그를 향해 꾸벅, 하고 허리를 숙였습니다.

“네, 사쿠마 마유라고 합니다. 반가워요.”

“반갑습니다. 어제 그렇게 부딪힌 것도 죄송한데 이렇게 먼저 아는 척을 해주니까 고맙네요. 아 참, 저는 이런 사람입니다.”

그는 품 속에서 명함 하나를 꺼내 재게 내밀었습니다.

명함에는 회사의 이름과 주소, 그리고 그의 이름이 적혀 있습니다.

프로듀서, P씨.

P씨라고 하는군요, 당신은. 그의 이름을 알아낸 순간, 꽈악, 하고 왼팔의 리본이 조금 더 강하게 조여드는 것을 느꼈습니다. P씨, 축하해주세요. 우리의 인연이 조금 더 강해졌답니다.

“프로듀서? 누구시죠?”

안경을 사이에 두고 그의 눈을 바라보는 것은 너무나도 황홀한 시간이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것을 방해하는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볼일은 다 보고 오셨습니까?”

“네, 덕분에요.”

어디선가 불쑥 돋아나온 방해물. 아니, 그 여자는 저보다 머리 두 개 정도 키가 큰 사람이었습니다. 비록 모자를 쓰고 있고, 커다란 뿔테 안경을 쓰고 있었지만, 키가 크고 손발이 길쭉길쭉하고 올리브색 머리칼을 가지고 있는 그 사람은 모델이라면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저도 잘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바로, 모델 출신의 아이돌이자 저를 비롯한 아마추어 모델의 우상 중 한 명인 타카가키 카에데 씨였습니다. P씨는 아무래도 이 사람의 프로듀서인 듯 합니다.

“볼일이라니, 어감이 나빠요.”

“뭐 어떻습니까, 볼일보고 볼일이라고 하는 것인데.”

카에데 씨가 가까이 다가가자 P씨는 기다렸다는 듯 손에 들고 있던 작은 손가방을 그녀에게 건네주었습니다. 카에데 씨는 여성 모델 중에서도 키가 큰 편에 속합니다. 그런 그녀가 바로 옆에 섰음에도 불구하고, P씨는 그녀보다 머리 하나가 더 컸습니다.

그녀는 그가 내민 가방을 받아 들고 샐쭉한 표정을 지으며 팔꿈치로 그를 쿡쿡 찔렀습니다. 잡지 속에서만 보던, 도도한 포커페이스의 모델과 동일인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들 정도의 언행이었습니다. 그녀에게서 저런 표정을 끄집어내다니. 두 사람은, 사실 업무 관계 그 이상으로 가까운 사이가 아닐까요?

……부러워.

“읏……그럼, 하다못해 ‘꽃을 따러 가는 것’이라고 해 주시죠.”

“그럴 거면 처음부터 꽃을 따러 간다고 말해 주세요.”

“흥, 배려심이 없군요? 프로듀서는 그러니까 여자친구가 없는 거에요.”

“없는 게 아니라 안 만드는 겁니다.”

“어머나, 정말로?”

“정말로.”

“아무튼, 여기 이 분께 인사하세요.”

언어의 캐치볼이 끝나고, 그녀는 마침내 저를 바라보았습니다. 저를 바라보는 색이 다른 두 개의 눈동자가 명백한 경계의 눈빛을 띠고 있었습니다.

“어머나, 이 사람은?”

“사쿠마 마유 양입니다. 이번에 함께 촬영한 모델 중 한 분이에요.”

“안녕하세요? 저는 타카가키 카에데라고 해요.”

“안녕하세요오……P씨께 소개받은 사쿠마 마유라고 합니다.”

‘P씨’라는 단어를 꺼내자, 온화한 빛을 품고 있던 그녀의 눈빛이 단박에 날카롭게 번뜩입니다. 금세 본래의 온화한 모습으로 돌아오지만, 제 눈은 속일 수 없어요.

과연, 당신이 그의 곁에 있는 것은, 단순한 업무 관계는 아니라는 뜻이군요.

좋아요, 이 정도의 시련은 얼마든지 넘어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운명으로 엮인 관계이니까요. 자, 보세요. 이렇게, 저와 이 사람의 사이에 이어진 붉은 리본이…….

……

리본이……?

 

 

 

********

 

 

 

 

편집부의 회의실 앞에서 나는 편집장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럼, 2차 샘플은 폐사의 사무실 쪽으로 보내주시면 한번 더 검수해서 답신 드리겠습니다.”

“네,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두 분 모두, 어제랑 오늘 양일간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회사를 대표해서 감사 인사 드립니다.”

정중하게 허리를 숙이는 편집장에게 나 또한 깊게 허리를 숙였다.

“아뇨, 오히려 이쪽이야말로. 여러모로 배려해주셔서 정말로 감사합니다. 마지막까지 폐만 끼쳐드린 것 같아서 죄송하네요.”

흘깃, 곁눈질로 편집부의 문을 바라보며 그렇게 말하자 편집장은 크게 웃으면서 손사래를 쳤다.

“하하, 아닙니다. 그녀 정도의 안목인걸요. 본인의 사진은 스스로 정하게 하는 것도 좋지요.”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저는 먼저 가보겠습니다. 저희 쪽 모델들 일이 남아있어서…….”

“네, 그럼, 다음 번에 또 기회가 되면 뵈었으면 좋겠네요.”

“하하, 그 때는 조금만 싸게 해 주세요.”

“하핫, 선처하겠습니다.”

……이렇게 편집장과 헤어진 것이 한 시간 전.

편집부 밖에 마련된 휴게실에 앉아서 나는 조용히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후강평을 마친 뒤, 카에데는 편집부 안에서 직원들과 함께 샘플을 정리하고 있다. 원래는 나도 함께 동석하기로 되어 있었지만, ‘부끄러운 사진이 많다’라는 그녀의 억지에 밀려 밖에서 기다리는 것으로 타협하기로 했다.

사실은 이쪽도 나름대로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던 것도 있지만.

나는 손에 들고 있는 캔 커피를 작게 흔들었다. 꺼냈을 당시에는 김이 모락모락 올라올 정도로 따뜻했었지만, 이제 와서 깨닫고 보니 반도 채 마시지 않은 커피는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는데, 생각이 길어지고 있었다.

‘사쿠마 마유. 독자 모델, 주 영역은 고스로리 패션. 16세, 153cm. 보기에 따라서는 작고 가녀리게도 보이는 체구……팔려고만 한다면 세일즈 포인트는 충분하다. 재능도 있어.’

내가 그녀에게서 본 가능성은 그녀의 분위기였다. 가위로 잘라낸 듯한 이질적인 분위기. 그렇게 수많은 사람이 다니는 번화가에서도 그녀와 그녀 주위의 공간은, 마치 가위로 잘라낸 것처럼 철저하게 분리되어 있었다.

그렇다. 마치 자기 혼자만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 것처럼 그녀는 세상과 담을 쌓고 있었다. 남들이 안을 볼 수 없지만, 자기 자신 또한 밖을 볼 수 없을 정도의 담을.

‘그녀를 끌어들일 것인가, 아니면 끌어들이지 않을 것인가…….’

물론, 끌어들인다고 해서 그녀가 내 손을 잡을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시도한다면 아마도 그녀가 나를 따라올 가능성은 매우 높을 것이다.

나는 몇 시간 전, 공원에서 그녀와 마주쳤던 때를 떠올렸다.

나에게서 무엇을 본 것인지, 나를 처음 마주친 그녀는 아주 기쁜 듯한 표정을 지었던 것을 기억한다. 하지만 곧바로 카에데를 보았을 때 그녀가 지었던 표정. 아니, 순간적이지만 그녀의 얼굴에서 표정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때의 그 모습 또한, 나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나를 만난 그녀는 무척이나 흥분한 것처럼 보였지만, 카에데를 본 다음에는 어찌된 일인지 시무룩해져서는 곧장 돌아가버렸던 것이다.

그녀를 본 시간은 너무나도 짧고, 그렇기에 섣부른 판단 또한 내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그러한 모습은 어째서인지 내게 무척이나 낯익은 모습으로 다가왔다.

‘……속단하기에는 이르지 않나. 제대로 대화도 안 해봤는데.’

만약, 내 생각이 옳다고 한다면, 나는 그녀를 스카우트할 수는 없다. 아니, 그녀를 위해서라면 스카우트 해서는 안 된다. 단순한 내 욕심 하나로 인해 서로에게 상처만 생기는 선택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칠 무렵, 문득 내가 아무 생각도 없이 저질렀던 행동이 떠올랐다.

오늘 아침, 그녀에게 건네주었던 내 명함이었다.

‘아차……줘서는 안 될 물건을 줘 버렸군…….’

머리를 가볍게 두 번 쥐어박고, 나는 남은 커피를 모조리 마신 뒤 그것을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크게 한숨을 내쉬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풀고 있자니 사무실 안에서 인사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후, 사무실의 문을 열고 후련한 표정의 카에데가 모습을 드러냈다.

“다 했어요?”

“네!”

나는 크게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에게 보라는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번만입니다. 다음부터는 꼭 저도 참관할거에요. 아시겠죠?”

“물론이죠.”

“자, 그럼 이제 집으로 갑시다. 짐 두고 온 건 없죠?”

“없어요!”

“좋습니다.”

 

 

********

 

 

오후의 촬영 중, 제 분량은 생각보다 금방 끝났습니다.

저는 그저,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공허하게 껍데기로만 서 있었을 뿐이었는데, 사진사 씨는 뭐가 그렇게 좋은지 “좋아”를 연발하며 연신 셔터를 눌러댔습니다.

“하아…….”

어제와는 전혀 다른 한숨을 내쉬며 사무소를 나오기 전, 저는 다시 한번 왼손을 바라보았습니다.

역시, 아무것도 없습니다.

어제, 그 사람을 만난 그 때부터 느껴졌던 두근거림 또한 느껴지지 않습니다.

오늘 오전, 공원에서 저는 운명의 이끌림에 따라 그 사람을 만났습니다. P씨를 만났습니다. 저는 너무나도 행복했습니다. 우리를 이어주는 붉은 리본의 존재를,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그 사람을 만난 순간, 모든 것이 흐트러졌습니다.

타카가키 카에데.

대체 무슨 수작을 부린 것인지, 그녀가 나타난 순간, 그녀의 존재를 인식한 순간, 저와 그 사람을 이어주던 붉은 리본이, 뚝, 하고 끊어져 버렸습니다. 아니죠, 끊어져 버렸다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사실은, 녹아들 듯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어떻게 된 일일까요. 분명히 그 사람……아니, P씨와 저는, 분명히 붉은 운명으로 이어져 있었을 터인데, 어떻게 된 일일까요.

‘설마, 마유보다도 그 사람과 더 강한 인연으로……?’

생각을 떨쳐내듯 고개를 붕붕 가로저었습니다.

아뇨, 그럴 리가 없어요.

집으로 향하는 전철을 타기 위해 저는 승강장으로 내려갔습니다. 승강장에 도착하자, 검은 인형들이 하나 둘씩 모여들고 있었습니다. 다시 찾아온 새까만 세상에서 저는 고개를 돌려 승강장에 설치된 시계를 바라보았습니다. 이제 곧 러시아워입니다. 인형들도 집으로 돌아갈 때가 되는군요.

바로 직전 역에 열차가 도착했다는 알림이 들려왔습니다. 저는 승강장의 끄트머리에 서서 열차가 도착하기를 기다리면서, 옆에 차고 있던 작은 손가방에 손을 뻗었습니다.

가방에서 꺼낸 것은 그 사람이 남기고 간 우리들의 인연의 증거. 명함에는 그 사람의 이름과 연락처가 적힌 명함이었습니다. 비록, 그 사람과 저를 이어주는 붉은 리본은 사라졌지만, 이것만 있으면, 저는 얼마든지 그 사람에게 다가갈 수 있어요.

“우후후…….”

그 때, 반대편 열차가 지나가면서 강한 돌풍이 불었습니다. 눈 깜짝할 사이에, 그 돌풍은 제 손에 들려 있던 그의 명함을 빼앗아 허공으로 날려버렸습니다. 허공에서 몇 번인가 춤을 추던 명함은 곧장 선로 아래로 떨어졌습니다.

순간 저는 고민했습니다. 저것을 주워야 할까요? 아니면 그냥 포기해야 할까요?

그러나, 그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사라진 줄만 알았던 붉은 리본이, 지금까지 본 것들 중에서도 가장 새빨갛게 빛나는 리본이 명함을 감싸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것을 놓친다면, 저는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겠지요.

그렇게 생각한 저는 곧장 선로로 뛰어들었습니다. 그리고 명함을 챙기는 것과 동시에, 승강장에 알림 방송이 들려왔습니다.

[지금 열차가 직전 역을 출발합니다. 승강장에 계신 승객 여러분께서는 한 걸음, 물러나 주십시오.]

저는 고개를 들어, 조금 전 제가 서 있던 장소를 바라보았습니다.

이상하네요.

이 승강장, 저렇게 높았던가요?

 

 

 

*********

 

 

 

호텔에서 짐을 챙기고, 체크아웃까지 마친 우리는 택시 대신 지하철로 센다이 역까지 향하기로 했다. 원래대로라면 사무실에서 차량을 제공하기로 했지만, 무슨 일인지 오늘 아침 갑자기 차량에 문제가 생겨 한동안 정비소 신세를 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불행인지 아니면 다행인지, 호텔에서 나왔을 때는 하필 러시아워가 시작되는 시간대였기 때문에 도로는 완전히 꽉 틀어 막혀 있었다. 아마도 회사에서 제공하는 차량을 이용한다 하더라도 움직이는 데는 상당히 스트레스가 쌓였을 것이리라.

“어휴, 슬슬 사람이 모이네요.”

“이제 퇴근시간이란 거죠. 지하철이 혼잡하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승강장으로 하나 둘씩 모여드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카에데에게 대꾸하면서 나는 그녀를 벽면에 설치된 벤치로 안내했다.

“빨리 집에 가고 싶어라~.”

“술은 안 됩니다. 얌전히 집에 가서 쉬세요. 내일 바로 레슨 있으니까.”

그러자, 그녀는 금세 부루퉁해져서 팔꿈치로 내 옆구리를 쿡쿡 찌르기 시작했다.

“프로듀서는 가끔 융통성이 없는 것 같아요.”

“융통성이 있으면 톱 아이돌이 된답니까……뭐 마실래요?”

“아뇨, 괜찮아요. 아까 편집부에서 많이 마셔서.”

“좋겠네요, 누구는 밖에서 캔커피나 홀짝였는데.”

“후훗, 미안해요.”

나는 그녀의 옆자리에 쪼그려 앉아 승강장 내부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직업병이라는 것인지, 이 일을 시작한 다음부터는 이렇게 사람이 모인 곳에 가면 사람들을 관찰하는 것이 일종의 습관이 되어 버렸다.

그 때, 내 시야에 익숙한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붉은 리본을 기조로 한 차림새의 그녀는, 자그마한 체구와 어깨 앞으로 늘어뜨린, 붉은 리본으로 장식된 액세서리를 착용하고 있는, 다갈색의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이었다.

‘저거 사쿠마 양, 맞지?’

그것이 그녀임을 확신한 바로 그 순간, 나는 곧바로 내 눈을 의심했다.

무엇을 본 것인지, 선로를 가만히 바라보던 그녀가 갑자기 지체 없이 곧장 선로를 향해 뛰어내렸기 때문이다. 아무런 전조도 없이 너무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라 나는 한동안 멍하게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내 의식을 흔들어 깨운 것은 열차가 전 정류장을 출발했다는 방송이었다.

“타카가키 씨,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네? 아, 네.”

이상하게 당황하는 내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내 지시에 따르는 카에데를 벤치에 앉혀놓은 뒤, 나는 곧장 선로를 향해 달려갔다. 이제 막 승강장에 도착한 사람들이 무슨 일인가 싶어 나를 바라보는 것이 보인다. 그들의 시선을 무시하고, 나는 곧장 선로를 향해 달려갔다.

문득 뒤를 돌아보자, 시야의 한 켠에서 벤치에 앉아 있던 카에데가 당황하며 일어서는 모습이 보인다.

승강장의 가장자리에 도착한 뒤, 혹시나 싶어 고개를 돌려 선로의 안쪽을 바라보자, 저 멀리서 다가오는 두 개의 광원이 어렴풋이 눈에 들어왔다.

“사쿠마 양! 제 목소리 들립니까?”

“……P씨……?

내 목소리에 반응한 것인지, 선로에 주저앉아 있던 그녀는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그녀의 얼굴에 꽃이 만개하듯 미소가 번졌다.

‘정말로 아름다운 표정이다.’라고 한 순간 생각했지만, 지금의 상황이 곧바로 내 머릿속에서 그런 생각을 지워냈다.

“어서 이쪽으로 오세요! 끌어 올려 드릴 테니!”

나는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 일어나려고 했다.

“아얏!”

몸을 일으키는 순간, 그녀는 크게 휘청거리고는 다시 선로 위로 쓰러졌다. 발목을 움켜쥐고 있는 모습을 보아하니 자갈투성이인 선로 위로 뛰어내리면서 발목을 접질린 모양이다.

“이런……!”

승강장의 가장자리에서 내려다 본 선로는 생각보다 깊었다. 대략 1.6미터 정도의 깊이. 그녀의 체구를 보면, 올라오기는커녕 뛰어 내리는 것도 잘못하면 다리에 무리가 갈 수 있는 행동이었다.

뒷일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이미 여기까지 온 이상, 그녀를 못 본 체 한다는 것 또한 생각할 수 없다. 생각보다 더 빠르게 결단을 내린 나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 곧장 선로로 뛰어내렸다.

“프로듀서!!”

등 뒤에서, 다급하게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그 사람의 모습은 이미 모여드는 인파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지금쯤 인파의 뒤에서 다급하게 나를 부르고 있을 그 사람에게, 나는 들리지 않을 말을 마음 속으로 전했다.

괜찮아요. 걱정 마세요.

선로에 착지하고, 나는 또다시 터널 안쪽을 바라보았다. 두 개의 점으로만 보이던 불빛은, 어느새 귀를 기울이면 덜컹거리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올 정도로 가까워져 있었다.

 

 

 

**********

 

 

 

“사쿠마 양! 제 목소리 들립니까?”

지금 제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저는 행복감에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습니다.

제가 손 안에 꼬옥 쥐고 있는 그 사람의 명함에서 뻗어 나온 붉은 실이, 저와 그 사람의 손을 강하게 동여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목소리를 듣자, 안도감과 행복함, 그리고 만족감이 가슴을 가득가득 채워지기 시작했습니다.

“…...P씨……?”

지금의 제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저는 모릅니다. 하지만, 안경 너머로 제 얼굴을 바라본 P씨의 표정이, 한순간 굳는 것은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렇군요. 당신은, 저의 이러한 감정을 좋아하는군요.

“어서 이쪽으로 오세요! 끌어 올려 드릴 테니!”

그가 저를 향해서 손을 뻗습니다. 새빨간 색으로 저와 연결되어 있는 그 손을 잡기 위해, 저는 몸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 발목에서 닥쳐오는 통증에 저는 저도 모르게 다시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그제서야 발목이 데일 정도로 뜨겁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런……!”

무릎을 꿇고 있던 자세에서 몸을 일으킨 그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는 곧바로 절 향해서 펄쩍 뛰어내렸습니다. 제가 봤을 때는 그렇게 높아 보이던 승강장이, 그 사람이 내려서자 고작 가슴 정도의 높이밖에 되지 않습니다.

“잠시, 실례할게요.”

제 옆으로 뛰어내린 뒤, 그는 저에게 작게 양해를 구하고는 곧장 제 어깨와 무릎 안쪽으로 손을 넣고는, 그대로 저를 들어 올렸습니다.

소위 말하는 ‘공주님 안기’ 자세였습니다.

번쩍, 가볍게 저를 들어올린 그는 곁눈질로 터널 저편을 바라보았습니다. 서서히 가까워지는 열차 소리는 이제 제법 선명하게 들릴 정도였습니다.

행복감에 빠질 새도 없이, 그는 승강장 위에 저를 올려두고는 곧바로 자신도 도움닫기를 하며 승강장을 거슬러 올라왔습니다.

너무도 간단하게, 그리고 눈 깜짝할 사이에.

그는, 또 다시 한번 저를 구한 것입니다.

 

 

 

 

 

그 날의 일이 있고 나서, 어느덧 2주라는 시간이 지났습니다.

다친 발목도 이젠 완전히 나아서 달리는 데도 아무런 지장이 없습니다.

외출 준비를 마치고, 저는 손가방을 열어 ‘그것’이 제대로 들어 있는지를 확인했습니다. 네, 제대로 들어 있네요.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조심해서 다녀오거라.”

부모님께는 아직 말씀 드리지 않았지만, 저는 모델을 그만두었습니다.

하기 싫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저 지금까지 어쩔 수 없이 살아왔던 저에게 있어, 단 한 가지 목표라고 할 만한 것이 생겼을 뿐입니다. 처음에는 저를 만류하던 편집장님은 이런 제 이야기를 듣고는, 자신의 길은 자신이 정하는 것이라며, 오히려 제게 용기 있는 선택을 했다고 격려를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저는 제가 정한 ‘목표’가 있는 곳으로 향하려고 합니다.

도쿄로 향하는 신칸센에 올라타자, 꾸욱, 하고 왼팔이 조여오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이제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습니다. 저와 그 사람을 이어주는 운명의 리본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으니까요.

 

 

 

*********

 

 

 

센다이에서의 촬영 이후 2주가 지났다.

자신에게는 말도 안하고 대뜸 선로로 뛰어드는 것에 적잖이 놀란 듯, 카에데는 돌아오는 내내 팔짱을 낀 채 나랑은 한 마디도 말을 섞지 않았다. 사무실에 도착해서도 계속해서 미안하다고 사과를 한 끝에, 결국 그녀는 ‘연초에 1박 2일 온천여행’을 대가로 마침내 말문을 열어 주었다.

‘……어째서 나도 따라가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지…….’

 

어느덧 코앞으로 다가온 데뷔 무대를 앞두고, 마스터 트레이너의 앞에서 마지막으로 점검을 받는 트라이어드 프리무스의 모습을 나는 트레이닝 룸 밖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비록 ‘와일드 카드’로 오디션을 거치지 않고 참가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 아이들의 실력이 저평가되어서는 안 된다. 이쪽을 얕잡아보고 있을 상대방에게 일격을 가하기 위해서는 목표보다도 조금 더 높은 곳을 바라보고 있을 필요가 있었다.

그 때, 품 속에 넣어둔 업무용 휴대전화가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휴대전화의 액정에 나타난 것은 회사 내부 회선의 번호였다.

“네, 아이돌 부서의 P입니다……정문 보안팀이요? 네? 저를 찾아 온 사람이요……?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네……직접 찾아올 사람이 있었나?”

 

있긴 있었다. 한 사람, 센다이에서부터 이어진 인연이.

“안녕하세요, P씨.”

본관의 정문으로 향하자, 검색대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이 나를 보더니 일전의 꽃이 만개하는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 사람과 눈이 마주친 나 역시 미소를 지으며 그 사람에게 인사를 건네었다.

“오랜만이군요. 사쿠마 마유 양. 다리는 괜찮으세요?”

“네에, 덕분에 이제는 다 나았답니다.”

가까이서 우리를 바라보고 있던 경비팀장이 내게 다가왔다.

“프로듀서 씨, 아는 분입니까?”

“네, 전에 제가 스카우트한 사람입니다. 연락을 달라고는 했는데, 이렇게 직접 찾아올 줄은 몰랐네요.”

그러자 경비팀장은 납득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당신의 명함을 가지고 있길래 무슨 일인가 했지요.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임시 출입증을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잠시 후, 임시 출입증을 가져온 경비팀장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전한 뒤 나는 그녀를 데리고 제 2별관에 위치한 사내 카페로 향했다.

카페의 가장 안쪽 자리에 앉아서, 나는 곧바로 그녀에게 본론을 꺼냈다.

“아이돌이 되고 싶어서 오셨다구요? 모델 쪽은…….”

“그만뒀어요.”

“……그렇군요. 부모님과 상의는 해 보셨습니까?”

“네. 받아주기만 한다면, 얼마든지 괜찮다고 하셨어요. 여기, 동의서도 있답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그녀는 손가방에서 작은 봉투를 꺼내 내게 내밀었다. 내용물을 살펴보자, 그 안에는 정말로 법정대리인의 직인이 들어간 동의서가 들어 있었다. 16살답지 않은 굉장한 행동력에 감탄하여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렇군요. 혹시, 아이돌이 되고 싶은 이유를 여쭤봐도 될까요?”

그러자, 그녀는 단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안경 너머로 내 눈을 정확하게 응시하면서 대답한다.

“당신이 여기에 있으니까요.”

“……네?”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싶어, 나는 그만 얼빠진 소리를 내고 말았다.

“마유는, 당신께 운명을 느꼈어요. 당신의 아이돌이 되어, 당신께 프로듀스를 받고 싶어요. 그래서 모델도 그만두고, 부모님도 설득했답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그녀는 붉은 리본 액세서리를 차고 있는 자신의 왼쪽 손목을 소중하게 쓰다듬었다.

“그렇군요…….”

“혹시 안……되나요?”

“아뇨. 거절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제 입장에서는 환영이죠.”

“그러면……?”

“단,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이라는 말에 그녀의 표정이 진지해진다. 나는 자세를 고쳐 앉으며 안경을 다시 한번 고쳐 썼다.

“어떤 조건인가요?”

”당신이 이 길을 걷겠다면, 당신은 태양이 되어야 합니다. 미소라는 빛을 평등하게 뿌릴 수 있는 태양 말이에요.”

그녀는 잠자코 내 말을 듣고 있었다.

“강요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이 조건을 만족할 수 없다면, 당신은 이 업계에서는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나는 잠시 호흡을 골랐다.

“그러니, 다시 한번 재고해주시기 바랍니다. 다른 동기라면 얼마든지 환영입니다. 하지만, ‘제가 여기에 있기 때문에’라는 이유에서라면, 저는 확답을 드릴 수 없습니다.”

“……둘 다는, 안 되는 건가요?”

“불가능하지는 않겠죠. 하지만, 그렇다고 쉽지도 않을 겁니다. 무엇보다도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당신이 저만을 바라본다 하더라도 저는 당신만을 볼 수는 없습니다. 저는 한 사람의 매니저가 아니라, 이 회사의, 우리 부서의 프로듀서니까요.”

나는 품 속에서 새 명함을 하나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

“사쿠마 양이 이렇게 직접 찾아와 주신 것은 정말로, 대단히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생각이 정리되면 다시 연락주세요. 수락이든 거절이든, 저는 당신의 대답을 기다리고 또 존중하겠습니다.”

그러나, 뜻밖에도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그녀는 자신을 향해 내밀어진 명함을 조용히 내 쪽으로 되돌렸다. 자신의 행동에 당황하는 나를 올려다 보는 그녀의 눈동자에는 강한 뜻이 담겨 있었다.

“……마유가 최고의 아이돌이 되면.”

“……네?”

“열심히 힘내고, 열심히 노력해서, 마유가 최고의 아이돌이 되면, 그 때는, 마유가 당신만을 바라보아도 괜찮을까요? 당신은 저만을 바라봐 줄 수 있으신가요?”

“……이 길은, 고작 의지만 가지고 어떻게 할 수 있을 정도로 쉬운 길이 아닙니다.”

“’고작 의지’가 아니에요. 마유는, 당신이 마유의 손을 잡아주기만 한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어요. 무엇이든 될 수 있어요. 그러니 마유의 손을 잡아주세요.”

그 순간 두근, 하고 심장이 뛰었다. 방긋 웃는 그녀의 미소를 바라보는 내 머릿속을, 마치 먹물처럼 끈적하고 시꺼먼 색을 가진 어떤 기억이 뒤덮는다.

 

[나라는 존재를 인정받을 수만 있다면, 난 무엇이든지 할 수 있어.]

 

그때가 되어서야 나는 그녀를 만났던 공원에서 느꼈던 낯익은 느낌의 정체를 확신할 수 있었다. 그렇다. 그건 다름아닌 동질감이었다. 내가 입을 다물고 자신을 바라보고만 있자 그녀는 내가 말하기를 기다리는 듯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려두고 고개를 들어 나를 마주보았다. 서로를 파악하려는 듯 시선이 뒤섞이고, 잠시간의 정적 끝에 나는 입을 열었다.

“……저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매력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당신은 저를 따라오려고 하시는 건가요?”

그녀는 당연하다는 듯, 일체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너무나도 강한 의지를 담고 있는 그녀의 눈빛을 바라보고 있자니 욱씬, 하고 가슴 깊은 곳이 아릿하게 아려오기 시작했다. 7년 전 묻어두었던 상처가 빼꼼 고개를 내밀고, 끄트머리부터 서서히 벌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이건 거절할 수 없다.

거절했다가는 그녀가 무슨 선택을 할 지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녀를 위해서. 나는 그녀가 잡을 수 있도록 손을 내미는 수 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녀의 얼굴에 또다시 웃음이라는 이름의 발간 꽃이 피었다. 의미를 모른 채 본다면 그 누구라도 매혹할 수 있을 정도의 아름다운 미소였다. 하지만 그것은 그 웃음의 의미를 알고 있는 내게는 오래 된 상처를 자극하는 미소이기도 했다. 마치 쓰라린 소독약처럼.

“지금부터 당장 처리해야 할 일이 많지만, 우선은 다시 한번 인사를 나누죠.”

자리에서 일어나서 나는 그녀에게 욱신거리는 왼손을 내밀었다.

“CG프로덕션, 아이돌 부서 소속 프로듀서 P입니다. 오늘부터 당신, 사쿠마 마유의 프로듀스를 담당하겠습니다. 잘 부탁 드립니다.”

“우후후……잘 부탁드려요, P……아니, 프로듀서 씨.”

나와 마찬가지로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내 손을 맞잡았다.

 

 

 

<끝>

 

 

 

길이 막혔을 때는 뒤를 돌아 과거의 자신에게서 배운다고들 합니다.

처음에 이 시리즈를 쓰기 시작했을 때보다 현격하게 떨어지기 시작하는 퀄리티를 보면서

도대체 뭐가 문제일까 고민을 좀 했습니다. 처음에 쓰기 시작한 글들을 계속해서 다시 보기도 했구요.

그래서 답을 알아내면 좋겠는데, 아직은 잘 모르겠군요. 조금 더 저 자신한테 질문을 던져봐야겠습니다.

 

혹시나 이 글을 읽어주신 분들께서 보이는 것이 있다면 따끔하게 지적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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