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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정을 가로지르는 빨강(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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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7-01, 2016 03:32에 작성됨.

[프로듀서의 P는 퍼스널리티의 P] 시리즈의 프로듀서가 등장합니다.

[밤 바다와 등대] 에서 약 8개월 정도 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

 

 

[마유는 누구에게나 친절하구나? 좋은 아이야.]

 

저를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들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저는 항상 같은 반응을 보입니다. 그 반응이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것이에요. 저는 누구에게나 친절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좋은 아이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저 인형을 인형으로써 대하고 있었을 뿐이에요.

그래요, 온통 새까만 세상에 서 있는 온통 새까만 인형들 말이에요.

하지만 어느 날, 온통 새까만 세상 속에서, 저는 처음으로 ‘그것’을 보았습니다.

언젠가 본 적이 있는, 피보다도 더욱 빨간, 아주 새빨간 색깔의 아름다운 리본을.

 

 

*********

 

 

11월. 그 중에서도 한 주의 시작에 적응하기 시작하는 화요일.

작년 이맘때만 하더라도 슬슬 초겨울로 접어드는, 분명히 아직은 그다지 춥지는 않을 시기였지만 올해의 날씨는 빌딩 사이를 누비는 도시의 삭막한 바람처럼 무척 싸늘했다.

“자, 여기 만두 다섯 개.”

장갑을 낀 큼직한 손이 내민 종이봉투를 받아 들었다. 슬쩍 봉투의 안을 들여다보자, 안에 든 갓 만든 따끈한 만두가 발산하는 열기가 봉투의 입구로 강렬하게 뿜어져 나온다. 그것들이 식기 전에, 나는 재빨리 입구를 꽁꽁 싸매어 닫았다.

“하나가 많네요?”

”한 개는 서비스로 주는 거야. 매운 맛인데, 이런 추운 날씨엔 아주 제격이에요.”

“이야, 감사합니다.”

“젊은이 웃는 게 마음에 들어서 그래. 다음에도 자주 먹으러 와.”

“네, 많이 파세요.”

“그래, 살펴 가시게.”

껄껄 웃으며 손을 흔드는 사장님에게 고개 숙여 인사를 건네고, 나는 가게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가을답지 않은 칼바람이 드러난 목덜미를 사정없이 할퀴었다.

“휴, 춥다, 추워.”

몇 번째일지 모르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나는 여름 정장 위에 걸친 얇은 코트의 옷깃을 세우면서 서서히 붉은 색으로 저물어가는 하늘 아래를 빠른 발걸음으로 걷고 있었다. 횡단보도에 서서 신호를 기다리면서 주변을 돌아보았다. 골목길 입구에 자리한 레코드 가게의 ‘밀리언 셀러’ 코너에 걸려 있는 포스터 한 장이 시선을 끌었다. 포스터 안에 그려진 것은 녹색을 기조로 어깨를 드러내도록 디자인 된 드레스를 걸친 올리브색 머리카락의 여인이었다.

‘발매된 지 한 달 조금 지났는데, 여전하구나.’

나의 첫 번째 아이돌, 타카가키 카에데. 그리고 우리가 만든 첫 번째 노래인 ‘연풍’.

노래를 구하는 것도 고역이었지만, 그 노래를 길들이던 그 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맞은 뺨이 얼얼해지는 것 같았다. 잠시 후 신호가 바뀌고, 길을 건너면서 나는 마지막으로 고개를 돌려 레코드 가게를 한 번 더 바라보았다.

‘뭐, 잘 나가니까 됐지.’

품에 안고 있는 종이봉투에서 새어 나오는 작은 열기를 난로 삼아, 서류가방을 든 손에 한층 힘을 주면서 큰길의 모퉁이를 돌자, 두 블록 떨어진 곳에 커다란 자태를 자랑하는 건물이 서 있었다.

높게 솟아오른 20층짜리 빌딩을 사이에 두고 별관 4동이 마치 성문처럼 동서남북을 둘러싸고 있다. 내가 향하는 곳은 그 중에서 두 번째로 작은 제 1별관. 원래는 부서별 창고가 모여있던 반쯤 버림받은 건물이었지만, 작년 겨울에 아이돌 부서가 신설되면서 해당 별관 전체를 아이돌 부서가 사용하기 시작했다.

별관 입구로 들어서서, 나는 곧바로 엘리베이터의 옆에 있는 계단을 통해 2층으로 향했다. 건물 전체를 아이돌 부서가 사용하고 있다지만, 아직은 아이돌 부서의 덩치가 그다지 크지는 않았기 때문에 1층에는 회사 내부의 자체 스테이지에서 사용하는 촬영 소품을 모아두는 소품 창고가 있었다.

“저 다녀왔어요. 어휴, 쌀쌀해라.”

‘아이돌 부서’이라고 적혀 있는 문을 열고 들어가자, 저마다 시간을 보내고 있던 두 사람이 나를 향해 반갑게 인사를 건네었다.

“어머, 수고하셨어요. 프로듀서 씨.”

문과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아 있는, 댕기머리와 밝은 연녹색 유니폼이 어울리는 사무 어시스턴트 센카와 치히로가.

“수고하셨습니다, 프로듀서.”

사무실 한켠에 설치된 소파의 1인석에 앉아서 잡지를 읽고 있는, 눈물점과 오드아이가 인상적인 아이돌 부서의 유일한 아이돌. 타카가키 카에데가 내게 인사를 건네었다.

“어라, 시부야랑 호죠, 카미야는 아직 안 왔어요?”

“네, 조금 전에 트레이너 씨한테 연락이 왔어요. 마무리 해서 올려 보낸다고.”

“아아, 그렇구나.”

나는 품에 안고 있던, 아직은 온기가 남아 있는 종이봉투를 소파 앞에 있는 탁자 위에 올려두었다. 냄새를 맡은 것인지, 카에데는 이미 읽던 잡지를 내려놓고 테이블에 반쯤 올라선 상태였다.

“타카가키 씨, 센카와 씨, 와서 이것 좀 드세요.”

“네? 뭐에요? 맛있는 건가요?”

“거창한 건 아니고, 오다가 보니까 회사 근처에 만두 가게가 새로 열었길래, 하나씩 사 왔어요.”

“와아! 안 그래도 속이 출출했는데, 감사합니다. 잘 먹을게요!”

나는 종이봉투를 찢어 넓게 펼치고 그 위에 만두 다섯 개를 늘어놓았다.

“아 참, 다섯 개 중 하나는 고추가 들어간 만두니까 조심하세요. 생긴 건 똑같지만.”

내 말에 군침을 삼키며 손을 내밀던 두 사람의 손길이 잠시 멈추었다. 신중한 눈빛으로 만두를 요리조리 살피던 두 사람은 ‘이거다!’라고 말하듯, 제각각 가장 가장자리에 있던 것을 하나씩 집어 들고 입으로 가져갔다.

“으응, 맛있네요, 이거!”

“그러게요. 반죽도 쫀득쫀득하고……맥주가 당기는 맛이군요.”

아무래도 둘 다 꽝을 뽑은 모양이다. 입고 있던 코트를 옷걸이에 걸어놓은 나는 컴퓨터가 켜지기를 기다리면서 호오호오 입김을 불며 소파에 앉아 만두를 먹는 두 사람의 모습을 자리에 앉아서 바라보았다. 그 때, 카에데와 눈이 마주쳤다.

“응? 흐로류서 히는 안 흐세효(프로듀서 씨는 안 드세요)?”

“저는 먹고 왔어요. 맛있으니까 사 왔죠.”

“흐러후나(그렇구나).”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녀는 다시 만두로 시선을 돌렸다.

참 맛있게도 먹는구나, 싶어서 나는 컴퓨터의 전원이 완전히 켜진 것도 잊고 한동안 숙녀 두 사람이 뜨거운 입김을 내뱉으며 만두를 먹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우리 왔어.”

그 때, 사무실의 문이 열리면서 트레이닝복 차림의 소녀 세 명이 한꺼번에 들어왔다. 일행 중 제일 앞에 서 있는, 머리가 길고 키가 큰 아이가 시부야 린, 그녀의 바로 뒤에서 죽을 상을 지은 채 터벅터벅 걷고 있는 아이가 호죠 카렌, 그리고 가장 뒤에 있는, 풍성한 곱슬머리를 하나로 묶어 정리한 아이가 카미야 나오로, 세 명 모두 데뷔를 앞두고 있는 연습생이다.

“으아아, 죽겠다……내가 지금까지 한 트레이닝은 대체…….”

“카렌, 그래도 우리들 중에서 네가 제일 잘 버텼어…….”

“나오나 린은 연습생 된 지 이제 2달이잖아. 나는 반 년째라구.”

비틀거리는 걸음걸이로 투덜거리면서 들어오는 세 명에게 나는 손을 흔들어 주었다.

“셋 다 고생했다. 만두 사 왔으니까 소파에서 그거로 요기라도 해.”

손가락으로 소파가 있는 방향을 가리키며 말하자 언제 그랬냐는 듯, 세 사람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고마워, 프로듀서.”

“만두! 마침 무지 배고팠는데!”

“어쩐지 맛있는 냄새가 난다고 했더니.”

세 사람이 소파로 이동하자, 먼저 와 있던 두 명의 목소리가 들렸다.

“레슨 받느라 수고했어요. 여기요.”

“와, 엄청 크네? 찐빵 같아.”

“이렇게 큰 만두는 처음 볼 만두 하지……후훗.”

칸막이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를 들으면서 서류가방에서 꺼낸 기획서를 마지막으로 검토하던 나는 중요한 사실 하나를 전달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욱! 이거 뭐야!!”

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순간 나오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가방 안에서 저녁으로 먹을까 싶어서 사 두었던 크림빵을 꺼내고, 냉장고에서 물병을 꺼내 나오에게 다가갔다.

“나오? 괜찮아?”

“왜? 무슨 일이야, 나오?”

나는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채 목을 가리키며 손을 붕붕 휘두르는 나오에게 물병을 건네주었다. 식은땀을 뻘뻘 흘리던 나오는 기다렸다는 듯 그것을 홱 낚아채고는 꿀꺽꿀꺽 물을 마시기 시작했다. 정신없이 물을 넘기던 그녀는 푸핫! 하고 숨을 몰아쉬면서,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나를 쏘아보면서 반쯤 먹은 만두를 내게 들이밀었다.

“아아, 진짜! 안 그래도 배고픈 사람한테 이게 뭐야!”

“하하, 미안해. 말한다는걸 깜박했네. 대신에 이거라도 줄게.”

잔뜩 부루퉁해진 나오가 들이민 만두를 받아들고, 대신 아까 꺼내놓은 크림빵을 내밀자 나오의 표정이 한층 누그러졌다. 그러자 옆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나머지 두 명의 눈이 샐쭉해졌다.

“프로듀서, 특별대접은 없다고 하지 않았어?”

“아앗, P씨, 나오한테만? 치사하게!”

“뭐래, 너희는 만두 먹었잖아. 음, 생각보다 맵네 이거.”

나는 나오가 남긴 만두를 대신 먹으며 자리로 돌아가서, 아까처럼 의자에 털썩 앉으며 고개를 돌려 벽에 걸린 스케줄 보드를 바라보았다.

카에데의 이름이 적힌 곳을 제외하곤 아직은 온통 새하얀 스케줄 보드. 하지만 이제 곧 저 새하얀 부분도 검은 글자로 채워질 것이다. 자리에 돌아간 나는 읽다가 내려놓은 기획서를 다시 읽으면서 그녀들이 식사를 마치기를 기다렸다.

마침내 그녀들의 식사가 끝나고, 만족스러운 한숨을 내쉬는 네 사람을 바라보며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거기 네 분.”

“네?”

“응?”

나는 시계를 바라보았다. 사무실에 돌아온 것이 네 시였지만 벌써 오후 다섯 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오늘은 퇴근 전에 조금 할 이야기가 있으니까, 집에 갈 준비 해서 10분 뒤에 회의실에 모이세요.”

 

 

잠시 후, 아이돌 부서의 회의실에는 카에데, 그리고 린과 나오, 카렌이 둥근 탁자에 빙 둘러 앉아 있었다. 가지고 온 음료수를 한 명씩에게 돌리고, 달력이 걸린 화이트 보드를 끌고 온  뒤 비어있는 자리에 앉아서 나는 미팅의 시작을 알렸다.

“자, 우선은. 우리 연습생들부터.”

나는 옆에 쌓아둔 서류더미에서 자료를 꺼내 들었다.

“시부야.”

“응.”

자료를 받고, 그것의 표지를 읽은 린의 표정이 미세하게 밝아진다.

“호죠.”

“어? 응.”

다른 생각을 하고 있던 것인지, 한 박자 늦게 카렌이 반응한다. 마찬가지로 자료를 받아 든 그녀의 표정이 삽시간에 환해졌다.

“뭐야, 다들 왜 저러는…….”

“카미야.”

“응? 아? 응!”

두 사람의 반응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나오에게 마지막 자료를 내밀었다. 머리 위로 물음표를 띄우며 자료를 받아 든 그녀는, 그 첫 장에 인쇄된 글자를 읽자마자 고개를 번쩍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세 사람 중 가장 기대되는 반응이었기에, 나는 팔짱을 끼며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프, 저, 프, 프로, 프로듀서!! 이, 이거 진짜지?!”

“그래.”

고개를 끄덕이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어느새 나를 바라보는 연습생 세 명을 바라보았다.

아차, 이제 연습생이 아니지.

“너희들의 데뷔가 결정됐어. 12월 중순에 있는 아이돌 페스티벌. 거기가 너희들이 데뷔 무대가 될 거다.”

거기까지 말하고, 나는 팔짱을 풀면서 책상을 짚고 일어섰다. 소녀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서로를 바라보았다.

“구체적인 목표도 없는 막연한 길이었지만, 내 억지에도 묵묵히 따라와줘서 정말로 고맙다. 그리고 세 사람 모두, 지금까지 트레이닝 하느라 정말로 고생 많았어.”

나는 책상을 짚고 있는 오른 손을 들어 주먹을 꽉 쥐며 세 사람을 한 명씩 번갈아 바라보았다.

“오늘부터, 너희들은 더 이상 연습생이 아니야. 이제 너희들은 ‘트라이어드 프리무스’다.”

“트라이어드……”

“프리무스……!”

반짝이는 눈으로 자신들의 유닛명을 따라 말하는 세 사람과, 그들의 옆자리에서 흐뭇한 눈빛으로 후배들을 바라보는 카에데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들어올린 오른손으로 등 뒤의 화이트보드를 가볍게 두들겼다.

“목표는 다음 달에 있을 아이돌 페스티벌! 최종적으로는 랭크 인이 목표다. 알겠지?”

“응, 맡겨만 줘. 얼마든지 해 보일 테니까.”

“그럼!”

“이렇게 된 이상, 전력으로 붙어 보이겠어.”

서로를 바라보며 의지를 다잡는 그녀들이었지만, 곧바로 이어지는 내 말에 그들의 표정이 새하얗게 바뀌었다.

“좋아, 그러면 내일부터는 본격적인 ‘프로’의 삶을 가르쳐주마. 걸어서 집에 가는 것도 오늘까지라고 생각하는 게 좋을 거야. 마스터 트레이너의 훈련이 어떤지는 호죠한테 물어보도록.”

“엑.”

”하하, 농담이지? 프로듀서.”

”마스터 트레이너라니…….”

새하얗게 질린 세 사람이 나란히 꿀꺽, 하고 침을 삼키는 모습에 속으로 웃음을 터뜨리면서, 나는 화이트보드를 빙글 돌려 반대쪽 부분이 드러나도록 뒤집었다.

“뭐, 방금 전의 그건 농담이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반복할 테지만, 이번 무대를 기점으로 너희는 ‘프로’가 된다. 즉, ‘공인’이 된다는 말이야.”

“프로……”

”얻는 것도 있겠지만, 아마도 잃는 것이 더 많을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한 가지 내가 확실하게 말해줄 수 있는 건, 적어도 너희들이 후회할만한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야.”

세 사람은 나란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 표정은 여전히 조금 굳어 있었다. 그런 그들을 향해 한번 빙그레 웃어준 뒤, 나는 주머니에서 보드마카를 꺼내어 뚜껑을 열었다.

“어허, 긴장 풀라니까. 그럼 지금부터 대략적인 계획을 가르쳐줄게. 아, 중요한 건 아니니까 그냥 듣기만 해 둬. 앞으로 어떻게 할 건지는 알아둬야지.”

“네!”

 

 

린, 나오, 카렌. 아니, 이제는 ‘트라이어드 프리무스’가 된 그녀들을 먼저 집으로 돌려보낸 뒤 다시 회의실로 돌아오자, 홀로 남아 있던 카에데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발을 앞뒤로 흔들고 있었다. 회의실의 문이 열리는 소리에 반응하여 그녀가 이쪽을 돌아보았다.

“아이들은 잘 보냈어요?”

“그럼요.”

“귀엽네요. 그렇죠?”

“타카가키 씨도 저랬어요?”

“어머나, 제가요?”

“놀랍게도 사실입니다.”

“뭐, 그건 그렇고, 더 늦기 전이 이 쪽 이야기도 끝내죠.”라고 덧붙이며, 나는 짐짓 놀란 척 과장되게 눈을 동그랗게 뜨는 그녀에게 마지막으로 남은 서류를 내밀었다.

“이건……출장 계획서? 센다이 쪽이네요?”

“네. 센다이 지역 잡지사에서 오퍼가 왔거든요. 그래서 이번에 1박 2일 일정으로 그곳에 가게 되었어요.”

일정을 이야기하면서, 나는 며칠 전에 오퍼를 받을 때를 떠올렸다. 따지고 보면 아이돌로써는 보기 드문 패션 잡지에서의 협조 요청이었다. 보통은 이쪽에서 손을 내미는 것이 일반적인 접근이기 때문이다. 물론 최근 몇 달간 급속도로 치솟은 인지도의 영향도 있을 테지만, 카에데의 출신이 꽤나 잘 나가던 모델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아마도 그 쪽의 영향이 더 컸을 것이리라.

“그렇군요. 센다이라……센다이는 온천이 온 천지에……후훗.”

나는 들고 있던 서류에서 눈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센다이’라는 말을 중얼거리며, 한 손으로 입가를 만지작거리면서 종이를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표정이 어쩐지 약간 들뜬 것처럼 보였다.

‘그러고 보니 이 사람 취미가 온천 순회였던가.’

“자, 그러면 간단하게 일정을 말씀 드릴게요. 오래 안 걸리니까 조금만 집중해주세요.”

“네, 후훗.”

 

 

출발 당일.

센다이로 향하는 신칸센 안에서, 묘하게 들뜬 분위기로 창 밖을 바라보고 있던 카에데가 문득 생각난 듯 나를 돌아보았다.

“프로듀서, 그거 알고 계세요?”

“뭐를요?”

커서를 깜박거리는 노트북에서 시선을 떼고 고개를 돌리자, 기다렸다는 듯 그녀가 들이댄 센다이 홍보 잡지의 표지가 내 시야를 가득 채웠다. 표지의 한 켠에서 시선을 자극하는 노란 글자로 적힌 ‘온천 관광 특집’이라는 문구가 인상적이었다.

“센다이는 온천이 유명한 곳이에요.”

“네, 그렇다고 적혀 있네요.”

“그리고 저는, 온천 순회가 취미에요.”

“음, 좋은 취미입니다. 토크쇼에서 써먹기 좋겠네요.”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하고 나는 다시 노트북으로 시선을 돌렸다.

“읏……!!”

“아얏, 꼬집지 마세요. 아프잖아요.”

“사람 마음도 몰라주는 바보듀서는 좀 아파도 되요.”

“너무하네요. 바보라니.”

집요하게 살갗을 꼬집는 그녀의 손길을 피해 왼팔을 이리저리 돌리지만, 결국 내가 먼저 백기를 들었다.

“자꾸 왜 그러세요?”

“이거요, 이거!”

노트북에서 시선을 떼고, 자신을 돌아본 나에게 한껏 볼을 부풀린 카에데는 이번에는 잡지의 페이지를 펼쳐 나를 향해 보란 듯이 내밀었다. 센다이 지역의 유명 온천을 소개해놓은 리뷰 페이지였다.

“가고 싶어요?”라고 묻자, 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재빨리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 그녀에게 빙그레 미소를 지으면서, 나는 “안 되요.”라고 말하곤 곧바로 시선을 내려 다시 노트북을 바라보았다. 카에데는 그러는 내 얼굴을 잡아서 억지로 자신을 바라보도록 빙글 돌렸다.

“왜 안돼요?”

“2일 일정이라고 말씀 드렸잖아요? 촬영은 센다이 시내고.”

“그치만, 여기 보면 도심에서 40분~1시간이면 갈 수 있다는데요?”

“온천을 고작 한 두 시간만 하고 나올 거에요?”

“읏…….”

양쪽 뺨을 누르는 그녀의 손을 풀고, 나는 노트북을 대기 모드로 돌려놓고 덮개를 덮었다.

“……뭐, 그래도 온천에 대한 타카가키 씨의 열정은 잘 알았으니까, 한번 알아보고 그쪽으로 한번 계획 넣어볼게요. 겨울이니까 슬슬 온천관련 기획이 나올 때기도 하고.”

“정말인가요?”

“제가 언제 일로 거짓말 하는 거 본 적 있습니까?”

“아뇨!”

카에데는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그녀에게 담요를 내밀면서 대기 상태로 돌려놓은 노트북을 가방 속으로 집어 넣었다.

“그럼 그렇게 알고 도착할 때까지 쉬고 계세요. 도착하면 그쪽 담당자가 배웅을 나온다고 했으니.”

“네. 고마워요, 프로듀서.”

“별 말씀을.”

 

 

 

*********

 

 

평소보다 약간 이른 시간인 오전 여덟 시.

학교에 결석계를 제출하고 저는 교실로 향하는 대신 곧바로 평소에 촬영장소로 사용하는 스튜디오로 향했습니다. 제가 모델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은 학교에서도 허가해 준 것이기 때문에, 오늘처럼 피치 못할 사정이 있는 경우 결석을 하더라도 생활기록부에 기록이 남지 않는다고 합니다.

오늘의 일은 크리스마스 전후로 발행되는 특집 화보의 촬영입니다.

이 일은 저희 같은 아마추어 모델 입장에서는 ‘프로’로 데뷔할 수 있는 가장 큰 기회이기도 합니다. 특집이라 함은 말 그대로 어느 정도 팔리는 잡지라는 것을 상징하는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정도 팔리는 잡지이면, 그만큼 ‘관계자’의 눈에도 띄기 마련이죠. 무릇 인생이란 것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것이 아니라지만, 이제 막 ‘조금 팔리는 모델’이라는 타이틀을 얻은 우리 독자 모델들은 너무도 쉽게 콧대가 높아집니다.

어리석게도 말이에요.

“아, 사쿠마 양, 어서 와.”

“안녕하세요.”

미리 연락 받은 장소에 도착하자, 조감독님이 저를 보며 인사를 합니다. 모른 체 할 수는 없으니, 마지못해 저도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습니다.

”혹시 제가 늦지는 않았나요?”

“괜찮아. 어차피 게스트도 아직 안 왔으니까. 7시에 도쿄에서 출발한댔으니, 여기에 온다면 아홉 시는 되야 하지 않을까.”

게스트? 처음 듣는 이야기네요.

제 표정을 읽은 것인지, 조감독님은 아하하, 하고 웃음소리를 높였습니다.

“보면 깜짝 놀랄 거야. 아무튼, 먼저 대기실 가서 준비하고 있어.”

“……네.”

 

 

*********

 

 

 

출발한 지 두 시간 정도 지난 오전 아홉 시.

센다이 역에 도착하자, 대합실에서 회사의 관계자가 이미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현장 담당자인 듯, 마중을 나온 사람은 정장이 아닌 사복 차림새의 풍채가 좋은 중년의 남성이었다.

“안녕하세요, CG프로덕션의 타카가키 카에데 씨 일행 되시죠?”

“네. 제가 담당 프로듀서인 P이고, 이쪽이 저희 소속 아이돌인 타카가키 씨입니다..”

“소개받은 타카가키 카에데입니다. 안녕하세요.”

공손하게 허리를 숙이는 그녀와 나를 한번씩 번갈아 바라보면서 그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가볍게 목례하며 악수를 나누자, 담당자는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맞잡은 손을 위아래로 흔들었다.

“와하하! 이거 굉장한데요? 타카가키 양은 사진보다 훨씬 우아하고, 우리 프로듀서 씨는……우와, 덩치가 무슨 운동선수처럼 생겼네!”

“어머, 고마워요.”

“자자,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얼른 이동하죠. 다른 모델들도 지금쯤 도착했을테니.”

우리는 담당자의 뒤를 따라 역의 밖으로 나와 주차장으로 향했다. 주차장의 출구 근처에 주차되어 있는 검은색 6인승 승합차에 담당자가 열쇠를 꽂아 문을 열어 주었다. 카에데가 먼저 올라타고, 뒷좌석의 남은 자리에 우리들의 짐을 실은 뒤 나는 조수석에 올라탔다.

시동을 걸면서 담당자가 재차 확인하듯 말했다.

“일단 스튜디오까지는 제가 운전할거고, 그 다음부터는 매니저가 붙어서 촬영장까지는 이동을 보조해줄겁니다. 계약서는 확인하셨죠?”

“네, 물론이죠.”

승합차가 보기보가 연식이 있었던 탓인지, 가속페달을 밟자 덜컹 하는 소음을 내며 다소 거칠게 나아가기 시작했다. 꼴사납게 휘청거리지 않도록 창틀 위에 달린 손잡이를 잡으면서 나는 룸 미러를 통해 뒷좌석에 앉아 있는 카에데를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뜻밖에도 그녀는 조용히 앉아서 창 밖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스튜디오에 도착하자, 담당자는 곧바로 다음 일이 있다면서 승합차를 가지고 자리를 떠났다. 이제 어찌 해야하나, 싶어서 멍하니 서 있으니, 곧바로 건물 안에서 명찰을 달고 있는 매니저 한 명이 달려나와 우리를 맞이했다. 매니저의 안내에 따라 스튜디오의 사무실에 도착하자 난감한 표정으로 스케줄을 이리저리 확인하던 남성이 우리를 보더니 반가운 듯 만면에 미소를 띄웠다.

“아, 어서 오세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생각보다 도로 사정이 안 좋아서 그만…….”

깊게 허리를 숙여 사과하는 나를 일으켜 세우면서, 남성은 내게 손을 내밀었다.

“괜찮아요. 담당자님께 미리 사정은 들었습니다. 저는 이번 프로그램의 조감독을 맡고 있는 S라고 합니다. 짧은 일정이지만 이틀간 잘 부탁드려요.”

“CG프로덕션의 프로듀서 P입니다. 그리고 이쪽은 이번에 함께하게 될 동 소속 아이돌인 타카가키 카에데 씨구요.”

“안녕하세요.”

나와 가볍게 악수를 나누고, 목례하는 카에데에게 마찬가지로 가볍게 목례를 나눈 뒤 조감독은 가슴팍에 차고 있는 워키토키를 뽑아 들었다.

“일단 대기실로 메이크업 팀을 보내드릴 테니까, 타카가키 씨는 바로 대기실……3B로 향해 주세요. 위치는 천장에 보면 표지판이 있으니까, 그걸 보고 따라가시면 됩니다.”

“3B대기실. 알았어요. 그럼 프로듀서, 저 먼저 가볼게요.”

손을 흔들며 종종걸음으로 복도 너머로 사라지는 카에데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워키토키로 무언가를 바쁘게 이야기하던 조감독이 다시 워키토키를 가슴팍에 꽂으면서 나를 불렀다.

“시간이 약간 지체된 만큼 브리핑을 최대한 조이는 수 밖에 없습니다. 저는 지금부터 제작팀을 소집할 테니 프로듀서 씨도 10분 뒤에 촬영장으로 와 주세요.”

조감독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품 속에서 명함 하나를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그럼 저는 잠시 타카가키 씨의 대기실에 들렀다가 갈게요. 혹시 다른 변동사항이 있다면 이쪽으로 연락 부탁드립니다.”

조감독과 헤어지고 난 뒤, 나는 카에데의 대기실로 향해 그녀의 촬영 준비에 빠진 것은 없는지, 컨디션은 괜찮은지 등의 여부를 확인하고, 곧바로 다시 촬영장을 찾아 대기실을 나섰다.

여기서, 나는 천장에 붙은 이정표만 바라보면서 걸어 다녔기 때문에, 복도의 모퉁이를 도는 순간 맞은편에서 튀어나온 조그만 그림자의 존재를 나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꺄앗!”

“엇?!”

나와 부딪힌 사람은 상당히 빠른 걸음으로 걷고 있었던 것인지 부딪힌 충격으로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시선을 아래쪽으로 내리자 파일을 품에 안고 있는, 작은 체구의 여자아이가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나는 허리를 문지르고 있는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죄송합니다. 괜찮으세요?”

다갈색 머리카락을 어깨 앞으로 늘어뜨리고, 붉은색 헤어밴드를 하고 있는 작은 체구의 소녀는 약간 아래쪽으로 처진 두 눈을 깜박거리며 내 얼굴을 올려다보더니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아, 저기, 그, 그러니까…….”

“……?”

나는 그녀의 안색을 좀 더 살펴보기 위해 자세를 낮추었다.

그러자 그녀는”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라고 말하며, 내 손을 떨쳐내고는 내가 지나왔던 길로 재빨리 사라졌다. 그 순간, 내 손을 떨쳐내던 그녀의 손목에 매여 있는 새빨간 붉은색 리본이 어째서인지 내 눈에 너무도 선명하게 보였다.

“……키 큰 게 죄지.”

‘괜찮았는데. 스카우트라도 해 볼 걸 그랬나.’라며 입맛을 다시는 것도 잠시, 나는 곧바로 이정표를 따라 발걸음을 재촉했다.

 

 

**********

 

 

깜짝 놀랐습니다.

그 분은 온통 새까만 것 천지였던 이 세상에서, 제가 처음으로 본 ‘까맣지 않은’ 사람이었어요.

하지만 그것보다도 더욱 더 저를 놀라게 했던 것은, 그 사람에게서 이어져 나온 한 줄의 가느다란 리본이 제 왼 손목에 둘둘 감겨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리본의 색은 어린 시절 책에서 읽었던 것처럼 아주 새빨갛게 빛나는 붉은 빛을 띠고 있었어요.

“하아, 하아…….”

집합장소까지 잰걸음으로 뛰어나오는 바람에 가빠진 호흡을 고르면서, 저는 리본 장식을 매어놓은 저의 왼 팔을 바라보았습니다.

 

 

**********

 

 

“그러니까, 오늘은 여기서 A팀이 촬영하고, B팀은 바로 출발해서 야외 스튜디오에서 촬영. 내일은 A팀이 야외에서, B팀이 이곳에서 하는 겁니다.”

촬영장에 도착하자, 스태프들이 모여 오늘 촬영에 대한 간단한 브리핑을 하고 있었다. 손에 든 서류를 넘기며 열심히 브리핑을 하던 조감독이 때마침 촬영장에 들어선 나를 바라보더니 이리 오라는 손짓을 했다.

“여러분, 잠시 이 분을 소개할게요. 이번에 게스트로 참가해주신 타카가키 씨의 프로듀서이신, CG프로덕션 아이돌 부서의 P씨입니다.”

“……반갑습니다. 소개받은 P입니다. 앞으로 양일간 잘 부탁 드리겠습니다.”

꾸벅, 하고 허리를 숙이며 인사말을 말하자, 모여 있던 스태프들이 감탄사를 지르면서 박수를 보내왔다. 내가 스태프들과 인사를 나누기를 기다리던 조감독은 내가 마지막 한 사람과 인사를 마치자 기다렸다는 듯, 미리 준비해 둔 5페이지 분량의 종이다발을 내게 내밀었다.

“이거, 이번에 참가하는 인원들 명단입니다.”

“아, 감사합니다.”

 

브리핑을 마치고, 카에데의 준비상태를 점검하기 위해 나는 대기실로 돌아갔다. 문을 열기 위해 문고리를 잡는 순간, 대기실 안에서 두런두런 들려오는 말소리에 나는 문고리를 잡았던 손을 놓고, 그대로 문을 세 번 두드렸다.

“누구세요?”

문 안에서 새어 나오는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의 데굴데굴 굴러가는 듯한 목소리가 아닌 ‘영업 모드’의 우아한 목소리였다. 그렇다면 나도, 지금은 ‘P’가 아니라 ‘프로듀서’가 될 필요가 있다. 방 안에서 들리지 않도록 작게 헛기침을 하고, 최대한 가라앉은 목소리로 질문에 답한다.

“프로듀서입니다. 잠시 준비 상태를 점검하러 왔습니다.”

“아, 들어오세요.”

문을 열고 들어가자, 카에데의 사인이 그려진 CD나 공책 등을 손에 들고 있는 모델들이 일제히 이쪽을 돌아보았다. 외모는 제각각이었지만, 단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모두들 연령대가 17살 언저리로 보인다는 점이었다.

잡지의 표지에 실리는 독자모델의 연령대는 곧 잡지를 읽는 독자들의 연령대를 대변하기도 한다. 처음 기획안을 받았을 때는 막연하게 독자층이 13~15살 정도로 생각했기에 어째서 우리들에게 의뢰를 했는지 의아했지만, 막상 이렇게 눈으로 확인하고 나니 그런대로 납득이 갔다.

비록 아직 많지는 않지만, 부서 매상의 7할을 담당하는 카에데의 주요 팬 층 또한 이 잡지의 연령대와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갑습니다. 저는…….”

“저 분이 바로, 제가 말했던 그 프로듀서 씨랍니다?”

한 걸음 크게 들어와 문을 닫고, 반절 정도 진행된 나의 자기소개는 곧바로 터져 나온 여자아이들의 환호성에 파묻혀 스르륵 사라졌다.

“어, 저기, 여러분. 그러니까…….”

눈을 반짝이며 내 주위로 우르르 몰려드는 아이들을 돌아보면서 난처해하는 나를 카에데는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쿡쿡 웃으면서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은 누가 보더라도 즐기고 있는 모습이었다.

‘대체 날 가지고 무슨 소리를 했길래……?’

곧바로 이어지는 나이는 몇 살이니, 키는 몇이니, 평소에는 뭐 하고 사느니, 등등 난처한 질문의 연속에 쩔쩔매고 있던 나를 구원한 것은 촬영 시작을 알리는 스태프의 방문이었다.

 

 

 

감독이 돌아와 지휘봉을 잡자, 조감독은 이제 자신의 역할은 끝났다며 스태프들의 가장 뒤쪽, 내가 서 있는 곳으로 빠져 나왔다. 감독이라기에 나는 막연하게 다소 나이가 있는 사람을 생각했지만, 촬영장에 모습을 드러낸 감독은 아무래도 임명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많이 쳐 줘 봐야 3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젊은 감독이었다.

“역시, 능숙하네요. 타카가키 씨.”

“아무래도 프로 출신이니까요. 경험이란 게 있겠죠.”

“그렇군요.”

내 말에 동의하듯 조감독은 고개를 끄덕였다.

조감독의 감상처럼 실제로 촬영장에 모인 모델들을 리드하는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카에데였다. 과연 프로 모델로 다년간 쌓았던 경험은 결코 녹록하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촬영 시작 전에 이런 기획은 처음 맡아보는 것이라고 말하던 감독 또한 이 부분을 십분 활용하여, 촬영에 대해서 상의 할 것이 있을 때는 우선 카에데의 자문을 먼저 구하고 있었다.

‘과연, 젊은 나이에 감독의 자리에 오를만한 인재로군. 리더십도 있지만 생각도 적당히 열려 있고.’

촬영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을 보면서, 나는 펜라이트를 입에 물고 아까 전에 받은 참가자 명단을 한 장씩 천천히 넘겨보기 시작했다. 50음도 순서대로 내림차순으로 정리된 명단의 마지막 페이지를 펼치자 낯익은 얼굴이 나타났다.

조금 전, 대기실 복도에서 나와 부딪혔던 소녀의 얼굴이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사쿠마 마유.”

그것이 그녀의 이름이었다.

 

 

*******

 

 

제가 속한 B그룹의 촬영은 예정보다 조금 일찍 끝났습니다. 하지만 촬영을 마치고, 저희들의 인솔을 담당하는 매니저분과 함께 편집부에 들러 샘플을 정리한 뒤, 다시 밖으로 나왔을 무렵에는 이미 해가 완전히 떨어져 하늘이 컴컴해진 뒤였습니다.

“이제 어떻게 할까요오…….”

사무소 앞의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면서 저는 드물게 행선지를 고민했습니다. 이미 시간은 저녁 시간이지만 촬영 중 틈틈이 간식을 챙겨먹었기 때문에 배가 고프지는 않습니다.

평소라면 곧바로 집에 들어갔을 테지만, 어째서인지 오늘은 시간이 제법 늦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집에는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보다도 지금은 먼저 가보고 싶은 곳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 발걸음이 향한 곳은 평소엔 일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면 잘 가지 않는 번화가 쪽이었습니다.

어째서일까요?

저는 왜 그 곳으로 가고 싶었던 것이었을까요?

“하아……앗?!”

꾸욱, 하고 가슴을 조여오는 이유 모를 답답함에 한숨을 내쉬는 찰나, 저는 나도 모르게 스스로가 내뱉은 뜨거운 숨결에 깜짝 놀랐습니다.

 

 

*******

 

 

오늘의 촬영이 마무리 될 무렵에는 이미 석양이 저물어가고 있었다.

전직 프로 모델이자, 현재 잘 나가는 아이돌인 카에데와 함께 일한다는 것이 상당히 긴장이 되었는지, 함께 촬영하던 모델들 중 나이대가 어린 아이들이 좀처럼 긴장을 풀지 못했기 때문이다.

스튜디오에서 나올 무렵에는 붉게 타오르던 하늘은 수평선의 반대쪽에 있는 지평선부터 천천히 검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으응~!”

카에데는 스튜디오를 나서면서 늘어져라 기지개를 폈다. 한껏 뒤로 드러누운 그녀의 모자가 떨어지지 않도록, 반 걸음 뒤에 서 있던 나는 가볍게 그녀의 정수리를 눌러 주었다. 신음소리를 내면서 이리저리 몸을 비틀던 그녀는 푸핫, 하고 날숨을 크게 내쉬면서 다시 원래의 자세로 돌아왔다.

“촬영 수고하셨습니다.”

“간만에 모델 시절로 돌아간 느낌이었어요. 게스트라면서 어찌나 많이 찍어 대는지…….”

“그래도 잘만 리드하던데요? 익숙해 보였습니다.”

“그런 아이들과는 몇 번 호흡을 맞춰 보기도 했으니까요.”

“그렇군요.”

“뭐, 저는 이제 더 이상 모델이 아니니까, 이제 와서는 의미 없는 이야기지만요. 그렇죠?”

나는 과장되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하지만 아이돌 타카가키 카에데는 언제든 모델을 연기할 수 있는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지요.”

“후훗, 그렇게 칭찬해도 아무 것도 안 나와요?”

어깨를 주무르며 푸념하는 그녀에게 미소로 대답하면서, 나는 그녀가 들고 있는 그녀의 짐이 들어있는 가방을 낚아채 어깨에 들쳐 멨다.

“엇차, 알고 있어요. 이제 곧 저녁 시간이니까 바로 숙소로 이동합시다. 근처에 있는 호텔로 예약해 뒀으니까, 체크인하고 거기서 식사까지 하면 될 거예요.”

‘호텔’이라는 말에 카에데의 눈이 반짝였다. 

 

 

스튜디오에서 걸어서 30분 거리에 있는 커다란 호텔.

로비 안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카운터에서 체크 인을 하는 내 옆에서 카에데는 금빛으로 번쩍이는 호텔 내부를 정신 없이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와아, 이렇게 좋은 곳은 처음 와 봐요.”

“아예 처음이에요? 로케이션 촬영 같은 거는 안 했어요?”

“네. 저는 대부분 도내에서만 촬영을 했으니까요. 출퇴근 식이었죠.”

“하하, 그러면 이 참에 호텔 구경 왔다고 생각하시면 되겠네요. 자, 여기 카드 키 받으세요. 사용법은 제가 같이 올라가서 가르쳐드릴 테니까.”

“감사합니다.”

각자의 방에서 간단하게 짐을 풀고, 호텔 안에 마련된 식당에서 식사를 마칠 무렵에는 이미 해가 완전히 떨어져 하늘에 별이 하나 둘씩 보이고 있었다. 식사를 마친 뒤 다시 카에데에게 그녀의 방을 안내해주고, 나 또한 곧바로 내 방으로 들어와서 낮에 입고 있던 정장을 청바지와 후드점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작은 디지털 카메라를 챙긴 뒤, 카에데의 방 앞에 서서 그녀가 나오기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죄송해요, 오래 기다리셨어요?“

“아니요, 저도 방금 전에 나왔습니다.“

이리저리 자세를 바꿔 가면서 10여분 정도를 기다리자 문이 열리고, 마찬가지로 활동하기 편한 복장으로 갈아입은 카에데가 모습을 드러냈다. 올리브색 머리카락을 머리핀으로 틀어 올려 그 위에 야구모자를 쓰고, 색이 옅은 선글라스까지 끼고 있으니, 그녀 특유의 슬렌더한 체형과 어울려 마치 해외여행을 온 외국인 같은 분위기가 풍겼다.

“이 정도면 어때요?”

“뭐, 쉽게 들키진 않겠네요.”

“고마워요.”라며 생긋 웃으며 카에데는 팔짱을 끼고 서 있는 내 모습을 위아래로 쓱 훑어보았다.

“그런데, 프로듀서 씨도 변장이에요?”

“아뇨, 저는 그냥 사복인데요……그렇게 이상해 보입니까?”

“후훗, 농담이에요. 매번 정장만 입고 다니니까 이런 소리나 듣는 거라구요.”

“……선처해보죠.”

“그래요. 자, 그럼 어서 출발하죠? 밤이 너무 늦기 전에.”

고개를 끄덕이고 나는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거울이 있다면 아마 지금 내 얼굴은 상당히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호텔을 나와 센다이 시내의 번화가로 향했다.

“타카가키 씨, 몇 번이나 말씀 드렸지만, 내일 회사로 돌아가기 전까지는 일의 연장선상이란 걸 잊지 말아주세요. 아시겠죠?”

“물론이죠. 확실하게 알고 있어요. 그나저나, 저쪽에 뭔가 재미있는 게 있어 보이는데요?”

분명 출발 전 지금부터 하는 것은 엄연한 업무의 연장이라고 몇 번이나 주의를 주었지만, 정작 시내에 도착하기가 무섭게 그녀는 마치 새장에서 나온 새처럼 여기저기를 신나게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아니, 그러니까……하아.”

매번 무언가 주의를 줄 타이밍이라고 생각은 하지만, 진심으로 즐거워하는 그녀의 미소를 보고 있으면 그럴 마음은 어느 새인가 쑥 들어가버리기 일쑤다. 그래서 나는 주의를 주는 대신 카메라를 들어 그녀의 모습을 렌즈에 담기 시작했다.

레코드 가게에 걸린 자신의 포스터를 바라보며 깔깔대는 모습.

골목길의 노점에서, 적당히 예쁘게 나온 싸구려 장신구를 옷 여기저기에 갖다 대보는 모습.

여덟 달 전의 그녀와 비교하면 도저히 동일인이라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생기가 넘치는 모습을.

렌즈 너머의 나를 노려보며, 미간을 찌푸리면서 나이에 안 맞게 볼을 부풀리는 모습……을?

그 때, 카에데의 등 뒤를 두리번거리면서 천천히 지나가던 어떤 사람의 모습에 나는 눈에서 카메라를 떼고 다시 한번 그쪽 방향을 바라보았다. 내 시야가 끊어지는 그 짧은 사이, 그 사람의 모습은 인파에 휩쓸려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저 정도 체구에 그런 코디가 흔한 건 아니지만……뭐, 그 사람이라는 보장도 없으니. 잘못 본 거겠지.’

잘못 본 건가, 라고 생각하며 다시 카메라를 들어올리자, 이번에는 얌전히 찍혀야 할 피사체가 눈에서 불을 켜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프로듀서!”

“네?”

그녀는 잔뜩 뿔이 난 목소리로 나를 부르더니, 큼직한 걸음걸이로 다가와서는 내가 눈에 대고 있던 카메라를 덥석 잡아 아래로 확 잡아당겼다.

“정말, 아까부터 뭐 하는 거에요? 같이 어울리지는 못할 망정 사진만 계속 찍고.”

“아니, 저 원래 이거 하려고 나왔…….”

“됐고요! 이럴 때는 좀 어울려 주세요!”

“네이, 네이.”

그녀의 손길에 막무가내로 이끌려가면서, 나는 조금 전, 붉은 리본을 감고 있던 그녀가 지나간 방향을 한번 더 바라보았다.

 

 

**********

 

 

“하아…….”

집에 돌아와서, 따뜻한 물이 채워진 욕조에 천천히 잠겨 들어가며 저는 몇 번째일지 모를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가슴의 답답함을 해소하기 위함이었지만, 어쩌다 보니 저는 사무소에서 번화가를 거쳐 집까지, 장장 두 시간 가까이를 걷고 있었습니다.

“결국 못 만났어…….”

새까만 인형들 사이에서 반짝이는 별님들과 함께했던 달밤의 산책에서, 저는 지금까지 어렴풋이 느끼고만 있던 제 가슴의 답답함의 원인을 비교적 확실하게 알 수 있었습니다.

 

-죄송합니다, 괜찮으세요?

 

그 때 들었던 그 사람의 목소리가, 눈을 감으면 아직도 생생하게 귓가에서 메아리 칩니다.

저는 물 속에 잠겨 있는 왼손을 들어올렸습니다. 찰박거리는 물소리와 함께 아무것도 없는 맨 손목이 드러납니다. 아니요, 실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닙니다. 저에게만 보이는 특별한 무언가가 여기에 있어요. 그래요. 저와 그 사람을 연결해줄, 운명의 붉은 리본이 단단히 묶여 있습니다.

당신을 만나기 위해서 찾아갔던 그 거리에서, 저는 이 붉은 리본이 가르쳐주는 당신의 존재를 분명히 느꼈습니다. 비록 마주치지는 못했지만, 우리가 서로 가까운 거리를 지나쳤음을 분명히 느꼈습니다. 당신은 어떤가요? 저를 찾으셨나요? 아니면 저의 존재를 느끼셨나요?

 

만약 정말로 신 님이 계신다면, 저를 용서해 주세요.

 

‘사쿠마 양은 ‘운명의 만남’같은 거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해요?’

‘운명의 만남 따위, 동화책에서만 나오는 이야기잖아요?’

 

저는, 마유는 지금까지 거짓말을 했어요.

 

 

 

-----------> 검정을 가로지르는 빨강(下)에서 계속됩니다.

 

 

*********

 

오랜만에 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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