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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사가 망토 속에 감추고 있는 것 (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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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6-10, 2016 03:53에 작성됨.

 

프로듀서의 P는 퍼스널리티의 P 시리즈의 P가 등장합니다. 인물이 궁금하다면 한번쯤 읽어주시면 도움이 될 수도 있습니다. 

[퍼스널리티P 시리즈] 마법사가 망토 속에 감추고 있는 것(上) 에서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 P가 찌질해 보일 수 있습니다. 아니, 찌질해 보일 겁니다. 아마도.

 

 

 

웃어라, 세상이 너와 함께 웃을 것이다.

울어라, 너 혼자만 울게 되리라.

낡고 슬픈 이 세상에서 기쁨은 빌려야 하지만,

고통은 이미 가득 차 있어 충분하다

 

노래하라, 언덕들이 화답할 것이다

탄식하라, 허공에 흩어지고 말 테니

메아리는 즐거움을 울려 퍼뜨려주지만

근심에 가득 찬 소리는 외면할 것이다.

......

즐거워하라, 그러면 친구들이 늘어날 것이다.

슬퍼하라, 그러면 그들을 다 잃고 말 것이다.

네가 주는 달콤한 술은 아무도 거절하지 않지만

인생을 한탄할 때는 너 홀로 술을 마시게 될 것이다.

......

- E. W. 윌콕스의 '고독(Solitude)' 中

 

 

 

 

사장의 스카우트를 받고, 나는 9살 때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반강제로 떠났던 일본 땅을 20년만에 다시 밟게 되었다. 그리고 일본에 도착한 그 다음날, 나는 기억 속에 남아 있던 ‘그 장소’로 갔다. 비록 20년 전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나를 내친 사람이었지만, 혹시나, 혹은 설마, 하는 마음이 아예 없었다고는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혹시는 역시로 바뀌었다.

 

그 곳에는 아무 것도 없었던 것이다.

어릴 적 보았던 꽃밭도.

어릴 적 뛰놀았던 마당도.

어릴 적……던 그 사람도.

아무 것도 없었다.

 

그 날, 내 추억이 있을 것이라고 막연하게 희망을 가졌던 그 장소에서, 내가 얻은 것은, 이미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정말로 시시한 사실뿐이었다.

너는 이미 혼자라는 것.

 

고향도 없고, 가족도 없고, 추억도 없다.

자, 그럼 이제 나에겐 뭐가 있지?

 

 

 

***********

 

 

 

“……죄송합니다. 잠시만 시간을 주십시오.”

얼떨떨한 표정의 기자와 사진사에게 통보하듯이 말을 내던지고, 나는 의자에 앉아서 흐느끼는 아나스타샤의 손을 반쯤은 잡아 끌며 대기실 밖으로 나왔다. 자판기 옆에 설치된 의자에 그녀를 앉혀두고, 나는 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내 자판기에 집어넣어 핫초코를 하나 뽑았다.

“마실래?”

“……спасибо. 아, 감사, 합니다.”

아나스타샤는 두 손으로 종이컵을 감싸쥐고, 핫초코를 홀짝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요동치던 그녀의 호흡이 점차 가라앉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그녀의 옆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조용히 맞은편 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두 모금째를 마시고, 그녀의 호흡이 완전히 가라앉았음을 확인한 나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그녀에게 내밀었다.

“자, 이걸로 눈물 닦고.”

“……네.”

“코도 풀어.”

“하지만…….”

“적당히 빨아서 쓰면 되니까, 신경 쓰지 말고.”

“감사합니다…….”

곧바로 옆에서 코를 푸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도 없는 복도라서 소리가 크게 울리는 걸 의식하는 것인지 다소 억누른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그녀에게서 축축해진 손수건을 받아 적당히 구겨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이유, 물어봐도 될까?”

“семья́……물어봤습니다.”

“세……? 미안, 뭔지 모르겠다.”

“семья́, 가족……입니다. 기자분, 저희 가족에 대해서 물어봤어요.”

“아…….”

아나스타샤는 가족에 대한 이야기. 특히 러시아 태생인 아버지와 러시아의 이야기를 많이 한다. 타인에게 그런 이야기를 풀어놓을 정도로 그 곳에 대한 애착이 있다는 뜻이다. 신비하고 이국적인 분위기에 가려지기 쉽지만, 그녀도 결국 15세 소녀. 정든 고향과 가족의 품을 떠난 지 다섯 달이나 되었는데 그리울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더군다나 주위의 시선을 과도하게 의식해, 자신을 억누르는데 익숙한 이 아이의 성격을 고려하면, 아무래도 쌓여 있던 그리움은 내 예상보다도 훨씬 컸던 모양이다.

“그래서…….”

아나스타샤의 목소리가 또다시 흔들리기 시작한다. 나는 그녀의 머리를 헝클어뜨리지 않도록 조심해서 쓰다듬었다.

“괜찮아. 말 안 해도 된다. 다 이해했으니까.”

“спасибо…….”

정적이 흘렀다. 짧은 정적을 깬 것은, 잔뜩 풀이 죽은 아나스타샤의 목소리였다.

“……화 안 내시나요?”

“안 내.”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나 역시 딱히 캐묻고 싶은 마음은 없었으므로, 마찬가지로 입을 다물었다. 세 모금 째, 핫초코를 마시는 소리가 들렸다.

“그 정도였으면……집에 가고 싶다고 말을 하지 그랬어.”

“.......”

“아나스타샤?”

“……홋카이도, да́льний, 그러니까, 매우 멀어요. 프로듀서는, 분명히 제가 가고 싶다고 하면 어떻게든 시간을 내 주었을 겁니다. 프로듀서는, доброхо́тный, 아, 친절하니까요.”

“당연하지. 누구 부탁인데.”

아나스타샤는 고개를 들어 내 눈을 마주보았다. 약간 붉은 기가 남아 있지만, 마치 북극해처럼, 깊이를 가진 푸른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저는 말할 수 없습니다. 프로듀서가 쓰러졌을 때, 저도 그 곳에 있었습니다. 프로듀서가 없는 사무실, 굉장히 차가웠어요. 저, 추운 것은 괜찮습니다. 하지만, 차가운 것은, 싫어합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아나스타샤는 내 외투 옷자락을 꼬옥 잡았다.

요전 겨울 라이브 때, 감기에 몸살이 겹쳐서 쓰러졌던 것이 그녀에게는 그 정도로 크게 다가왔던 것일까. 고작 열다섯 살 치곤 참으로 기특한 마음가짐에 나는 나도 모르게 손을 들어 콩, 하고 그녀의 머리를 가볍게 쥐어박았다.

“아읏.”

“어린 녀석이 오지랖하곤……정말이지, 우리 애들은 왜 다 이런 애들뿐인지 모르겠네.”

“……?”

아냐는 나를 올려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마치 고양이 같은 행동에 또 다시 입꼬리를 올리면서, 나는 그녀의 손에서 텅 빈 종이컵을 받아 휴지통에 던져 넣었다.

“나잇값 좀 하라는 말이야.”

“나잇값……? 일본은, 나이도 가격이 있나요?”

나는 의자에서 일어나 무릎을 탁탁 소리나게 털고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건 나중에 닛타한테 물어봐. 자, 가서 하던 거 마무리해야지?”

“네.”

그녀의 손을 잡고, 우리는 다시 대기실로 돌아갔다. 마치 죄라도 지은 것처럼 초조해하던 기자는 화기애애한 모습으로 돌아온 아나스타샤를 향해 가슴을 쓸어내리고는 미안하다며 연신 고개를 숙였다. 우리들은 또 우리대로 시간을 끌어서 죄송하다고 고개를 숙였으니, 그렇게 한동안 누가 더 사과를 잘 하는지 경쟁이 붙을 정도로 서로 연신 사과를 주고받았다.

 

“프로듀서는, 고향이 어디입니까?”

어찌저찌 인터뷰를 마치고, 스튜디오에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조수석에 앉아 있던 아나스타샤가 내게 물었다.

“내 고향? 그건 갑자기 왜?”

“프로듀서는 제 이야기를, 우리 이야기를 항상 들어줍니다. 관심을 가져 줍니다. 그런데, 나는 프로듀서를 몰라요. 저도……알고 싶습니다. 당신에 대해서.”

“나에 대해서……라.”

정지 신호에 맞추어 브레이크를 밟고, 고개를 돌려 나를 응시하는 푸른 눈동자를 바라본다. 그리고 왼손을 들어, 가볍게 손날로 이마를 콩, 하고 맞추었다.

“비밀이야. 안 가르쳐 줘.”

사실은 몰라도 돼, 라고 말하려다가, 살짝 방향을 바꾸었다.

“치사해요, 프로듀서.”

“뭐, 열심히 해서 아나스타샤가 엄청 잘 팔리게 되면, 그 때는 마음이 바뀔지도 모르지.”

“그렇다면 저, 노력합니다.”

나는 마치 복어처럼 볼을 부풀리는 아나스타샤에게서 시선을 돌려 다시 운전을 시작했다. 저 멀리, 프로덕션 본관의 커다란 건물이 보이기 시작했다.

 

“다녀왔습니다. 센카와 씨, 아이들은 다 왔어요?”

“네, 지금 휴게실에서 기다리라고 했어요.”

나는 시계를 다시 한번 보았다. 오후 4시.

‘댄스 레슨이 5시부터니까, 빨리 샘플 확인하고 내려가면 되겠군.’

대기상태로 잠들어 있던 컴퓨터를 두들겨 깨우고, 메일함을 열자 스튜디오에서 보낸 사진들이 도착해 있었다. 그 사이 아나스타샤가 의자를 가져와 내 옆자리에 앉았다. 나는 그녀가 사진을 잘 볼 수 있도록 모니터의 방향을 약간 돌린 뒤, 샘플을 하나하나씩 열어보기 시작했다.

“여기서 여기까지, 괜찮지 않아?”

“아뇨, 이건, 눈이 조금…….”

“내가 봤을 땐 이것도 귀여운데 말이야.”

“므읏, 그래도, 싫습니다.”

“그럼 별 수 없지. 그럼 이 정도만 보내면 되겠지?”

“네, 이 정도면 된 것 같아요.”

결정된 사진들을 메일로 다시 전송하고, 전송한 사진의 사본을 포함한 남은 사진들은 사무실 공용 디스크로 옮겨 저장해 두었다. 나중에 사무실 앨범을 만들 때 써먹을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안녕하세요!”

“안녕, 닛타.”

“Привет, 안녕하세요, 미나미.”

이제 슬슬 아나스타샤를 내려보내야지, 라고 생각한 순간, 사무실의 문이 열리며 미나미가 들어왔다.

“아냐랑 프로듀서? 거기서 뭐 하세요?”

“어제 촬영한 사진 샘플 정리하고 있었어. 닛타도 5시에 댄스 레슨이지? 그럼 내려갈 때 아나스타샤랑 같이 내려가줄래?”

“네, 그렇게 할게요.”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미나미는 아나스타샤에게 손을 내밀었다. 두 사람이 사무실을 나가고, 마치 바통 터치를 하듯 치히로가 응접실에서 들어왔다.

“어머, 아냐는 내려갔나봐요?”

“네. 때마침 닛타가 왔길래 같이 내려 보냈어요.”

나는 모니터를 원래 위치로 돌려놓고, 서류가방에서 브리핑 자료를 꺼내어 책상 위에 늘어놓았다.

”센카와 씨, 휴게실에 있는 아이들 회의실로 보내주세요. 저는 자료 챙겨서 바로 갈 테니까.”

“네, 알겠어요.”

나는 일 끝나면 먼저 퇴근해도 된다는 내용의 쪽지를 치히로의 자리에 남겨두고, 자료를 한번 더 확인한 다음 회의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한 박자 늦게 들어간 회의실 안을 바라보면서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늦었군.”

“자, 그럼 제1회 ‘크리스마스를 재미있게 보내기 위한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브리핑 자료를 가지러 한 박자 늦게 회의실에 도착했더니, 미오가 이미 단상을 점령하고 멋대로 회의를 시작하고 있었다.

“어이, 혼다.”

“네, 프로듀서! 말씀하세요!”

“내가 미팅을 소집한 건 그런 주제를 말하라고 소집한 게 아닐 텐데?”

그러자 미오는 검지손가락을 흔들며 쯧, 쯧, 쯧, 하고 혀를 찬다.

“프로듀서는 낭만이 없네~ 그러다간 여자애들한테 미움받는다구~?”

자신만만한 표정을 짓고 있는 저 이마에 딱밤을 먹이고 싶었다.

“주면 받고 아니면 말고.”

“우우, 프로듀서가 너무해.”

“뭐, 그래도 나쁘진 않네. 계속해봐.”

나는 팔짱을 끼고 등받이에 등을 기대었다. 그것을 OK신호로 받아들인 듯, 기세가 등등해진 미오는 화이트보드를 끌고 와서 자신의 옆에 세워두었다.

“들어봐, 미나밍이랑 아냐를 위해서 내일 저녁에 파티를 할까 하는데, 좋은 의견 있는 사람?”

미오의 의견에, 잠자코 있던 우즈키가 손을 들었다.

“저기, 내일은 저희들 촬영시간이랑 겹치지는 않을까요?”

“에엑, 그 부분은…….”

우즈키의 질문을 받고,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미오는 나를 바라보았다.

“의장, 거기서 나한테 의지하기냐?”

“아잉, 부탁해용!”

“뭐, 오전 촬영이고 토크쇼 형식의 생방송이니까, 어지간한 트러블이 아닌 이상 길어도 정오 전후에는 끝나지 싶어. 아, 그리고.”

팔짱을 낀 자세 그대로 등받이에 드러누우려다 말고, 나는 한 마디를 덧붙였다.

“내일 저녁에 아나스타샤랑 닛타가 영화를 보러 가거든? 계획 짤 때 그것도 감안해서 짰으면 좋겠다.”

“아, 그 부분이라면 괜찮아.” 라며, 카렌이 손을 들었다.

“조금 전에 미나미랑 얘기 끝났거든. 영화 시간을 조금 당겨서 보기로 했어.”

“그럼 다행이군. 의장, 마저 진행하도록.”

“네이~!”

아이들은 이후에는 장식은 뭘 할 건지, 음식은 어떻게 할 건지 등을 간단하게 정하기 시작했다. 나는 의자를 좌우로 흔들면서 이야기가 대충 마무리되기를 기다렸다.

“그러니까, BGM에 애니 노래는 안 넣어도 된다고!”

“에이, 나오도 좋으면서 그런다.”

“안 좋거든?!”

‘음……?’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무언가 가슴 쪽에서 따끔한 것이 느껴졌다. 낯선 통증에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그 한 번을 마지막으로 그 통증은 다시 나타나지는 않았다.

그렇게 30분 정도 시간이 지났다.

“자, 그럼 대충 이렇게 하는 걸로.”

의견을 받아 화이트보드에 이것저것을 적기 시작한 미오는 충실해진 화이트보드를 바라보며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괜찮겠지, 라고 생각한 나는 팔짱을 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이야기 끝났어? 이제 내 차례지?”

내 질문에 미오는 주위를 한번 돌아보았다. 이만하면 충분한 것인지, 다들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으응, 시간 빌려줘서 고마워, 프로듀서.”

나는 묵직한 어깨를 풀면서 천천히 단상으로 다가갔다.

“좋아, 그러면 이제 진짜 미팅을 시작하자. 이봐 캡틴, 선수교체.”

“호잇!”

하이파이브를 하며 자리로 돌아간 미오가 의자에 앉기를 기다리면서 나는 계획이 적힌 화이트보드를 뒤집어 뒷면을 노출시켰다.

“자, 지금부터 내일 촬영에 대한 마지막 브리핑을 시작할게. 우선 대본은 다들 확인했지?”

“”네!””

 

 

“하나, 둘, 셋, 쉬고, 턴! 찍고 턴! 다시 하나! 둘! 셋! 좋아!”

미팅에 참가했던 다섯 명을 돌려보내고 사무실의 지하에 위치한 연습실에 도착하자 미나미와 아나스타샤의 댄스 레슨이 막바지에 다다르고 있었다. 들키지 않도록 살짝 열린 문 틈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매서운 눈빛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던 베테랑 트레이너가 내 인기척을 눈치채고는 거울 건너편에서 슬쩍 눈인사를 보냈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가볍게 목례를 했다.

베테랑 트레이너의 박수소리가 멈추고, 동시에 흘러나오던 음악도 멈추었다. 땀으로 범벅이 된 채 기진맥진하여 쓰러진 두 사람에게, 베테랑의 가혹한 평가가 쏟아진다.

“미나미, 동작에서 동작으로 넘어가는 게 둔해. 지금 네게 감정표현을 요구하지는 않겠다. 우선은 동작 하나하나를 매끈하게 연결시킬 수 있도록.”

“하아, 하아……네……!”

“아나스타샤, 리듬을 타는 건 좋지만, 그 감각에 네 흐름을 잃으면 안 된다. 방금 전에도 턴 하는 과정에서 반 박자 정도 늦었지. 이 부분 참고해서 확실하게 네 것으로 할 수 있도록.”

“стара́ться……저, 노력, 하겠습니다……!”

“좋아, 오늘은 여기까지. 두 사람 다 따라오느라 고생 많았다. 스트레칭 확실하게 하고 돌아가도록!”

“”수고하셨습니다!””

두 사람의 대답에 만족한 것인지, 베테랑 트레이너는 작게 웃으면서 연습실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수고하셨습니다.”

“제가 무슨. 프로듀서 씨가 더 고생이죠. 자, 여기 두 사람의 자료입니다.”

나는 베테랑 트레이너가 건네는 차트를 받아 페이지를 넘겼다.

“보시다시피. 미나미 쪽은 아직 데미지가 덜 돌아온 것 같아요. 아나스타샤는 열심히는 하는데, 뭔가 마음이 꽃밭에 가 있고…….”

“……알겠습니다. 그럼 이번 주 레슨은 오늘까지로 할게요. 내일은 둘 다 휴식을 줘야 할 것 같네요.”

“네, 그럼 그렇게 전해두겠습니다.”

내 말을 듣고 베테랑 트레이너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 참, 프로듀서 씨?”

그녀에게 차트를 건네고, 내가 연습실 안으로 들어가려고 할 때, 그녀가 다시 나를 불렀다.

“네?”

“혹시 내일, 약속 있으신가요?”

“내일요? 무슨 일 있어요?”

“아뇨, 별 다른 건 아닌데……저희들, 가족끼리 파티라도 하려고 하는데 말이죠, 프로듀서 씨도 부르자는 이야기가 있어서…….”

어색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하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또다시 따끔, 하고 가슴이 아렸다.

“……?”

“왜 그러세요? 갑자기 가슴을 문지르시고…….”

“아,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보다 내일 말인데요, 저는 잔업이 있어서 힘들 것 같네요. 그냥 마음만 감사히 받을게요.”

“아아, 역시 그렇겠죠……? 죄송합니다, 쓸데없는 질문을 드려서.”

쓴웃음을 짓는 베테랑 트레이너에게 다시 한번 미안하다고 말하면서, 나는 직원실로 들어가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나 같은 건 그냥 없는 게 나을 텐데. 왜 다들 나한테 관심을 가지는거지.’

 

 

*********

 

 

한편, 프로듀서가 지하로 내려간 사이, 타임카드를 찍은 치히로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회사를 나와 골목길을 걷고 있었다. 회사 근처에 위치한, 개점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선술집을 발견한 그녀는 망설임없이 곧장 그곳을 향해 걸어갔다.

가게의 문을 열자, 딸랑거리는 방울소리가 조금 소란스러운 가게 내부에 울려 퍼졌다. 벽면에 마련된 3인용 좌석에 앉아 있는 두 사람이 그녀를 발견하곤 손을 흔들었다.

“치히로 씨! 여기야!”

치히로가 남은 한 자리를 채우자, 곧바로 그녀의 오른쪽에 앉아 있던 미즈키가 손을 들어 맥주 하나를 추가했다.

“죄송해요, 많이 기다리셨어요?”

“아뇨, 저희도 조금 전에 수록을 마치고 온 참이라서요. 식사 드실래요?”

“네, 주세요. 아직 밥을 못 먹어서…….”

치히로의 왼쪽에 앉은 카에데가 메뉴판을 내밀었다. 치히로는 거기서 적당한 메뉴를 골라 곧바로 주문했다.

“그나저나, P군은 또 잔업이야?”

미즈키의 질문에 치히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에, 미나미랑 아냐의 레슨 끝나면 기숙사까지 바래다주고 퇴근한다는데…….”

“그 사람이 그럴 리가 없죠.”

무거운 표정으로 말하는 치히로의 말을, 카에데가 능숙하게 받는다.

“P군, 겨울 라이브 이후로 계속 야근이지?”

“맞아요. 아니 뭐, 체력이야 이젠 놀랍지도 않으니까 그러려니 하는데, 그래도 한 번 쓰러졌던 사람이잖아요? 걱정되는 게 정상이잖아요? 거기다 슬슬 경리팀에서 야근수당 그만 받아가라고 압박이 들어오는데……직급상 저보다 높은 사람이라 어떻게 할 수도 없다구요. 정말…….”

“아하하, 힘 내.”

“마음 같아서는 저도 도와주고 싶은데, 일을 하면 이상하리만치 제 일만 먼저 끝나거든요……그렇다고 일도 없는데 사무실에 남아 있으면 왠지 미안하고.”

“으응, 그 기분, 나도 알 것 같아. 정말 미안하지 그거.”

“휴우, 아무튼 저도 답답해요. 정말로…….”

울상을 지으며 푸념을 늘어놓는 치히로의 말을, 카에데는 보기 드문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듣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던 미즈키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카에데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카에데?”

“…….”

“얘, 카에데?”

“네, 네엣?!”

“깜짝이야. 무슨 생각을 그렇게 심각한 표정으로 해?”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일 생각을 조금…….”

“뭐야, 지금 자랑하는 거야?”

‘일 생각’이라는 말에, 미즈키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부러움과 아쉬움이 반반씩 섞인 듯한 표정이었다.

“아아, 그러고보니 카에데 씨, 홍백전 나간다고 했죠?”

“네,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네요. 다 프로듀서 덕분이죠.”

“으으, 이럴 때는 정말 분하단 말이야. 난 이제 차트에 이름을 간신히 올렸는데…….”

“경력의 차이죠? 후훗.”

“아악! 저 잘난 척하는 웃음! 두고 봐, 내년 홍백전은 내가 나갈 거니까!”

“그러려면 우선 NG부터 먼저 이겨야 할걸요~? ‘Angel Breeze’의 순위가 지금 몇 위더라……?”

“아아악! 카에데 너, 진짜?! 아 몰라, 난 이제 성탄절부터 신년까지 백수니까 실컷 마실거야! 카에데는 레슨이나 가라지!”

“성탄절......성탄절......? 성에 불이 난 날은 성탄절……후훗.”

미즈키와 카에데가 투닥거리는 모습을 바라보던 치히로는 조금 전, 카에데가 지었던 표정의 의미가 무엇인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 고민은 잠시 후 음식이 나올 때 즈음에는 ‘내일은 뭐 하면서 쉬지?’라는 생각으로 바뀌었지만.

 

 

********

 

 

다음 날, 도내의 모 방송국.

촬영이 끝나고, 청중이 모두 빠져나가고 난 다음에야 스태프들은 분주하게 움직여 무대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토크쇼 형식의 생방송이었기에, 촬영은 예정과 거의 비슷한 시각에 마쳤다.

““수고하셨습니다~!””

촬영을 마치고, 출연진과 스태프들에게 활기차게 인사를 나눈 다섯 명의 아이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나를 향해 우르르 달려왔다.

“프로듀서!”

“그래, 짐은 미리 다 챙겨 놨으니까 빨리 가서 의상 갈아입고 와.”

“응!”

지치지도 않는지, 대기실을 향해 기운차게 달려가는 다섯 명을 바라보면서 나는 수첩에 기록하던 사후강평의 내용을 마저 마무리했다.

‘어디, 오늘은……지금 시장 보고, 저녁에 닛타랑 아나스타샤를 픽업하고, 잔업 좀 하면 끝이군.’

“P씨! 우리 다 왔어!”

“빨리도 갈아입었네. 인사도 제대로 했지?”

“응!”

“좋아, 그럼 어서 이동하자.”

시내를 한 바퀴 돌고, 저마다 두 손 가득 음식이나 소도구를 챙긴 다음 우리는 깔끔하게 정리된 여자 기숙사의 휴게실로 돌아왔다. 평소대로라면 한쪽 구석에서 후미카가 책을 읽고 있고, 햇빛이 내려쬐는 창가에서는 마유가 뜨개질을 하고 있었을 테지만, 유감스럽게도 지금은 둘 다 고향에서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자, 그럼 시작해 볼까!”

어느새 두 팔을 걷어붙인 미오의 기세 좋은 한 마디를 시작으로, 저마다 휴게실의 여기저기에 달라붙어 장식들을 배치하기 시작했다.

“프로듀서, 잠시 이것 좀 옮겨줘.”

“그래. 여기면 되나?”

“응, 좋아.”

“프로듀서 씨! 풍선 좀 잡아주세요!”

“시마무라, 너 그러다 또 넘어진…… ”꺄악!” 늦었군. 안 다쳤어?”

“네에……전 괜찮아효…….”

“시부야, 이 꽃은 어디다 놔둘까?”

“그건 저기 입구 옆에.”

“P씨! 잠깐 이것 좀 잡아줘!”

“야, 호죠! 무거운 거 혼자서 들지 말라고 했지?”

“……”

“카미양, 표정이 왜 그래? 프로듀서가 관심 안 가져줘서 심심해?”

“아, 아니거든? 전혀 그런 거 아니거든?!”

시간이 지나고, 장식이 끝나고 주문해둔 음식이 하나 둘씩 도착하기 시작했다. 미나미와 아나스타샤의 영화가 끝날 시간이 되었기에, 나는 나갈 채비를 한 뒤 미오를 불러 다시 한 번 강조했다.

“혼다, 서프라이즈는 좋은데, 너무 오버하지는 마. 알겠지?”

“알았어, 걱정 붙들어 매!”

“…….”

 

내 나름대로 분위기를 잡아 볼 요량으로 이번엔 회사 차량이 아닌 내 개인 승용차를 이용해 마중을 나갔다. 왼쪽에 운전석이 있는 모델이라 그런지 영화관 앞에 차를 세워 놓고 그 옆에 서 있으니 지나가던 사람들이 신기한 듯 한 번씩 훑어보고 지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이따금씩 휴대폰을 이용해 사진을 찍는 사람도 있었다.

슬슬 시간이 되었을 텐데, 라고 생각하며 시계를 한번 바라보고 있으니, 인파 너머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나미! 저기, 사람 잔뜩 있습니다.”

“여기 뭐 신기한 거라도 있나 봐? 사람이……엑, 프로듀서?”

인파를 헤치고 나타난, 간단한 변장을 하고 있는 미나미는 나를 보곤 깜짝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괜히 말을 길게 했다가는 일이 꼬일 가능성이 있었기에, 나는 대답 대신 뒷좌석의 문을 열고 얼른 타라는 제스쳐를 취했다. 두 사람은 서로를 한번 마주보더니 별 말 없이 재빨리 뒷좌석에 들어가 앉았다.

차량이 출발하고 나서 뒷좌석에 앉아 있던 아나스타샤가 차 안을 둘러보면서 말문을 열었다.

“удивля́ться , 아, 깜짝 놀랐습니다. 사람이 많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프로듀서였을 줄은…….”

“하하하, 놀랐지?”

“저도 깜짝 놀랐어요. 그나저나, 소문으로만 들었는데, 진짜로 외제차 가지고 계시는구나…….”

“뭐, 어쩌다 보니 공짜로 받은 거라서. 이런 건 잘 팔리지도 않거든. 둘 다 아직 저녁 안 먹었지?”

“네.”

“다행이네. 이제 곧 도착하니까, 편하게 있어.”

“아참, 어제 린이 저녁에 할 이야기가 있다고 했는데, 혹시 프로듀서 씨도 알고 계신가요?”

“응, 그것 때문에 너희들 데리러 온 거니까.”

“그렇군요. 일 얘기이려나......?”

"응, 아마 그건 아닐 거야."

 

“자, 도착했다."

기숙사에 도착할 무렵에는 이미 해가 완전히 떨어져 석양도 저물어가고 있었다.

“여기는…….”

“기숙사, 네요?”

“맞아, 기숙사. 자, 일단 들어가자.”

나는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두 사람을 2층의 휴게실로 데리고 갔다. 휴게실의 앞에서, 나는 문고리를 돌리고 두 사람이 먼저 들어가도록 문을 크게 당겨서 열어주었다. 두 사람의 뒤를 이어 들어간 내가 문을 닫자, 어두컴컴했던 휴게실에 전등이 일제히 켜지면서 사방에서 폭죽이 터졌다.

““메리 크리스마스! 미나미, 아냐!!””

“꺄악?!”

“!%!@!!@$!!”

폭죽을 너무 크게 터뜨린 것인지, 미나미와 아나스타샤는 내 뒤에 숨어서 덜덜 떨며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나는 폭죽 세 개를 한 손에 들고 미안한 듯 우두커니 서 있는 린을 향해 나무라듯 말했다.

“너희, 폭죽 너무 많이 터뜨린 거 아냐?”

“나는 잘못 없어, 미오랑 카렌이 부추긴 거야.”

“에에? 그래도 서프라이즌데 이 정도는 해 줘야…….”

“우우……시부린이 우리를 팔았어.”

“난 그냥 사실을 말했을 뿐이야?”

하아, 하고 한숨을 내쉬면서 린은 들고 있던 폭죽을 쓰레기통으로 집어 던진다.

“저기, 린, 혹시 하고 싶은 이야기란 게……?”

“으응, 우리는 다들 집이 이 근처인데, 미나미랑 아냐는 집이 멀잖아? 그러니까, 너희를 위해서 파티라도 열자, 라고 미오가 제안해서 말이지.”

린의 이야기를 듣는 미나미와 아냐의 눈시울이 조금씩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랬구나……고마워, 고마워요. 여러분.”

“спасибо, 고맙습니다, 정말로…….”

“아, 아하하, 이런 분위기, 나랑은 안 맞는데~?”

감격에 젖은 눈물을 흘리는 두 사람의 포옹을 받으면서, 미오는 그들의 등을 토닥거렸다.

 

 

크리스마스 파티가 시작되었다. 비록 머릿수는 일곱 명뿐인 파티였지만, 그래도 워낙 활발한 아이들이 모여 있다 보니 금세 떠들썩한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부럽다.

 

욱씬.

 

아이들이 웃고 떠드는 곳에서 조금 떨어진 소파에 앉아, 무알콜 샴페인을 홀짝이며 그 모습을 바라보던 내 가슴에 무언가 날카로운 통증이 지나갔다. 아니다. 통증이 아닌 무언가. 비슷하지만 다른 무언가였다.

잘못 느꼈나, 라고 생각하며, 아니, 그것을 애써 무시하며, 나는 여전히 즐겁게 웃고 떠드는 아이들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즐거워 보인다.

부럽다.

아니다.

저기는, 내가 끼일 자리가 아니다.

주제를 알아야지.

 

욱씬, 욱씬.

 

마치 늑골을 후벼파는 듯한 격렬한 통증에 나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절반쯤 남은 샴페인 잔 아래에 주의사항을 적어 둔 쪽지를 남겨두고, 나는 그녀들이 눈치채기 전에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기숙사를 벗어났다.

 

 

 

 

나는 비틀거리는 걸음걸이로 정신 없이 걸음을 옮겼다.

정신을 차려 보니, 내가 향한 곳은 집이 아니라 사무실이었다.

‘그래, 맞아. 여기가 내가 있어야 할 곳이지.’

어느 새 통증은 씻은 듯이 사라져 있었다.

“자, 일하자 일.”

나 자신을 채찍질하듯 중얼거리면서, 사무실의 불도 켜지 않은 채 나는 내 자리에 앉아 컴퓨터의 전원을 켰다.

 

모니터에 전원이 들어오고, 밝아진 검은 화면에 일순간 내 얼굴이 비쳤다.

가져서는 안 될 질투심에 젖은 추악한 몰골이 비쳤다.

 

부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친구도, 고향도, 가족도, 모두 가지고 있는 그들이, 그녀가.

너무나도 부럽고, 너무나도 샘이 나서.

이 좁아터진 속으로는, 도저히 그것을 보고 있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가슴의 아픔은 고독(孤獨)의 증거. 

 

마법사는 빛나는 세계로 가는 길을 열어줄 뿐, 결코 그 길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

그의 망토 아래 숨겨진, 열등감과 고독에 얼룩진 그의 본성이 드러나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

 

 

 

얼마나 웃고 떠들었을까.

파티의 열기가 식어갈 무렵, 그녀들은 뒤늦게 눈치챘다.

한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프로듀서?”

 

 

 

<끝>

 

 

조잡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번 테마는 '외로움'입니다.

언뜻 완벽초인처럼 보이지만, 이 시리즈에서 프로듀서는 가족도 없고, 고향도 없고, 친구도 없습니다. 한마디로, 인간관계가 파탄나 있는 상태입니다.

개인적으로 타지생활을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게 연휴였어요.

차라리 그날 당직이라도 시켜줬으면......했거든요. 그 경험을 바탕으로 적어 보았습니다.

그리고 러시아어 어려워요... 왜 아냐가 주연인 2차가 멸종직전인지 알 것 같습니다.

 

여담이지만, 처음에는 1인칭이 더 쉽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써보면 1인칭보다 3인칭이 더 괜찮은 물건이 많이 나오네요.

정말 신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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