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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어져 본 사람은 일어서는 법을 안다(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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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5-22, 2016 03:39에 작성됨.

* 프로듀서의 P는 퍼스널리티의 P 시리즈의 P가 등장합니다. 인물이 궁금하다면 한번쯤 읽어주시면 도움이 될 수도 있습니다.

* 시기상으로는 [밤 바다와 등대] 의 약 2년 뒤, [익숙한, 하지만 평소보다 푸른 하늘] 과 [태양의 질투(Jealousy)] 의 약 반 년 뒤입니다.

* 시리즈물이므로 가능하면 읽어주시는 쪽이 즐기는 데 더 도움이 될......수도 있습니다. 즐길만한 가치가 있는지는 제쳐두고......

* 이치노세 시키 주연의 [맺히기 전부터 꽃봉오리가 품고 있던 것]은 시간상으로 훨씬 뒤의 일입니다.

* 역시나 글쓴이 주관의 개똥철학이 있습니다. 비웃어주셔도 됩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멘토’라는 단어가 있다.

고대 그리스의 문학 ‘오디세이아’에서 유래한 말로, 현명함을 겸비하며 정신적으로나 내면적으로도 신뢰할 수 있는 상대를 뜻하는 단어.

실패했을 때, 넘어졌을 때, 힘들어 주저앉고 싶을 때, 그 사람의 손을 잡아 일으켜주는 것이 멘토의 역할이다.

 

가끔, 나는 멘토라는 소리를 듣는다. 지금의 내가 누군가의 손을 잡아 앞으로 이끌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렇게 할 것이기 때문일까.

그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나는 나 자신에게 물음표를 던진다. 내가 멘토라는 명칭을 들을 자격이 있을까? 현명하지도 않고, 박식하지도 않으며, 실패밖에 해 보지 못한 나인데.

누군가를 이끌면서, 처음으로 마주하는 실패의 벽에 비치는 내 모습을 향해, 오늘도 나는 나 자신에게 물음표로 가득 찬 종이를 내민다.

 

 

**************

 

 

“결과를 발표하겠습니다.”

미나미의 옆에 서서, 프로듀서는 오디션 담당자의 발표를 기다렸다.

“참가번호 7번, 11번, 40번, 52번. 축하드립니다.”

미나미는 조용히 연습복의 가슴팍에 달린 번호표를 바라보곤 고개를 돌려 프로듀서를 올려다 보았다.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담담한 표정의 프로듀서가 있었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뜨릴 듯, 자신을 올려다보는 그녀의 축 늘어진 어깨를 토닥이며 프로듀서는 그녀를 데리고 오디션장을 나왔다.

“뭐, 마실 거라도 사 줄까? 커피 마실래?”

“아뇨……. 마음만 감사히 받을게요.”

오디션장의 입구에 미나미를 세워두고, 프로듀서는 그녀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여기서 잠깐만 기다리고 있어. 차 가져올테니까.”

“네.”

 

돌아가는 차 안에서, 정지 신호에 멈춰선 틈을 타 프로듀서는 운전하는 내내 고개를 숙인 채 발끝만 바라보고 있는 미나미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오늘 고생했다. 내가 봤을 땐 좋았는데 말이야.”

“죄송해요…….”

“뭐, 이런 것도 있는 법이지.”

“…….”

“너무 기죽지 마. 언제나 이기는 것도 아니잖아?”

“네…….”

입술을 앙다물면서 미나미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작게 웃은 프로듀서는 그녀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주곤 다시 운전대를 잡았다.

“잠깐 사무실에 들렀다가 집에 데려다 줄게. 피곤하면 한숨 자고 있어. 담요는 뒤에 있으니까.”

“……고마워요, 프로듀서 씨.”

“고맙긴. 잠깐 내려놓고 쉬어.”

회사에 도착할 무렵, 미나미는 조수석에서 담요를 덮은 채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 그녀를 깨우지 않도록 가능한 조심해서 문을 닫고, 프로듀서는 별관의 사무실로 올라갔다. 미리 만들어둔 몇 가지 서류와 노트북을 챙겨 가방에 넣고, 타임카드를 찍고 나서 상태표시를 ‘퇴근’으로 맞추어 두었다.

 

“닛타, 다 왔어.”

대문 옆에 차를 세우고, 프로듀서는 운전석에서 내려 조수석의 문을 열고 미나미의 어깨를 흔들어 깨웠다.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보던 미나미는 자신의 집 앞이라는 것을 인식했는지, 크게 숨을 마시면서 정신을 차리려는 듯 고개를 붕붕 내저었다.

“…..고맙습니다.”

“내일. 그러니까 금요일 레슨은 일단 다음 주로 미뤄둘게. 내일이랑 주말 동안 쉬면서 생각 좀 정리하고……다음주에 만나자.”

“네.”

대문 옆에 기대어 선 프로듀서는 힘없이 꾸벅 인사를 하는 미나미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미나미가 현관문 앞에 섰을 때.

“닛타!”

자신을 부르는 큰 목소리에 미나미는 약간 놀란 듯 몸을 돌려 프로듀서를 바라보았다.

“오늘 일, 너무 가슴에 담아두지 마. 그냥 잊어버려. 알겠지?”

“…….”

“닛타.”

“……죄송해요.”

대답 대신 사죄의 말을 남기고 미나미는 꾸벅, 고개를 숙이며 현관문 너머로 사라졌다. 혼자 남은 프로듀서는 멀뚱히 현관문을 바라보다가 휴우, 하고 한숨을 내쉬며 운전석으로 돌아왔다.

빼 두었던 차 열쇠를 다시 꽂아넣고, 그는 휴대전화를 조작해 어떤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십니까, 오늘 참가했던 CG프로덕션의 프로듀서 P입니다. 네. 다름이 아니라……네. 하하하, 알겠습니다. 그럼 다음에 반드시. 네. 감사합니다.”

잠시 후 통화를 마친 프로듀서는 휴대전화를 조수석에 대강 던져놓고 꺼 두었던 자동차의 시동을 다시 걸었다. 이제는 반쯤 습관이 된, 핸들에 머리를 기댄 자세로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던 그는 또다시 한숨을 내쉬면서 핸들을 돌렸다.

 

다시 사무실로 돌아온 프로듀서는 타임카드와 상태표는 그대로 둔 채, 문만 열고 들어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키보드와 마우스를 한쪽으로 밀어내고,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어 그 앞에 늘어놓은 그는 목과 어깨를 빙빙 돌려 가볍게 풀어주고 컴퓨터의 전원을 켰다. 컴퓨터가 부팅되는 사이에 늘어놓은 서류를 한 뭉치씩 집어 한 장씩 넘겨보았다.

부팅이 완료되자 프로듀서는 서류를 내려놓고 마우스를 조작해 메일함을 열었다. 조금 전에 도착한 메일이 있음을 확인하고, 그것을 열어 내용을 훑어보았다.

 

<참가번호 31번 닛타 미나미>

1. 동작 연결 미숙

2. 절정 부분 임팩트가 약함

3. 보컬 불안정

4. 시선처리 불안정

 

결과: 불합격

 

키보드와 마우스에서 손을 떼고, 프로듀서는 안경을 벗어 내려놓은 뒤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총체적 난국이었다.

‘대체 어디서부터 엇나간 거지…….’

양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지르며 가만히 고민하던 프로듀서는 잡생각을 떨쳐내려는 듯 크게 심호흡을 하고는 곧바로 행동을 시작했다. 책상 위에 놓인 업무용 전화기를 들고 트레이너와 연결된 버튼을 눌렀다. 몇 번인가 신호음이 가고 사무실에서 휴대전화로 송신이 전환되었다는 메시지가 들려왔다. 그리고 잠시 후, 수화기 너머에서 트레이너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 안녕하세요?”

-프로듀서 씨? 무슨 일이에요?

“하하, 별 일은 아니고요. 최근 닛타의 레슨에서 혹시 부자연스러운 부분이나 어색한 점이 보이지는 않았나요?”

-으음, 글쎄요……저도 그렇게 핀 포인트로 기억해낼 정도로 기억력이 좋은 건 아니라서……죄송해요. 혹시 급한 일인가요?

“아뇨, 딱히 급한 건 아닙니다.”

-그러면 내일 한번 밑으로 내려오실래요? 미나미의 최종 리허설은 영상 녹화해둔 게 있으니까, 그걸 보면 될 것 같아요.

뜻밖에 들려온 좋은 소식에 프로듀서는 조용히 입꼬리를 올렸다.

“……그런 게 있었군요. 알겠습니다. 내일 내려가기 전에 따로 연락 드릴게요.”

-네~ 그럼 내일 봬요~!

수화기를 내려놓고, 프로듀서는 한결 가벼운 표정이 되어 등받이에 등을 기대었다.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돌파구를 찾을 방법이 되었을 것이다.

“잠깐만, 설마…….”

그 때, 스쳐 지나가듯 어떤 생각이 떠올랐지만, 프로듀서는 그 생각을 떨쳐내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지. 그 땐 분명히 내 잘못이었고, 고작 그 정도로 흔들릴 아이는 아니잖아. 나도 참, 자의식 과잉인가…….”

자신에게 되새기듯 입 밖으로 소리내여 중얼거리며, 프로듀서는 서류를 정리해 가방에 집어넣고 다시 키보드를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새로운 보고서의 양식을 불러오면서 프로듀서는 벗어두었던 안경을 고쳐 썼다. 자신에게 각오를 새기듯 주먹 쥔 오른손을 왼손바닥에 쾅쾅 부딪히면서 그는 등받이에 기댄 상태로 축 늘어진 척추에 빠릿하게 힘을 넣어 곧추세웠다.

벌써 두 번째 실패. 하지만 세 번째까지 실패할 수는 없다. 현재 미나미의 문제는 결국 그녀 쪽에서 스스로 다가오지 않으면 뾰족한 수단이 없다. 제3자인 입장에서, 그는 지금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생체 시계가 기상시간을 알린다. 눈을 뜨니 365일 언제나 켜져 있는 수면실 천장의 어슴푸레한 백열전구가 눈에 들어왔다. 피로에 절어 완전히 셧다운 된 뇌에 전원을 연결하듯 뺨을 꼬집자, 마치 꺼진 컴퓨터가 부팅하듯 천천히 의식이 수면 위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아, 그러고 보니 어제 보고서 쓴다고 퇴근 안 했지. 결산때 또 깨지겠네…….’

왼손에 찬 손목시계를 확인하기 위해 왼팔을 들어올리려 할 때, 프로듀서는 왼쪽 팔에서 묵직하고 따뜻한 무게감을 느꼈다. 뭔가 싶어 고개를 돌리자, 왼팔에 매달린 채 물끄러미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어깨를 반쯤 드러낸 옷을 입고 있는 풍성한 단발머리의 여성이 있었다. 그녀는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조용히, 그저 눈만을 꿈벅거리며 그의 왼팔에 매달려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팔을 자극하는 이런저런 부드러운 감촉조차 느끼지 못할 정도로, 심장이 튀어나올 것처럼 소스라치게 놀라 자리에서 벌떡 튀어 오른 프로듀서가 비명을 지르려는 찰나, 그녀의 손이 번개처럼 뻗어 나와 그의 입을 막았다.

“으아…..읍읍읍!”

“쉬잇!”

그렇게 입을 틀어막힌 채, 격렬하게 눈을 굴리면서 손발을 버둥거리던 프로듀서는 잠시 시간이 지난 뒤에야 마침내 완전히 안정을 되찾았다. 눈을 깜박이며 이제 됐다는 신호를 보내자 여인은 싱긋 웃으면서 손을 떼었다.

“타카가키 씨 덕분에 확 깼네요. 지금 몇 시죠?”

“오전 7시에요. 딱 프로듀서 씨 출근 시간이죠.”

“휴, 그럭저럭 맞춰서 일어났네.”

그렇게 말하는 프로듀서를 약간 화난 듯 노려보며 여성, 타카가키 카에데는 몸을 일으켜 프로듀서의 두 볼을 꽈악 붙잡았다.

“아야야야야.”

“지금 할 말은 그게 아닐 텐데요?”

모범답안을 생각하는 듯, 프로듀서는 잠시 눈알을 이리저리 굴렸다. 그리고는 무언가가 떠올랐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아침입니댜야야야야!”

“물론 아침 인사는 중요하죠. 하지만 그거 말고요.”

“아라흐니하, 이허 노호 에기애어(알았으니까, 이거 놓고 얘기해요)!”

정말로 아픈 듯 카에데의 손등을 필사적으로 탁탁 두드리며 프로듀서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자신도 모르게 힘이 들어간 것일까. 뜻밖의 반응에 카에데는 깜짝 놀라며 황급히 손을 풀었다.

“미, 미안해요.”

“아그그, 뺨은 조금만 힘줘도 엄청 아픈 곳이라니까…….”

잠시 후, 두 손으로 뺨을 이리저리 문지르던 그는 어느정도 통증이 가라앉았는지 자세를 고쳐 앉았다.

“미안합니다. 어제 급한 일이 있어서, 피치 못하게 또 야근을 했네요.”

“흥, 잘 알고 계시는군요.”

“그런데, 타카가키 씨는 갑자기 왜…….”

“그건 자기 휴대전화한테 물어보시죠.”

프로듀서는 벗어둔 재킷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어 액정을 켰다.

 

<부재중 전화 12건>

 

“읍.”

액정에 떠오른 글자를 보던 프로듀서의 뒷목이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한 줄기의 식은땀이 등줄을 타고 흐르는 것을 느끼면서 그는 버튼을 조작해 수신 내역을 확인했다. 저녁 10시부터 거의 30분 주기로 걸려온 전화들. 12건 모두 카에데의 번호가 찍혀 있었다.

“이제 알겠나요?”

“죄송합니다.”

“나 참,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하라고 그렇게 큰 소리를 쳐놓고 정작 필요할 땐 받지도 않는군요? 프로듀서에겐 실망했어요.”

“아니, 이거는 사정이…….”

“무슨 사정이요? 고작 보고서가 제 전화보다 더 중요한가요?”

“그건 어떻게 알았습니까.”

“책상 위에 아주 자랑스럽게 펼쳐져 있던걸요? 그래서, 그 보고서가 제 전화보다 더 중요한가요?”

잔뜩 토라진 목소리로 쏘아붙이는 카에데를 보며 프로듀서는 말문이 막혔다. 그녀의 말대로 어제 하루종일 작성한 보고서는 사실 딱히 서두를 필요가 없는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아니요…….”

“저번에 약속했었죠? 야근은 하더라도 꼭 집에 가서 자겠다고.”

“그, 그랬었죠.”

“그런데 그 약속을 이렇게 어기는군요?”

“그것이…….”

“프로듀서, 마지막으로 집에 언제 들어갔는지 기억하세요?”

“어, 아마도, 4일 전……?”

그렇게 대답하는 순간, 카에데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대단하네요. 라고 칭찬이라도 해드려야 하나요?”

“면목 없습니다…….”

재차 고개를 숙이는 프로듀서의 앞에서, 카에데는 팔짱을 끼며 고개를 홱 돌린다.

“흥이에요, 이제 술도 혼자 가서 먹을거에요.”

“아니, 혼자서 잘 먹었잖아요.”

“골목길 으슥한 곳에 있는 수상한 가게에 가서, 변장도 안 하고 먹을 거에요.”

“아니 그건…….”

“그러면 저를 노리고 어떤 수상한 변태가 약을 탄 술을 권하겠죠. 그리고 저는 아무것도 모른 채 그걸 먹고…….”

그 뒤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어슴푸레한 전등 아래에서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카에데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자기가 말 꺼내놓고 왜 당신이 부끄러워합니까.”

“……아무튼, 이제 프로듀서랑 안 놀 거에요!”

“미안하다니까요. 사과의 의미로, 다음에 제가 온천 로케이션 하나 잡아올게요.”

그러자 고개를 돌린 카에데의 옆 얼굴이 움찔했다. 이거다 싶은 프로듀서는 재차 후속타를 넣기 시작했다.

“노천탕이 구비된 하코네 고급 여관, 2박 3일 일정에 2일차는 자유여행.”

움찔.

“효고현 특산 다이긴죠(주: 엄청 비싼 일본주. 고급 브랜드는 한 병에 5만엔 이상.)도 함께.”

움찔, 움찔.

“여차하면 일행도 데리고 갈 수 있게 해드릴게요. 그러니 이번 한 번만은…….”

“흠, 흠! 뭐, 그렇게 나오신다면 별 수 없죠. 이번 한번만은 특별히! 봐 드릴게요.”

“선처 감사합니다.”

재차 고개를 숙이며 프로듀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선심 쓰듯 말했지만 온천 부분은 이미 다 러브콜이 들어와 있는 항목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다이긴죠는 사비를 좀 털어야겠지만.

 

 

수면실에서 나와 샤워실에서 간단하게 씻고 사무실에 들어가자, 시계는 오전 8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평소라면 프로듀서보다 약간 늦게 출근하는 치히로와 오전에 일정이 있는 인원들이 모여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기에, 머리에 남은 물기를 가볍게 털어내면서 프로듀서는 사무실에 모인 인원들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늦잠을 자는 바람에.”

“아뇨, 괜찮아요. 아직 여유는 조금 있으니까.”

“늦었지만 바로 미팅 시작할테니 먼저 회의실 가서 기다려주세요. 센카와 씨, 잠시 전화 부탁드릴게요.”

“네, 맡겨주세요.”

모여 있던 아이돌 중에서 가장 연장자인 카에데가 아무렇지도 않은 웃음을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누구 때문인데!’라고 속으로 일갈하며, 얄미워 보이기까지 하는 저 밝은 미소에 입가를 경련시키면서 프로듀서는 자료를 챙겨 회의실로 향했다.

 

“휴우, 그래도 시간 맞게 끝났네.”

잠시 후, 응접실을 거쳐 회의실로 통하는 사무실의 옆문을 열고 프로듀서가 들어왔다. 항상 계획에 맞춰서 움직이는 그로서는 보기 드물게 서두르는 듯한 모습이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차라도 한 잔 하시겠어요?”

“아뇨, 괜찮아요. 곧바로 나갈 참이라. 혹시 전화 온 거라도 있나요?”

“아직은 조용하네요.”

“감사합니다.”

자료가 든 폴더를 그대로 책상 위에 놔두고, 그는 외투와 서류가방을 챙겨 곧바로 나갈 준비를 했다. 곧바로 자리를 뜨려던 그는 아차, 하면서 뒷걸음으로 책상 앞으로 돌아와 책상 위의 키폰을 조작해 곧바로 업무용 휴대전화로 전화가 연결되도록 설정해 두었다.

“저는 연습실 내려갔다가 곧바로 영업 다녀올게요. 결산회의에는 못 갈 것 같으니까 제 책상 위에 있는 파란색으로 체크 된 봉투만 바로 매니저 부서로 전달해주세요.”

“네~. 맡겨만 주세요.”

“감사합니다. 그럼…….”

프로듀서가 나가고, 일시적으로 조용해진 사무실 안에서 치히로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며 타임카드와 그 밑에 달린 근무표를 바라보았다. 근무표에는 퇴근이라고 찍혀 있었지만, 유감스럽게도 당직일지와 CCTV 출입기록에는 야근에 회사에서 잠까지 잤다는 사실이 적혀 있었다.

“이번엔 또 뭐라고 변명을 해야할지…….”

결산회의 때마다 쏟아지는 과다근무에 대한 질타를 생각하며 치히로는 조용히 몸을 떨었다.

 

 

별관 지하의 연습실 내부에 위치한 트레이너들이 사용하는 직원실.

원래라면 사후강평을 위해 사용하는 회의실이지만, 지금은 프로듀서와 세 명의 트레이너가 모여서 프로젝터을 통해 비치는 영상을 보고 있었다.

“어때요, 뭔가 보입니까?”

“으음……저는 잘 모르겠네요. 세이 언니는 어때요?”

“글쎄, 내가 봤을 땐 평소의 미나미인데…... 레이 언니는 어때?”

조용히 화면을 노려보던 마스터 트레이너, 아오키 레이는 고개를 돌려 프로듀서를 바라보았다.

“저기, 프로듀서 씨.”

“네?”

“혹시, 미나미가 당신보고 저번에 쓰러졌던 일로 뭐라고 한 적이 있었어?”

“아뇨.”

“흐음, 그렇단 말이지.”

“왜 그러십니까?”

마스터 트레이너는 리모컨을 이리저리 조작하더니 특정 부분에서 일시정지를 눌렀다. 노래의 클라이맥스 부분이었다.

“여기서부터 후렴구가 끝나는 부분까지.”

재생 버튼을 누르자 다시 노래에 맞춘 댄스가 시작되고, 후렴구를 지나 마지막 부분이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 부분에서 마스터 트레이너는 다시 일시정지 버튼을 눌렀다.

“이 부분까지야. 동작에 너무 힘이 들어가 있어. 그렇다고 곡에 휘둘리는 건 아니고, 마치 뭔가에 쫒기는 것 같아.”

마스터 트레이너의 의견에 나머지 두 트레이너도 고개를 끄덕였다.

“오호라, 확실히.”

“확실히, 듣고 보니 그렇네.”

“그렇군요.”

화면을 보고 있던 프로듀서는 팔짱을 끼며 중얼거렸다.

“리허설에서도 이 모양인데, 실전에서는…….”

“그래, 훨씬 더 심하겠지.”

“…….”

마스터 트레이너의 맞장구에 프로듀서는 팔짱을 풀고 턱을 쓰다듬으며 뚫어져라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몇 초 정도 지나, 그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보일 듯 말 듯 하네요. 협조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 우리야말로 도움이 됐다면 다행이지. 그럼, 난 다음 레슨이 있어서. 메이, 세이, 뒷일은 부탁한다.”

“응. 잘 가.”

“맡겨주세요!”

마스터 트레이너가 나가고, 프로듀서는 남은 두 사람을 돌아보았다.

“두 분, 가능하면 지금부터 닛타가 받는 댄스, 연기 레슨을 전부 녹화해주실 수 있을까요?”

“에엑, 전부 다요?”

“네. 전부 다. 가능하면 저도 참관하겠습니다만, 일정상 도저히 가능할 것 같지가 않아서요.”

“하지만, 그거 다 언제 보시려고…….”

“그 부분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다음 라이브 배틀의 오디션은 3주 뒤. 그 때까지 어떻게든 부탁 드릴게요.”

두 트레이너는 서로를 마주보더니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는 프로듀서를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그 부분은 저희에게 맡겨주세요.”

“감사합니다. 그럼 다음주에 뵙죠.”

두 사람에게 꾸벅, 인사를 건네고 연습실을 나온 프로듀서는 손목시계를 슬쩍 보았다. 시계바늘은 오전 10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위에서 뭘 하는거지…….”

위층에서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는 엘리베이터는 포기하고 계단을 뛰어 올라가 별관의 로비에 도착하자, 같은 스튜디오로 향하기로 되어 있는 카에데와 트라이어드 프리머스의 셋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프로듀서는 그들에게 걸어가며 미안하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도대체 오늘 몇 번이나 고개를 숙이는 것일까, 라고 생각했다.

“죄송합니다. 잠시 연습실에 용건이 있어서.”

“으응, 괜찮아.”

“어머, 땀 흐르는 것 좀 봐.”

“시간이 얼마 없으니까 바로 차량으로 이동하죠. 5분 뒤에 건물 입구로 나오세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프로듀서는 몸을 돌려 주차장으로 향했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린을 비롯한 트라이어드 프리머스의 세 명은 서로를 마주보았다.

“프로듀서, 오늘은 좀 이상하네.”

“그치? 보기 드물게 지각도 하고. P씨치고는 여유가 없어 보여.”

“단순히 바쁜 건 아닌 것 같은데……아아 몰라! 내가 왜 걱정해야 하는데!”

“그야 우리의 P씨잖아? 걱정하는 게 뭐가 문제야?”

“나오는 은혜를 모르는 배은망덕한 언니였구나.”

“이것들이!”

“”와~앗!””

미소 띤 얼굴로 노닥거리는 세 사람을 바라보던 카에데의 시선이 멀어져 가는 프로듀서의 등을 쫓았다. 조금 기다린 뒤 카에데는 자리에서 일어나 이제는 서로 손장난을 하고 있는 세 사람을 돌아보았다.

“여러분, 슬슬 나가서 기다리죠.”

 

이동하는 도중에도 프로듀서는 조용히 운전에만 집중했다. 조수석에 앉은 카에데에겐 이따금씩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중얼거리는 모습이 보였지만, 그녀는 짐짓 못 본 척 일부러 시선을 창 밖으로 돌리거나 뒤를 돌아 후배 세 사람과 오늘 일정에 대해 간단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중간한 시간대라 그런지 도로는 한적했다. 생각보다 일찍 스튜디오에 도착했기에 프로듀서는 촬영장 내부까지 동행해 일행을 대기실에 먼저 데려다 주고, 스태프들에게 간단하게 인사를 나눈 뒤 다시 대기실로 돌아왔다. 그 때, 네 사람은 메이크업을 정리하고 있었다.

“여기 있어도 괜찮아?”

린의 질문에 그는 시계를 톡톡 두드리는 행동으로 대답했다. 아직은 여유가 조금 있다는 표현일 것이다.

“아침에도 이야기했지만, 이번 인터뷰는 저번 단독 라이브 이후로 첫 촬영이니까 적당한 선에서 끊을 수 있도록 주의해. 상대방도 프로니까, 정신 놓고 끌려가면 별의 별 거 다 튀어나간다.”

““네~에.””

”그리고 촬영 중에 모르는 거 있으면 타카가키 씨한테 물어보고.”

프로듀서는 슬쩍 고개를 돌려 조용히 앉아 있는 카에데를 바라보았다. 거울 너머로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과장되게 방긋 웃으면서 오른손을 치켜든다.

“네~에! 소개받은 전문가, 타카가키 카에데입니다!”

“……전문가랍신다. 그러니까 부담 갖지 말고 마음껏 상담하도록. 알겠지?”

“응. 고마워, 프로듀서.”

“신경 써줘서 고마워요, P씨.”

“자, 그럼 슬슬 시간도 다 됐으니까, 난 이만 가볼게. 타카가키 씨, 아이들 잘 부탁드립니다.”

“네. 맡겨주세요.”

프로듀서는 손을 흔들면서 조용히 대기실의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갔다. 거울 너머로 그 모습을 바라보던 트라이어드 프리머스는 약속이라도 한 듯 카에데를 바라보았다. 일행의 대표격으로, 가장 가까이 앉아 있던 카렌이 질문을 던졌다.

“저기 카에데 씨. 오늘 P씨 좀 이상하죠?”

“글쎄요…...제가 보기에는 그냥 일이 좀 밀려서 그런 것 같은데요?”

“그런가…….”

“걱정할 거 없어요. 프로듀서잖아요?”

“하긴, 우리가 걱정할 팔자는 아니긴 하죠.”

프로듀서가 나간 문을 에서 고개를 돌려, 서로를 마주보면서 고개를 갸웃거리는 카렌과 나오를 바라보며, 카에데는 걱정 말라는 듯 싱긋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그런 카에데의 시선 또한 거울 너머로 비치는 대기실의 문에 못박혀 있었다.

“어디, 다음은…….”

스튜디오를 나와 주차시켜둔 자동차에 올라탄 프로듀서는 시계를 슬쩍 확인하고는 시동을 걸었다. 덜덜거리는 핸들에 머리를 기댄 채 그는 머릿속으로 머릿속을 붕붕 떠도는 잡생각들을 정리하듯 무언가를 끊임없이 중얼거렸다. 이윽고 생각이 정리되었는지, 다시 자세를 바로 잡고, 가속페달을 밟는 그의 눈빛이 아까 전보다는 조금 더 예리하게 번뜩였다.

교차로에서 정지 신호를 기다리며, 그는 휴대전화를 열어 다음 일정이 있는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

“마유? 15분 뒤에 도착할 것 같으니까, 준비해서 건물 앞으로 나와 있어. 옆에 사기사와도 있어? 그럼 둘이 같이 나와줬으면 하는데. 그래. 고맙다.”

신호가 바뀌자 휴대폰을 덮으면서 프로듀서는 작게 중얼거렸다.

“역시 이제는 승합차라도 있어야 하려나……승용차로는 동선이 너무 길어지네.”

 

 

 

“이봐, 지금 몇 시인데 여기로 들어……으응?”

“아하하, 수고하십니다.”

“뭐야, P씨잖아? 또 야근이야?”

“어쩌다 보니까 그렇게 됐네요.”

“그러다 몸 상할라, 적당히 해요.”

“네, 감사합니다. 나갈 때는 별관으로 나갈게요.”

본관 입구의 당직실을 지나오면서,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는 당직자에게 인사를 건네고 프로듀서는 구름다리를 지나 별관의 사무실로 향했다.

영업 코스를 한 번 돌고, 오늘 일정이 있는 인원들을 제각각 픽업하고 난 뒤 다시 사무실로 돌아올 무렵에는 오후 7시를 넘긴 시각이었다. 쉴 새 없이 걸어 다니고 운전을 하느라 약간은 무거워진 발걸음으로 사무실에 도착하자, 역시나 이번에도 불이 꺼진 사무실이 그를 반갑게 반겼다. ‘퇴근’이라고 적혀 있는 치히로의 상태 카드를 조금은 부러운 듯 바라보면서, 카드키로 보안시스템을 열고,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 ‘출장’에 찍혀 있던 타임카드를 ‘근무’로 되돌린다.

“으아~!”

재킷을 옷걸이에, 가방은 책상 옆에 대강 내려놓은 뒤 프로듀서는 무거운 신음소리를 내면서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지칠 대로 지친 두 다리가 그제서야 살았다는 듯 묵직한 통증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그 대신 사무용 의자가 작작 앉으라며 삐그덕거리는 비명을 지르지만, 그는 그것을 무시하고 의자에 앉은 채로 의자를 빙글빙글 돌렸다.

그렇게 몇 바퀴를 돌렸을까. 회전을 멈추고, 대충 던져놓았던 가방을 집어 든 그는 그 안에서 또다시 서류뭉치를 꺼내어 책상 위에 늘어놓았다.

“어디, 오늘은 몇 시에 끝나려나.”

양 손가락의 관절을 풀면서, 프로듀서는 늘어놓은 서류의 대열을 습격했다.

 

 

********

 

 

“얌마, 애송이. 너 왜이리 기운이 없어?”

“…….”

“뭐? 데뷔전을 말아먹었어? 오호라, 그게 너였구만? 뭐 슈퍼루키라고 단장이랑 빅리그놈들이 완전히 입이 귀에 걸렸던데. 왜 조졌어?”

“…….”

“뭐 그럴 수도 있지. 그래서, 여기 떨어진 게 그렇게 불만이냐?”

푸하핫! 하고 털복숭이 남자는 기가 차다는 듯 너털웃음을 터뜨린다.

“이제 막 밑바닥에서 일어선 놈이 뭐가 아쉬워서 벌써 드러눕냐. 앞길도 창창한 게. 일어나, 짜식아.”

남자는 퉤, 하고 바닥에 침을 뱉고는 옆에 놓인 바구니에서 야구공 하나를 꺼내 내게 던졌다. 습관적으로 오른손을 들어 그것을 받았다. 언제 끼고 있던 것인지, 내 오른손에는 글러브가 끼워져 있었다.

“얌마, 공이나 던져 봐라.”

“…….”

“뭐, 싫어? 싫으면 어쩔건데. 넌 선수고, 난 코치야. 닥치고 시키는 대로 해.”

왼손으로 적당히 그립을 잡아 공을 던졌다. 묵직한 야구공이 미트에 빨려 들어가며 팡, 하고 경쾌한 소리가 울린다.

“공 좋네! 근데 왜. 뭐가 문제야?”

“…….”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다고? 얌마, 어린 새끼가 뭐 그렇게 걱정이 많아? 니가 오늘내일 하는 영감쟁이냐?”

“이거 말곤 잘 하는 게 없다고? 그럼 이거 해서 먹고 살면 되지. 뭐? 다시 못 올라갈 것 같아서 무서워? 젊은 놈이 생각하는 뽄새하곤. 너 지금까지 야구 어떻게 했냐?”

또다시 퉤, 하고 가래가 섞인 침을 뱉으며 남자는 나를 향해 공을 던졌다. 울컥한 것인지, 나는 아까보다는 조금 더 세게, 자세까지 취해 가면서 그를 향해 공을 쏘았다.

“어쭈, 화났쩌요? 그럼 어디 좀 더 해봐.”

남자는 나를 도발하듯 혀를 내밀면서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그렇지! 더 센 놈으로 던져봐! 맞출 수 있으면 맞춰도 좋고!”

“…….”

처음에는 간단한 토스에서 시작한 것이 정신을 차려 보니 나중에는 마치 경기를 하는 것처럼 스텝까지 섞어 가면서 전력투구를 하고 있었다. 그렇게 몇 개의 공을 던졌는지 이젠 슬슬 왼쪽 어깨가 묵직해졌다 싶었을 때, 쪼그려 앉아 땀 범벅이 된 채 호흡을 고르고 있는 내 앞으로 남자가 다가왔다. 지금까지의 태도와는 정 반대로, 그는 내 앞에 쪼그려 앉아 나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이제야 눈에서 힘이 좀 빠졌군.”

그러면서 남자는 들고 있던 포수용 미트를 내 머리 위에 푹 씌웠다. 로진가루와 약품냄새, 그리고 채 빠지지 않은 땀냄새가 뒤섞여 매캐한 냄새를 풍겼다. 일어서서 미트를 내동댕이치고 기침을 하고 있자니, 어느새 돌아온 것인지 남자가 내 엉덩이를 걷어찼다.

균형을 잃고 흙바닥에서 뒹구는 내 앞에 다시 쪼그려 앉아, 남자는 물고 있던 담배에 불을 붙이며 내 양 뺨을 톡톡 쳤다.

“야 애늙은이.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이건 니 코치가 아니라, 인생 선배라서 하는 말이야.”

 

 

 

누군가가 줄을 달아 잡아당기기라도 한 듯, 프로듀서는 누워있던 자세에서 그대로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하지만 빠릿하게 일어난 것은 자세 뿐인듯, 두 눈은 아직 반쯤 감겨 있었다.

“이거 야근을 너무 많이 했나……아침부터 무슨 개꿈을 다 꾸네.”

게슴츠레하게 뜬 눈을 비비면서 흰색 반팔 셔츠에 반바지 차림이라는, 평소의 말쑥한 슈트 차림밖에 모르는 사무실의 동료들이 본다면 기겁할 만한 패션으로 프로듀서는 발을 질질 끌면서 밍기적밍기적 욕실로 향했다. 머리를 거울에 박은 자세로 세면대의 배수구를 닫고 차가운 물을 틀어 절반 정도 채운 뒤 비몽사몽간에 휘청거리는 머리를 그대로 풍덩, 세면대에 집어 넣었다.

한겨울 기온의 영향을 받아 한껏 차가워진 수돗물이 시동이 걸리다 만 두뇌를 급속 점화시켰다. 그의 몸이 크게 움찔하면서, 그는 자기도 모르게 숨을 들이쉬었다. 차가운 물이 콧구멍을 타고 코 속으로 조금 들어갔다. 곧바로 자세를 일으킨 그는 콜록거리며 기침을 했다.

잠시 후, 기침이 멎고 간단하게 샤워를 마친 프로듀서는 다시 침대에 앉아 멍하게 창 밖을 바라보았다. 문득 돌아본 벽걸이 전자시계가 오늘이 일요일이고, 지금은 오전 10시라는 사실을 가르쳐주고 있었다.

창 밖으로 보이는 겨울 하늘에 다시 시선을 옮기면서 프로듀서는 어제는 뭘 했는지 곰곰히 떠올렸다.

토요일에는 작업을 마치고 집에 도착하자마자 쓰러져 잠들어, 일어나보니 시간은 저녁 8시를 넘어간 시각이었다. 딱히 만날 사람도 없고, 만나서 할 일도 없었기에 그는 간단하게 주변 공원을 조깅한 다음, 저녁 10시쯤 집에 들어와서 씻고 잠을 잤다.

“그러니까 대충 14시간 정도 잔 건가……아무리 단련을 안 했다고는 해도 나도 체력 다 죽었구나.”

‘고작 5일 철야한 정도로 이 모양이라니’라고 중얼거리면서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지만, 그 5일간 그가 소화한 스케줄은 보통 사람이 본다면 ‘저런, 그러면 죽어요’소리가 나올 정도로 살인적인 스케줄이었다. 8시부터 18시까지 영업, 19시부터 다음날 4시까지 서류업무, 2시간 취침 후 다음날 업무를 시작하는 정도로, 취침시간에 30분 정도 차이가 있을 뿐 그 이외에는 대동소이한 수준이었다. 즉, 고작 반나절 쓰러져 자는 정도로 회복하는 것이 대단한 셈이다.

침대에서 벌떡 일어난 프로듀서는 간단하게 스트레칭을 하고, 곧바로 트레이닝복을 챙겨 입었다.

기왕 얻은 귀중한 주말이니 어디든지 돌아다녀 볼 심산이었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요란한 금발 가발을 쓰고 그 위에 야구모자를 눌러 쓴 뒤, 그는 휴대전화와 지갑을 챙겨 들고 집 밖으로 나갔다.

 

평소와는 조금 다른 코스로 조깅을 하던 도중, 프로듀서는 의외의 인물과 마주쳤다.

가볍게 스텝을 조절하면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던 도중, 그의 뒤에서 강아지가 짖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자, 그 곳에는 손에 목줄을 쥐고 있는 평상복 차림의 린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프로듀서?”

“어, 안녕, 시부야.”

뛰던 걸음을 멈추고, 횡단보도에서 두어 걸음 물러섰다. 예상 외의 만남이었지만, 생각외로 린은 반가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여기까진 무슨 일이야? 기숙사는 꽤 멀리 있을텐데?”

“요새 하도 몸을 안 움직였더니 뻐근해서 조금 뛰어볼까 하고 나온거야. 간만에 얻은 휴일이니까.“

대답을 들은 린은 조금 질렸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일하고도 움직일 수 있구나…….”

“뭐, 이 정도도 못하면 프로듀서 하겠냐. 그나저나 나라는 건 어떻게 알았어?”

“냄새로 알았지. 프로듀서의 냄새.”

무슨 소린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린 프로듀서는 린의 품에 안겨 있는 작은 강아지를 발견하곤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냄새. 그렇군. 기억하고 있었구나.”

“으응. 아마, 오랫동안 기억할 거야. 기억력이 좋은 아이니까. 그럼 그 가발은? 변장?”

“그렇지. 이제는 너희들도 꽤나 잘 나가니까 나도 조심할 필요가 있겠다 싶어서. 시부야는 오늘도 가게 일이었나?”

“뭐, 그렇지. 꽃집에는 휴일이 없으니까.”

“……그러고 보니, 한 번쯤 인사를 드려야 하긴 하는데. 성과 보고도 드려야 하고.”

“오늘, 오려고?”

왠지 모르게 화색을 띠는 린에게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프로듀서는 흘러내리는 땀을 수건으로 닦았다.

“아니, 오늘은 안 되지. 차림새도 이 모양이고.”

“난 괜찮다고 생각하는데…….”

“안 돼. 다음에 정식으로 말씀 드리고 찾아뵐게.”

“으으……알았어. 아깝다……그럼, 프로듀서는 길 건너갈거지?”

“그래. 시부야네 집은 이 근처였지?”

“맞아. 아쉽게도 방향은 반대지만.”

노골적으로 아쉬워하는 린을 바라보면서 프로듀서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뭐……나도 딱히 길이 정해진 건 아니니까, 너희 가게까지는 동행해도 될까?”

“정말? 그래 주면 고맙지!”

“고마울 것 까지야……그럼 가자.”

“응!”

 

"그럼, 여기서 이만 헤어져야겠네."

"응. 동행해줘서 고마웠어, 프로듀서."

"별 말씀을. 남은 주말 잘 보내고, 내일 사무실에서 만나자."

"프로듀서도, 너무 무리하지 말고."

린의 가게 앞에서 그녀와 헤어진 뒤, 프로듀서는 아까보다는 조금 더 페이스를 올려서 달리기를 재개했다. 멍하게, 그저 발을 옮기는 것만 생각하면서 뜀박질을 하다 보니 어느새 강변에 마련된 공원에 도착했다. 한겨울이지만 한 시간 가까이 달렸던 덕분에 슬슬 탈수증상이 느껴졌기에 프로듀서는 근처의 자판기에서 이온음료를 뽑아 벤치에 털썩 앉았다.

모자와 함께 가발까지 벗고, 시원한 강바람을 만끽하듯 벤치의 등받이에 등을 기대어 몸을 쭉 뻗었다. 이렇게 땀을 흘려본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땀과 함께 쓸데없는 잡념도 함께 빠져나간 것인지, 지금은 무슨 생각을 하더라도 명쾌하게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엇을 생각하는 것인지 그는 건너편 강변의 풍경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 비치는 풍경은, 자전거를 타고 있는 한 쌍의 가족의 모습이었다. 그렇게 몇 분이 지나고, 그는 땀이 거의 다 식었음을 깨닫고 체온이 과도하게 떨어지기 전에 쭉 뻗었던 자세를 다시 접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스트레칭을 마친 뒤, 텅 빈 캔을 휴지통에 던져 넣은 프로듀서는 가발과 모자를 고쳐 썼다.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말하듯, 소리 없이 조용하게 흐르는 강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그래! 이미 쏟아버린 건 별 수 없지! 지금부터 새로 채우면 되는 거야!!”

그렇게 외치는 그의 입가에는, 작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렇다. 이런 나라도 알고 있는 것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넘어졌을 때 어떻게 일어나야 하는지.'

 

 

 

----------[퍼스널리티 P 시리즈] 넘어져 본 사람은 일어서는 법을 안다(下) 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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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코는 코가 참 좋아요. 개니까요. 그렇죠?

 

시키 편에서 뭘 잘못 건드렸는지 이번엔 유독 쿨타임이 길었네요.

그래도 시험기간이 다가오니까 다시 또 소재가 막 생각이 납니다. 시험기간 대단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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