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맺히기 전부터 꽃봉오리가 품고있던 것 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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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5-13, 2016 02:43에 작성됨.

* [맺히기 전부터 꽃봉오리가 품고 있던 것 上] 에서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 글쓴이 주관의 개똥철학이 들어가 있습니다. 마음껏 비웃으셔도 됩니다.

 

 

 

 

나는 천재였다.

어린 나이에 일본의 교육과정을 넘어가고, 보란 듯이 미국에 있는 유명한 대학교에 유학을 갔다. 남들이 청춘이니 뭐니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을 때, 나는 교육과정을 넘어가고 학위를 따냈다. 그렇게 나는 ‘학업’의 정점에 섰다.

올라올 때는 몰랐지만, 정점에서 내려다본 풍경은 정말로 살풍경해서, 나는 그대로 눈을 가리고 도망쳤다. 부모님과도 거의 연락을 하지 않았다. ‘천재’인 이치노세 시키는 그들의 희망이었겠지만, 나는 더 이상은 ‘천재’로 남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되는 대로 마구 떠돌아 다닐 무렵, 나는 그 사람을 만났다.

원래부터 사람 얼굴을 잘 기억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그 남자의 얼굴은 알고 있었다. 뉴욕에서 사는 사람에게 그 사람의 이름을 대면 열 명 중에서 일곱 명은 그의 이름과 업적을 줄줄 꿰고 있을 정도의 대 스타였으니까.

그러나 내게 있어서 그는 선수보다는 스포츠학계와 의학계를 크게 한 번 뒤집히게 되는 사건의 빌미가 되는 인물로써 더 유명한 사람이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세월이 꽤 흘렀지만, 동안은 타고난 것인지 그는 내 기억 속의 모습에서 그다지 변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를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은 여전히 남아 있는 왼쪽 눈의 어떤 자국 덕분이었다.

가장 크게 변한 점이라고 하면, 실제로 만난 그 사람은 더 이상은 야구선수가 아니었다는 부분 정도였다.

“거기 여학생, 무슨 볼 일이라도 있어요?”

너무 물끄러미 보고 있었던 탓에 그의 시선을 끌었던 모양이다.

“아뇨~ 그냥 구경~.”

“그래요?”라고 말하면서 그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이 향하는 곳에는, 몇 대인가 카메라의 주목을 받고 있는 여성이 있었다. 나이는 20대 초반......정도, 풍성한 올리브색 머리카락을 어깨 언저리까지 기르고 있는 사람이었다. 특이한 점이라면, 그래. 담청색과 녹색의 헤테로크로미아.

바람의 방향이 바뀌어 이제는 나를 향해 맞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그러자 바람에 섞여, 내 후각을 자극하는 미묘하게 좋은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천천히 냄새를 따라가기 시작한 나는 냄새의 근원지에 있는 그의 재킷을 쓱쓱 잡아당겼다.

“저기, 당신한테서 좋은 향이 나는데, 혹시 지금 좋아하는 일 하고 있어? 일이 막 즐겁고 그래?”

그는 잠시 대답을 고르는 듯 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야구가 아니더라도 그렇게 좋은 향기를 풍길 정도로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나는 그가 매우 부러웠다.

그래서 그의 팔을 잡고 매달렸다.

“그럼, 나한테도 아이돌 가르쳐줘, 가르쳐줘~! 그렇게 즐거운 일이라면, 나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

지금 돌이켜보면, 그 때의 그는 그의 말버릇마냥 반짝반짝거리고 있었다.

 

 

 

“음냐.”

해가 중천에 떠올라서야 느릿느릿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잔뜩 물을 머금은 솜처럼 무거운 몸을 이끌고 어기적어기적 목욕실로 들어갔다. 반쯤 감긴 눈으로 더듬더듬 온수밸브를 찾아 돌리자, 밤중에 식혀져 있던 차가운 물이 먼저 쏟아져 나왔다.

“흐갹!”

새된 비명을 지르며 몸을 움츠리자, 그제야 미안하다는 듯 온수가 쏟아져 나왔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휴일인가.”

실없는 개그 프로그램이 나오는 TV소리를 배경음악으로 삼아 침대에서 뒹굴거리고 있자니 머리맡에서 툭, 하고 작은 책 하나가 떨어졌다. 어제 프로듀서와 헤어지기 전에 받았던 시집이었다.

받을 때는 일단 고맙다고는 했는데, 솔직히 저게 도움이 될지는 부정적이다.

고작 시집 따위가, 내 고충을 이해할 리가 없으니까.

그 때, 어제 저녁 프로듀서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미지를 정립하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으니까.’

그래, 꽃봉오리의 이미지를 알기 위해선 시집도 읽을 필요가 있겠구나.

그렇게 프로듀서를 핑계 삼아, 나는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침대에 엎드려 시집의 첫 페이지를 펼쳤다. 팔락, 하고 쪽지 하나가 떨어졌다.

 

당신에게 도움이 될 만한 시를 모아보았습니다. 모쪼록 꽃의 마음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사기사와 후미카-

 

사기사와 후미카, 알고 있는 이름이다. 주로 휴게실 한 구석에 앉아, 하루 종일 문고판을 붙들고 있는 칙칙한 인상의 여자였다.

‘헤에, 그 여자한테서 추천받은 거구나. 아무렴, 문학이랑은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는데.’

일부러인건지, 아니면 정말로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인지. 투덜거리면서 나는 쪽지를 꾸깃꾸깃 접어 휴지통에 집어던졌다.

갑자기 불쾌감이 느껴졌다. 나는 디퓨저를 꺼내 페퍼민트 오일을 넣고 침대 바로 옆에 세워두었다. 방 안에 오일의 향이 퍼지고 코에서 시작된 청량감이 뇌를 상쾌하게 씻겨낸다. 그럼에도 여전히 찝찝하게 남은 불쾌감을 애써 무시하면서, 나는 시집의 두번째 페이지를 넘겼다.

 

 

 

그날 저녁, 나는 침대에 몸을 둥글게 웅크린 채 누워 있었다.

 

결과부터 말하면, 프로듀서의 제안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지금이라면 어제보다는 훨씬 더 나은 노래를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차올라 있었다.

문제는 꽃봉오리의 이미지를 구체화하는 과정에서 하필이면 그를 소재로 써 버렸다는 것.

‘아니, 그치만, 가사에 나오는 ‘너’랑 딱 맞는걸…….’

그렇게 열심히 자기합리화를 하면서,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지만 터져 나오는 부끄러움에 소리도 질러 보고, 마음을 가라앉히는 향도 조합해서 맡아 보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오죽하면 음악을 들으면서 깜박 잠이 들었을 때 그가 나오는 꿈까지 꾸었을까?

새로운 아로마를 배합해 향을 맡아 보았지만, 지금까지 그래왔듯 전혀 진정이 되지 않았다. 마치 가슴 속에 뜨거운 불길이 타오르는 것 같은 느낌. 진화를 하고 싶지만 진화는커녕 화재의 원인조차 제대로 규명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야. 이게 아니야!’

초조함 때문인지 이제는 배합마저 한번씩 실수가 나왔다. 아니, 사실은 이 불을 끄는 방법을 나는 알고 있었다. 본능이 호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이 따위 조잡한 냄새가 아니라고. 그리고 그와 동시에, 새삼스럽지만 나는 다시금 실감했다.

‘나는 언제부턴가 네게 이렇게나 빠져 있구나’라는 사실을.

시계를 바라본다. 시간은 이미 저녁 8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조금만 더 참으면, 어떻게든 잠을 자면 내일은 그를 만날 수 있다. 하지만…….

‘만나고 싶어, 지금 당장.’

너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이미 퇴근하고 집으로 가고 있을까?

옷장을 열고, 어제 입었던 것과 비슷한 디자인의 옷을 꺼내어 대충 걸친다. 내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그가 말했던 ‘변장’도 제대로 했다. 체취는……지울 필요 없겠지.

집 밖으로 나와서, 손을 들면 잡히는 차를 타고 회사로 향했다. 사무실이 있는 제 1별관의 앞에 서서, 건물 안에 들어가기에 앞서 건물 주위를 크게 한 바퀴 돌았다. 만의 하나, 불이 모두 꺼져있다면 헛수고가 될 것이 틀림없었으므로.

세 번째 면까지 보고 슬슬 기대감이 식어갈 무렵, 나는 세 번째 모퉁이를 돌아 마지막 면을 살펴보았다.

있다. 단 하나, 불이 켜진 창문이!

“흥흥흥~.”

삽시간에 기대감이 다시 불타오른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나는 미리 복사해둔 보안카드로 별관 정문의 보안시스템을 휴면상태로 되돌렸다. 휴면 상태에서는 경보도 울리지 않고, 5분 뒤에는 다시 정상 상태로 돌아가므로 손이 덜 간다. 당직실에도 쓸데없는 주의를 끌지 않도록, 가급적이면 CCTV의 시야를 피해 천천히 복도를 지나갔다. 그리고 2층에 도착해, 사무실의 문 앞에 섰다.

심박수가 올라간다. 머리가 띵하다.

이 문 너머에는 네가 있겠지.

이 시간의 너는 나를 보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놀랄까? 꾸짖을까? 그것도 아니면, 둘 다 할까?

뭐라도 좋아. 다양한 너를 보여줘. 내 갈증을 채워줘.

꿀꺽, 하고 침을 삼키면서, 나는 사무실의 문고리를 잡았다. 천천히 힘을 주어 그것을 비틀자, 끼익, 하는 소리를 내면서 문이 열린다.

“아…….”

사무실 안은 텅 비어 있었다. 그의 자리에 불이 켜져 있을 뿐이었다.

허탈함에 다리의 맥이 탁 풀리려는 그 순간.

“이치노세?”

등 뒤에서, 강렬한 향기와 함께 지금 가장 듣고 싶었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무나도 기쁘고, 또 너무나도 놀랐기에 하필이면 입으로 심장이 튀어나올 뻔 했다.

하지만 그보다도 놀라운 건, 가슴 속에서 타오르던 불길이 순식간에 잠잠해졌다는 것.

그리고……내 안에서 차오르는 행복함이라는 감정이었다.

나보다 먼저 네가 나를 발견해 주었다는 것이.

오늘 처음 듣는 네 목소리가 다름아닌 내 이름이었다는 그런 사소한 사실이 너무나도 기뻐서.

“내가 오늘 분명 쉬라고 했을 텐데……?”

자세를 숙이고 가장 먼저 내 눈을 봐주는 너의 상냥함이 너무나도 기뻐서.

“야야, 너 표정이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혹은, 내가 너를 만나고 싶을 때, 네가 내가 생각한 장소에 있어 주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기뻐서.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그의 품에 뛰어들어 마치 과호흡에 걸린 사람마냥 폐부 한 가득 그의 향기를 채워 넣고 있었다.

아아, 너무 좋아……뇌가 녹아버릴 것 같아.

“하아……또 이러냐.”

그가 찰칵, 하고 문을 닫는다. 머리 위에서 익숙한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이제 너는 나를 떼어내겠지. 어떻게 할까? 예전처럼 머리를 누를까, 아니면 처음 만났을 때처럼 정중하게 손을 풀까?

그렇게 생각하자, 의식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단단한 몸을 껴안는 두 팔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이번의 그는 내 예상을 훌륭하게 깨뜨렸다.

천천히 들어올린, 마치 솥뚜껑처럼 커다란 두 손은 제각각 움직여 하나는 내 어깨를, 그리고 하나는 내 머리를 조용히 감싸 안았다.

“이,이, 이게 무슨짓이냥!?”

“힘들 때는 내 냄새가 최고라며? 지금 네 표정 진짜 장난 아니거든? 얼마든지 맡아도 되니까 좀 진정해.”

“에헤헤, 그럼 감사히 받겠습니다~!”

처음으로 받아보는 ‘따뜻한 포옹’. 언제 트립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역치를 아득하게 뛰어넘는 자극에 찌릿, 하고 내 몸의 중심이 반응하기 시작했다. 아니,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동안 나는 그의 품에 매달려 뇌의 주름 하나하나에 새겨지도록 그의 향기를 만끽했다.

으응, 역시 이 냄새가 최고야. 그 어떤 아로마보다도.

 

“이제 좀 진정이 됐어?”

소파에 멍하게 앉아 있자니 어느새 끓인 것인지 프로듀서가 따뜻한 핫초코를 들고 나타났다. 그것을 내 앞에 내려놓고, 그는 맞은편 소파에 약간 구부정한 자세로 앉는다.

고개를 끄덕이면서 핫초코를 들고 한 모금 마셨다. 아, 달콤해.

“나 참, 올 거면 온다고 말을 하지 그랬어.”

“미안해. 그, 갑자기, 너무 진정이 안 돼서.”

“그럼 전화하면 내가 갈……아니다, 이러면 큰일 나지.”

“냐하하하.”

“그래, 진전은 좀 있어?”

“응! 아니, 네가 말한 방법대로 하니까 파팍! 하고 이미지가 떠오르는 거 있지. 역시 넌 대단해, 천재야. 내가 인정한!”

“그래그래, 영광이네.”

그는 빙그레 웃으면서 꺼내온 드링크를 한 모금 마셨다.

“저기, 너……아니, 프로듀서.”

“왜?”

여전히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로 그는 이쪽을 바라보았다. 워낙 눈치가 빠른 남자이니, 말투가 바뀐 것으로 무언가를 눈치챘을지도 모른다. 아니, 눈치채 주었으면 좋겠다.

나를, 도와주세요.

“당신이 준 시집을 읽고, 당신이 해 준 얘기를 계속 곱씹으면서, 뭐가 문제였는지 깨달았어.”

“응.”

“나는, 넘어지는 게 두려웠던 거야. 실패하는 게, 두려웠던 거야.”

“그래.”

“저기, 그러니까, 어드바이스를……”

그러자, 그는 미소를 누그러뜨리며 나를 다시 바라보았다. 안경을 끼고 있지 않았으니, 형광등의 빛을 받아 여전히 남아 있는 왼쪽 홍채의 핏자국이 다소 선명하게 나타났다.

“……아니, 도와주세요, 프로듀서.”

당신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나와 같은 길을 걷다가, 내가 두려워하던 상황에 맞닥뜨려놓고도 지금처럼 눈부시게 서 있을 수 있는 당신의 이야기가.

나는 차마 그의 눈을 마주보지 못하고 천천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지금 내가 하려는 행위는 그의 내면에 새겨진 가장 깊숙하고 치명적인 상처를 후벼 파는 일. 건방지게도 그가 가슴속 깊이 묻어둔 트라우마라는 상자를 꺼내어 열어달라고 부탁하는 파렴치한 행동일 테니.

“나, 당신의 이야기가, 듣고 싶어…….”

나도 놀랄 정도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가 나왔다. 조심스레 고개를 들어 그의 표정을 슬쩍 보았다. 뭐라고 할까, 얼이 빠졌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어이가 없는 표정이라고 해야할까. 아무튼 기가 차다는 듯 허, 하고 한숨을 내쉰 그는 커다란 두 손을 내밀어 내 머리를 손끝으로 꾸욱꾸욱 누르기 시작했다.

“너 뭐 잘못 먹었어? 아로마랍시고 마약 한 건 아니지?”

“으냐앗! 아니거든!”

한동안 내 머리를 주물럭거리던 프로듀서는 다시 자리로 돌아가며 또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나 참, 무슨 얘기 한다고 그렇게 무게를 잡나 했더니. 그래서, 뭐가 듣고 싶어? 뭐 말해줄까?”

내가 대답하기 전에, 그는 무언가가 떠오른 듯 내게 손바닥을 내밀었다.

“아니, 그보다 먼저, 브레인스토밍을 하자.”

“응?”

“너는 어째서 넘어지는 게, 실패하는 게 두려운거야?”

나는 잠깐 망설였다. 이 이야기를 해도 좋을지. 어렴풋이나마 생각하고는 있었지만, 정작 말로 꺼내려 하니까 내 생각보다는 조금 더 부끄러웠다.

“으응, 나는, 청춘을 숏컷 해버렸잖아? 학교생활도 반항기도. 전부 유학과 함께 날아가 버렸으니까. 그러니까 동경하거나 고민하거나 하면서, 무엇을 목표로 하는 기분 같은 걸 몰라. 넘어졌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즉, ‘평범함’을 몰랐다는 거구나.”

단박에 논점을 파고드는 프로듀서에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으응, 나도 모르는 사이, 소중한 것을 잊고 있었던 걸지도…….”

“그렇군. 뭐, 그런 거면 모를 만도 하네. 아예 개념부터 안 잡혀 있었으니.”

잠시 등을 곧게 편 프로듀서는 턱을 쓰다듬으면서 나를 바라본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그 눈빛이 마치 나를 스캔이라도 하는 것처럼 보였다.

“묘하게 태도가 얌전한 것도 그것 때문인가……흉내내기 같은 거?”

“응. 사실 지금도, 가슴으로는 알겠지만 머리로는 모르겠어서, 직접 행동해보면 어떨까 싶었거든. 뇌가 혼자서 붕 뜬 것 같이 괴로워. 그러니 프로듀서의 이야기를 듣고 싶은 거야.”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선수로써의 당신은 나와 같은 부류였으니까. 당신의 자취를 훑다 보면 내가 가야 할 길도 보이지 않을까 싶어서.”

“과연, 나쁘지 않은 생각이야. 그러면 무슨 이야기를 해 주지?”

“에? 무슨 이야기냐니. 당연히 실패했…….”

거기까지 말하고, 나는 말을 멈추었다. 실언이다. 본인 앞에서 실패했던 이야기를 해 달라고 하다니, 이건 불 난 집에 부채질이 아니라 기름을 끼얹는 꼴이 아닌가.

“아니, 저, 그건, 그러니까…….”

“뭐, 이것저것 있긴 하지만. 말이야.”

어떻게 하면 그를 자극하지 않을지, 단어를 고르는 사이, 그에게 표정을 읽혀버렸다. 하핫, 하고 멋쩍은 듯 웃으면서 그는 다시 자세를 구부정하게 낮추어 나와 눈높이를 맞춘다.

“하하, 이래봬도 꽤나 많이 넘어진 몸이라서. 그래……그럼 가장 화려하게 넘어졌던 걸 말해줘야겠네.”

프로듀서는 잠시 시선을 돌리더니 뒤통수를 쓱쓱 문질렀다.

“흠……뭐부터 이야기를 해야 하나. 그래. 7년 전, 그러니까 2008년 월드시리즈는 두 가지 별명이 있어. 한 가지는 뉴욕의 두 팀이 맞붙은 뉴욕 더비.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프로듀서는 숨을 고르듯 잠시 뜸을 들였다. 그 틈을 타, 나는 기억 속에서 7년 전 월드시리즈의 기억을 끄집어 냈다. 그래, 분명히 이렇게 불리었을 것이다.

““둠스데이.””

“뭐야, 알고 있었네?”

목소리가 겹쳤다. 프로듀서는 쑥쓰러운 듯 웃으면서 뒷목을 주물렀다. 그러고보면 이 사람은 이따금씩 자기가 주인공인 주제에 묘하게 자기 자신을 낮춰보는 경향이 있다.

“응, 일단은. 유명한 사건이었으니까.”

 

10월 24일부터 11월 1일까지 펼쳐졌던 서브웨이 시리즈와 '둠스데이'는 미국에서 신문을 보거나, 뉴스를 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대사건이었다. 리그에서 가장 강한 팀과 가장 약한 팀이 결승에서 만나 싸운다는 극적인 이야기도 있었지만, 그보다 훨씬 더 극적인, 정말로 영화같은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최약팀인 뉴욕 메트로의 투수 한 명이 일으킨 돌풍이었다.

1차전 선발등판 2:1 완투승.

2차전 선발등판 0:1 완투패.

3차전 8회 말 구원등판하여 3:0으로 세이브.

4차전 6회말 구원등판 2:3 패.

5차전 선발등판 0:2 완투패.

6차전, 1회부터 선발이 무너지며 11점을 내준 상황에서 2회부터 구원등판하여, 11:12 역전승을 만들어낼 때까지 단 하나의 실점도 허용하지 않았다. 

여기까지 그가 던진 공의 개수가 620여개. 이미 인간의 한계를 넘었다고 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진짜 사건은 그 다음에 있었다. 투수들이 타고 다니던 버스가 사고를 당해 투수조 전원이 부상을 당하는 참사가 벌어진다. 멀쩡한 선수라고는 버스에 자리가 없어 타자들과 같은 버스를 타던 ‘그 선수’뿐. 여기서 누군가가 선발로 나서지 않으면 팀은 자연스럽게 부전패를 당하게 되는 상황이었다. 그나마 사지가 멀쩡한 인원들로 어떻게든 엔트리를 꾸리기는 했지만, 그 인원들도 도저히 경기에 나갈 상태는 아니었다. 다들 어디 한 두 군데는 금이 가 있었기 때문이다.

감독에게 사정을 전해들은 그는 긴 말 하지 않고 곧바로 붕대를 풀고 몸을 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시각이 다가왔다.

뉴욕 메트로의 홈구장인 시티 필드에서 열린, 훗날 둠스데이라고 불리는 월드시리즈 7차전. 뉴욕 메트로는 선발투수로 공을 던지기는 고사가호 더 이상 걷기도 힘들어 보이던 ‘그 선수’를 지명했다.

그리고 그 경기는 전설이 되었다.

7차전 선발등판 1:0 노히트 노런으로 경기를 끝낸, 완벽한 투수 혼자만의 원맨쇼. 그 경기에서 유일하게 나온 1점은, 타석에 선 투수의 솔로 홈런이었다.

교체선수가 없었기 때문에 매 회마다 왼손과 오른손을 바꾸어 던질 수 있다는 합의가 되어 있었고, 그는 자기의 재능을 과시라도 하듯 왼팔과 오른팔로 상대 타자들을 농락하며 그들을 완벽히 바보로 만들었다.

여기서 끝났으면 그냥 괴물 투수의 양민학살로 끝났겠지만, 유감스럽게도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상대 팀의 벤치에서는 이대로는 답이 없다고 판단했는지, 7회 말 그 선수가 타석에 들어섰을 때, 투수 하나로 하여금 그의 머리를 맞추도록 지시했다. 훗날 상대 팀의 감독도 인정한 고의적 헤드샷이었다. 물론 전략적으로는 충분히 타당한 선택이었다. 어떻게든 그만 끌어내린다면 경기는 그냥 이기는 것이니까. 다만 비극이라면 헬멧을 쓴 머리를 조준해야 할 공이 빗나가는 바람에, 헬멧이 감싸고 있지 않은 그의 왼쪽 눈을 직격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쓰러지지 않았다. 왼쪽 눈의 혈관이 터져 눈 전체가 시뻘겋게 되고, 뇌진탕으로 발음이 꼬이고, 뛰는 것조차 제대로 되지 않아 포수의 부축을 받아 가며 마운드에 올라섰다. 8회 초부터 9회 초까지, 19개의 공을 던져 여섯 명의 타자를 돌려세우면서 그는 공 하나 하나를 던질 때마다 마운드에 쓰러졌다 일어서기를 반복했다. 균형감각도 정상이 아니었던 탓에 공을 던지고 나서 자세를 추스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공 하나 하나를 던지는데 너무도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상대 타자들은 물론이고 심판과 관중들 그 누구도 야유하거나 그에게 뭐라고 하지 않았다.

망가진 몸으로 마운드에서 홀로 분투하는 그의 뒷모습은 그야말로 비장함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오히려 아웃을 하나씩 잡아낼 때마다 그라운드의 관중들은 모두 일어서서 기립박수를 쳤다.

마지막 타자를 돌려세우고, 자신의 임무를 마쳤다는 듯 그는 마운드 위에 그대로 쓰러졌다.

마지막 스물 일곱번째 아웃이 잡히는 순간, 목발을 짚거나 팔다리에 깁스를 한 동료들이 마운드 위에 주저앉은 그를 향해 환호하며 모여드는 그 모습을 찍은 사진은 그 해 퓰리처상 후보에 올랐다. 비록 상을 수상하지는 못했지만. 제목은 ‘부서진 자들의 왕’이었지만, 읽기에 따라서는 ‘가장 크게 부서진 사람’으로도 읽을 수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7번의 등판에서 4승 3패, 던진 공만 670개.

그렇게 그 날은 영광의 일요일이 되었고, 주황색 테두리를 두른 남색 숫자 31번은 글자 그대로 ‘전설’이 되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시티 필드’의 입구에는 흰 바탕에 푸른 줄무늬가 그려진 유니폼에 주황색 테두리를 두르고 있는 31번이라는 남색 숫자가 새겨진 채 전시되어 있다.

월드시리즈에서 우승한 것은 팀이 아니라 ‘그 선수’였지만, 결국 우승 사진에서 그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헤드샷의 후유증과 한 시즌 내내 뛰어다닌 과도한 체력소모가 겹쳐 반 년 가까이 의식불명의 상태로 누워 있었고, 의식을 되찾은 이후에는 두 번 다시는 프로 무대에서 뛸 수 없을지도 모르는 몸이 되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벽'을 넘고자 하였고, 자신의 모든 것을 불태운 만큼 그의 두 팔은 완전히 잿더미가 되어 있었다. 물론, 현대의학의 힘은 의지만 있다면 잿더미도 되돌릴 수 있었지만, 어째서인지 그는 조용히 은퇴를 선택했다.

'내 평생의 목표를 이루었다. 내 안의 불꽃이 꺼졌으니, 이제는 후배들에게 길을 터주고 싶다. 그것 뿐이다.'

그것이 전 미국을 뒤흔든 젊은 초신성이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뭐, 지금부터 할 이야기는 그 뒷이야기야.”

……여기까지가 내가 알고 있던, 그리고 세상이 알고 있는 알려진 이야기. 그리고 지금, ‘그 선수’였던 당사자의 입에서 그 다음의 이야기가 나오려 하고 있었다. 내가 모르는 세계의 이야기에 나는 가슴이 약간 뛰는 것을 느꼈다. 유감스럽게도 이럴 때야말로 내가 과학자였음을 실감한다.

“반 년만에 눈을 뜨고, 내가 제일 먼저 본 건, 내 머리맡에 놓여 있던 우승 반지와 트로피의 레플리카, 그리고 전력외 판정이 적혀 있는 방출 통지서였어. 물론 계약금 관련한 사항도 적혀 있었지. 우승 인센티브까지 해서 빠방하게 넣어줬어. 뭐......내 꿈을 완전히 잿더미로 만들어버린 댓가라고 치기엔 조금 싼 느낌도 있었지만.”

그 순간,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방출이라니? 스스로의 의지로 은퇴한 게 아니었어?

“하하, 못 믿겠다는 표정이네. 진짜야. 구단의 이미지를 생각해서 외부에는 내가 자진해서 나간걸로 됐지만, 사실은 전력외 통보를 받고 방출된거지. 뭐……헤드샷 맞고 사경을 헤매던 몸이었고, 고의는 아니었다지만 양 팔도 완전히 맛이 갔으니까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때는 좀 억울했어.”

나는 프로듀서의 얼굴을 슬쩍 올려다 보았다. 그렇게 말하는 그의 표정에선 뜻밖에도 그다지 불편한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어째서 그렇게 태연하게 있을 수 있는거야? 괴롭지 않아?”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어 지금까지 쌓아 올린 것이, 한 순간에 사라졌다. 아마도 내가 저런 일을 당했다면, 나는 제정신을 잡고 있지는 못했을 것이다.

“힘들지. 지금도 생각하면 분하고, 화가 나지.”

“그런데 어째서…….”

“타협하는 거야. 분하고 괴로워도 이미 지나간 일이니까.”

“아…….”

무언가, 내가 생각하던 것에 한 걸음 다가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제 저녁, 수록을 마치고 나오면서 엉망진창인 상태일 때 그에게서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너는 분명히 천재고 똑똑한 아이지만, 지금은 그냥 아이돌이야.

-뭐, 그냥 알아만 두라고. 그 사실을 잊지 말고, 언제나 염두에 둬.

 

머릿속이 조금이지만 맑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턱을 괸 채 가벼운 미소를 띄고 내 눈을 바라보고 있는 프로듀서의 검은 눈이 보였다.

“이제 좀 알겠어?”

응. 알 것 같아.

“아니, 아직은 잘 모르겠어.”

“으음, 요컨대, 돌아서 가는 용기 라는 거야.”

“돌아서 가는 용기?”

“살아가면서 어떤 장해물을 만났을 때. 그것을 정면돌파 해서 넘어가는 것도 용기가 되지만.”

프로듀서는 소매를 걷어 자신의 오른쪽 팔꿈치를 내게 보여주었다. 총 세 군데, 구멍이 뚫렸던 흉터가 있었다. 그것은 프로듀서가 저지른 과오(過誤)의 상처. 장애물은 반드시 넘어야만 한다는 그 자신의 오만이 불러온 최후였다. 아마도, 그의 왼쪽 어깨에도 같은 상처가 있을 것이다.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그 옆으로 돌아서 가는 것 또한 용기가 될 수 있어. 무모한 용기는 만용이 되고, 만용은 곧 파멸의 지름길이 된다.”

걷었던 소매를 다시 되돌리면서, 프로듀서는 또다시 빙그레 웃었다.

“거기다, 너는 이제 혼자가 아니잖아? 네가 잘못되더라도 붙잡아줄 동료들이 있잖아?”

 

-너는 아이돌이야. 지금은 유닛 활동을 하고 있는.

-글쎄, 내게는 너희들이 희망이려나.

 

“나에게는 그런 것이 없었어. 죄다 나를 부추기고, 내 등을 떠밀기에만 바빴지. 결국 나는 멈추는 법을 몰라서 추락했지만, 네가 그런 꼴이 되는 건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엔 안 될 거다.”

잠시 말을 멈추고 프로듀서는 드링크를 한 모금 마셨다.

“너는 내 아이돌이고, 나는 네 프로듀서니까.”

그렇게 말하는 그의 모습에 두근, 하고 심장이 크게 뛰는 바람에 나도 모르게 잠시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프로듀서는 검지 하나를 세워 내 시선을 다시 붙잡았다.

“자, 그럼 여기서 질문. 퇴원하고 나서 나는 무엇을 했을까요?”

“어……?”

나는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무엇을 했을까.

저렇게 열정적이고, 긍정적인 사람이니까 뭐라도 하지 않았을까? 맞아, 그러고 보니 할리우드에 있었다고 했지.

“어……새 일자리를 찾아보지 않았을까?”

“땡!”이라고 말하며 그는 검지손가락을 좌우로 까딱까딱 흔들었다. 그리고는 왼팔에 찬 손목시계를 풀어 테이블 위로 올려놓았다.

“자, 정답은, 여기에 있습니다. 좀 지저분할 수도 있으니까 주의하시고.”

그렇게 말하면서 그는 손목시계를 푼 왼팔의 소매를 걷어 올렸다. 그제서야 나는 프로듀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저 시계를 푸는 일이 없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준비 됐어?”

대체 무엇이길래 이렇게까지 하는 것일까, 라고 생각하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가 손목을 뒤집고, 빛 아래로 드러난 그의 손목을 본 순간 나는 숨을 삼켰다.

언제나 손목시계의 끈으로 가려져 있던 그 장소. 손목의 정맥이 드러나는 그 자리에 있는 것은 끔찍한 자해의 흉터였다. 도대체 몇 번이나 시도했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것은 그가 일부러 굵은 시계줄을 사용해서 가리고 다녀야 할 정도로, 그 흉터는 결코 가벼워 보이지 않았다.

“어, 미안. 이치노세 정도라면 괜찮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건 좀 심했나…….”

내 표정을 보고 진심으로 미안한 듯, 프로듀서는 재빨리 소매를 내리고 시계를 다시 차면서 분위기를 환기하려는 듯 밝게 말했다.

“뭐, 그러니까 희망은 공짜가 아니라는 거지. 바닥의 바닥을 오랫동안 헤맨 끝에 간신히 찾아낸 작은 별 조각이라고나 할까?”

그런 그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문득, 노래의 가사가 떠올랐다.

 

[눈물이 멈추지 않을 때나]

[발이 걸려 넘어지는 일도 있지만]

[내일을 향해 다시 걸음을 내딛고 싶어]

 

모든 것을 잃어버린 절망 속에서 어릴 적 품었던 작은 꿈이 만들어낸 한 줄기 빛. 그야말로 씨앗이 발아하고, 봉오리가 되어 개화하는 것과 같지 않은가.

다시 소매를 내리고, 손목시계를 차면서 프로듀서는 한숨을 내쉬듯 이야기를 계속했다.

“뒤집어 말하면, 절망 속에 빠져보지 않는 이상 희망은 찾기 힘들어. 희망이란 별 같은 녀석이거든.”

“별?”

“자, 한낮에는 별이 안 보이지? 해가 지면 보이고. 희망이란 그런 거야. 밝은 낮에는 내 주위에 있어도 있는지 모를 정도로 아무것도 아니지만, 해가 지고 나면 그것이 이정표가 되지.”

조용히 타이르듯 말하는 프로듀서의 이야기를 나는 머릿속으로 노랫가사와 함께 곱씹었다.

 

[꿈을 꿈을 이룰 날개를 지금]

[펼쳤다면 드넓은 하늘에서 노래하자]

 

그렇게 찾아낸 희망이라는 빛으로, 지금의 그는 이렇게 반짝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기껏 하는 말이 이런 거라서 미안하지만, 내 입장에선 가능하면 현실에서는 희망 따윈 찾지 않는 쪽이 제일 좋다고 생각한다. 노래 안에서만 찾을 수 있게 말이야.”

“그렇구나…….”

“그래, 좀 참고가 됐어?”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으음, 되었다면 됐고, 아니라면 아닌데……저기, 프로듀서는, 괜찮아?”

“내가 뭘?”

“으응, 아무것도 아니야.”

태연하게 되물어오는 그의 모습에 나는 내심 안도하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쓸데없는 질문이었다. 아무리 프로듀서의 멘탈이 좋다지만, 오늘은 내 이기적인 질문 덕분에 트라우마를 거의 1:1로 대면한 수준이었으니……아니, 이제는 솔직해지자. 지금의 나는 평범한 소녀 이치노세 시키니까.

“저기, 이거 줄게. 내가 괜한 걸 물어서…….”

나는 가지고 온 가방에서 작은 향수병을 꺼내어 프로듀서에게 내밀었다.

“어? 뭐야?”

“마음이 진정되는 향. 마음이 심란할 때 맡으면 가라앉히는 데 도움이 될 거야.”

“오오, 좋은 거잖아? 고맙다.”

“그럼, 늦은 시간에 실례했습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프로듀서에게 꾸벅, 허리를 숙였다. 그러자 프로듀서도 자리에서 일어나 옷걸이에 손을 뻗었다.

“가려고? 잠깐만, 데려다 줄게.”

“아냐, 괜찮아. 혼자 갈 수 있어.”

“내가 안 괜찮아. 하다못해 택시라도 태워 줄 테니까.”

“……알았어. 고마워.”

 

 

집에 돌아와서, 나는 옷을 갈아입을 생각도 하지 않고 침대로 뛰어들었다. 오늘 낮에 읽었던 시집의 내용을 떠올리면서 이어폰을 귀에 꽂고 곧바로 ‘꽃봉오리’의 후렴구 부분을 재생했다.

 

[작은 빛을 가슴에 품고서]

[희망의 씨앗을 푸른 하늘을 향해 날리자]
[걸어온 길을 잊지 않도록]
[네가 있으면]
[또 한 송이 꽃이 피어나]

 

지금까지는 글자로만 이해했던 가사가 하나하나씩 가슴으로 스며들었다. 난생 처음 느껴보는 감각에 이따금씩 전율하면서, 나는 이어폰을 낀 채 이불을 뒤집어쓰고 둥글게 몸을 말았다.

마치 꽃봉오리가 되듯이.

그래, 나는 꽃봉오리.

무엇이 될 지 모르는 꽃봉오리니까, 이제부터는 한 가지에만 전념하자.

뭐어, 전념이라기 보다는 ‘그’를 위해서……이려나.

반복해서 재생되는 노래를 들으며, 마치 자궁 속의 태아처럼 동그랗게 몸을 만 채 나는 조용히 잠이 들었다.

 

꿈을 꾸었다.

어두운 진흙탕에 서 있는, 왼쪽 팔이 없는 한 남자가 나오는 꿈이었다.

외팔이 남자는 무언가를 찾는 것처럼, 끊임없이 진흙탕을 헤매고 다녔다. 이곳 저곳을 들쑤시고 다니던 그의 눈에, 새까만 어둠을 뚫고 새어 나오는 아주 미약한 빛이 보였다. 외팔이는 마치 무언가에 씌인 것처럼 그 빛이 나오는 곳으로 갔다.

그 곳으로 향하는 길은 험난했다. 가파른 오르막을 오르다 돌부리에 걸려 다시 굴러 떨어지기도 하고, 자기 키보다도 큰 어마어마한 바위를 거의 달라붙다시피 하여 억지로 기어 올라가기도 했다. 독을 품은 독사도 있었고, 굶주린 그에게 달콤한 음식 냄새를 풍기며 교묘한 함정으로 그를 유인하던 나쁜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이겨내고, 결국 남자는 그 곳에 도착했다. 이름 없는 풀들이 가득한 초원에서, 남자는 빛의 근원을 발견했다. 그것은 다 썩어가는 낡은 상자였다. 남자는 상자가 부서질세라 조심스레 그것을 열었다.

상자 안에 들어있던 것은 낡은 고깔모자와 빛 바랜 망토, 그리고 금이 간 작은 지팡이였다.

남자는 모자를 쓰고, 하나밖에 없는 팔로 간신히 망토를 둘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금이 간 지팡이를 들자, 외팔이의 모습은 눈 깜빡할 사이에 말끔한 양복 차림의 남자로 바뀌어 있었다. 그의 뒷모습은 어째선지 굉장히 낯익은 모습이었다.

 

 

 

다음 날.

 

사무실에 도착하기가 무섭게, 나는 프로듀서를 찾아가 트레이닝 룸으로 끌고 갔다. 그리고는 다짜고짜 노래를 부르고 싶다고 말했다. 무슨 일인가 의아해하면서도 그는 내 억지에 어울려 주었다.

 

[분명 내일도 꿈의 꽃이 피겠지♬]

 

노래가 끝나고, 장비 앞에 서 있던 프로듀서가 장비를 멈추었다.

“휴우, 좀 어때? 괜찮은 것 같아?”

여전히 뒤돌아 선 상태인 그의 등에 나는 호흡을 정리하면서 흘러내리는 땀을 닦았다. 어제 했던 것들이 효과가 있었던 듯, 확실히 노래가 끝나도 몸이 가벼웠다.

빙글, 돌아선 프로듀서의 얼굴에는 만족했다는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그 표정을 보고 나도 모르게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괜찮은데? 엊그제보다 훨씬 더 노래답다.”

“그래? 잘됐네. 어제 했던 게 효과가 있었던 것 같아.”

“그러게. 나도 도움이 돼서 다행이군. 자 그럼 여기서 내 개인적인 어드바이스를 하나 해 주마.”

프로듀서는 품 속에서 한 장의 CD를 꺼냈다.

“조금 전까지 불렀던 건 너를 제외한 4명의 화음이 들어간 것이지만, 이거는 순수하게 반주만 따온 물건이야. 한번 이거에 맞춰서 불러봐.”

CD를 넣고 재생버튼을 누르자, 아까와 똑같은 음악이 흘러나왔다. 차이점이라면 이 노래에서는 나 혼자만 움직이고 있다는 것.

‘어라? 느낌이 달라…….’

지금까지와는 달리 곡에서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쉴 새 없이 나를 압박해오던 가사의 무게도, 혼자 치고나가는 것이 두려워질 정도였던 동료들의 화음도 느껴지지 않았다.

1절이 끝나갈 무렵, 프로듀서는 장비를 정지시키고 CD를 뽑았다.

“어때, 느낌이 많이 다르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노래를 부를 때, 노래의 분위기를 타는 경향이 있어. 나쁜 건 아니고, 오히려 따지자면 좋은 버릇이지만, 이렇게 서정적인 분위기에다 아카펠라가 중심이 되는 노래는 궁합이 안 맞지.”

프로듀서의 말에, 나는 이전에 불렀던 노래들을 떠올렸다.

“네가 이전에 불렀던 Tulip은 너희들의 개성이 너무 강해서, 개인 파트를 최대한 늘리는 방향으로 컨셉을 잡았다. 하지만 이 노래는 그 반대야. 지나치게 서정적으로, 오히려 너희들의 개성을 죽이는 방향으로 컨셉을 잡았지. 네가 고생한 건 아마 이런 이유도 있을 거라고 생각해.”

“그렇구나……그래서 뭔가 톱니바퀴가 안 맞는 것처럼…….”

“그래. 이전에 부르던 노래에선 왠지 모를 무게감도 느껴졌을 거야. 하지만 방금 전 반주만 있는 버전에서는 없었지?”

“맞아! 너무 가벼워서 나도 모르게 막 치고 나갔는데.”

“그래. 네 혼자라면 모르겠지만, 다섯 명이 부르게 되면, 거기서 관성처럼 네 명의 화음이 발목을 잡는다. 유닛 전체로 놓고 보면 네가 너무 튀어다니는게 오히려 독이 된 셈이야.”

프로듀서의 말이 마치 송곳처럼 내 가슴을 따끔하게 찔렀다.

“통통 튀는 것도 좋지만, 이따금은 우아하게 걸을 줄도 알아야지. 안 그래?”

빙그레 웃으면서 프로듀서는 다시 USB를 꽂아넣었다.

“자, 접근방식이 틀린 걸 알았으니, 제대로 다시 해보자고.”

“응!”

 

 

 

**********

 

 

라이브 당일.

 

“저기, 잠시 너랑 할 이야기가 있는데 괜찮아?”

최종 리허설을 마치고, 대기실에서 마지막으로 무대의 순서를 점검하던 프로듀서는 시키의 부탁을 받고 그녀의 뒤를 따라 복도로 나왔다. 이제 막 무대의 최종점검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복도는 인기척조차 없이 고요했다.

“무슨 일이야? 여기까지 불러내고. 아, 냄새 맡고 싶었어?”

"아니, 오늘의 나는 퓨어한 이치노세 씨. 오늘만큼은 변태 놀이 없음! 이니까."

"역시 자각은 하고 있었구나? 다행이야."

잡생각을 쫒아내듯 고개를 붕붕 내저으며, 시키는 수줍은 미소를 띄웠다.

“저기, 그러니까, 저……나는, 이렇게 너에게 순화되어서, 이렇게 되었거든.”

만개한 꽃처럼 새하얀 드레스를 걸친 그녀는 평소와는 다르게 프로듀서와 좀처럼 시선을 맞추지 못하고 손을 등 뒤로 모은 채 발끝을 이리저리 꼬았다.

“언제나 네가 우리에게 일어설 용기를 주니까, 응, 거기에 감화된 것 같아요. 그러니까, 저, 요 며칠 고민하면서, 완전히 독이 빠져버려서…….꺄핫?!”

어쩐지 횡설수설하며 점차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는 시키의 두 어깨를 프로듀서가 조심스레 짚었다.

“……이치노세, 너 뭐 잘못 먹었냐? 진짜로 위험한 약 같은 거 한 건 아니지?”

그 말을 들은 시키의 얼굴에서 빨간 기운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아아, 진짜! 사람이 중요한 얘기 하는데!”

“미안.”

“그, 그러니까, 아 몰라! 너 때문에 분위기 다 깼잖아! 안 할래!”

“미안하다니까. 그러니까 끝까지 다 해줘.”

“……딱 한 번만 할거야.”

“응.”

‘흠, 흠.’하고, 시키는 분위기를 환기하듯 작게 헛기침을 했다.

“저기, 그, 네 이야기 덕분에 드디어 깨달았어. 내가 두려워하던 것, 이치노세 시키도, 시키냥도 모두 나 자신이라는 사실 말이야. 응, 네 덕분이야.”

“잘 된 일이긴 한데, 내가 너한테 그런 이야기를 했었나?”

‘……정말, 눈치가 없는 건지 일부러 그런 건지…….’

“저기, 나, 지금은 꽃인 척 하고 있지만, 또 생각이 나면 꽃봉오리로 돌려놔 줘. 이제는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무엇이든 될 수 있으니까.”

그녀의 말을 듣고, 물끄러미 시키를 바라보던 프로듀서는 크게 웃음을 터뜨리며 그녀의 머리를 손날로 통, 하고 내리쳤다.

“아읏.”

“돌아가긴 뭘 돌아간다는 거야, 아직 꽃봉오리도 못 벗어난 녀석이.”

내려친 손을 그대로 머리에 얹어, 마치 고생했다는 듯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스타일이 망가지지 않을 정도로 최소한의 움직임이긴 했지만, 그 마음만큼은 어떻게든 전해진 모양인 듯 시키는 마치 브러싱을 받는 고양이처럼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넌 이제 18살이야. 식물로 치면 이제 막 꽃봉오리가 맺힐까 말까 하는 녀석이지. 그런 녀석이 애늙은 소리 하는 거 아니다.”

“애늙은 소리라니……”

”실패 따윈 걱정하지 마. 너는 그냥 앞만 보고 뛰어. 지금 네가 할 걱정은 모두 내가 해야 할 일이니까.”

“흐흥~, 당신도 가끔은 멋진 소릴 하는구나”

“그럼, 너보다 열한 살이나 더 먹었다고.”

“식물로 치면 이제 꽃이 시들어 갈때인가요~?”

“아니거든?”

프로듀서는 손목시계를 슬쩍 들여다보았다.

“자, 이제 시간 됐다. 가서 한번 보여봐. 꽃봉오리의 마음이란 녀석.”

“알았어. 한 눈 팔지 말고, 똑바로 봐야 한다?”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야.”라고 말하면서, 프로듀서는 V자로 꺾인 빨간색 사이륨 막대를 들어 보였다.

“이번엔 무대 뒤가 아니라, 무대의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봐 주마.”

 

 

**********

 

 

[분명 내일도 꿈의 꽃이 피겠지♬]

 

노래가 끝나고, 반짝이는 노란색, 파란색, 분홍색의 사이륨 사이에서 단 하나, V자로 꺾인 붉은 사이륨이 눈에 띄었다. 안무의 마무리 동작을 마치고, 조명이 암전하기 직전, 나는 재빨리 그 붉은 사이륨이 있는 방향으로 손을 흔들었다. 그 일대의 팬들이 환호성을 지르기 시작한다.

'미안해!'라고 그들에게 마음 속으로 고개를 숙이며, 나는 붉은 사이륨을 바라보았다.

곧 조명이 꺼지고, 사이륨을 제외하곤 실루엣조차 보이지 않았지만, 내 행동에 잔뜩 미간을 찌푸리고 있을 그의 얼굴은 얼마든지 떠올릴 수 있었다. 무대 뒤로 향하면서, 나는 나 혼자만 볼 수 있는 웃음을 지었다.

 

 

어때? 당신이 심고, 당신이 키운 꽃봉오리는 아름답게 피었어?

저기, 당신은 나를 아직 맺히지 않은 꽃봉오리라고 했었지만……그거 알아?

맺히지 않은 꽃봉오리도 그 안에는 꽃이 있다는 사실을.

비록 작고 미숙한 꽃이지만 그래도 그건 분명히 꽃이야.

언젠가 때가 되면 그 꽃은 반드시 자신을 피워준 해님을 향해 활짝 피어나겠지.

그 때가 되면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나의 해님♬

 

 

 

 

 

 

 

그러니까, 손으로 쓴 건지, 발로 쓴 건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치노세 시키의 이야기입니다.

우선 산만한 이야기의 흐름에 대해서 변명을 좀 하겠습니다.

꽃봉오리 시키는......어 그냥 특이점이에요 특이점.

방황하는 어린 중생을 특훈시켰더니 웬 큐트식 메가데레 캐릭터가 짠! 하고 튀어나오지 뭡니까.

특훈 전, 너무나도 진지한 이치노세씨에게 빠져서 시작한 글인데 하편으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별 생각 없이 특훈을 눌러버리는 바람에 이미지가 크게 바뀌어 버렸습니다.

이치노세씨 특훈 대사 너무 달달해요. 아이고 나 죽네!

 

아무쪼록, 엉망진창인 글이지만 재밌게 읽어주셨으면 좋겠네요. 

혹시나 어색한 부분이 있다면 지적해주시는 쪽이 더 좋습니다. 그렇다고 욕먹는게 좋은 건 아니고요.

그럼 다음 이야기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아마도 미나미 혹은 카나데가 되지 싶은데.....

 

아, 큐트식 메가데레가 뭐냐면 큐트 4천왕으로 대표되는 바로 그겁니다. 얀데ㄹ....읍읍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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