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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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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5-05, 2016 04:37에 작성됨.

 

 

 비는 너무도 세차게 땅을 두드린다. 기세등등한 빗줄기에 우산 든 사람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발을 빨리 움직인다. 자동차도 미끄러지지 않으려 속도를 줄인다. 전철을 타려는 사람들도 타는 곳 먼발치에서 지붕을 우산 삼아 쓰고 기다린다. 시끄러운 도시 소음이 빗소리에 사라진다. 그리고 빗물이 떨어지는 창문을, 한 사람은 말없이 쳐다본다.
 “잘 먹었어?”
 창 밖을 보던 여자 곁으로 남자가 커피 두 잔을 들고 와, 탁자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한 잔을 여자 앞으로 슬쩍 밀었다.
 “아, 감사합니다.”
 여자는 잔을 만지작거렸다.
 “죄송합니다. 뭐라도 도와드렸어야 했는데…….”
 “신경 쓰지 마. 손님을 대접하는 것도 집주인의 의무지.”
 남자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손을 저었다.
 여자는 쓴웃음을 짓고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따뜻했다. 창 밖의 비와는 전혀 다른 감촉이다. 향긋한 냄새와 우유와 어우러진 부드러운 맛이 입안을 감싼다. 남자가 여자의 취향을 알기라도 한 것인지, 여자는 내심 기뻤다. 잔을 내려놓고 앞을 보자 남자는 창 밖의 비를 바라보고 있다. 조용하게, 잔을 들고서, 하염없이 비를 바라본다. 여자도 남자를 따라 비를 바라본다. 적막 속에 오직 빗소리만이 귀를 때린다.

 

-

 

 -딩동
 초인종 소리가 울린다. 집 주인이 나오기 전에 여자는 주위를 둘러봤다. 잔디밭, 묘목, 운치 있는 의자, 자그마한 정원이다. 집도 혼자 살기엔 약간 커다랗다. 그리고 보기에도 고급스럽다는 느낌을 준다. 찰칵 하고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문 뒤에선 남자가 나왔다. 부스스한 갈색 머리, 검은 안경, 반쯤 감긴 눈, 너무도 편해 보이는 반팔과 반바지다.
 “아, 어서 와.”
 남자는 눈을 비비면서 웃으며 얘기했다.
 “후우. 지금 해가 중천에 떴는데, 아직까지 주무신 건가요?”
 여자는 한숨을 쉬었다. 남자는 머쓱한지 머리를 긁었다.
 “끝내야 할 일이 좀 남아서 늦게 잤거든. 자, 들어와.”
 남자가 여자에게 들어오라는 손짓을 했다. 들어가니 화려하진 않지만 소박하게 꾸민 복도가 눈에 들어온다. 닫힌 몇몇 문과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지나 거실로 온 두 사람. 소파와 TV, 탁자 말고는 없다.
 “거기 앉아서 기다려. 차라도 내올게.”
 남자는 거실과 이어진 부엌으로 들어갔다. 여자는 소파에 앉아 남자의 지켜봤다. 물을 끓이고, 거름망에 찻잎을 넣고, 충분히 우려질 때까지 기다린다. 겉으로 보이는 분위기처럼 작은 행동 하나하나에 다정함이 묻어난다. 남자가 들고 온 찻잔은 하나였다. 잔을 탁자 위에, 여자 앞에 올려둔다.
 “잠시만 있어. 빨리 씻고 올게.”
 2층에 올라가 갈아입을 옷을 챙겨온 남자는 곧바로 욕실로 들어갔다. 샤워기의 물소리가 들렸다. 여자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쌉싸래한 맛과 은은한 향, 적당한 온기. 아직 추위가 가시지 않은 바깥 날씨를 잊게 한다. 다만 마냥 기다리기 힘들어 가방에서 MP3 플레이어를 꺼낸다. 녹음할 곡을 들으려 이어폰을 귀에 꽂고 음악에 빠진다. 눈을 감고 음색을 느낀다. 아직 초반 가이드지만, 이 부분은 어떤 느낌으로 불러야 할지, 이 부분을 어떤 느낌을 갖고 연주했을지 상상한다. 몇 번의 반복이 끝나고 이어폰을 뺀다. 눈을 뜨니 옆엔 말끔하게 차려 입은 남자가 앉아 있었다. 잘 말린 곱슬머리, 하얀 와이셔츠와 약간 여유가 있는 청바지다.
 “깜짝 놀랐잖아요.”
 여자가 살짝 놀랐는지 남자한테 뾰로통하게 말했다.
 “그거 내가 쓴 곡이야?”
 남자가 물었다. 여자는 그렇다고 했다.
 “늦게 잔 이유가 그거 때문이었는데, 이제 녹음만 남았네.”
 남자는 빙긋 웃었다. 그리고는 완성곡을 가져오겠다면서 2층으로 빠르게 올라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랩톱 컴퓨터와 모니터링 헤드폰을 들고 왔다. 여자는 헤드폰을 받아 들고 썼다. 재생하자 잔잔한 기타 음색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뒤에서 있는 듯 없는 듯, 바이올린과 첼로 등의 현악기가 기타를 받쳐준다. 박자를 맞춰주는 악기 없이 음색만이 이어지는 그런 곡이었다. 남자의 작곡 스타일이다. 그래서인지 여자는 남자의 곡이 좋았다. 하지만 좋아서 너무도 아팠다. 듣는 지금도 가슴이 아팠다. 곡이 끝나고 여자는 만족스런 얼굴로 남자를 보았다.
 “좋은 곡이네요. 누구나 들어도 가슴이 뭉클해질 만큼.”
 남자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혹시 여자가 퇴짜를 놓으면 어쩌지 하면서 전전긍긍했으니 말이다. 다행히 마음에 든다고 하니 마음이 놓여 축 늘어졌다.
 “그런데 가사는 없나요?”
 여자는 완성곡에 가이드가 없으니 뭔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원래라면 남자의 가이드가 들어있어야 했다.
 “이번엔 곡을 숙지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일부러 뺀 거야.”
남자는 그렇게 말했다. 여자는 무슨 생각이 있겠거니 하고서 다시 헤드폰을 쓰고 음을 숙지했다. 어느새 하늘이 어두워지고, 빗방울이 하나씩 떨어졌다.

 

 잎사귀에, 잔디에, 옅은 꽃잎에 빗방울이 떨어진다. 남자는 비를 바라본다. 여자도 헤드폰을 벗고, 비를 바라본다.
 “오늘 비는 안 내릴 거라더니. 일기예보도 엉터리네요.”
 여자가 곤란한 듯 푸념했다. 비가 올 줄 몰라서 우산을 안 가져왔으니. 이건 여우비다. 조금 있으면 그칠 것이라 생각했다. 여자의 푸념에도 남자는 아무런 표정 없이 밖만 보았다. 그의 시간이 멈춘 듯이 적막했다.
 “난 비가 좋아.”
 남자가 입을 열었다.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에 쌓인 것들이 전부 씻어진다고 할까? 그런 느낌이 들어.”
 그러고는 여자를 쳐다 보면서
 “하지만 이번엔 좀 오래 봐야 할 것 같아.”
 라면서, 살짝 보이는 슬픔을 감춘 채로 말했다. 여자는 알았다. 남자도 자기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서둘러 캐물을 생각은 없었다. 둘은 아직 서로를 이해할 시간이 남아있다고 생각했다. 그의 마음이 모두 씻길 수 있도록, 여우비가 아니기를 바라며, 두 사람은 말없이 비를 보았다.

 

 “일어났어?”
 여자는 자기도 모르게 소파에 누워 잠이 들었다가 부스스 일어났다. 남자는 여자가 자는 동안 밥을 하고 있었는지, 탁자 위엔 요리가 놓여 있었다. 두툼한 스테이크와 샐러드, 그리고 레드 와인.
 “냉장고에 마침 쇠고기가 있더라고. 다행이다 싶었지.”
 여자는 미안한 마음에 어쩔 줄 몰랐지만, 남자는 괜찮다며 진정시켰다. 그가 와인잔을 들자, 여자도 화답했다. 쨍하고 잔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와인으로 입가심을 하고 고기 한 점을 입에 넣었다. ‘맛있다’란 말이 바로 나올 만큼 잘 익은 고기와, 아삭한 샐러드. 혼자 사는 남자가 만들었다고는 믿을 수 없는 요리 수준이었다.
 “입에 맞나 모르겠네.”
 남자가 물었다.
 “솜씨에 더 감탄하게 되네요.”
 여자는 솔직히 대답했다.
 “다른 거 더 필요한 건?”
 “아뇨. 충분해요.”
 여자는 이미 충분히 민폐인 것 같아서 마음이 뒤숭숭한데, 여기서 더 뭘 바랄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식사는 별 말 없이 끝났다. 하고 싶은 말은 굴뚝 같아도, 식사를 망치고 싶지 않았기에. 식사를 대접 받은 걸 대신해서 설거지를 하겠다고 나선 여자를, 남자는 괜찮다면서, 그저 편하게 있으라면서 대신 부엌으로 들어갔다. 물소리가 들린다. 여자는 하릴없이 창 밖의 비를 바라봤다.

 

-

 

 커피 향이 점점 사그라들 즈음, 여자가 말을 꺼냈다.
 “이제 얼마 안 남았네요.”
 “응.”
 “우리 이렇게 헤어지는 걸까요?”
 “…….”
 남자는 말이 없었다. 그리고 긴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네 노래를 처음 담당했을 때였지.”
 그는 프로듀서였다. 이름만 들어도 누군지 아는 유명한 프로듀서는 아니었으나, 그가 쓴 몇몇 곡이 히트하자 조금씩 이름이 알려진 정도였다. 어느 날, 사무소에서 그에게 곡 의뢰를 부탁했고, 완성된 곡을 녹음하려 여자가 스튜디오에 들렸다. 그리고 남자는 여자의 목소리를 듣고서 눈이 떠졌다.
 “그 때, 너에게서 빛을 봤어. 뭐랄까. 안개가 잔뜩 낀 바다 한가운데서 홀로 서있는 등대라고 해야 할까? 네 목소리가 그 빛이었지. 그 빛에 이끌려서, 그 빛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보여주고 싶어서 널 아이돌이 아닌 보컬리스트로 바꾼 거야. 그 땐 많은 일이 있었지.”
 그랬다. 여자를 아이돌에서 보컬리스트로 바꾸는 것이 좋겠다는 남자의 말에 사무소 사장은 물론, 다른 아이돌들도 걱정을 했다. ‘우리는 하나’라는 공동체 의식에서, 누군가가 먼저 전문적인 길로 걸어가는 것. 뒤에서 그것을 지켜봐야 하는 남겨진 사람들. 처음엔 갈등이 심했지만, 다른 아이돌들의 존중, 먼저 앞선 사람의 겸손, 뒤를 봐주는 사람의 희생에 완전히 없어졌다고 할 순 없지만, 표면적으로 드러나지는 않게 되었다. 그리고 다른 아이돌들도 하나 둘씩 전문적인 길로 걸어갔고, 모두들 각자의 길에서 힘쓰고 있다.
여자의 목소리는 대중들의 마음을 흔들기에 적합했다. 처음엔 아이돌이었단 말에 거부감을 느끼던 사람들도, 어느덧 자신도 모르게 그 목소리에 빠져버리게 되었다. 평론가들의 평가도 우호적이었다.
 ‘꺼진 마음에 다시 불을 밝혀주는 목소리.’
 여자를 표현하는 데 이런 표현이 쓰일 만큼.
 “그래서 작곡이나 작사도 즐거웠어. 내 노래를 불러줄 누군가가 있다는 게 얼마나 든든했는지 몰라.”
 그런 관계가 지속되다가 남자와 여자는 서로를 좋아하게 되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었다.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빛을 내는 등대와, 그 등대를 보수해주는 사람이었기에.
 하지만 그것도 언젠가 끝이 나는 법이다. 보수공은 다른 배들이 등대를 이정표 삼는 걸 뿌듯하게 바라봤고, 다른 보수공들도 나타남으로써 자신의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했다. 남자는 그랬다. 하지만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둘의 사이는 아직 세간에 알려지진 않았으나, 노랫말엔 남자가 여자를 향한 마음이 듬뿍 담겨 있었고, 몇몇 평론가들 사이에서 남자와 여자의 관계를 의심했다. 기자들도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덜컥 겁이 나더라. 우리 관계가 들켜서 너한테 피해가 가지 않을까 하고.”
 그래서 남자는 한동안 여자를 멀리했고, 신곡은 다른 가수들에게 주는 등, 여자와 관계를 끊기 시작했다. 이번에 쓴 곡도 여자에게 주는 마지막 곡이었다.
 “일방적이에요.”
 여자가 말했다.
 “전 관계가 밝혀져도 상관 없다고 생각했어요. 피해를 입는 것도 나고, 그걸 해결하는 것도 나인데, 왜 당신이…….”
 잠시 말이 막힌 여자는 숨을 가다듬었다.
 “당신이 내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 피할 이유는 없었어요.”
 여자는 오늘 이렇게 찾아온 이유도 남자의 일방적인 회피를 더는 지켜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직 마음에 미세한 떨림이 있었네요.”
 비를 보면서 말한 남자의 말에 여자는 알 수 있었다. 헤어져야 한단 걸 알면서도, 헤어지고 싶지 않은 모순이다.
 “맞아. 헤어지고 싶지 않아. 하지만 그래야 해.”
 남자는 여자에게 다가갔다.
 “네가 힘들어하는 걸 볼 수 없으니까.”
 “이기적이야, 정말…….”
 둘은 서로의 숨결을 빼앗고, 심장 소리가 들릴 만큼 가까이서 호흡을 맞췄다. 창 밖엔 아직 비가 내렸다.

 

-

 

 며칠 뒤, 스튜디오에서 두 사람은 마지막 노래를 녹음하려고 만났다.
 “가사는 녹음실 안에 준비해뒀어.”
 “알겠어요.”
 녹음실에 들어간 여자는 가사를 읽었다. 한 글자, 한 문장을 읽을 때마다 가슴이 떨리고,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리고 눈물을 흘렸다. 남자가 여자에게 줄 수 있는 마지막 선물. 서로는 바보처럼 눈물 흘리며 웃기만 했다. 끝나지 않았으면 하는 시간은 노래가 완성될수록 줄어들었고, 결국 녹음이 끝나면서 그 시간도 끝났다. 스튜디오를 나서기 전에 남자는 여자에게 남은 선물을 주었다.
 “몇 달 뒤면 네 22살 생일이네. 그 땐 내가 곁에 없을 테니까 미리 줄게.”
 품 속에서 꺼낸 반지와 목걸이. 화려하진 않아도 소박한 멋이 살아있는 물건이었다.
 “끝까지 눈물 나게 하네요.”
 남자는 직접 목걸이를 걸어주었다.
 “반지는 음……. 뭐, 나중에 쓸 일이 있으면 그 때 끼워도 돼. 지금은 필요 없겠지만.”
 남자는 멋쩍게 웃었다.
 헤어질 시간이다.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마지막으로 입을 맞췄다.
 헤어짐이 다른 시작으로 바뀔 것이라 믿으며.

 

-

 

 “지금 들으신 곡은 여러분도 많이 아시는 노래일 겁니다.”
 라디오에서 음악 관련 방송이 나왔다.
 “이 가수는 어떻게 봐도 정말 대단하네요.”
 “가수도 가수지만 전 노래가 정말 좋더군요.”
 라디오 진행자들은 자신의 생각을 얘기했다. 이번에 남자가 쓴 곡이 음반 판매량 1위를 달리고 있었기에 TV든 라디오든 인터넷이든 이 노래에 대한 의견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런데 이 작곡가와 가수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진 않으신가요?”
 “글쎄요. 몇몇 기자들이나 평론가들이 그런 의심은 했는데, 가수나 작곡가 쪽에서 딱 잘라 없다는 말이 나와서요.”
 “무슨 관계가 있어도 노래랑 가수가 좋으면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두 진행자는 호탕하게 웃었다.
 “아무튼 이번 ‘키사라기 치하야’의 노래, 잘 들었습니다. 다음 노래는…….”
 그와 동시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키사라기 치하야 씨, 스탠바이 부탁드립니다.”
 “네!”
 여자는 라디오를 끄고 무대로 나선다.
 목걸이와 반지가 조명을 받아 빛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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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제 비도 내렸고, 노래가 좋아서 한 번 끄적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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