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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CHEMY]아베 나나 "은하철도의 분실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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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3-27, 2016 23:51에 작성됨.

수 많은 별들이 멋대로 태어나 이름조차 받지 못한 채 저물어간다. 우주를 가로지르는 열차는 피어나지 못한 모든 꿈의 원망과 체념을 수거해 암흑 물질 너머로 던져버렸다. 추가방영 연장방영 휴방 분할2쿨 특별편 OVA오리지널 스토리까지 다 써 가며 열차 짐칸의 말석이나마 붙잡으려 해도 무정한 은하철도는 기계적으로 모든 낙오자들을 절대영도의 공간으로 추방하고, 비정한 대숙청의 폭풍 속 살아남은 일부 중의 일부에게만 우주 저편의 유토피아 우사밍 별에 내려서는 것을 허락해준다.

 

나 아베 나나는 이번에도 살아남았다. 하지만 열차는 운 좋게 살아남은 바퀴벌레들을 유토피아에 내려주지 않는다. 다음 숙청이 있기 전까지 환승을 요구해올 뿐이다.

다음 숙청에서도 살아남을 자신이 없었기에, 중간의 간이역에 내려서 언제 올 지 모르는 기차를 찾고 있었다.

 

---

 

"으윽....."

 

물리 치료를 받은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허리가 삐걱거린다. 혹시 디스크가 온 것은 아닐까. 30을 넘은 몸이다. 슬슬 허리 디스크 같은 것을 걱정해야 할 나이다. 마음은 아직도 젊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몸은 지금까지 허비해온 세월의 여파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이 세상에 속일 수 없는 것이 있다면, 그건 자기 자신과 시간일 것이다. 그래, 지금처럼.

 

"아베 선배~ 접시 여기 두겠슴다~"

 

"그, 그래~ 거기 둬요~"

 

아베 선배.

다른 사람을 선배라고 불렀던 적이 언제일까. 연월의 흐름이라는 것은 여러 가지 기억들을 망각의 저편으로 추방해놓고선, 가끔 필요하지 않을 때 단편적으로 면회를 시켜줄 뿐이다. 하지만 반복되는 일상의 시간은 달갑잖은 과거의 자신을 돌이킬 틈을 주지 않는다. 목과 허리의 삽관절이 녹아서 새어나오는 듯 한 아픔이 괴로움을 잊게 해 주는 달콤한 마약처럼 척수를 뒤흔들었다. 괴로움을 지지대 삼아 척추를 고정하고, 팔 아래에서 가슴까지 올 정도로 잔뜩 쌓인 접시를 플로어까지 옮겼다. 손가락 관절이 뒤틀리는 듯 한 소리가 났다.

 

"아, 제 지명은 아직인가요?"

 

"으~음, 오늘은 아직 없네요. 아베 선배 지명 오면 바로 불러드릴테니 걱정 놓으십쇼."

 

입에 한 손가락을 갖다대고 맹한 듯 귀엽게 대답하는 이 후배의 이름은 사토 신. 최근에 들어온 대학생이고, 올해가 마지막 학기인 졸업 예정자이다. 버블 붕괴 이후, 그래도 대학 졸업생의 취직은 그런대로 쉬워진 이 시대에 굳이 슈가하트풀한 일을 해 보겠다고 찾아온 여자다. 일에 대한 열정에 브레이크가 걸리지 않아 헛돌고 있다는 처절한 평가를 맘 편히 비웃을 수 없었다. 슈가하트라니, 우사밍 급으로 처참하지 않은가.

 

"알겠어요~"

 

"아, 그리고 3번 플로어 손님 방금 나갔슴다. 그거 정리하면 청소 좀 부탁드림다."

 

사토는 그렇게 전하곤 메이드복을 팔랑거리며 다시 플로어로 돌아갔다. 최근 들어온 아이들 중 상당히 인기가 많은 아이다. 지명이 쌓이고 쌓여 플로어에서 떨어질 시간이 없다. 어느 가게에서도 플로어와 떨어진 지 꽤 된 나와는 다르다.

 

"3번 플로어인가. 이것만 옮기고 갈까. 으쌰....."

 

온 몸에 힘을 집어넣었다.

동시에 무릎 관절이 비명을 질렀다. 내 비명도 동시에 새어나왔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무릎이 바닥을 찍어내렸다.

 

"에? 무슨 일...... 에?! 선배?! 괜찮슴까?!"

 

"괘, 괜찮아요. 바닥이 미끄러워서 넘어진 것 같.... 으윽, 아."

 

제대로 펴지지 않는 무릎을 한 손으로 억지로 펼쳤다. 관절이 역으로 돌아가 꺾이는 듯 한 느낌에 중저음의 날카로운 신음을 흘렸다.

 

"손 잡으십쇼."

 

"괜찮아요....."

 

주방 싱크대의 손잡이를 지지대 삼아 홀로 일어섰다. 축축하게 젖은 다리가 후들거린다. 무릎 아래로 내려오는 메이드복 치마가 다리의 후들거림을 적절히 감춰주기만을 바랄 뿐이다. 반쯤 펼쳐졌거나, 접힌 다리가 가장 불편한 자세로 굳어 자세를 바꾸는 것을 거부한다.

 

"설 수 있어요...."

 

"아니, 그 선배님, 점장 불러 오겠슴다. 뒷정리 제가 할 테니 오늘은 빨리 들어가십쇼."

 

"아직, 할 수 있어요."

 

"아니, 고집부리지 말고요."

 

"아직이라고!!"

 

비명소리, 혹은 악소리. 슬슬 끝물이 보이는 목이 갑작스런 고음에 갈라져 피를 흘린다. 입 안에서 풍겨져나오는 끔찍한 단내와 불쾌한 쇠맛을 위장으로 억지로 집어삼키곤 입 주위를 닦는 척 하며 구역질을 뒤로 삼켰다.

 

"무슨 소리 하시는 검까! 치마랑 다리 보십쇼!! 지금 장난 아님다! 구급차 부르겠슴다!"

 

사토의 노성이 귓전을 때렸다. 다리? 제대로 펴질 생각을 안 하지만 그게 뭐 어때서. 종종 있는 일이다. 이미 식상하다고 악평을 들은 적만 해도 셀 수가 없다. 눈을 조금만 내리면, 지금도 평소와 같은 다리가 붉게

 

"......아."

 

육안으로 쉽게 볼 수 있을 정도로 큼지막한 유리 파편이 무릎과 다리에 꽃혀 있었다. 새하얀 메이드복 치마 위에 붉은 꽃이 피어 있었다. 안료는 내 피였다.

 

비명은 나오지 않았다. 자신의 신음 소리가 호흡과 함께 무릎을 쑤셔대고 있었다.

 

 

---

 

 

"오늘도 슈가밍을 지명해줘서 고마워~☆ 아, 거기 지명 안한 너한테는 권법 잡는 귀신 하트님의 시어 하트 어택★"

 

구급차를 부르겠다고 난리피는 사토를 말리고, 병원에 가겠다는 다짐을 한 다음에야 짐을 챙겨 나올 수 있었다. 큼지막한 조각 말곤 따로 박힌 유리 파편은 없었다. 식당에서 쓰는 식기라는 것은 어느 정도는 이런 처리가 되어 있어서, 유리가루가 사람 몸에 박혀들어가는 사고는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물론 이번엔 운이 좋았다고 해야겠지만.

 

"아, 저기 나가는 거 우사밍 아니야?"

 

"에? 누굽니까 그거. 본 적 없는데."

 

직원용 출입구를 따로 둘 정도로 큰 메이드카페는 아니다. 출퇴근 할 때는 손님 사이를 가로질러갈 수 밖에 없다.

 

"아아, 우사밍? 어디 계셔? 얼굴 못 본지 꽤 되서 그만두신 줄 알았는데?"

 

"저기 지나가잖아."

 

"메이드카페 죽돌이인 둘만 이야기하지 마세요. 이야기에 좀 끼어듭시다. 저 큰누님 같은 사람이 그 우사밍인지 하는 사람입니까?"

 

"말조심해라, 우리보다 나이 많다. 그런데 아직 계속 하시고 계셧네....."

 

"나이 네타도 질렸는데 말이야. 애초에 전파계 컨셉이 잘 먹히던 게...."

 

"전파+나이 조합? 우와 극불호."

 

지금 일하고 있는 메이드카페는 흔히 말하는 역세권이다. 그것도 금싸라기 수준의. 역에서 걸어서 1분도 채 안걸리는 거리에 자그마한 메이드 카페라니. 도전정신이 대단하다고 해야 할까. 그래도 뭐, 그 덕분에 빨리 나갈 수 있다는 건 장점이다. 아무런 음악도 흐르지 않는 장식용 이어폰에선 손님들의 말소리들이 음악 대신 들렸다. 도망치듯 귀가 열차에 올라탄 후에야, 자신이 걸어온 1분 남짓한 길이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후우......"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며 어릴 적 부터 좋아하던 음악을 틀었다. 싸구려 전자 트럼펫 소리와 부자연스럽게 튀는 효과음, 그리고 가창력 상태가 영 좋지 않은 아이돌의 노랫소리. 이젠 기억해주는 사람도 없는 싸구려 음악이고, 나온 당시에도 아무런 주목을 끌지 못하고 세상에서 자취를 감춰버린 노래다. 얼마 전, MP3에 넣으려고 아마존과 오리콘에 구글을 다 뒤져봤지만 디지털 앨범을 구할 수가 없어서, 결국 카세트테이프에 있던 노래를 MP3로 옮겨오느라 고생했었을 정도로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어린 아베 나나의 눈으로 봐도, 추운 겨울날, 무릎 위로 올라오는 미니스커트를 입고서 판촉활동에 목숨을 걸던 언니들이 빛나보였던 건, 별이 죽어가며 초신성같은 빛을 발했기 때문이었다. 지금보다 무릎이 더 시렸던 날 이후 오랜 시간이 흐를 때 까지, 세상 어디에서도 그 언니들을 본 적은 없었다.

 

".....아, 병원 가야 했지. 지금 문 닫았겠네."

 

열차 바깥을 지나가는 녹색 십자가를 보고 나서야 병원에 가야 한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하지만 이미 늦어버렸다. 좋은 시간을 붙잡지 못한 것이다. 이제 갈 수 있는 곳이라곤 응급실 정도밖에 없다. 뒤늦게 무릎이 시리고 아파온다.

아프다는 말의 뜻은 알아도 시리다는 말의 뜻은 잘 알지 못했던 때, 그 날 처음 산 카세트테이프를 워크맨에 넣고 지금처럼 야경을 바라보며 듣고 있었다. 그 날도 그랬다. 우주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차가웠던 밤하늘 사이를 열차가 가로지르고, 창가에 비친 수 많은 빛들을 그 때 처럼 바라보고 있었다. 겨울의 밤은 빠르다. 그 날도 그랬다. 그 날 이후, 세기 싫어질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빛들은 언제나 모습을 바꾸었고, 때론 밝게 타오르고, 때론 오랬동안 빛났다. 사람들의 기억 저편에 남지 못한 빛들은 모습과 주체를 바꿔가면서도 변함없이 아베 나나의 여로를 비추고 있었다.

 

"아야야....."

 

매일같이 겪는 일이다. 몸이 아파지니 마음도 약해져, 익숙한 귀갓길도 우울하고 맘 약한 소녀처럼 바라보게 되었을 뿐이다. 우사밍 별에서 지구까지 밥벌이 하러 온 외노자이니 이 정도 아픔은 견뎌내야 한다. 이불 속 우사밍 원더랜드에 틀어박힌다면 금세 내일 하루를 살아갈 힘이 생길 것이다. 지금까지 몇년 간 그렇게 살아오지 않았는가. 일하는 메이드카페를 바꾼 적은 몇 번이나 있었지만 이것만큼은 변하지 않았다.

내일도 같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열차에서 내렸다.

 

"저, 저기요?! 잠시만요!! 지금 다리!! 어이! 사람불러!!"

 

"네? 나나한테 무슨 볼 일이라도..... 어라?"

 

역무원이 내게 달려올 때 까지 피에 젖은 스타킹의 존재를 깨닫지 못했다. 발걸음이 붉게 질척거리며 떨어지지 않는다. 결국 늪 속에 붙잡혀선 쓰러져 버렸다. 차가운 돌바닥이 내가 있을 곳이라고 말하며 반겨주었다.

 

그러고보니까 그 언니들, 이름이 뭐였지?

 

 

---

 

 

[선배, 무리하지 마시고 푹 쉬세요. 알겠죠?]

 

조금 절뚝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집에 도착했다. 점장한테는 어제 병원에 실려간 다음에 연락하였다. 아무리 나라고 해도 오늘은 쉴 수 밖에 없었다. 점장도 내 무릎을 걱정하는 듯 허가해주었다. 성격도 좋고 능력도 있는, 앞날이 밝은 젊은 친구다.

 

"그래그래. 사토도 일 열심히 해요. 한창 인기있을 때 잖아요."

 

[그래서 점장 몰래 땡땡이치고 전화하는 검다.]

 

"정말이냐."

 

무심코 반말이 나와버렸다. 것보다, 땡땡이치면서까지 내 건강을 확인하려 한 거냐. 의외로 사람도 좋다.

 

[정말임다.... 아, 점장한테 들켰슴다. 좆됐슴다.]

 

"사토. 메이드가 '좆됐다'같은 비속어 쓰면 안 돼요."

 

[엿 됐슴다. 그럼 이만 끊슴다.]

 

폰 너머로 점장의 목소리와 사토를 찾는 손님들의 목소리가 사라졌다. 안도감에 한숨을 내쉬었다. 한 때는 나도 사토 신 만큼 찾는 사람이 많았다. 물론 지난 일일 뿐이다. 그 때 올라가지 못해서,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미 서른을 넘긴 우사밍 별 메이드라니, 웃기지도 않는 개그다. 아무도 없는 단칸방에서 홀로 웃으니, 어제 비명을 지른 목이 진통제를 요구해왔다. 곰팡이와 결로는 진통제 대용으로 쓸 수 없었다. 결국 자그마한 냉장고 속에 들어있는 진통제를 꺼냈다.

 

"크으......."

 

아아, 위대한 그 이름 아사히 드라이여. 깔끔한 목넘김과 부드러운 거품이 진통제를 찾는 목을 상냥하게 감싸안았다. 아, 그러고보니까 살균도 필요할려나. 분명 가방 속에 남은 게....

 

"3개피. 그것도 와카바. 하아....."

 

술도 있고 담배냄새 지워주는 방향제도 많이 있는데 정작 담배가 없다. 병원에서 돌아올 때 편의점에 들를 걸 그랬다. 언제나 시간이 지나가고 나서야 왜 그 때 그러지 않았는지 후회하게 된다. 담배를 살 때를 놓치고, 병원에 갈 때를 놓치고. 화려하게 피어나는 별이 될 기회조차 어느 새 놓쳐버렸다. 망각의 너머로 추방된 기억들이, 갑작스러운 면회를 신청해왔다. 너희들은 전부 사형이라고. 면회도 석방도 외출도 없는 종신형. 어딜 함부로 탈옥하고 난리야.

 

"후우......"

 

이전에 선물로 받은 재떨이에 새로운 담배가 꽃혔다. 이 가게에 오기 전에 받은 선물이다. 우사밍을 자주 지명해주던 사람이었지. 팬이라고 할 수도 있을까. 어느 새인가 그의 이름도 외모도 피지 못한 별처럼 사라졌다. 그래도 쓸데없이 기억을 더듬어 보자면, 아마 젊은 사업가였던 것 같다.

 

"아아, 그래. 그 사람 대머리었지. 푸흡....."

 

술과 담배연기가 입에서 뿜어져 나와 바닥을 적셨다. 얼룩에 곰팡이가 슬기 전에 빨리 닦아야 할 텐데. 하지만 어제 그 돌바닥의 감촉이 의외로 기분좋았다. 술기운이 돈다. 오늘따라 잘 받는다. 몸이 빠르게 망가져 갈 수록 술담배가 잘 받는 법인가 보다. 그래, 마침 쉬는 날이겠다 애니메이션이라도 하나 볼까. 어디 보자. 그걸 어디에 뒀더라. 아, 컴퓨터에 넣어놨었지. 몇 년 전에 산 컴퓨터에 전원을 넣고, 시끄러운 팬 소리를 이어폰으로 차단하고......

 

[쿠헤헤헤헤헤!!! 좌절 에너지가 잔뜩 모이는구나!! 이 에너지로 패치 님께서 장작의 왕이 되어주겠다!!]

 

[그렇게는 안 돼!!]

 

[너, 너는?!]

 

"매지컬 아머드 링크스 소녀 올드킹! 네 악행은 더이상 용서하지 않겠어! 캐롤, 아이작, 주임! 내게 힘을 줘!"

 

추억의 애니메이션을 보았다. 마법소녀와 악당의 전투 중에 도시를 불태웠다. 이 장면을 제일 좋아한다. 술에 취해선 한참을 웃어대었다.

담배연기와 술 냄새가 자욱한 곰팡이 핀 단칸방의 아이돌 애니 오타쿠. 상장폐지 당하지 않기 위해 추가방영 연장방영 휴방 분할2쿨 특별편 OVA오리지널 스토리까지 다 써버려서 더 이상 쓸 수단조차 없다. TV에서 말하는 낙오자에게 딱 어울린다. 술이 들어가니, 스스로를 인정하기 쉬워진다.

 

그래, 그러고보니까 감기약이랑 수면제가 있었지. 목도 안 좋고, 피곤한데 잠은 안 오고. 약을 먹기엔 딱 좋은 날이다. 약을 먹을 땐 술이 아니라 물이지. 물은 화장실에서 적당히 마시면 되고. 몇 알이지? 잘 모른다. 그냥 손에 집히는 것만 들고왔다. 알록달록 별처럼 빛나는 약들이다. 요즘은 진통제가 없으면 몸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을 때도 있다. 자, 여기 보자. 있는 거 다 쥐고서.

맥주를 마지막 한 방울까지 비우고, 술안주 삼아서 약들을 꿀꺽. 아, 넘어간다. 넘어간다. 드디어, 넘어간다.

 

다음 역은 우사밍 별 우사밍 별 역입니다 종착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없습니다.

 

 

 

 

 

 

----

 

 

"괜찮으심까?"

 

"우웨에엑......."

 

음, 조준은 제대로 한 듯 하다. 토사물이 변기 한 가운데에 들어왔다. 엉뚱한 곳에 튀어배기진 않았다.

 

"씻고 나오십쇼. 그리고, 머리 아파서 타이레놀 찾는 사람이 술 마시는 거 아님다."

 

"반성중입니다아.... 우웨에에엑...."

 

하얀 알약이 토사물 사이에서 떠오른다. 알록달록한 감기약인 줄 알았는데, 전부 타이레놀이었을 줄이야. 취기가 너무 빨리 돌았다. 평소보다 느긋한 페이스로 마셨는데도 이 꼴이라니. 젊었을 때는 이 정도는 여유였는데. 아니, 그 전에 아사이 슈퍼드라이 두 캔으로 거기까지 취하나?

 

"그나저나 담배 냄새 쩌네..... 제 방보다야 상황이 낫지만 그래도 좀 깨끗하게 사는 게 어떻습니까?"

 

"사토쨩 방은 어떻길래......"

 

"쓰레기 안 버려서 발디딜 틈이 없슴다."

 

뭐야 그거 쩔어. 바닥 밑엔 지하실이 있는 법이구나. FX마진으로 돈을 날려버린 사람이 왜 그런 얼굴을 하는지 이해할 것 같다.

 

"암튼 몸에 좋은 치킨이랑 담배 사왔으니 씻고 나오십쇼. 아, 스위티한 나쵸 체다치츠맛 과자도 있슴다."

 

"그건 솔튀이우우에에에엑......"

 

 

----

 

 

"병문안 와 줘서 고마워. 일 끝나고 힘들었을 텐데...."

 

"별 거 아님다. 오늘 손님 없어서 한가했슴다. 것보다, 와카바 피우십니까? 노인도 아니고....."

 

"그것밖에 없었어. 그리고, 카멜보다는 낫다고 생각해."

 

"우와 기껏 사왔는데 너무해. 슈가하트의 스위티한 하트에 시어 하트 어택임다."

 

카멜은 전혀 스위티하지 않다.

 

"그나저나 역시 이런 자리에선 반말임까? 뭐, 아베 선배 답습니다만......"

 

"우사밍은 영원한 17세야..... 잊지 말아줘....."

 

"열일곱살 꼬마들은 카멜 안 핍니다."

 

토사물과 담배와 맥주의 냄새를 깔끔히 씻어낸 몸에, 이번엔 담배와 고구마소주와 치킨이 들어간다. 역시 대학생, 스위티니 뭐니 해도 이런 걸 좋아한다. 졸업반인데 이런 바닥에서 이러고 있어도 되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혼자 단칸방에서 술을 마시는 30대 노처녀보다야 나을 것이다. 아니 뭐 엄밀한 의미로 말하자면......

 

"몸조리하십쇼. 거 참, 사람 걱정하게 만들지 말고."

 

"걱정해준 거야? 됐어. 굳이 찾아올 건 없었는데. 아직 한창 팔릴 때잖아. 나 같은 거 보는 거 아니라고."

 

불편하다. 사토 신이라고 하는 사람의 존재가.

내가 바보처럼 흘렸던 모든 기회를 붙잡고 빛나려 하는 이 존재가. 초신성의 별빛이 비칠 때 마다 암흑 성운을 들추어내 뒤엎는 폭주기관차같은 사토 신이. 독특한 컨셉을 잡고서 열정적으로 빛나려 하는 그녀를 볼 때마다, 내가 놓치거나 버티지 못하고 추방당한 모든 열차의 비웃음이 들려온다.

멋대로 태어나 이름조차 받지 못한 채 저물어간다. 그 수 많은 별들 중 아베 나나라고 하는 우주의 먼지는, 오늘도 이루지 못할 꿈을 꾸며 치졸하고도 처절하게 질투하며, 끈질기고도 추잡하게 버텨가고 있다. 한 때 내가 동경하던 이름 모를 아이돌 그룹처럼, 팬에게조차 기억되지 못한 채로 저물어 사라져갈 운명을 부정하고 있었다.

 

"뭡니까, 기껏 찾아왔는데."

 

"아아, 그 뭐냐.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니야. 그 여러가지 있잖아? 오디션이라던지, 대학이라던지......."

 

사토 신의 불쾌한 듯 한 목소리가, 나를 재빨리 현실로 끌어당겼다. 사토 신이 기분나빠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검은 질투심은 내 소심함을 이길 수 없었다.

 

"....대학 말임까."

 

"지금 다니고 있는 곳 편차치 높은 곳이잖아."

 

"메이드카페에서 알바하면서 술담배 하는 학생이 졸업할만한 곳임다."

 

언제든지 나가서 그녀를 찌르겠다는 마음이, 소심함의 장막을 뒤집어쓰고 기회만을 엿보고 있다. 구밀복검. 표면적이고 시시한 신변잡기적인 대화만 오고가는 가운데, 스스로를 응석받이로 만드는 꿀로 날카로운 칼날을 코팅한다. 열차에서 쫒겨난 방랑자 우사밍의 칼이

 

"아, 그러고보니까 술게임 하나 하는 게 어떻슴까?"

 

"술게임? 대학 졸업한 지 오래되서 요즘 건 잘 모르는데....."

 

"임금님 게임 어떻슴까? 저 갑자기 선배 돈으로 라면이 먹고 싶어졌슴다."

 

"알코올이 들어가서 눈에 뵈는 게 없구나. 좋아."

 

기회만을 노리고. 지금 이 제비처럼 소심함을 걷어내고 뽑혀저 나오기만을. 내가 뽑은 붉은 당첨제비처럼

 

"사토 신, 노래하도록. 가장 좋아하는 걸로."

 

"노래임까.... 자신없는데."

 

 

---

 

 

".....어떻슴까?"

 

노래가 끝났다. 캐릭터에 비해서 노래는 꽤나 평범했다. 평범하게 잘 부르는 수준이었다. 진 태양의 젤러시같은 곡을 내심 기대하고 있던 내 가슴에, 충격과 경악이 방울져 떨어져내린다.

 

"그 노래...."

 

"예?"

 

"그 노래.... 어디서 들은 거야?"

 

어제, 열차 속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지기 전까지 듣던 노래였다. 추운 겨울날, 짧은 미니스커트와 함께 카세트테이프를 팔던 아이돌들의 노래였다.

 

"이 노래 말임까?

 

벌써 수십년 전 노래인데, 그 누구였지? 아아, 그래그래. 그 뭐시기..... 메르헨이라는 아이돌 그룹이 부른 노래임다. 메르헨은 안 팔려서 이거 부르고 해산하고, 멤버들 소식은 완전히 끊겨버렸슴다. 근데 좀 아쉽지 않슴까? 목소리 자체는 그런대로 들어줄 만 하고, 댄스 쪽은 상당히 잘 했는데. 얼굴은.... 역시 슈가하트님보단 한창 부족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잊혀지는 건 좀.... 이 친구들 사진집 구하느라 정말 힘들었슴다. 여기 구한 날 사진도 찍었는데 보시겠와악?!"

 

사토의 스마트폰을 꼭 쥐곤, 그녀가 찍은 사진집의 사진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아."

 

수십 년의 세월. 수십 년 동안 세상의 한 구석에서 빛 바래버린 종이가 저화질 디스플레이를 거쳐 다시 나타났다. 이 언니들의 얼굴. 그래, 내가 그 날 보았던 빛나던 사람들이랑 똑같다.

 

"서, 선배?"

 

"다른 사진도 있어?"

 

"아아, 그 폴더 열어보시면 됨다. 몇 개 찍어놓고선 감상용으로 보고 있으니 얼마든지....."

 

해산 전, 그녀들의 모습이 찍혀 있었다. 사람 없는 미니라이브, 아무도 보지 않는 홍보활동. 비참했던 역사의 모든 것을 어떻게든 치장하기 위한 사진들이 늘어서 있었다. 처참한 역사 중, 단 한장의 사진이 빛나고 있었다.

 

"이건......"

 

"아, 그러고보니 아베 선배 어릴 때 활동하던 사람들임까? 기억하고 있는 사람 처음 봤슴다. 그러고보니 거기 찍힌 꼬마 초상권은 어떻게 된 건지.... 역시 소형 프로덕션은 이래서....."

 

반짝이던 수십 년 전, 반짝이던 어제의 아베 나나였다.

 

 

---

 

 

'그거 놓고 감다'라는 말과 함께 사토는 아이돌 사무소들의 오디션 관련 전단지를 두고선 돌아갔다. 그게 벌써 며칠 전 일이다.

 

"........후우."

 

오디션은, 조금 오랫만이다.

매연과 습기가 달라붙은 아침 공기도 오랫만이다. 아직 해조차 떠오르지 않은 밤하늘을 열차가 가로질러 간다.

 

[.....역과 승강장 사이의 간격이 넓습니다. 내리실 때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오늘도 수 많은 별들이 멋대로 태어나 이름조차 받지 못한 채 저물어간다. 우주를 가로지르는 열차는 피어나지 못한 모든 꿈의 원망과 체념을 수거해 암흑 물질 너머로 던져버렸다. 나 아베 나나는 이번에도 살아남았다. 하지만 열차는 운 좋게 살아남은 바퀴벌레들을 유토피아에 내려주지 않는다. 다음 숙청이 있기 전까지 환승을 요구해올 뿐이다. 이제 포기하라고.

 

"아, 일출이다."

 

창 너머로 새벽동이 떠오르고 있었다. 아직 분주하지 않은 도시를 비추던 별빛들이 하나둘 사라져간다.

 

[이번 역은 미시로마에, 미시로마에 입니다. 내리실 문은 오른쪽입니다. 내리실 땐 잊으신 물건이 없는지.....]

 

꿈은 아직 잃어버리지 않았다. 우사밍 역의 아침햇살이 열차 문을 통해 쏟아져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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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이이이이이잎ㅍㅍㅍㅍㅍㅍㅍㅍㅍ

 

 

마감.... 마감.... 좀더 시간을!! 좀 더 완벽하게 쓸 수 있을 터!! 으아아아아아악!!!!

열차 하면 은하철도. 은하철도 하면 우사밍. 아아 좀 더 다크한 묘사를 집어넣어서 완성도를 올리고 싶은데 시간이 부족해에에에에!!! 내글구려!! 이 좋은 소재를 가지고 여기까지밖에 못 쓰는 거냐아아아!!!! 더 탄탄한 전개가 가능할텐데 왜 이 수준이냐고오오오오오오오(자책

 

실버메탈입니다. 월요일 앞두고 이런 우울한 똥글로 눈 더럽혀서 죄송합니다. 그래도 마무리는 좋게 했으니 이건 우울한 글만은 아닐 거에요. 사실 시간적 여유를 두자면 저기서 타이레놀이 아니라 진짜 수면제와 감기약을..... 아, 전 아베 씨를 응원합니다! 에? 나나라고요? 일본에서는 함부로 이름 부르는 거 아닙니다~ 제대로 된 '어른'들의 관계에선 성씨로 부르고 존댓말을 써야 하는 법입니다~

 

그리고 아베 씨는 성인이니 술담배와 관한 묘사를 해도 문제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 글을 보는 여러분들은 하지 않는 것을 권장합니다. 쓰고 나서 갑자기 술이 땡기는 제가 할 말은 아니지만요. 그래도 담배는 안 하니까.....

 

그럼 이만 줄입니다. 모두 좋은 하루 되세요. 그런데 내일 월요일이니 좋은 하루가 아니겠군요 우헤헤헤헤헤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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