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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즈 담당 프로듀서는 죽을 만큼 후회했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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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2-26, 2016 01:52에 작성됨.

원작
아이돌 마스터 신데렐라 걸즈 - 반다이 남코 엔터테인먼트/ A-1 Pictures

"프로듀서?"
"뭐, 이러 저러한 일이 있었어. 간추리면 나는 마에카와 미쿠의 매니지먼트를 실패했다. 그래서 담당이 바뀌었어. 미쿠만 담당한 건 아니고 유닛으로 두 명 더 담당하고 있었어. 그 아이들은 내가 실패해서 전부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지. 별로 드물지도 않고, 유쾌하지도 않은 실패담이야. 내 재능과 기량이 부족해서 그 아이들이 흩어졌지.“

-도박을 걸고 싶어. 네가 거절하면 난 일을 그만둘 거야. 너를 설득하지 못할 정도라면 내 재능과 기량은 여기서 끝날 정도라는 거지.

처음 만났을 때, 프로듀서는 그렇게 말했다.

프로듀서는 턱을 쓰다듬던 손으로 얼굴 전체를 쓰다듬었다. 풍선 공기를 빼듯이, 안쪽의 답답한 공기를 빼듯이 그렇게 얼굴을 주물렀다.

"나는 그걸 계기로 의욕을 잃었어. 그래서 일을 그만두려고 했는데, 너를 만난 거지. 원석인 널 보고 염치 불고하게 이 업계에 계속 붙어있게 되었다."
"간추린 이야기니까 내막은 좀 더 복잡해?"
"응, 그렇지. 날카롭구나. 어디까지나 간추린 이야기니까. 유쾌하지 않은 이야기는 축소했어."
안즈가 침묵한다. 프로듀서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어때? 정떨어졌어? 실력 없는 프로듀서라서. 네가 원하면 다른 프로듀서를 주선해줄게."
"그런 말 하지 마. 정말……. 말했잖아. 안즈의 프로듀서는, 당신밖에 없다고."
"사람 참 쑥스럽게 하네. 고맙다."
"지금도 마음에 걸려?"
"그렇지. 그때 느꼈던 감정들은 전부 지금 이 순간에도 마음 한구석에 자리하고 있어."
"괜히 떠올리게 해서 미안해."
"아니, 괜찮아. 슬슬 환기하고 싶었으니까. 속에 묵은 걸 털어놓는 건 정말 중요해. 뱉고 싶을 땐 잘 뱉어야지. 안 그러면 마음에 병이 나거든."
프로듀서는 그대로 소파에 기댔다. 어깨를 등받이에 걸친 채, 목을 등받이 뒤로 넘겼다. 상사가 들어오면 경위서를 써야 할지도 모르는 경박한 자세였다.

"안즈, 너 학교 갈 수 있을 땐 가라."
"귀찮은데……."
"학교에는 이미 말해두고 승인도 받았어. 일이 있을 땐 빼먹어도 되지만, 갈 수 있을 땐 가. 더는 빼먹지 마. 너 그러다 유급한다?"
"아, 알았어……."
대화가 끝이 보인다. 조금 있으면 프로듀서는 다시 업무로 돌아갈 것이다.
하나만 더 물어보고 싶다. 안즈는 흐름과 분위기를 타고 던지듯이 물었다.

"엄마랑 아빠는 뭐래?"
"흠……. 그냥 너를 잘 부탁한다고 그러셨어. 그 외엔 별말씀 안 하셨어."
프로듀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프로듀서는 어깨와 목을 가볍게 풀었다. 그리곤 주머니에서 사탕 하나를 꺼내 안즈에게 던졌다.

"칼슘 사탕이야. 이거 먹고 튼튼해져라."
"애 아니라니까. 키도 여기서 더 안 클걸. 17살이니까."
"17살이면 아직 한창 성장할 나이란다."
프로듀서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자리로 돌아갔다. 안즈는 사탕을 입에 털어 넣었다.

체력 20%를 단번에 회복했다!
어디까지나 기분상으로.
-

뭐든 할 수 있어도, 실제로 아무것도 안 하면 소용없다.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만능의 재능을 보유해도 그걸 계속 묻어두기만 하면 재능은 삭는다.

쓰지 않으면 없는 거나 마찬가지.

그래서, 주변에서 그걸 쓰게 만들었다.
그래서, 지쳤다.

힘을 쓰는 것 자체가 질렸다. 이럴 바에야 노력하지 않는 게 낫잖아.
힘을 덜 들이고 싶어.

날 내버려 둬.  

스마트폰 알람에 일어나 보니 무슨 꿈을 꿨는지 잊어버렸다.

3월 23일

안즈는 학교에 갔다.
월요일이므로 이번 주 첫 등교. 휴일을 빼면 저번 주에 이어 4일 연속 등교다.

학교에 와서 가장 피곤한 점은 주목을 받는다는 점. 처음엔 휴학 기간이 긴 안즈의 공부 수준을 떠보려는 목적으로 과목별 교사들이 낸 문제를 적당히 풀었더니 오히려 더 주목받게 되어서 수업마다 문제 푸는 역을 떠맡아 죽을 맛이다.

수면으로 피로를 풀고 싶어도 쉬는 시간에는 쓸데없이 안즈 주변을 얼쩡거리는 같은 반 아이들 때문에 제대로 쉬지 못했다. 그래도 날이 갈수록 이런 현상은 줄어들고 있기에 안즈는 그 사실을 위안 삼으며 버텼다,

게다가 학교 수업은 기본적으로 시간이 정해져 있다. 정해진 시간까지만 버티면 된다. 규칙적인 생활이란 정해진 시간을 정해진 시간에 보내는 거니까. 어떻게든 버티기만 하면 끝나는 법이다.

가끔, 예정에서 벗어나는 경우도 있지만.

"안즈 쨩은 아이돌이라면서요?"
"아니, 아직은 후보생이야."
하교 시간이 되자마자 안즈가 해방감을 맛보는 것도 잠시, 같은 반 아이가 안즈를 붙잡았다.

"아이돌 후보생은 어떤 일을 하나요?"
"어, 일단 레슨을 받고 데뷔할 준비를 하고 그러지……."
"그렇군요! 특훈으로 파워 업! 멋지네요! 힘이 넘칠 것 같습니다!"
"글쎄, 그냥 연습하는 것뿐이야. 트레이너를 잡아먹거나 다른 아이돌의 피나 도플갱어의 생명력을 빨아서 파워 업하는 것처럼 거창하진 않으니까 그렇게 대단하진 않아."
"연습! 그렇군요! 슬램덩크에서 슛 연습을 2만 번 하는 것처럼!"
"아니 아니 아니 아니, 그러다 안즈 죽어……."
"크으……. 불타오릅니다! 아이돌은 정말 좋네요! 그야말로 정열!"
"아이돌에 관심 있어?"
"넵!"
상대방의 목소리가 워낙 커서 안즈는 그만 순간적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노력하는 걸 좋아하거든요!"
"그, 그렇구나. 네가 아이돌이 되면 꽤 주목받을 것 같네."
"안즈 쨩은 어떤 아이돌을 목표로 삼았나요?"
"어, 아직 자세히 안 정했어."
정확히는 안 정했다기보단 정하지 못한 것에 가깝지만.

일단은,
"안즈는 안즈니까."
해보면서 생각하기로 했다.
프로듀서와 함께.

"아카네! 빨리 가자!"
"넵! 그럼 전 이만 실례할게요. 응원하겠습니다!"
안즈는 같은 반 아이가 다른 아이와 함께 사라지는 걸 보며 중얼거렸다.
“뜨겁네. 정말.”

"안즈는 충분히 재밌으니까, 그냥 있는 그대로 데뷔해도 될 거야."
"컨셉 연기를 안 해도 되는 건 귀찮지 않아서 좋지만 안즈 같은 걸 보고 사람들이 좋아할까?"
"그 점은 내가 보장해. 안즈는 지금 이대로도 충분히 개성 덩어리니까."
오늘 스케줄은 레슨을 쉬고 프로듀서와 미팅.

앞으로 어떻게 활동을 할지 방향성을 정하는 일정이다.
물론 하루아침에 정한 건 아니다. 오늘까지 틈틈이 프로듀서와 시간 날 때마다 논의했다.

오늘은 그 논의를 본격적으로 심화시키는 날이다.
둘은 소파에 앉아 서류 몇 장과 태블릿 PC를 테이블에 올려놓곤 이야기를 진행했다.

"그럼 안즈는 힘을 덜 들이는 쪽으로 고를래."
"좋아, 일단 데뷔는 그렇게 하기로 하고……."
"근데 프로듀서. 사람들이 안즈를 재밌게 여겨도, 반짝 인기로 끝나지 않을까?"
"그럴 확률도 있지. 그래서 그렇게 되지 않게 하는 게 내 일이야. 앞으로의 활동 플랜을 몇 개 궁리했어. 데뷔하고 나서 당분간은 있는 그대로 니트 캐릭터를 중점으로 내세울 거야. 아마 예능 쪽 일이 주가 되겠지."
"오지탐험 가?"
"하고 싶어?"
"아니……."
프로듀서는 태블릿 PC를 조작해 꺾은선 그래프를 띄웠다.

그래프 선마다 아이돌 아이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안즈는 여태까지 아이돌에 관해 관심이 없었기에 누가 누군지 알아보지 못했지만.

프로듀서는 손가락으로 그래프의 굴곡을 가리켰다.

"대중들이 아이돌의 이미지에 질리는 시기가 높은 확률로 오게 되어 있어. 원 패턴밖에 없는 아이돌은 여기서 주저앉기 마련이지. 예외는 있지만 요즘 같은 아이돌 전국시대에는 그러기 마련이야. 요즘엔 아이돌이 포화상태야. 특이한 캐릭터성은 대중에게 큰 인상을 남기는 데에는 좋지. 문제는 그걸 어떻게 질리지 않게 만드느냐야."
"으음, 그럼 결국 중간에 컨셉을 만들어야 한다는 거네?"
"아니, 우선 안즈의 매력을 어필하는 쪽으로 갈 거야."
"안즈의 매력?"
"그래, 안즈는 귀엽지. 귀엽고 영리하지. 게임도 잘하는 편이고. 안즈, 너를 뜯어 보면 매력이 참 많아."
"안즈가 나름 귀엽고 영리한 건 알고 있지만 그게 잘 통할까."
"통할 거야. 그렇게 만들어야지."
안즈는 잠시 고민하다가 프로듀서에게 물었다.

"프로듀서는 그걸 어떻게 확신해?"
"너를 믿으니까."
"너무 낙천적이다……. 부담스러워."
"그 부담을 나한테 덜어. 넌 나를 믿고, 난 너를 믿으면 돼. 걱정하지 마. 난 너를 화제성만으로 반짝이고 끝나는 단발 아이돌로 만들진 않을 거야."
프로듀서는 태블릿 화면을 다음으로 넘겼다.
이번엔 꺾은선이 급격하게 아래로 꺾인 그래프였다.

"데뷔를 해도 그대로 무명으로 끝나는 아이들도 있어. 원인이 뭔지 알아?"
"음……. 인상이 별로 강렬하지 않거나……. 아니면 개성을 펼칠 기회가 없었거나?"
"그거야. 지금 시점에서 전자는 6할이고, 후자는 4할이다. 전자는 어쩔 수 없는 경우. 그러니까 후자의 경우를 들어보자. 아이돌이 아무리 개성과 실력이 있어도 프로듀스와 매니지먼트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뜨지 못해. 그래서 프로듀서와 사무소의 능력이 중요한 거지. 346 프로덕션은 규모가 크니까 그 점에선 든든하지. 뭐, 예전만큼 아이돌 부서를 푸쉬하진 않지만 지금도 충분해."
"예전엔 어땠는데?"
"346 프로덕션은 원래 예능, 가요계의 큰손이었지만 아이돌 쪽은 무명이었어. 그래서 한때 아이돌 부서를 키워보려는 움직임이 있었고 그 움직임이 절정에 달했을 때는 굉장했지. 소속 아이돌이 3자리를 딱 넘었거든."
"많이 크네? 근데 지금은 줄어들었어?"
"응, 내가 실패해서 절반 규모로 줄어들었어."
안즈는 그만 입을 다물었다.
마음이 무겁다.

"뭐 리얼하게 유쾌하지 않은 이야기는 여기서 끊고, 다시 돌아오자. 자 자 안즈, 정신 차려."
프로듀서는 보란 듯이 손가락을 튕기곤 말을 이었다.

"아까 말한 것처럼 데뷔 초에는 예능 쪽을 중심으로 돌아갈 거야. 우선 안즈의 캐릭터성으로 화제를 불러모은 다음에 안즈의 매력을 조금씩 풀어나갈 계획이다. 어때?"
"이의 없음. 알았어. 프로듀서를 믿을게."
"좋아, 좋은 대답이다. 그래도 하고 싶은 게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 내가 물어올 수 있는 일이라면 물어다 주마."
"그럼 안즈는 그냥 평소대로 하면 되겠네."
"너무 하이텐션이 되어서 쓸데없이 대중의 먹잇감이 되는 짓은 하지 않도록 조심해. 예를 들어서 인세를 목적으로 아이돌이 됐습니다!는 괜찮지만 어차피 아이돌이란 건 인세를 목적으로 아양이나 떠는 것들이에요. 라는 말을 하는 순간 아웃이다."
"그렇게 대놓고 거친 말은 안 해. 전자는 몰라도 후자는 그렇게 생각 안 하고."
"좋은 말만 해도 물어뜯는 녀석들이 나오기 마련에 긁어 부스럼은 만들지 않는 게 좋으니까. 안즈는 영리하니 이 정도는 당연히 구분될 거야."
프로듀서는 그래프 창을 닫고 새로운 창을 열었다.

"데뷔곡 시안을 몇 개 뽑아봤어. 이번에 새로 작곡한 건 이쪽이고, 나머지는 이미 있던 미발표 곡이야. 난 이번에 새로 작곡한 곡으로 가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안즈는 어때?"
태블릿 PC에서 정신없는 음악이 흘러나온다. 빠른 속도로 톡톡 튀는 반주. 반주에 맞춰 부르기 힘들어 보일 정도로 굉장히 정신없는 곡이었다. 노래방에서 이 노래를 처음 들어보는 사람은 십중팔구 0점을 받지 않을까.

"전파곡이잖아."
"그런 종류지."
안즈는 이런 노래를 많이 들어봐서 바로 간파했다.

"역시 알 거로 생각했어. 어때?"
"그럴싸한 PV만 붙으면 니코동에서 조회수가 많이 나올 것 같은 음악이네."
집에서 놀기만 했을 때는 하루에 한 번씩 니코니코 동화를 순례하는 게 일상이었으니까.
안즈의 말에 프로듀서는 크큭 거리면서 웃었다.

"그런 느낌으로 주문한 곡이야."
"그럼 평범하게 말하는 투로 부르면 돼? 아니면 랩을 하는 식으로?"
"회화하듯이 말하는 부분도 있고, 라임에 맞춰서 부르는 부분도 있지."
"흐음……. 생각했던 것보단 쉬울 것 같아서 다행이네."
"글쎄다, 생각보단 어려울걸?"
프로듀서가 가느다란 눈초리로 안즈를 보며 의미심장하게 말꼬리를 올린다.

안즈는 그저 바람 빠진 풍선처럼
"뭐, 어렵든 쉽든 할 수밖에 없겠지만."
힘 빠진 어투로 말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당분간 레슨은 기초 체력 레슨을 베이스로 발성 연습을 중점으로 할 거야. 발성이 어느 정도 됐다 싶으면 댄스 레슨에 들어갈 거다."
"이 곡으로 데뷔하는 거지?"
"응, 5월에 데뷔해서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할 거야."
"앞으로 2개월인가……."
안즈는 그대로 소파에 쓰러져 누웠다.

"그동안은 기초를 갈고 닦아야지."
"귀찮아……. 그래도 할 수밖에 없나……."
안즈는 그렇게 푸념하며 소파 옆에 뒀던 토끼 인형을 끌어안았다. 실밥이 터지고 곳곳에 더러운 얼룩이 묻은 인형이었지만 안즈는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토끼 인형에 얼굴을 묻었다. 이렇게 만든 게 안즈 본인이니 더럽고 뭐고 따질 필요가 없으니까.

"다른 음악도 들어봐."
프로듀서는 다른 음악 몇 곡을 틀었다. 조금 전에 틀었던 전파곡에 비해 정상적인 곡들이었다.

"정하기 귀찮으니까 처음 걸로 가자."
"그럼 이걸로 결정. 안즈, 누우려면 개인 소파에 가서 누워."
"네에."
안즈는 좀비처럼 일어나 공용 소파 바로 옆에 붙어 있는 개인 소파에 몸을 실었다.
푹신한 소파에 안즈의 몸이 파묻혔다. 마치 마시멜로가 눌리는 것처럼 부드럽게. 소파가 안즈의 몸을 일부 삼키듯이.

"하아……. 좋다아……. 프로듀서도 나중에 써봐."
"안즈 전용이니까 사양할게. 그건 그렇고 정말 마약 쿠션 소리를 들을 만하네. 앉으면 1초 만에 나태해지겠어."
논의, 미팅은 이런 분위기로 흘러가 일단락되었다.
정확히는 이 직후 치히로가 사무실에 들어와서 환기되듯 미팅 분위기가 완전히 와해했다.

치히로가 과자 상자를 품에 안고 들어왔다.

"수고하십니다."
"아, 치히로 씨. 수고하십니다."
"재미있는 선물이 들어와서 신세 졌던 분들께 하나씩 나눠드리고 있어요."
치히로는 과자 상자에서 과자를 꺼내 프로듀서와 안즈에게 건네주었다. 프로듀서가 포장지를 뜯자 치히로가 말한다.

"포춘쿠키예요. 열어보세요."
"포춘쿠키는 처음 먹어보네요. 어디……."
프로듀서는 쿠키를 반으로 쪼개 종잇조각을 꺼냈고,
"으웩, 그런 건 먹기 전에 말해……."
안즈는 이미 혀에 달라붙은 종잇조각을 떼어냈다.

-큰돈이 들어올 운명입니다.

안즈의 침에 종이가 젖어 문장이 번졌다.
식용 잉크겠지?

안즈는 결과가 마음에 들었는지 화를 풀었다. 종이를 씹은 불만이 다 날아간 모양이다. 반면 프로듀서는 영 찝찝한 얼굴로 자기가 뽑은 종잇조각을 뚫어지라 바라봤다.

-단명할 운명입니다.

"어머, 이런 것도 다 들어있네요."
"치히로 씨, 죄송하지만 하나만 더 뽑아도 될까요?"
다음 결과,

-조만간 사신을 볼 운명입니다.

"하나만 더요!"

-만족스럽지 못한 죽음을 맞이할 운명입니다.  

프로듀서는 종잇조각 세 장을 번갈아가며 노려봤다.

"이거, 신사에 가서 나뭇가지에 묶으면 되나?"
"그건 제비야. 프로듀서."
"저, 저기, 죄송해요. 괜히 저 때문에 기분 상하신 것 같아서……."
치히로가 어쩔 줄 몰라 한다.

"아뇨, 괜찮습니다."
프로듀서는 종잇조각 세 장을 그대로 입에 넣곤 염소처럼 우물거렸다. 안즈와 치히로가 뭐라 하기도 전에 프로듀서는 그걸 그대로 삼켰다.

"어라? 무슨 일 있었어?"
프로듀서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자, 그럼 업무로 돌아갑시다! 안즈, 너 뭐 원하는 거라도 있어?"
"놀고 싶어, 자고 싶어, 24시간 연중 유휴, 사탕 먹고 싶어, 집에 가고 싶어."
"오, 그거 좋은걸. 가사에 넣을게."
프로듀서는 손가락을 튕기며 태블릿 PC의 메모 앱에 안즈의 말을 기록했다.

"정말 넣게?"
태평했던 안즈가 불안해할 정도의 발언이지만
"응, 괜찮아. 이 정도는."
프로듀서는 가볍게 대답하며 앱을 닫았다. 아무래도 농담이 아닌 것 같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볼게요. 이 쿠키는 더는 나눠드리면 안 되겠네요. 설마 그런 게 들어있었을 줄은……."
치히로는 식은땀을 흘리며 사무실을 나갔다.
프로듀서는 자리로 돌아가 모니터에 전원을 넣었다.
안즈는 그대로 소파에 파묻힌 채로 프로듀서에게 물었다.

"결과 신경 쓰여?"
"됐어, 미신이잖아."
마우스 버튼 소리와 자판 소리가 회화를 끊었다.
안즈는 어떤 말을 하품에 섞어 넌지시 내뱉었다. 자판 소리보다 더 작은 소리로.

“혹시라도 위기에 처하면 안즈가 구해줄게.”
프로듀서는 그 작은 소리를 들었는지 잠시 손가락을 멈추곤
"말이라도 고맙다."
나태에 빠져 도저히 움직일 기색이 없는 안즈에게 그렇게 빈말을 돌려줬다.

5월 8일

오후 2시.
시부야 역 근처에 자리한 어느 건물의 지하. 지하에 어울리지 않게 '스타라이트 스테이지'라는 이름이 붙은 공연장. 안즈는 오늘 이곳에서 데뷔 무대를 치르기로 했다.

데뷔 무대는 신인 아이돌에겐 중요한 무대지만, 척 봐도 무명 햇병아리 아이돌인 안즈가 공연할 만한 곳으론 알맞지 않았다.

규모가 너무 켰다. 물론 수만 명이 관람하는 대형 아레나 공연장과 비교하면 작은 규모지만, 어디까지나 그런 곳은 초거대 규모고, 안즈가 보기엔 지금 공연장도 충분히 컸다.

메이저 아이돌의 공연에나 쓰일 법한 수용 가능 인원 수천 명 단위의 대규모 공연장.
어떻게 지하에 이렇게 넓은 공연장이, 어떻게 무너지지도 않고, 어떻게 정상영업 허가를 받았는지 안즈는 실제로 보고도 믿기지 않았다.

이런 대규모 공연장에서 공연한다는 사실은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으므로 새삼스럽지만, 어떻게 안즈가 이런 공연장에서 공연하게 되었는지도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으므로 새삼스럽지만.

정말 새삼스럽지만,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가슴이 죄어온다.

안즈는 무대에서 관객석을 내려다보았다. 무대 아래, 무대와 관객석을 가로막는 철제 난간을 경계로 빼곡히 들어선 좌석들. 조금 후에 이 좌석에 앉은 수많은 시선이 안즈를 주목할 것이다.

사고가 거기까지 퍼지자 안즈는 마른 침을 삼켰다. 긴장된다.
나태의 화신인 안즈조차 시간이 흐를수록 초 단위로 정신이 번쩍 든다.
정신이 맑아지는 게 아니라 정신이 점점 굳어가는 감각.

압도감과 위압감.
안즈는 관객 없는 무대에서 그걸 느꼈다.

안즈는 무대 스태프 두 세 명이 앞을 지나가도 정신을 못 차리다 자기를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긴장 상태에서 빠져나왔다.

"안즈 쨩, 여기서 뭐 하고 있어냥. 슬슬 준비할 시간이다냐."
메이크업과 의상 착용을 마친 미쿠가 안즈를 불렀다. 어떻게 움직이는 건지 의상에 달린 꼬리까지 움직이며.

"아, 시간……."
"나 참, 넋 놓고 있지 마냐. 이해는 하지만."
미쿠는 안즈를 끌고 무대 뒤편으로 향했다.

어떻게 걸었는지 기억이 안 난다. 안즈가 인식하기엔 장소가 갑자기 바뀐 것처럼 보였다. 안즈는 미쿠의 손길을 통해 스타일리스트의 손길을 거쳐 최종적으론 메이크업 아티스트의 손에 몸을 맡겼다.

안즈가 느끼기엔 정신을 차리고 나니 이미 의상을 입었고, 또 정신을 차리고 나니 메이크업이 완료된 것처럼 느껴졌다.

"안즈 쨩, 긴장했어냐?"
"어, 어어, 응."
"아아, 원래 이런 큰 무대엔 바로 서면 안 되는데……. 냥……."
"괘, 괜찮을 거야. 아마도……."
"데뷔 때부터 이런 무대에 서면 악영향이 올 확률이 높은데……. 긴장으로 무대에 악영향을 끼칠 수도 있고 무사히 넘기더라도 후유증이 올 수도 있어냥."
긴장은 이미 하고 있고 후유증은……. 올 만하겠다고 안즈는 뼈저리게 느꼈다.

"미쿠가 의견을 낼 수 있었다면 반대했겠지만……. P쨩이 정한 거니까 정말 어쩔 수 없는 거였겠지."
안즈의 데뷔 무대는 원래 신인 아이돌의 등용문이라 불리는 어떤 무대를 통해서 이루어질 예정이었다. 그러나 방송 사정상 출연 인원이 갑자기 꽉 차 안즈가 잘렸고, 다른 무대에도 몇 번 거절당해 일정상 나올 수 있는 무대를 겨우겨우 찾아 나오게 된 것이다.

마에카와 미쿠의 무대에 오프닝 공연 일부로.

"P쨩? 미쿠 쨩의 프로듀서?"
"아니, 안즈의 프로듀서를 말한거다냐. 예전에 그런 애칭으로 불렀다냥."
"그러고 보니 프로듀서는 어디에……."
"P쨩은 미쿠의 프로듀서랑 스태프들이랑 같이 이야기하는 중이다냐.“
프로듀서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안즈는 더더욱 불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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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데뷔 무대를 좀 더 늦게 넣을 예정이었지만...
생각해 보니까 아이돌 마스터 게임 원작에선 대부분 데뷔를 빨리 마쳤던 게 떠오르더라구요. 그래서 안즈를 빨리 데뷔시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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