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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2-25, 2016 22:52에 작성됨.

 난 아이돌이 되고 싶었다. TV에 나오는 아이돌들은 춤추고, 노래하고, 언제나 사람들에게 희망과 꿈을 주었다. 나 또한 그들을 동경했고, 그들처럼 되기를 바랐다.
 하지만 꿈은 꿈일 뿐. 내가 아이돌이 될 수 없단 건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내심 분하게 여기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8살짜리 어린애에겐 그저 현실이 냉혹하게 느껴졌다.
 나는 의사 선생님이 뭐라고 하는 건지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아무튼 큰 병에 걸렸다고 했다. 나는 매일 매일을 그저 병원 침대에 누워서 보냈다. 정해진 시간에 밥을 먹고, 약을 먹고, TV를 보거나, 옆 침대 사람이 하는 이야기를 듣거나.
 난 오랫동안 이 병실에 있으면서 많은 사람들을 보았다. 대부분은 금방 퇴원했고 곧 새로운 사람이 들어왔다. 1인실로 옮기는 게 어떠냐는 의사의 제안은 내 고집으로 무산됐다. 혼자는 외로웠으니까.
 그리고 어느 날, 그 소녀는 나타났다. 내 바로 옆 침대에 새로 입원한 그 아이는 두 다리에 깁스를 하고 있었다. 모든 걸 다 잃었다는 듯한, 무척 우울한 표정을 짓고서. 간호사 언니는 교통사고를 당해서 입원한 거라고 했다. 과연, 그거라면 납득이 간다. 사고를 당한 사람들 중엔 저런 표정을 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저 아이도 소중한 무언가를 잃은 것이겠지.
 난 그 아이를 될 수 있는 한 무시하기로 했다. 그런 사람들에겐 함부로 말을 걸지 않는 게 좋다. 괜한 위로는 그들을 더 슬프게 만드니까. 긴 입원 생활은 어린 나에게 그런 것들을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한동안은 아무런 일도 없었다. 나는 변함없이 침대 위에서 하루를 보내야 했고, 그 아이는 가끔 휠체어를 타고 병실 밖으로 나갔다. 서로 대화는 커녕 통성명도 하지 않았다. 그 아이도 그걸 불쾌히 여기지 않았으니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아마도 그렇게 1주일이 흘렀을 즈음. 한밤중에 혼자 화장실에 갔을 때였다. 누군가가 화장실 맨 끝 칸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어디서나 들을 수 있을 법한 흔한 동요. 울음 섞인 그 노랫소리는 듣고 있는 것만으로 가슴이 뛰었다. 나는 화장실 입구에 우두커니 서서 노래가 끝날 때까지 움직이지 못했다. 그 노래를 끊는 게 어쩐지 큰 잘못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잠시 후, 노래가 끝나도 잠긴 문은 열리지 않았다. 그저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올 뿐이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화장실로 들어가, 맨 안쪽 문을 노크했다.
 똑똑.
 안에서 힉 하고 숨을 삼키는 소리가 났다.
 "안에 누구 있어요?"
 "……아무도 없어요."
 "풉."
 아무도 없다면서 대답을 하다니. 나는 웃으면서 문을 더 두드렸다. 똑똑똑. 안에선 여전히 콧물을 훌쩍거리는 소리가 났다.
 "진짜로 아무도 없어요? 이상하다. 아까 엄청 예쁜 노랫소리를 들었는데."
 그렇게 말하자 잠시 후 걸쇠가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천천히 문이 열리고 안에서 나타난 건 내 또래의 여자애였다. 어디선가 본 얼굴. 기억을 더듬어, 그 아이가 내 옆 침대에 누워 있던 애란 걸 기억해 낸다. 이름이 뭐였더라. 문에 붙은 이름표에서 봤었는데.
 소녀는 문 뒤에 몸을 숨기고 고개만 빼꼼히 내밀며 말했다.
 "……내 노래, 들었어?"
 "응, 들었어. 노래 엄청 잘 하더라!"
 내 칭찬에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다시 울먹였다. 내가 뭔가 잘못된 말을 했을까? 잠깐 생각해 봤지만 잘 알 수 없었다. 나는 몸을 숙여서 소녀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녀는 놀랐는지 다급하게 손으로 눈물을 닦았다. 내가 오기 한참 전부터 울고 있었는지 눈도 코도 뺨도 붉게 물들어 있었다.
 "왜 여기서 혼자 노래하고 있었어? 잠이 안 왔어?"
 "으응. 동생 생각이 나서……."
 "동생?"
 "나랑 같이 사고를 당해서, 동생은, 으우……."
 아차. 이건 지뢰다. 아마 그녀는 사고로 동생을 잃은 것이다. 소녀는 금방이라도 다시 울기 시작할 것처럼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어떻게든 말을 돌려야 하는데…….
 "어, 그게, 너 이름은 뭐야?"
 "……? 키사라기 치하야."
 지금 상황에서 정말 아무래도 상관 없는 질문이었다. 맥락과도 동떨어져 있고. 하지만 그녀는 의아해하면서도 성실히 답해 주었다. 우울한 주제가 빗겨간 것을 내심 안도하면서 나도 이름을 말한다.
 "난 하루카. 아마미 하루카야."
 "……노래, 더 듣고 싶어?"
 "어, 더 불러 줄 거야? 야호! 불러줘, 불러줘!"
 내가 손뼉을 치면서 좋아하자, 그녀는 그제서야 엷은 미소를 지었다.
 그 직후 간호사 언니가 와서 그대로 병실로 돌려보내졌지만 뭐어. 우리의 첫만남은 대충 그런 느낌이었다.

 그 뒤로 나는 치하야에게 관심을 가졌다. 밤중에 혼자 화장실에서 울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 말고도, 나는 그녀의 노래에 매료되었던 것이다.
 나는 늘 아이돌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난 노래도 잘 못하고 춤도 못 춘다. 그야 항상 침대에 누워있기만 하니까 당연하다면 당연하지만. 햇살이 강한 날은 함부로 외출도 못하고. 아이돌이 되고 싶다는 건 그야말로 꿈, 환상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다르다. 그녀에겐 재능이 있다. 아마 치하야라면 톱 아이돌이 되는 것도 가능할지 모른다. 그녀의 노래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뭔가가 있었다.
 그래서 나는 틈만 나면 치하야에게 노래를 불러달라고 졸랐다. 그녀는 처음엔 별로 내켜하지 않았지만, 자꾸 조르자 이내 못 이기는 듯 노래를 해 주곤 했다.
 그녀가 목발을 짚고 걸을 수 있게 되고 나선, 구름낀 날엔 같이 건물 밖 정원에서 벤치에 앉아 수다를 떨었다. 난 병원에 있느라 학교를 거의 나가지 못해서 치하야가 들려주는 '평범한' 이야기를 아주 좋아했다. 하지만 치하야는 한참을 즐겁게 이야기하다가도 금방 시무룩한 표정을 짓곤 했다.
 오랜만에 산책을 나온 오늘도 그랬다.
 "치하야 짱. 왜 그래? 어디 아파?"
 "으응……동생 생각이 나서. 하루카 짱이 웃는 모습이 유랑 닮았어."
 동생은 키사라기 유라는 남자애라고 했다. 세 살 아래인데, 평소에도 치하야에게 노래를 불러 달라고 자주 졸랐다고 한다. 그 날도 동생 부탁으로 노래를 부르면서 길을 가다가, 유가 누나에게 정신이 팔려 차를 보지 못했고, 그리고…….
 "저번에 화장실에서 혼자 불렀던 노래 있잖아. 유가 죽은 게 그 노래 때문인 것 같아서 견딜 수가 없어. 유가 나 때문에 죽은 것 같아서, 난……."
 "치하야 짱."
 나는 그녀의 이름을 부르고 그대로 그녀를 끌어안았다. 치하야는 내 갑작스런 행동에 움찔했다가 그대로 굳어 버렸다.
 "치하야 짱은 아무것도 잘못 안 했어. 그렇지? 동생 부탁을 들어 줬을 뿐이잖아."
 "하지만 유는……,"
 "괜찮아, 치하야 짱. 치하야 짱 탓이 아니야. 유도 치하야 짱이 힘들어하는 걸 보고 싶진 않을거야."
 그렇지? 하는 내 질문 아닌 질문에 그녀는 눈물을 그렁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끌어안은 팔을 풀고 눈물을 훔쳐 준다.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자 그녀는 배시시 웃었다. 응. 역시 웃는 얼굴이 좋다.
 그런 식으로 우리는 매일 매일을 함께 보냈다. 노래에 대한 것, 아이돌에 대한 것, 내 병에 대한 것.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치하야와 함께한 몇 주간은 내 인생에서 빛나는 추억이 되었다. 늘 회색빛이었던 입원 생활에 색이 입혀진 것만 같았다.
 한결같은 내 응원이 도움이 되었는지 치하야는 웃는 얼굴로 노래할 수 있게 됐다. 슬쩍 물어 보니, 동생이 죽은 건 슬프지만 동생이 좋아했던 노래를 포기하는 것도 뭔가 잘못된 것 같다고 했다. 유에 대한 것도 잊지 않으면서, 노래는 노래대로 즐기기로 했다고 웃으며 말했다. 그녀의 웃음은 처음 만났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밝았다.

 즐거운 하루 하루가 지나는 동안 치하야는 어느새 깁스를 풀게 됐다. 입원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이별의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나도 치하야도 무척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녀는 비밀 이야기가 있다며 떠나기 직전 나를 불렀다. 자주 앉아서 이야기하던 정원 벤치. 몇 주 전에 비하면 더운 날씨였다. 계절은 어느새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려 하고 있었다.
 "하루카 짱. 나 이제 가 봐야 하는데. 이대로 헤어지긴 아쉬웠으니까……. 그러니까 약속하자. 10년 후에 다시 여기서 만나기로. 이 병원의 정원에서."
 "……응. 절대 안 잊어버릴게. 꼭 다시 만나자."
 치하야는 울먹이는 나를 꼭 안아 주었다. 언젠가 내가 그렇게 해 주었던 것처럼. 병원복이 아니라 처음 보는 사복. 얇은 병원복 너머로 느껴지는 체온이 평소와 다르게 느껴졌다.
 "그럼 갈게. 잘 있어, 하루카 짱. 또 보자――"
 "치하야, 짱……. 으우."
 그녀는 나를 풀어주고 주차장으로 갔다. 나는 울음으로 말을 잇지 못하고 그저 손을 흔들었다. 가는 길에 슬쩍 돌아본 그녀의 얼굴도 조금 붉게 상기된 것처럼 보였다.
 그게 내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치하야의 모습이었다.
 그 후로 치하야의 소식을 들을 방법은 없었다. 약속보다도 주소를 나누었으면 좋았을 텐데. 몇 달 뒤에 나도 퇴원할 때가 되었을 즈음 깨달은 거지만.
 병세가 안정되고 퇴원이 결정된 후, 나는 치하야네 주소를 간호사 언니에게 물었다. 자기가 알려준 건 비밀이라고 몰래 쥐어주었던 쪽지. 부모님께 졸라서 찾아간 그 주소에는 이미 다른 사람이 살고 있었다. 전에 살던 사람은 한 달 전쯤 이사를 갔다고 했다.
 우리가 만날 방법은 정말로 10년 후에 만나자는 약속밖에 없었다.
 10년 후를 상상해 본다. 그 때면 나는 18살, 고등학교 3학년이 된다. 치하야는 나보다 한 살 어리지만 같은 학년이라고 했으니, 그녀도 똑같이 3학년일 것이다. 수험생. 과연 정말로 만날 수 있을까. 치하야는 정말로 오는 걸까. 어쩌면 약속 같은 건 까맣게 잊고 평범한 학교생활을 보낼지도 모른다.
 나는 그저 작은 기대와 불안을 마음에 품고 어색한 학교 생활에 적응하기에 필사적이었다.

 그리고, 나 자신도 놀랄 정도로 아무런 일도 없이 고등학교 2학년도 다 끝났을 때. 나는 치하야를 발견했다.
 ……TV에서.
 정말 깜짝 놀랐다. 처음엔 그냥 동명이인인가 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진짜 치하야. 아이돌이 될 수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던 그녀는, 정말로 아이돌이 되어서 빛나는 스테이지에 서 있었다.
 '기대의 신인, 키사라기 치하야! 지난달 발매된 첫 싱글, '눈이 마주친 순간'이――'
 노래와 함께 흘러가는 자막을 눈으로 쫓는다. 지난달. 벌써 한 달이나 지났다고?
 그러고 보니 저번 달엔 시험 공부를 하느라 나도 친구들도 CD샵에 가지 않았었다. 눈치채지 못할 만도 하다.
 9년이 지나도록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다. 그야 9년이나 지났으니 얼굴도 어른스러워졌고, 키는 나보다 더 큰 것 같고, 목소리도 조금 변했다. 하지만 그녀가 그때 그 소녀임을 왠지 알 수 있었다.
 가슴이 뛰었다.
 죽은 동생을 그리워하며 노래를 포기하려고 했던 그 아이가. 지금은 이렇게 많은 관중 앞에서, 이런 유명한 방송에서 노래하고 있다. 정말 행복한 웃음을 지으며 관객의 환성을 받고 있다.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있다――
 달리기라도 한 것처럼 두근대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면서 TV를 본다. 한 장면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라이브라곤 생각되지 않을 만큼 완벽한 노래. 그러면서도 박자를 놓치지 않는 댄스. 한 달 전에 데뷔한 신인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여러분, 고마워요!'
 노래가 끝나고, 화면 속의 치하야는 손을 흔든다. 사방에서 물결치는 푸른 야광봉. 이마와 목에는 반짝이는 땀이 맺혀 있었지만 그녀는 전혀 지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이어지는 인터뷰 영상. 무대 의상이나 조명이 없어도 그녀는 여전히 반짝이는 것처럼 보였다.
 '키사라기 상은 왜 아이돌이 되기로 했나요?'
 '어렸을 때부터 꿈이었어요. 노래도 댄스도 필사적으로 연습해서――'
 어라.
 같이 놀던 시절엔 그런 꿈은 들은 적 없었다. 아이돌 같은 건 잘 모르겠다고 그랬었는데. 오히려 된다면 가수가 되고 싶다고――
 '――키사라기 치하야였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이윽고 인터뷰까지 끝나고 화면이 바뀌어 다른 신인 아이돌의 무대가 시작되었다.
 후우.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여전히 심장은 진정하지 못하고 빠르게 뒤고 있었다.
 벌써 9년이나 지났다. 분명 나 같은 건 잊어버렸겠지. 갑자기 아이돌이 된 건 의외였지만. 나중에 CD라도 사서 들어 보자.
 그렇게 최대한 평정을 가장한 생각을 해 보려 하지만, 좀처럼 머릿속에서 그 생각은 떠나 주지 않았다.
 "아이돌……."
 내 오랜 동경. 하지만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을 꿈.
 병이 발병한 시점에서 내 꿈은 실현불가능한 환상이 되고 말았다. 지금 난 별 이상 없이 학교도 다니고 있지만 그건 전부 약과 생활습관 덕이다. 조금만 햇볕을 쬐도 발진이 생기고, 조금만 숨이 차도 금방 목이 붓는다. 당연히 체육시간엔 가만히 그늘에 앉아만 있다. 아이돌 같은 건 절대로 무리다.
 절대로 무리지만.
 "가능성을 믿고 도전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는……거겠지, 치하야 짱."
 나도 치하야와 같은 무대에 서고 싶다. 아이돌로서 꿈과 희망을 전하고 싶다.
 ……그렇게 바라는 건, 내 욕심이 지나친 걸까.
 아직, 아직은 모르겠다. 하지만 그녀가 나를 잊어버렸더라도 나는 기억하고 있으니까. 다시 한 번 그녀를 만나고 싶으니까.
 그렇다면 내가 만나러 가면 된다. 치하야가 있는 곳까지. 같은 높이까지.
 그러려면 난――

 일단 결심이 서고 나자 다음은 금방이었다.
 나는 매일같이 노래와 댄스 연습을 했다. 몸에 무리가 가지 않게, 휴식을 많이 섞어가면서. 당연히 숙달은 더뎠고 몸은 피곤했다. 솔직히 어디까지가 괜찮고 어디부터가 무리인지 잘 알 수 없었다. 생각해보면 여태껏 제대로 운동을 해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연습을 시작하고 나서도 내 몸은 그럭저럭 잘 버텨 주었다. 예상과는 달리 목이 심하게 붓는 일도 없었다. 어쩌면 오랜 시간동안 몸이 병에 적응한 건지도 몰랐다.
 내가 아이돌이 되겠다고 하자, 부모님은 깊게 깊게 한숨을 쉬셨다. 하지만 옛날부터 아이돌 아이돌 노래를 부르고 다녔기 때문인지 반대는 하지 않으셨다. 단지 내 몸을 걱정해 주셨을 뿐이다. 지금은 그것이 죄송하고 감사했다.
 치하야는 그 뒤로도 자주 TV에 얼굴을 비췄다. 버라이어티는 영 어색해 보였지만 노래만큼은 무서울 정도로 훌륭했다. 가슴은 옛날과 비교해도 전혀 안 큰 것 같았지만……아이돌은 가슴으로 되는 게 아니니까.
 나는 슬쩍 그녀에게 팬레터를 쓰기로 했다. 나라는 건 비밀로, 그저 한 명의 팬으로서. '치하야 짱을 동경해서 저도 아이돌이 되기로 했습니다. 그땐 꼭 같은 무대에 서 주세요. 약속이에요!' 내용은 그런 느낌이었다. 보내는 사람 주소랑 히라가나 이름은 썼는데, 그녀는 과연 나란 걸 알아 줄까. 눈치채 줬으면 하는 마음과 만나는 날까진 비밀로 하고 싶은 마음이 마구 뒤섞여 있었다.
 그렇게 동경과 기대와 연습 투성이인 몇 달이 지나고 나서. 나는 765프로덕션에, 치하야가 소속된 곳에 연락을 하려고 했다. 오디션을 보기 위해.
 하지만 결국 그건 이루어지지 않았다. 몇 달이나 잠잠했던 병이 뒤늦게 악화된 것이다.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병원 침대였다. 연습실에서 갑자기 쓰러져서 실려온 거라고 옆에 있던 간호사 언니가 말했다.
 문득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치하야를 만나기 전까지 온통 회색빛이었던 입원 생활. 하루 하루 TV에 나오는 아이돌을 바라보는 것이 유일한 행복이었다.
 언젠가 그 사람들처럼 노래하고 춤추고 싶었다. 희망을 전하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런 꼴이다.
 어느새 간호사 언니가 의사 선생님을 불러왔다. 가볍게 문진을 하고 내 상태를 살펴본 후, 그는 유감이라는 표정을 지으며 내게 고했다.
 "과격한 운동은 안 하는 편이 좋다고 했지요. 이런 식으로 급성 증세가 계속 나타나면 예후가 안 좋습니다. 후유증이 남을 수도 있어요."
 "……어차피 불치병이잖아요."
 "불치병이지만 걸렸다고 반드시 죽는 병도 아니에요. 좀 더 자신을 아끼세요, 아마미 상."
 일단 지금은 푹 쉬시구요. 그렇게 말하고, 의사 선생님은 차트를 들고 병실을 나갔다.
 아이돌, 되고 싶었는데.
 치하야 짱도 보고 싶었는데.
 같은 무대에 서서 같은 풍경을 보고 싶었는데.
 '자신을 아껴라'라니. '푹 쉬어라'라니. 난 그저 자신을 이루기 위해 노력했을 뿐인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맺혔다. 치하야를 만나지 못하는 게 슬퍼서. 자신의 처지가 너무나 비참해서.
 맞은편에 걸린 TV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마침 치하야가 게스트로 나오는 방송인 모양이었다. 화면 속의 그녀는 여전히 부드러운 미소로 시청자들에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2주 뒤에 키사라기 상의 첫 단독 라이브가 있죠? 기분이 어떠세요?'
 '사실 아직도 실감이 안 나요. 데뷔한 게 바로 어제 같은데……. 이 감사를 팬들에게 돌려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렇구나. 바로 2주 뒤가 라이브였구나. 벌써 표는 다 매진됐겠지. 보러 가고 싶었는데.
 기분이 점점 바닥으로 가라앉는 것을 느끼며 시선을 돌렸다. 화면 너머라곤 해도 그녀를 바라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렇지. 그녀에게 편지를 쓰자. 몸이 이래선 어차피 못 갈테니까. 적어도 못 가서 미안하다는 말이라도 전해야지. 같이 스테이지에 서자는 약속을 못 이루게 됐다고도.
 간호사 언니에게 부탁해서 편지지와 펜을 받았다. 편지지 위에 펜을 놀린다. 최대한 깨끗한 글씨로.
 안녕하세요, 하루카예요. 라이브 정말 가고 싶었는데, 입원하는 바람에 못 갈 것 같아요. 꿈꿨던 아이돌도 포기하게 됐어요. 언젠가 치하야 짱이랑 한 무대에 서고 싶었는데 안 될 것 같네요. 그래도 계속 응원할 거예요. 라이브 꼭 성――
 "으흑……."
 결국 참지 못하고 울음이 터져나왔다.
 고등학교 3학년 초여름. 우리가 약속했던 10년 후. 그녀는 과연 약속을 기억하고 있을까. 정말로 병원 앞으로 나와 줄까. 분명 잊어버렸겠지. 그녀는 한창 잘 나가는 아이돌이고. 나는 꿈을 쫓다가 병원에 입원한 바보니까.
 역시 아이돌 같은 거, 나한텐 무리한 목표였던 거다. 환자 주제에 건방지다고 하늘이 벌을 내린 거다.
 나는 치하야와 나란히 설 수 없다――
 어떻게 마무리됐는지도 모를 편지를 두 번 접어서 봉투에 넣는다. 혹시 눈물이 떨어져서 젖지는 않았을까. 보내는 사람 란엔 우리집 주소와 내 이름. 받는 사람 란엔 프로덕션 주소와 치하야의 이름. 간호사 언니는 편지를 받아들고 병실을 나갔다. 문을 닫는 그녀의 표정은 마치 딱한 것이라도 보는 듯했다.

 나는 결국 할 수 있는 것도 없이 2주일을 병원에서 보냈다. 아주 천천히 이루어지는 고문 같았다. 오늘은 엄마가 병문안을 오셨다. 병원은 익숙하니까 병문안 같은 거 안 와도 되는데.
 "하루카. 몸은 좀 괜찮니?"
 "평소랑 똑같아요. 이젠 괜찮은 것 같은데."
 "그러다 쓰러졌잖니. 조금 더 두고보자꾸나."
 아, 그러고 보니. 그렇게 운을 떼고 엄마는 갑자기 가방 안에서 봉투 하나를 꺼냈다. 하얀 봉투엔 보내는 사람 이름이 없었다. 받는 사람 란에 우리집 주소와 내 이름이 적혀 있을 뿐이었다.
 "어제 편지가 왔단다. 네 이름으로 왔길래 뜯어보진 않았어. 자."
 봉투를 받아 조심스럽게 열어 보니, 안에는 편지 한 장과――
 "――라이브 티켓?"
 키사라기 치하야 1st 솔로 라이브라고 적힌 티켓. 아니, 정확히는 티켓이 아니었다. 그건 백스테이지 출입증이었다. 어째서 이런 물건이…….
 놀라서 떨리는 손으로 편지를 펼쳐 보았다. 가지런한 글씨로 적힌 짧은 편지. 편지라기보단 쪽지라는 말이 어울릴지도 모른다. 이 티켓을 보낸 사람이 쓴 걸까.
 '갑작스럽게 미안해요. 하지만 당신이 라이브에 와 줬으면 좋겠어요.
 최고로 좋은 자리를 준비해놓고 기다릴 테니까, 꼭 와 주세요.
 아, 그렇다고 무리하면 안 돼요 (웃음)'
 (웃음)이라니 그게 뭐야.
 오늘이 며칠이었더라. 계속 침대에만 있다 보니 요일감각이 무뎌졌다. 벽에 걸린 디지털 시계에서 오늘이 며칠인지를 확인한다. 어디서 많이 본 숫자. 그래, 오늘은 라이브 당일이다. 게다가 시간은…….
 "그럴 수가."
 안 늦는다. 당장 가면 제 시간에 맞춰 갈 수 있다.
 심장이 두근대는 게 느껴졌다. TV에서 치하야를 처음 봤을 때 같다. 편지와 출입증을 든 손에 땀이 배어나왔다.
 그럼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죄송해요, 엄마!"
 "하루카?!"
 당황하는 엄마를 내버려 두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다. 아무리 그래도 환자복으로 나갈 수는 없으니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는다. 곧장 병원을 뛰쳐나와 전철역을 찾는다. 고작 2주일이 지났을 뿐인데도 밖은 무척 더워져 있었다.
 '무리하면 안 돼요 (웃음)'이라니. 뭐야 그게. 무리해서라도 오라는 말 맞지? 2주일이나 쉬었으니까 하루 쯤은 무리해도 되는 거지?
 라이브 장소가 어디인지는 찾아볼 필요도 없었다. 전철역에 광고가 걸려 있었으니까. 치하야의 인기를 새삼 실감한다.
 전철을 타고 가길 몇 정거장. 가슴의 고동은 잠잠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어쩌지. 대체 누가 왜 이런 걸. 백스테이지 출입증이라니 역시 관계자일까? 관계자라면 역시……치하야 짱? 아니, 그럴 리가 없다. 분명 나 같은 건 잊어버리고 있을 테니까. 팬레터도 날 떠올릴만한 내용은 안 적었을 텐데. 그러고 보면 우리집 주소는 어떻게 알았을까.
 하지만 지금은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도착한 회장. 이미 입장이 시작된 뒤인지 줄을 서 있는 사람은 없었다. 어디 보자, 관계자용 출입구는……저기인가.
 출입증을 보여 주자 정말로 관계자용 문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난생 처음으로 오는 라이브 회장에서 관계자라니, 이상한 기분이다.
 안쪽에선 스태프들이 정신없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모두가 나를 힐끔 힐끔 바라보며 뒤가 있어 보이는 웃음을 지었다. 애써 무시하며 복도를 걷다가 발견한 이상한 문. 발걸음이 자연히 멈추었다.
 '대기실-키사라기 치하야, 아마미 하루카'
 치하야의 대기실. 아마 이 문 너머에 무대를 기다리는 그녀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왜 내 이름이 여기에?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계속 문앞에 서 있었다간 스태프들의 시선을 받을 게 분명했기에, 문을 노크해 보기로 했다.
 똑똑.
 "안에 누구 있어요?"
 "……아무도 없어요."
 "풉."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엉뚱한 대답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 때문만은 아니었다.
 "치하야 짱. 들어갈게?"
 문을 열고 들어가자, 대기실에는.
 화려한 무대 의상을 차려입은, 만나길 고대했던 인물이 있었다.
 "……하루카. 맞지?"
 "응. 치하야 짱……날 잊지 않아 줬구나."
 "당연하지. 한 번도 잊은 적 없었어."
 치하야는 나를 끌어안았다. 갑작스런 포옹에 놀라서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더니, 그녀는 그 상태 그대로 쿡쿡 웃었다.
 "후후. 옛날엔 하루카가 자주 이랬으면서."
 "정말, 놀리지 마."
 내가 어깨를 톡톡 두드리자 그녀는 팔을 풀어 주었다. 가까이서 얼굴을 보니 눈 앞에 있는 사람이 아이돌이란 실감이 났다. 반듯한 얼굴은 TV에서 보던 것보다도 예뻤다.
 "미안해, 하루카. 난 이제 무대에 나갈 시간이거든. 쌓인 얘기는 나중으로 미루고……. 자, 여기. 펜 라이트를 줄게."
 사진이나 영상으로만 보던 펜 라이트를 받아들고 전원을 넣어 봤더니, 생각보다 훨씬 밝아서 놀랐다.
 치하야는 내 손을 끌고 대기실을 나가서 가까이 있던 스태프에게 나를 맡겼다. 스태프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나를 좌석으로 안내했다.
 아까부터 뭔가 이상하다. 너무 잘 짜여져 있다고 할까. 꼭 내가 원래부터 이 공연에 올 걸 알고 있던 것처럼……. 대기실에 내 이름이 적혀 있던 것도 그렇고, 스태프들의 반응도 그렇고. 치하야 짱의 반응도 수상하다. 전혀 놀라질 않는걸.
 내가 관계자석에 도착했을 때쯤 공연 시작을 알리는 부저가 울렸다. 잠시 후 노랫소리와 함께 치하야가 나타나고 관객의 환성이 터져나왔다. 홀 전체를 울리는 성원에 나는 깜짝 놀라서 펜 라이트를 떨어뜨릴 뻔 했다.
 태어나서 처음 와 본 콘서트 회장. 그 열기는 TV로 보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귀가 아니라 몸으로 느껴지는 소리.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야광봉들. 회장 전체가 떠나갈 듯한 콜.
 그리고 그 앞에, 당당히 치하야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눈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좋아한단 걸 깨달았어――"
 그녀가 나를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렇게나 사람이 많은데도, 어쩐지 그렇게 느껴졌다.
 "――당신은 지금 어떤 기분이야?"
 노래는 계속 이어져 간다. 회장의 열기 때문인지 음향 때문인지, 그녀의 노래는 어떤 때보다 힘있고 아름답게 들렸다.

 "감사합니다!"
 노래가 끝나고 치하야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객석에서는 환호성이 울렸다. 라이브는 이제 종반을 향하고 있었다.
 "이 자리에 모여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리면서, 오늘의 스페셜 게스트를 모시겠습니다!"
 헤에. 게스트도 있는 거구나. 누가 나오는 걸까. 아이돌 동료나……아니면 음…….
 그 때 누군가 내 어깨를 두드렸다. 아까 그 스태프였다.
 "아마미 상. 슬슬 준비해 주세요. 이쪽으로……."
 "어, 네?"
 영문도 모른 채 좌석 사이의 좁은 길을 가로질러 무대 뒤편으로 향한다. 조금 멀리서 치하야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늘 게스트는요, 제 오랜 친구인데……. 제가 가장 힘들었을 때 의지가 되어 주고 늘 절 응원해 준 고마운 사람이에요. 제가 조금 억지를 부려서 무대에 설 수 있게 됐어요. 그 친구도 아마 많이 긴장하고 있을 테니까 실수하더라도 너그럽게 봐 주세요. 그럼 소개합니다――"
 스태프는 내게 인이어 모니터와 마이크를 주고선 얼른 나가라고 손짓했다. 에, 뭐? 나가라니, 스테이지에?!
 "――스페셜 게스트, 아마미 하루카입니다!"
 "에에에?!"
 거의 등을 떠밀리듯이 스테이지에 선 나. 당연히 무대 의상도 아니고, 아무것도 준비해 오지 않았다.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관객들의 시선이 아팠다. 긴장으로 몸이 잘 움직이지 않는다. 나보고 뭘 어떡하라고?!
 "하루카. 자기 소개 부탁해."
 "아, 응. 안, 안녕하세요. 아마미 하루카, 18살입니다, 자, 잘 부탁드립니다!"
 박수 소리.
 "갑자기 불러서 미안해. 놀랐지."
 그야 놀랐다. 엄청나게 놀랐다. 최고의 자리를 준비해 준다는 게 이런 거였어?
 "너무해, 치하야 짱……. 날 갑자기 이런 큰 무대에 세워도 있잖아,"
 "자, 그럼 게스트와 함께할 노래는……. 후후."
 치하야는 내 말을 끊고 멋대로 순서를 진행했다.
 인이어 모니터에서 들려온 반주는, 어, 음, 확실히 이거라면 부를 순 있지만……. 관객석에서도 당황한 기색이 보였다.
 하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 노래――어디서나 들을 수 있을 법한, 흔한 동요를 부르기 시작했다. 나도 그에 떠밀려 같이 노래를 부른다.
 처음에는 당황하던 관객들도 일단 노래가 시작되니 야광봉을 흔들고 콜도 넣어 주었다. 이런 동요에도 콜을 넣을 수 있다니, 이쯤 되면 관객도 프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10년 전, 그녀가 혼자서 화장실에서 불렀던 노래. 동생이 사고를 당하기 직전에도 부르고 있었다는 그 노래. 그 때보다 훨씬 좋아진 실력으로, 나를 보고 웃으며, 그녀는 즐거운 듯이 동요를 불렀다. 그녀의 표정을 보자 나도 어쩐지 즐거워졌다.
 그런 말도 안 되는 한 곡이 끝나고 나서. 관객들은 다른 곡들과 마찬가지로 따뜻한 성원을 보냈다. 치하야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관객을 향해 말했다.
 "제 억지에 어울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저한텐 추억이 담긴 노래였거든요. 하루카는 제가 노래를 포기하려고 했을 때 그걸 막아준 친구였어요. 하루카가 없었다면 아마 아이돌인 키사라기 치하야도 없었겠죠. 아이돌이라는 제 꿈은, 지병으로 꿈을 이룰 수 없는 그녀를 위한 거였으니까요."
 그랬구나. 치하야는 날 위해서…….
 "제가 지금 서 있는 이 무대. 눈부신 조명. 반짝이는 야광봉. 팬들의 응원. 이 모든 게 하루카와 여러분 덕분입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치하야가 고개를 숙이자 객석에서 박수와 함께 일제히 '고마워요!'하는 답이 들렸다. 그 대답이 아이돌을 향한 것인지, 팬 자신들을 향한 것인지, 아니면 나를 향한 것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나도 마이크는 대지 않고 큰 소리로 감사를 전했다. 내 꿈을 대신 이루어준 치하야에게, 그녀를 언제나 지지해 주는 팬들에게.
 "그럼 마지막으로, 하루카. 스테이지에 서 본 기분은 어때?"
 "솔직히 무서워. 나 내려가면 안 돼?"
 "물론 안 되지. 하루카는 나랑 마지막 한 곡을 불러야 하니까."
 "으에. 치하야 짱 노래는 어렵단 말야. 난 못 불러."
 "후후. 농담이야. 오늘은 와 줘서 고마워. 이따가 보자."
 그녀는 무대 입구쪽으로 나를 밀었다. 정말이지 환자 취급이 너무하다. 손을 흔들고 무대 뒤로 돌아가는 내 등 뒤로 따뜻한 박수 소리가 들렸다.

 마지막 곡이 끝나고 나서. 대기실로 돌아온 치하야는 땀범벅이 되어서 숨을 몰아쉬었다. 무대에서 퇴장한 뒤 관계자석이 아니라 대기실로 돌아와 있던 나는 그녀에게 수건을 건넸다.
 "수고했어, 치하야 짱!"
 "고마워. 하루카도 오늘 수고했어. 후후. 오면서 무리하진 않았어?"
 "안 했어, 안 했어. 솔직히 나한텐 무대에 선 게 훨씬 무리였는데."
 조용히 웃는 그녀에게 거짓말을 한다. 병원을 멋대로 뛰쳐나와 버렸으니 나중에 돌아가면 엄청 혼날 게 분명하다. 아, 물론 무대에 선 게 무리란 말은 거짓말이 아니다.
 "그건 유감인걸. 된다면 앙코르 무대에 같이 서자고 할 생각이었는데."
 "치하야 짱, 난 운동 못하는 거 알잖아."
 "무슨 소리야? 몇 달 동안이나 아이돌이 되겠다고 연습했었잖아."
 "에?"
 어째서, 어째서 치하야 짱이 그걸? 분명 얘기한 적 없었을 텐데.
 "뭘 그렇게 놀라. 아, 혹시 비밀이었어? 그런 식으로 편지를 쓰면 그야 알지. 마지막으로 온 편지는 이름도 그대로 적어 놓고."
 그녀는 싱글싱글 웃으면서 구석에 놓여 있던 가방에서 종이뭉치를 꺼냈다. 전부 내가 보냈던 팬레터였다. 그 중 하나를 내밀길래 받아서 보니, 아아, 과연. 젖었다 마른 것처럼 조금 우글쭈글한 봉투 한켠에 우리집 주소와 내 이름이 적혀 있었다. 히라가나가 아니라 평범하게 한자로. 성까지.
 "사실 좀 기대하고 있었는데. 어쩌면 하루카가 나랑 같이 공연을 할 수 있을지도 몰랐으니까. 그런데 1주일 전쯤에 그걸 받았거든. 그런 편지를 읽으면 누구라도 무리하고 싶어지지."
 말하면서 그녀는 내 머리를 마구 쓰다듬었다. 어쩐지 옛날보다 치하야가 적극적인 성격이 된 것 같은데.
 "아무튼. 이제 앙코르 무대 나가야 하는데, 같이 안 갈 거야? 내 노래는 가사도 안무도 다 외웠다고 편지로 자랑했었잖아?"
 "정말. 여기서 그 얘기를 꺼내면 거절할 수가 없어지잖아. 너무해."
 말은 그렇게 하면서, 나도 웃으며 그녀가 내민 손을 잡는다.
 그녀가 마련해 준 최고의 자리. 단 하루, 내가 아이돌이 될 수 있도록. 꿈을 이룰 수 있도록. 아마도 많은 반대를 무릅쓰고 준비해 줬을, 그녀와 가장 가까운 자리.
 다시 고동이 빨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맞다, 하루카가 꼭 올 거라고 믿고 의상도 빌렸어. 얼른 갈아입어."
 "?!"
 저기, 고맙긴 한데, ……좀 지나치지 않아?

 어찌어찌 앙코르 무대는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 ……그리고 환자는 무대에 서지 않는게 좋다는 것, 아이돌은 굉장한 사람들이라는 교훈을 얻었다.
 처음 입어본 예쁜 의상. 금방 벗어 버리는 건 아쉬웠지만 계속 입고 있을 수도 없으니, 치하야와 함께 의상실에서 옷을 갈아입었다. TV에서 봤던 것처럼 치하야 짱은 정말로 전혀 가슴이 안 큰 것 같았다.
 대기실에서 쉬고 있었더니 치하야의 프로듀서라는 사람이 왔다. 안경을 쓴 온화한 인상의 남성이었다. 그는 다른 아이돌 일이 바빠지는 바람에 치하야 전담 프로듀서를 그만두게 될 거라고 했다. 이번 라이브가 마지막 일이었다고 한다.
 "프로듀서, 아직 새 프로듀서는 안 들어왔죠?"
 "아, 미안. 오토나시 상이 모집 공고를 내긴 했는데, 역시 약소 프로덕션이라 그런지 좀처럼 사람들이 안 오나봐. 나 참, 너처럼 훌륭한 아이돌이 있는 프로덕션이 아직도 이런 취급이라니."
 "후후. 요즘은 사실상 저 혼자 일하는 셈이었죠."
 "……미안. 진짜로 미안."
 "그래도 바쁜 건 좋은 거예요."
 프로듀서라. 치하야가 짧은 기간 동안 솔로 라이브를 열 정도로 유명해진 건 분명 그의 수완 덕이 클 것이다. 일을 따오는 게 프로듀서의 일이라고 하니까.
 "하루카라고 했지? 치하야한테 얘기 많이 들었단다. 아까 무대 좋았어."
 "아……감사합니다."
 갑자기 나한테로 이야기가 넘어와서 당황하면서 대답한다. 안 그래도 지쳐 있던 목은 완전히 뒤집힌 우스운 목소리를 냈다.
 "너도 아이돌이 되면 좋을 텐데……. 병 때문이라니 유감이구나. 그렇지, 내 명함을 줄게."
 765프로덕션 프로듀서. 명함에 적힌 직책이 어쩐지 실감나지 않았다. 조금 전에 진짜 아이돌과 함께 무대에 섰다는 것조차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해. 치하야 친구니까 어지간한 일은 도와 줄게."
 "가, 감사합니다."
 이번엔 뒤집히지 않은 목소리로 대답을 한다.
 "저흰 이만 가 볼게요. 오늘 하루카를 너무 무리시킨 것 같아서 병원까지 데려다 주려고요. 변장은 잘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래, 나도 이만 다음 현장에 가 봐야 하니까……. 치하야, 오늘 정말 수고 많았다. 굉장한 무대였어."
 "칭찬은 아직 일러요, 프로듀서. 앞으로 더욱 굉장한 무대를 만들 거니까요."
 그녀는 프로듀서에게 엄지를 세워 보이고 내 손을 잡았다. 아까 들어왔던 문이 아니라 건물 뒷문으로 나간다. 그리고 그녀는 모자와 안경을 썼다. 길가에서 택시를 잡아 병원 이름을 말하자 곧 차가 출발했다.
 뒷좌석에 나란히 앉아서. 그녀가 살며시 내 손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따스했다.
 "하루카. 오늘은 와 줘서 고마워."
 "으응. 나야말로 불러 줘서 고마워. 나 있잖아, 치하야 짱이 날 잊어버렸을 거라고 생각하고, 그럼 내가 만나러 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서 무리해 버렸어. 치하야 짱은 날 기억해 줬는데. 난 치하야 짱을 못 믿어 줘서……미안해."
 내가 사과를 하자 그녀는 내 머리를 엉망으로 쓰다듬고는 소리내서 웃었다. 어쩐지 옛날하고 입장이 반대가 된 느낌이다. 치하야 짱, 밝아진 건 좋지만 좀 너무 밝아진 거 아냐?
 "왜 하루카가 사과하는 거야. 너한텐 평생 걸려도 못 갚을 만한 도움을 받았으니까 사과 안 해도 돼. 그 때 하루카가 계속 응원해주지 않았으면 지금처럼 즐겁게 노래하지도 못했을 거야. 그러니까 됐어."
 "……응."
 그리고 나서 한동안 대화는 없었다.
 아무 생각 없이 주머니에 찔러넣은 손이 무언가를 잡았다. 프로듀서의 명함이었다.
 765프로덕션. 결국 오디션은 보지 못했다. 이제 아이돌이 되는 것도 의사 소견으로 금지당했으니 치하야와 같이 지낼 방법은……어라.
 내 머릿속에는, 어떤 한 생각이 떠올라선 사라져 주지 않았다.

 오래 지나지 않아 택시는 병원에 도착했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택시비를 계산하고 내렸다. 나도 따라서 차에서 내린다. 어느새 저녁 시간이었다.
 병원을 향해 걸으면서 10년 전의 추억을 이야기한다. 화장실에서 처음 만났던 일. 정원에 앉아서 이야기했던 시시콜콜한 것들. 내가 졸라서 불러 주었던 여러 노래들. 10년 전 일인데도 꼭 어제 일인 것만 같았다.
 그리고 도착한 병원 앞. 추억 속 정원. 그녀는 건물에 들어가지 않고 늘 앉던 벤치에 앉았다. 정확히는 예전에 앉던 벤치와 같은 자리에 있는 새 벤치. 이전 건 너무 낡아서 새 걸로 재설치됐으니까.
 나도 그 옆에 나란히 앉자, 그녀는 나를 보고 미소짓더니 몸을 돌려 있는 힘껏 나를 껴안았다.
 "으와와, 치하야 짱, 뭐 하는 거야!?"
 "……약속, 지킨 거다?"
 귓가에서 들린 속삭임에 놀라서 숨을 삼켰다. 잠깐 동안 그녀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병원 앞, 늘 앉던 정원의 벤치. 고등학교 3학년. 봄은 이미 지나 초여름. 어쩐지 익숙하게 느껴졌던 날짜. 오늘은――
 "……오늘이었구나."
 "뭐야, 설마 까먹고 있었어?"
 그녀는 나를 풀어주고선 토라진 것처럼 볼을 부풀리고 시선을 돌렸다.
 "아. 병원에 실려오고 나선 정말로 까먹고 있었는지도."
 "너무해."
 입을 삐죽 내밀고 말하는 치하야는 고등학생도 아이돌도 아닌 7살짜리 어린애 같았다. 하지만 금방 웃는 얼굴로 표정을 되돌리고 내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잠깐만, 가까워, 가깝다니까.
 "하루카네 집 상당히 먼 데 있었지. 그럼 이제 한동안 못 볼지도 모르겠네."
 "으, 응. 그렇지. 치하야 짱은 아이돌이고. 난 평범한 고등학생이니까."
 "흐응~. 하루카를 위해서라면 언제든 시간 만들 수 있는데."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또다. 또 가슴이 뛰었다. 어느 때보다도, 무대에 섰을 때보다도 더 심장이 시끄럽게 느껴졌다. 평정을 가장하려고 노력하곤 있는데 잘 되고 있는 걸까.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치하야는 코가 닿을락 말락 하는 아슬아슬한 거리에서 나를 바라보았다.
 "있잖아, 하루카. 중요한 이야기가 있는데. 들어줄래?"
 "응. 그야 치하야 짱 이야기라면."
 "나,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
 '중요한 이야기'라고 운을 떼고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이었다. 사랑 상담? 그거라면 나보다도 프로듀서에게 하는 편이…….
 "그 사람에 대해서 생각하거나, 그냥 보기만 해도 막 가슴이 뛰는 거야. 다른 사람들한테도 심장 소리가 들리지 않을까 걱정될 만큼."
 어라.
 "아주 옛날부터 그랬는데. 하지만 그 사람하곤 한동안 만나질 못해서 확신이 없었어."
 그건 마치.
 "그런데――오늘 드디어 만나서 확신이 섰어. 난 그 사람을 좋아하는 거라고."
 내 얘기 같았다.
 처음 그녀의 노래를 들었을 때. TV에서 그녀를 발견했을 때. 티켓을 받았을 때. 그리고 지금.
 "음, 그러니까, 내 말은."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내 것인지 치하야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고요한 정원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유난히 맑게 울렸다.
 "나, 널 좋아해, 하루카."
 잠깐의 정적.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그 입술은 내 이름을 말한 것 같았다.
 맥박이 더욱 빨라진다. 얼굴이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뭔가, 뭔가 대답을 해야 하는데. 좋아해? 치하야 짱이? 나를? ……그럼 나는?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 나는 그녀의 노래에 반했다.
 오랜 시간이 지나 아이돌 데뷔를 한 그녀를 보았을 때. 나는 그녀를 동경했다.
 그리고 오늘. 내가 반하고 동경했던 그녀를 만나서. 그녀의 노래를 듣고. 같은 스테이지에 서서. 여태껏 맛보지 못한 두근거림을 느꼈다.
 그녀 말대로 이 두근거림이, 이 벅차오르는 감정이 좋아한다는 거라면.
 ――나도 그녀에게 반한 게 분명했다.
 말 없이 그녀의 입술에 내 입술을 겹친다. 눈을 감아서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잠시 후 입술을 떼고 눈을 떴을 때, 그녀는 행복한 웃음을 지었다.
 "나도 좋아해, 치하야 짱."

 후일담.
 그리고 나서 병실로 돌아간 나는 당연하게도 엄청나게 혼났다. 잘못을 했다는 자각은 있었기에 연신 죄송하단 말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었다. 꽤 위험한 짓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다행히도 도로 앓아눕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후 퇴원을 해서 평범히 학교를 다니는 생활로 돌아가게 됐을 때. 나는 765프로덕션의 프로듀서에게 연락을 했다. 부탁을 하기 위해서.
 생각해 봤는데, 내가 치하야 짱 곁에 있기 위해서 꼭 아이돌이 될 필요는 없잖아, 그렇지?
 예를 들면, 그래――
 "――프로듀서가 되고 싶다고?"
 "네!"
 내가 프로듀서가 돼 버리면 된다. 그거라면 아이돌만큼 격렬한 운동을 안 해도 되고, 그녀와는 계속 함께 있을 수 있고, 직장도 생긴다. 왓호이!
 긴장하고 보러 간 면접에서, 타카기 사장님은 나를 보더니 '팅!' 하고 왔다며 그대로 채용해 버렸다. 아직 졸업은 못 했으니까 견습 프로듀서란 걸로. 도대체 이 사무소는 어떻게 된 곳인지. 일반인을 무대에 올리는 걸 허락하질 않나, 학생을 프로듀서로 채용하질 않나. ……게다가 당사자는 둘 다 나였다.
 아무튼 나는, 그렇게 너무나도 간단히 765프로덕션 소속이 되었다.

 "치하야 짱, 다음 일까지 15분밖에 안 남았어! 택시로 가도 아슬아슬해!"
 "스케줄 짤 땐 좀 여유를 넣어 달라니까……."
 프로듀스라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고, 아직 배우는 중이라 실수도 많이 하지만.
 "으아으. 기말고사가 있었단 말야. 치하야 짱은 공부 안 해?"
 "아이돌이니까 그 정도는 어떻게든 되는 법이야."
 "그런 게 어딨어!"
 비록 내 꿈은 이룰 수 없었더라도, 나 대신 꿈을 이뤄 준 소중한 사람이 있었다.
 "아무튼, 으아아, 뛰어, 치하야 짱! 이번에도 늦으면 사장님께 잔소리 들을 거야!"
 "스케줄을 빡빡하게 잡은 하루카 잘못이잖아!?"
 아이돌은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을 전한다. 그런 동경의 대상을, 소중한 사람을, 내가 뒤에서 조금이라도 지탱해 줄 수 있다면.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그러니까 지금은 뛰어줘!"
 "……나중에 두고 봐."
 그렇게 생각하는 것만으로, 나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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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이 나오지 않는 약속 소설. 소재를 제공해주신 유하치님께 감사드립니다.

치하야 짱, 생일 축하해!

선물로는 프로듀서 하루카를 줄게!

하루치하 왓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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