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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마음 - 10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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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2-21, 2016 13:43에 작성됨.

인간군의 상태는 점점 가면 갈수록 악화되어 가고 있었다.
제일 먼저 생명의 위기를 느낀 부상병들이 하나 둘 탈주를 하기 시작하고, 거기다 그들이 잡히지 않고 무사히 돌아갔다는 소식이 들리자 탈주자의 수는 늘어났다. 억지로 잡아둔다고 해도 별 소용이 없었다. 그렇다고 그들을 잡아두지 않는다면, 정규군이 아닌 병사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그 때는, 그렇게 군의 분위기가 술렁거리던 때였다.


"비룡이 온다!!!"
 

누군가가 외치는 소리에, 모두들 질렸다는 표정으로 하늘을 바라보았지만, 곧 그들의 표정은 희미하게 밝은 빛을 띄었다.
언젠가 그랬던 것처럼, 날아오는 비룡은 단 한 마리 뿐이었다.

 

 

 


 

 
"용건은 이미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 말에 옆에 서 있던 이들의 입에서 무거운 한숨이 작게 흘러나왔다.
이런 상황이다. 분명히 항복을 요구할 것이다. 잘못하면 주종관계를 요구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싸움을 더 계속할 수 없는 인간군은 그것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신관인 유키호에게는 마족에게 복종하는 국가라는 건 생각하기도 싫은 일이었다.


"우리는 정전을 바란다."

 
그 순간 그 자리에 있던 이들은 모두 자신의 귀를 의심해야만 했다. '항복'을 '정전'으로 잘못 듣진 않았는지. 그런 분위기를 눈치챈 것인지 아닌지, 마코토은 계속 말을 이었다.

 
"저번같이 너희가 내세운 게 우리가 받아들일 만한 것이라면 받아들이겠다는 조건은 없다. 오히려 너희와 마석을 거래하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정전을 요구하겠어."

 
마코토의 말은 마치 적어온 것을 읽어내리는 듯한 말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이것이 어떤 말인지 받아들이는 데에는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그것이 이 전쟁의 상황에 비하면 피해가 상당히 적은 협상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마코토은 묵묵히 그들을 바라보다가 툭, 하고 내뱉듯 물었다.


"어떻게 할건진 결정했나? 물론 그래봤자 너희의 선택권은 없겠지만."

 
그 건방지다면 건방질 말에 첫째왕자가 이를 악물었지만, 그 이상의 행동은 보이지 않았다. 그의 말이 사실이었다. 그들에게 승기는 없고, 선택권도 없었다.
마석을 포기해야 한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에 머뭇거리던 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로 끝나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 거라고,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좋다..."

 
그 말에 마코토은 웃지도 않은 채, 기다렸다는 듯 돌아섰다. 마치 실망했다는 듯한 태도였다. 그 모습을 보던 유키호는 왠지 오싹함을 느꼈다.
사실, 저 마족은 정전을 하지 않고 모든 인간을 섬멸하길 원했던 것이 아닐까, 하는.
몇 걸음 걸어가던 그녀는 문득 생각이 났다는 듯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에 그 압박감에 질려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이들은 다시 굳은 채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전에 와서 인간군 본진을 단신으로 휩쓴 것은 그만큼 그들에게 충격이었다.


"그러고보니 이 쪽에 그 나라의 공주가 포로로 잡혀 있었지."
"!! 언니는 어떻게 됐어?!"
 

그 말에 마코토은 그녀를 힐끗 돌아보았다. 그러나 그 눈빛에선 여전히 오만함 외엔 어떤 것도 찾아낼 수 없었다. 그 사실에 그녀가 불안한 감정을 억지로 억누르고 있을 때 마코토는 예고도 없이 툭 내뱉었다.

 
"그 녀석이라면 살아있다. 반환하지. 포로 송환은 정전 협상 후 이틀 뒤에 하겠다. 정전 협상은, 오늘 오후에 우리의 왕이 여기로 올테니 그 녀석이랑 해. 아..그리고 우리의 왕은 힘으로 결정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그 녀석을 암살하거나 해서 전세를 역전시키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겠지. 물론 암살당할 정도의 왕이라면 필요없지만."


그 말에 그 자리에 있던 첫째 왕자가 숨을 들이켰다. 그 모습에 유키호는 그녀가 그런 생각을 잠시나마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마코토가 올라타자마자 비룡은 기다렸다는 듯 날아올랐다. 그 모습을 멍하니 보던 유키호는 옆에서 툭, 하는 소리가 나서 돌아보았다.
그녀의 둘째 오빠가 그 자리에 주저앉아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서 있던 왕은 한숨과도 같이 내뱉었다. 그 모습을 보던 그녀는 깨달았다.

전쟁은, 끝났다.
남은 것은 패배의 쓴 눈물 뿐이었다.

 

 

 

 
 

 

"알고 있지, 하루카?"
"으, 응"


하루카의 옷차림을 깔끔히 정돈한 치하야는 걱정된다는 듯 그렇게 다시 한 번 덧붙였다. 정전 협상에서 요구할 것과 제안할 것 모두 다 말해둔 상태고, 그 내용은 굉장히 짧았지만 치하야는 혹시라도 하루카가 잘못 말할까 걱정되었다.
그녀도 물론 같이 갈 예정이었지만, 인간군 내부인데다가 왕의 앞이므로 그녀의 목소리를 낼 순 없었다. 그녀의 혈족은 분명히 그녀의 목소리를 알아 들을테니까. 그녀가 같이 가는 건 단지 하루카가 잘못 말할 때 발이라도 꾹 밟아주기 위해 같이 가는 것 뿐이었다. 동시에 첫째 왕자가 그 후드의 마족이 자신이 아니라는 걸 완벽히 확신할 수 있도록 하는 마지막 작업이었다. 아무리 협조했다고 해도, 협상 때까지 포로인 인간을 데려갈리는 없으니까.
치하야는 검은 후드를 눌러 쓴 뒤에 검은 복면을 눈 밑에까지 올렸다. 그러고나서 하루카를 돌아보며 말했다.


"이상한 소리 해선 안돼."
"알고 있다니까?"
 

그 수긍에 살짝 웃어보인 치하야는, 마지막으로 메모리즈를 목에 걸었다. 실드 마법이 담겨있는 메모리즈였다.
그렇게 준비가 끝나자마자, 하루카는 치하야의 허리를 붙잡았다. 그 절대 익숙해질 리 없는 행동에 치하야가 움찔했지만, 하루카는 치하야를 붙잡은 채로 비룡 위에 뛰어 올랐다.

 
"그럼, 다녀올게!"


아래에 있는 마족들을 향해 그렇게 외치자마자, 비룡이 날아올랐다. 그 강한 풍압에 치하야는 후드를 붙잡았다. 잘못하면 후드가 벗겨질 것 같은 강한 바람이었다. 그 모습을 보던 하루카가 치하야를 끌어안았다.
그 포옹은 왠지 지나치게 다정해서, 오히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 느낌에 치하야는 하루카의 품에 안긴 채 쓰게 웃었다. 예전부터 이별을 각오했다고 해도, 이별은 슬픈 일이었다. 인간군의 본진이 보이는 사실을 현실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자신을 보고 치하야는 조소를 보냈다.
알고 있었으면서. 언젠간, 이렇게 될 것을 알고, 그녀를 끌어안고 있는 이 여자를 사랑했고, 그리고 이 여자를 위해 동족을 죽이는 작전을 지휘했으면서도, 이런 감정을 안고 있다는 건 바보같았다.
 
비룡은 충실히 인간군 본진 위로 날아갔다. 비룡을 발견한 인간들이 비켜서자마자, 비룡은 그 장소에 내려섰다. 비룡이 완전히 땅 위에 내려서고 나서야 하루카는 치하야를 끌어안은 채로 땅 위에 내려섰다. 하루카에게서 떨어져서 인간들의 왕이 있는 곳까지 간 치하야는 조심스레 심호흡을 했다. 이런 입장으로 인간군에 들어오게 될 것이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입술이 메마르는 것 같았다.
여기서 만약 그녀의 정체가 탄로난다면─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하루카가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그에 놀라서 치하야가 그녀를 돌아보자, 하루카는 그녀에게 미소지어보였다.

 
"괜찮을거야."

 
그에 멍하니 하루카를 보던 치하야는, 자신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무엇을 불안해하는지 알고서 그렇게 말하는걸까? 그렇게 묻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자, 치하야의 손을 놓은 하루카가 인간의 왕을 돌아보곤 말했다.

 
"용건은 오늘 오전 왔던 이가 전해주고 갔을 거라고 생각하고 바로 본론에 들어가겠어. 난 너희들과 정전 협상하는 조건으로, 너희들이 마석을 포기하길 권하는 바야."


훌륭히 서론에 들어간 하루카에, 치하야는 들리지 않도록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런 치하야의 동요는 겉에선 전혀 보이지 않았다. 첫째 왕자는 아직도 그녀를 의심하고 있는 듯 계속 치하야 쪽을 힐끗힐끗 바라보았지만, 치하야는 그 쪽은 전혀 돌아보지 않았다. 그리고 겉으로 봐선 전혀 알 수 없는 치하야의 존재를, 인간들은 마왕인 하루카보다 더욱 신경쓰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 반응을 깨달은 치하야는 하루카 뿐만이 아니라 자신조차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후드를 쓴 자'로 잔악한 마왕과 함께 인간의 역사에 남을 것이라고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그 잠시의 시간동안 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가 간신히 내뱉었다.

 
"마석의 포기라 함은, 마계에 대한 침략 행위를 하지 않는다는 걸 뜻하는건가?"
"아니, 이전의 거래도 모두 포기하라는 뜻이야."

 
하루카의 그 말에 인간군 전체가 술렁였다. 그리고 치하야는 그 기분을 이해했다. 마석을 얻으러 온 전쟁에서, 본래 있던 마석마저 모두 포기하고 돌아가야 한다는 것은 밑져야 본전조차 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런 술렁거림이 가라앉을 때까지 입을 다물고 있던 하루카는 조금 술렁거림이 가라앉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이번 전쟁으로, 마석을 가공할 수 있는 이들이 많이 죽었고, 마석은 가공하지 않으면 전혀 쓸모가 없어. 그리고 마석을 가공할 수 있는 이들은 매우 희귀하기에, 우리는 전과 같은 거래량을 유지할 수 없고, 동시에 마석을 더 이상 유출하지 않기로 한거야. 그러니까 마석의 거래는 완전히 포기해."
"그런..."
"그럴 수 없다면... 우리는 너희들을 섬멸하고 새로운 인간의 왕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어. ...그러고 싶진 않아. 그리고 인간에게 마석이 얼마나 영향력이 컸는지 알고 있으니, 마석 대신 다른 거래를 하자고 요구하고 싶어."
"...그건 무엇이지?"


그 말에 대한 왕의 질문에, 하루카는 치하야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치하야는 미리 손에 쥐고 있던 또 하나의 메모리즈를 하루카에게 건넸다. 그 메모리즈를 인간군 모두가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하루카는 메모리즈를 잘 보이도록 들고서 말했다.

 
"이건 스타피스 메모리즈. 인간의 신관들이 만드는 부적과도 비슷한 물건인데, 이걸로도 마석과는 다르지만 엄연히 마법을 쓸 수 있어."
"그게... 정말인가?"
"그럼! 마족은 인간과 달리 거짓말따윈 하지 않으니까."

 
그 말에 왕은 입을 다물었다. 지나칠 정도의 솔직함이 마족의 장점이며 단점이라는 것은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었다. 그런 분위기를 느낀 하루카는 미소짓곤 말했다.


"난 이것의 거래를 제안하고 싶어. 마석과는 다르지만, 인간들에게 필요한 건 어느 정도의 마법의 힘인 듯 하니까. 이런 조건으로 전후 처리를 하는 걸로, 정전을 요구할게."

 

 

 

 

 

마족의 전후 처리는 빨랐다.
마코토의 부대만을 남겨두고, 인간군이 있는 그린 브리즈 호에서 마왕군은 모두 철수했다. 인간군에 대한 배려의 일종이었다. 인간군에는 부상자가 많고 거의 대부분의 이들이 탈진 상태였기 때문에, 철수하는 데에는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치하야와 함께 먼저 마왕성으로 돌아온 하루카는 한숨을 내쉬었다. 군은 해체되었고, 본래 정치 체제라곤 거의 없는 마왕성은 한적한 분위기였다. 전쟁에 참가했던 인원들 대부분이 오늘은 쉬고, 내일부터 전쟁 때문에 중지되었던 싸움을 계속할 것이다.
그 사실을 떠올리던 하루카는 후드를 벗은 치하야를 바라보았다. 푸른 머리칼이 하늘로 흩날렸다. 그녀의 시선을 느낀 듯 치하야는 하루카를 돌아보았다가 빙긋 웃곤 말했다.

 
"약속했어. 적어도 백년이야."
"...왜 하필 그만큼을 요구하는거야?"


쓰게 웃으며 그렇게 답하는 하루카의 질문에, 치하야는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그녀는 하루카의 질문에 조용히 답했다.


"백년이면 난 벌써 죽어있을테니까."
"...치하야쨩.."

 
그녀의 부름에도 치하야는 응답하지 않은 채 조용히 하늘만 바라보았다. 검은 하늘은 인간계와는 다른 붉은 빛을 띄고 있었다. 검붉은 하늘 위에 별이 쏟아진 풍경은 언제봐도 신기하다. 그리고 이제 다시는 이 풍경을 바라볼 일은 없을 것이다.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이틀 뒤에, 인간계로 돌아간다는 사실이 싫어진다는 게 이상하게 느껴졌다.


"...평생 기억해달라고 안해. 마족의 평생은 기니까."

 
치하야는 하늘을 바라보며 그렇게 말했다.
그래, 마족의 평생은 길다. 인간에 비하면 지나칠 정도로 길었다. 그리고 그 사실에 치하야는 여기서 헤어진다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하나 고민했다.
자신은 급속도로 늙어갈 테지만, 하루카는 지금 모습 그대로일테니까.

마족은 늙지 않는다. 가끔 가다가 노인 모습의 마족이 있지만, 그가 오히려 하루카보다 훨씬 더 적게 살았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마족의 모습은 성인식 이후 결정되며, 그 모습은 죽을 때까지 바뀌지 않는다. 치하야는 그들이 노화로 죽는지도 의문이었다. 대부분의 마족은 싸우다가 죽었고, 죽을 때까지 싸우니 노화의 정도도, 노화로 인한 사망도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사실이 슬프게 느껴졌다. 왕인 하루카는 강하고, 왕에게 도전하려면 차례차례 그 밑에 있는 이들을 쓰러뜨려야 한다. 그리고 왕의 밑에 있는 이들도 강했다.
그런 만큼, 그는 오랫동안 이 세계의 왕으로 살아갈 것이다.


"그냥 내가 살아있을 때 동안만 기억해줘."

 
그 말을 내뱉은 순간, 하루카가 그녀를 끌어안았다. 어깨를 적시는 뜨거운 눈물에 치하야는 쓰게 웃었다. 하루카는 치하야를 끌어안은 채 울음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치하야쨩까지 잃으면 세 사람째 잃는 것이 되려나..."


그 목소리에 치하야는 웃으며 답했다.

 
"몇백년이나 살았으면서 날 포함해서 세 사람만 사랑했어?"
"......"
"두 사람은 마족이었지?"
"...응."

 
그 말에 치하야는 하루카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눈물이 날 것 같아서,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부럽네... 너한테 사랑받았던 사람들."


그들은 훨씬 더 오랫동안 같이 있었을텐데.
자신보다, 훨씬 더 오랫동안 하루카와 함께 있었을 것이, 이 여성에게 오랫동안 사랑받았을 것이 무척이나 부러워서, 왠지 질투심마저 일었다.

속삭이는 듯한 그 목소리에 하루카는 치하야를 안았다.
이틀 후면 이별이었다. 그 사실에 일어나는 이 뜨거운 감정을 뭐라고 말해야만 할까.

검붉은 밤하늘 위에서, 조용히 별들이 반짝였다. 그런 그들의 소리없는 반짝임을 뒤로 한 채, 두 사람의 입술이 맞닿았다.
어찌보면 우스운 인연이었지만, 그런 건 상관 없었다. 그렇게 사랑했다기엔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런 건 그녀들에게는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둘 모두, 염두에 두고 있는 건 단 하나 뿐이었다.

 

헤어지고 싶지 않다는, 감정.
곁에 있고 싶다는 감정.
그것 뿐이었다.

 

서로를 요구하는 듯한 키스가 한참을 이어졌다. 검붉은 빛을 띄고 있는 밤하늘은 조용히 서로를 안고 있는 그들을 감쌌다.

몇 번이고, 그 부드러운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거듭한다.
좋아한다는, 헤어지고 싶지 않다는, 그렇지만 놓아줘야만 한다는 슬픔과, 이 생각이, 그녀만을 생각하는 자신의 생각이, 그에게 전달되도록.

놓치고 싶지 않은 이 마음이 전달되도록.
영원히 그녀가 자신을 잊지 않도록. 자신이 그녀를 잊지 않도록.

 

 

 

달빛에 새하얀 피부가 드러난다.
그만큼이나 새하얀 달이 검붉은 하늘 위에 휘영청 떠 있었다. 그 달빛은 인간계에서 볼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밝아서, 어둠 속에서도 감출 것 없이 그 모든 모습을 드러냈다.
태양만큼 밝지 않은, 은은한 달빛 아래 드러나는 새하얀 피부는, 낮에 보는 것 보다 훨씬 더 고혹적이다. 새하얀 빛에 물들어 더 하얗게 보이는 그 피부에 입을 맞춘 하루카는 조용히 그 품에 기댔다.
심장의 고동 소리. 전달되어오는 따스한 온기.

 
"치하야쨩..."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그녀의 손이 아무 말 없이 그녀를 감싸 안았다. 그 따스한 온기에 어쩐지 울고 싶어지는 기분이었다.
이제, 이 온기를 두 번 다시 느낄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다시는, 느낄 수 없게 되어 버릴 지도 모른다면, 지금 잊지 않도록 하고 싶었다. 절대로 잊지 않도록.

고개를 들어 그 입술에 키스한다. 아까의 키스로 붉은 기를 띄운 입술은 어둠 안에서 더 매력적으로 보였다. 다시 한 번, 몇 번이고 짙은 키스를 거듭한 끝에 그 귓가에 조용히 속삭인다. 그 속삭임에 치하야가 어쩐지 울 것 같은 쓸쓸한 표정으로 웃었다.
잠깐 할 말을 잃었던 치하야는 붉어진 얼굴로 말했다.

 
"대체...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어..."
"응?"
"...나, 이런 건 처음이니까! 대체 내가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다고!"

 
애써 부끄러움을 참고 내뱉었는데 알아듣지 못하는 하루카에 화가 나 그렇게 외쳐 버린다. 하지만 그 목소리에도 하루카는 놀라거나 울상이 되지 않은 채 빙긋 웃고선 그녀를 끌어안은 채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괜찮아요~ 전부 하루카씨에게 맡겨두면 되니까!"


그 목소리가 어쩐지 지나치게 상냥하다고 느낀 치하야는 고개를 내저었다.
이렇게 상냥하게 말하면, 이렇게 따뜻하게 대해주면 어쩔 수 없다. 정말로, 이 사람 최대의 무기는 그 상냥함이다.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린 치하야는 고개를 끄덕였다. 분하던 뭐가 어쨌던 자신은 누군가와 이런 행위를 한 적은 한 번도 없는 반면, 하루카는 분명히 경험이 있다. 그렇게 떠올려보면 어쩐지 묘한 질투심도 일지만, 치하야는 그런 생각은 버리기로 했다.


어차피 이 날 하루가 지나면, 다시는 그녀에게 안길 수 없다.
아마도, 죽을 때까지.

그렇지만 하루카는 그보다 훨씬 오랜 세월을 살아갈 것이다. 더 많은 사람들을 사랑할 것이고, 더 많은 사람들과 사랑에 빠질 것이다. 언젠가 잊혀질 건 알고 있다. 그렇지만, 지금 그녀를 좋아한다는 것도 현실.

 

 

다른 어느 때보다 흐트러진 눈동자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붉어진 그 얼굴과, 갈색 눈동자의 끝에 매달린 물기를 바라보던 하루카는 살짝 그 눈가의 물기를 핥아냈다.
그 누구보다도 사랑스럽다.
놓치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면, 치하야쨩은 화를 낼까.


치하야는 툭, 하고 무언가 떨어지는 느낌에 눈을 떴다. 그리고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왜... 울어?"

 
그렇게 중얼거리며, 떨리는 손을 뻗어 그녀의 눈물을 닦아낸다. 그런 치하야를 보던 하루카는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이 이후, 다음날 아침이 온다면 다시는 볼 수 없게 되어 버린다.
이렇게 사랑스러운 사람을.

 
"아니... 아무 것도, 아무 것도 아니야."


그렇게 중얼거리며, 그녀의 어깨에 잠시 고개를 묻는다. 그런 하루카를 본 치하야는 쓰게 웃곤 그녀의 뺨에 가볍게 키스했다.
어째서 우는 것인진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는데.
 

"치하야짱..."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강하게 그녀를 끌어 안는다.
누구보다도 좋아한다는 이 마음이 전달되기를, 그렇게 바라면서.


좋아한다고..

 

 

 

 

 

 

 

 


 

"...치하야쨩?"

 
조용히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하루카에 치하야는 가늘게 눈을 떴다. 아직 숨이 거칠었다. 그 여파로 대답은 하지 못하고 무슨 일이냐는 듯 자신을 바라보는 치하야를 보고 미소지은 하루카는 여전히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잠시 오른팔을 빌려줄 수 있을까?"
"응? ...상관없지만..."


그녀의 요청에 의아해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인 치하야는 간신히 몸을 일으켜 팔을 내밀었다. 그 행동에 그녀가 마족인 자신을 얼마나 믿고 있는지 다시 한 번 느낀 하루카는 어쩐지 씁쓸해 보이는, 그렇지만 행복한 듯한 미소를 짓고선 손을 그 어깨에 가져갔다.


"앗! 아, 아파..."
"아, 미안! 조금 아플거야. 잠시만 참아줘."


인상을 찌푸리는 그녀의 모습에 그렇게 덧붙이듯 말하는 하루카를 보고, 치하야는 그런 건 좀 더 진작에 말해주라고 할까 망설였다. 하지만 그녀가 그렇게 말하기도 전에 하루카는 됐다, 라면서 그녀의 어깨에서 손을 뗐다. 그에 자연스레 치하야는 그 어깨에 시선을 돌렸다.

 
"...이게 뭐야? 문신?"
"마계의 왕의 문양이야. 제 8대 왕..여왕인 내 문양은 그런 모양이지!"


검은 선으로 어느새 새겨진 그 문양을 바라보며, 치하야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직 그 문양의 용도가 무엇인지 감이 오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 그녀를 보고 웃은 하루카는 미소를 띄운 채로 말했다.


"그 주문이, 치하야쨩을 보호해 줄 거야."
"...보호?"
"응."
 

고개를 끄덕이고선, 어쩐지 쓸쓸하게 미소짓는 그에 치하야는 괜찮다고 말하려던 입을 다물었다. 그런 치하야를 보고 하루카는 조용히 말했다.

 
"쓸모없는 걱정이라고 할 지도 모르겠지만, 난 분명... 치하야짱과 떨어져 있다면, 걱정하느라 어쩔 줄 모를거야. 그러니까, 이렇게라도... 치하야짱을 지켜주고 싶어."
"...하루카."
"난 같이 갈 수 없지만. 그렇지만, 이렇게 한다면, 이 주문만은 치하야짱과 함께 갈 수 있으니까. 그러니까, 이렇게..."

 
검은 문양이 새겨진 그 어깨에 잠시 시선을 맞췄던 하루카는 몸을 기울여 그 어깨에 입술을 맞췄다. 그 순간 검은 문양에서 은은한 붉은 빛이 났다, 라고 느꼈을 때, 하루카가 치하야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이걸로라도, 지켜주고 싶어."

 
그 말에 치하야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건네져오는 키스에 응했을 뿐. 검은 문양이 달빛을 받아, 어슴푸레하게 드러났다.

 



 

 

 

 

 

인간계의 가을 하늘보다 더욱 푸른 마계의 하늘에 뜬 태양은 고루 햇빛을 뿌렸다. 그 햇빛은 마왕성 가장 깊숙한 곳에도 여김없이 들어왔다. 햇빛이 뿌려지는 것에 희미하게 눈을 뜬 하루카는 으음, 하고 신음을 내뱉었다.
품에 안겨 자고 있는 치하야가 하루카의 눈에 들어왔을 때, 잠깐 놀랐다가 이내 곧 미소짓고선 치하야를 끌어안는다. 따스한 온기가 품 안에 들어왔다. 그 온기에 왠지 눈물이 날 것 같은 기분을 느낀 하루카는 한숨을 섞어 웃으며 치하야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치하야의 어깨에 새겨진 검은 문양이 희미하게 빛을 발했다.


이별의 날 아침이었다.

 

 

 

 

 

포로였던 치하야의 인간계 송환은 조용히 이루어졌다. 그녀는 아무 연락도 없이 왕국으로 돌아왔고, 그녀의 모습은 포로라고 하기엔 미안할 정도로 깔끔하고 단정한 모습이었다. 패전 덕에 꼴이 말이 아닌 남매들하곤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무사했구나. 다행이다."


그렇게 말하는 왕의 말을 그저 인사치레로 받아들인 치하야는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고개를 든 그녀는 조용히 말했다.

 
"돌아오자마자 갑자기 죄송합니다만,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무엇이냐?"


그렇게 묻는 왕을, 그녀의 갈색 눈동자가 똑바로 바라보았다. 어딜 봐도 왕과는 닮지 않은 그녀의 모습은, 왕의 후궁이며 자신의 어머니인, 예전에 죽었던 이를 완벽히 닮아있었다. 그 사실에 묘한 아련함을 느끼던 왕은 치하야가 꺼낸 말에 집중했다.


"마석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치하야는 잠깐 숨을 돌렸다.
왕국의 전후 처리는 자신이 할 것이라고, 그렇게 스스로 맹세한 터였다. 협조한 자신에 대한 배려로 항복이 아닌 정전을, 마석의 몰수 대신 메모리즈의 거래를 요구해 준 이들을 위해서.
자신이 갈 수 없을 그 곳에서 충실히 자신의 일을 하고 있을 한 여자를 위해서.


"제가 직접 그들에게 들었던 내용입니다만...."

 

 

 

 

 

 

"언니!"


밝은 목소리에 치하야는 시선을 돌렸다. 환한 미소를 지은 채로 치하야를 보고 달려온 유키호는 망설임없이 그녀의 품에 덥썩 안겼다. 그 무게감에 주춤, 두어걸음 뒤로 물러선 치하야는 쓰게 웃곤 그녀를 떼어놓았다.

 
"몸은 괜찮아? 어디 다친 곳은 없어? 내가 치료해줄게!"
"아냐, 괜찮아. 멀쩡해."


그리곤 곧바로 그렇게 묻는 유키호에게 웃어보이며 치하야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나치게 편하게 지내서 오히려 전장에서 고생했을 유키호에게 미안할 정도였다. 어딘가 모르게 더 피곤해보이는 듯한 유키호의 머리를 쓰다듬은 치하야는 쓰게 웃곤 말했다.


"나야 괜찮지만. 너야말로 피곤한 거 아냐?"
"난 괜찮아. 부상병들이 많지만, 신전의 신관들 모두가 부상자들을 치료하고 있으니까 난 별로 할 일도 없고... 그런데, 언니. 우음..예전하고 좀 달라진 것 같아."
"뭐가?"
"아니, 뭐랄까... 응, 분위기랄까... 아니, 그거보단 좀..."


뭔가 알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유키호를 잠시 멍하니 바라보던 치하야는 아아, 하고 짧게 내뱉었다. 무엇 때문에 유키호가 그러는 지 알 것 같았다.
그녀의 시선이 그의 오른쪽 어깨에 멎었다. 그 복장은 여름인 덕분에, 공주인만큼 엄격하긴 하지만 실용적인 반팔 차림이었다. 치하야의 시선을 자연스레 따라간 유키호는 그 오른쪽 어깨 옷깃 아래에 새겨진 것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게... 뭐야?"
"으음, 문신이라고 할까, 뭐랄까..."

 
유키호의 질문에 그렇게 답하며 치하야는 곤란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의 오른쪽 어깨에는, 검은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인간계에선 볼 수 없는 그 문양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유키호는 치하야를 돌아보며 말했다.

 
"왠지 기분이 나빠... 이거."
"그래? 유키호는 신관이니까 그런 거 아닐까... 난 별 느낌 없지만."
"에?"
"음...마계에서 인간계로 돌아올 때, 선물...로 받은 거야."
"선물? 이런 걸? 아니, 그보다, 마계에서? 괘, 괜찮은 거야, 이거?"
"별로 나쁜 의미는 아냐. 그보다 이건 비밀로 해줘, 유키호."

 
치하야의 말에 인상을 찌푸리고 머뭇거리던 유키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됐든 그녀에게 있어 치하야는 소중한 사람이었고, 치하야에게 해가 갈 일은 별로 하고 싶지 않았다. 포로에게 선물로 뭔가 준다는 것은 뭔가 잘못된 것처럼 느껴졌지만.
고개를 끄덕이고선 굳게 입을 다물어보인 유키호에게 미소지은 치하야는 오른쪽 어깨를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위치에선 옷깃에 가려서, 그 문양은 보이지 않았다. 치하야는 쓰게 웃었다. 그 쓸쓸해보이기까지 하는 미소에 유키호가 머뭇거리며 말을 걸려는 순간, 치하야가 갑자기 뒤를 돌아보았다.
 

"왜, 왜 그래, 언니?"
"...아니, 기분 탓인가? 방금 누가..."


누가 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 오싹함에 복도를 둘러보던 치하야는 갑작스레 뒤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기운에 자신도 모르게 뭐라고 외치며 유키호를 감쌌다.
그리고 치하야가 유키호를 감싸느라 보지 못한 것을, 유키호는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단검을 들고 달려드는 검은 그림자를.


"언니!!!"


그녀의 비명같은 목소리가, 별궁 복도에 울렸다.

 

 

 

 

 

 


 

"...치하야쨩?"


평소와 다름 없이 마왕성에서 몇가지 잡무를 처리하고 한가한, 혹은 지독할 정도로 무료한 시간을 보내던 하루카는 갑작스레 그렇게 중얼거렸다.
하루카의 녹색 눈동자가 인간계가 있을 뱡향을 돌아보았다. 이 위치에서 인간계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아주 잠깐이었지만 그녀가 느낀 그건 틀림없이 마력의 파동이었기 때문에 하루카는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걸까..."

 
그녀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헤어지기 전날, 그녀를 품에 안은 뒤에 하루카는 그녀의 어깨에 마계의 8대째 왕인 그 자신의 문양을 새겨주었다. 그건 일종의 보호 주문이었다. 치하야에게 살의를 띄거나, 치하야에게 생명의 위협을 주는 이가 있을 때 자동으로 그 주문이 발동하게 되어 있었다. 그 이외에 다른 것도 있지만, 하고 생각하던 하루카는 쓸데없는 생각을 털어냈다.
발동시 그 마력의 파동은 자신의 것으로 나타난다. 인간계까지는 먼 거리였지만, 그 거리에서도 하루카는 자신의 마력을 느낄 수 있었다.


치하야를 지켜주고 싶어서 걸었던 주문이었지만, 오히려 이게 자신을 더 불안하게 할 줄은 몰랐다고 생각하며 하루카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 주문이 있다면 치하야에게 위해를 끼칠 수 있는 자는 없다. 그렇지만 위해를 끼치려고 하는 자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하루카의 걱정은 부풀어만 갔다.


"괜찮은거야, 치하야쨩...?"
 

대답해 줄 리 없는 질문을, 인간계가 있을 허공으로 던진다.


눈을 뜬 치하야는 별궁 복도가 전부 날아가 버렸단 사실에 멍하니 별궁을 바라보았다. 본래 복도에서 보이지 않을 별궁의 정원이 한눈에 들어왔다.
누군가가 습격해오고, 그래서 유키호를 감쌌다. 그 후로 어떻게 된 건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아서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고민하던 치하야는 오른쪽 어깨가 저려오는 것을 느꼈다. 자연스레 오른쪽 어깨로 시선을 돌리자, 희미하게 오른쪽 어깨의 문양이 붉은빛을 띄고 있었다.

치하야는 아아, 하고 내뱉었다.
하루카가 말했었다. 이 주문이 있는 한 위해를 끼칠 수 있는 자는 없을 거라고. 지켜주고 싶지만, 함께 갈 수 없으니까, 이걸로라도 지켜주고 싶다고.

 
"언니,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유키호가 멍하니 그렇게 물어보았다. 그런 유키호에게 보고 명확한 답을 줄 순 없던 치하야는 쓴미소만을 짓고서 고개를 가로저어 보였을 뿐이었다. 그리고 유키호를 품에서 떼어놓은 그녀는 날아가 버린 복도를 보고 한숨을 내쉬고 있다가, 자신이 바라보고 있는 방향이 남쪽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잠시 멍하니 그렇게 바라보고 있던 치하야는 툭, 하고 내뱉었다.

 
"...고마워. 덕분에 괜찮아..."

 
듣는 사람이 없는 대답을.
유키호가 무슨 말이냐는 듯 바라봤지만, 치하야는 그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계는 굉장히 평화로웠다. 여기저기에서 계급 싸움이 끊이지 않았지만, 그것이 바로 마계의 일상이었기 때문에 그건 평화롭다고 표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인간계에선 원인 불명의 대폭발과 첫째 공주인 치하야에게 암살자가 보내졌다는 이유로 일대 혼란이 일어났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계에서 요청해 온 제의는 조금 늦게 마계에 도착했다.
치하야가 인간계로 간 이후 대부분의 일에 의욕을 잃었던 하루카는 그 서신을 가만히 읽어보다가 말했다.


"그러니까 요점은, 인간들의 첫째 공주가 암살을 당할 뻔했고, 그 때문에 여러 가지로 불안하므로 평화 정전의 상징으로 서로에게 볼모...라는 걸로 사람을 보내자는 이야기인가?"


그 서신의 내용 때문에 간만에 소집된 마계의 주축을 이루고 있는 자들은 그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하고 내뱉은 하루카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 표정을 본 모두는 하루카가 서로를 믿지 못한다는 것이 틀림없는 그 제안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고 있다고 추측했다.
그리고 그들의 예상대로 하루카는 인상을 찌푸린 채로 서신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인간은 이상한 걸 많이 아는구나... 우리를 의심하고 있다는 이야기일까, 이건?"
"그런 것 같아."


리츠코가 그렇게 수긍하는 거에 한숨을 푹 내쉰 하루카는 머리를 긁적였다. 볼모로 누군가를 교환하자는 이야기가 꺼림칙한 모양이었다. 그런 하루카를 보고 있던 아즈사가 조용히 말했다.


"하루카쨩, 그 첫째 공주가 누굴 가리키는지 알고 있니?"
"응? 누군데요?"


타카네의 질문에, 인간계에 사정에 대해 전혀 문외한인 하루카는 그렇게 되물었다. 인간들과 10년 가까이 싸워왔지만 누가 누군지, 인간의 왕자가 몇 명인지 공주가 몇 명인지 알 길은 없었다.
그리고 적어도 하루카보단 인간계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아즈사가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하루카를 바라보며 말했다.

 
"치하야쨩이야."


그 말에 하루카의 표정이 굳었다.
치하야가 인간계로 돌아가기 전, 함께 있던 이틀 동안 하루카가 치하야를 곁에서 떼놓지 않았기 때문에 마계의 중심축을 이루고 있는 일원들 대부분이 그녀가 치하야라는 인간을 어떻게 여기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아즈사도 그런 것을 염두에 두고 내뱉은 말이었다.
하루카는 시선을 내려 서신을 다시 보았다. 이 서신에 적힌 첫째 공주라는 것이 치하야를 가리키는 말이라면, 치하야에게 암살자가 갔다는 소리였다.


그 쪽에서 이 쪽을 의심한다는 것보다, 하루카에겐 그 사실이 더 신경이 쓰였다.
아무리 그 주문을 걸어놨다고 해도, 걱정이 된다.
한참을 인상을 찌푸린 채 그 사실에 대해 고민하던 하루카는 한숨을 푹 내쉬곤 말했다.

 
"좋아, 그럼 마코토가 인간계로 가줘."
"뭐?! 하루카, 지금 네가 무슨 말을 하는건지 알고 있는 거야?"
"응. 누군가는 인간계로 가야 하는 거잖아? 그러니까, 마코토가 가는거야."
"대체 왜 나야!! 그 약해 빠진 녀석들 사이에!"
 

마코토는 굉장히 화가 난 듯 했지만, 다른 이들은 자신이 아니니 상관없다는 듯 외면했다. 그리고 하루카도 그런 그들의 분위기를 눈치채곤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자아, 여기 봐볼래? 이들은 막내 공주를 보낸다고 하잖아. 그러니까 동등한 조건의 사람을 교환한다면, 왕의 혈족이 되어야겠지. 그리고 내 혈족은 마코토밖에 없어."
"그게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하는거야, 지금?"
"그리고 마코토는 왕의 다음 가는 지위인 재상이지? 그만큼 계급 싸움 때문에 다른 이들이 불편해 할 일은 없겠지. 재상에게 도전할 수 있는 이는 몇백년에 한 번씩이나 나오니까."


인상을 찌푸린 마코토는 입을 다물었다.
계급 싸움은 마족들에게 있어서 인생 전체이며, 평생과도 같았다. 그리고 자신도 천 년만에 전 재상에게 온 도전자라는 것을 상기한 마코토은 욕설을 내뱉었다. 계급 싸움 자체는 마족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거였고, 인간계로 간다면 그 계급 싸움에서 가장 먼 이가 가야 마족들에게 불편함을 주지 않을 것이다.
계급싸움에서 거리가 멀며, 중요직을 차지하고 있는 자. 그 것이 볼모의 조건이라면, 마코토만큼 적합한 이는 없었다. 그 것을 떠올린 마코토은 입술을 깨물었다. 마코토는 인간을 싫어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하루카는 쓰게 웃으며 말했다.
 

"미안하지만 마코토, 부탁할게. 나도 된다면... 내가 가고 싶어."


그 말에 내부가 다시 조용해졌다.
잠시 서신을 바라보던 하루카는 후우, 하고 고개를 내저었다. 정치 체제가 거의 없는 마족에게 있어서 왕이라는 것은 큰 의미를 가지지 않았지만, 대표자라는 의미에서 마계를 비울 순 없었다. 그게 왕이란 자리였다.
아무리 자유로운 마족이라도, 왕이란 자리엔 그만큼의 책임이 있었다. 그 책임에 평소보다 훨씬 더 강한 부자유를 느끼며 하루카는 말했다.


"그럴 수 없으니 부탁하는거야...그 곳에 가서 치하야짱을 지켜줘."

 
자신이 지키고 싶지만 지킬 수 없는 그녀를.

 

 

 

 

 

 

 

"마계로... 볼모라고?"

 
놀라 되묻는 그 말에 유키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유키호의 표정은 극도로 어두워져있었다. 전쟁 중 눈 앞에서 둘째 오빠가 팔을 잃는 모습까지 본데다가 신관이기까지 한 유키호는 마계로 간다는 게 꺼림칙한 모양이었다. 그런 유키호의 심정을 이해하면서도, 치하야의 머릿속은 극도로 빠르게 돌아갔다.
볼모라면, 마계로 합법적으로 갈 수 있다. 그렇게 마계로 간다면, 하루카의 곁에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은 굉장한 매력으로 느껴졌다.


헤어지기 전, 각자가 있을 자리에 있기로 맹세했다. 그렇지만, 볼모로 간다면 그녀가 있을 자리는 마계가 된다.
그 약속도 지키면서, 하루카의 곁에 있을 수 있었다.

 
"...유키호, 아버지를 알현하러 가자."
"응? 무, 무슨 생각이야, 언니? 잠깐만!"


빠르게 왕의 방으로 향하는 치하야의 모습에 유키호는 놀라 그녀를 뒤쫓아갔다. 그녀가 쫓아오는 것을 힐끗 보는 것으로 확인한 치하야는 바쁘게 걸으며 말했다.


"내가 볼모로 간다고 말하겠어."
"에? 잠, 잠깐, 언니, 그렇게까진...! 잠깐만, 언니!"


고개를 숙이는 경비병들을 지나쳐, 왕이 머무는 방의 문을 열고 들어간 치하야의 모습에 그녀가 대체 무슨 일로 그렇게 행동하는 건지 알 수 없었던 유키호는 난처해하며 발만 동동 구르다가 따라 들어갔다. 치하야는 그렇게 침착한 상태에서 서두르는 성격이 아니었다.
들어가자마자 곧장 몸을 숙인 치하야를 본 왕은 피곤한 듯 조용히 물었다.

 
"무슨 일이지? 치하야, 유키호."
"이번에 마계로 볼모를 보내는 일에 관해서 이야기 드릴 게 있어서 왔습니다. 정말 유키호를 마계로 보낼 생각이신가요?"

 
그 질문은 그만두라는 듯 유키호가 치하야의 옷깃을 잡았지만, 치하야는 그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왕은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 모습을 본 치하야는 잠깐 입술을 깨물었다가 그가 생각한 '반대 이유'를 꺼내기로 결심했다.


"말도 안돼요."
"어째서 그렇게 말하는거냐?"
"유키호는 이 나라의 공주이기 이전에 신에게 평생을 바치기로 맹세한 신단의 신관이에요."


그 말에 유키호가 놀란 표정을 지으며 치하야를 바라보았다. 왕도 그 말에 동요된 듯 유키호를 바라보았다. 그 사실을 눈치챈 치하야는 재빠르게 말했다.

 
"예, 유키호는 신의 종입니다. 그런 유키호를 마계로 보낸다면 신단에서 엄청난 반발이 있을 거에요. 신의 아이를 그런 곳에 보냈다는 신관들의 반발을 어떻게 견뎌내실 생각이시죠?"
"......"
"신관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이 사실이 커지면 주교님께서도 반드시 반대하실 겁니다. 이 나라의 기틀은 종교국가입니다. 그걸 간과하지 말아주세요."
"...그러면 어쩌자는 이야기냐?"

 
기다렸던 대답이 나왔다고 생각한 순간, 치하야의 심장이 떨렸다.
두근거리는 소리만 귓가에 커다랗게 울린다고 생각하면서 치하야는 힘겹게 말했다.

 
"제가 마계에 볼모로 가겠어요."


그 말에 왕은 놀란 표정으로 치하야를 바라보았다. 유키호가 그녀의 옷깃을 꽉 잡았지만, 그 감각은 치하야에게 느껴지지 않았다.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만이 느껴졌을 뿐이었다.

 

 

 

 

 

 

 

 

 

치하야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날씨는 맑았지만, 그 하늘은 마계의 하늘보다 푸르지 않았기 때문에 맑다는 생각은 그다지 들지 않았다. 그러고보면 마계의 하늘은 정말로 새파란 빛을 띄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치하야는 시선을 들었다.
그의 시야에 비룡 두 마리가 날아오는 것이 들어왔다. 주변에 서 있던 이들도 그것을 발견했는지 술렁였다. 그리고 그 것이 좀 더 가까워졌을 때 치하야는 쓴웃음을 짓곤 중얼거렸다.

 
"마코토인가. 그 뒤엔... 하루카...?"


그렇게 중얼거리던 치하야는, 자신이 비룡이 누구의 비룡인지 알아봤다는 사실에 놀랐다. 하지만 그 놀람도 잠시 마코토의 비룡 뒤에 따라 오는 하루카의 비룡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여기서, 다시 하루카를 만날 수 있게 되는 걸까.

그렇다면 하루카한테 안기지 않으면 다행일텐데. 그렇게 생각하며 치하야는 쓴웃음을 지었다. 비룡은 빠른 속도로 날아와 그들에게서 좀 떨어진 공터에 내려섰다. 그리고 치하야는 그 비룡 중 사람이 타고 있는 것은 한 마리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비룡에서 내린 것은, 마코토 하나 뿐이었다. 거기서 그들이 마코토의 힘을 얼마나 신뢰하고 있는지 깨달은 치하야는 미소짓고선 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갑작스레 걸음을 옮긴 것에 그녀를 따라 걸어야하나 술렁이던 병사들은 치하야가 뒤를 돌아보곤 고개를 내저어 보인 것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마코토는 그들에게 있어서 아직도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그들과 다른 입장에서 마코토를 만났던 치하야는 태연하게 걸어가 마코토의 앞에 섰다. 마코토은 묵묵히 그녀를 보다가 툭 던지듯 말했다.


"역시 치하야, 네가 오는건가. 그럴 가능성도 있다고 예상했지만."
"응. 나도 하루카의 혈족이라면 마코토라고 예상했어."
"하루카는 네가 올 거라곤 절대 생각하지 않을걸?"


그 말에 치하야는 쓴 웃음을 지었다. 하루카다워, 라고 중얼거리는 그녀를 본 마코토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런 그녀의 표정에 잠깐 머뭇거리던 치하야는 음, 하고 내뱉곤 말했다.


"마코토, 한가지 부탁해도 될까?"
"...너까지 부탁이야?"
"미안. 하지만 꼭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 하루카랑 비슷한 갈색 머리의 여자아이, 본 적 있어? 신관인..."
"아아. 그 여자 말이야?"
"응. 유키호라고... 내 동생이야. 싫어할지도 모르겠지만, 그 아이가 위험한 일을 하지 않게 지켜봐 달라고 해도 될까, 마코토?"

 
그 말에 마코토는 차가운 시선으로 그녀를 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신관을 마족에게 부탁하다니 대체 무슨 정신인지 알 수 없었다.
그래, 어차피 이 인간은 평범한 인간이 아니다.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린 마코토는 그녀에게 몸을 돌려 그녀를 데려가기 위한 병사들이 있는 장소를 바라보며 말했다.

 
"내 마음에 든다면 고려해볼게."

 
그 말에 치하야는 쓰게 웃었다. 그런 치하야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마코토는 조용히 말했다.

 
"뒤에 있는 비룡을 타고 가. 널 공격하거나 하진 않을테니 걱정하진 마."
"아, 알아. 저 비룡, 하루카의 비룡이지?"
"그래, 하루카의 비룡이야."
"그럼, 네 비룡은...?"
"내가 데려갈거야."


그 말에 저 커다란 걸 왕성 어디에 놓을지 고민하는 표정으로 치하야는 비룡을 바라보았다. 그런 그녀의 고민을 깨달았는지, 마코토는 비룡을 돌아보고 손짓했다.
그 순간 작게 변하는 비룡의 모습에 치하야는 놀랐다. 놀란 것은 치하야 뿐만이 아니라 병사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비룡은 그게 자연스럽다는 듯 날아가 마코토의 손 위에 앉았다. 그 거대한 생물이 손 위에 앉을 정도로, 거의 매만큼 작아진 걸 보고 놀란 치하야를 본 마코토은 멍하니 그녀를 보며 말했다.


"마법을 건 거야. 뭘 그렇게 놀라는거지?"
"아, 아아. 그런 마법도 있구나... 싶어서."
"...아, 그래, 인간이었지."
"......인간이야, 난."


그 말에 새삼스레 치하야가 인간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마코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녀에 한숨을 푹 내쉬던 치하야는 조용히 말했다.

 
"그럼, 부탁할게. 마코토."
"......"


그 말에 대답하지 않은 채 마코토는 치하야의 손을 붙잡았다. 그 돌발 행동에 놀란 치하야가 그녀를 바라보며 무슨 일이냐고 묻기도 전에 마코토이 그 붙잡은 왼손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에?! 자, 자, 잠깐, 마코토, 이게...!!"
"...마계의 왕비가 될 자에 대한 예의야. 난 결혼식엔 참석 못 할 테니까. 부탁은 생각해보지."
"왕비라니...."


마코토는 그에 대해 더 이상 할 말이 없는 듯 치하야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인상을 쓰고 있던 치하야는 한숨을 푹 내쉬곤 하루카의 비룡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치하야가 걸어오자마자, 하루카의 비룡은 기다렸다는 듯 목을 숙여 치하야를 바라보았다. 그 커다란 비룡을 보던 치하야는 비룡이 그녀를 알아보고 머리를 쓰다듬어주길 바란단 사실을 깨닫곤 손을 뻗어 비룡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걸 기다린 듯 목을 울려 그르렁거리던 비룡은 치하야의 옷깃을 물었다.


"어, 잠, 잠깐, 왓!"


그에 치하야가 당황하기도 전에 치하야의 옷깃을 문 채로 치하야를 들어올린 비룡은 자신의 목 뒤로 치하야를 넘겼다. 미끄러질 뻔했던 것을 간신히 비늘을 잡아 떨어지지 않은 치하야를 본 마코토는 그녀가 인간이라는 걸 또 잊고 있었단 사실을 떠올렸다. 그리고 마코토는 자신이 왜 자꾸 그녀가 인간이 아니라고 생각하는지 깨달았다.
그녀에게선 인간만이 갖는 인간 특유의 마력의 냄새가 없었다.


그 사실에 대해 이상함을 느끼기도 전에, 치하야가 안장이 있는 곳까지 어떻게 가서 제대로 자리를 잡았는지 하루카의 비룡이 날갯짓을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마코토는 그녀의 손 위에 있던 자신의 비룡을 어깨 위로 옮겨 올려놓고선 병사들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인간 병사들은 그녀를 두려워하는 것 같았지만, 그 직무에 맞게 충실히 그녀를 데리고 돌아갈 채비를 했다.
비룡 위에 혼자 올라탄 치하야는 멍하니 주변을 바라보았다. 인간계의 도시와 마계의 황폐하다 싶을 정도의 모래 사막이 그의 시야에 모두 들어왔다.
언젠가 비룡에 혼자 탔을 때 봤던 것과는 전혀 다른, 환상적인 풍경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치하야는 조용히 말했다.

 
"가자."

 
그 말을 알아들은 듯 비룡은 크게 목을 울리고선 날개짓했다. 빠른 속력은 아니었지만, 뺨을 스치고 가는 바람은 굉장히 기분이 좋았다.
치하야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왠지 웃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치하야는 미소지었다.

 

 

 

 

 

 

 

 

 

마왕성으로 그녀의 비룡이 돌아오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하루카는 어쨌든간에 볼모로 오는 이를 맞이하기 위해 비룡이 착륙할 장소로 나섰다.
널따란 마왕성의 발코니에서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던 하루카는 비룡이 날아오는 것을 발견하고 그 위에 시선을 맞췄다. 막내 공주라면 치하야짱의 동생일테고, 그렇다면 잘 대우해주리라 마음먹은 터였다. 치하야쨩은 마코토에게 맡겨두면 좋겠지, 라고 체념한 지 오래였다.
하지만 비룡이 가까이 날아왔을 때, 하루카는 순간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비룡 위에 타고 있는 이의 푸른 머리카락. 갈색 눈동자. 잊혀질 수 없는 그 모습.

 
그리고, 그 몸에서 느껴지는 마력의 파동─

 
"어, 하루카, 저건..."
 

옆에서 미키가 그렇게 중얼거리며 하루카의 어깨를 치려는 순간, 비룡이 착륙하기 위해 느리게 선회하는 것을 포착한 하루카가 발코니를 박차고 뛰어 올랐다. 커다랗게 날갯짓하는 비룡의 날개를 간신히 피한 하루카는 비룡의 꼬리를 손으로 짚은 반동으로 비룡의 등 위에 올랐다.
그리고 등 위에서 그런 그녀를 멍하니 보는 치하야를 본 하루카는 울 것 같은 표정으로 그녀의 이름을 말했다.

 
"치, 치하야쨩...!"
"...하루카..."


잊을 수 없는 그녀의 모습을 꿈을 보는 것 같이 보던 하루카는 그녀에게 달려갔다.

 
"치하야쨩!!"
"...위험하잖아!"

 
그리고 치하야를 곧장 끌어안으려던 하루카는, 치하야가 그녀의 머리를 내려치는 바람에 비룡의 등 위에서 미끄러질 뻔했다. 비룡이 느리게 선회하고 있어서 간신히 미끄러지진 않은 하루카는 우아, 하고 머리를 감싸쥔 채로 눈물로 눈을 글썽인채 치하야를 바라보았다.
 

"아, 아파라... 치하야쨩, 왜 갑자기..."
"아래서 기다렸으면 됐잖아, 위험하게 왜 그런 짓을 해?"
"치, 치하야쨩! 잠깐!! 여, 여기서 치하야쨩이 날 때리는 게 더 위험하거든요?!"

 
다시 때리려는 치하야를 보고 그렇게 외친 하루카의 말은 꽤나 설득력이 있었는지, 치하야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잠시 입을 다물고 있던 치하야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하루카."
"응?"

 
눈물을 글썽인 채 속으로 투덜대던 하루카는 그녀가 부르는 목소리에 시선을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잠시 머뭇대는 듯 보이던 치하야는 시선을 들고 미소지으며 말했다.

 
"다녀왔어."

 
그 말에 하루카는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비룡이 느리게 공중을 선회했다.

 
"어서와, 치하야쨩."

 
조심스레 입술이 맞닿는 두 사람을 감싸고 바람이 불었다.
언제나 새파란 마계의 하늘은, 그 날도 지나칠 정도로 맑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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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량 마개조를 통해서 10편으로 끝이네요 아하하하

아마 마코토 위주의 에필로그가 한편가량이 남아있긴 하지만 '~`..

......9-10-에필로그라는 3연속 제한에 맞추기 위해 이번 편 분량도 좀 늘어난거고<

 

원래대로였다면 제대로 표현은 안되있지만. 아 못한거지만/ 

하루치하의 [검열삭제] 이후부터가 11화로 갔을텐데 말이죠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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