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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마음 -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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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2-21, 2016 09:50에 작성됨.

왕의 행동에, 맨 처음 입을 열 수 있던 건 그녀의 언니이자 그런만큼 왕을 가장 오랫동안 보아온 마코토였다.

 
"제정신이야, 하루카?"


그리고 마코토의 질문에, 모두들 긍정하고 싶다는 듯한 표정으로 하루카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들에 하루카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런 하루카의 옆에는, 한 인간이 서 있었다.

 

 

 

 

"그렇지만, 조언을 구해오라고 한 것은 마코토잖아..."
"그렇지, 하지만 데려오라고 한 적은 없어."


날카롭게 내뱉는 그 말에 하루카는 난처한 표정으로 치하야를 바라보았다. 뒤집어 쓰고 있던 커다란 후드를 벗은 치하야는, 그녀의 옆에 서서 긴장된 표정으로 마족들을 보고 있었다. 목숨이 걸린 이 상황에서 긴장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모습에 하루카는 불안감을 느꼈다.
마족은 강한 것을 좋아한다. 강한 것을 제일로 치고, 가장 강한 자를 왕으로 삼을 정도로 약육강식의 원리가 지배하는 마족의 세계와 사고방식은, 치하야가 약해 보인다면 곧장 지배하려 들고 혹은 무시하려 들 것이다. 그것이 아니면 아니면 죽이려 들 것이다. 하루카가 걱정하는 것은 마지막의 일이었다.

 
"인간 주제에, 여기까지 따라 올 생각을 하다니. 하루카만 상대하더니 마족이 우습게 보이는거야? 배짱 좋은 인간이네."

 
그리고 하루카의 걱정을 그대로 보여주기라도 할 듯, 이오리가 입을 열었다. 그 말은 명백히 치하야를 향한 공격이었다. 그런 말을 한 그녀를 힐끗 돌아본 치하야는 후우, 하고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에게 조언을 요청한 건 너희들이야. 그리고 전쟁은 그때 그때 변화하는 거야. 그런데 그런 전쟁을 내게 머리로만 대처하란 소리는 지고 싶다는 소리지. 너희는 분명히 승리를 원하고, 그렇기 때문에 인간인 나에게까지 조언을 요청했겠지? 그런데 내가 전쟁에 참가하는 건 싫다는 거야?"


그 말에, 그 자리에 있던 마족들이 날카로운 눈으로 치하야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들에 하루카는 안절부절하지 못했다. 그녀는 왕이고, 그만큼 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지만 여기 있는 마족들도 하나같이 강한 이들이었다. 이들이 치하야를 죽이기로 마음먹는다면 하루카도 어찌할 수 없을 지 모른다. 그런 현실에 하루카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와 동시에 하루카는 오른쪽 발을 앞으로 내딛었다. 만약 이들이 멋대로 행동한다면 언제든지 움직일 수 있도록.


"웃기는 소리 하지 마! 인간인 것을 무시하고, 나에게 도움을 요청한 건 너희야. 그리고 난 너희들이 요청했기 때문에 여기에 온 거야. 인간에게 도움을 요청할 정도로 자존심을 버렸던 주제에, 인간이 너희들을 돕기 위해 전쟁에 참여하는 건 자존심이 상해서 도저히 못봐주겠다는거야? 말도 안되는 소리. 전쟁을 돕기 위해선 전쟁에 참여할 수밖에 없어!"


치하야의 언성이 조금 높아졌다.
그 모습에 하루카는 그녀는 인간들의 공주였고, 한 군을 지휘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의 말은 능숙하게 사람을 끌어들이는 힘이 있었다. 몇 차례, 그런 식의 연설을 해본 적이 있는 것일까. 그러나 그 것이 그 자리에 있는 마족들에게 먹힐 지는 모를 일이기에, 하루카는 초조한 마음으로 주먹을 쥐었다 폈다했다. 잠시 숨을 내쉰 치하야는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너희는 인간만큼 전쟁을 많이 치룬 적도 없고, 인간처럼 전쟁을 기록하지도 않았어. 그런 만큼 너희는 전쟁에 미숙해. 그렇지만 난 너희를 도와서 너희가 전쟁에 익숙한 인간을 상대로 승리를 가질 수 있도록 하겠어. 이 왕이 원하는 대로, 피해를 최소화하는 승리를 위해서. 그러니까, 이제와서 그까짓 일을 갖고 가타부타 시끄럽게 굴지마!"

 
긴장한 탓에, 손 끝이 시려왔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억지로 용기를 짜내서 그들 앞에서 이야기하긴 했지만, 만약 원한다면 손을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자신을 죽일 수 있는 이들 앞에서 강압적으로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치하야에게 심한 불안감을 가져다주었다.
혹시 진짜로 죽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몇 번이나 반복하게 하는 침묵이 지속되었다. 치하야가 답답함에 어쩔 줄 모르게 되어 버릴  것 같을 때, 짧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 웃음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하핫..재미있는 인간이군."
 

웃은 것은 마코토였다. 그 말을 치하야는 어떻게 받아들일 지 몰라, 마코토를 빤히 바라보았다. 하루카에게 조언을 요청하라고 한 것을 보아 꽤나 높은 지위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치하야의 생각과는 연관없이, 마코토는 여전히 싸늘한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좋아, 너에게 조언을 요청하라고 한 건 나야. 그러니까 나도 널 여기로 불러온 거나 마찬가지겠지. 나도 책임지겠다. 네가 여기 있는 건 왕인 하루카, 그리고 재상인 내가 보장하겠어."

 
마코토의 말에 주변에 있던 마물들이 전부 경악한 표정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그에 치하야는 그녀가 상당히 높은 지위에 있는 것 같다고 어렴풋이 짐작했다. 재상이라는 단어는 같지만, 그 것이 인간과 같은 지위에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주변 마물들이 놀란 것은 왕의 다음에 있는 그녀가 인간을 지지해서가 아니었다. 그 말을 한 것이 바로 그 마코토이기 때문에 놀란 것이었다. 그 자리에 있는 누구보다 인간을 싫어하는 그녀가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은 그 자리에 있는 이들에게 경악을 가져다주기 충분했다. 하루카에게게 조차. 하지만 마코토은 자신의 말에 설득력을 부여하듯이 입을 다물었고, 그에 그들은 그 말이 농담이 아니라고 믿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사실에 뭐라고 그들이 판단을 내리기도 전에, 밖에서 외침이 들려왔다.

 
"인간군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 ..치하야쨩?"

"응. 지금의 포위진을 계속 유지하며, 인간군이 빠져 나갈 수 있는 길을 모두 없애겠어. 인간군을 그린 브리즈 호에 고립시키는거야!"

 

 

 

 

 

 

공격 해 오는 인간군을 격파하라는 명령을 받은 야요이는 접근해오는 인간군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군사역인 인간은 그들의 행동을 돌파구를 찾기 위한 '시험'이라고 판단했다. 그리고 그 인간은 되도록 인간을 죽이지 않고, 대신 부상자는 늘려서 돌려보내라고 명령했다.
야요이는 인간을 딱히 싫어하는 것도 아니지만, 존중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그 인간의 명령이라고 생각하기보단, 왕의 명령이라고 생각해서 따르기로 했다. 그리고 그녀를 따르는 이들은 충분히 그럴 만한 능력을 갖고 있었다.

 
"모두, 지시대로 행동하는 거에요! 인간군과 전투 준비!"


미리 전달받은 지시가 있었기에, 야요이의 신호에 그들은 인간군을 향해 도열했다. 모여있다면 마법에 의해 피해를 크게 입는다는 것을 10년의 전쟁으로 깨달은 인간들은 일정한 간격으로 흩어져서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야요이는 먼저 시작 신호를 던졌다.

 
"이터널 스파이럴!"

 
그녀의 외침에 응하듯, 앞으로 뻗은 야요이의 팔에서 거대한 회오리가 생성되어 맹렬한 기세로 인간군을 향해 돌진했다.
거대한 먼지가 뿌옇게 일어나며 비명이 울려퍼졌지만, 야요이는 그들 중 사상자는 한 명도 없을 거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먼지구름을 신호로, 야요이의 휘하에 있는 이들은 인간군을 향해 달렸다.

 
마족들은 전통적으로 개개의 싸움에 강하다. 단체로 하는 싸움에는 소질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야요이는 그들에게 싸움을 맡겨두기로 했다. 일일이 지시하는 것은 소용없다. 단지, 그들이 자신의 맨 처음의 지시를 잊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땅을 박차 몸을 옆으로 피해 자신에게 날아오는 칼을 피한 야요이는, 적당한 힘으로 주먹을 내질렀다. 그리고 그녀는 인정했다.


봐주는 싸움이, 더 힘들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하루카는 자신의 옆을 돌아보았다. 커다란 검은 후드를 뒤집어 쓴 치하야가 그녀의 옆에 있었다. 그녀의 목에 걸린 스타피스 메모리즈만이 반짝였다.
그 스타피스 메모리즈는, 마족의 마력을 담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치하야가 인간이라는 것은 들키지 않을 것이다. 분명히 치하야에게는 마족이 가진 마력의 냄새가 날 테니까. 하루카는 그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하루카는 그것을 걱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치하야의 지시를 의아하게 여겨서 그녀를 봤을 뿐이었다.

 
치하야는 인간군을 고립시키기 위해 인간군과 전투를 벌이는 방향을 택했다. 하지만 그녀의 지시는 묘했다. 인간군이 그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은 숫자임에도 불구하고, 치하야는 되도록이면 사상자를 내지 말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부상자는 허용한다. 그것도 죽지 않을 정도지만 움직이지는 못할 부상이라면 더욱 환영한다는 투로 말했다. 상대에게 신관이 있는 상황에서, 죽지 않은 사람들은 곧 부상을 치료해서 올 거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던 하루카는 그 지시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옆에 서서 저 멀리 보이는 먼지구름을 보던 치하야는 하루카의 시선을 느꼈는지 그를 돌아보았다. 후드 아래로, 그녀의 눈동자가 보였다.


"왜 그래, 하루카?"
"...치하야쨩, 아까의 그 지시는...어째서 그렇게 지시한거야?"
"..신관을 지치게 하고 싶었어."
"뭐?"
"이제부터 이 포위망을 유지하면서, 인간군이 싸움을 걸어오는 걸 기다리는 게 아니라 각각의 부대마다 번갈아가며 인간군을 공격한 뒤 충분한 부상자를 냈다고 생각하면 바로 후퇴하게 할거야. 아무리 뛰어난 신관이라도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부상자를 치료하려면 지칠 수밖에 없지. 인간군에 있는 신관들은 다들 유능한 신관인건 인정해. 아마도 대부분 여성이겠지. 처녀성을 유지하는 신관은 그 대가로 뛰어난 능력을 가지게 되니까. 하지만 아무리 뛰어난 사람들이어도, 열명 남짓으로 그 엄청난 부상자들을 치료하려면 힘들어."

 
그렇게 중얼거리고선 치하야는 인간군의 본대를 바라보았다. 아마도 이건 '시험'이니까, 슬슬 인간군 본대 쪽에서 후퇴 신호가 나올 것이다. 그러면 추격은 하지 않는다. 그렇게 머릿속으로 생각하던 치하야는 후드가 꽤나 덥다고 느꼈다. 하지만 그런 것은 상관없는 듯 말은 계속 이어졌다.

 
"냉정하게 보자면, 전쟁에서 부상자는 짐이야. 동정심을 버리고 보자면, 움직이진 못하면서 식량은 소비하는 건 짐에 불과하지. 적어도 사상자는 식량은 소비하지 않아. 거기다가 사상자가 많이 나오면 나올수록, 병사들은 줄어들고, 식량의 소비량은 줄지. 하지만 난 식량을 빨리 소비하게 하고 싶어. 그러니까 부상자를 내는거야."
"으, 응..."

 
그 냉정한 말은 하루카의 마음에는 들지 않았지만, 주변에 있던 마코토와 타카네를 설득시키기에는 충분했다. 그리고 잠깐 주변을 둘러보던 하루카는 그 것을 깨닫고 한숨을 내쉬었다.
전쟁에 있어서 동정심은 필요없다. 치하야가 했던 말을 다시 되새기며, 하루카는 조용히 물었다.


"그러면, 아즈사씨와 리츠코씨는 왜 보낸거야?"
"아, 그건 그 둘이 따로 해 줄 일이 있어서 그래. 설마하니 내가 원하는 효과를 얻을 수 있는 마법을 딱 쓸 수 있는 마족이 있을 줄은 몰랐어. 분명히 두 사람은 도움이 될 거야."
"그, 그런가..."
"그렇다니까. 믿고 기다려봐. 좋은 결과가 나올테니까."


그녀의 말을 하루카는 얌전히 수긍하고 따르기로 했다. 그녀의 말에 분명한 자신감이 깃들어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사태를 보던 치하야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인간군이 후퇴한다!"

 
그 말에 하루카는 시선을 돌렸다. 먼지구름이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그 모습을 같이 보고 있던 치하야는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타카네... 라고 했던가요? 응, 인간군의 서쪽에 있는 이들을 끌고 서쪽을 습격해주세요. 마찬가지로, 사상자는 되도록 줄이고 부상자를 많이 내주세요. 부탁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정말로, 아즈사씨의 길치속성은 못고치는건가요!"
"어머, 죄송해요~그래도 그린 브리즈 호까지 왔잖아요?"
"하아, 아무튼.. 그럼 이쯤이면 좋을까. 자아, 그럼 시작해봅시다!"


리츠코는, 좋았어! 라고 외치고선 손을 앞으로 내뻗으며 그린 브리즈 호를 바라보았다.
잔잔한 수면을 감싸듯 주둔해 있는 인간군을 보며, 그녀는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GREEDY GIRL!!"


그린 브리즈 호의 잔잔한 수면이 일렁였다.
그리고 그 파도 안에서, 수많은 물의 기둥이 솟구쳐나왔다.

 

 

 

 

 

인간군은 더할 나위 없이 곤란한 지경에 처했다.
그린 브리즈 호에 마왕군에게 포위당한 상황에서,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무수한 숫자의 부상자들에 신관들은 지쳐가기 시작했고, 간헐적으로 나타나서 그 위치를 알 수 없는 곳에서 그린 브리즈 호의 물로 인간군을 공격하거나 혹은 그 물을 오염시키는 마족들에 부상자는 줄기는커녕 늘기만 하고 있었다. 애초에 마족과의 신체 능력이 다르다는 사실은 그들에게 절망감을 더했다. 그 절망 속에서 빠져나올 방법을 찾던 첫째 왕자는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마족들의 행동이 예전보다 지나칠 정도로 계획적이 되어 있다는 것이 그 것이었다.

그리고 첫째 왕자는 마왕의 곁에 검은 후드를 눌러 쓴 존재가 있다는 보고를 받았던 기억을 떠올렸다.
싫은 예감이 들었다.

 

 

 


 

 

"어떻게든 되어 가고 있을까... 아무리 그 재상이라는 사람하고 하루카의 지지를 받고 있다지만, 인간의 입장으로 마족을 지휘하는 건 역시 곤란하구나..."


혼자 그렇게 중얼거리며 치하야는 침대에 걸터 앉았다. 마왕군엔 원래 막사가 설치되지 않지만, 인간인 치하야는 마족들과 같은 조건에서 생활할 수 없기에 막사가 하나 더 설치되었다. 그런 그들의 배려에 감사하며 치하야는 침대 옆에 놓인 탁자를 손 끝으로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톡, 톡, 하는 손톱이 탁자에 부딪히는 소리가 울렸다.
한참 막사 안에 그런 소리만 울리고 있을 때, 천이 젖혀지며 한 사람이 들어왔다.

 
"치하야쨩."
 

조용하지만 다정함이 깃든 목소리였다. 하루카의 목소리에 치하야는 고개를 들어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어때, 하루카? 밖의 상황은."
"응... 평소와 다를 바 없어. 어쨌든 싸우는 걸 좋아하는 사람들이니, 기가 죽거나 할 일도 없고. 다만, 인간군에서 좀 이상한 낌새가 보여서..."
"북쪽으로 진군할 태세인가보네."
"어? 어떻게 보지도 않고 알았어?"
"뻔하잖아. 북쪽으로 나가지 않으면 신관들이 있는 보급대와 합류하지 못하고 여기서 고립되어 죽게 되어있어. 하지만... 나가게 하면 안되겠지."
 

그렇게 말하며 단호한 표정을 짓는 치하야를 바라보던 하루카는 한숨을 내쉬며 그의 곁에 앉았다. 그런 하루카를 가만히 보던 치하야는 가만히 손을 뻗어 그녀의 리본을 만져보았다. 그러고보면 볼 때마다 하고 있던 것 같은데 설마 신체의 일부인걸까. 치하야는 하루카의 리본을 만지다가 잡아당겨보기까지 했다.


"...뭐하는거야?"
"아, 미안. 잠깐 확인해보고 싶어서..?"


참고 있다가 결국 그렇게 말하는 하루카에, 치하야는 그제사 정신을 차린 듯 사과하며 황급히 손을 뗐다. 그에 치하야를 가만히 보던 하루카는 다시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지쳤지?"

"조금은..."
"하루카는 사람을 다치게 하고 죽이는 걸 싫어하니까, 어쩔 수 없겠지. 마왕성으로 돌아가 있을래?"
"아니, 치하야쨩이 여기에 있는데 하루카씨가 돌아갈 순 없지!"


지친 표정이지만, 단호하게 그렇게 내뱉는 하루카를 보고 치하야는 인정했다. 바보긴 하지만 꽤나 책임감은 있는지도 모른다고. 그렇기 때문에 왕인 것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해보지만, 좀 더 생각해보면 마계의 왕은 책임감도, 그 무엇도 아닌 '힘'으로 결정되니 그런 것은 왕의 자질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사실을 금방 찾아낼 수 있다. 그런 현실에 조금 슬퍼하며 치하야는 하루카의 머리를 다시 잡아당겼다.
정확히 말하자면 끌어당긴 셈이었다. 갑작스런 그 행동에 하루카는 저항도 하지 못하고 끌려갔다. 그대로 하루카를 끌어당겨 자신의 무릎 위에 눕히자, 갈색의 머리칼이 여기저기로 흩어졌다. 그 머리칼을 바라보던 치하야는 하루카의 눈동자와 마주쳤다.

 
"치하야쨩?.."
"일단은... 쉬게 해 줄 순 있으니까."


그렇게 말하고, 치하야는 고개를 숙였다. 약간 그녀의 뺨이 붉었다.
따스한 온기가 살며시 맞닿았다.

 

 

 

 

 


"그 후드를 쓴 녀석이 온 뒤로 마왕군의 행동이 바뀌었다고 생각하지 않아, 유키호?"

"....무슨 뜻인가요, 그거?"
"마왕군은 정말로 전쟁에 약해. 그래야 정상이야. 그런데 이건 마치... 우리를 여기에 고립시켜놓기 위해서라곤 해도, 부상자를 일부러 많이 내는 것 하며, 저 호수를 이용해서 우리를 압박시켜 오는 것... 모두, 그 마왕군이라고 생각하기엔 너무 치밀한데."

 
첫째 왕자가 그렇게 중얼거리는 것을 들은 유키호는 머릿속에 자꾸 떠돌아다니는 오싹한 생각을 애써 떨쳐냈다.
치하야가 그들에게 협력할리 없다. 그렇지만, 만약 협력했다면?
제정신으론 협력할리 없으니까, 라고 생각하며 유키호는 애써 그 가능성을 부정하려고 했지만, 인간들은 마족의 능력이 어디까지인지 몰랐다. 그렇기 때문에 유키호는 치하야가 세뇌되어 그들에게 협력했을 것 같은 가능성도 부정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그 것은 죄가 되는가, 되지 않는가? 생각 해 보면 생각 해 볼수록 어지러운 생각들이었다.

 
"10년 전쟁이에요, 벌써. 그 정도면 마왕군도 어느 정도 전쟁의 패턴을 익혔다고 생각해요."


그 어지러움에 애써 모든 가능성을 부정하며 유키호는 그렇게 내뱉었다. 다행히도 그녀의 말은 꽤나 가능성이 있는 말이었다. 그녀의 말을 첫째왕자는 조금 납득하는 듯 보였지만, 그의 머릿속은 대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유키호는 알 수 없었다.
딱딱하게 굳은 표정을 한 채로 무언가 생각에 빠진 그에게 뭔가 물어보려 했던 유키호는, 갑작스런 소리에 놀라 고개를 돌렸다.


"마족들이 온다!!"

 
그 말에 유키호는 놀라거나 걱정하는 것이 아닌 피곤한 표정을 지었다. 그 건 그녀의 옆에 서 있던 첫째 왕자도 마찬가지였다. 어차피 저 마족들이 그들을 죽이거나 전멸시키진 않을 거라는 것은 이제 완전히 파악한 뒤였다. 하지만 그 사실은 그들에게 더 짜증을 불러일으켰다.
이미 식량도, 물도, 모든 보급이 끊겨있고, 모든 조건이 압도적으로 불리하다는 것을 안 상태에서 하는 전투 준비이기 때문에, 그들의 행동엔 의욕이 없었다.

 

 

 

 

 

 

 

"내가 원하는대로 잘 안하네. 슬슬 한계일텐데."
"한계?"


치하야의 중얼거림에, 옆에 서 있던 마코토가 그렇게 물었다. 마코토가 그 신분을 보장한다고 한 뒤로, 하루카가 없다면 치하야의 곁에는 마코토가 함께 있었다.

 
"식량도 한계고, 물을 다량으로 쓸 수도 없을거야. 그런 만큼 버티는 데 한계가 있다는거지. 이 상태면 살아있는 병사들도 죽이는 셈이 될거야."
"그럼, 넌 뭘 기대하고 있는거지? 인간."
"...인간이 아니라, 치하야. 제대로 알고 있는거야?"
 

마코토의 질문엔 신경쓰지 않은 채 그렇게 내뱉는 치하야에, 마코토는 일말의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다. 애초에 그의 머리에 인간의 이름을 입력해 둘 공간 따윈 있지도 않은 것 같았다. 그 사실에 한숨을 내쉰 치하야는 시선을 돌려 타카네의 군대와 인간군이 부딪히고 있는 모습을 보며 말했다.

 
"내가 기대하는 건, 인간군이 부상자들을 죽이길 기다리고 있어."
"...뭐? 그런 일도 생기나?"
"보통은 신관이 있으니까 잘 안 생기지만, 지금 기껏해야 인간군에 있는 신관은 열명 남짓. 모두들 지금 지칠 대로 지쳤을거야. 그렇게 되면, 언젠가 신관이 아무런 힘도 못 쓰는 때가 와. 그 때쯤엔 식량도 모자랄거고... 그렇다면, 먹을 게 부족해진 인간군은 부상자에게 가는 식량의 배급을 줄이기 시작할테지. 아니면, 직접 베는 것도 좋아. 그렇게 되면 부상자들은 목숨을 걸고 도망치게 될 거야. 그리고 일반 병사들도 상부에 대한 신뢰가 떨어질거고. 언제든지 부상을 입으면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는 거지. 자기 아군한테... 그러면 급속도로 인간군은 해체될거야. 아, 이 이야기는 하루카한텐 비밀로 해줘."


치하야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마코토는 그의 마지막 말에도 순조롭게 수긍했다. 하루카가 안다면 큰 충격을 받을 것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동시에 마코토는 이 인간에게 묘한 공포를 느꼈다.


"... 그럴 걸 알면서도, 그걸 기대하고 있다는 거야?"
"응? ...전쟁은 살인의 숫자가 영광의 척도가 되는 일이지. 살인이 정당화되는 것 뿐만이 아니라, 살인을 많이 한 자가 영광스런 이름을 받는 곳이야. 살인을 해야 모든 게 이루어지는 곳. ...그런 전장에 나와서 약한 소릴 할 생각은 없어."
"....하루카보단 네가 더 마계에 어울렸을지도 모르겠어."
"칭찬일까? 칭찬이라면 고마워."


물론, 치하야에게 있어선 어떨지 몰라도 마코토에게 있어 그 말은 칭찬이었다.
그런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전장을 바라보던 치하야는 살짝 혀를 차곤 말했다.


"큰일인데...내가 너희들에게 협력하고 있다는 것, 조금은 감을 잡은 걸까..."
"...전장만 봐도 그 것을 알 수 있나?"
"너무 노골적이라서. ....퇴각 신호를 보내자. 마음에 걸리는 게 있어."


치하야의 그 말에 마코토는 별다른 반문을 하지 않고, 옆에 있던 비룡의 비늘을 가볍게 손으로 두드렸다. 그에 비룡이 커다란 울음을 토했다. 그 울음소리에 치하야는 귀를 막았다. 휩쓸려 가 버릴 것 같은 거대한 울음소리였다.
그리고, 비룡의 불꽃이 하늘을 가로질렀다.

 
화려한 퇴각 신호였다. 그 신호를 본 마왕군은, 인간군을 정 가운데에서 가로지른 타카네의 '달의 왈츠'을 뒤로 한 채로 바쁘게 돌아갔다.
거대한 먼지구름이 인간군을 뒤덮었다.

 

 

 

 


 

"치하야가... 아닌가?"


첫째 왕자는 혼자서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 후드를 쓴 사람이이 치하야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를 시험하는 방식의 전투를 택했다.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해 첫째 왕자는 더욱 혼란을 느꼈다.
방금 전, 그의 상대가 치하야였다면 치하야는 분명히 그대로 치고 들어왔을 것이다. 일부러 빈틈을 보였다. 치하야라면 그 빈틈을 놓치지 않는다. 부상자만 내는 것이 목적이라고 해도, 그 빈틈을 치고 들어왔다면─


"...아니... 저건 치하야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다가 고개를 내젓고 중얼거렸다. 그 사실에 치하야의 오빠인 그는, 상대가 치하야일 것이라는 확신이 높아지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자신의 내부에선 이미 알고 있었다.
치하야라면, 서툴게 빈틈이라는 미끼을 물기보다는 그 것이 자신의 도발이라는 것을 알고 후퇴했을 것이다. 일부러 보인 것이니까.

치하야에게 전쟁의 기본을 가르쳐 준 건 그였다. 어린 동생이 귀여웠을 때 가르쳐줬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입술을 깨물며 분해 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치하야를 잘 알고 있었다. 치하야의 실력은 충분했고, 어느 정도 실전 경험도 있었다. 이론 뿐만이 아니라 실전 경험도 어느 정도 있다면, 그녀의 이해력이라면─ 이라고 까지 생각한 그는 오싹해지는 기분에 자신의 팔을 쓸어내렸다.
치하야가 상대인 데다가 치하야가 이끄는 것이 그 마족이라면 승산은 매우 적었다. 그렇게 봐도 좋았다. 그렇지만, 그렇게 된다면─

협력하고 있는 것이 치하야라면, 치하야를 인간들 사이에 다시는 합류하지 못하게 할 수 있다. 아예, 인간군으론 발도 못 들여 놓도록, 아니, 인간군이 아니라 왕국, 인간계 자체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할 수 있었다.
여성임에도 유력한, 왕위 후계자인 그녀를 제거할 수 있다는 사실은 그에겐 꽤나 매력적으로 들렸다.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다음 왕위 후계자가 될 수 있을 확률이 가장 높은 것은 자신도, 그리고 자신의 동생인 둘째 왕자도 아닌, 공주인 치하야라는 것을. 그리고 그는 그 사실을 싫어했다. 그런 그에게 그 사실은 굉장히 매력적이었다. 그는 퇴각하는 마왕군을 보며 생각했다.


그 후드를 쓴 정체불명의 자가, 치하야라는 것을 밝혀내겠다고.


"하루카."
"응? 무슨 일이야, 치하야쨩?"
"하나, 부탁할 게 있는데."

 
그리고 그 치하야는, 그런 그의 도전에 대해 맞설 준비를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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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치하야가 타카네에게만은 경어를 쓰고 있는건 하루카가 경어를 쓰는 사람 중 하나라서~?
그나저나 시간의 부족함과 연속글 제한에 의해 두편을 합쳐 올려서 한편당 분량이 계속 증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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