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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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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2-03, 2016 01:33에 작성됨.

 눈이 내리기 시작한 건 치하야네 와서 혼자 이불을 뒤집어 쓰고 있을 때였다. 창 밖에 흰 것이 날리는 것을 보자마자, 나는 반사적으로 전화기를 집어들었다.
 ‘봤어, 치하야? 첫눈 ㅇ’
 액정 오른쪽 구석태기에 박힌 숫자를 보니, 메시지를 쓰던 손가락이 절로 움직임을 멎는다. 별 일은 아니다. 여섯 시 반, 키사라기 치하야의 오후 스케줄이 한창 정신없을 시간이다. 치하야는 업무 시간에 개인적인 메시지를 확인하지 않는다. 그렇게 하고는, 나중에 와서 얼굴을 맞대면 그걸 죽을 만큼 미안해한다. 그러니 섣불리 연락을 보낼 수가 없다. 이렇게 반가운 마음인데, 지금 당장 전하고 싶은 사람에게 꾹 참아야 하는 게 아쉬웠다.
부르르 떨린다. 진동을 일으킨 건 몸이 아니라, 전화기였다.
 ‘이른 퇴근이네. 눈이 많이 와서 계속할 수 없어. 하루카는 혹시 집이야?’
 메시지를 보낸 사람의 이름에 두근거린다. 잘못 읽었나 다시 보았다. 하지만 글자가 변하는 일은 없다. 보통 치하야가 일이 끝났다고 메시지로 알려오는 것은 드문 사건에 속한다. 반은 기쁘다가, 반은 아쉽다가 마음이 오락가락했다. 아까 거, 그냥 보내버릴 걸, 하고 들떴던 기분을 흘려보내며 답장을 보냈다.
 ‘응!! 먼저 치하야네 와버렸네~!! 눈 보고 있었어! 밖에 엄청 하얗다 XD’
 ‘미안한 부탁이지만, 빨래 좀 걷어줄 수 있겠니. 눈 맞으면 안 되니까’
 아하. 본론은 이거였구나.
 ‘싫어.’
 치하야는 거절에 놀랐는지 답장이 없다. 키사라기 치하야. 글자만으로 뻔뻔함이 느껴지는 건 물론 기분 탓인 것을 안다. 하지만 화면을 노려보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잠시 숨을 들이키고 생각한다. 그리고 사랑하는, 키사라기 치하야의 얼굴을 속으로 그리며 하나씩 타협해 나갔다. 혼자 사는 애니까 이럴 수 있지. 빨래를 다시 하려면 힘들겠지. 까짓거 힘든 일도 아니고, 해 주는 거 어렵지 않지. 그치만 아무리 생각해도 괘씸한데.
 마지막에 스쳐 지나간 마음은 애써 밀어놓고, 손가락으론 결국 ‘농담이야! 얼른 걷어와야지^-^’라는 메시지를 입력해 보냈다. 얄밉지만, 키사라기 치하야는 상대방의 기대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아주 좋지 않은 습성을 가지고 있었고, 필연적으로 그 기대를 저버리는 데에는 자랑거리인 노래에 맞먹을 만한 재능을 갖추고 있었다. 요컨대 구제불능이기 때문에, 신경쓰면 손해다.
 어째서 그런 게 좋게 되어 버렸을까, 하고 잠깐 고민하다가,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걸 깨닫고 황급히 베란다로 나갔다.

 발코니 창을 열었을 때 내가 있는 곳은 완전히 다른 세계가 되었다. 이 이세계의 경도와 위도를 대충 알 수 있을 것 같다. 필시 남극이다. 너무 춥잖아.
 “우와... 추워...”
 이건 얼른 끝내고 들어가야 얼어죽지 않는다. 그런 확신이 들어서, 일단 뭐든 잡히는 대로 빨래 걷는 통에 던져넣었다. 속옷이 집히건 말건 부끄러워할 겨를도 없었다. 오히려 머리에 덮어쓰고 추위를 막을 수도 있을 성싶은... 아니, 그건 좀 아닌 것 같기도 한 걸. 비주얼으로도 그야말로 예쁘지가 않은 데다, 치하야에게 들키면 엄동설한에 거리로 쫓겨날 게 틀림없다.
 얌전히 문을 닫고 덜덜 떨었다. 감기에 걸릴 것 같았다. 눈이 올 줄은 몰랐으니, 여기로 오는 길에 우산 같은 건 들고 올 생각도 못했을뿐더러 입고 있는 건 두껍다긴 어려울 니트 스웨터 한 장. 빨래를 개는 건 나중에도 할 수 있을 테지. 우선은 침대로 기어올라가서 이불로 몸을 감쌌다.

 다음에 눈을 떴을 때는 해가 들어가고 없었다.
 그리고 나는 혼나고 있었다.
 “양말도 안 벗고 자면 안 되잖아. 다 젖었는데.”
 “하지만, 너무 추웠다구......”
 “춥다고 잠이 든다니... 동면하는 곰이라면 모르겠지만.”
 차갑고 가혹하고 매몰찬 한겨울의 눈 섞인 바람 같은 치하야 따위와는 다르게, 치하야가 쓰는 이불은 푹신푹신하고 따뜻하다. 처음 피부에 닿는 느낌은 차갑지만, 두르고 있으면 곧 약불에 굽는 감자처럼 뜨뜻하게 익는다. 누구랑은 다르지, 응. 그렇기 때문에, 체온을 녹이고 있다가 잠이 들긴 딱 좋다. 그러니까 그걸 꼭 내 잘못이라고 말하긴 어렵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하지만 치하야에게 그렇게 말했다간 혼이 나겠지. 고집을 피우면서 가만히 앉아 있으니 치하야의 눈길이 따가워진다. 녹다 만 눈송이가 아직도 드문드문 붙어 있는 치하야의 코트가 옷걸이에 걸리고, 시계가 침대 옆 조그만 탁상 위에 놓인다. 그 다음에야 비로소 가차없는 한 마디가 날아든다.
 “양말.”
 이불 속에서 발만 쏙 내밀었다.
 치하야는 기가 막힌 표정을 감추지도 않았다.
 “다음엔 직접 벗어, 하루카. 완전히 애라니깐.”
 그렇게 타박하면서도, 치하야는 금방 벗은 축축한 장갑과 양말 한 짝만 빼고 아무것도 들지 않은 빨랫감 통에 내 발에서 벗긴 양말을 한 짝식 넣는다. 그리고는 물수건으로, 아냐 잠깐 기다려 봐.
 “발은 내가 닦을 수 있는데,”
 “양말을 벗을 줄도 모르는 하루카니까 할 수 없어. 벌이니까 얌전히 받으렴.”
 치하야는 거침이 없다. 부끄러울 만큼 꼼꼼하게 수건으로 발가락 사이사이까지 씻어낸다. 너무 진지한 표정이라서, 솔직하게 말하자면 황당한 기분도 든다. 일부러 그러는 거라는 건 알겠지만, 짖궂다고 하기에는 정성스럽기 그지없는 손길이 아닌가 싶다. 조용히, 숨을 쉬는 것도 잊고 수건을 쥐고 있는 손을 바라보았다.
 “하루카...”
 길고 흰 손가락이 수건을 꾹 쥔다.
 처음으로, 치하야가 긴장한 티를 냈다.
 “그렇게 열심히 안 쳐다봐도 돼. 집중을 못 하겠잖아.”
 “이건 치하야가 그렇게 만든거잖아! 갑자기 발을 닦으니까.......”
 빨개진 얼굴로, 발에서 손가락도 떼지 않고선, 치하야가 미미하게나마 웃었다. 이거 내가 이겼어. 그런 표정이다.
 얄밉다.
 종아리 근처에서 나를 올려다보면서 어물거리고 있는 치하야의 얼굴에 손을 댄다. 땀인지 눈인지 아니면 화장인지, 눈으로 보기에 번들거리는 정도는 아니지만 손가락 끝이 느끼는 건 축축한 감각이다. 뭐가 묻었던들 어때.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어딜 딛었을지 모르는 발도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씻어 주는 사람인데. 장난이 조금 섞였지만, 그야말로 애교라고밖에는 생각을 못하겠다.
 “그치만 얄미워.”
 “아야.”
 볼을 꼬집어도, 치하야는 꼬집힌 채로 웃는다. 조금만 멀리서 봐도 웃는 얼굴인지 모를 정도로 아주 약간이지만, 내게는 보이도록.
 치하야는 아이에게 만들어 신겨 줄 신발이라도 궁리하는 사람처럼 내 발을 놓지 않고 계속 살폈다. 너무나도 꼼꼼히 들여다보고 있어서 고작 발 두 쪽 내놓고 있는 것만으로 속살까지 샅샅이 드러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치하야가 그 발을 내려다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나는 모른다.  바로 옆에서 보고 있어도, 궁금해해도, 발에 닿는 손길이 좋기는 하지만 무슨 생각인지를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무슨 생각해?”
 “아까는 추웠으니까, 이것도 분명히 한껏 오므리고 있었겠지, 하고.”
 웃었다. 정말 뭐야, 이상한 거 생각하고 있었잖아.
 분명히 치하야도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
 그러니까, 전하고 싶은 말은 잊지 말고 해야 할 것 같았다.
 “아까 메시지 보내려고 그랬었어. 첫눈 온다구.”
 “첫눈?”
 갸웃, 하다가 고개를 끄덕인다. 아, 첫눈이구나, 하고 알아채는 얼굴은 아니다. 그걸 왜 메시지로 전하려 했는지 알 수 없지만, 그렇구나, 하루카는 그랬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을까 하고 나는 짐작해 보았다.
 치하야는 무어라 말도 않고, 묻지도 않고, 내 발을 놓아주었다. 침대 옆에 쭈그리고 앉아서는, 또 생각에 골몰한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일에 관한 생각일는지, 아니면 눈에 관한 생각일는지, 아니면,
 뭐든, 괜찮아. 괜찮을 거야.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시간 봐봐. 저녁 준비해야 되겠다.”
 “오늘은 다 하루카한테 미뤄버리네, 미안해.”
 “됐어. 내일 다 받아낼거야.”
 고개를 젓는 치하야의 손에 다시 가방이 들린다. 그렇게 식사 전까지는 들어가서 업무를 검토한다. 치하야의 일과는 언제나와 같이 지켜진다.
 첫눈같은 두근거림은 없어도, 충분해.
 하나도 특별하지 않은 날의 하루에, 우리 둘은 그렇게 같이 있었다.

 

END

 

 

12월에 첫눈 봤던 날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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