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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 - 착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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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1-25, 2016 01:03에 작성됨.

지는 내기(링크)라는 글을 보고 오시면 내용이해가 편합니다.

작년 썼던 글[아미의 거짓말]을 리메이크 해봤습니다.
이번엔 장기휴재(...)없이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주의. 시점변경이 자주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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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헤헤~."
 하루카는 어젯밤 일을 떠올렸다. 실수로 지갑을 사무소에 두고 오는 바람에 집에 바로 돌아가지 못하게 돼버렸다. 하루카는 어쩔 수 없이 프로듀서의 돈을 빌려 택시를 타고 가려고 했다. 그러나 프로듀서의 권유에 밀려 그의 집에서 묵게 됐다. 처음 와본 것은 아니지만, 단둘이서 온 것은 처음이었다. 이런 기분을 느껴본 적이 처음이 아니었지만, 어제는 무언가 특별했다.

 

 

#

 

 

 프로듀서는 열쇠를 돌려, 찰칵하는 소리와 함께 문을 열었다. 그는 열쇠를 바지 앞주머니에 쑤셔 넣고 현관으로 들어가자 밝게 불이 켜졌다. 이어 색이 빠져 누리끼리한 전등 하나도 복도를 밝혀주었다.

 

 하루카는 열린 문을 그저 바라보았다. 이제라도 혼자 사무소로 돌아갈까. 억지를 부려 집으로 갈까. 어쩌면 좋을지 고민하는 하루카의 시선은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거실로 들어가려던 프로듀서는 서늘한 바람이 느껴져 뒤를 돌아보았다. 불이 꺼져있는 현관 앞에서, 여전히 하루카는 문 손잡이를 잡은 채로 서 있었다.
 "안 들어오고 뭐 해?"
 "아, 네. 시, 실례할게요."
 얼떨결에 대답한 하루카는 종종걸음으로 프로듀서의 뒤를 따랐다. 들어오면서 주변을 둘러보니 액자 몇 개가 걸려 있었다. 첫 번째 라이브 후의 파티, 봄 소풍, 아레나 라이브 등 굵직한 사건마다 찍은 기념사진들. 그리고 몇 달 전 프로듀서가 유학을 끝내고 돌아온 날 찍은 사진이 눈에 보이자, 왠지 모르게 하루카의 볼이 뜨거워졌다.

 

 거실에 들어온 프로듀서는 들고 있던 봉투를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식탁에 내려놓았다. 내용물을 꺼내기 전, 안절부절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고 있던 하루카의 뒤쪽으로 손가락을 향했다. 새로 사둔 침구도 있으니 거기서 자면 된다고 하는 안심시키는 말과 함께.

 

 그 방은 다른 방과는 달리 붉은색의 명패가 하나 걸려 있었다. 예전에 갔었을 때는 못만 박혀 있었던 문. 명패를 뒤집어보니 히비키의 큼지막한, 치하야의 조그마한 사인이 하나씩 적혀 있었다.
 "이게 뭐예요?"
하루카는 명패를 집어 프로듀서에게 보여주었다.
 "아, 그거. 몇 달 전에 히비키가 이사하기 전날에 잠깐 내 집에 있었잖아. 가기 전날에 저걸 걸어두고 갔더라고."
프로듀서는 힐끗 올려다보곤 냉장고에서 몇 채소들을 꺼내며 대답했다.
 "거기 있는 침구는 너도 알다시피, 치하야가 실수로 집을 먼저 빼버린 탓에 고생했었잖아. 그래서 새집을 구하는 데 꽤 걸릴 것 같길래 새로 산거야. 지금까지 하곤 다르게 두 명이 살 집이니까. 근데 그날 저녁에 집주인 분한테 연락이 와서 결국 한 번도 못썼지."
 "그럼 치하야 쨩이 아직 안 가져간 거네요."
 "아니. 저걸 나한테 이사 기념 선물로 줬거든…."
 "아아."
 이제는 어머니와 같이 살게 된 치하야를 떠올린 하루카는 가슴이 따뜻해졌다. 먼저 말을 걸어준, 이끌어준, 더는 상처받을 일 따위 생기지 않을 거라고 언제나 치하야를 북돋워 주던 하루카였기에 더더욱. 그걸 증명하듯 하루카의 핸드폰 메인화면은 치하야가 미소를 짓고 있는 사진이었다.

 

 하루카는 들고 있던 명패를 다시 못에 걸어두고 문을 열었다. 조심스레 문 옆쪽을 더듬어 전등 스위치를 눌렀다. 그러자 바로 앞에 보이는 푸른색의 이불과 갖가지 동물 캐릭터가 그려진 베개. 치하야의 취향을 알게 돼버렸다. 나중에 물어보면 당황할 것이 눈에 선했다.

 

 하루카는 요리를 시작하기 전에 아까부터 계속 신경이 쓰인 곳, 신발장으로 되돌아가 쪼그려 앉았다. 어질러진 프로듀서와 자신의 구두를 가지런히 정리하기 시작했다. 슬리퍼 옆엔 운동화, 그 옆엔 가죽구두와 자신의 신발을 나란히 놓았다. 하루카의 노란 구두 외엔 모두 헤지고 오래된 모습. 그의 태도와 모습은 2년여 전 선물로 바뀐 지갑 외엔 달라진 게 없었다. 언제나 모두에게 친절하고, 모두와 거리를 둔다. 그때도 하루카는 프로듀서 본인을 위해서 마음껏 쓰라고 말했건만, 별 소용이 없었다. 이번 크리스마스 선물은 구두가 좋겠다고 그녀는 마음먹었다.

 

 거실에 다시 들어온 하루카는 손을 씻은 뒤 슈퍼에서 사 온 재료와 프로듀서가 미리 꺼내놓은 갖가지 소스들을 살펴보았다. 하루카가 필요한 것 외에도 꽤 다양하게 있어, 이것이 자취하는 사람의 살림이라곤 전혀 떠올릴 수 없었다.
 "그거 중에 몇 개는 치하야가 사 왔었어."
정장에서 간편한 복장으로 갈아입고 나온 프로듀서가 물었다.
 "치하야 쨩이요?"
 하루카는 살짝 움찔했다.
 "묵었던 두 번째 날, 그러니까 집 구한 날 아침에 부엌을 빌려달라고 해서. 아마 도시락을 싸는 데 썼던 것 같은데."
 "아마…."
 "나한텐 뭔지 안 말해줘서 나도 잘 몰라. 완성 전에 내가 먼저 나가기도 했고."
 "그럼 도시락 맞을 거예요. 종종 저랑 같이 먹었거든요."
 시간이 날 때마다 하루카는 사무실이나 방송국에서 치하야를 만나 점심을 함께 먹었다. 이사를 간다는 것도 점심을 먹으면서 제일 먼저 들은 이야기. 치하야가 아직 혼자 사는 것에 익숙해 새로운 환경에 어색함을 느낄 적에, 하루카는 그녀에게 제안을 했다. 당분간 같이 지내면 어떻겠냐고. 물론 그녀는 싫은 내색 하나 없이 하루카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치하야 쨩이 저보다 맛있게 만들어서 기뻤어요. 드디어 노력의 성과가 나오는구나 싶었달까요…."
 "설마."
 "이 하루카씨가 장담하는 실력자예요~!"
 하루카는 엄지손가락을 올렸다.
 "음, 왠지 믿음이 안 가네."
 "프로듀서 씨…."
 "아하하. 농담이야. 네가 하는 말이라면 상당히 신뢰할 만 해."
 "다음에 치하야 쨩한테 프로듀서 씨 것도 싸달라고 부탁하려고 했는데 말아야겠네요~."
 하루카는 몸을 휙 돌렸다.
 "뭐…… 어쨌든. 자, 여기 앞치마."
 프로듀서는 돌아본 하루카에게 앞치마를 주려다가 팔을 접었다.
 "엣?"
 "할 수 있겠어? 내키지 않으면 그냥 내가 할게."
 하루카는 그에게 앞치마를 달라며 두 손을 내밀었다.
 "이쯤이야 문제없어요."
 "너무 무리하지는 마. 난 대충 만들어도 상관없으니까."
 "으으-, 절대로 그렇게 안 할 거예요!"
 하루카는 왠지 모를 승부욕이 차올라 자신만만히 대답했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도저히 요리하는 데 집중할 수가 없었다. 방송에서 언제나 그가 바라보던 것과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그의 집에서 만드는 첫 요리였다.

 

 덕분에 하루카는 평소엔 거의 안 할 실수들을 반복했다. 과일을 깎다가 손을 베이고, 가스 밸브를 안 돌린 상태로 불을 켜려고 하거나, 소스를 만드는 도중 치하야처럼 몇 가지 향신료를 착각해 넣으려 하다 프로듀서가 지적해줘 겨우 요리를 살렸다.
 "……."
 요리는 거의 다 완성됐다. 하루카는 전혀 만족스럽지 않았다. 제 솜씨를 제대로 발휘하지 못해 오히려 의기소침해 있었다. 프로듀서가 괜찮다며 그녀를 부를 때까지, 하루카는 음식을 담지 못했다.

 

 정신을 차린 하루카는 아직 끝난 게 아니라고, 장식으로 만회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했다. 정결하게 담아 예쁘게 과일로 포인트를 준 그릇을 들고나오다 문턱에 발이 걸려 넘어졌다. 다행이라고 할 만한 건, 운이 좋게도, 그릇은 엎어지지 않았다. 음식은 조금밖에 안 망가졌지만, 하루카의 기분은 무척이나 망쳐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만드는 데 제일 익숙한 걸로 할 걸 그랬어요…."
 하루카는 포크를 깨작거렸다. 입맛이 싹 사라졌다. 좌불안석의 기분으로 상대의 평가를 기다린다. 그런 걱정을 덜어주듯, 프로듀서는 음식을 한 입 먹어보곤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음, 모양은 이래도 맛은 좋네."
 하루카는 프로듀서를 천천히 올려다보았다.
 "그…런가요?"
 "나야 평소엔 아무렇게나 먹어서 형태는 어떻든 간에 별 상관없어."
 "다행이다…."
 억지로 하는 말이 아녔다. 그동안 바라본 날의 경험에 비례해 볼 때, 프로듀서의 표정은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이었다. 그제야 하루카는 음식을 삼킬 수 있었다. 더 이상 속은 불편하지 않았다.

 

 프로듀서는 배가 고팠는지 빠르게 식사를 끝마쳤다. 더 먹겠느냐는 하루카의 말에는 괜찮다고,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말했다. 그저 남았으면 냉장고에 넣어두어, 다음날 뎊혀 먹겠다고 했다. 곧이어 하루카도 식사를 마치고, 식탁의 그릇을 정리해 싱크대로 가져갔다. 수도를 틀어 플라스틱 대야에 물을 담았다.
 "응? 하루카, 설거지는 내가 할 테니까 내버려둬."
프로듀서는 싱크대로 재빨리 다가가 위쪽에 걸린 고무장갑을 집었다. 그러고선 하루카의 어깨를 잡고 의자에 앉혔다.
 "오늘 하루카한테 얻어먹었으니, 당연히 이건 내 담당."
그는 장갑을 손에 끼고 간단히 물로 그릇들을 씻어낸 다음 설거지 세제를 퐁퐁, 수세미에 조금 올려 그릇을 닦기 시작했다.
 "잘하신다."
 "이래 봬도 유학 포함 자취생활이 7년 차야. 이런 건 식은 죽 먹기지."
 프로듀서는 깨끗하게 닦인 쟁반을 들어 하루카에게 보여주었다. 장갑에서 손을 빼 그릇을 문지르니 뽀득뽀득, 하고 소리가 났다.
 "음~ 그럼 다음엔 프로듀서 씨가 음식 만들어주실래요?"
 "뭐?"
 "아까 대신해주신다고 하셨잖아요."
 "오늘 솜씨를 보니 역시 하루카는 파티쉐가 어울리네."
 그는 대답하지 않고 말을 돌렸다.
 "이거랑 그거랑 별 상관없잖아요."
 "아무튼, 10년, 아니 8년 후쯤엔 하루카, 너만의 제과점을 차리는 건 어때? 상당히 번창할 게 분명해."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그건…."
 목에서 차마 올라오지 못하는 대답.
 "그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점심 즈음에도 말했던 이야기. 원하지만 그러지 않기에, 더 이상 하루카는 말하지 않았다. 지금으로써는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더라도 용기는 생기지 않을듯했다. 때문에 하루카는 말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하루카는 우울해지지 않았다. 방으로 들어가기 직전, 어렴풋이 들은 프로듀서의 말에, 왠지 모를 착각까지 더해져 도리어 기분은 좋아졌다.

 

 


#

 

 


 덕분에 졸리지만 상쾌한 하루를 시작하는 하루카는 냉장고에서 토스트 식빵과 달걀을 꺼내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내며 식빵을 두 장 집어 들고 나머지는 다시 넣었다. 버터가 녹여진 프라이팬엔 하나를 반으로 찢어 살포시 올려둔다. 버터의 풍미가 집안을 모두 돌 무렵, 레인지의 불을 약불로 줄인다. 조금 뒤 뒤집개를 이용해 식빵을 옆으로 치워두고, 달걀을 풀었다. 하루카는 왠지 부족함을 느꼈는지, 냉장고를 다시 열어보았다. 냉장고 문 쪽에 놓인 사과주스를 보자, 무언가 떠오를 듯 말 듯한 느낌이 들었다. 곰곰이 주스를 컵에 따르던 도중, 어제 했던 아미와의 약속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몇 시지?"
 시간을 확인하려고 탁자 위에 올려둔 휴대전화의 전원을 눌렀지만, 배터리가 모두 나가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어제 늦게까지 치하야와 문자를 하는 게 아녔다.
 "신경을 썼어야 했는데…."
 하루카는 앎는 소리를 냈다. 그녀는 시계를 찾기 위해 정신없이 주변을 돌아다니다 컵을 건드려 내용물을 바닥에 쏟고 말았다.
 "아앗?!"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무언가 타는 소리에 재빨리 프라이팬의 식빵을 뒤집었지만, 중앙에 가깝게 위치한 것은 거의 타버려 거무튀튀하게 돼버렸다. 하루카의 속도 까맣게 타들어 갔다. 한숨을 크게 한번 쉰 하루카는 행주를 가져와 바닥을 닦았다.

 

 좋던 기분을 망쳐 구시렁대던 하루카는 바닥을 모두 닦고 일어섰다. 그러자 바로 앞에 보이는 시계. 등잔 밑이 어둡다고 했던가. 시계는 냉장고 바로 옆에 걸려있었다. 하루카는 까먹고 있던 약속을 그제야 떠올렸다. 시각은 7시가 되기 2분 전. 안 그래도 어둡던 그녀의 얼굴은 흙빛이 되었다.
 "아?!!"
 문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비명에 방에서 미적거리던 프로듀서가 놀라 재빨리 부엌으로 나왔다.
 "무, 무슨 일이야!? 바퀴벌레라도 나왔어?"
 "아뇨… 그게 아니라… 프로듀서 씨! 빨리! 빨리 집에 데려다주세요!"
 무슨 일인지 물어보는 프로듀서에겐 가는 도중에 이야기해준다며 등쌀을 밀었다. 어쩔 수 없다는 듯 프로듀서는 하품을 하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발을 동동 구르고 있던 하루카는 방금 뒤집었던 멀쩡한 식빵의 뒷면을 확인해본 뒤 레버를 돌렸다. 다 익혀진 계란은 그릇에 담아, 간단히 비닐랩으로 싸서 냉장고에 넣었다. 그 후 시계를 한 번 더 확인했다. 7시가 넘은 지 오래였다.
 "빨리요-!"
 "알았어, 알았다고-."
 하루카는 양손에 노릇하게 구워진 식빵을 집어 들곤 아직도 나오지 않는 프로듀서를 재촉했다. 하나는 제 입에 물고 하나는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하루카는 의자에 걸터둔 자주색 가디건을 성급히 입곤 다시 식빵을 집어, 현관 앞에서 프로듀서를 기다렸다.
 "아흐음…."
 프로듀서는 희뿌연 안경을 수건으로 대충 닦았다. 그의 복장은 어제 있었던 정장 그대로로, 뒷주머니에 지갑을 쑤셔 넣으면서 구두를 신고 있었다.
 "여기, 급하지만 아침이에요."
 "고마워."
 하루카는 들고 있던 식빵을 프로듀서에게 건넸다. 그러나 그는 얼굴을 찌푸린 채로 그녀에게 다시 돌려주었다.
 "토스트는 별로 안 좋아하시나…?"
 하루카는 갸우뚱하며 식빵을 돌려받았다.
 "열쇠가… 열쇠가…."
 프로듀서는 정장 안주머니를 뒤적였다. 옆에서 느껴지는 초초한 기운에 서두르다 지갑을 떨어트렸다.
 "앗, 잠깐 들어가서 찾아올게. 급하면 먼저 가고 있어."
 허리를 굽혀 지갑을 주운 프로듀서는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갔다. 하루카는 어쩔 수 없이 혼자 엘리베이터를 탔다. 1층으로 내려가는 버튼을 누르고 기다리는 잠깐의 순간이 그녀에겐 너무나도 길게 느껴졌다.
 "먼저 잡아두자."
 어떻게 가야 빠를지 고민하는 사이 1층에 도착했다. 하루카는 바로 앞에 보이는 도로를 유심히 보다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택시에 탄 하루카는 운전사에게 미리 목적지를 말해뒀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프로듀서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하루카는 그가 찾을 수 있도록 손을 흔들었다.
 "프로듀서 씨~. 여기에요! 여기!"
 "결국, 택시네."
 프로듀서는 지갑의 현금을 살피면서 중얼거렸다. 둘이 타고난 뒤 택시는 출발했다. 이따금 신호에 걸려 멈추는 택시 안에서 하루카는 앞에 보이는 시계에 시선을 고정했다. 속마음으로 1초, 2초, 3초를 쭉 세다 보면 시간이 늦게 가는 듯해도, 실제로 시간이 늦게 가는 게 아니란 건 하루카도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지금의 상황으로서는 뭐라도 하고 싶었다.

 

 룸미러를 통해 하루카는 프로듀서와 눈이 마주쳤다. 다만 정신이 다른 곳에 팔려 별 신경 쓰지 않았다. 여전히 그녀는 정면을 주시하면서 켜지지 않는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렸다. 가끔은 창문으로 눈을 돌렸는데, 풍경을 감상하기보단, 어디까지 왔는지 확인하려고 두리번거렸다.
 "이다음 건널목이에요."
 10분쯤 지났을 무렵, 택시는 어느 한 곳에서 멈췄다. 하루카는 프로듀서에게 비용에 대한 지급을 부탁했다. 그는 놓고 온 것이나, 문제가 생겨서 그런 것인지 물어보았다. 하루카는 아니라고 말하며 택시에서 내렸다. 프로듀서도 따라 내렸다. 그가 여기가 어딘지 주변을 둘러보는 도중, 하루카는 그의 팔을 잡고 급히 어둑한 골목길로 이끌었다.
 "하루카? 어디 가는 거야?"
 "지름길이에요."
 내려앉은 공기에 왠지 모를 이상한 기분이 들어 하루카는 발걸음을 서둘렀다.
 "지름길?"
 "네에-."
 다시 밝은 골목 밖으로 나가니, 바로 옆에 타루키정이 보였다.
 "어? 사무소?"
 프로듀서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하루카를 바라보았다.
 "별수 없으니까요. 제 지갑도 가져가야 하고, 사무소 차로 가는 게 돈을 아낄 수 있다면서요."
 "빨리 내 차를 사야지 하루카한테 잔소리 그만 듣겠네."
 프로듀서는 건물 정문에 열쇠를 꽃아넣었다.
 "읏, 그렇게 말씀하시니 평생 해드려야겠네요!"
 "아하하…. 다른 건 괜찮지만, 잔소리는 싫은걸. 아, 지갑은 내가 가져올테니까 여기서 기다려줄래?"
 이번에도 착각해버리는 그의 말. 이상한 말을 하는 사람이 잘못한 거라고, 그렇기 때문에 착각 정도는 해버려도 좋다고 하루카는 생각했다. 계속 품고 있는 마음을 숨기다간, 이대로 끊어져 버릴 것 같았다.
 "여기 지갑."
 금세 프로듀서가 차 열쇠를 가지고 내려왔다.
 "하루카? 빨리 가자."
 "…네, 네!"
 프로듀서가는 멍하게 서 있던 하루카의 손을 잡고 차로 향했다. 그도 급한 일이 있는지 더욱 서둘렀다.

 

 

#

 

 

 "프로듀서 씨는 아침에 뭐 드세요?"
 하루카는 운전하고 있는 프로듀서에게 물었다.
 "음… 보통은 토스트를 먹지. 쉬는 날엔 브런치로 간편하게 때우고."
 "네? 그럼 아까 왜 안 드셨어요? 기껏 준비한 건데-."
 "아 그거, 구두 좀 제대로 신느라고 입만 대고 말았네. 미안."
 하루카는 한순간 말문이 막혔다. 양손으로 뜨거워지는 얼굴을 감싸 안았다.
 "그런 건 미리미리 말씀해주세요…."
 프로듀서는 힐끗 쳐다보았다. 시선이 느껴졌다. 더더욱 하루카는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너, 아미 때문에 그런 거지?"
 부끄러움에 신발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하루카는 놀란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어라? 어떻게 아셨어요?"
 "어제 나도 얼핏 들었으니까, 혹시나 했지."
 "프로듀서 씨가 어제 고집만 안 부리셨어도 이런 일은 없을 텐데…."
 하루카의 말에 프로듀서는 시선을 피했다.
 "윽, 미안."
 자동차 신호를 기다리는 프로듀서는 정장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하루카에게 건넸다.
 "자, 여기. 그렇게 걱정되면 내 걸로 전화해봐. 자주, 아니 가끔 아미가 내 전화를 안 받긴 하긴 해도 지금은 받겠지."
 프로듀서가 준 휴대폰에 화색이 돈 하루카는 서둘러 전원을 눌렀다. 하지만 기대가 무색하게도 화면은 켜지지 않았다.
 "이거 안 켜지는데요."
 "엑? 배터리가 다 됐나?"
 "그런가 봐요."
 "그럼 예비 배터리를… 배터리가… 사무소에 있네."
 실소가 나온 하루카는 슬며시 프로듀서의 정장 주머니에 휴대폰을 집어넣었다.
 "덜렁이 프로듀서 씨. 한 번 더 유학 가시는 걸 추천해 드려요."
 "미, 미안."
 "농담이에요. 농담. 에헤헤."


 실실 웃던 하루카는 프로듀서의 시계를 보고 굳었다. 벌써 이렇게나 시간이 흘렀다니. 아무리 계산해보아도 최소 1시간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아미가 정말 약속했던 말대로 왔다면, 자신을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다면, 어떻게 풀어주어야 할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장난스레 풀기엔 너무나도 시간이 지났다.
 "유학도 그렇고, 처음 너희를 만난 게 엊그제 같네. 다들 철부지에 사춘기 아이들이라 고생 좀 했지. 하루카 너만 빼고."
 "저는 왜요?"
 "믿음직스러우니까. 예전에 리더로 선정한 이유도 그중 하나야."
 "별로 못 믿으시는 것 같은 데…. 맞다, 프로듀서 씨. 야요이뿐만 아니라 아미도 사춘기인 것 같아요."
 "아미가?"
 프로듀서는 전혀 몰랐다는 듯 하루카에게 물었다.
 "손을 몰래 잡으면 깜짝 놀라서 놓으려고 한다든지, 아무튼 귀여워요."
 "그랬나…? 난 똑같던데."
 "역시 섬세하시질 못하시네요."
 하루카는 그를 지긋이 쳐다보았다.
 "그건 언제까지 우려먹을 거야……."
 "섬세해지실 때 까지요~."
 프로듀서는 한숨을 쉬었다.
 "하긴, 내가 자각하지 못한 부분을 빼더라도, 분명 아미는 3년 전의 너같이 소녀다움이 물씬 풍기고 있어. 본인은 잘 모르는 듯하지만 말이야."
 "무으-, 저도 아직 소녀예요-?"
 하루카는 심술을 냈다.
 "잘 알고 있어. 누구보다도."
 하루카는 또다시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가 나쁘다고 생각했다.


 "어른이 되면 억지로 웃는 날이 많아져. 기분이 나빠도, 슬퍼도 주위의 시선때문에 표현 할 수가 없거든. 그래서 아직까진 너희를 아이로 남게 해주고 싶어. 내가 여기 있는 한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억지로 할 필요 없으니까, 부담되는 일이 있으면 꼭 말해줘."
프로듀서는 진지하게 당부했다.
 "그 말 벌써 세 번째입니다."
 "윽, 중요하니까 여러 번…."
 "조금 무리를 해서 그랬던 거지, 제가 좋아서 했던 일이에요. 다음엔 컨디션 조절을 제대로 해낼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게다가 우리 프로듀서는 각자가 좋아하는 일만 딱 맞춰서 가져오시니, 따로 걱정할 필요가 없는걸요."
 하루카는 프로듀서를 똑바로 바라봤다.
 "하나 더 미안한데, 아마 역까지만 데려다줄 수 있을 것 같아. 오늘 잡지미팅이 정오에 잡혀있거든."
 "괜찮아요. 이것도 무리한 부탁이었는데요 뭘."
 그렇게 말하면서도 하루카는 기분이 내려앉았다.
 "흐음, 꽤 시간이 빡빡하겠는데."
 프로듀서는 다급한 듯 핸들을 톡톡 건드리다 오른쪽의 손목시계를 주시했다.
 "여기서 내릴게요."
 "응? 아직 도착하려면 좀 남았어."
 그는 네비게이션의 남은 거리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프로듀서 씨도 늦으면 미키가 싫어할 거에요?"
 "딱히 상관은 없다만…."
 "그러면 안 돼요!"
 하루카는 다그쳤다.
 "윽, 차로도 10분 이상은 걸리는 거리야."
 "체력엔 자신 있습니다!."
 안전띠를 풀은 하루카는 자신 있게 응대했다.
 "그 체력 믿다가 사고 친 게 언제였지."
 "또 또 그러신다! 저 이젠 정말 괜찮다고 했잖아요?"
 하루카는 조금이라도 함께 있고 싶은 마음을 우그러트렸다. 더 이상의 우선순위는 자신이 아니어야 했다. 그것이 정녕 아픔을 수반한 결정일지라도, 반드시 해야만 이대로의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가방에서 변장 도구들을 꺼냈다. 이목구비를 가리는 뿔테안경을 쓰고, 리본을 안 보이게 만드는 두툼한 브라운색 모자도 쓰고, 마지막으로 목에 얇은 목도리를 둘렀다.
 "자, 변장도 다 끝났으니까, 저기 건널목에서 서주세요. 네?"
 하루카는 손가락으로 한 블록 앞의 신호등을 가리켰다.
 "뭐…, 어쩔 수 없네."
 체념한 프로듀서는 한숨을 내쉬었다.
 "대신, 너무 무리해서 뛰지는 마."
 "알겠습니다!"
 하루카의 당찬 대답에 역시 그는 썩 내키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여기까지 태워다주셔서 감사드려요! 그럼 수고하세요~!"
 "알겠으니까, 앞 보고 뛰어! 그러다 또 넘어질라."


 그의 말대로 시야에서 벗어나기 전, 길모퉁이를 돌다 풀어진 신발 끈을 밟아 넘어지고 말았다. 분명 아미는 일찍 와서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때문에 이제 하루카에겐 넘어질 여유도, 넘어진 자신을 위로할 여유도 존재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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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도 그려야 하는데 글만 쓰는 글림쟁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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