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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담는 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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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1-24, 2016 23:49에 작성됨.

 

 싸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어느 겨울날의 일이었다. 코트를 입었지만, 그것으로도 부족해 목도리까지 하지 않으면 바람이 새어 들어와 몸이 부르르 떨릴 정도였다. 그런 날씨에도 멍하니 길을 걷던 소녀는 문득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사람 두 명이 간신히 지나갈 만한 좁은 골목길에 어떤 노파가 앉아있던 것이다.

 

 노파는 이런 날씨에도 방한이라는 단어와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모포 비슷한 외투 한 벌을 걸치고 있을 뿐이었다.

 

 다른 사람에게 그다지 관심을 두는 편은 아니었던 소녀였지만 알 수 없는 느낌에 이끌려 이상한 노파에게 다가갔다. 평소라면 거리를 지나는 사람 모두 이상할 정도로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점을 눈치챘을 그녀였지만 홀린 것처럼 발걸음을 옮겼다.  

 

 "할머니, 여기서 뭐 하세요?"

 

 세 발짝 정도 앞까지 다가가 말을 걸자 노파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고개를 들어 소녀를 바라보았다. 그 얼굴에는 거지의 비굴함도 길을 잃은 사람의 불안도 아닌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학생이우?"

 "네?"

 

 노파의 말은 어딘가 알아듣기가 힘들었다. 동화에 나오는 마녀처럼 가래가 낀 것 같은 불쾌한 목소리는 아니었다. 그것보다는 라디오의 주파수가 맞지 않는 것처럼 선명하지 않은 목소리였다.

 

 "학생은 고민이 많아 보이는구먼. 혹시 마음을 더 담아둘 상자가 필요한가?"

 

 노파는 처음 보는 소녀가 말을 걸 것을 알고 있었다는 눈치였다. 그리고선 품속을 뒤적거리다 작고 검은 상자를 꺼냈다. 반지가 들어갈 만한 크기의 상자는 아무런 빛도 나지 않는 투박한 검은색이었다.

 

 "마음을 담는 상자... 라고요?"

 

 소녀는 노파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단어의 뜻은 모두 알고 있었지만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어때, 가져갈라우? 이 늙은이 생각에는 학생한테 꼭 필요한 것 같은디."

 

  노파의 말에 이끌려 소녀는 무엇인지도 모르는 상자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그것은 소녀의 마음이 너무도 복잡해서, 가득 차있었기 때문이었을까.

 

 "얼마죠? 아니, 돈을 내야 하는 게 맞긴 한건가요?"

 

 소녀의 말에 노파는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냥 가져가도 된다우."

 "공짜인가요?"

 

 소녀의 눈에는 의심의 빛이 드리웠지만, 더 말을 하기도 전에 노파는 소녀의 손에 상자를 쥐여주었다.

 

 "요긴하게 쓰시게."

 

 노파는 억지로 밀어 넣듯이 상자를 건네고서 순식간에 손을 빼내어 감췄다. 조금 전까지의 느릿하게 움직이던 사람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소녀는 무언가 결심한 것처럼 손에 건네진 상자를 꼭 움켜쥐었다. 

 

 "마음을 담는 상자라. 그래요. 받아가지요. 제 안의 것은 이미 다 차버렸으니까요. 그리고 이제 그걸 버리고, 잊어버린 후에 다시는 기억해내지 않을 거예요."

 

 소녀는 감사하다는 인사 한마디도 없이 다시 길을 걸어갔다.

 

 

-

 

 

 늦은 시간이어서인지 광장에는 사람의 모습이 그다지 많이 보이지 않았다. 턱이 높지 않은 계단을 올라오면서 둘러봐도 사람의 활기는 잘 느껴지지 않았다. 몇 시간 전만 하더라도 인파로 북적였을 텐데 지금은 연극이 끝난 무대처럼 적막하고 고요하기만 했다. 그래서인지 카나데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꺼지지 않은 무대의 조명처럼 아직 빛을 내며 조용히 물을 뿜어내고 있는 분수대 앞에 카나데는 앉아있었다. 평소처럼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뚱한 표정으로 있는 그녀를 바라보자 나의 시선을 느끼기라도 한 것처럼 서로의 눈이 마주쳤다.

 

 제법 먼 거리에서 서로의 모습을 확인했지만 내가 다가갈 때까지 카나데는 가만히 기다릴 뿐이었다. 내가 카나데 앞까지 도착하자 그제야 카나데는 자그맣게 웃었다.

 

 "어머, 정말로 올 줄은 몰랐는데."

 

 카나데는 원피스에 카디건 뿐이라는 제법 얇은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요즘 같은 날씨에 감기 걸리기 딱 좋을 텐데. 나중에 꼭 한마디 해 둬야겠다.

 

 "뭐야, 그럼 괜히 온 거야?"

 "후훗, 그럴지도?"

 

 말은 그렇게 하지만 본심이 아니라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카나데의 담당이 되고 나서 처음에는 어디까지가 본심이고 어디까지가 나를 떠보는 말인지 알 수 없어서 줄곧 휘둘려 다니기만 했었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고 카나데와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지고 나니 어느 정도 그녀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 시간에 와줄 수 있느냐고 전화로 부르는데 모르는 척을 할 수도 없잖아."

 

 10시가 넘은 시간에 전화가 걸려오니 순간 무슨 일이라도 났나 하고 걱정스러웠던 것도 사실이지만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카나데의 목소리는 평소와 같아서 별일 아닐 거라고는 생각했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다른 일을 하고 있으니 나중에 전화하라는 것도 너무하니까 바로 찾아오긴 했지.

 

 "술 마시고 있었던 거야?"

 

 가까이 다가가자 역시 술 냄새가 났나 보다. 최대한 냄새가 나지 않도록 신경을 쓰긴 했는데 무리였나.

 

 "어... 뭐, 오랜만에 친구 놈이랑."

 "미안하게 됐네."

 

 카나데는 술 냄새에도 살짝 눈을 찌푸렸을 뿐 그 이상 불쾌함을 내보이지는 않았다.

 

 "그래서, 무슨 일로 부른 거야?"

 "음... 그냥?"

 

 뻔뻔스러운 말에 나는 조금 황당했다. 지금 시각은 자정이 가까운데, 담당 아이돌이 전화로 와줄 수 있느냐는 말에 술자리도 깨고 달려왔더니 그냥이라니. 물론 카나데가 하는 말이니만큼 거짓말일 수도, 아니면 정말 그냥 불러봤을 수도 있었지만 지금은 잘 모르겠다. 술이 들어간 탓일까.

 

 "어이어이, 지금이 몇 시라고 생각하는 거야. 미성년자가 나돌아다닐 시간도 아니고."

 "그냥... 프로듀서가 보고 싶어서...라는 이유는 안 돼?"

 

 카나데는 어울리지 않게, 어쩌면 카나데답게 눈을 찡긋 윙크했다.

 

 "......."

 

 그렇게 말하고서 빤히 쳐다보면 나도 할 말이 없다. 언제나 내 머리 위에 있는 녀석이다.

 

 "카나데."

 "......."

 

 내가 이름을 불러도 카나데는 대답이 없었다. 그저 계속 빤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뭐라도 말을 좀 해 봐."

 "......."

 "하야미 씨...?"

 "...네?"

 

 간신히 입을 열게 했지만 그 직후에 카나데가 푸훗 하고 폭소를 터트려버렸다. 매번 대체 어디가 웃긴 건데. 여자처럼 섬세하지 못한 나도 좀 이해할 수 있게 설명을 좀 해줬으면 하는데.

 

 "아냐 아냐. 됐어. 프로듀서는 그런 사람이니까."

 "...영문을 알 수가 없는데."

 

 간신히 웃음을 멈춘 카나데는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프로듀서는 어릴 적에 장난감을 모았던 적이 있어?"

 "응? 갑자기 무슨 이야기야?"

 "그런 게 있으니까. 대답해 봐."

 

 어릴 적이라. 로봇 장난감이라든가 자동차 장난감을 가지고 논다던가 하긴 했다. 집안이 그렇게 유복한 편은 아니어서 많이는 가지지 못했고 그것 때문에 부모님께 떼를 쓰곤 했다.

 

 "그렇지 뭐. 그 나이 때의 남자아이라면 보통이니까."

 "그래. 그럼 프로듀서는 좋아하는 장난감을 얻게 되면 기분이 좋았어?"

 

 물론이다. 원하는 선물을 받고 기분이 나쁜 사람이 어디 있겠어.

 

 "당연하지."

 "조금 말을 잘못 골랐네. 원하는 걸 얻은 그 후로도 계속 기분이 좋았어?"

 "...아?"

 

 카나데가 말하는 것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그렇게 가지고 싶었던 장난감도 어느 순간 관심이 사라져버리곤 하는 법이니까.

 

 "나이가 먹고 어른이 되어서도 변하지 않아. 너무나도 원했던 것도, 너무나도 바랐던 일들도 완성되어버린 순간에 의미를 잃어버려. 열심히 모아놓은 장난감들은 잡동사니가 되어버리고. 나중에 이사라도 갈 때가 되면 처치 곤란한 쓰레기가 되어버리지. 그래도 사람은 미련을 버리지 못해. 그런 것들을 쉽사리 버리지 않아.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거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바라고 후회하지."

 

 카나데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그럴수록 점점 더 불안해져서 새로운 것들을 찾아 나서는 거야. 절실하게 자신이 옳다는 증거를 찾아 헤매고, 제자리를 맴돌며 반복하는 거야."

 "음... 그래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데?"

 

 말하고 난 후에야 배려심 없는 말이라고 후회했지만 카나데는 조용히 미소 지었다.

 

 "그래. 그런 당신의 모습도 솔직해서 싫어하지 않아. 후훗."

 

 카나데는 주머니에서 다시 핸드폰을 꺼내며 말했다.

 

 "사실은 프로듀서를 시험해 본 거였어. 정말로 와줄까, 하고. 끊임없이 시험해서 불안을 지우지 못하면 견딜 수가 없어지는 것이 여자니까."

 

 어느새 내 손은 카나데의 다른 한쪽 손에 잡혀있었다. 장갑도 끼지 않아 차가워진 손을 통해 싸늘한 느낌이 전해져왔다.

 

 "그럼 프로듀서, 부탁을 하나 더 들어주지 않을래? 이대로 아무도 보이지 않는 달의 뒤편으로 함께 가자."

 

 

-

 

 

 우리는 그 길로 보통 심야버스라고 부르는 것에 몸을 맡겼다. 스케쥴이라던가 하는 내일 일들은 모두 잊고 길을 떠났다. 버스 안은 조용했다. 다른 손님도 몇 명 정도 있었지만 다들 잠을 청하고 있었고, 그들의 조용한 숨소리와 버스의 엔진이 울리는 낮은 소리 말고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카나데와 나는 바로 옆자리에 붙어 앉아 있었다. 카나데는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타기 전에는 자리에 대해 나는 상당히 고민했지만 알고 보니 안전을 위해 여자 손님과 남자 손님은 앞뒤를 나누어서 앉게 되어 있었고 남녀 동반이라면 버스 중앙에 같이 앉게 되어있었기 때문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런 카나데는 지금 내 어깨에 기대어 있었다. 눈을 감고 있었지만 자는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하나 싶었지만 지금 입을 열면 이 조용한 분위기가, 이 경계를 달리는 듯한 아슬아슬한 상황이 깨어져 버릴 것 같아 함부로 말을 꺼내지 못했다.

 

 길지 않은 푸른 머리카락이 내 뺨에 닿아 살랑거렸다. 은은히 풍겨오는 향기가 기분이 좋았지만 나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평소 대담하다고 할 정도로 나를 가까이하는 카나데였지만 언제나 마지막 선은 넘지 않았다. 다른 아이들이 경계선에 다가오지 않는다면 카나데는 그 끝을 자유롭게 오가는 아이였다. 

 

 하지만 지금 카나데의 행동은 어쩌면 선을 넘어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어른스럽게 보이지만 그녀는 아직 17살밖에 되지 않았다. 나중에 내가 상황을 설명하고 수습하면 될 거라는 생각에 아무것도 묻지 않고 같이 길을 나섰지만 미성년자가 밤을 새우며 돌아다니는 건 확실히 올바르지 않은 일이었다. 게다가 카나데가 이렇게 직접 나에게 몸을 가까이 한 적도 없었다. 차라리 지쳐 잠들었다면 이해할 수도 있었지만 분명히-어디까지나 나의 생각이지만-카나데는 잠들지 않았다.

 

 이래저래 의문투성이였다. 머리가 복잡해져서 눈을 감고 마음을 비우고 싶었지만, 어깨에 느껴지는 무게감은 그것마저 허락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묻지 않는 거야?"

 

 다른 손님들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카나데가 속삭였다. 역시 깨어있었구나. 나는 눈만 살짝 돌려 바라봤지만 여전히 눈을 감은 채였다. 더 몸을 움직였다가는 카나데가 움직이게 된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그 자세 그대로 대답했다.

 

 "물어봐도 대답해주지 않을 거고, 말할 생각이라면 묻지 않아도 말해줄 거잖아?"

 "비밀은 밝혀지기 위해 있는 걸. 비밀인 채로 잊혀진다면 영원히 어둠 속일 뿐이니까."

 

자세 때문인지 카나데의 숨결이 닿아 나를 간지럽혔다. 내가 말한다고 내 숨이 닿지는 않겠지만 제법 부끄러워서 얼굴이 새빨개질 것 같았다.

 

 "물어봐 주기를 원하는 거야?"

 "그래. 아니, 어쩌면 아닐 지도."

 

 그래도 내가 쉰 한숨은 카나데에게도 느껴진 것 같았다.

 

 "여자아이의 마음은 복잡한 거야. 나 스스로 논리에 맞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알려지기 싫지만 알아주었으면 해. 제멋대로라도 이해해주었으면 해."

 

 카나데가 눈을 떴다. 그 어느 때보다도 가까이서 바라본 그 눈은 고양이처럼 노란빛을 띄고 있었다. 너무나 가까워서 그 눈에 비치는 내 얼굴을 찾아볼 수도 있을 정도였다.

 

 "그래."

 

 카나데의 말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해도 나는 그저 알겠다는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카나데에게 생각을 바꾸라고 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런 태도를 싫어할 수는 있어도 옳지 않다고 말할 자격은 내게는 없다. 그저 나는 그 말을 듣고 내가 생각하는 대로 행동할 뿐이었다. 그것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는 법이었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별로 싫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무슨 일 있었어?"

 

 그럼에도 나는 물어보기로 했다. 항상 물어보지 않고 대응하지 않고 먼저 발을 빼 왔던 나였지만 오늘은 그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나데도 물어보지 말라는 말은 하지 않았잖아?

 

 "비-밀."

 

 느릿느릿한 어조로 나온 카나데의 대답은 예상한 대로였다. 그럴 줄 알고 있었다. 이 경계선이 무너지는 건 카나데도 원치 않을 테니까.

  

 "...이었지만, 듣고 싶어?"

 

 비밀을 알게 되는 건 언제나 원했던 일이지만 카나데의 눈에는 여느 때와 같은 장난스러운 느낌이 없어서 왠지 두려워졌다. 지금 이 이야기를 듣는다면 어떤 방향으로든 돌아올 수 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듣지 않는다면, 원래대로 장난스러운 관계로 돌아갈 뿐이겠지. 평범한 프로듀서와 아이돌의 관계 말이다. 다만, 그렇게 된다면 카나데에게서 이 이야기를 듣는 일은 앞으로 영원히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응. 말해 줘."

 

 침묵 속에서 오랜 시간을 고민했다. 카나데도 그런 나를 조용히 지켜보며 기다려주었다. 그 끝에 내가 내놓은 답은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이었다. 거짓뿐인 관계라도 상관없지만 나는 카나데를 더 알고 이해하고 싶었다. 프로듀서와 아이돌의 관계가 아니더라도 사람과 사람 사이로 더 가까워지고 싶었다. 카나데의 진정한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래."

 

 카나데는 서서히 머리를 들어 몸을 일으켰다. 한쪽 어깨에 실린 무게가 사라졌지만 편하기보다는 공허한 느낌이었다.

 

 "프로듀서는 기적이라는 걸 믿어?"

 

 제법 뜬금없는 서두였지만 진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기에 정직하게 대답했다.

 

 "사람들이 보통 말하는 기적이라는 건 믿는다기보다 있다고 생각해. 다만 비현실적이고 사람에게 불가능한 일이 일어난다는 기적은 믿지 않아."

 

 나는 조금 망설였지만 사족을 덧붙였다.

 

 "하지만 있었으면 해. 평범한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어딘가에는 그런 초자연적인 힘이 있었으면 좋겠어."

 

 카나데는 조금 놀란 표정이었다. 하지만 이내 그것을 감추고 평소와 같은 카나데로 돌아왔다.

 

 "의외네. 당신은 이성적이고 논리적이니까 그런 아이 같은 생각은 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유치해서 참 미안하다."

 

 카나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냐. 나도 믿고 싶은 마음은 같으니까."

 

 카나데는 품에서 작은 물건을 꺼냈다. 이번엔 핸드폰이 아니었다. 검고 작은 상자였다. 

 

 "나는 얼마 전까지 어떤 기억이 없었어. 당신이 나와 만나기 조금 전의 일이었을까. 그래서 너무나 불안했어. 그건 프로듀서, 당신도 잘 알고 있지?"

 

 카나데를 처음 만난 날, 그녀를 보고 느낀 첫 감정은 자살희망자 같다는 것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자살에 실패한 사람 같았다. 신경질적이고, 무기력하고, 삶의 어디에서도 의미를 찾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그녀에게 다가갔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카나데는 무엇이라도 의지하고 붙잡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그래도 당신을 만나고, 아이돌 활동을 하면서 나는 새로 태어난 것만 같았어. 지금까지 내가 어떤 삶을 살았거나 기억나지 않는 그 시간 동안 무슨 일을 했거나 상관없다고 생각했어."

 

 카나데의 눈동자는 깊게 가라앉아있었다. 어둠 저편에 떠오른 달처럼 조용히 일렁였다.

 

 "당신과 만나서 새로운 세상을 알고, 여러 가지 일을 접하고, 즐겁게 살아가자고 생각했어. 아이돌이니까, 속이는 건 익숙하니까. 자기 자신조차도."

 

 버스가 방지턱을 넘어가는 듯 덜컹거렸다. 몸이 흔들려도 마주친 서로의 시선은 흔들리는 일이 없었다.

 

 "기억이 없었다, 라는 건 지금은 기억이 났다는 거야?" 

 "응."

 

 하지만 대화는 거기서 끊겼다. 카나데는 고개를 돌리고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도로의 가로등이 하나둘씩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바다를 보러 가자고 말했다. 카나데와 처음 만난 것도 바다 근처의 길이었다. 하지만 굳이 먼 곳으로 가기로 했다. 정말로 달의 뒤편으로 날아갈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이 밤이 쫓아오지 못하는 곳까지.

 

 -

 

 결국, 버스에서 내려 택시를 타고 바다에 도착할 때까지 카나데는 아무 말도 없었다. 택시기사가 의심스러운 눈길을 보내서 내가 멋쩍게 웃으며 대답할 때도 카나데는 가만히 있었다. 평소같으면 도발적인 말투로 장난을 쳤을 텐데. 그래서 나도 버스에서도 택시에서도 내내 그저 창문 밖으로 보이는 풍경과 그 밤빛에 물든 카나데를 조용히 바라볼 뿐이었다. 

 

 떠오른 기억이 무엇이었는지 카나데는 말할 생각이 없던 거겠지. 나도 별로 상관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때 무슨 일이 있었다고 해도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고, 굳이 그 이야기로 카나데를 더 괴롭히고 싶지 않았다. 그게 정말로 중요한 일이라면, 예를 들어 아이돌 활동을 하는 데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일이었다면, 카나데 쪽에서 먼저 말해줬을 거다. 

 

 "벌써 새벽이 가까운 시간이네."

 

 택시에서 내려 시계를 보니 다섯 시 반 정도였다. 아직 이른 시간이었지만 아주 부지런한 사람이라면 벌써 일어나고 있을 시간이었다. 

 

 "밤은 비밀의 색깔에 덮여있으니까. 비밀을 가진 사람에게 어울리는 시간. 그러니까 재빨리 도망가버리는 거야."

 

 카나데는 지금까지 침묵한 적이 없다는 듯 이야기했다. 아니, 딱히 카나데가 모른 체를 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사람이 끊임없이 말을 해야 할 이유는 없다. 그냥 너무 오래 깨어있었더니 정신이 맑지 않은 거다.  

 

 우리는 바닷가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가끔 겨울 바다의 싸늘한 바람이 불어왔지만 그것 말고는 온화한 날씨였다. 백사장 같은 곳이 아니라 해안 도로의 가드레일 옆을 따라 걸었다. 카나데를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도쿄만 주변의 도로에서 우리는 처음 만났었다.

 

 "프로듀서는 그때, 왜 나를 붙잡은 거야?"

 "응?"

 

 처음 만난 날의 이야기인 걸까. 나는 조금 놀랐다. 카나데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걸까.

 

 "키스해달라고 했었잖아. 처음 만난 남자한테. 이상한 여자라고 생각하지 않았어? 게다가 순순히 알겠다고 하는 당신은?"

 

 그런 일이 있었지. 아무런 의욕이 없는 카나데를 끈질기게 설득하자 카나데는 포기한 것처럼 '키스를 해 주면 아이돌이 되어주겠다.'라고 했었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알겠다고 했었지. 지금 생각하면 왜 그랬는지도 모를 일이지만 그때는 기세 때문인지 바로 당당하게 대답했던 것 같다. 

 

 조금 낭만적으로 말하자면, 운명을 느꼈다고 해야겠지. 놓치면 안 된다고 생각해 버린 거야.

 

 "카나데가 굉장한 인재였으니까. 어떻게든 잡아야겠다고 생각했지."

 

 나는 시치미를 떼며 거짓말을 했다. 우리는 그렇게 항상 거짓말을 했다.

 

 "거짓말이네."

 "...어떻게 알았어?"

 

 나는 너무나도 쉽게 단언하는 카나데때문에 당황했다.

 

 "거짓말에 익숙한 사람은 거짓말을 알아보는 법이니까."

 "뭐... 그래도 카나데가 재능이 있다고 생각하는 건 사실이야."

 

 진심을 다 내보일 수는 없었지만 이것만큼은 거짓이 아니었다.

 

 솔직함이라는 건 칼과 같은 것이다. 일방적인 솔직함은 상대에게 들이대는 협박과 다르지 않은 흉기다. 나는 이런 것까지 알려주는 거니까 당신도 그에 상응하는 신뢰를 달라는 것이다. 이야기하는 순간 타인의 문제였던 것도 말려들어서 자신의 이야기가 되어버린다. 그래서 서로 아무리 소중한 사람이라고 해도 모르는 것이 있는 편이 좋다고 생각한다. 모든 걸 알아버리면 부담스러워질 뿐이겠지.

 

 "비밀은 사람을 강하게 만들고, 매력적으로 만들어. 그리고... 소중한 사람을 지키기도 해. 당신이라면 이해할 수 있지?"

 

 나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 동의에 카나데는 미소 지었다.

 

 "그러면 당신에게 이걸 맡길 수 있을 것 같네."

 

 카나데는 예의 검은 상자를 나에게 건넸다. 조용히 열어보니 안에는 반쪽의 반지가 들어있었다. 의아한 표정을 짓는 나를 보고 카나데가 말했다.

 

 "잊고 싶었던 것들도, 잊을 수 없는 밤들도 있었지만 나는 전부 버려두기로 했어. 슬픔도 기억나지 않도록. 그래서 나는 비어버렸던 거야."

 

 바다 저편을 바라보는 카나데의 표정은 쓸쓸했다. 아직 어두운 바다를 샛노란 등대의 불이 비추고 있었다.

 

 "지금이라면 확실하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아. 당신과 시작하게 되어도 괜찮다고. 버려버린 장난감들을 다시 긁어모아도 아무런 의미가 없는 쓰레기가 될 뿐이야. 그 사이에 이 틈은 당신의 색으로 벌써 가득 차버렸으니까. 나에게는 이제 필요 없으니까."

 

 반지라는 말은 그 자체로 반쪽이라는 말이었다. 한 쌍이 모여야만 비로소 의미가 있는 물건이었다. 

 

 "무엇이 정답인지, 무엇이 옳은 길인지 계속 망설였지만, 그런 건 아무 상관 없었던 거야. 소중한 사람이 곁에서 웃고 있다면 그걸로 좋아. 그러니까 거짓말을 해 줘. 계속 속여줘. 계속 그렇게 있어 줘."

 

 나는 반쪽 뿐인 반지를 꺼내 살펴보았다. 보석도 문구도, 그 흔한 장식도 없는 평범한 반지였다. 반지의 반쪽이라고도 알아채기 힘들어서 정말로 나머지가 없으면 아무런 의미도 없는 쇳조각으로 보일 뿐이었다. 

 

 "그래도 이래선 낄 수도 없잖아."

 

 나는 무안해서 괜히 투덜거렸다.

 

 "어차피 프로듀서라는 입장이니까 반지를 끼고 다니면 곤란할 거 아니야?"

 

 나는 그것을 다시 상자에 넣고 닫았다. 그리고 주머니에 넣었다. 굳이 신줏단지처럼 애지중지 보관할 필요가 없다는 건 나도 카나데도 잘 알고 있었다. 이건 어디까지나 기묘한 쇳조각일 뿐이었으니까.

 

 "이것도 비밀인 거지?"

 "아이돌이니까 언제나 사랑은 첫사랑인 거잖아? 진실이든 거짓이든."

 

 나는 뻔뻔한 카나데의 말에 웃어버렸다. 내 웃음 때문인지 카나데의 굳어있던 얼굴에도 웃음이 번졌다.

 

 우리는 다시 길을 걸었다. 손을 맞잡은 채였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었다. 카나데의 말에 나의 답을 말할 필요도 없었다. 추운 날씨에 둘 다 장갑을 끼고 있어서 서로의 촉감 같은 건 거짓말로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 무게가 느껴지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저기, 당신."

 "응?"

 

 손이 움직였다. 그네를 타는 것처럼, 어린아이들이 손을 잡고 걸어가는 것처럼 앞뒤로 흔들렸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의 말을 따라야만 한다면 그건 내 의지일까, 아니면 그 사람의 의지일까?"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그만뒀다. 그냥 말장난이잖아.

 

 "아무래도 상관없잖아. 결국 서로가 좋은 거니까."

 "아하하하, 그러네. 아무래도 상관없겠지."

 

 갑자기 카나데의 발이 멈췄다. 나의 발도 따라 멈췄다. 흔들리던 손이 꽉 쥐어져 멈춰버렸다. 그리고 입술이 닿았다. 곧이어 떨어졌다.

 

 "나를 여기까지 데려다준 건 프로듀서, 당신의 날개니까." 

 

 방금 있었던 일은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편이 분위기 있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굳이 한마디를 더 했다.

 

 "몇 번째였어?"

 

 카나데니까 할 수 있는 장난이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대로 뺨을 맞고 쫓겨났을지도 모르지.

 

 "물론 처음이야. 아이돌이니까 언제나 키스도 첫 키스인 거잖아?"

 

 맨날 키스키스 노래를 부르는 주제에. 생각해보니 그런 것치고 진심으로 다가가는 상대에게는 한 걸음 물러서는 카나데니까 정말일 지도 모른다.

 

 "자, 그러면 밤을 넘어서 내일을 잡으러 가자."

 

 수평선 너머가 붉게 달아올랐다. 해가 뜨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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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마노 츠키코 - 모형정원 : https://youtu.be/JU1BI6USHEo

 

 만약 당신과 시작하게 되어도 상관없다고 지금이라면 강하게 말할 수 있어.

 

 

 오랫동안 쓰고 싶었던 노래를 소재로 글을 쓰는 건 즐겁지만 욕심이 과해서 부족함이 느껴지면 아쉽습니다. 더 노오오오력이 필요한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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