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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하야에게 키스하고 말았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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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10-11, 2015 02:33에 작성됨.

퇴근하고, 샤워를 끝냈을 때에만 하더라도 10시를 조금 넘기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시계의 시침이 11에 도달하기 직전이었다.


샤워를 마치고 지금까지의 근 1시간여의 시간. 나는 그 시간동안 침대에 누워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게임이나 넷서핑같은 것을 한 것은 아니다.


“하아.”


키사라기 치하야.


폰의 화면에는 내가 담당하는 아이돌의 전화번호가 떠있었다.


지금 통화 버튼만 누르면 치하야에게 전화가 간다.


치하야가 전화를 받으면 간단하게 인사를 하고, 내일부터 당분간 리츠코가 담당하게 되었다고 전한다. 이유를 묻는다면 미리 준비했던 변명거리를 들려준다. 그래도 안 되면 달래준다.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다.


단지 문제가 있다면 치하야를 볼 면목이, 그리고 치하야와 대화할 용기가 생기지 않는다는 것. 그래서 나는 근 1시간동안 침대에 누워 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만약 나의 또래가 미성년자에게 키스를 했다는 말을 듣는다면 나는 분명 진심으로 경멸할 것이다. 더군다나 그 미성년자가 잠을 잘 때에? 경멸의 정도가 심해질 것이다. 더군다나 프로듀서가 담당아이돌에게? 업계종사자로서 경찰에게 신고를 한 다음 이렇게 말하겠지. ‘죽어.’


그런데 그게 나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이불을 뒤집어쓰고 몸부림쳤다.


알고는 있다. 내가 가만히 있으면 아무런 일도 없을 거라는 것을.


하지만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치하야를 대할 정도로 나는 용감하지 않다.


그래서 내 감정이 진정될 때까지 리츠코에게 담당을 해달라고 부탁한 거다. 그런데 지금 당분간 리츠코가 담당하게 되었다는 말조차도 치하야에게 전하지 못하고 있다. 이 무슨 한심한.


폰의 시계가 11시라는 것을 알려준다.


마음을 다잡자. 이 상태로 시간만 끌어봤자 사태만 악화시킬 뿐이다. 이보다 늦으면 전화자체를 못하게 된다.


응. 그러니까 11시 10분에 전화하자.



11시 15분.


마음속으로 정해둔 마지노선을 한 번 더 연장하고 나서야 나는 간신히 통화버튼을 누를 수 있었다.


이제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다.


연결음이 울린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치하야가 받으면 먼저 인사를 한다.


다섯 번, 여섯 번, 일곱 번……


그리고 내일부터 리츠코가 나대신 당분간 프로듀싱을 한다고 전한다.


여덟 번, 아홉 번, 열 번……


혹시나 왜 그렇게 됐냐고 물으면 내가 최근에 바빠서 그렇다고 대답한다.


열한 번, 열두 번, 열세 번……


왜 하필 자신이냐고 묻는다면 리츠코에게 하려고 했던 변명을 이번에도 써먹자.


열네 번, 열다섯 번, 열여섯 번……


그래 완벽하다.


열일곱 번…… 사서함으로 연결된다.


나는 전화를 끊었다.


하하하.


“…….”


뭘 안도하고 있는거냐. 짜식아.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상황이 안 좋아지는 건 나라고.


아니, 치하야랑 통화하려고 하니. 전화를 안 받잖아?


그러면 어쩔 수 없지. 치하야랑 통화하는 건 내일로 미룰까? 괜히 전화 받을 때까지 전화를 해서 폐를 끼칠 수 없잖아.


그래, 그러자. 하하하하.


“…….”


다음에 특기가 뭐냐고 사람들이 물어보면 자문자담, 혼자놀기라고 하자.


“아, 몰라. 안 되는 걸 어쩌라고 그냥 한잔 걸치고 잠이나 자자.”


침대에 폰을 대충 던져놓고 방 한편에 있는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냈다.


그리고 캔을 땄을 때.

 

파랑새

혹시 행복이 가까운 곳에 있더라도



“히익!”


갑작스럽게 들려온 치하야의 목소리에 들고 있던 맥주를 떨어뜨렸다.


떨어뜨린 맥주가 방바닥을 흥건히 적셨다.

 

저 하늘로 나는 날아올라


미래를 믿으면서



아니다. 치하야의 목소리는 맞지만 치하야 본인이 아닌 벨소리다.


그러나 안도할 수 없었다.

 

당신을 잊지 않아

하지만 예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어

 

나는 각 아이돌의 대표곡을 각자의 벨소리로 지정해놓았다.


이 노래는 치하야의 파랑새.


즉 지금 치하야에게 전화가 왔다는 뜻이다.

 

창문으로 보이는 빛나는 바다에서

파도 속으로 뛰어들고 싶어



맥주를 닦을 생각도 못하고 후다닥 침대로 달려갔다.


키사라기 치하야.


폰의 액정에는 그렇게 쓰여져 있었다.

 

붙잡아 세우는

팔을 뿌리치고


십호흡을 한다.


결코 당황하면 안된다.

 

가야할 곳은

어딘가에 있어

 

인사한다, 리츠코가 대신 프로듀싱하는 것을 전한다. 이유를 말한다. 달랜다.


그래. 그렇게 제대로 하기만 하면 된다. 당황할 이유가 없다. 간단하거다.



당신의 품 안의 새장에서는

달콤한 시간만이 흐르지



마지막으로 심호흡을 한다.

 

하지만 붉은 열매를

지금 찾으러 가네



나는 폰의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프로듀서입니다.”


“여보세요? 치하야에요, 프로듀서.”


폰 너머로 치하야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키사라기 치하야를 좋아한다.


아니다. 좋아한다는 말을 쓰니 친근하다는 의미로 해석될 것 같으니 말을 바꾸겠다.


나는 키사라기 치하야를 사랑한다.


남자로서 키사라기 치하야라는 여자를 사랑한다.


“치하야에요, 프로듀서.”


이 단 한마디가 나에게 얼마나 커다랗게 다가오는지 치하야는 모를 것이다.


치하야에게 입 맞추고 하루 종일 죽여 놓았던 감정이 이 한마디로 다시 살아난다.


“방금 전에 전화하셨는데 못 받아서 죄송해요.”


지금 치하야는 어떤 모습으로 전화를 받고 있을까?


“휴대폰을 두고 잠시 편의점에 갔다 와서요.”


치하야와 이렇게 연결되어 있는 것만으로 내 안은 치하야로 가득 찬다.


감정이 북받쳐 올라 웃음이 나오면서도 눈물이 난다.


지금 당장 이 감정을 치하야에게 전하고 싶다.


“치하야가 잘못 한 건 없어. 이렇게 늦은 시간에 전화한 내가 잘못이지.”


그러나 이 감정을 전할 수 있을 리 없다. 치하야와 나는 아이돌과 프로듀서니까.


“편의점에 가면서 별일은 없었지?”


“편의점 직원이랑 손님이 절 보고 놀란 것 외에는 없어요.”


“그 사람들도 적잖이 놀랐겠네. 밤에 갑자기 톱아이돌이 나타난거니까. 그래도 이렇게 늦은 밤에 돌아다니는 건 위험하니까 자제해줘. 톱아이돌이기 이전에 여자아이잖아.”


“후후, 톱아이돌이기 이전에 여자아이라. 그러네요. 다음부터는 조심할게요. 걱정해주셔서 고마워요.”


치하야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 웃음소리를 들으니 나 역시도 소리내어 웃고 싶어졌다. 사랑하는 사람의 웃음소리를 듣기만 해도 행복하단 걸 왜 지금까지 몰랐을까.


“그래서 무슨 일로 전화하신거에요?”


그러나 계속해서 행복에 젖어있을 수는 없다. 아니 행복에 젖어있어서는 안 된다.


용건을 물어오는 치하야의 그 한마디가 나를 일깨웠다.


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나를 위해서, 치하야를 위해서 이 말은 꼭 전해야한다.


“사전에 아무런 대화도 없이 이쪽에서 막무가내로 정해서 나도 미안하게 생각해. 그래도 급한 사안이라 어쩔 수 없이 전화로 일방적으로 통보하게 됐어.”


아까 전 히비키와의 대화를 통해 나도 느낀 게 있다. 이렇게 미리 말해두면 상대도 충격을 덜 받을 거다.


“무슨 일인데요?”


나는 다시 심호흡을 했다. 이 말을 듣고 치하야가 따질 때 침착하게 대응하기 위해서.


“미안하지만 당분간 나 대신 리츠코가 치하야를 프로듀싱 해줄 거야. 인수인계는 끝났으니까 이번 달 동안은 일 관련 된 건 리츠코에게 전화해줘.”


“…….”


치하야는 아무런 대답도 없다. 히비키처럼 소리를 높여 따지지 않을 거라는 것은 예상했다. 하지만 소리 높이지 않더라도 이후에 나올 말들을 상상하면 두렵기는 매한가지다.


“알겠어요.”


잠깐의 침묵 후에 대답하는 치하야의 목소리는 착 가라앉아있었다. 딱딱하고 차가웠다.


“미안해. 치하야.”


일단 사과를 했다. 누가 뭐래도 잘못한 건 나니까. 일 관련 되서 일방적으로 통보하는 것도 그렇고, 그리고……치하야에게 연정을 품은 것도 그렇고.


“잘못한 건 알고 계신가보네요.”


치하야는 쏘아붙이듯이 말했다.


“…….”


히비키의 분노가 불이라면 치하야는 얼음이다. 차가운 분노가 나를 겨냥하고 있었다. 방금 전 웃던 분위기가 거짓말 같다. 심장이 얼어붙어 깨질 것 같았다. 방금 전 사랑하는 사람의 웃는 소리에 행복에 젖었던 가슴이 고통으로 가득 찬다.


“도대체 이런 중요한 일을 오밤중에 전화로 전하는 게 어디 있어요? 사전에 상의도 없었고 말이에요.”


“…….”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더군다나 프로듀……


약간씩 격해지던 치하야의 목소리가 끊겼다.


뭐지? 연결이 끊겼나?


“치하야?”


폰 너머로 한숨소리가 들렸다. 다행히 연결이 끊긴 건 아닌 것 같다.


“죄송해요. 너무 무례하게 반응했어요.”


사과를 받을 거라고 생각 못 했다. 누가 보더라도 치하야가 화를 내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아냐, 치하야가 잘못 한 건 없어. 이런 중대한 이야기를 사전에 예기도 없이 일방적으로 통보한 내가 잘 못 한 거지.”


“프로듀서가 잘못이 없다는 말은 아니에요. 하지만 그렇다고 감정적으로 되서 프로듀서에게 무례하게 대해서는 안 되죠. 죄송해요.”


나이는 나보다 어린데 나보다 어른스러웠다.


부끄러워졌다.


치하야는 한층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바쁘신 거죠?”


“……응.”


“아까 전 화보촬영 때 프로듀서 대신에 리츠코 씨가 계신걸 보고 저도 대충 짐작했어요.”


“…….”


‘치하야에 대한 감정을 억누르지 못해서 리츠코에게 대신 봐달라고 부탁했다.‘ 라고 말할 수 있을 리 없다. 그것이 아무리 사실이라도 말이다.


다시 한 번 한숨소리가 들렸다.


“이번 달까지만 인가요?”


“응.”


“내일부터요?”


“응.”


“알겠어요. 그래도 다음에도 이런 일이 있을 것 같으면 미리 상의 해주세요. 프로듀서가 바쁜 걸 알면서도 섭섭하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유념할게.”


그리고 잠깐의 휴지기.


나는 치하야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말을 먼저 꺼낼 수 있을 리 없다.


“프로듀서?”


“응?”


“저기…….”


치하야가 머뭇거리는 것을 폰 너머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긴장했다.


혹시 아까 전 키스한 것을 알고 있는 건가? 그것에 대해서 말을 꺼내려고 이러는 건가? 아니면 일방적인 통보로 인한 화가 아직 덜 풀려서 거기에 대해서 매도하려고 그러는 건가?


이런 저런 불길한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한참을 말을 고른 치하야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안녕히 주무세요.”


“아, 응. 고마워. 너도 잘 자.”


“…….”


“…….”


“먼저 끊으세요.”


“으, 응.”


나는 전화를 끊었다.


힘든 일을 별 고난 없이 끝낸 후련함과 치하야의 목소리를 더 이상 들을 수 없어진 것에 대한 아쉬움이 내면을 가득 채운다. 그리고 마지막에 치하야가 얼버무린 이야기에 대한 호기심까지.


뭐, 그래도 전체적인 감정의 벡터는 긍정적인 방향이라고 평을 내리겠다.


이걸로 고비는 다 넘겼다. 이제 다음 달까지 일과 내 마음을 진정시키는 데에 집중하도록 하자.


나는 행주를 들어 아까 전 흘린 맥주를 닦았다.


그런데 뭔가 잊은 것 같은데?


“……아.”


맥주를 다 닦고 나는 다시 폰을 들었다.


전화로 할까? 아냐. 괜히 긁어서 부스럼 만들 필요는 없지.


나는 문자 메시지를 작성했다. 쓰다가 지우고, 다시 쓰다가 지우고. 이런 과정을 여러 번 반복하고 나서야 간신히 문자 메시지를 완성할 수 있었다.


‘깜빡하고 말 안했는데. 사과의 의미로 치하야의 소원을 들을 수 있게 해 줘. 이걸로 완전한 사과가 되리라는 생각은 안하지만 그래도 내가 최소한의 성의를 보여줄 수 있게.’


사과 받는 것을 강요하는 느낌이 들었지만 이보다 더 나은 문장이 나오지 않았다. 나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눈을 딱 감고 전송버튼을 눌렀다.


답장은 곧장 날아오지 않았다. 치하야가 휴대폰을 다루는 것이 미숙하다는 것을 감안하면 당연했다. 하지만 나는 혹여 어떤 답장이 올지 불안해하며, 그리고 치하야가 어설픈 손짓으로 나에게 문자를 보내는 모습을 상상하여 가슴이 뛰는 것을 느끼며 치하야의 답장을 기다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지나도 치하야의 답장을 돌아오지 않았다.


새벽 1시.


나는 그제야 하릴 없이 답장을 기다리는 일을 포기했다. 내일도, 아니 자정을 넘겼으니 오늘이지. 오늘도 출근해야한다. 이 이상 취침시간을 줄였다가는 일에 지장이 생긴다. 직장인에게는 휴식도 의무다. 그리고 치하야도 이미 잠들었을 수도 있으니 이 이상 기다리는 것도 무의미 할 것이다.


불을 끄고 침대에 눕는다. 마지막으로 휴대폰을 확인하고 나는 잠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휴대폰에 문자 메시지가 도착해있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발신자는 치하야다.


‘예, 알겠어요.’


새벽 2시에 날아온 문자였다.

 

 

“다녀왔습니다.”


영업과 협약을 끝내고 사무실로 돌아오니 아무도 없었다.


코토리 씨는 쉬는 날이고, 리츠코는 류구의 이벤트 회장으로 갔다. 사장님은 뭐……어딘가에 잘 계시겠지. 아이돌들은 당연한 말이지만 전부 자신의 일을 하고 있을 테고.


사무실에 돌아왔지만 아무도 반겨주지 않는다. 조금 외롭다고 생각해버렸다. 외로운 마음에 망연히 사무실을 둘러본다. 그 많은 소파와 의자에는 아무도 앉아있지 않다. 반면에 책상위에는 처리해야할 서류가 가득하다. 그리고 옛날에는 빈 칸 밖에 없던 아이돌들의 스케쥴판이 지금은 모두 꽉차있다.


나는 스케쥴판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하나의 이름 위에 눈이 고정되어버렸다.


치하야 ‘음반 녹음 13:00~17:00’


치하야와 마지막으로 통화하고 2주가 지났다. 나의 예상대로 그 2주 동안 치하야와 얼굴을 마주하지 못했다. 그러나 치하야와 직접 얼굴을 맞대지 않더라도 주위는 치하야가 가득했다. 아니 나의 감각은 치하야를 찾아냈다. 길거리를 가면서 치하야의 음악을 찾아내었고, 무심코 지나칠 작은 지하철 광고에서도 치하야를 찾아내었다.


그럴 때마다 나의 가슴은 격하게 두근거렸고 나는 그 격동을 죽이기 위해 언제나 끊임없이 두 가지 사실을 되뇌었다.


아이돌과 프로듀서.


미성년자와 성인.


직업적으로도, 도의적으로도 허용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내가 되뇌이는 현실이라는 역풍에 나의 감정은 조금씩 조금씩 깎여나갔다. 치하야를 향한 마음이 깎여나가면 깎여나갈수록 그만큼의 고통이 내 안을 가득 채웠다.


그러나 나의 노력은 헛된 것이 아니었다. 자포자기……라고 말해도, 세뇌라고 말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나날이 치하야를 향한 마음이 작아지는 것을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격류처럼 내 몸을 흐르던 감정은 실개천만큼이나 약해졌다. 처음에는 그것이 두려웠으나 나는 나 자신을 다잡았다.


나를 위해서.


치하야를 위해서.


치하야의 꿈을 향하는 길의 장애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 과거에서 벗어나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된 이 소녀의 미래의 앞길을 가로막아서는 안 된다.


내가 사랑‘하는’, 아니 내가 사랑‘했던’ 소녀를 위해서.


“…….”


마음의 파편이 떨어진다. 파편이 가슴을 찌르나 조금 먹먹할 뿐 옛날만큼의 고통은 없다.

 

한숨에 가슴을 가득채운 막막함을 실어 내쉰다.


뒤늦게 어지러움과 피곤함이 엄습한다.


쉬자. 지금의 어지러움과 피로는 최근의 격무 때문이다. 결코 다른 이유 때문에 그런 건 아니다. 그래, 그럴 것이다.


다행히 다음 일정까지 1시간 정도 여유가 있으니 조금 눈을 붙일 수 있다.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쉬자.


정장 상의를 내 의자에 걸쳐놓고 휴대폰의 알람을 45분 뒤로 맞춘다.


아직 낮이었기에 좀 더 편안하게 잠들기 위해 손수건을 접어 눈 위에 올린다.


그리고 소파에 누웠다.


세 번 호흡하기도 전에 나는 기절하듯이 잠이 들었다.



콧노래가 들린다.

비몽사몽간에도 듣기 좋다고 생각할 콧노래였다.


멜로디는 단순했지만 비몽사몽이었기에 더 마음에 와 닿았다. 복잡한 멜로디였으면 소음으로 밖에 받아들이지 못했을 것이다.


높아졌다가 낮아진다. 길게 늘어지다가 짧게 끊어진다. 빨라졌다가 느려진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이 반복된다.


멜로디가 다섯 번 정도 반복되었을 때에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크게 기지개를 펴 굳은 몸을 푼다. 그러자 멜로디가 끊기고 말소리가 들린다.


“아, 일어났어 프로듀서?”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였다.


나는 눈 위를 덮고 있는 손수건을 치우고 소파에 똑바로 앉았다. 그러자 내 몸을 덮고 있던 모포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내가 자기 전에는 없었던 물건이다.


나는 모포를 집어 들었다.


“아직은 날이 춥다구. 아무리 실내라고 해도 그렇게 자며 감기 걸려.”


소파의 맞은편에 2주 만에 보는 소녀가 있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기지개를 킨 후 말했다.


“고마워, 히비키.”


가나하 히비키는 생글생글 웃었다.


“오랜만이네, 프로듀서.”

 

가나하 히비키.


요즘 한창 높은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아이돌.


운동만능에 노래도 잘 부른다.


그리고 최근에는 잘나가는 드라마의 준주연이기도 하고, 고정적으로 이끌어나가는 프로그램도 있다.


자 아이돌 가나하 히비키에 대한 소개는 여기까지만 하자.


이제 인간 가나하 히비키에 대해서 소개하자.


올해 16세.


오키나와 출신.


귀여운 외모와 작은 키. 하지만 그와는 대조적으로 몸매는……대단하다. 굉장히 착하면서도 감사한 몸매다. 이 이상 말하면 위험하니 이정도로 줄이겠다.


언제나 활기차고 강한척하지만 실상은 섬세하면서도 외로움을 잘 타는 성격.


취미는 뜨개질, 탁구, 애완동물 기르기.


특기는 가사전반.


총체적으로 봤을 때 인기를 얻을 수밖에 없는 스펙이다. 아이돌이 아니라 보통의 학생이었어도 팬클럽을 이끌고 다녔을 것이다.


자기 입으로 ‘본인은 완벽하다구.’라고 말하는 것이 전혀 과언으로 들리지 않는다.


그 정도로 히비키는 매력적인 아이이다.


그래, ‘아이’.


나는 히비키를 바라보았다.


“?”


내가 말없이 바라보자 히비키는 눈을 깜빡이며 그 시선을 받아준다.


그러나 내가 계속해서 바라보자 눈이 불안하게 떨리더니 곤란하다는 듯이 시선을 이리저리 뿌린다. 그러다가 고개를 돌린다.


그래도 내가 계속해서 바라보면 히비키는 곁눈질로 내 시선을 받는다.


이내 히비키는 못 참고 다시 고개를 내 쪽으로 돌리며 말한다.


“뭐, 뭐야? 프로듀서.”


히비키의 얼굴을 붉게 변해있었다.


“미안. 잠이 덜 깨서. 잠시 멍해 있었어.”


나는 내 말을 증명해보이려고 크게 하품을 했다.


다시 말하지만 히비키는 귀엽다. 얼굴도 그렇고 방금 전의 행동을 봐도 그렇다.


반면에 그 귀여움과 작은 키와는 대조적으로 몸매는 무척이나 성숙하다. 그 몸매가 히비키의 약간 어두운 편인 피부와 조합되면 그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성적매력을 자아낸다.


히비키는 귀여우면서도 섹시하다.


그러나 이토록 매력적인 히비키이지만 히비키를 보고 있더라도 가슴이 두근거리거나 막막해지지는 않는다.


가족이 아무리 멋있고, 예쁘더라도 이성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과 같다.


히비키는 아무리 보더라도 동생을 바라보는 기분이랄까.


“그나저나 원래라면 지금 현장에 있어야하는 거 아니야?”


요즘 인기가 절정에 달한 아이돌 중 한 명이다. 한 낮의 피크 타임에 이렇게 느긋하게 있을 시간은 없다.


“땡땡이 친 거야?”


“우걋! 아냐! 본인을 뭐로 보는 거야!”


히비키는 뭐랄까……왠지 ‘괴롭혀 주세여.’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고 할까. 하면 안 된다는 것을 머리로 알고 있으면서 나도 모르게 스스럼없이 짓궂게 대해버린다.


“드라마 촬영 중이었는데 감독이 갑자기 ‘헛! 그 분이 오셨다! 전부 동작 그만! 스토리를 변경한다! 대본이 나올 때까지 촬영은 연기한다!’라고 해서 오늘은 하루 종일 오프라구.”


다른 사람을 떠올릴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한 성대모사였다. 감독의 특징을 무척이나 잘 담고 있었다.


나는 손을 뻗어 히비키의 머리에 손을 얹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고생이 많네. 감독이 제멋대로라.”


내가 머리에 손을 얹자 히비키는 몸을 조금 웅크렸다. 그러나 싫어하는 기색은 전혀 없었다.


“그런데 프로듀서도 원래라면 여기 있으면 안 되는 거 아냐? 아, 혹시 땡땡이?”


짓궂은 미소로 장난스럽게 말하는 히비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히비키가 보고 싶어서 땡땡이 쳤어.”


만화였다면 펑하고 히비키 머리위로 수증기 덩어리가 올라왔을 것이다.


히비키의 머리에 얹은 손바닥이 순식간에 뜨끈뜨끈해졌다.


조금만 생각하면 농담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을 텐데 말이다.


히비키는 붉어진 얼굴로 성을 냈다.


“우, 우걋! 무, 무무무슨 소릴 하는 거야 프로듀서!


부끄러워하면서 버둥거리는 히비키.


히비키의 반응에 나는 웃었다.


응, 역시 귀엽다.


하지만 역시나 연인이 되고 싶다거나 그런 감정은 전혀 들지 않는다.


나와 히비키는 이런저런 농담과 장난을 주고받았다.




CHANGIN' MY WORLD!!

변해가는 세계에서 빛나라

CHANGIN' MY WORLD!!

나의 세계를 나만의 것으로 CHANGE!!

 

휴대폰이 울렸다.


나는 휴대폰을 집어 들고 울리는 휴대폰을 껐다. 자기 전에 맞춘 알람이 울린 거였다.


“이제 일하러 가야겠다.”


“벌써?”


“땡땡이 친 만큼은 일 해야 하잖아.”


“우우……알겠어.”


마음 같아서는 계속 놀아주고 싶지만 내가 일이 있는 이상 불가능하다.


벗어서 의자에 걸쳐 둔 정장외투를 입으면서 슬쩍 히비키를 바라보았다.


히비키는 버림 받은 강아지 마냥 의기소침해 진 채 날 바라보고 있었다.


끄응, 텐션이 이렇게 낮은 건 좋지 않은데. 비록 오늘 하루 종일 오프지만 이런 텐션은 내일까지 영향을 미친다.


어떡하면 좋을까?


……아, 맞다.


“그러고 보니 지난번에 내가 소원 들어 준다고 한 거 있었지? 그거 생각은 해봤어?”


히비키는 내 말이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은 표정을 지었다. 내가 리츠코에게 프로듀싱을 맡겼다고 통보했을 때 사과의 의미로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했던 일 자체를 잊었던 것이리라.


그러나 곧 내가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했던 적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낸 듯 ‘아’하고 입을 벌린다.


히비키는 머리를 부여잡고 고민에 빠졌다.


근근히 “음, 아냐. 이건 너무 소박해.”, “그, 그건 아, 안된다구!”, “흐아아아.” 같은 소리를 내서 나에게 불안감을 심어준다.


어쨌든 의기소침해 있는 것보다 저렇게 고민하고 있는 게 여러모로 낫다.


나는 잠을 자느라 눌린 머리를 대충 손보고 난 후 말했다.


“나중에 결정하면 나한테 문자 보내줘.”


“보, 본인 집에 와줘!”


히비키는 다급하게 외쳤다.


“히비키 집에?”


내가 되묻자 히비키는 다시 얼굴을 붉혔다.


“본인 최근에 일 열심히 했다구! 오프인 날에도 레슨 받고, 아이들 밥도 챙겨주느라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구! 그리고, 그리고 프로듀서 최근에 바빠서 밥도 제대로 못 챙겨 먹는 것 같고! 그리고, 그리고……”


히비키는 횡설수설했다.


끈기 있게 들어주고 나서 나는 히비키가 한 말을 한마디로 요약했다.


‘우리 집에 와서 놀아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알겠어.”


“괜찮은거야?”


“딱히 문제 될 건 없지. 내가 했던 말도 있고, 그리 어려운 것은 아니니까. 그래도 하루 종일 있는 건 힘들다? 종일 있으려면 히비키 오프랑 내 휴일이 겹쳐야하는 데 그거 맞추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니까.”


“그, 그럼 본인 집에서 자고 가!”


오랜만에 만나서 그런가? 오늘따라 어리광이 심하네.


아니다. 생각해보면 이렇게 변한 것도 나 때문일지도.


다른 아이돌들을 관리한다고 자신을 다른 프로듀서에게 임시로나마 프로듀싱을 맡긴 것 때문에 ‘나는 쓸모없는 아이인가?’라고 자책할 수도 있으니까.


다시 말하지만 히비키는 활기차고 강한척하지만 실상은 섬세하면서도 외로움을 잘 타는 성격이니까.


히비키는 불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스스로가 너무 이상한 소원을 부탁한 건 아닌가 의심하고 있는 표정이었다.


나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쯤이야.”


“정말? 정말로?”


“당분간은 일이 많아서 필수적으로 야근을 해야 할 판이라 안 되겠지만 나중에 조금 숨통이 트이면 일정 보고 난 다음에 정확하게 약속 잡자.”


“정말 괜찮은 거지?”


소파에 앉아 날 올려다보는 히비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괜찮으니까 걱정마.”


히비키는 안심한 표정으로 헤헤 웃었다.


그 모습을 본 나는 나도 모르게 내뱉었다.


“그러니까 나 없다고 외로워서 울면 안 돼?”


오랜만에 히비키를 봐서 다른 때보다 더 짓궂게 구는 것 같다.


“우갸아아아앗! 안 울어!”


다행스럽게 히비키는 기운을 차린 것 같다.


나는 성을 내는 히비키에게서 손을 때고 잽싸게 사무실을 나서서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빌딩 밖으로 뛰쳐나오자 이제는 많이 따뜻해진 공기와 햇살이 나를 반겨준다.


“자, 힘내자!”


오늘 하루도 힘낼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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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 웹에 올렸던 건 여기까지입니다.

 

이후부터는 웹에 올렸던 적이 없는 것들입니다.

 

대신 연재속도와 분량은 극악이지만요...(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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