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카테고리.

  1. 전체목록

  2. 그림

  3. 미디어



치하야에게 키스하고 말았다. -2-

댓글: 3 / 조회: 1857 / 추천: 3


관련링크


본문 - 10-11, 2015 01:58에 작성됨.

담배를 피었다면 대략 두개피를 피었을 정도의 시간이 흐른 후. 나는 결정을 내렸다.


한심하고, 비겁하고, 더럽지만 없었던 일로 하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


지금 정황을 보니 내가 치하야에게 입을 맞춘 것을 알고 있는 것은 오직 나 밖에 없다. 나만 입 다물고 무시하면 그 사실은 없었던 거나 마찬가지가 된다. 치하야가 스캔들에 휩싸일 염려도 없고, 치하야가 상처를 받을 일도 없다. 그리고 나에게도 아무런 피해가 오지 않는다.


정말로 쓰레기가 할 만한 발상이지만 이 이상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


냉정해지자. 나만 모른척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나만 득을 봤다. 그렇게 생각하자. 양심의 가책 따위는 잊어버리자.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만 않게 하면 된다.


그래. 그러면 된다.


“좋아.”


더 이상의 고민은 없다.


나는 촬영장소를 향했다.


사전에 조사했기에 눈에 익은 풍경을 사이를 걷다보면 조금씩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약간 방향이 어긋나 있었기에 수정한다. 그리고 계속 걸어가면 드디어 촬영 장소에 도착.


그리고 그곳에 도착했을 때.


방금 전에 했던 결심이 순식간에 무너지고 말았다.



걸어가자 끝없는 길을

노래하자 하늘을 넘어서

마음이 전해지도록

앞을 바라보겠다고 약속하자



치하야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사진사가 사진을 찍기 위해서 불러달라고 요청한 것이겠지. 아니 단지 시늉만 해달라고 했을지도 모른다. 어찌되었건 치하야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눈물을 닦고서

걸어가자 결심한 길을

노래하며

이 기도가 울려퍼지도록

 

무척이나 행복한 표정으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노래를 부르는 것 그 자체만으로 행복하다는 듯이.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고, 온몸에서는 기쁨이 넘쳐흘렀다.


사진은 치하야의 목소리를 담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치하야의 행복에 찬 모습을, 그 아름다운 모습은 고스란히 담아낼 수 있을 것이다.

 

가만히 맹세해 꿈을 이루겠다고

너와 동료들에게

약속할게

LaLaLa……

 

이 소녀에게 입을 맞춘 걸 잊으라고?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면 된다고?


그게 가능할리 없다.


이토록 사랑스러운데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겠는가.


미성년자와 성인, 아이돌과 프로듀서의 관계를 잊게 만들 정도로 사랑스러운데.


보고만 있어도 사무치도록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만드는데.


지금 당장 달려가 껴안고 싶다.


그 입에 다시 입을 맞추고 싶다.


그리고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싶다.


머리는 그러면 안 된다고 외치지만 감정은 지금 당장 그러라고 종용한다.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다.


누가 볼세라 얼른 한손으로 얼굴을 주물러 식힌다.


안 된다.


이 이상 여기 있다가는 버티질 못하게 된다.


여기를 떠나자.


당분간은 이 감정이 정리될 때까지 치하야와 마주치는 것을 피하자.


그러자. 아니, 그래야만 한다. 나를 위해서라도, 치하야를 위해서라도.


휴대폰은 차에 있겠지. 내가 다시 차에 돌아올 것을 생각해서 두고 왔겠지. 혹시라도 치하야가 가지고 있으면 곤란하다. 지금 이 상태로 치하야와 마주쳤다간 돌이킬 수 없는 짓을 해버릴 것 같다. 부디 차에 있기를.


불안함을 가득 안고 허둥지둥 차로 돌아갔다.


다행스럽게도 휴대폰은 차에 있었다.


“……나, 정말, 중증이구나.”


고이 개어진 외투 위에.


이 외투를 치하야가 덮고 잤다는 것을 상상하니 심장이 뛴다. 그리고 잠에서 깬 치하야가 그 가느다란 손가락을 놀려 외투를 개었을 것을 생각하니 다시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다.


중학생도 아니고, 이런 것에 얼굴을 붉히다니. 기분 나쁜데다가 한심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지금은 자괴감으로 몸부림 칠 때가 아니다.


휴대폰으로 전화를 건다. 몇 번의 신호음이 이어지다가 연결된다.


“아, 리츠코? 지금 시간 되지? 응. 된다고? 그러면……”

 


“어? 허……프로듀서!”


이 녀석, 또 사람들 앞에서 허니라고 부르려고 했네.


“어쩐 일인거야? 리츠코는?”


“리츠코 씨.”


“리츠코.”


“……리츠코한테 또 혼난다?”


“아핫! 걱정해주는 거야? 괜찮은거야. 안 들키면 안 혼나는 거야.”


혼 날 일은 하지 않는다는 선택지는 없는 건가?


“그래서 왜 프로듀서가 온 거야? 원래 리츠코가 오기로 한 걸로 미키는 알고 있는거야.”


‘치하야랑 계속 같이 있으면 사고를 칠 것 같아서 리츠코에게 치하야를 맡기고 여기로 왔습니다.’라고 말했다가는 엄청난 일이 일어나겠지?


“방송국에서 협의를 할 게 조금 있어서. 겸사겸사 온 거지.”


미키는 볼을 부풀렸다.


“뿌우! 뿌우! 이럴 땐 미키를 보러 온 김에 겸사겸사 협의를 하러 왔다고 하는 거야!”


“하하. 그걸 다른 사람 앞에서 어떻게 이야기해.”


나도 미키처럼 이렇게 솔직해 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니면 미키를 대할 때처럼 치하야를 대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


아니, 그래도 무리겠지.


미키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자, 이번 일정은 토크쇼지? 대본은 읽어봤고?”


“아핫! 미키인거야. 그 정도는 누워서 주먹밥 먹는 정도로 가뿐한거야.”


“그러다가 탈난다?”


미키와의 실없는 농담과 흠 잡힐 데 없는 가벼운 스킨십.


그러나 이것도 외부의 눈이 없는 곳에서는 좀 더 진하게 변한다.


호칭부터가 ‘프로듀서’에서 ‘허니’로. 단순한 친근감의 표시의 스킨십이 애정행각으로 보이기에 충분한 스킨십으로. 곤란하냐고 묻는다면 그 답은 긍정. 그러나 싫다고 묻는다면 그 답은 부정. 미키처럼 아름다운 소녀의 호의를 싫어하는 남자는 없을 것이다.


만약에……만에 하나지만……내가 미키를 이성으로 좋아하게 되었다면. 지금 안고 있는 마음의 짐은 이보다 훨씬 가벼웠을 거다.


미키와의 관계를 가볍게 여긴다는 말은 아니다.


미키가 하는 행동은 겉으로 보기에는 가볍기 그지없다. 그러나 내가 보아 온 바로는 미키의 행동은 진지하다. 미키가 나를 향해 하는 행동의 하나하나에 미키의 진심이 담겨있다. 아직은 미키가 어리기에 연상의 이성에 대한 동경을 애정으로 착각하고 하는 행동일 확률이 높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미키에게 지금 치하야에게 품는 만큼의 연정을 품게 되었다면 미키에게 고백을 했을 것이다.


미성년자와 성인의 관계나 아이돌과 프로듀서의 관계를 생각한다면 이미 도리를 벗어난 것이겠지만 지금처럼 나의 일방적이고 음습한 사랑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치하야는 어떤가.


치하야가 나에게 호의를 품고 있는가? 그렇다. 그러나 그것은 동료로서, 아이돌이 프로듀서에게 품고 있는 그런 신뢰일 뿐이다. 이 호의를 연애감정이라고 확대해석하기는 힘들다.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것은 부정하지 않겠지만 아닐 확률이 훨씬 더 높다.


동료들의 도움으로 주위에 마음을 열게 된 치하야지만 그것으로 인해 연애에 대해서도 개방적으로 됐다고 말하기 힘들 것이다. 솔직하게 말해서 치하야가 연애에 흥미를 가지고 있는지조차 모르겠다. 아니, 계속 말하는 거지만 치하야가 연애에 흥미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나에게 연애감정을 품을 확률은 지극히 낮겠지.


“호시이 씨! 녹화시작 15분 전입니다! 준비해주세요!”


“미키 이제 가봐야하는거야.”


“그래, 힘내.”


“아핫! 미키는 언제나 만전의 상태인거야. 그리고 프로듀서.”


미키는 손짓으로 나에게 귀를 내보이라고 했다. 나는 무릎을 굽혀 미키의 말대로 했다. 그러자 미키는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이 접근하고는 나에게 귓속말을 했다.


“그렇게 어두운 얼굴로 있으면 미키 걱정하게 되는거야. 무슨 일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허니도 힘내는거야.”


내가 미키의 말을 이해하기도 전에 미키는 아핫하고 웃고는 촬영스태프들을 향해 달려갔다.


“…….”


잠시 멍하니 있다가 뒤늦게 미키의 말을 이해한다. 한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한참이나 어린 소녀에게 위로를 받다니. 정말 글러먹은 어른이다.


“푸핫!”


그래도 미키 덕분에 많이 기분이 나아졌다. 절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미키는 좋은 아이다.


예쁘고, 상냥하면서 밝다.


스스로는 반짝반짝하고 싶다고 말하고 있지만 미키는 이미 반짝반짝하고 있다. 그 존재만으로도 주위를 환하게 밝힌다. 절로 응원하고 싶어지게 만든다. 아이돌을 명확하게 정의하기는 힘들겠지만 미키가 아이돌이라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언젠가 미키가 아이돌을 그만두거나 혹은 내가 프로듀서를 그만두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평생을 미키의 프로듀서였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길 것이고, 평생을 미키의 팬으로 남을 것이다.


“하아.”


한참을 웃고 난 후에 한숨을 내쉬었다.


힘내자.


아이돌에게 격려 받고도 계속 의기소침해 하는 한심한 프로듀서로 있어선 안 되지. 나의 문제는 나의 것이지 아이돌의 것이 아니잖아.


일하자. 치하야에 대한 것은 떠올리지 못 할 정도로 바쁘게.

 


일말의 휴식도 없는 지옥 같은 일정을 끝내고 사무실에 돌아오니 벌써 9시다.


흐느적거리는 다리를 놀려 간신히 사무실의 문을 열고 들어간다.


“다녀왔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프로듀서 씨.”


사무실에 들어가니 나 때문에 지금까지 남아있었던 코토리 씨가 반겨줬다.


“수고하셨습니다. 오토나시 씨. 그리고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억지를 부렸죠?”


“괜찮아요. 어차피 제가 해야 할 일들이었는데요. 덕분에 당분간은 널널하게 일할 수 있게 되었네요.”


“그래도 면목 없네요.”


“후후, 그러시면 다음에 술이나 사주세요.”


동료가 혼자 폭주해서 자신의 일거리를 늘리면 보통은 인상을 찌푸리기 마련이건만 코토리 씨에게는 그런 불편한 기색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어째서 이런 사람이 지금까지 결혼을 못 한 걸까? 참으로 알 수 없는 노릇이다.


털썩, 쓰러지듯이 소파에 앉는다. 그리고 목을 조이던 넥타이를 푼다.


“후우, 요즘 일을 너무 많이 받았네요. 일이 들어온다고 아이돌들의 상태를 안보고 마구잡이로 받아들이다니. 프로듀서 실격이네요.”


“잘나가고 있다는 것의 반증이잖아요. 일이 없어서 사무실에서 노는 것보다는 훨씬 낫잖아요.”


“그래도 다음 스케쥴을 짤 때에는 좀 더 여유있게 짜야겠네요. 이대로 가다간 분명히 누군가가 과로로 쓰러지고 말죠.”


“제가 보기에는 그 1순위가 프로듀서 씨 같은데요?”


후후, 웃으며 코토리 씨는 급탕실로 들어갔다.


소파에 멍하니 앉아 물 끓는 소리, 달그락 거리는 소리를 듣는다.


잠시 후 코토리 씨는 두 개의 머그컵을 들고 급탕실에서 나왔다.


“오늘 종일 수고하신 프로듀서 씨에게 선물입니다.”


코토리 씨가 나에게 머그컵을 건네준다. 향을 맡아보니 코코아다.


“피곤한데에는 역시 단 거죠.”


“감사합니다.”


감사를 표하고 코코아를 홀짝인다. 따뜻한 기운이 위에서부터 온몸으로 퍼져나간다. 그 따뜻함이 피곤함과 만나 노곤함으로 변한다. 한 순간이라도 정신을 놓다가는 이대로 잠이 들 것 같다.


코토리 씨는 내 맞은편 소파에 앉으며 물었다.


“이제 퇴근인가요?”


“저는 리츠코랑 의논할 게 있어서 남아있으려고요.”


“날도 늦었는데 오늘은 이만 퇴근하는 게 낫지 않나요?”


“쇠뿔도 단 김에 빼라잖아요. 이왕 이렇게 된 거 처리할 수 있는 건 전부 처리하려고요.”


“그런가요? 그러면 리츠코 씨가 올 때까지 이야기나 나눌까요? 최근에 바빠서 업무 외의 이야기는 못했잖아요.”


분명 자신도 피곤할 텐데, 내가 사무실에 홀로 남는 것을 걱정해서 이야기를 나누자고 하는 코토리 씨.


다시 말하지만 정말 이상하다. 어째서 이런 사람이 지금까지 결혼을 못 한 걸까?




코토리 씨와 한창 이야기를 나누는 중. 누군가가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지금 시간에 사무실에 올 사람은 한 명 밖에 안 남았다.


“다녀왔습니다.”


“수고했어, 리츠코.”


“수고하셨습니다, 리츠코 씨.”


리츠코가 들어오자 코토리 씨는 소파에서 일어나 급탕실로 들어갔다. 나 때와 마찬가지로 코코아를 타려는 거겠지.


“수고하셨습니다. 코토리 씨, 프로듀서 씨.”


리츠코는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리며 방금 전까지 코토리 씨가 앉아있던 자리에 앉았다.


“아, 정말 피곤하네요.”


“인기 있다는 증거잖아.”


코토리 씨에게 들었던 말을 그대로 내뱉는다. 리츠코는 쓰게 웃었다.


“그러네요. 인기가 없어서 일이 없는 사람들이 들으면 배부른 소리라고 욕하겠죠. 우리들도 1년 전만하더라도 일이 많았으면 좋겠다고 노래를 불렀었죠.”


“지금 생각하면 꿈만 같네, 그때가”


일이 없어서 12명이나 되는 아이돌이 언제나 사무실에서 왁자지껄 놀던 때. 일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그러는 수밖에 없었지만 오히려 그 덕분에 성공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아이돌들이 서로의 가장 친한 친구가 되어 서로를 이끌어왔다. 라이벌로서 서로를 자극하고, 친구로서 서로를 지탱해줬다. 재능도 있었다. 성공을 못하는 것이 더 이상할 것이다.


“그래서 조금 쓸쓸하기도 하네요. 자, 리츠코, 코코아.”


급탕실에서 나온 코토리 씨가 우리의 말을 이어받으며 리츠코에게 코코아를 건냈다.


“감사합니다.”


코토리 씨는 소파 등받이에 두 팔을 얹었다.


“옛날에는 모두 모여서 재미있게 잘 지냈었잖아요. 그런데 최근에는 사무실에 들리지 못하는 아이들도 있잖아요. 사무실에 들르지 않고 곧장 현장으로 가고 그 일이 끝나면 다시 곧장 다른 현장으로, 그리고 시간이 남으면 레슨을 받으러 가고……그래서 조금이지만 지금보다 덜 인기 있어도 좋겠다 라고 가끔은 생각해요.”


“큰일 날 소리네요.”


“역시 큰일 날 소리겠죠.”


코토리 씨는 후후 웃었다.


사실 아이돌들의 성공을 가장 기뻐하는 사람 중에 한 명이면서. 내가 지난번에 다쳤을 때에 했던 단체 콘서트가 성공하자 코토리 씨가 눈물을 흘리던 것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러나 코토리 씨의 마음도 이해한다. 아이돌도 아니고 나이차가 있기는 하지만 코토리 씨도 아이돌들의 친한 친구다. 일이 없던 옛날에는 코토리 씨가 아이돌들과 자주 어울려 놀았었다. 그러던 친구들의 얼굴을 바빠서 못 본다면 기쁘면서도 쓸쓸하기도 할 것이다.


“그러면 저는 이만 퇴근할게요. 너무 오랫동안 일하지는 마세요. 몸 상하니까요.”


“알겠습니다. 오토나시 씨도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그리고 오늘 고마웠습니다.”


“고마워요. 아, 그리고 아까 한 약속 잊지마세요. 기대할 테니까요.”


약속? ……아, 술 사주겠다고 한 약속.


“기대하세요. 안주가 싸고 맛있는 집을 소개시켜드릴테니까요.”


“기대할게요.”


마지막으로 가슴 두근거리게 하는 눈웃음을 남기고 코토리 씨는 퇴근했다.


요즘 남자들이 많아서 결혼 못해서 난리라고 하는데. 어째서 예쁘고, 성격도 좋은 코토리 씨가 어째서 지금까지 결혼을 못한 걸까? 정말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뭐에 대해서 의논하고 싶으신 건데요?”


코코아를 홀짝이며 리츠코가 물었다.


“응, 아, 뭐, 의논하고 싶다고 하기보다는……부탁이라고 해야 할까.”


리츠코는 만화라면 머리 위에 물음표가 떠올랐을 표정을 지었다.


“뭔데요? 수락하는 건 내용에 따라서 달라지지만 들어주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으니 말해보세요.”


들어주는 건 어렵지 않겠지만 말하는 건 쉽지 않다고. 그래도 결국엔 말하긴 해야겠지만.


난 합장을 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리츠코가 최근에 바쁜건 알고 있는데……미안하지만 아이돌 두 명 정도만 맡아줄 수 있을까? 이번 달의 일정이 끝날 때까지만.”


“아까 갑작스럽게 치하야의 촬영을 대신 봐달라고 부탁하셨을 때에 대충 예상은 했는데……그렇게 바쁘신건가요?”


치하야의 이름이 나와서 잠시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이내 진정한다. 나만 입 다물고, 나만 진정하면 윤리적인 것 외에는 문제 될 게 없다. 나는 한숨을 빙자한 심호흡을 했다.


“바쁘지. 인기 아이돌 9명이니까. 더군다나 이번 달은 내가 너무 폭주해서 일을 너무 많이 받아버렸고…….”


거짓말이다. 바쁜 건 사실이지만 내가 조금 무리하면 충분히 소화를 할 수 있는 양이다. 아무리 일거리가 늘었다고 하더라도 내 능력은 잘 파악하고 있다. 내가 거짓말을 하는 이유는 한 가지뿐이다.


나의 속셈도 모르고 리츠코는 고개를 끄덕였다.


“음, 어느 정도 여유가 있으니 2명 정도는 괜찮겠네요. 물론 스케쥴이 겹치는 게 있으면 전 류구 쪽을 우선시할거에요?”


말은 이렇게 하지만 둘 다 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지. 리츠코는 성실하니까.


“고마워, 리츠코.”


난 웃었다.


난 쓰레기다.


“그래서 누구를 맡으면 되는 건데요?


“히비키랑.”


다음 말을 내뱉기 전에 살짝 숨을 들이마셨다.


지금 상태로 온전히 그 말을 내뱉을 거라는 확신이 안 섰기 때문이다.


단지 말만하면 되는 거다. 동요할 이유가 없다. 지금까지 수 백, 수 천 번을 했던 말이다. 주저하지마라. 오히려 주저하며 이상한 취급을 받는다. 정신차리자. 여기까지 와서 양심 있는 척해도 소용없다. 단지 한 마디만 하면 된다.


나는 강제로 가슴 속에서 그 말을 짜냈다.


“치하야.”

 


다행스럽게도 리츠코는 왜 이 둘을 골랐는지 묻지는 않았다.


혹여나 리츠코가 왜 둘을 골랐는지 이유를 물어볼 때를 대비해서 미리 변명거리를 준비해뒀으나 헛수고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헛고생을 한 것에 대해서 허무감이 들기보다는 그 변명거리를 쓰지 않게 되었다는 안도감이 더 크다.


그래도 아직 한 가지 고비가 더 남아있었다.


두 아이돌에게 당분간은 리츠코가 프로듀싱 한다는 것을 전달해야한다. 도의상으로나 업무상으로나 이것은 내가 직접해야한다. 결국에는 치하야와 전화로나마 접촉하게 된다는 뜻이다. 무슨 말을 해야 할 지는 분명하게 떠오르지만 그것을 제대로 말할 수 있을지는 의심이 간다.


그러나 그건 그때 생각하도록 하고 먼저 할 수 있는 것을 하자.


전화연결음이 5번 정도 반복되다가 연결된다.


“하이사이~! 가나하 히비키입니다.”


“아, 히비키, 나야 프로듀서.”


“프로듀서? 무슨 일이야 이 시간에?”


“너한테 전해줄 게 있어서 말이야.”


“남자가 으슥한 시간에 여자에게 전화라니. 혹시!?”


“네네, 프로듀서가 이 시간에 담당 아이돌에게 전화한 거면 뻔 하죠.”


“우갸! 재미없어! 적당히 어울려 달라고!”


미안, 지금 상태로 거기에 맞춰서 농담을 했다가는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일어날 것 같았어.


물론 말로 전하지는 않는다. 그냥 웃어줬다.


“그래서 무슨 일이야?”


“응, 당분간은 리츠코가 내 대신 프로듀싱 해줄 거야. 인수인계는 끝났으니까 이번 달 동안은 날 찾을 일이 있으면 리츠코한테 전화해줘.”


“……응?”


“그러니까, 당분간은 리츠코가 나 대신 프로듀……”


“우갸아아아아아아아앗!”


휴대폰 너머로 괴성이 울려 퍼졌다. 귀가 지릿지릿하다.


“왜!? 왜 프로듀서 대신 리츠코가 하는 건데?”


담당프로듀서가 바뀌면 자신에 대한 이해가 떨어질 수도 있으니 싫어할 거라고 생각하기는 했다. 그래도 반응이 과하다. 그렇게 리츠코가 프로듀싱 해주는 게 싫은 건가. 조금 빡빡하게 조이는 경향이 있기는 하지만 리츠코도 훌륭한 프로듀서인데. 혹시 최근에 리츠코랑 안 좋은 일이 있었나? 리츠코는 아무런 말도 안했는데?


“미안. 혹시 리츠코랑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어?”


“그건 아니지만……그래도 왜 프로듀서 대신에 리츠코가 하는 건데?”


“미안. 내가 이번 달 일정을 너무 빡빡하게 잡아서 내가 일을 전부 소화하기 힘들 것 같아서 리츠코 한테 부탁했어.”


“그래도! 왜 하필 본인인데! 본인 요즘 하는 프로그램도 본궤도에 올랐고, 출현하고 있는 드라마도 잘 나가고 있잖아! 라이브도 있고 말이야!”


……아까 리츠코에게 하려고 한 변명을 지금 써야겠다.


“프로그램이랑 드라마 둘 다 히비키의 자리가 확고하게 잡혔잖아. 그래서 이제는 내가 가야 할 일도 거의 없고. 라이브 같은 경우도 이미 협의를 다 해놓은 상태잖아. 무슨 일이 생긴다고 하더라도 리츠코라면 충분히 처리 할 수 있을 테고.”


“우우…….”


안 보이지만 히비키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생생하게 떠오른다. 죄책감이 마구 솟아오른다.


“본인에게 손 갈게 별로 없다면 그냥 프로듀서가 계속해도 되잖아.”


확실히 그렇기는 하다. 하지만 리츠코에게 부탁을 했을 때, 치하야만 부탁하다가 의심을 했을 수도 있었으니까. 말하자면 히비키는 내 진짜 속셈을 은폐하기 위해서 치하야와 함께 선택 한 거다.


……나 진짜 갈 때까지 갔구나. 겉으로는 아이돌들을 위해서 행동하는 척하면서 이럴 때에는 아이돌을 이용하다니 말이다. 나라는 인간은 이런 인간이었구나.


“그래도 혹시라는 게 있잖아.”


“우우…….”


“정말 미안해. 네 의견은 안 물어보고 이렇게 일방적으로 통보하게 돼서. 그래도 다른 아이돌들은 요즘 한창 협의를 하는 게 많아서…….”


“……알겠어.”


히비키가 수락하자 죄책감을 품은 와중에도 안도하는 것을 보니 나는 쓰레기 중의 쓰레기 인가보다.


왕창 풀이 죽은 목소리로 히비키가 말했다.


“프로듀서가 바쁜 건 본인도 알고 있어. 본인이 억지를 부리면 프로듀서가 곤란할 테니까.”


죄책감이 가중된다. 히비키는 날 위해주는데 나라는 인간은 그런 히비키를 이용한다.


“고마워, 히비키. 이걸로 보상이 될 거라고 생각은 안하지만 그래도 나중에 시간이 되면 소원하나 들어줄게.”


“……진짜?”


목소리가 살짝 밝아졌다.


“어떤 거라도 들어주는 거야?”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내라면……너무 무리한 소원은 빌지 말아줘?”


장난스럽게 마지막을 덧붙인다.


“흥이다! 다시는 이런 일을 할 생각도 못하게 엄청 벗겨먹어버릴거야!”


다행스럽게도 장난스럽게 덧붙인 말을 히비키도 받아주었다.


히비키가 단순해서 그렇다고? 나랑 다투자. 히비키는 천사일뿐이다.


그 후 이런 저런 잡담을 나눈 후 히비키와의 통화를 끝냈다.


다행히 히비키와는 큰 문제없이 일을 끝낼 수 있었다. 그러나 가장 큰 고비가 남아있었다.


치하야와 통화를 해야 한다.


치하야의 성격을 생각하면 히비키 만큼이나 소란스러울 거라고 생각은 안하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지.


“…….”


일단은 치하야에게는 퇴근하고나서 전화를 할까.

 

================================

 

내일이면 비축분 + 새로 쓴 분량을 다 올리겠군요.

3 여길 눌러 추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