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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키호「베개가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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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10-09, 2015 17:23에 작성됨.

사무소에 들어오니 미키가 자고 있었다.

 

알아차리는 것은 손쉬웠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소파의 등받이 너머로 풍성한 금발이 엿보였으니까. 또구나, 그렇게 생각하며 조심조심 소파 앞쪽으로 돌아가자 아니나다를까 낯익은 소녀가 태평한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미, 미키…?」

이름을 불러 보아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 아이, 호시이 미키의 수면벽에는 특출난 데가 있었다. 그곳이 어디든지 내킨다면 잠든다. 사무소에서도, 차 안에서도, 심지어 스튜디오에서도. 게다가 한 번 잠들면 좀처럼 깨어나지도 않는다. 프로듀서나 관게자 분들을 꽤나 애먹이곤 하는 점이지만, 그럼에도 어떤 일이든지 능란하게 해내는 미키이기에 그다지 질책받는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이유가 그것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자고 있는 미키를 보고 있으면 자연스레 알게 되는, 약간은 불합리한 이유다.
굉장히, 에쁜 것이다. 깨울 마음이 생기지 않을 정도로.

「… 하우」

보잘것없는 나와는 다르구나. 살짝 한숨을 쉬며, 누워 있는 미키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여기저기 흩어진 금발과 대비되는 가지런히 감긴 두 눈, 길다란 속눈썹, 간혹 입맛을 다시듯 오물거리는 입. 희고 매끈한 피부는 잠들어 있어도 여전히 넋을 잃을 정도로 매혹적이다. 조금, 부럽다고 여기고 만다. 한동안 뚫어지게 응시하다 괜시리 부끄러워져 고개를 도리도리 내저었다. 난 무슨 생각을 하는 거람.
그저 미키를 보려고 온 것은 아니었다. 사실, 정확히 말하자면 미키의 평화를 깨야 하는 입장이었다. 만약 미키가 자고 있으면 깨워 둬 달라고 프로듀서로부터 부탁받았으니까. 마치 인형처럼 자고 있는 미키의 잠을 방해해야 한다는 사실에 조금의 죄책감마저 느껴졌다. 그럴 필요는 없는, 거겠지만. 한 번 심호흡을 했다.

「저, 저기… 미키? 이제 일어나야 해, 미키」

얼굴 가까이에서 이름을 부르며 몸을 가볍게 흔들자, 예상 외로 미키는 금방 깨어났다. 감겨 있던 눈꺼풀이 느릿하게 열리고, 그 아래에 숨겨져 있던 녹색의 눈동자가 내게로 향했다.

「으음… 유키, 호…? …… 아후우」

상체를 일으킨 미키가 눈을 비비더니 작게 하품을 했다. 더없이 나른해 보이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아직 잠이 덜 깬 모양이니 시원한 음료라도 가져다 주는 편이 좋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냉장고 쪽으로 향하려는 찰나, 몸이 앞쪽으로 확 끌어당겨졌다. 저항할 겨를조차 없이 일어난 일이었다.

「햣…!?」

바보 같은 소리를 내며 무슨 영문인지 확인하려고 했지만 그럴 필요조차 없이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누군가 등 뒤로 팔을 두르고 날 끌어안은 채로 누워 버린 것이다. 누구인가 하면, 당연히 한 명밖에 없었다.

「앗, 저기, 미키… 안 돼. 이제 일어나야…」

「우~응… 더 자고 싶은… 거야…」

잠깐 깨어났던 것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미키는 도로 잠들고 말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안는 베개가 생겼다는 것이었다. 베개라고 해도, 나였지만.

「미, 미키이~…. 우우, 정말 안 되는데에…」

몸을 이리저리 비틀며 빠져나가려 해 보았지만 미키는 놓아줄 기미가 없었다. 매우 만족스럽다는 듯이 미소를 띄우고서 새근새근 규칙적인 숨소리를 낼 뿐이었다. 아무래도 여간해선 일어나지 않을 심산이다. 프로듀서도 그냥 '깨워 두라'는 정도로만 말씀하셨으니 그렇게까지 초조해 할 필요는 없겠지만, 그렇다 해도, 곤란하다.

「… 조금만, 이야? 미키」

어쩔 수 없이 건넨 말을 들었는지 어떤지도 알 수 없었지만, 어찌됐든 한동안은 이대로 있기로 했다. 미키가 적당한 시간에 깨어나 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누군가 찾아와서 도와줄지도 모른다. 조금은 강압적으로 깨워도 괜찮을 만한 상황인데도 되려 미키에게 방해가 될까 숨을 죽이고 있는 자신이 조금 초라해졌지만, 별 수 없는 일이었다. '하기와라 유키호'는 그런 선택지를 고를 수 있는 사람이 아닌 것이다.

「… 역시 글러먹었어요…」

혼잣말을 중얼거리다 무언가를 눈치챘다. 가슴께에 부드럽게 말랑거리는 감촉이 와 닿고 있다. 그 위치에 무엇이 있을까, 그 답을 떠올려내자 얼굴이 격하게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보나마나 우스울 정도로 붉어져 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아까부터 쇄골 부근에 따뜻하고 축축한 숨결이 전해지고 있는 것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소중한 것이라는 듯 꼬옥 끌어안고 있는 미키의 팔도, 부드럽고 좋은 냄새가 나는 몸도, 배시시 웃고 있는 입가도, 한 번 의식하기 시작하자 홍수처럼 머릿속에 밀려들기 시작했다. 나쁜 기분은 전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부끄러워.
미키와 이런 식으로 단둘이 있어 본 적은, 기억에 따르면 거의 없었다. 하물며 이렇게 가까이 몸을 밀착시키고서라니, 긴장하게 되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내가 이상한 것이 아니다. 아닐… 텐데.

… 그치만 역시 같은 여자끼리인데, 의식하는 내 쪽이 이상한 걸지도….

어쩐지 자신이 바보같이 느껴져 뺨을 붉힌 채로 미키에게 폭 안겨들었다. 따스하다. 누군가의 체온을 직접 전해받는, 굉장히 포근한 느낌. 방금 전까지 긴장하고 있었는데도 어느샌가 온몸이 노곤해졌다. 안 되는데. 내가 잠들어 버리면, 미키를 깨워 줄 사람이 없어지는걸.

「… 으음…」

자꾸만 내려앉으려 하는 눈꺼풀에 힘겹게 저항해 보았지만 그리 오래 가지는 못했다. 누군가를 껴안고 잔다는 건, 위험할 정도로 기분 좋은 일이었구나. 마지막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가물거리는 의식을 놓아버리고 말았다.

 

***

 


「미키 말야, 아끼는 베개가 하나 있어」

그런 말을, 들은 것 같았다. 누구의 목소리지. 이건, 음, 미키 목소리다. 아직 잠에서 헤어나오지 못해 몽롱한 상태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대해 단편적으로 추리했다.

「안고 자면 굉장히 포근해서, 미키가 정말 아끼는 베개야. 로케에 갈 때에도 가능하면 가지고 다니는 거야」

미키의 목소리는 나직하면서도 속삭임에 가까울 정도로 작다. 누구에게도 알려준 적 없는 소중한 비밀을 귀띔해 주는 어린아이 같은 말투다.

「그치만 말야, 유키호는 그 베개의… 그러니까… 음, 14배 정도 더 기분 좋은 거야」

베개와 비교당하는구나, 나. 이래서야 정말로 베개가 되어버린 것 같다. 그치만 미키가 그렇게나 기분 좋게 잘 수 있었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한 것 같기도 하다. 그나저나 미키, 어째서 14배 같은 애매모호한 숫자인 거야…?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훠~얼씬 더 기분 좋은 거야. 따뜻하고, 부드럽고, 말랑말랑하고… 그리고, 유키호니까」

기뻐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알 수 없는, 미묘하기 그지없는 이유가 미키답다면 미키다웠다.

「그러니까, 미키는…」

목소리가 조금 더 가까워졌다. 바로 귓가에 대고 말하고 있는 걸까. 아주 잠시간의 침묵이 흘렀다.

 

「… 유키호가 갖고 싶은걸」

 

목 뒤로 무언가가 둘러졌다. 귀에 머리카락 같은 것이 스친다. 머리를 끌어안긴 것이리라고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아무 데도… 가지 않는 거야, 유키호. 이대로」

기뻐, 미키. 그치만 그런 건 곤란하다고 생각해. 왜냐면.

「이대로, 미키의─」

 

미키의 목소리가 곧 들리지 않게 되었다. 모든 감각들이 멀어져 간다. 좀 더 자고 싶어. 그 외의 다른 생각은 전부 멈추고서, 깊고 편안한 곳으로 빠져들어 갔다.

 

***

 

「… 아」

눈이 뜨였다.

「우… 으응」

졸린 눈을 비비며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텅 빈 사무소의 모습은 온통 붉었다. 노을이 지고 있는 거겠지. 함께 잠들었을 터인 미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제대로 혼자서 일어날 수 있었던 모양이다. 결국, 늦게까지 자 버린 것은 나 혼자인 거구나.

「… 아, 이건」

테이블 위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다. 작은 접시 위에 놓은 찻잔이다. 김은 나지 않지만 손을 대어 보자 아직 온기가 남아 있었다. 나를 위해 타 준 것일까.

「미키… 이려나」

잠시 망설이다 컵에 입을 대고 한 모금을 흘려넘겼다. 입 안에 쌉쌀하면서도 향긋한 풍미가 감돈다.
… 응, 그치만.

「아직 서툴구나, 미키…」

아무래도 본인에게는 말할 수 없는, 조금 실례인 한 마디를 중얼거렸다.
미숙하게 우려진 녹차를 전부 마시고 나자 어느 정도 잠기운도 가신 것 같았다. 그럼 이제 돌아가야겠지. 소파에서 일어나려다가 무언가를 발견했다. 더없이 친숙한, 금색의 머리카락 한 올. 그것을 집어들자 흐릿한 무언가가 떠오를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무엇이었더라.

「… 꿈을 꿨던 걸까?」

약간은 미심쩍은 기분을 털어버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사무소를 나서기 전 돌아본 소파는 이젠 비어 있었다. 사소한 변덕으로, 미소와 함께 살짝 고개를 숙였다.

「고마워」

어느 날의 사무소의 따스한 기억에게.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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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지방에서 아이마스 SS를 쓰는 군인이 실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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