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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완성작 -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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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6-20, 2015 23:29에 작성됨.

손이 닿는 거리에 사람이 있다.
태어나서 지금껏, 그 사실에 감사해본 적이 없었다.


"우으…… P씨……"


잠결에 자신의 이름을 중얼거리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살살 쓰다듬었다.
보들보들하게 흘러내리는 머리칼.
아이돌은 아이돌이라는 걸까, 손에서 살살 흘러내리는 감촉에 마음이 놓임을 느낀다.


"이거 참, 아이돌이란 애가 이제 프로듀서도 아닌 내 방에 찾아오질 않나……"


살풍경할 정도로 아무것도 없는 방.
연식이 20년이 넘어가는 목조 아파트의 한 구석에, 나는 이전 내가 프로듀스했던 아이돌, 미즈노 미도리가 잠든 모습을 보고 있는 중이다.

어느덧 시각은 새벽 3시 30분.
나를 제외하면, 이 주변에 깨어 있는 것이라곤 길을 밝히는 가로등과 계절 모르고 우는 밤벌레들.
창 밖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들리는 풍경 소리에, 눈을 감고 바람을 느끼기로 했다.

불어오는 바람이 시원하다.
서서히 따뜻해진 바람이, 봄꽃 향기를 싣고 볼을 간지럽힌다.
아니, 간지럽힌다기보다는 건드린다고 해야 하나.

불현듯, 노크 소리가 들린다.
이 시간에 누굴까.


"P, 있어? 나야."
"전화도 아니고 문 넘어서 보이스피싱을 하는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이 시간에 그런 장난 참 잘도 치겠네. 얼른 열어줘."


문을 열자, 또 다른, 이전 프로듀스했던 아이돌인 쿠로카와 치아키가 문 앞에 서 있었다.


"뭐야, 미도리 안에 있어?"
"방금 전에 와서는 지쳐서 자고 있어."
"칫, 오는 날을 잘못 잡았나보네. 뭐 좋아, 들어가도 되겠지?"
"들어오는 거야 상관 없지. 근데 이 시간에 괜찮아?"
"SP라면 이 건물 주위에 깔아뒀으니까 상관 없어."


현관을 사이에 둔 대화.
치아키가 구두를 벗고 현관을 들어와, 그대로 날 지나쳐 방으로 들어갔다.


"밤바람이 좀 쌀쌀하네. 몸은 좀 괜찮아?"
"보는 대로. 아직 별다른 이상은 없어."
"그래? 다행이네. 키요라 씨… 저번에 왔었다며?"


야나기 키요라. CG프로덕션의 보건관련 스탭으로 스카웃된, 내가 입원했던 병원의 간호사.
지금은 아이돌 부문으로 아예 넘어갔다고 한다...만, 그 인연인지 정기적으로, 그리고 상태가 안 좋을 때마다 찾아와주고는 한다.

시커먼 방. 소파도 융단도 없는, 그녀의 방보다도 작을 이 집의 한켠에 걸터앉은 치아키.
자연스럽게 벽장을 열어 방석을 꺼냈다.


"어머, 고마워."
"저번에 너가 왔을 때 너무 불편해 보이더라고."
"그래서 산 거야?"
"오랜만에 밖에 나갈 겸?"
"……고맙다고 솔직하게 이야기해야 하나 이건?"


멋쩍게 웃는 내게, 수줍게 웃으며 치아키가 다가왔다.


"그래도, 너무 밖에 나가면 안 되잖아. 그러고 나서 괜찮았어?"
"아니 뭐 이 앞에 장 보러 나간 건데."
"폭탄 달고 사는 사람이 말은 잘 하시네."


볼을 꼬집혔다.
미묘하게 아프다.


"갑자기 쓰러져서는 말야. 그 때만 생각하면 소름이 다 끼친다고."
"가끔 왔다갔다 하는 정도는 좀 봐 달라고 참."


벽장에 기대 앉아, 무릎에 머리를 대고 자고 있는 미도리의 머리칼을 살살 쓰다듬었다.


"귀엽네, 자는 모습."
"치아키 자는 모습도 꽤 귀여운데, 몰랐어?"
"말은 잘 하네."
"혀에는 아직 폭탄이 안 달려서."
"……웃을 수가 없는 농담이잖아."


스케줄 때문에 두 사람을 태우고 방송국에서 사무소로 복귀할 때 일어난 교통사고.
음주운전이 원인이었던가. 앞에 가던 트럭이 급정거하면서 그대로 그 차를 들이받고 말았다.

듣기로는, 그 당시 운전석에 있던 나는 차 밖으로 튕겨져나왔기에 망정이지, 그대로 있었으면 차에서 화재가 났기 때문에 불에 타죽을 뻔했다나.
물론 다행히도, 두 사람은 무사히 차를 빠져나왔다고 한다.


"무슨 생각하고 있어? 설마, 또 그 때 그 사고?"
"으응…… 뭐, 그 때 생각이 나서."
"……그래?"


사고 후 며칠 뒤 의식을 찾은 내가 본 건 병원의 침대 옆에서 잠들어 있는 치히로 씨와, TV에서 필사적으로 MC의 질문에 대답하는 두 사람의 모습.
사고가 난 바로 그 날 예정되었던 녹화의 방송분.
예능계열 방송이었기에, 의상을 따로 준비해 가지 않은 것은 불행 중 다행이었다.

코디네이트된 옷을 입고 스튜디오를 돌아다니다가 바나나 껍질에 미끄러져 넘어지는 부분.
대본에도 적혀 있었기 때문에 알고 있었지만, 일부러 이야기하지 않았다.
이 둘은 연기가 서투른데다 신체능력은 좋아서, 미리 알고 있으면 넘어지려다 말고 낙법을 써서 튕겨올라 일어날 그림이 머리에 선했기 때문에.

방청객들의 웃음소리와 함께 당황한 듯한 치아키의 얼굴이 몇 번이고 클로즈업으로 반복되던 그 순간, 불현듯, 세계가 피로 물드는 듯한 착각과 함께 고통이 찾아왔다.
온 몸을 칼로 들쑤시는 듯한 아픔.
어떻게든 너스 콜을 해보려고 버튼에 손을 뻗어도, 움직이지 않는 몸.

필사적인 신음소리에 잠이 깨었는지 당황하던 치히로 씨.
그리고, TV 화면에서 나온 듯한 사신의 얼굴. 아니, 사신이 TV화면 너머로 몸을 들이밀고 있었다고 해야 하나.
여하튼, 그 사실일 리가 없는 환상.
의식이 멀어져가면서, 그저 고통이 빨리 없어져 주기만을 바라는 마음으로 눈을 감았을 뿐,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병원을 퇴원한 후 사무소에 복귀한 이후에도, 발작적으로 이런 통증이 찾아오곤 했다.
어떻게든 감춰보려고 노력했지만, 사무소가 사무소이니만큼, 누군가 한 명 - 내가 알기로는 키요라 씨인 것 같다 - 에게 발견되고 말았다고 한다.

결국 건강 상의 문제를 이유로 프로덕션을 퇴사...가 아니라 권고사직.
갑작스러운 퇴사였기 때문에 치아키와 미도리 둘 다 납득하지 못했었지만, CCTV 화면을 어떻게 구했는지, 그 당시의 화면을 보고서는 두 사람 다 너무할 정도로 울었다.
그저 자신들이 미안하다며 울었다.

정말로, 하루종일 울었다.
그리고 바로 다음날, 프로듀서와 아이돌 관계가 아니게 되었다면서 집에 쳐들어오고서는, 지금은 거의 반 동거인 상태.
...탑 아이돌이 된 두 사람이니까, 조금 더 자기관리를 잘 했으면 좋겠다. 이런 아저씨 집에 드나든다는 거 알려지면 위험하잖아.


"나도 좀 피곤하네, 이렇게 자도 돼?"
"여기서? 괜찮겠어?"
"뭐 언제는 불편해서 못 잤어?"
"뒤척이기는 했지."
"저기 말야. 그런 관찰은 좀 못 하면 안 되는거야?"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으며 웃는다.
어둠 속에서 부스럭대는 소리.
창문에 달아 둔 풍경에 바람이 부딪히는 소리가 울린다.

딸랑딸랑.

계절을 잊은 벌레소리.
계절을 잊은 풍경소리.
그리고, 밤을 잊은 나와 치아키.


"그러고보니까, 내일 요 앞에서 축제 있대."
"…그래?"


내게 기대오는 치아키의 적당한 무게감.
팔을 들어 치아키의 어깨에 얹는다.


"저기, P씨. 그게 말야…"
"내일 시간 돼?"
"어? 뭐라고?"
"내일, 시간 되냐고."
"으, 응… 그야 되지."


서로 눈을 마주치면서 살짝 웃는다.
청량한 향수의 향기.
옅은 화장품의 향기.
두 가지 향기가 잘 섞여 치아키다운 향을 내고 있다.

조명을 켜지 않은 어두운 방, 좁은 아파트 방 한켠에 가득 들어오는 달빛.
달빛이 세 사람을 조용히 비춘다.
흑백영화의 한 장면과도 같이, 조용한 세계 속에 시계추의 째깍거리는 소리만이 울린다.

 


새벽녘, 태양이 잠시간의 외출을 끝내고 얼굴을 들어올리는 시간.
그의 규칙적인 숨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운다.
푹신한 베개는 아니지만, 그만큼 말랑말랑한 다리에 머리를 올린 채로 잠든 그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정좌해 있는 그녀의 이름은 미즈노 미도리.

그녀의 무릎에서 느껴지는 적당한 무게감을, 그녀는 정말 기분이 좋다고 생각하곤 한다.
그가 반드시 섭취해야만 하는 약의 냄새와, 그의 집에서 나는 나프탈렌의 향이 마주쳐 나는 이 향이, 그녀는 왠지 모르게 좋았다.
그 상세한 이유는 말할 수 없지만, 그녀도, 그리고 지금 P의 팔을 베고 자는 치아키도 이 냄새를 좋아하게 된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라고 할 수 있겠다.

찌르르르, 찌르르르.
풀벌레 소리가 조용한 방을 채운다.

이런 포근한 조용함은, 그녀가 매우 새로워하는 것들 중 하나이다.
부호의 딸이기에 주위에 사람이 없던 적이 없던 그녀에겐, 어찌 보면 '일탈'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긴다.
아니, 정확히는 생각도 하지 않고, 그저 조용한 이 순간을 흘려보낸다.
여름날 밤 축제에서, 등을 단 종이배를 강으로 흘려보내는 듯한 그 잔잔함.
숲 속도, 바닷가도, 심지어 강가도 아닌 도심 한복판의 허름한 아파트이기에 그 잔잔함은 '불완전'하지만, '완전'하지 않기 때문에 그녀는 더욱 이 곳에서 이런 시간을 보내는 것을 좋아한다.
완전함 안에 변화는 찾아오지 않기에.

무릎에 느껴지는 적당한 무게감.
성인 남녀의 규칙적인 고른 숨소리.
바깥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찌르릉대는 풍경소리.

그녀의 감은 눈 사이로, 바람이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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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 동안 고민해서 한 마디 한 마디 쓰다 말고 쓰다 말고 하다가

겨우 뱉어낸 게 이런 글이라니 너무 창피해서 그만... (도망갔다고 전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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