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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번째 생일축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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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5-05, 2015 16:28에 작성됨.

 내가 그녀와 만난 지 벌써 10년이 되었다. 그때의 나는 갓 입사한 20대 중반의 청년이었고, 그녀는 이제 막 어린 티를 벗은 14세 소녀였다.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 무슨 만화에 나오는 어린아이라도 되는 양 토끼인형을 든 채로 100% 오렌지 주스를 달라며 사람을 깔보는듯한 억양과 말투로 나를 하대했고, 앞뒤 보이지 않을 정도로 화가 난 나는 그녀의 뺨을 때리려 했으나 코토리씨의 귓속말을 듣고는 속으로 화를 삭혔다. 그녀는 잘못 건드리면 내 인생 자체를 끝장낼 수도 있는 미나세 가문의 규슈였기 때문이었다. 뭐, 그래도 난 그녀에게 동네 편의점에서 파는 스카시 오렌지 하나 주는 걸로 소소하게 복수하긴 했지만 말이다.

 첫 아이돌을 배정받을 때, 그녀를 피하기 위해서 사장님과 리츠코 이사님, 그리고 코토리씨에게 화도 내고 달래도 보고 뇌물(?)도 줘가며 사방팔방으로 노력했지만 '그녀를 담당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 라는 이유만으로 결국 그녀를 첫 매니저 상대로 배정받게 되었다.
 고압적이고, 대화도 안되며, 사회생활 경험이라곤 전혀 없는 그녀를 되도록이면 피하고 싶었고, 결국 레슨을 시키거나 되도 안 한 오디션만 시킨 채 매일 드라이브를 하거나 컴퓨터 게임을 하며 농땡이만 치곤 했다. 그렇게 하면 그녀가 질려서라도 다른 사람이 맡게 될 거리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아무 의미없는 하루하루를 보내던 어느 날, , '고압적이고 대화도 안 된다' 로 요약되는 그녀에 대한 이미지를 깨는 사건이 터지게 된다.

 사무실에 숨어서 PDA폰으로 전자오락을 즐기던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 그녀가 내가 숨어있던 곳으로 직접 찾아와 나의 전화기를 뺏어서 가루가 될 때까지 부수고 부순 뒤 '귀족으로서 할 수 있는' 온갖 욕을 다 하며 나에게 '나는 반드시 톱 아이돌이 되어야 하고, 그렇게 하려면 네가 필요한데, 너는 왜 여기서 오락이나 하면서 놀고 있냐? 다시 한 번 이런 모습을 보여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너의 숨통을 끊어놓겠다!' 로 요약되는 요청도 아니고 협박도 아닌 으름장을 놓았다.
 사실 처음에 그녀가 나의 PDA폰을 부술 때 정말로 속이 후련해질 때까지 두들겨패고 이 프로덕션을 관둘까 생각도 했지만 화를 못 풀은 듯 상기된 얼굴로 눈물을 흘리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설움과 욕망이 뒤섞인 알 수 없는 무언가를 느꼈고, 그 자리에서 그녀에게 한 마디 던진 뒤 다음 날 부터 적극적으로 매니저 업무를 시작했다. 그때 했던 말이 뭐였냐면…

“좋아. 네가 그렇게 톱 아이돌이 되길 원한다면 내가 도와줄께. 단, 이 한가지 약속만은 지켜줘. 만약 나에게 필요한 것이 있다면 지금같이 '요구'를 하지말고 '부탁'을 하는 걸로. 알았지?”

 …였던 것 같다.

 그 사건 이후로 그녀는 나와 했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때로는 그녀도 한계에 부딛혔는지 식식거리며 죄없는 사무기구나 벽을 걷어차곤 했지만 절대로 나에게 '요구'를 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고, 나도 그녀의 노력에 보답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매니저 업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때론 오디션에서 떨어진다던지, 라이브 투표에서 상위권에 도달하지 못한다던지 하는 '아무리 노력해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갖지 못하게 되는' 상황에 직면해 나에게 말도 제대로 못한 채 사무실 구석에서 온갖 욕설을 하며 울고있을 때가 있었는데, 나는 '최소한의 위로라도 되겠지라는 심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녀를 꼭 안아주었다.

 그렇게 전국을 돌아다니며 여러가지 행사와 라이브배틀을 진행하며 희노애락을 서로 공유하는 동안 그녀와 나는 손발이 척척 맞게 되었고, 이 때문인지 시간이 지날수록 속칭 '랭크'로 불리는 그녀의 유명세는 점점 커져가기 시작했다. 우리가 서로를 만난지 3년이 되던 날, 전국의 모든 방송국과 신문사에서 주최하는 각종 연예대상 투표에서 그녀가 톱을 휩쓰는 기적같은 일이 벌어졌다. 처음에는 충격을 받았는지 멍하니 있다가 엉엉 울기 시작했고, 사무실에 있던 나에게 달려와 와락 안기고는 이런 말을 남겼다.

“오늘의 기적은 네가 나를 맡아주었기 때문에 일어난 거야. 정말 고마워.”

 그녀의 한 마디에 나는 자제력을 잃어버리고 그 자리에서 울어버렸다. 그녀는 나보고 어린애같다고, 매니저로서 부끄럽지도 않냐면서 화를 내고는 이내 어느 날 내가 그녀에게 했던 것 처럼 나의 얼굴을 감싸안았다.

 연예대상을 휩쓸고 난 뒤에도 그녀는 '류구코마치' 등의 유닛 활동과 솔로활동을 병행하며 아이돌 생활을 이어갔고, 후배들이 들어오기 시작했을 땐 765 프로덕션의 1대 아이돌이자 선배로서 조언과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 분명 그녀와 내가 처음 만났을 때는 '언제쯤 철들까?' 싶을 정도로 어린아이같이 행동했는데…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후배들이 자리를 완벽하게 잡아갈 즈음, 그녀는 이미 아이돌로서의 수명이 다 되어가고 있었고, 후계자 자리를 물려받기 위한 가족들의 요청도 있어서 '더 이상 아이돌 활동을 하기 어렵게 되었고, 이때까지 나를 지지해준 팬들에게 고맙고, 나의 뒤를 이을 후배들도 많이 사랑해달라'는 말과 함께 은퇴를 하게 되었다.

 그녀가 아이돌을 그만두고 미나세 그룹의 일원으로서 돌아간 뒤에도 나는 유명 아이돌들을 관리하는 부서의 부장으로서 계속 후배 프로듀서와 매니저들을 교육하며 그녀, 혹은 그들이 지금같은 유명세를 유지하도록 매일매일 노력했다. 일이 너무 바빠서 그런지 코토리씨나 리츠코 이사님이 결혼해서 아이를 갖게 될 즈음에도 연애나 결혼 같은 건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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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내 아내보다 먼저 퇴근해서 아내가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테이블엔 약간 사이즈가 큰 생일 케이크가 준비되어 있고. 그녀가 가장 아껴하는 최상품 와인과 잔, 그리고 식기도구도 세팅을 완료했다. 그녀가 벨을 누를 때 즈음이면 난 촛불을 켜고 불을 끈 뒤에 생일축하 파티를 벌이겠지.

'띵동~'

“누구세요?”

“나야!”

“알았어 잠깐만 기다려봐! 어이쿠!”

 일부러 작은 사고가 벌어진 척 하며 시간을 끈다. 그 동안 촛불을 키고, 거실의 전등을 끈다.

“무슨 일이야? 괜찮아? 언제 문 열어줄꺼야?! 안 열어주면 내가 쳐들어간다?”

“다됐어 다됐어!! 문열러간다!”

 현관문을 열자 20대 중반 여성의 실루엣이 드러나더니 곧 그녀가 나의 아내이자 미나세 그룹에서 제일 잘나가는 사업부 하나인 패션/섬유/신소재 사업부의 부사장인 미나세 이오리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10년 전의 고집많고 답없던 땅딸막한 열 네살의 어린애는 이제 최고경영자로서의 미모와 풍채를 물씬 풍기는 어른으로 바뀌어 있었다. 덤으로 임신을 해서 배도 어느 정도 불러있었고 살도 붙었지만 그녀의 아름다운 외모를 망치거나 하진 않았다.

“고생했어 이오리! 오늘도 일이 많았지?”

“우리 애기 스트레스 안 받게 하려고 되도록이면 큰 일은 피하려고 노력은 하는데 잘 안돼… 그나저나 아까 무슨 일 있었던거야? 그리고 왜 불은 다 꺼져있어?”

 그녀의 서류뭉치를 받아 옮기던 그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며 가벼운 미소를 짓는다.

“그게 말이야...”

나는 서류뭉치를 테이블에 놓은 뒤 그녀를 향해 두 팔을 벌리며 말한다.

“생일 축하해 이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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