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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드백] 화이트 나이트 외전 - 고해告解 : 아나스타샤 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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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8-19, 2017 22:58에 작성됨.

 “저는 사람을 죽였습니다.”

 한참 무게를 잡다 뗀 첫마디였다. 천가리개 너머에서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의외로 보통내기가 아니야,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무릎 위에 중절모를 만지작거리다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게 제 일이었어요. 프로듀서가 되기 전, 한국에서. 영화에 그런 거 자주 나오잖아요. 돈을 주면 뭐든지 하는 해결사. 사람 찾고, 사람 패고, 사람 죽이고. 전 그쪽 업계에서 제일 잘 나가는 놈들 중 하나였어요. 한 번 일을 맡으면 정말 악독하게 저질렀거든요. 당한 놈들은 복수할 엄두도 못 내고 찌그러져서 의뢰인들이 좋아했죠.”

 증오와 공포로 찌들은 얼굴들이 또렷하게 떠올랐다. 바로 눈앞에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내가 자신들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적잖이 기분 나빴는지 망령 같은 몰골로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졌다. 반짝이는 구두와 검은 정장에 피가 묻어났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제가 주먹을 쓴 놈들은 하나 같이 악당이었습니다. 시장 사람들에게 들러붙고, 돈 내놓으라며 드러눕는 것들. 사람 뱃속에서 나온 게 맞는지 의심이 가는 놈들. 하드코어한 영화에나 나오는 일을 밥 먹듯이 저지르는 놈들. 심지어 어린 아이들한테까지. 그런 놈들을 전문으로 상대했어요. 변명이 아니라 진짜지만, 변명이기도 해요. 저는 제가 얼마나 쓰레기인지 잘 알아요. 착한 척 정상인 척 코스프레나 하면서 실제로는 악당 짓을 일삼는 쓰레기. 어려운 사람들에겐 돈 안 받고 일해주면서 좋은 사람이라고 자기합리화나 하는 놈. 동네 사람들이 저를 반갑게 맞아줄 때마다 자기혐오에 시달렸어요. 그리고…….”

 이제부터가 가장 질이 나쁜 죄였다. 나는 잠깐 쉬면서 물을 들이켰다. 건조한 식도를 적시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일이 좀 잘못된 적이 있었어요. 일이 잘못되는 거야 종종 있었지만 그 때는 특히 위험했죠. 제가 그대로 있으면 형님들과 동생들에게 피해가 갔을 거예요. 그래서 사무소를 나왔습니다. 모두 붙잡았지만 제가 참을 수 없었거든요. 갈 곳이 없어서 예전 의뢰인에게 전화 걸어 일자리를 구해 달라 했습니다. 이 프로덕션을 소개받았고, 일본으로 건너온 게 5년 전, 스물다섯 살 때예요. 처음 프로듀서가 되었을 땐 굳건한 각오를 짊어졌죠. 청산하자, 이제부터라도 평범한 사람들과 섞여 살자. 많이 힘들었습니다. 일도, 주변의 시선도. 지금이야 괜찮지만 그 때는 언어도 형편없었고요. 그래도 전부 감수하고 열심히 일했어요. 악착같이 성과를 내려고. 그런데…… 아나스타샤의, 제 첫 아이돌의 데뷔 날이었어요. 그 아이가 정말 아름답게 무대를 끝마치고 내려왔는데, 방송관계자 한 명이 천박한 말로 접근했어요. 아나스타샤가 잘 대응했지만 나중에 저를 불러서 또 지껄이더군요. 놈이 뭘 원하는지 바로 알았어요. 연예계 쪽 의뢰도 자주 받았으니까. 그래서 그날 바로 작업했습니다. 예전 방식대로. 고개를 숙이는 건 어렵지 않지만, 그 후에 놈이 또 아나스타샤에게 접근할 테니까. 죽이지는 않았지만 다시는 찝쩍대지 못 하게 만들었죠. 놈은 바로 업계에서 증발했습니다. 그로부터 1년 동안은 아이돌들에게 해가 될 만한 업계의 부조리들을 전부 그런 식으로 해결했어요. 저는 아무것도 바뀐 게 없는 놈입니다. 쓰레기예요. 무엇보다 저의 가장 큰 죄는…….”

 핸드폰이 벨소리를 흘렸다. 죄송합니다. 서정적인 음을 배경으로 울리는 아나스타샤의 목소리를 끊고 나는 전화를 받았다. 미오였다.

 어디야, 겨울P? 회사야, 왜? 사무실에 왔는데 안 보여서. 사무실은 아니고, 딴 데서 얘기 좀 하고 있었어, 지금 갈게.

 “가보셔야겠네요?”

 전화를 끊자 건너편의 그녀가 말했다. 네, 죄송합니다. 실루엣이 고개를 저었다. 저도 이만 가 봐야했어요.

 클라리스가 대충 걸어둔 소품용 천가리개를 걷었다. 감은 듯 아닌 듯 은근히 보이는 자애로운 눈빛에 나는 감사를 표했다. 의문도 함께. 그거 꼭 쳐야했습니까?

 “서로 얼굴도 목소리도 다 아는데.”

 “분위기라는 건 중요하답니다. 대놓고 마주보는 것보단 이쪽이 속마음을 털어놓기 좋잖아요.”

 “응접실에 딸랑 가리개 하나 둔다고 무슨 분위기가 생기겠습니까.”

 클라리스는 부정하지 않고 가리개를 접었다.

 사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나도 그 말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가리개가 아니라 분위기 말이다. 진짜 수녀를 앞두고 정적 속에서 행해지는 고해성사의 분위기에 나는 꽤나 심취해 있었다. 그렇다고 마음이 편해졌냐 하면 그건 또 아니지만.

 그것을 눈치 챘는지 클라리스가 말했다.

 “원래는 보속을 드려야하는데…….”

 “보속, 말입니까.”

 “네. 저는 백야 씨를 믿고 있고, 백야 씨가 좋은 사람이라는 것도 알고 있어요. 하지만 백야 씨의 죄는 제가 보속을 드릴 수 있을 만한 일이 아니에요. 애초에 이건 정식 고해성사도 아니고. 다행인 점이라면 백야 씨에게서는 죄를 뉘우치는 진심이 느껴져요. 그러니까 보속 대신 크리스마스 선물을 드리려고요.”

 가늘게 뜬 눈꺼풀 사이로 클라리스의 동공이 면도날처럼 빛났다. 그녀가 선물이랍시고 내놓은 미션에 나는 혀를 내둘렀다. 역시 보통내기가 아니야. 독실한 신자의 가면 뒤에 어쩌면 나만큼이나 어두운 과거가 숨어있을지도 모른다는, 그런 해괴한 생각이 들었다.

 그럴 리가 있나. 얼른 병적인 망상을 지웠다. 죄송합니다, 은혜를 베풀어도 이 따위로 갚는 게 저입니다. 속으로 반성하며 모자를 썼다.

 먼저 응접실을 나서는 나에게 클라리스가 말했다.

 “남은 얘기는 다음에 마저 해요.”

 나는 대답 대신 문고리를 돌렸다.

 치히로가 특유의 생글거리는 웃음을 짓고 있었다.

 

 *

 

 이게 다음 일정이야.

 프로듀서. 이 날은…….

 미안해. 어쩔 수가 없었어. 연말이라 한창 바쁠 때니까. 너를 찾는 사람도 많고. 어떻게든 하고 싶었는데.

 괜찮아요. 조금 아쉽긴 해도. 프로듀서가 힘들게 가져온 일이니까.

 이해해줘서 고마워. 정말, 고마워.

 빨리 준비해야겠어요. 프로듀서는 이미 끝냈나요?

 나는 못 가.

 что(네)?

 미오랑 시키의 촬영 현장에 가봐야 해. 그래도 걱정 마. 선배가 같이 갈 거야. 그쪽 사정은 나보다 선배가 더 잘 알고, 애초에 이거 선배가 기획한 거니까.

 …….

 무슨 말 하려는지 알아.

 약속, 안 잊은 거죠?

 기억해.

 그럼 저, 열심히 할게요.

 부탁해.

 금방 돌아올 거예요. 기다려줘요.

 

 *

 

 어릴 때부터 더위에 약한 나는 여름을 질색했다. 백야라는 이름을 쓰기 전부터 있던 어쩔 수 없는 체질이었다. 기억에 남는 여름 중 가장 더웠던 것은 부모님이 돌아가셨던 해. 내 나이 겨우 10살 때였다.

 내가 맡겨진 고아원은 쉼터를 가장한 지옥으로 원장이 아주 쓰레기였다. 애들을 잡아다 수상쩍은 교육을 시켜 어딘가로 팔아버리는 악마. 15살 겨울에 나는 그를 죽이고 독립했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아주 홀가분하게.

 그가 가르친 대로 시신을 처리하고 나오자 하늘에서 새하얀 눈이 내렸다. 분명 밤인데도 온 세상이 하얗게 뒤덮인 광경을 한 동안 가만히 서서 구경했다. 어디가 길인지 분간할 수 없었지만 동시에 어딜 가도 길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 날부터 내 마음에는 항상 눈이 내렸다. 괴로움도 슬픔도, 앞으로 있을 안 좋은 일들까지도 전부 하얀 눈이 덮어버리라고. 내가 저지른 일들을 잊지 않고 전부 기억 한 구석에 간직해두겠다고. 아마 인생 최고의 겨울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백야라는 이름을 사용한 것도 그 때부터였다.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겨울이 지나고 봄이 찾아왔을 때 나는 강한 위협을 느꼈다. 항상 곤두선 신경과 예민한 감각이 빚어낸 직감이 위험신호를 울린 것이다. 정신을 차리니 내 손에는 피가 묻어있었다.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기억속의 혈흔이. 날씨가 따뜻해지고 눈이 녹으면서 묻혀있던 시체가 드러난 것이다.

 나는 더욱 여름을 질색하게 되었다. 기온이 올라갈수록 점점 무기력해지고, 충동에 휩싸이고 망상이 진해졌다. 직감이 폭주해 사람을 제멋대로 판단했다. 이 사람은 거짓말을 하고 있어, 이 녀석은 쓰레기야, 이 자식은 믿어선 안 돼.

 태어나 단 한 번도 직감이 틀린 적이 없었다.

 나는 갈수록 체질을 원망했다. 그나마 겨울이 되면 증세가 완화되는 것이 위안이었지만 이젠 그렇지만도 않았다. 기온이 영하까지 떨어진 겨울에 나는 커다란 고민을 앓고 있었다. 평소라면 바람만 불어도 콧노래를 불렀을 날씨에.

 그것을 이상히 여긴 치히로가 고해성사를 제안했다. 한 번 속 시원히 털어놓고 용서를 받으면 어떻겠냐고. 치히로는 내 과거를 아는 몇 안 되는 인물이었고 나는 그녀를 신뢰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가 준비해준 방에 들어가 엄숙한 분위기 속에 죄를 털어놓은 것이다.

 돌아가서 보고해야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문 앞에 서자 익숙한 녹색 악마의 기운이 느껴졌다.

 “수고하셨어요. 프로듀서님.”

 “네.”

 나는 자연스레 인사를 받았다.

 “별로 놀라지 않으시네요. 제가 기다리고 있던 것도 알고 있었나요?”

 “알고 싶지 않아도 알게 됩니다. 감이 좋아서. 그런데 놀라지 않던 것은 클라리스 씨도 마차가지더군요. 센카와 씨가 뭔가를 알려주신 겁니까.”

 “너무 충격적인 사연에 클라리스 씨가 심장마비라도 걸리면 안 되잖아요. 불쾌하셨다면 죄송해요.”

 “전혀요. 오히려 속 터놓고 말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준 센카와 씨에게 감사드려야죠. 다만 모든 이야기를 하지는 못 했습니다. 사무실에 미오가 왔어요. 얼른 가봐야 합니다.”

 부지런히 걸음을 옮기는데 치히로의 입가에서 생글거림이 사라지지 않았다. 이 인간이 저런 표정을 지으면 뭔가 불길한데. 분명 미오와 무언가 작당을 치고 있어. 어쩌면 고해성사까지 합쳐진 하나의 큰 그림일지도.

 뭘 꾸미고 있든 간에 순순히 당해줄 생각은 없었다. 나는 속으로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 그리고 사무실 앞에 서는 순간 모든 것이 부질없음을 깨달았다.

 빌어먹을.

 복도의 서늘함이 한층 강해졌다. 분명 나만이, 내 직감만이 느끼고 있을 가상의 추위였다. 이 안쪽만 한층 더 겨울이 진해.

 직감이 위협과 경고, 비웃음과 조소를 보냈다. 꼴좋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어. 깊은 한숨을 쉬며 문을 열었다. 어서와, 겨울P! 내 담당 아이돌이 반겨줬다. 항상 반짝거리는 미소를 짓는 미오. 그리고…….

 “다녀왔어요. 프로듀서.”

 아나스타샤였다.

 푸른 눈동자와 조명에 비쳐 반짝이는 은발. 잊을 수 없이 아름답고 순수한 미소가 내게 인사를 건넸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대꾸했다. 오랜만이네.

 “일주일 밖에 안 됐어요.”

 “일은 잘 끝냈어?”

 “Да(네). 선배님이 많이 도와줬어요.”

 “그래. 선배가.”

 안심이 됐다. 내팽개쳐 두고서 마음이 편치는 않았는데.

 나는 미오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바로 미오가 “난 다음 무대 의상 좀 보고 올게.”라며 나가버렸다. 곧이어 치히로도 마실 것을 사오겠다며 미오를 따라갔다.

 그렇게 나오는 건가. 이중삼중으로 놓인 완벽한 덫이었다. 빠져나갈 틈이 없어.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의 저항은 맑은 눈동자를 피해 고개를 숙이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그마저도 허락하지 않았다. 프로듀서.

 “약속. 잊지 않았죠?”

 

 한 달 전의 일이었다.

 여느 때처럼 출근해서 사무실에 왔더니 바깥과 다름없는 차가운 공기에 기분이 좋아졌다. 평소에는 치히로가 먼저 와서 히터를 틀어놓았기 때문에 맛볼 수 없는 상쾌함이었다. 다른 사람이 오기 전에 만끽해야겠다 싶어 일정 검토를 조금 미루기로 했다.

 창밖의 세상은 완연한 겨울. 강하게 불어든 바람에 창문이 흔들리는 흉흉함이 마음에 들었다. 이대로 눈만 내린다면 완벽할 텐데. 아쉽게도 하늘에는 구름 한 점 보이지 않았다.

 아나스타샤가 온 것은 히터를 켜기 직전이었다. 평소에는 이렇게 빨리 오지 않는데. 무슨 일이 있냐고 물었더니 나를 만나러 왔다고 했다.

 “크리스마스에 파티를 하려고요. 미리 스케줄을 비워뒀으면 해서 상의하려고 왔어요.”

 파티라. 조금 생각에 잠겼다.

 이런 일이 처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나스타샤는 파티를 좋아했고 평소엔 소극적이다가도 다 같이 모이는 일이라면 주도적으로 이끌고 나가기도 했으니까. 본인의 생일이나 크리스마스 같은 기념일에 특히 그랬다. 당연히 올해도 뭔가를 벌이겠다 싶어 크리스마스 당일엔 스케줄을 잡지 않으려고 했으니 그리 큰 문제는 아니었다.

 나는 자동으로 참여해야겠지. 밖을 돌아다니기 보다는 집안에서 시간을 보낼 거야. 전골이나 우동 같은 걸 먹으면 좋겠어.

 그런 식으로 파티 계획을 구상하고 있는데 설명할 수 없는 기시감이 느껴졌다. 겨우 그런 거라면 이렇게 일찍 찾아올 필요가 없을 텐데. 어차피 오후에도 만나야 하니까.

 내가 뭔가를 눈치 챘음을 저쪽도 알았는지 묘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깜짝 선물을 공개하려는 어린 아이처럼.

 “이번 크리스마스는 프로듀서랑 저, 단 둘이 보내고 싶어요.”

 나는 굳어버렸다. 원래부터 표정 변화라는 게 없는 얼굴이 그 때 만큼은 한층 강하게 얼어버렸다. 한기로 가득한 겨울의 사무실에서도 혼자 동떨어져 아나스타샤가 이상함을 알아챌 수준이었다.

 최대한 조정해볼게.

 입으로는 그렇게 말했지만 사고는 여전히 정지해 있었다. 그 날 하루 동안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는데 온 힘을 쏟아야만 했다.

 그리고 아무런 선택도 하지 못 했다. 내 대답을 기다리는 아나스타샤가 기대를 하는 것조차 견디지 못 했다. 약속이 흐지부지 잊히길 바라며 급하게 일정을 잡아 아나스타샤를 선배 프로듀서에게 맡겼다.

 그런데 녹색 악마와 또 다른 담당 아이돌의 계략으로 또 선택의 기로에 서고 만 것이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는 안다. 잠시 아나스타샤를 멀리하는 동안에도 나는 시간의 대부분을 아나스타샤를 생각하는 데 사용했으니까. 하지만 고민한다고 해서 결론이 바뀌지는 않았다. 나는 겁쟁이에 비겁자다.

 “피곤하지 않아? 오늘 막 돌아왔을 텐데.”

 나에겐 대답할 용기가 없다.

 

 *

 

 “조금 쉬어야겠어요.”

 “데려다줄게.”

 “괜찮아요. 대신에, 프로듀서.”

 독특한 발음이 내 고막과 마음에 박혔다.

 “오늘 밤에 기다릴게요.”

 코트를 걸치는 아나스타샤의 머리칼이 눈에 띄었다. 잘 정돈된 단발이 일주일 사이에 목을 살짝 덮고 있었다.

 자조했다. 대답 하나 제대로 못 하면서 관심은 또 뭐 그렇게 많은 건지. 스토커보다도 못한 놈. 그러면서도 아나스타샤가 나가는 순간까지 눈을 떼지 못 했다.

 문이 닫히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미오가 들어왔다.

 “뭐하는 거야, 겨울P!”

 따지는 물음에 착잡하게 답했다.

 “너야 말로 뭐하는 거야.”

 자리에 앉자 히터 바람이 얼굴에 닿았다. 아나스타샤가 있을 때는 전혀 눈치 채지 못했는데. 느릿하게 일어나려 했더니 미오가 대신 전원을 꺼줬다. 고마워. 감사를 표했으나 미오는 도끼눈으로 답했다.

 “고마워 할 필요 없어. 담판을 지으려고 그런 거니까. 얘기 좀 해.”

 “네가 나랑 담판 지을 게 뭐 있어.”

 “친구로서 아냐 대신에 지어주는 거야!”

 혼다 미오가 이렇게나 화를 내다니. 희귀한 광경이었다. 그 만큼 내가 답이 없다는 증거겠지. 자조하면서도 나는 먼저 미오에게 해명을 구했다.

 “아나스타샤가 왜 여기 있어?”

 “치히로 씨가 선배P에게 연락했어. 내가 부탁했거든. 겨울P가 노골적으로 아냐를 피하는 게 괘씸하니까 한방 먹여주자고. 그래서 선배P가 아냐 몫의 촬영을 한 번에 몰아서 먼저 끝내줬대. 아냐는 피곤한데도 혼자 신칸센 타고 돌아왔고, 나는 아침부터 마중 나갔어. 근데 정작 겨울P가 이렇게 나오면 어떡해!”

 그렇게 된 거였나. 사정을 아는 치히로는 물론이고 선배까지 적이란 사실이 충격으로 다가왔다. 한층 깊어진 심란함에 방심하고 있을 때 미오가 내 모자를 벗겼다.

 내가 손을 뻗자 재빨리 뒤로 빠지며 놀렸다.

 새까만 중절모가 미오의 손가락을 축으로 빙글 돌았다. 5년간 나를 대신해 풍파를 맞아 군데군데 하얗게 샌 자국이 있었다. 마치 눈처럼 보이는 자국들은 자신이 누구의 소유인지, 누구로부터 전해졌는지 확고히 주장하고 있었다.

 “모자가 그렇게 소중해? 그럼 아냐는?”

 “…….”

 그래. 그건 아나스타샤가 준 거야. 더위에 쉽게 지치는 나를 여름으로부터 지켜주기 위해.

 모자를 받았을 때 일본에 온 뒤 처음으로 웃음을 지었다. 아나스타샤는 정말로 기뻐했다. 차갑다, 무섭다, 그래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그것이 우리의 공통점이었으니까. 미오가 나를 겨울이라 부르는 이유도 그래서였다.

 “아냐를 좋아하잖아.”

 미오가 나의 가장 큰 죄를 말했다.

 맞아. 나는, 백야는 아나스타샤를 사랑해.

 그러니까 아나스타샤의 제안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달콤하고 행복한 일이야. 그 아이를 독차지할 수 있는 기회니까. 동시에 나의 무엇보다도 거대한 죄악 그 자체지. 클라리스에게 미처 고하지 못한 죄악.

 우리는 아이돌과 프로듀서. 사적인 친분은 있을 수 있지만 절대 선을 넘어서는 안 되는 관계. 극단적으로 말하면 제품과 생산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어야 하는 관계.

 그리고 클라리스에게 고백한 대로 나는 쓰레기다. 별처럼 반짝이는 아이돌과 달리 어둡고 음울하고 비뚤어진 인간.

 미오는 그 사실을 모른다. 아나스타샤도.

 몰라야만 된다.

 “아냐도 겨울P를 좋아해. 알지? 눈치 빠르니까 모를 리가 없겠지. 알면서 피하는 건 너무하잖아. 아니, 피한 것도 아니지. 아냐를 치웠어. 아냐는 이 약속만 한 달 넘게 기다렸는데 겨울P는 아무것도 선택한 게 없어. 프로듀서와 아이돌이라서 그래? 그렇다 해도 대답은 해줄 수 있잖아! ‘나도 네가 좋아’는 안 돼도 ‘미안해, 안 되겠어’라고는 말할 수 있잖아!”

 안 그래? 어? 재촉하는 한 마디 한 마디가 상처에 소금을 뿌렸다. 머리가 지끈거리고 잔인한 망상과 환청이 아른거렸다. 뒤죽박죽으로 섞인 시간들 속에서 아나스타샤의 데뷔 날이 떠올랐다.

 모처럼 예쁜 얼굴을 타고났는데, 그것 말고도 매력을 키워야지 않겠어? 노골적이고 역겨운 눈빛이 아나스타샤를 훑어봤다. 뭣하면 내가 가르쳐 줄 수도 있는데. 아나스타샤가 대응하자 놈은 뒤에서 내게 불쾌함을 드러냈다. 이제 막 시작한 신인인데 상사한테 따박따박 말대꾸나 하더군.

 놈은 업계의 예의를 입에 담았다. 그로 인해 나는 속이 뒤집어졌고 놈을 따로 불러냈다. 치히로가 아나스타샤의 데뷔 기념 파티를 준비했지만 나는 가지 않았다. 술집에서도 추악함을 드러내는 놈에게 내가 어떤 인간인지 보여줬다.

 유리와 안면이 깨지고 터져 나오는 술과 피. 뭉개지는 코와 감정. 술로 젖은 바닥과 깊은 절망 아래에서 벌레처럼 기어 다니는 놈의 처참한 모습. 언제나처럼 감정을 절제하고 폭력과 분노를 터뜨리는 나.

 아나스타샤에게, 찝쩍대지마. 물론, 다른, 사람들에게도.

 무대 뒤에서 내가 저지른 만행들이 시야를 가렸다. 그 중에는 괴로움을 애써 삼키는 아나스타샤도 있었다. 반드시 가겠다고, 너를 만나러 가겠다고 끝내 대답을 못한 나에게 끝까지 웃어주는 아나스타샤가.

 “아으! 답답해!”

 미오가 거칠게 모자를 눌러 씌웠다. 순간 어두워진 세상 속에서 나는 안정을 되찾았다. 주마등처럼 지나간 시간이 찰나에 불과했음을 깨닫고 자조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에 미오는 분통을 터뜨렸다. 계속 그렇게 한심하게 굴 거야?

 “겨울P 정말 치사한 거 알아? 평소에는 쿨하고 멋있는 척 다하면서 아냐 일만 관련되면 한심해지잖아. 그러니까 별명이 노예, 애완동물이지. 주인 말 잘 듣는 것도 아니면서.”

 “쿨한 척 한 적 없어.”

 똑바로 모자를 정돈했다.

 미오가 만졌기 때문인지 반짝이는 별빛이 맺혀있었다.

 “한 번도 그런 적 없어.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을 뿐이야. 남들을 위협하니까. 그래서 존대를 하고 모자로 눈을 가린 거야.”

 마음이 얼어붙어서.

 마지막 말은 하지 않았다. 목구멍에 턱 걸리는 바람에.

 “말 잘 하네.”

 “너희들 앞에서만.”

 “근데 그거 아냐도 마찬가지거든? 미디어에서는 쿨한 미인이라고 말하지만 우리랑 있을 때는 귀엽고 순수한 아냐라고. 그런 아냐가 감정을 다 드러내서 말하는데 왜 겨울P만 숨기는 건데!”

 “……”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 미오가 쏘아붙였다. 시키 데리러.

 “내가 분명 오전 중에 오라고 했는데 벌써 12시야. 평소처럼 튀었을 게 뻔해. 너도 따라와. 다음 스케줄 가야 돼.”

 “싫어. 안 가. 혼자 가. 아니, 아냐한테 가.”

 “그럼 버스 타고 가시던지.”

 마침 들어오던 치히로와 마주쳤지만 서로 별 말은 하지 않았다. 이미 상황 파악을 마쳤는지 내 대신 미오를 맡아주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다 벽에 붙은 거울을 바라봤다. 그 안에서도 모자에 묻은 별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

 

 감사, 합니다.

 괜찮아요. 천천히 이야기 해줘요.

 네. 그, 아이돌, 해보시지, 않겠습니까?

 TV에 그…… 아이돌 말인가요?

 네. 그, 아이돌입니다. 저런, 광고를, 찍죠.

 아이돌…….

 흥미, 있으신가요?

 잘 모르겠어요. 아이돌이 어떤 건지.

 기본적으로, 춤, 노래. 음악과, 관련된 것을, 하죠. 인터뷰도, 하고. 잡지, TV에 나오고,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을 보여줍니다.

 прекрасно…… 대단하네요.

 당신이,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되어주셨으면, 합니다.

 제가? 어떻게?

 아름다우, 시니까요. 외모만이 아니라, 전부. 고독함이나, 순수함. 꼭, 별처럼, 반짝이시는 것, 같아요. 그 모든 게, 아름답습니다.

 아!

 왜, 그러시죠?

 звезда(별). 그러니까, 별. 저, 정말로 좋아해요. 저한테서 별이 보이나요?

 네. 보입니다. 아이돌은, 별처럼, 반짝이는 존재니까.

 прекрасно. 훌륭해요. 아이돌도 당신도요.

 그렇습니까.

 저, 더 알고 싶어졌어요. 아이돌의 세계.

 

 *

 

 프로듀서를 시작하고 얼마 안 되어 선배를 따라 홋카이도에 갔을 때. 혼자 있던 중 지나가던 아나스타샤를 발견한 순간 나는 이루 말할 수 없는 황홀감에 빠져들었다. 고결하다고도 표현할 수 있는 아름다움이 눈을 사로잡은 것이다.

 나는 낯선 곳에서 만난 눈의 요정에게 말을 걸었다. 독특한 발음의 러시아어를 듣기 전까지는 내가 무슨 행동을 하는지 조차 모른 채로.

 보기에도 수상한 나의 말을 아나스타샤가 끝까지 들어준 이유는 나의 일본어가 서툴렀기 때문이었다. 핸드폰 번역기의 도움을 받아 띄엄띄엄 말하는 모습에서 동병상련을 느낀 것이다. 그럼에도 뜻을 전달하려는 노력에서도.

 손짓발짓 섞어 말하다 ‘별’이라는 키워드로 관심을 끄는데 성공했다. 생각 없이 던진 것은 아니고 느낀 바를 그대로 말한 것이다. 별, 러시아어로는 즈베즈다звезда. 겨울과 함께 아나스타샤를 상징하는 단어였다.

 홋카이도에 있는 동안 나는 자주 아나스타샤를 만나 아이돌에 대해 이야기 했다. 쉽게 결정할 일이 아니니까 시간을 들여 천천히. 마음을 굳힌 아나스타샤는 나를 믿고 무대로 향하기로 했다.

 창밖으로 보이는 카페를 보고 그 날의 일들이 떠올랐다. 아나스타샤에게 명함을 건넨 것이 저곳과 같은 프랜차이즈 앞이었다. 그 땐 봄의 홋카이도, 지금은 크리스마스의 도쿄라는 점이 시간의 흐름을 느끼게 했다.

 그런데 룸미러에 씰룩거리는 검붉은 머리칼이 분위기를 확 깨버렸다.

 “가만히 못 있냐.”

 “코리안 야쿠자에게 잡혀가는 소녀의 처절한 저항이야. 냐하하.”

 “스물셋을 소녀라고 할 수 있는지 의문인데.”

 코너에서 핸들을 돌리자 시키가 시트 위에 드러누웠다. 교태를 부리다 굴러 떨어지는 모습이 영락없이 말 안 듣는 고양이였다. 그게 또 뭐가 재밌는지 웃으면서 내게 항의하는 모습까지 전부.

 “전부터 생각한 건데 백야는 사디스트 같아. 아이돌을 이렇게 험하게 다루잖아. 차 태울 때도 옷 다 늘어날 뻔 했다고.”

 “누누이 경고하는데 넌 내가 머리끄덩이 안 잡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 돼.”

 “‘누누이’라고는 말하지만 요새는 못 들었던 거 같은데. 그보다 말이지.

 아냐한테는 언제 갈 거야? 시키가 고개를 쑥 내밀었다.

 밀어 넣으면서 답했다. 못 가, 바빠, 크리스마스라고.

 “핑계 대기는. 아무래도 여기선 천재 시키 박사가 백야의 거짓말을 낱낱이 파헤쳐 줘야겠어. 어디 보자, 우선…….”

 시키가 자세를 잡고 모자를 눌러썼다. 내 것과 비슷한 중절모인데 시키가 따로 산 것이라 미묘하게 디자인이 달랐다. 입을 앙 다물고 팔짱을 낀 걸로 보아 자기 나름대로 나를 흉내 내는 것 같았다.

 보고 있으려니 배가 조였지만 혀만 쯧, 차고 신경 쓰지 않았다. 약간의 인내로 녀석의 입을 닫을 수만 있다면 오히려 싸게 먹히는 거니까. 그러나 이내 나는 시키를 얕본 것을 반성해야만 했다.

 “사실 백야는 아냐와의 약속에 가고 싶어 해. 왜냐면 아냐를 좋아하니까. 그건 분명한 사실이야. 우리들 중에서 아냐를 가장 어렵게, 다르게 말하자면 소중히 대한다는 점에서 알 수 있어. 그런데도 백야가 아냐를 슬프게 하는 이유는 죄책감 때문이지. 백야는 어두운 사람이니까.”

 시키가 여유로운 미소를 보였다. 이곳에서 내 과거를 아는 몇 안 되는 사람이기 때문에 가능한 행동이었다. 그런 식으로 내 속을 긁는 것을 즐기는 것이다.

 나는 차분하게 운전에만 집중하는 척 했다.

 “바쁘다는 핑계를 댔지만 거기엔 모순이 있어. 난 오늘 백야의 일정을 알거든. 지금 가는 라디오 생방과 저녁 토크쇼가 있지만 그 정도는 백야가 없어도 돼. 우리도 연예계 생활 오래 한 프로니까. 실제로 미오는 두고 왔잖아? 무엇보다 정말로 아냐를 떼어놓고 싶었다면 훨씬 완곡하고 치밀하게 크리스마스에 스케줄을 잡을 수도 있는데 그러지 않았어. 아냐의 로케는 크리스마스에 아슬아슬하게 걸쳤지. 주위 사람들이 도와주지 않더라도 오늘 저녁쯤에는 충분히 돌아왔을지도 모른다는 거야.”

 목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시키가 내 반응을 살피며 눈을 굴렸다. 완전히 상황을 주도하는 중이었다.

 “굳이 이런 애매한 스케줄을 잡았다는 점에서 나는 백야의 진짜 심정을 유추할 수 있었어. 크리스마스가 흐지부지 지나가기를 바라면서도 아냐가 돌아오기를 기다린 거야. 자신이 무언가를 선택하는 게 겁난 거지. 치사한 일이지만 이런 걸로 백야를 비난하지는 않을 게. 나는 백야의 복잡한 사정을 잘 아니까.”

 정지 신호에 차를 멈췄다. 신호등의 빨간 불을 보자마자 시키가 다시 고개를 내밀었다. 자신의 시간임을 어필하는 매혹적인 목소리를 냈다.

 “그런데 말이지, 그거 알아? 마조히즘은 사실 자기 자신을 향한 사디즘이라는 학설이 있어. 지금의 백야를 보면 그 말이 딱 맞는 것 같아. 아냐가 슬퍼하는 모습, 그로 인해 괴로워하는 자신의 마음. 두 가지를 전부 즐기고 있잖아. 그런 점에서 역시 백야는 사디스트야.”

 어땠어? 시키가 몸을 뒤로 뺐다. 동시에 신호가 파란불로 바뀌었다.

 나는 한발 늦게 액셀을 밟았다.

 “백야처럼 감으로 파바박, 맞추지는 못 하지만 이 정도는 알아낼 수 있다고. 자아, 셜록 시키의 추리력에 짝짝짝짝!”

 거슬리는 박수가 한참이나 이어졌다. 무관심, 무관심으로 대하자. 나름대로 작전을 짰지만 겉으로 변화 없는 내 태도에 시키는 오히려 재미있어 했다.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치익, 뿌렸다.

 향수였다. 산뜻한 향이 코끝에서 은은하게 감돌아 마음을 안정시키는 향. 오늘도 맡은 적 있는 라벤더의 향이었다.

 자연스레 나는 아나스타샤를 떠올렸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는 주인공이 홍차에 적신 마들렌을 먹다 그 냄새에서 어린 시절을 추억하는 장면이 있어. 그거와 같이 어떤 냄새에서 특정한 기억을 떠올리는 것을 프루스트 효과라고 해. 있잖아, 백야는 지금 무슨 기억을 떠올리고 있어?”

 “…….”

 아나스타샤를 처음 본 순간.

 직감이 속삭였다. 저 아이가 너를 살릴 거야. 태어나 한 번도 틀린 적 없는 감의 명령에 몸이 자동적으로 움직였다. 계절은 봄이었고 나는 시달리고 있었으니까.

 아나스타샤와 함께 있으면 나는 한 여름에도 겨울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아이가 걷는 길에는 눈꽃이 피고, 입을 열면 입김이 흘렀다. 오직 나에게만 보이는 이미지. 그 아이가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나는 살아날 수 있었다. 그래서 점점 빠져들었다. 그뿐인 줄 알았는데 시간이 지나자 깨달았다.

 이제 나는 겨울에서 아나스타샤를 느끼고 있어.

 언제 어디서든 그곳이 겨울이라면 나는 아나스타샤의 영역 안에 있는 거야. 벗어날 수 없는 몸이 되었고 벗어나고 싶지도 않아.

 미오의 말대로 나는 그 아이의 노예야.

 잠시 차를 세웠다. 더 이상 망상이 진해지는 것을 견딜 수 없었다.

 시키는 별 말 없이 내 상태를 지켜봤다. 조금 진정이 됐을 때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묻어왔다. 그거 기억나, 백야?

 “내가 무대 백댄서로 섰던 날. 그 날도 백야가 나를 찾아내고 말했던 거.”

 “네가 우주 어디에 있든, 내가 찾아내주겠다고, 했지.”

 빙고. 시키가 고개를 들었다. 백야는 정말로 내가 실종될 때마다 찾아줬지. 시키의 머리칼에서 풍기는 화학약품 냄새가 기억을 불러일으켰다.

 그 때도 차 안에서 이런 대화를 했다.

 막 아이돌이 된 시키가 취미로 실종됐을 때 나는 몇 번이나 찾아내 레슨을 시키고, 무대에 세웠다. 냄새도 행동도 하나 같이 마음에 안 들었지만 그렇게까지 한 이유는 이 아이가 방황 중인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아버지와의 안 좋은 일로 홀로 미국에서 일본으로 온 시키는 나와 마찬가지로 표류 중이었다. 넓은 우주를 탐구하다 낯선 행성에 불시착한 존재. 내가 느낀 시키는 그랬다. 그래서 약속한 것이다. 우주 어디에서라도 너를 찾아내 무대로 데려다주겠다고.

 “좀 거칠긴 해도 마음에 들었어. 백야는 정말로 나를 아이돌의 세계로 데려다줬으니까. 거긴 정말 신기했지. 쉽게 흥미를 잃는 시키냥이 벌써 5년째 머물고 있을 만큼. 그런데 나는 지금 백야가 표류 중이라고 생각해. 갈 곳을 알면서도 자꾸 도망치고 있잖아. 이번에는 내가 도와줄게. 데려다주지는 못 해도 고장 난 우주선에 좌표를 입력할 수는 있거든.”

 시키가 향수를 내 주머니에 넣었다. 이 냄새를 따라가.

 “목적지는 소행성 아나스타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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