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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다 로코] 말하지 못한 EMO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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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8-18, 2017 17:59에 작성됨.

"로코!! 너 또 휴게실에서 작업하는 거냐?!!"

 

적당히 좋은 날씨.

좁지도, 지나치게 넓어 휑한 느낌이 들지도 않는 딱 적당하게 넓은 휴게실.

적당한 크기의 음악 소리가 방 안에 감돌고 있던 그 때.

옷을 말끔하고 세련되게 차려 입은 훤칠한 키의 남성은, 그 특유의 적당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던 휴게실 안에서 크게 호통쳤다.

날카로운 눈매와 턱선이 인상 깊었던 남성의 시선은 잡동사니가 잔뜩 어질러진 책상 위에 턱을 괴고 앉아 고개를 까딱거리던 작은 소녀에게 향해 있었다.

그리고, 그의 호통 소리를 들었는지 푹신푹신해 보이는 양갈래 머리가 인상 깊은 소녀는 바로 볼을 빵빵하게 만들며 볼멘 목소리로 대답했다.

 

"프로듀서! 로코가 디자인에 대한 드래프트를 이메진 하고 있을 때는 터치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이메진이고 나발이고 휴게실에서 작업하지 말랬잖아 내가! 이 쓰레기들은 대체 뭐야?!"

"트래쉬라니요! 이건 로코 아트에 필요한 매터리얼들이라구요!"

 

프로듀서로 보이는 남성은 식식거리며 그녀가 앉아 있는 책상으로 빠르게 다가가더니, 잔뜩 어질러져 있는 잡동사니들을 집으며 로코라는 이름의 소녀에게 따졌다.

 

"아니 디자인에 쓰일 재료라면 좀 정리를 해놓던가. 이렇게 쓰레기처럼 아무렇게나 내팽개치면 당연히 쓰레기인 줄 알지!"

"너무 비지해서 까먹고 있었어요. 하지만 곧 치울 예정이었다구요? 그것보다 프로듀서! 이것 좀 봐주세요. 이번 콘서트를 맞아 시어터에 프레젠테이션 할 로코 아트의 드래프트인데 한 번 봐주시겠어요?"

"뭐……?"

 

로코가 자신 있게 종이에 스케치한 것을 들이밀며 보여주자, 프로듀서는 내키지 않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조용히 그녀의 디자인 시안을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얼굴 표정을 일그러뜨리더니, 다시 쏘아붙이는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아니, 이건 좀 아닌 것 같은데?! 정말 이런걸 시어터에 놔두겠다고?!"

"왜요! 이번 로코 아트는 정말 야심차게 준비한 거라구요!"

"이봐… 내가 비록 지금은 프로듀서지만, 프로듀서가 되기 전엔 디자인을 전공했단 말이야. 유학까지도 다녀왔고, 심지어 조소과 출신이야. 그런데 그런 내 앞에서 이런 디자인을 보여주면……."

"또 또! 프로듀서, 저의 로코 아트는 컨템포러리 아트 비전과는 궤를 달리하는 아방가르드한……."

"아방가르드고 나발이고, 작품 명은 빛의 천사인데 왜 시안에는 새까만 문어가 그려져 있는 거야?! 만약에 누군가가 와서 이 작품의 의도에 대해 설명해보라고 하면 설명할 수 있겠어?"

"그… 그건… 으……."

 

프로듀서의 날카로운 지적에 의기양양하던 로코는 고개를 살짝 떨구더니, 이내 볼을 빵빵하게 만들며 중얼거렸다.

 

"프로듀서는… 정말… 바보에요!"

"뭐……?"

 

어느 새 눈가에 눈물이 맺혀 있던 로코는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뒤도 안 돌아보고 휴게실 밖으로 뛰쳐 나갔다.

갑작스런 그녀의 행동에 당황한 프로듀서는 주춤거리며 빠르게 사라져 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지만, 얼마 안 가서 익숙하다는 듯 한숨을 쉬고는 주섬주섬 책상 위에 널브러진 잡동사니들을 줍기 시작했다.

 

"에휴……."

 

무슨 연유인지는 몰라도 가위와 칼로 엉성하고 조악하게 잘려진 종이들을 손에 주워담으며 프로듀서는 속으로 생각했다.

 

'하이고… 또 울리고 말았네.'

 

모두가 쓰는 휴게실에 작업을 한답시고 잡동사니를 어질러놓던 로코에게 주의를 준다고 한 것이, 작품에 대한 그녀의 프라이드에 상처를 입혀버리게 된 그는 아차 싶었는지 입 안에 고여 있던 씁쓸함을 삼키며 묵묵히 잡동사니들을 주웠다.

 

아이돌과 동시에 아티스트를 꿈꾸던 15세 소녀, 로코와 만난 지 얼마 안 된 그는 독특한 그녀의 행동에 아직 적응이 되지 않은 듯 보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녀에게 상처를 주면 안 되는 일이었다.

담당 프로듀서라면 더더욱 그러지 말아야 했다.

하지만 결국 또 다시 그녀의 마음에 상처를 입힌 프로듀서는 마음이 편치 않았는지 양 손에 한 가득 담긴 잡동사니들을 버리지 않고 책상 한 곳에 가지런히 모아두고는, 창문 너머로 보이는 풍경들을 보며 중얼거렸다.

 

"나… 이러다 미움 받겠지?"

 

그러다가 이럴 때가 아니다 싶었는지, 프로듀서는 뛰쳐나간 로코를 찾기 위해 휴게실을 나갈 채비를 했다.

잡동사니를 정리하지 말고 그녀의 뒤를 바로 쫓아갔어야 했음을 뒤늦게 깨달은 그는, 또 아차 하며 다급하게 몸을 돌려 휴게실 문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때였다.

 

"프로듀서, 또 코로쨩을 울리셨군요?"

"......!"

 

어느 새 문 쪽에서 프로듀서를 바라보고 있던 여성은 팔짱을 낀 채 또 저질렀냐는 듯 그에게 이야기했다.

풍성한 묶음머리에 기품이 느껴지던 여성의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오자, 프로듀서는 어떻게 알았냐는 듯한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이야기했다.

 

"치… 치즈루? 방금 그걸 어떻게 알았어?"

"프로듀서의 목소리, 그리고 울며 뛰쳐나가는 코로쨩의 모습. 딱 연상이 되더군요. 프로듀서가 또 코로쨩을 울렸구나 싶었어요."

"으윽……."

 

방금 전에 있었던 일을 정확하게 알아차린 치즈루는 멀뚱멀뚱 서 있던 프로듀서의 앞으로 사뿐사뿐 발걸음을 옮기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프로듀서, 자꾸 그렇게 코로쨩을 울리시면 안 된답니다. 레이디의 마음에 상처를 주면 젠틀맨이 될 수 없다구요?"

"…그건 아는데 말이지……."

 

어느 새 코앞까지 다가온 치즈루를 본 프로듀서는 로코에게 윽박지를 때와는 다르게 살짝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게… 아무래도 내가 머리 속으로 생각하고 있는 걸… 잘 표현을 못해서 말이야. 칭찬도 그렇고… 생각해보니 배려심도 없는 것 같기도 하고……."

"배려심이 없으신 건 아닌 것 같은데 말이죠. 물론 코로쨩한테는 좀 모질게 대하시는 것 같긴 하지만."

"솔직히 다른 아이들과는 아직 어색한데… 로코는 유독 편하게 느껴지거든. 그래서 내가 긴장도 안 하고 자주 선을 넘는 것 같네. 이러면 안 되는데 말이야……."

"하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하는 게 제일 나쁜 거죠."

"……그렇지."

 

치즈루의 정확한 지적에 프로듀서는 할 말이 없었는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로코에 대한 미안한 감정이 더 커져서 그런 걸까, 프로듀서는 조용히 고개를 돌려 책상 위에 모아놓은 잡동사니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런 프로듀서의 반응을 유심히 지켜본 치즈루는 잡동사니들을 슬쩍 본 뒤, 천천히 다시 입을 열었다.

 

"뭐, 프로듀서의 심정도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에요. 어찌되었던 간에 코로쨩이 휴게실을 자주 어지럽히는 건 사실이니까요. 그런데 프로듀서, 혹시 그 아이가 왜 휴게실에서 작업을 하는 지 알고 계신가요?"

"음……?"

 

로코가 휴게실에서 작업을 하는 이유.

그 이유에 대해서 평소에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고 있던 프로듀서는, 치즈루가 던진 질문에 살짝 놀라면서도 궁금증이 순식간에 끓어올랐는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녀에게 물었다.

 

"모… 모르겠는데? 혹시 무슨 이유라도 있었던 거야?"

"흐흠……."

 

치즈루는 프로듀서의 반응을 예상이라도 한 듯 고개를 끄덕이고 헛기침을 하고는,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사실 코로쨩, 프로듀서가 온 뒤로 휴게실에서 작업을 하기 시작한 거에요. 그 전까지는 개인 작업실을 썼었죠. 그러다가 언젠가 한 번 휴게실에서 작업을 하다 프로듀서한테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듣고 난 뒤로는 줄곧 휴게실에 와서 작업을 하더라구요."

"지… 진짜? 몰랐는데……."

 

치즈루의 입에서 나온 뜻 밖의 이야기.

줄곧 로코가 휴게실에서만 작업을 한 것인 줄 알고 있었건만, 자신이 프로듀서로서 이 곳에 온 뒤로 그녀가 휴게실에서 작업을 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그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우연히 휴게실을 지나가다 디자인 작업을 하고 있던 로코에게 조언을 해준 적이 있었는데, 그 날 이후로 로코가 작업을 휴게실에서 하게 되었다니.

말로 감정을 잘 표현하지 못 할 뿐이지, 눈치는 빨랐던 프로듀서는 곧바로 그녀가 무슨 심정으로 지금껏 휴게실에서 작업을 했을는지 짐작하고는, 목구멍으로 타고 올라오기 직전이었던 미안함과 안타까움을 어떻게든 억누르며 치즈루에게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 그런 거였구나…! 아… 큰일났네 진짜… 치즈루,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어떻게 하다니요?"

"아니 그런 것도 모르고 내가 로코한테 여태까지 윽박질렀던 거잖아……."

"일단 빨리 사과를 하셔야죠?"

"사과만으로 과연 그 애 마음을 풀 수 있을까?"

"그건 저야 모르죠."

"아이고……."

 

난처해진 프로듀서는 당혹감에 어쩔 줄 몰라 길쭉하게 뻗은 다리를 부산히 움직이며 발을 동동 굴렀다.

샤프하게 생긴 미남의 행동거지라고 하기엔 뭔가 어색하면서도 웃긴 구석이 있었는지, 그 모습을 보던 치즈루는 겨우 웃음을 참으며 애써 기품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커… 커흠! 어쨌든 코로쨩을 만난다면 바로 사과를 하셔야 해요! 이렇게 울면서 뛰쳐나간 적은 없었으니까요. 아셨나요?"

"으… 응. 일단 로코가 어디 있는지를 알아야겠네… 어쨌든 조언 고마워. 역시 치즈루는 셀레브리티답게 인간관계에 대해 잘 알고 있구나. 다행이야."

"……네? 아! 오~~~호호호호홋. 그야 당연하죠. 저는 그 유명한 니카이도 치즈루니까!"

 

전혀 예상치 못한 칭찬에 당황한 치즈루는 기껏 무겁게 잡고 있던 분위기가 뭉개질 정도로 과하게 웃었다.

허나 그녀가 진짜 셀레브리티라고 믿고 있었던 프로듀서는 그녀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며 곧바로 휴게실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렇게 침묵과 함께 휴게실에 덩그러니 남겨진 치즈루는 프로듀서의 인기척이 완전히 사라진 뒤에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뭐야… 칭찬 잘 하잖아……."

 

갑작스러운 프로듀서의 칭찬에 적잖이 놀랐던 치즈루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책상 위에 모아져 있던 잡동사니들을 쳐다보았다.

창문 너머에서 들어오는 따뜻한 햇살이, 잡동사니들을 비추고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은은한 햇살 대신 조명의 환한 빛이 휴게실을 밝게 비추는 저녁이 되었다.

일도 내팽개친 채 로코를 찾던 프로듀서는 그러나 결국에 그녀를 찾지 못했는지, 터덜터덜거리며 복도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전화도 안 받고… 어디 간 거야 대체……."

 

몇 시간이 지나도 도통 보이질 않던 그녀가 걱정이 되었는지, 프로듀서는 불안에 떠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녀와 친한 아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로코가 갈 만한 곳을 다 뒤져봤지만, 그녀의 모습은 커녕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던 상황.

혹여 그녀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이 아닐까 노심초사하던 프로듀서는, 그녀가 평소처럼 휴게실에서 작업을 하고 있기를 바라며 조심스럽게 불이 켜져 있던 휴게실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휴게실 문 앞에 도착한 프로듀서는, 침을 꿀꺽 삼키고 굳게 닫혀 있던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

 

책상에 엎드려 곤히 잠들어있는 로코가 그의 두 눈에 들어왔다.

가지런히 모아두었던 잡동사니들을 다시 어질러 놓은 채 피곤했는지 새근새근 책상 위에 얼굴을 파묻고 잠들어있던 그녀.

그런 로코의 모습을 본 프로듀서는 안도하면서 동시에 미안함을 느꼈는지 그녀의 이름을 부르려고 했지만, 차마 잠든 그녀를 깨울 수는 없었는지 말없이, 지긋이 그녀의 모습을 쳐다보았다.

 

"……."

 

그러다가 혹시라도 몸이 춥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었던 그는 조심스럽게 어딘가로 가더니, 가볍게 걸칠 수 있는 담요를 들고 와서는 천천히 그녀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조심스레 그녀의 가녀린 몸을 담요로 덮어준 프로듀서는, 미안한 감정이 서린 눈빛으로 조용히 잠든 그녀의 두 눈을 쳐다보았다.

 

"……."

 

이제 15살이었던 로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알고, 꿈에 대한 열정으로 항상 열심이던 그녀는 나이에 걸맞는 발랄함과 동시에,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책임감과 열의를 보여주었다.

로코 아트라는, 그녀만의 독특한 아이덴티티가 설령 프로듀서를 포함한 주변 사람들로부터 무시를 당한다고 해도 그녀는 굽히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걸어왔다.

현실에 부딪혀 디자이너라는 꿈을 포기하고 어떻게 인연이 닿아 프로듀서가 된 그는 표현을 하지 못했지만 그런 로코를 대견해했다.

 

하지만 표현의 미숙함 때문에.

아니, 사실은 표현의 미숙함은 핑계고 솔직한 마음을 드러내는 것에 대한 부끄러움, 그리고 로코에 대한 부러움 때문에 그녀에게 가지고 있던 마음을 말하지 않고 있었던 프로듀서는 자신의 그런 모습이 원망스러웠는지, 입 안에 머금고 있던 씁쓸함을 조용히 삼켰다.

 

"……."

 

하지만 그런 자신을 믿고 따라와 준 로코였기에, 그런 로코에게 또 다시 무심코 상처가 되는 말을 했던 그였기에, 프로듀서는 용기를 내서 로코에게 이야기해야만 했다.

미안하다, 그리고 네가 대견하고, 자랑스럽다고.

프로듀서는 비겁하지만 일단 그녀가 자고 있는 사이에 연습 겸, 자신이 말하지 않고 있던 걸 조심스레 입 밖으로 꺼내기 시작했다.

 

"……로코, 혹시 자고 있냐?"

"……."

 

곤히 잠들어 프로듀서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있던 로코.

그녀가 반응이 없자, 프로듀서는 침을 다시 한 번 꿀꺽 삼키고는 천천히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너가 깨어난다면… 다시 이야기할 거지만… 일단 아까 일은 정말 미안했다. 좋게 이야기 할 수도 있었던 건데… 괜히 널 무시하는 말을 해서… 어……."

 

예행연습이었음에도, 프로듀서의 얼굴이 순식간에 빨갛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그는 애써 몸과 마음을 감싸고 돌던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리고… 평소에 이야기를 하진 않았지만… 실은 네가 대견해. 누구보다도 노력하는 모습이 보기 좋고. 어… 그리고… 부족한 나를 믿고 따라와줘서 고맙……."

"으으……."

 

하지만 그 때였다.

프로듀서의 이야기가 다 끝나기도 전에, 로코가 하품을 하며 잠에서 깨어났다.

담요가 걸쳐진 걸 몰랐는지, 그녀는 빠르게 몸을 일으켜 세웠고, 그녀를 덮고 있던 담요가 힘없이 바닥으로 툭 하고 떨어졌다.

 

"……!!"

"으으….? 어, 프… 프로듀서!"

 

잠에서 깬 로코는 눈을 비비다가 몸을 숙인 채 가까이 붙어 있던 프로듀서를 보고 화들짝 놀랐다.

물론 놀란 건 프로듀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로코에게 물었다.

 

"이… 일어났니?! 자… 잘 잤어?!"

"프… 프로듀서! 언제부터 여기에 계셨던 거에요?!"

 

서로 깜짝 놀랐는지 질문에 질문을 거듭하던 두 사람은 두 눈을 크게 뜨며 좀처럼 진정을 하지 못했다.

 

"전화를 꺼둬서 얼마나 놀랐는데…! 찾고 있었다니까?"

"그… 그런가요?! 배터리가 다 되서 전원을 오프하고 있었는데… 몰랐어요!"

"하… 난 또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았네……."

"그… 그나저나 프로듀서, 저를 찾고 계셨던 건가요?"

"……!"

 

자신을 찾고 있었냐는 로코의 질문에 그제야 정신을 차린 프로듀서는 헛기침을 한 번 하고는, 고개를 숙이며 진지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이야기했다.

 

"미안. 아까 윽박질러서 미안했어. 좋게 이야기를 할 수도 있었는데 내가 괜히… 너를 무시하는 말을 했어. 정말 미안해."

"!"

"그 말을 하려고 널 찾고 있었는데… 전화도 안 되고 도통 모습도 안 보여서 걱정을 했었거든. 그래도 이렇게 만나서 다행이네… 다행이야."

"……."

 

처음으로 프로듀서에게 사과를 받아본 로코는 잠이 덜 깼는지 어안이 벙벙했지만, 그래도 자신을 걱정해주던 그가 내심 고마웠는지, 같이 고개를 숙이며 이야기했다.

 

"저도 죄송했어요, 프로듀서. 휴게실은 다 같이 쓰는 공간인데… 저 혼자만 너무 엉망으로 쓰고 있었네요. 다음부터는 주의할게요."

"로코……."

 

항상 엉터리 영어를 섞어가며 이야기를 하던 평소와 달리, 많은 감정이 담겨진 목소리로 사과를 하던 로코.

그녀의 마음을 눈치 챈 프로듀서는 땅에 떨어진 담요를 주우며 말했다.

 

"다음부터는 말할 때 조심할게. 표현이 서투르기도 하고, 넘지 말아야 할 선이라는 게 있는데 그걸 무심코 자주 넘기는 것 같고… 아무튼 다음부턴 이런 일이 안 생기게 노력해볼게."

"프로듀서…"

"시간도 늦었는데 피곤하면 돌아가도 좋아. 나도 슬슬 퇴근해야겠네."

 

그녀에게 마음을 터놓은 덕분인지, 한결 목소리와 말투가 부드러워진 프로듀서는 로코를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처음 보는 그의 미소에 로코는 살짝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그녀 역시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했다.

 

"…네! 저도 일단 뒷정리를 할게요. 오늘 하루 고생 많으셨어요 프로듀서!"

"응. 그럼 내일 보자. 들어가서 좀 쉬어."

"프로듀서도요!"

 

다정하게 인사를 나눈 로코와 프로듀서.

프로듀서는 담요를 손에 든 채로 조용히 휴게실 밖으로 빠져나갔다.

아무도 없는 복도로 홀로 나온 그.

 

"……."

 

사과는 했지만, 역시 부끄러움 때문에 결국 그녀에 대한 고마움과 대견함을 이야기하지 못했던 그는 손을 덜덜 떨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순식간에 얼굴이 새빨개진 프로듀서는 행여 누가 자신의 얼굴을 보지 않을까 싶었는지 소리 없이 종종걸음으로 사무실로 향했다.

 

그리고.

 

"……."

 

휴게실에서 화끈거리는 얼굴을 손으로 감싸 쥐던 로코 역시, 다급하게 책상 위에 어질러진 잡동사니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사실 프로듀서가 휴게실에 들어온 순간부터 이미 잠에서 깨어 있었던 그녀.

프로듀서가 자신에게 담요를 씌워준 것도, 그리고 자신이 잠들었다고 생각해 예행연습 삼아 나지막이 속삭였던 그의 본심도.

방금까지 있었던 모든 일들에 대한 부끄러움을 이겨내지 못한 로코는 허겁지겁 재료들을 챙겨 들고 휴게실을 빠져나갔다.

 

복도의 창문 너머에 펼쳐진 까만 캔버스.

그 캔버스에 박힌 별가루들이 유독 반짝반짝 빛나던 저녁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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