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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잡 -1-

댓글: 13 / 조회: 1022 / 추천: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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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8-18, 2017 17:40에 작성됨.

".....어라?"

 

그 스티로품 상자는 언제부터인가 원룸 안에 있었다. 아주 구석진 곳에 있어서 지금까지 눈이 닿지 않았다--라는 것도 아니다. 방바닥의 목재와 어울리는, 조금 때가 탄 흰색이여서 지금까지 크게 신경쓰지 않았던 거라고 보기엔, 이 상자의 위치가 너무 애매하다. 스티로품 상자는 창가 아래, 벽과 조금 떨어져 햇빛을 쬐기에 딱 좋은 자리에 있었다. 상자는 언제부터인가 그곳에 있었고, 남자는 그 스티로품 상자를 보며 자신의 영역이 침범당한 듯 한 약간의 불편함을 느끼면서도 귀찮음 등의 이유를 들어 그냥 그 자리에 두었다. 무엇인가를 담았을 때 쓰였던 상자는 그렇게 시간 속에 눌어붙은 땟국이 되어 원룸 한 곳이 제 집이라는 것마냥 당당히 햇빛을 쐬고 있었다.

 

"이게 뭐지?"

 

변덕이었을까, 우연이었을까. 남자는 무심코 창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어쩌면 며칠 전, 깜빡하고 창문을 열어두고 나간 날 갑자기 폭우가 내려 방 안이 젖어버린 걸 떠올렸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생활비 절약을 위해, 집에서 드라이클리닝을 할 방법을 찾고 있다가 창가를 본 걸 지도 모른다. 아무튼 남자는 창가를 향해 고개를 돌렸고, 며칠 전의 갑작스런 폭우가 거짓말인 듯 마냥 화창하게 개인 하늘이 너무 눈부셔 고개를 낮춰버렸다. 고개를 낮춘 곳에, 이젠 불편함도 얼마 느껴지지 않는 상자가 있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남자는 평소처럼 넘어가려 했다. 하지만, 상자 안에 들은 낮선 무언가가 남자의 시선을 끌었다. 땟국 위에 피어난 신선함을 느낀 남자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상자 속에서 무언가가 나타났다.

초록색 떡잎이었다.

 

"....에?"

 

눈을 비비고 다시 한 번 보았다.

연분홍색이 옅게 남은 물방울들 사이로, 옅은 갈황색으로 썩거나 말라죽은 떡잎들 사이로, 그 푸른 떡잎만이 화창한 햇살을 받아 싱그럽게 기지개펴고 있었다. 모처럼 맞이한 휴일의 아침에, 초록색 점이 찍혔다.

 

"풀?"

 

남자가 사는 원룸에서 살아있는 생물은 오직 남자 한 명 뿐이었다. 그는 곰팡이나 벌레 같은 자들에게 손쉬운 동거를 허가하는 맘씨좋은 사내가 아니었다. 방 구석에는 살충제와 곰팡이 제거제가 자기 앞의 살아있는 것들을 말살하기만을 기다리며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 물론 제초제 계열은 그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한참동안 그 이름모를 풀을 쳐다보던 그는, 자신을 찾는 휴대폰의 목소리에 회색빛 현실로 돌아올 뻔 했다. 그의 눈 속에서 녹색 점이 사라졌다.

 

[프로듀서, 잠깐 시간 있어요?]

 

녹색 점이 사라진 자리에 화색이 피었다. 잠시 후, 그는 청바지와 티셔츠를 입고 원룸을 나섰다. 정장 차림에선 느낄 수 없던 가벼움이 그의 발걸음에 경쾌한 음색을 더한다. 입술을 오므려 휘파람을 불어보려 했지만, 애석하게도 높은 음악소리 대신 바람 빠지는 소리만 흘렀다.

 

 

--

 

조금 밝아 보이네요. 무슨 일 있어요?

 

아아, 오늘 부른 이유요? 실은 그게.....

 

....고마워요. 덕분에 살았어요. 기껏 AS서비스에 가입했는데 이럴 때 쓸 수가 없다니.

 

쉬는 날에 불러서 죄송해요. 아, 혹시 괜찮으면 식사라도 같이 할래요?

 

어라, 평소엔 중화요리만 시키던 사람이 왠일이에요? 아 잠깐만요, 설마 비싼 거 시킬.....

 

다 먹고 백엔샵이요? 좋아요. 같이 가죠. 그런데 오늘따라 왠지

 

그러니까 몇 번을 말하지만, 절 부를 땐---

 

--

 

 

남자는 아이돌 사무소 소속의 직원으로, 직급은 프로듀서이다. 지금 한 명의 어린 아이돌을 담당하고 있다. 한창 사춘기인 여자아이들보다 훨씬 더 취급하기 어려운, 그런 아이다. 남자도, 남자의 주변 사람들도 그렇게 평가했다. 육성이라는 게 프로듀서의 업무인 이상, 주변의 평가라는 건 피할 수 없고 피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에고고고......"

 

'하지만 귀여운 부분도 있다고' 그는 마음 속으로 담당 아이돌을 변호하고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그의 옷 곳곳에 묻은 흙먼지가 옷을 적신 땀과 함께 섞여 있어 나갈 때 보다 훨씬 더러운 상태였고, 동시의 그에 손엔 여러 가지 짐이 들려 있었다. 비닐 봉투 2장에 쌓인 묵직한 짐들을 방바닥에 내려놓고, 그는 이번에야말로 운동을 시작하겠다고 다짐하며 팔을 주물렀다. 잠시 팔을 주무르던 그가, 컴퓨터를 다시 켜 필요한 것들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식물을 기를 때 필요한 것들 : 흙, 비료, 제초제, 화분, 화분받침 등등] 필요한 항목을 인터넷에서 대충 읽는 동안, 그의 머리 속에서 운동에 관한 맹세는 새로운 정보들의 쓰나미에 의해 순식간에 쓸려나갔다. 

 

"어디 보자, 우선 흙을 화분에....."

 

남자는 화면을 대충 읽다 말고, 조금은 성급하게 일을 시작했다.

그는 방을 둘러보았다. 화분은 당연히 존재하지 않았다. 내용물이 조금 남은 채로 쓰레기통에 쳐박힌 콜라 페트병은, 아무리 봐도 화분으로 쓸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안 그래도 담당 아이돌로부터 너무 콜라를 사랑하는 것 아니냐고 핀잔을 들은 참이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다, 시간 속에서 땟국처럼 방 안에 눌러앉은 스티로품 상자를 보았다. 그의 눈에 다시 초록 점이 들어왔다. 기분 탓인지, 그가 나가기 전 보다 더 커진 것만 같았다. 연분홍색 물때와 죽은 떡잎들을 식량 삼아 더 커진 것일까.

남자는 나름 조심스럽게 새싹의 줄기를 잡아 들어올렸다. 내려놓을 곳을 찾기 시작했을 때에야, 미리 티슈를 물에 적셔두었다면 편했다는 걸 깨달았다. 비효율적이고 초보적인 실수다. 남자는 스스로의 행동을 그렇게 평가하며 티슈를 찾다, 티슈 대신 키친타올을 한 장 뜯어서 물에 적시고 그 위에 새싹을 올려두었다. 남자는 잡초와 그 외의 식물들을 구분할 줄 몰랐지만, 흰 이불 위에 누운 초록색 점은 그것이 잡초인지 아닌지는 상관없다는 걸 알려주고 있었다.

 

"원석은 어디에나 있지. 그걸 연마하는 건 사람 나름이고."

 

그는 선배가 한 말을 입에 담았다. 멋쩍은 듯, 볼과 뒤통수를 긁적이던 남자는 무엇인가를 떠올린 듯 비닐봉투를 열었다. 흙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가 산에서 퍼온 마사토였다. 근처 백엔샵에서 사 온 모종삽을 가지고, 필사적으로 굳은 땅을 파내며 누가 볼새라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파 온 것이다. 스스로의 모습을 떠올리니 어지간히도 수치스러웠던 건지 그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잠시 후, 그는 작업을 다시 시작했다.

 

"흙이 조금 부족하나....?"

 

스티로품 상자에 흙을 부었다. 도심의 구석에서, 필사적으로 자연이란 것을 구성하고 있던 흙들이 갑작스레 문명으로 끌려들어왔다. 인간이 만든 인공물에 갇힐 때 마다, 흙들이 기분 나쁜 소리를 내며 비닐봉투에서 굴러떨어졌다. 결국 상자 바깥으로 뛰쳐나간 흙들이 나타나버렸다. 남자는 한숨을 쉬며, 작업이 다 끝나고 나서 빗자루로 쓸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자는 1/3도 채워지지 않았다. 스티로품 상자가 크기보단, 남자가 사용한 비닐봉지가 작은 탓이었다. 흙 속에서 남자가 사먹은 빵 봉지가 나올, 그 정도의 크기다.

 

"흙의 종류.... 산에서 퍼온 흙이면 되겠지 뭐."

 

남자에겐, 원예나 재배에 관한 지식이 없다. 당연히 흙의 종류 따위를 자세히 알고 있을 리도 없다. 산에서 흙을 퍼온 이유조차 '식물들이 자라는 산에서 퍼 온 흙이니까, 이름모를 풀을 기르기에도 적절할 것이다' 라는 것이었다. 그냥 그렇게 생각하고서 퍼온 것이다. 애초에 무슨 풀인지조차, 남자는 알지 못했다.

그저, 땟국물처럼 눌러붙은 무미건조한 풍경이 바뀌었기에. 그 뿐이다. 굳이 이유를 더 붙이자면, 주말 동안 딱히 할 일이 없어서이기도 했다. 할 만한 게임을 찾지 못한 것 또한 이유 중 하나다.

 

"그리고, 이걸 옮겨심은 다음에..."

 

남자는 모종삽으로 얇게 흙을 파내 새싹을 집어넣고, 뿌리 위를 흙으로 살짝 덮어주었다. 하지만 마사토는 금새 부스러져 뿌리를 다시 방 안의 공기에 노출시킬 것 만 같았다. 남자는 고슬고슬 떨어지는 흙먼지 입자를 다시 덮어씌우려 하다, 몇 번의 시도 끝에 허망한 일임을 깨닫고 포기해버렸다. 대신 냉장고 속에서 물을 꺼내, 식물 주변에 부어버렸다. 한번에 확 부어버렸기 때문에 식물의 뿌리가 다시 드러나버렸고, 남자는 자기 손을 젖은 흙으로 더럽힌 후에야 새싹의 뿌리를 흙 속에 묻을 수 있었다.

 

남자는 손을 씻으며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동시에 뿌듯함도 느꼇다. 현장에 자주 나간다곤 해도, 육체노동을 하진 않는 그에게 있어 이 정도의 중노동은 보람을 느낄만한 일이었다. 몸을 쓰고, 조금 계산 바깥의 일도 있긴 했지만 어찌되었든 완수하지 않았는가. 그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설계가 완벽했는지 체크하기 위해 대충 읽어내린 화면 앞에 앉았다.

 

"화분받침은... 물구멍?"

 

안타깝게도, 그의 설계는 처음부터 틀려 있었다. 우선 화분으로 쓸 스티로품에 물구멍을 내고 큰 쟁반을 화분밭침으로 삼아야 했다는 걸 그가 알 리가 없었다.

 

잠시 후, 원룸 바닥은 젖은 흙 천지가 되었다. 새싹은 어찌어찌 무사한 듯 싶었다.

 

--

 

....근육통? 평소에도 몸이 약한 건 알았지만

 

찔리시면 운동을 하세요. 저도 매일같이 트레이닝하고 있잖아요. 저보다 체력 없는 거 아니에요?

 

헤에.... 승부요? 받아들이죠. 달리기? 뭐 좋.... 잠깐만요 그거 반칙!! 지금 갑자기 출발하는 게 어딨어요?!

 

하아... 하아.... 아픈 건 팔인데 왜 다리가 꼬인 거에요? 아무튼 제가 이겼으니까 밥 사줘요

 

아, 오늘도 외식이에요.

 

그런데 대체 무슨 일을 한 거에요?

 

농사....? 여기 도쿄인데요? 혹시 작은 땅이라도 하나 얻었어요?

 

식물 기르는 것도 큰일이네요... 잠깐, 저보다 쉽다니 그거 무슨 뜻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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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적인 제목, 건전한 내용. 그렇다 농자천하지대본인 것이다.

오랬만에 하체운동까지 포함해서 제대로 운동을 하니까 글이 꽤 잘 나오네요.

음, 이거 몇 편이나 쓸려나? 퀄리티가 괜찮게 뽑혔으니 가능하면 쭉 쓰고 싶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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