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카테고리.

  1. 전체목록

  2. 그림

  3. 미디어



[오오하라 베이커리]-여섯 명의 마녀와 한 명의 괴물 (4)

댓글: 2 / 조회: 784 / 추천: 2


관련링크


본문 - 08-17, 2017 01:07에 작성됨.

이전편들

 

원래라면 닫혀서 열리지않아야할 문이 열렸다. 열린 문에서 가벼운 종소리가 한 번 울리고, 히이라기가 밤까지 기다렸다기에는 너무 어린 소녀가 들어왔다.

 

“어서오세요. 사에 양.”

 

사에가 살짝 인사를 하고는 히이라기의 손바닥이 가르킨 의자에 사뿐히 앉았다. 아직 더운 김을 내뿜고 있었지만, 너무 뜨겁지는 않은 차가 서로의 앞에 놓여 있었고 테이블의 중앙에는 빵들이 접시에 담겨있었다.

 

히이라기가 빵을 권유하자, 사에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조금만 떼어내어 받아갔다. 시간도 늦었고, 케이크까지 이미 대접받았기에 그리 당기지는 않았다. 하지만, 히이라기가 불편해하는 것도 좋아하진 않는다.

 

히이라기는 사에가 빵을 입에 넣는 것을 보고서야, 자신도 빵을 먹기 시작했다. 방금전에 케이크를 만든 사람은 배가 고팠겠지만, 사에가 받지않는다면 히이라기는 혼자 먹지않았을 것이다. 그런 사람이니까. 사에는 잠자코, 빵을 뜯어먹으며 히이라기의 여유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다. 그럴 생각이었다.

 

그러나, 히이라기의 배려가 한 수 앞이었다. 빵을 조금 뜯어먹고서 히이라기는 사에에게 말을 걸었다.

 

“이런 밤에 굳이 찾아오실 줄은 몰랐네요.”

 

“그런 것치고는 너무 준비하신 것 아닌가요?”

 

그는 들켰느냐는 물음과 함께 미소를 띄웠다. 이미 여러명의 처녀를 홀린 미소에 단단히 결심하고 온 소녀의 마음이 빠르게 허물어져버렸다. 지금은 어린애처럼 보이고싶지않았기에, 사에는 고개를 빠르게 숙여 달아오른 얼굴을 감췄다. 말아쥐는 주먹 속으로 기모노의 천들이 말려들어가 구겨지고있었다. 뻣뻣하게 굳은 채, 그대로 있다가 사에는 입안에 넣은 빵을 씹었다.

 

겉은 살짝 마른 듯, 종이가 살짝 찢어지는 느낌으로 시작했다. 부드럽기는커녕 오히려 조금 거친 느낌의 투박한 반죽. 고소하면서 조금씩 달달해지는 빵 반죽의 맛이 담백하게 닿는다. 그리고 그 속에서 빵 답지않은 소리가 나기시작한다. 빠지지직....빠지직.... 특히나 느린 사에의 입을 따라 야채들이 시원한 소리를 내며 씹히기 시작한다. 겨자를 넣은 걸까 살짝 톡 쏘며 매운 향이 알싸하게 코 끝을 간질인다. 짜지도 달지도 않고, 다만 빵 속에 약간 들어간 소금으로만 맛을 더한다. 아삭아삭 씹히는 야채의 맛에서 시나브로 단 맛도 느껴진다. 두툼한 빵이지만 한 조각, 한 조각, 씹어 삼키면서 오히려 속은 점점 가라앉고 달아오른 얼굴이 천천히 식어간다.

 

어느샌가 차분해진 사에는 고개를 다시 불쑥 들었다. 어두운 가게에서 은은한 불빛을 내는 등 밑에서 긴 생머리를 휘말리는 그 모습은 마치 처녀귀신같았다. 히이라기는 흠칫-했지만, 그렇다고 손에 든 찻잔을 떨어트릴 수 없었기에 살짝 몸을 흔들다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어딘가 불편하신가요?”

 

사에는 비장한 표정으로 입술을 앙다물고 눈을 감은 채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눈동자를 상대의 눈동자와 마주담은채, 그녀가 입을 열었다.

 

“히이라기 님, 일전에 드렸던 사업계획서를 되돌려 주셨으면 합니다.”

 

전에 갑자기 오오하라 베이커리 근처에 내고 싶다며 가져온 닭강정 사업계획서. 히이라기가 사에에게 조금 생각할 것들을 알려준 채 답변이 보류되었던 일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그녀는 되돌려달라고하고있었다.

 

“...이유를 물어도 될까요?”

 

조금 부담이야 되겠지만, 히이라기로서도 그리고 사에로서도 전혀 손해볼 것 없는 사업이었다. 그렇기에 히이라기는 그 내막이 궁금해졌다. 사에는 오른손을 가슴에 얹어 거칠어진 숨을 고르고 말을 시작했다.

 

“오늘, 히이라기 님이 요리하시는 것을 보고 느꼈습니다. 당신은 ‘최고’라고.”

 

“그런가요....뭔가 이렇게 들으니 조금 낯간지럽네요. 그나저나, 그게 어떻게 관련있다는 건가요?”

 

“제가 모르는 분야임에도, 히이라기 님이 ‘최고’라고 느꼈습니다. 그리고 문득 저를 다시 생각했습니다.”

 

사에는 가슴에 올린 손을 움켜쥐었다. 흰 색 피부 너머로 푸른 핏줄이 살짝 엿보였다. 사에는 가슴을 펴고 앞으로 나서듯 당당하게 말했다.

 

“저는 분명 히이라기 님을 사모하고있습니다! 뭐라고 하시던 지금, 저는 히이라기 님과 함께 같이 삶을 나누고싶습니다. 그래서 그런 일은 한 것입니다. 숨길 것도 없이, 제가 그런 사업을 하고자한 이유는....분명 히이라기 님 옆에 더 있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렇다면...”

 

사에는 히이라기의 말보다도 먼저 고개를 저었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오늘에서야 겨우 깨달았습니다.”

 

사에는 불쑥- 몸을 내밀어 히이라기에게 뻗었다. 둘의 코 끝이 아슬아슬하게 닿을락말락, 긴장감넘치는 거리를 가지고있었다. 사에는 행여나 히이라기가 고개를 돌릴까, 오른손으로 그의 턱을 붙잡아 자신과 마주보게했다.

 

“히이라기 님, 솔직히 대답해주십시오. 저를 어떻게 보시고 계셨나요?”

 

누구라도 놀라떨어질 법한 상황에 히이라기는 호흡 한 번 변하지않고 담담히 사에를 쳐다보았다.

 

뭐라고하면 좋을까. 여기서 진심을 말해야할까. 아니면 좋은 거짓말을 해야할까. 그게 아니면 능청스럽게 넘어가버릴까. 그건, 히이라기에게 너무나도 버거운 일이다. 선택의 문제를 넘어 그는 선택할 수 없다. 그는 그런 사람이 아니니까. 그런 삶이었다.

 

“.......”

 

“제가 걱정되십니까?”

 

‘어쩌면, 제가 걱정하는 건 저일지도 모릅니다.’

 

기나긴 침묵 속에서 히이라기는 드디어 입을 열었다.

 

“적어도, 사에 양이 원하는 모습대로 보고있진않겠죠.”

 

사에는 천천히 뒤로 물러나 앉았다.

 

“그렇지요...저는 9살이나 어리고, 톱아이돌도 아닌 어린애니까요. 그렇기에 더더욱, 지금 그것을 되돌려받고싶습니다. 지금 히이라기 님 옆에 있기로 한다면, 저는 아마 평생 히이라기 님 뒤에서 쫒아다니고 도움받는 어린애일 것 입니다.”

 

히이라기는 이때,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틀린 소리는 아니니까. 지금 사에가 같이 있기로 한다면 그것은 철저하게 선후배, 사제관계가 될 것이다. 옆에 있을지라도, 진정 같은 상대로서 옆에 있을 수는 없는 길이었다.

 

사에는 그것을 느꼈다. 분야의 문제 이전에 히이라기와 자신 간의 격차를.

 

“지금이 어떻든, 저는 당신의 옆에 서있고 싶습니다. 제가 받았던 것만큼이나, 돌려드릴 수 있고 그러니까 저는...언젠가 히이라기 님과 같은 자리에서...”

 

천천히 말을 이어나가던 사에의 표정이 점점 힘겨워지더니, 서서히 빨개지기시작했다. 가슴에 담은 말을 온전히 전하지못하는 답답함, 그리고 말을 만들어내야하는 힘겨움이 결국 넘쳐흐르고 만 것이다. 그리고 사에의 이성은 완전히-

 

“똑같은 자리에서 만나, 청혼하고싶습니다!!!”

 

멈춰버리고말았다. 동시에 히이라기가 찻잔을 입가에서 기울이는 순간이었다. 차를 삼키고 찻잔을 내려놓는다. 그 짧은 순간이 사에에게는 길고도 긴 순간이었고, 이성이 돌아오는 시간이었다.

 

“어.....에.......”

 

자기자신에게 경악하며 사에가 허둥지둥하는 순간, 평소의 폭넓은 옷이 그녀의 발에 밟혔다. 그녀가 넘어진다.

 

“꺄앗!?”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일어날 법한 통증은 없었다. 넘어지기 직전에 히이라기의 손이 그녀의 팔을 잡고있었으니까.

 

“.....”

 

“아으...저기, 그러니까 히이라기 님? 방금 전 말은...”

 

그대로 히이라기는 사에를 안았다.

 

“고마워요. 사에 양”

 

더 이상 말할필요도, 정리할 필요도 없었다. 히이라기는 사에의 마음을 이미 알아챘으니까. 그 날, 달 아래에서 자신이 반했던 사에의 마음이었으니까 똑똑히 기억하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미안해요.”

 

히이라기의 사과의 말을 덧붙이며 천천히 고개를 올렸다. 휠체어에서 몸을 조금 빼어, 사에의 입술---보다 조금 위쪽에 닿았다.

 

이마에 그의 입술이 닿았다.

 

“지금은 이것뿐이네요.”

 

“에.....?”

 

“기다리고 있을테니까. 다녀오세요. 사에”

 

은색 달빛이 천천히 어두운 밤을 이끄는 날이다. 그 날과 같은 날이었다. 길을 잃은 남자가 소녀의 눈물섞인 선언을 들어주고, 소녀의 길을 열어준 날. 달빛과 함께 흐려지는 소녀의 등을 보며, 남자가 소녀에게 반하는 날이었다.

 

====

 

로맨스는 제가 쓸 것이 아닙니다. 잘못했습니다.

 

이야기가 조금 사에로 튀어버렸는데 중요한 부분이라 꼭 넣고싶었습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오래된 빵집, 군산 이성당에 다녀왔습니다.

 

 

 

이하는 삭제 씬.

 

그 날도 오늘처럼 달밤이었다. 히이라기도 길을 잃어버리고 헤메이던 날이었다. 태어나서 짊어져야했던 오오하라라는 짐. 그것을 버티고 들고있게 해주던 가족. 하지만 코바야카와의 저택에서는 가족을 볼 수 없었다. 아버지는 너무 바빴고, 여동생은 오지도 못했으니까. 조리 후의 피로와 아무런 감흥없는 텅 빈의 말소리에 너무 괴로웠다. 미치루가 옆에 있었다면 조금 나았겠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차마 울어버릴수도 없어서 그냥 자리를 박차고 나온 날이었다.

 

헤메임의 끝에서 그는 그날, 울고있는 소녀를 만났다. 코바야카와 사에였다. 천천히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다. 처음에는 자신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자신과 다르다고 곧 생각했다. 태어났다는 이유로 짊어진 인생이라는 것 같았지만, 그 짐을 수긍한 자신과 다르게 사에는 자신만의 길을 향해 빛났으니까.

 

히이라기는 빛에 끌리듯 천천히 말을 해주었다. 자신이 꿈꾸었던 것들, 자신이 바라만 보아야했던 것들....수많은 이야기 속에서 소녀의 눈에서는 물이 가시고 빛이 흘러나왔다.

 

히이라기, 자신에게는 없는 것. 그리고 그가 그토록 바랬던 것. 그녀는 그것이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2 여길 눌러 추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