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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레마스/나오카렌] 뒷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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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8-02, 2017 15:41에 작성됨.

※어두운 글입니다. 이런 분위기를 원치 않으신다면 백스페이스를 눌러주세요.
 
 
눈꺼풀을 찌르는 빛에 카미야 나오는 눈을 떴다. 아침노을이 커튼 사이를 비집고 나와 방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언젠가부터 아침의 햇빛이 성가셔질 시간에 일어나게 되었다. 빛은 잠에서 깨어나라고 재촉하는 아이처럼, 매일 아침 나오를 괴롭혔다. 좋은 점이 있다면 알람이 없이도 늦지 않게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날씨가 흐린 아침에는 아무 소용이 없지만.
나오는 시계를 봤다. 오전 6시. 이 시간에 일어난 이상 다시 잘 수는 없으니, 하루의 시작을 준비하기로 했다. 마음을 먹자 몸이 따라 움직였다. 커튼을 젖히고 창문을 열었다. 꽉 막힌 방 공기를 물기젖은 바깥 공기가 대신했다. 그러고보니 창 밖 도로에는 물웅덩이가 고여 있었다. 고개를 올려 바라본 하늘에는 구름이 가득했다. 나오를 깨운 햇빛은 얇은 구름을 뚫고 나온 것이었다. 정말로 성가신 태양이었다.
바깥바람을 맞으며 나오는 아침식사를 준비했다. 냉동실에 쌓아둔 식빵 두 조각을 꺼내 토스터기에 넣고, 땅콩버터와 나이프를 꺼내두었다. 빵이 구워질 동안 나오는 물을 마시며 생각을 정리했다. 오늘의 일정, 내일의 일정, 예정된 일들 등등. 오랫동안 아이돌로서 일해온 만큼 명성이 쌓였고 일정은 빠듯해졌다. 일정을 복기하는 일은 곧 마음을 가다듬는 일이었다.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어떤 모습으로 대처해야 할지를 생각해두면 실수를 할 일이 없었다. 집을 나서면 생각할 시간조차도 부족해지기에 나오는 이 시간을 생각하는 데에 할애했다.
빵이 토스터기에서 튀어나오고, 식사를 하고, 몸을 씻고, 화장을 하는 등 나오는 나갈 준비를 끝냈다. 마지막으로 핸드백의 내용물을 확인한 뒤, 나오는 프로듀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다 울리기도 전에 그가 전화를 받았다.
"준비 끝났어, 프로듀서."
"나도 도착해 있어."
그가 와있음을 확인한 나오는 전화를 끊었다. 코트를 걸치고, 높지 않은 구두를 신었다. 대문을 나서자 프로듀서의 차가 보였다. 조수석에 앉자마자 차가 출발했다. 운전을 하면서 프로듀서는 나오에게 계속 말을 했다. 오늘의 일정에 관한 이야기들이었다. 다시 말해, 나오가 토스트가 구워지길 기다리며 생각했던 내용들이었다. 나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가끔씩 고개를 끄덕이며 프로듀서의 말에 동조했다. 이미 아는 내용이라고 찬물을 끼얹어봤자 변하는 것은 없었다. 이것도 프로듀서 나름의 하루를 시작하는 방법일테니 내버려 두자는 생각이었다. 둘 다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일 하러 가는 길이 너무 적막하기도 했고.
하지만 일 이야기로 가는 시간을 다 보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곧 소재는 떨어져버렸고 차 안에는 정적만이 감돌았다. 나오는 먼저 말을 거는 일이 없었다. 항상 이런 식이었다. 프로듀서가 이야기를 다 하면, 그 뒤로는 아무 말도 오가지 않았다. 점심을 어떻게 먹을지에 관한 이야기 정도. 프로듀서가 종종 무슨 이야기를 하면 좋을까 고민하는 표정을 보였지만, 나오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서로 이야기를 한 적이 없기 때문에 둘 사이의 공통점이라고는 아이돌 업무밖에 없었다. 그 외의 것을 말해봤자 의미없는 짓이라는 생각이었다. 나오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흐린 하늘은 여전히 개일 생각이 없었다.
 
둘은 방송국에 도착했다. 첫 스케줄은 라디오 생방송이었다. 시간이 30분 남짓 남아있었기에 나오는 방송 전 개인적인 점검을 했다. 목소리가 갈라지지 않는지, 물은 충분히 마셨는지, 발음이 새지는 않는지. 이상한 점은 없었다. 미리 들어가 인사라도 해둘 겸 차를 떠나려 할 때, 프로듀서가 갑자기 말을 걸었다.
"저기, 나오."
"응? 왜?"
나오는 무심코 대답했다. 더 이상 일에 관해서 할 이야기는 없을텐데, 더 알려줄 일이라도 있나.
"오늘 오후에 시간이 비잖아."
"그래서?"
"그, 간만에 비는 시간이기도 하고."
"했던 말을 또 하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그러니까 오랜만에 린이라도 만나보는게 어때?"
프로듀서의 말은 나오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오후에 일정이 비는 것은 알고 있었다. 몇 달 만에 비는 것이라는 사실 또한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 시간이 날 때마다 혼자 돌아다니거나 집에만 있었다는 걸 프로듀서가 모를 리가 없었다. 일에 관련된게 아닌 이상 프로듀서는 나오를 터치하지 않았고, 나오도 그랬다. 서로 그러자고 합의한 적은 없지만, 그게 지금까지 이어져 온 암묵의 규칙이었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너무 깊게 참견했나. 미안해."
프로듀서는 더 말을 하지 않았다. 나오는 고개를 돌렸다. 프로듀서가 어떤 의도로 한 말인지는 알고 있었다. 그 내용이 자신의 생각과 맞지 않을 뿐이었다. 괜히 화를 내서 일을 복잡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다녀올게."
나오는 차를 나섰다. 프로듀서는 뒤따라오지 않았다. 그 또한 대기실에서 볼 일이 있겠지만, 잠시나마 나오와 거리를 두기 위해 늦게 오는 것일 터였다. 이런 면에서 프로듀서는 프로였다. 사람의 기분을 알고 맞춰주는 면에서. 가끔씩 조금 전과 같은 실수를 하기도 했지만.
그러고 보면 나오와 프로듀서가 사적인 대화를 한 것은 꽤나 오랜만의 일이었다. 예전에는 흔한 일이었지만, 나오가 행동 노선을 바꾼 이후로 둘은 사적인 교류를 거의 끊어버렸다. 예전의 자신이 떠올라 나오는 한숨을 내쉬었다. 잊고 싶은 모습들이었다. 하지만 그런 바람과는 반대로 한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옛날의 기억들이 하나둘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지금은 혼자 활동하지만, 카미야 나오에게도 여러 사람들과 부대끼던 시절이 있었다. 막 아이돌이 된 이후 나오는 여러 프로젝트와 유닛들에 참여하며 경험을 쌓게 되었다. 작은 프로덕션이 아닌 대기업의 프로덕션 부분이기에 346이라는 큰 이름 아래에서 활동하게 된 것이다. 그러다가 정착하게 된 곳이 있었다.
트라이어드 프리무스. 시부야 린, 호죠 카렌, 카미야 나오 셋으로 구성된 유닛은 쿨한 이미지를 앞세워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구성원을 모르는 사람들이라도 트라프리는 알았다. 어마어마한 인기에 사람들의 이목은 당연히 따라왔다. 그들의 모든 것이 화제가 되었다. 린의 가족이 꽃집을 운영하는 것도, 카렌이 감자튀김을 좋아하는 것도, 나오가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것도. 무대 위의 멋진 모습과는 다른 평소의 친근한 모습까지 화제가 되었다. 실제로도 그들은 서로 사이가 좋았다. 친한 친구로서 일도 일상도 함께 보냈다. 지금 생각해도 행복한 나날들이었다. 모든 것이 바뀌기 전에는......
아아, 이 생각은 이제 그만하자. 나오는 고개를 저었다. 생방송 시작이 얼마 멀지 않았다. 사람들이 원하는 이미지를 보여주기 위해서는 집중해야만 했다. 상념에 젖어있다가는 어떤 말을 하게 될지 알 수 없었기에, 그녀는 남은 시간을 마음을 비우는 데에 썼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한 시간의 방송은 순조롭게 끝났다. 실수는 없었다. 방송을 진행하는 동안 나오는 사람들이 기억하는 대로의 카미야 나오였다. 여동생같은 어린 시절을 지나 멋진 여성으로 탈바꿈한 아이돌이었다. 적당히 우수에 젖은 채로, 몇몇 질문은 쿨하게 넘기고, 가끔씩은 당황하는 모습도 보인다. 프로듀서에게 이상한 이야기를 들어 조금은 신경쓰였지만 그 뿐이었다. 잠깐 옛날 생각에 빠진 정도였다. 이번 방송따라 당황하는 모습을 많이 보인 것 같았지만 크게 이상하지는 않았어, 라고 나오는 생각했다.
"나오쨩, 아니 카미야씨, 오늘도 멋졌어요! 입고 오신 코트부터 말씀하시는 것까지 전부요!"
"당신의 마음에 들었다면 다행이네요. 고마워요."
어린 라디오 진행자의 반응이 생각보다 격했다. 예의를 차려 대답을 해주니 더더욱 그랬다. 얼굴에 홍조까지 떠 있었다. 기쁨을 억지로 참는 모습이었다. 나오는 프로듀서의 말이 기억났다. 이번 라디오 진행자는 네 열렬한 팬이라고 하더라. 하지만 이렇게까지 좋아해 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 했는데.
"그, 그그그, 뭐라고 해야 할까. 저, 카미야씨를 오래 전부터 봐왔거든요. 데뷔부터 지금까지 계속! 처음 라이브 회장에서 우연히 봤을 때부터 저도 모르게 막 끌렸는데-"
그 뒤로는 당연한 이야기들이 이어졌다. 나오의 신인 시절부터 프로젝트 크로네, 트라이어드 프리무스 시절을 지나 지금까지. 나오가 아이돌로서 거쳐온 모든 과정이 전부 설명되었다. 나오에게는 익숙한 일이었다. 업계인 중에서 자신의 팬을 만나는 것도, 팬이 자신을 얼마나 오랫동안 관심있게 봐왔는지 이야기하는 것도. 몇 번이나 들은 이야기를 또 듣는 것이었지만 나오는 그리 지루하지는 않았다. 사람마다 기억이나 감상이 조금씩 다르기도 했고.
".....그래도 역시 제가 가장 좋았던 때는 트라프리 때의 카미야씨에요! 지금은 멋짐의 정점에 서있다는 느낌이지만, 그 때에는 정말 멋지면서도 엄청 귀여웠잖아요~ 지, 지금 귀엽지 않다는 건 아니지만! 그 때에는 귀여움의 비중이 더 커서! 다른 친구들이랑 함께하는 모습도 정말 좋았는데~"
하지만 나오에게는 피하고 싶은 이야기가 하나 있었다. 어느 정도는 공공연한 비밀로 자리하게 된 이야기. 나오의 아이돌 활동이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 계기가. 그 이야기를 듣자 겨우 눌러뒀던 말이 다시 떠올랐다. 오랜만에 린이라도 만나보는게 어때? 아, 어째서 하루에 두 번이나 이 이야기를 듣는 건지.
나오는 얼굴이 찌푸려짐을 느끼고 재빨리 표정을 수습했다. 하지만 상대의 표정에는 당혹감이 떠올랐다. 방심해버렸다. 이전에도 있었던 일이지만 이번에는 표정 수습이 잘 안 되었다. 나오는 재빨리 말을 건넸다.
"미안해요. 조금 안 좋은 기억이 떠올라서."
"아니에요. 제가 오히려 미안한걸요."
감정을 굳이 전부 숨길 이유는 없었다. 알 사람들은 대충이나마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고 있으니. 그녀의 팬 또한 이해해주는 듯 했다.
그 뒤로는 다시 전형적인 패턴이었다. 팬은 나오의 옛날과 지금을 이야기하고, 나오는 맞장구를 쳐주었다. 팬은 CD나 굿즈에 싸인을 부탁했고, 나오는 준비한 펜으로 싸인을 해주었다. 메일 주소는 교환하지 않았다. 옛날에는 메일 교환도 참 많이 했던 것 같지만. 그렇게 그들은 생각보다 많은 시간을 보내버렸다. 나오는 다음 스케줄을 핑계로 빠져나왔다.
프로듀서는 이미 출발 준비를 마쳐 두었다. 다음 목적지로 향하는 중 나오는 프로듀서에게서 다음 일의 브리핑을 들었다. 아침에 했던 이야기에서 조금의 디테일이 더해진 반복. 그녀는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며 창 밖만을 바라보았다. 시부야의 거리는 늦은 아침에도 차가 막혔다.
 
 
 
무대 뒤의 트라이어드 프리무스는 구성원들의 포지션이 명확했다. 나오를 괴롭히는 주도자 호죠 카렌. 리더이자 방관자이자 동조자 시부야 린. 그리고 괴롭힘당하는 자 카미야 나오. 혹자는 나오를 보면서 진심으로 불쌍하다고 말하기도 했지만, 나오는 이런 구도가 그리 싫지 않았다. 가끔씩 카렌이나 린이 심한 장난을 칠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그 둘이 자신을 정말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렇게 괴롭히는 것도 우정을 표현하는 하나의 방식이라고 생각했다. 나중에는 괴롭히는 패턴이 비슷해져서 카렌과 린이 좋아할 만한 반응을 해주기도 했다. 물론 그 둘은 나오는 괴롭힐 때마다 반응이 귀엽다거나 재밌다며 장난을 멈추지 않았지만.
즐거운 시간들이었다. 트라프리처럼 마음이 잘 맞는 친구들은 일생에 한 번 만날까 말까 한 인연이었다. 힘든 레슨도, 즐거운 일상도, 두근거리는 무대도 그들과 함께라면 즐거웠다.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트라프리가 결성되고 일 년이 지났지만 셋은 바뀌지 않았다. 장난치는 한 명과 동조하는 한 명, 받아주는 한 명. 하지만 어느 날, 나오는 문득 위화감을 느꼈다. 카렌의 분위기가 조금씩 달라졌다. 장난을 주동하는 건 이전과 같았다. 나오를 곤란하게 만드는 패턴도 같았다. 나는 나오가 좋은데, 나오는 내가 싫은 거야? 하지만 작은 부분들이 바뀌어있었다. 눈빛, 시선, 몸짓. 신경쓰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들.
처음에는 착각이라고 생각했다. 피곤해서 잘못 본 거겠지. 사람이 어떻게 매일매일 똑같겠어? 어쩌면 이 패턴이 지겨워져서 다르게 보이는 걸지도. 수많은 이유들을 붙여봤다. 하지만 위화감은 여전했다. 카렌의 말이, 장난이, 모든 것이 달라졌다. 시간이 갈 수록 그 차이는 커졌다. 나오는 이해할 수 없었다. 카렌은 무엇 때문에 달라진 것일까. 어째서 그 차이가 신경쓰이는 것일까.
나오가 그에 대한 답을 찾기도 전에 카렌은 정답을 가져왔다. 무더운 여름의 한낮, 아무도 없는 공원의 나무 그늘 아래였다. 린은 없었고, 둘만이 벤치에 앉아 있었다. 카렌이 불쑥 나오를 불렀다. 생각없이 카렌을 바라본 나오는 전에 없던 위화감을 느꼈다. 분위기가 달랐다. 카렌은 머리 위의 나뭇잎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오는 나를 어떻게 생각해? 그거야...... 나오는 무심코 입을 열었지만 대답할 수가 없었다. 어째서였을까. 둘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리고 호죠 카렌이 다시 말을 꺼냈다.
난 나오가 정말 좋은데, 나오는 어때?
그제서야 나오는 알 수 있었다. 카렌이 보여준 모든 것들의 의미를. 정말 좋다는 말이 뜻하는 바를. 카렌은 나뭇잎 수를 세었고, 나오는 카렌을 바라봤다. 응어리진 시간과 셀 수 없는 생각들이 흘러갔다. 바람이 불었고, 나오는 입을 열었다.
나도 그래, 카렌.
그렇게 둘만의 특별한 시간은 시작되었다.
 
 
 
".....나오, 나오."
그런 적도 있었지. 나오는 여전히 생각에 빠져 있었다. 운전석의 프로듀서는 곤란한 듯한 표정이었다. 벌써 도착했는데 불러도 못 들어서야. 그는 나오의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나아아아아앗?! 나오가 펄쩍 뛰며 머리를 천장에 박아버렸다.
"뭐, 뭐야! 왜 사람을 놀래키고 그래!"
"아, 아하하...... 미안, 미안. 다 왔는데 불러도 대답을 안해서."
나오의 표정에 프로듀서는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분한 표정이라고 해도, 나오가 감정이 풍부한 표정을 짓는게 얼마만인지 몰랐다.
"어쨌든 촬영장에 다 왔어. 조금 일찍 왔는데, 잠깐 앉아있다가 갈래?"
나오는 핸드폰을 확인했다. 1시간 일찍 도착했다. 지금 들어가도 할 일은 없거니와, 다른 촬영이 진행되고 있을 터였다. 어쩔 수 없네. 나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핸드폰을 켠 김에 몇 가지를 확인했다. 스팸 메일 몇 통, 앞으로 추가될 스케줄에 관한 메일, 공식 SNS 계정의 알림 몇 개. 톱 아이돌의 핸드폰이라고 하기에는 거의 연락이 없었다. 린에게 연락이라도 해볼까. 그녀는 문득 든 생각을 힘차게 고개를 저어 떨쳐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별다른 이유도 없는데 왜.
나오는 핸드폰을 끄고 의자에 몸을 묻었다. 머리가 아파왔다. 오늘은 이상한 날이었다. 집을 나설 때까지만 해도 괜찮았지만, 그 이후가 문제였다. 프로듀서는 린에게 연락을 해보라고 하고, 옛날 이야기를 하는 팬을 만나고. 잊고만 지냈던 것들이 어째서 하루동안 전부 떠오르는 걸까. 모든 것이 긴장을 억지로 풀어버리고 있었다. 다시 평소의 나로 돌아가야지. 나오는 물을 마시고 화장을 고쳤다. 날카롭게 그려진 아이라인이 마음을 벼렸다.
"나오, 오늘따라 더 괜찮아 보이네."
"무슨 뜻이야?"
"뭐랄까, 옛날로 돌아간 기분 같아서."
겨우 마음을 다잡았는데 이 사람은 또 이런 소리인가. 나오는 고개를 저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녀가 노선을 바꾼 뒤로 가장 많이 본 사람은 프로듀서였다. 어떤 일로, 무슨 이유로 이미지를 바꿨는지 가장 잘 아는 사람이 그런 말을 한단 말인가.
"괜한 기대 하지 마. 잠깐 당황한 거잖아."
나오는 다시 핸드폰을 확인했다. 30분이 지났다. 아직도 이르긴 하지만 들어가서 문제될 건 없었다. 화보 촬영은 항상 예정보다 시간이 더 걸리니까. 그녀는 차를 나섰다. 프로듀서는 따라 나오지 않았다. 나오는 돌아보지 않았다. 프로듀서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알 수 없었다. 그러고 보면 일이 이상해지기 시작한 것은 프로듀서가 린을 만나는게 어떻겠냐고 물어볼 때부터였다. 프로듀서는 무슨 생각으로 그런 제안을 한 걸까. 이유를 알 것도 같았지만 나오는 알 수 없었다.
촬영장에 들어가자 수많은 사람들이 나오를 반겼다. 이전 촬영은 마무리되고 있었다. 그녀는 한 명 한 명의 인사를 받았다. 그 동안 어떻게 지냈냐, 요즘도 많이 보인다, 더 예뻐진 것 같다 등등. 이 촬영장은 몇 번 온 적이 있기 때문에 굳이 나오의 과거사를 묻는 사람은 없었다.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나오는, 바로 생각을 철회했다. 애초에 옛날 일이 기억나지 않았다면 다행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았을텐데.
프로듀서는 이전 촬영이 마무리된 후에 들어왔다. 그 또한 모든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나오에게 왔다. 이번 촬영도 힘내. 너무 태연한 모습에 나오는 헛웃음을 지었다. 원래부터 이런 사람이긴 했지만.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메이크업 팀에게 갔다. 촬영에 집중해서 자꾸 떠오르는 기억들을 떨쳐낼 생각이었다. 과거의 일은 과거로 남겨두어야만 했다.
 
 
결론적으로 나오는 일에 집중할 수 없었다. 촬영을 하는 내내 옛 생각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메이크업부터 시작해서 복장, 포즈, 빛, 카메라, 촬영장의 모든 것이 카렌과 린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홀로 활동한 경력보다 트라프리에서 활동한 날이 훨씬 많다는 것을 생각하면 당연했지만, 나오는 한동안 그에 구애받지 않는 삶을 살아왔다. 모든게 프로듀서 때문이었다. 그가 린의 이야기만 꺼내지 않았어도 이러지 않았을텐데. 친구를 만나라고 할 거라면 히나같은 다른 친구 이야기를 해도 됐잖아.
나오는 조수석에 몸을 묻었다. 촬영은 문제 없이 끝났지만 오히려 생각들을 떨쳐내는 데에 더 힘이 들었다. 간만에 떠오른 기억이라 이라 더더욱 그랬다. 프로듀서도 그걸 아는지 조금은 미안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당당했다. 자신은 옳은 말을 했다는 것을 온 몸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그는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만류했지만, 트라프리가 해체된 이후에도 나오의 프로듀스를 계속 맡았으니까.
머리가 지끈거렸다. 차라리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는게 낫지 않을까. 혼자 생각하기만 해서는 아무 고민도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나오는 잘 알고 있었다. 혼자만의 고민은 생각을 더 깊은 수렁으로 끌고 들어간다. 사람은 생각해왔던 대로만 생각하기 때문에, 고민의 답을 찾고자 한다면 아무 것도 찾을 수 없다. 수학이나 과학처럼 답이 정해진 것이 아닌, 감정적인 고민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그래, 차라리 린을 만나자. 오랜만에 만나서 어떻게 지냈는지 물어보고, 옛날 이야기도 하면서 전부 털어내버리자.
나오는 프로듀서를 바라봤다. 그는 나오를 바라보고 있었다.
"알다시피, 이 뒤에는 스케줄이 없어. 어떻게 할래?"
"린을 만나러 갈게. 약속 잡을테니까 기다려줘."
프로듀서는 미소를 띄웠다. 나의 승리다, 라고 말하는 듯한 미소를.
"다 일부러 그랬던 거지. 이래서 당신이 싫어."
"칭찬 고마워."
 
 
약속은 바로 잡혔다. 나오는 확인할 생각을 못 했지만, 린도 오늘 오후의 스케줄이 비어 있었다. 그 인간, 분명 둘 다 확인하고 나한테 만나러 가보라고 한 거였어. 나오는 이를 갈았다. 다음 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않을 거야.
프로듀서는 나오를 시부야 교차로 앞에 내려준 뒤 떠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역에서 익숙한 인영이 보였다. 너무나 오래 봐왔기에 알아차릴 수 있는 사람. 얼굴을 모자와 목도리로 가렸지만 그 아래에 어떤 모습이 있을 지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린도 마찬가지였다. 나오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지만 린은 바로 나오를 알아차렸다. 그녀는 천천히 걸어와 나오를 바라봤다. 모자 아래로 푸른 눈동자가 차분히 빛났다.
"오랜만이네, 나오."
"응, 그러게."
추우니까 어디라도 들어갈까, 린은 근처의 커피샵을 향해 걸었다. 나오도 뒤따라 걸었다. 커피를 시키고 자리를 잡고 나서야 둘은 서로를 제대로 볼 수 있었다. 린은 예전보다도 어른스러워졌다. 트라프리를 함께 할 때의 린이 쿨하고 멋진 여고생이었다면, 이제는 쿨하고 멋진 여자라고 칭하는 편이 자연스러웠다. 모습은 크게 바뀌지 않았지만 분위기가 날이 갈 수록 바뀌었다. 좋게 말하면 멋지게. 다르게 말하면 어른스럽게.
"이게 얼마만이야. 그동안 잘 지냈어?"
"응. 린은? 방송에서는 자주 보이던데."
일상적인 잡담이 이어졌다. 둘은 서로의 근황을 물었고 관심사를 나누었다. 어디의 마카롱 가게가 맛있다더라, 시부야에 린이라는 우동집이 있다더라, 새로 생긴 아이스크림 브랜드가 있다더라. 먹을 것 이야기밖에 하지 않은 것 같았지만 나오는 아무래도 좋았다. 후련하기도 했다. 프로듀서 말대로, 다른 누군가와 지극히 일상적인 대화를 나눈지 너무 오래 되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 상대로 린은 가장 적합한 인물이었다. 나오가 마음을 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이었으니까.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먹을 것 이야기를 넘어서 아이돌 일로 주제가 넘어갔다. 린과 나오 둘 다 톱 아이돌이었기 때문에 둘은 서로의 모습을 자주 확인할 수 있었다. 조금 과장을 보태서 고개를 돌리는 곳마다 두 사람의 모습이 있었다. 하지만 일의 뒷야이기를 듣는 것은 사진과 스크린 너머로 상대를 보는 것과는 다른 이야기였다. 린에게는 수많은 이야기가 있었다. 한 번은 서바이벌 컨셉의 예능 촬영을 갔는데 먹을 것이 부족해져서 정말로 야생에서 식량을 구했다고 한다. 촬영장의 카메라가 고장나서 감독의 핸드폰 카메라로 사진을 찍은 적도 있었고(이 사진이 들어간 잡지는 불티나게 팔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드라마의 액션 신을 스턴트맨 없이 혼자 소화해내는 아이돌을 봤다고도 했다.
반면 나오는 할 이야기가 없었다. 그녀도 많은 일을 했지만 다른 사람들과의 접촉 자체가 적었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필요한 일이 아니면 하지 않았다. 가끔씩 팬들을 만나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기도 했지만 그것 또한 제한된 범위 내의 이야기였다. 예전 활동의 이야기는 최대한 하지 않는다. 그것이 나오와 팬 사이의 암묵적인 규칙이었다.
".....아, 346 아이돌 부서가 영화 부서와 협업하기로 했어. 미오가 연기자로서 성공한 것에서 가능성을 봤나봐."
그리고 린은 그 규칙을 깨기 쉬운 사람 중 하나였다. 나오의 표정이 굳어지고 나서야 린은 이야기를 잘못 꺼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래서 린을 만나기 싫었던 건데. 겨우 눈을 돌리고 있던 기억이 눈앞에 떠올랐다.
 
 
둘은 아무 티를 내지 않았다. 처음부터 티가 날 관계는 아니었다. 카렌은 나오와 항상 가까이 붙어있는 장난의 주도자였으니까. 두 사람의 분위기가 달라진 것을 눈치챈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모든 사람이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두 사람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공식적인 발표도 없었기에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지만.
사람들의 생각이 어떠했든, 그 여름날 이후로 나오와 카렌은 연인이 되었다. 크게 바뀐 것은 없었지만 카렌의 장난은 예전보다 더 짙어졌다. 가끔은 관계를 들키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위험했다. 장난이 심해질 수록 나오의 반응은 격해졌고 카렌은 그걸 즐겼다. 그게 나오의 매력이라나. 나오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카렌이 좋아하는 점이라고 생각하면 어느 정도 용서가 되었다.
하지만 가끔씩-정말 가끔씩-카렌은 연인같은 모습을 보여줬다. 주위에 아무도 없을 때에 그랬다. 평소의 장난기를 완전히 빼고는 나오에게 기대어 왔다. 그럴 때에는 말수 또한 줄어들었다. 둘밖에 없을 때 나오와 카렌이 주로 했던 일은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었다. 카렌이 나오에게 기댄 채로, 나오는 똑바로 앉아서.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몇 시간 씩 앉아만 있기도 했다.
언젠가부터 나오는 카렌이 기댈 때마다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면 카렌은 나오의 품에 더욱 안겨왔다. 연인으로서의 첫 스킨십이었다. 처음 키스를 했던 것도 둘이서 앉아 있을 때였다. 카렌은 나오의 손을 빠져나왔고 나오의 얼굴로 다가왔다. 왜인지는 몰랐지만, 카렌은 능숙했다. 그녀에게서는 박하 향이 났다. 떨어지고 나서도 박하 향이 지워지지 않았다. 나오는 두 눈을 크게 뜬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카렌은 작게 웃으며 질문했다. 어땠어, 나오?
그 뒤로도 같은 반복이었다. 사람들이 있을 때에는 장난을 쳤고, 아무도 없을 때에는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들의 연애사는 종이의 앞뒷면처럼 진행되었다.
 
 
"미안해, 나오."
"아니야. 괜찮아."
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오는 표정 없이 창밖을 내다보았다. 시부야의 교차로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신호가 켜지고 차들이 멈출 때마다 사람들은 모두 뒤섞여 도로를 건넜다. 나오는 사람들의 머리 수를 셌다. 신호는 수를 다 세기도 전에 끝나버렸다. 길을 건넌 사람들은 각자의 골목으로 사라졌고, 그 자리를 곧 새로운 사람들이 채웠다.
린이라면 괜찮았다. 어느 정도는. 가장 가까이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지켜본 사람이니까. 동시에 괜찮지 않았다. 린을 보는 것만으로도 옛날의 기억들이 되살아났다. 호죠 카렌과의 시간이 몰려왔다. 다른 사람들은 괜찮은 점조차 없었다. 카렌을 넘어 346 프로덕션에 관련된 모든 것들이 과거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그래서 나오는 도망쳤다. 사람들로부터, 기억의 이정표로부터.
교차로의 사람 수에는 의미가 없었지만 수를 세는 것에는 의미가 있었다. 나오는 다시 린을 바라보았다.
"어디까지 이야기했더라?"
".....그게, 잘 기억이 안 나네."
둘은 다 식은 커피를 홀짝였다. 나오에게는 더 할 이야기가 없었다. 린을 만난 것은 좋았지만, 그것도 조금 전까지였다. 식어버린 시간이 지나고 린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제 시간이 늦지 않았을까."
"그러네."
나오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둘은 역까지 걸어갔고, 형식적인 작별인사를 했다. 잘 지내. 나중에 연락할게. 린이 먼저 떠났고 나오는 그녀가 사라질 때까지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린이 완전히 가고 나서야 나오는 움직였다. 시부야에 얽힌 기억이 하나 더 늘어버렸다.
아무래도 한동안 시부야에 오지는 못할 것 같다.
 
 
첫사랑은 반드시 실패한다는 격언이 있다. 나오는 서로에 대한 생각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사랑의 열정에 휩싸여서 자신의 감정만 관철하고 상대방이 원하는 바를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의견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항상 다짐했다. 만약 사랑에 빠지게 된다면, 자신보다도 연인을 더 생각해 줄 거라고.
결론적으로 그녀의 생각은 틀렸다. 나오는 최선을 다했다. 카렌이 무엇을 좋아할지, 어떤 말이 듣고 싶을지 매 순간 고민했다. 매번 옳은 답을 낸 것은 아니지만 대개의 경우 나오가 옳았다. 그녀는 연인이기 전 카렌의 가장 친한 친구였으니까. 하지만 나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긴 시간 함께했던 사람은 결국 떠나버렸다.
헤어짐의 원인은 두 사람의 차이에 있었다. 장난치는 사람과 받아주는 사람은 자석의 두 극처럼 잘 맞을 것만 같았지만, 실제로 맞추어 보면 작은 차이들이 수없이 마찰을 일으켰다. 내향성과 외향성, 에로스와 플라토닉, 가벼움과 무거움. 작은 차이들에서 오는 피로는 눈치채지 못 한 사이 나오를 완전히 감싸버렸다.
그리고 한 가지 이유가 더 있었다. 린의 생각은 어떨지 몰랐지만 적어도 나오는 그렇게 생각했다. 지쳐버린 것은 나오 자신만 참으면 넘어갈 수 있었다. 카렌은 지칠 이유가 없었다. 카렌은 항상 나오를 끌고 다니는 쪽이었고, 나오는 카렌에게 맞춰주는 역할이었으니까. 실제로 나오는 수많은 감정적인 위기들을 넘어갔다. 단 한 번을 제외하고.
그 한 번이 이별의 발단이 되었다. 수 년이 지났지만 그녀는 그 때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석양빛이 비치는 사무실이었다. 동료들과 프로듀서는 모두 돌아가 사무실에는 둘 뿐이었다. 나오는 소파에 몸을 파묻었고 카렌은 나오에게 기대었다. 나오의 목덜미를 손으로 훑으며 호죠 카렌은 장난스럽게 물었다. 난 나오 없으면 못 살 것 같은데, 나오는 어때?
그 때 나오는 지쳐 있었다. 심해진 카렌의 장난에 스트레스가 쌓였고, 운 나쁘게 겹쳐진 스케줄 때문에 피로가 누적되어 있었다. 그에 나오는 첫사랑의 결심을 잊고 무심코 날카로운 말을 꺼내버렸다.
"우리가 평생 같이 있을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나오는 끝없이 생각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카렌이 떠난 걸까? 카렌과 처음 만났을 때부터 헤어지기 직전까지, 기억나는 모든 시간들을 생각했다. 몇 번을 생각해도 나오에게 생각나는 순간은 이 때 뿐이었다. 이 때문에 카렌이 변했는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언제부터 카렌이 변했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 때를 제외한다면 나오가 처음의 결심을 잊은 적이 없었다. 다시 말해, 카렌이 나오처럼 지칠 이유가 없었다. 나오는 끝까지 자기 자신보다 카렌을 먼저 생각했다. 그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녀의 흥미가 어디에 가 있는지를 생각했다.
카렌을 위한다고 해왔던 모든 일들은 의미가 없었다. 카렌을 챙겨준다고 고려했던 모든 것들은 헛된 고민이었다. 나오가 올바른 선택을 하고 있었다고 해도, 단 한 번의 실수 때문에 그녀는 카렌을 잃었다. 그래서 나오는 자기 자신을 혐오했다. 증오했다. 사랑하는 이를 위해주지 못한 나약함이 싫었다. 카렌과의 기억이 그녀를 괴롭혔다. 주변에 두었던 모든 것들에 카렌과의 추억이 담겨 있었다. 어디를 가든 카렌과 갔던 곳이었다. 한 순간도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카미야 나오는 생각을 바꾸었다.
집에 남아있는 호죠 카렌의 흔적을 전부 정리하고 자취를 시작했다. 카렌이 연상될 만한 것들은 피했다. 밖에 나가지 않고, TV나 인터넷도 보지 않은 채 몇 주를 보냈다. 무엇보다도 무시하는 법을 배웠다. 카렌의 흔적으로부터 완전히 도망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런 것들과 마주치더라도 문제가 없으려면 호죠 카렌과의 기억을 무시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 며칠은 기억을 외면하지 못하고 공황에 빠져버렸지만, 시간이 지날 수록 아픔은 무뎌지기 시작했다. 그에 이어 무시하는 것에 익숙해졌다.
그 다음 나오는 자기 자신을 바꿨다. 여동생에서 여성으로. 귀여움에서 멋짐으로. 청코트는 롱 코트가 되었고 포니테일은 풀어헤쳤다. 화장은 짙고 날카로워졌다. 사람들도 바뀐 나오의 이미지를 환영했다. 극복과 성장, 아이돌의 가치에 들어맞는 변화였다.
모든 준비를 마친 후에야 카미야 나오는 다시 세상으로 나올 수 있었다. 언제든 호죠 카렌의 기억에 공격당할 수 있었기에 나오는 많은 것들을 기피했다. 라디오 채널, TV 방송, 346 프로덕션, 옛날의 동료들, 그리고 박하 향. 가장 무서운 것은 박하 향이었다. 어디에서나 쓰이는 것이기 떄문이다. 나오는 자신의 행동을 제한했다. 향이 약한 치약을 쓰고 로즈마리 향수를 뿌렸다. 시원한 음료도, 허브로 향을 낸 음식도 전부 피했다. 모든 행동 지침은 효과가 있었다. 최소한 어제까지는.
나오는 머리를 부여잡은 채 집으로 들어갔다. 불빛이 켜지며 그녀를 반겼다. 돌아오는 시간 내내 카렌의 기억에 고통받았지만, 집이라면 안심할 수 있었다. 호죠 카렌에게서 완전히 도망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그녀는 식탁에 앉아 미지근한 물 한 컵을 들이켰다. 겨울바람의 차가운 냄새가 온기에 지워지는 듯했다. 한 시간을 아무 것도 안 하고 물만 마신 뒤에야 나오는 일어설 수 있었다.
이상한 하루였다. 프로듀서가 린을 만나보라고 한 것부터 오늘은 무언가 잘못 돌아간다는 것을 눈치챘어야 했다. 프로듀서도, 사람들도, 하다못해 린까지 옛날 이야기를 꺼냈다. 이전까지는 아무 일도 없었는데, 왜 이제 와서 이렇게 된 걸까. 의미없는 질문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오늘은 단지 운이 안 좋은 것 뿐이었다. 운이 나쁜 것에 이유는 없었다. 쉬자. 나오는 생각했다. 남은 시간은 쉬자. 일찍 돌아왔으니 요기를 하고 빨리 잠자리에 들자. 운이 나쁜 하루는 일찍 끝내버리면 그만이었다.
나오는 냄비에 물을 올렸다. 오늘은 우동을 먹자. 냉장고에서 인스턴트 우동 한 봉지를 꺼내 뜯어두었다. 물이 끓을 때 까지는 시간이 있었다. 그제서야 그녀는 아직도 코트를 벗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나오는 코트를 벗어 의자에 대충 걸어 두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요리를 할 때 머리를 묶을 끈을 찾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오늘은 정말로 운이 없는 날이었는지 머리끈 하나가 보이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나오는 항상 점심과 저녁을 밖에서 해결했다. 집에 들어와서 저녁 식사를 하는 오늘이 특별한 날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요리를 할 때가 아니면 머리를 묶지 않았다. 물이 다 끓을 때 까지는 시간이 조금 있었다. 나오는 머리끈을 조금 더 찾아보기로 했다. 오랫동안 열어보지 않은 서랍을 살펴보고 테이프조차 떼지 않은 상자를 뒤졌다. 방을 거의 다 뒤집어 엎고 나서야 나오는 머리끈을 찾을 수 있었다. 하늘색 리본 달린 머리끈이 두 개 있었다. 뭐야, 내가 언제 이런 걸 샀나. 머리끈 하나를 집어들었다.
박하 향이 났다.
나오는 화장실로 달려갔다. 무언가 붙잡기도 전에 속을 전부 게워냈다. 꿇어앉은 무릎이 축축해졌다. 터지는 별들이 시야를 삼켰다. 위장을 뱉어낼 기세로 수 차례 기침을 하고 나서야 무언가 붙잡을 수 있었다. 온 몸에 땀이 흘렀다. 미처 사라지지 않은 겨울의 시린 냄새가 배어 있었다.
그 가운데 선명한 박하 향이 맴돌았다.

나오는 다시 구역질했다. 몸에서 나는 김이, 끓는 물의 수증기가 눈 앞을 흐렸다. 구토의 역함에 눈물이 흘렀다. 물이 끓는 냄새가 집안에 가득했다. 가스불에 물이 닿는 소리가 났다. 역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나오는 불을 끄러 가지 않았다. 가지 못했다. 수증기가 오감을 마비시켜주길 바랐다. 불이 나서 모든 것을 집어삼켜주길 바랐다. 하지만 아무리 빌어도, 아무리 토해내도, 어떻게 해도 선명한 박하 향이 지워지지를 않았다.

 

 

 

 

 

나오카렌이라는 말에 낚여서 읽으셨을 분들을 위해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취향이 취향인지라 이런 식으로밖에 글이 안써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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