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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치루] 오오하라 미치루는 움직이지 않는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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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8-01, 2017 13:09에 작성됨.

                                             -3-

 

 커튼의 틈에서 새어 나오는 빛이 내가자고 있는 침대를 때리며 아침을 알리기 시작했다. 덕분에 잠깐 눈이 부셔서 앞이 안 보였지만 이내 정상적인 시야가 돌아오면서 나의 몽롱한 정신이 점점 수면의 늪에서 빠져나왔다. 어느 사람이든 그렇겠지만, 아침을 맞이하는 것은 생각보다 에너지가 필요한 일이다. 커튼을 걷자 햇빛이 나의 방 전체를 채우며 회색빛에 감돌던 분위기를 일신시켜 본래의 빛깔을 돌려주었다. 이렇게 빛을 받고 있으면 그 늪에서 더 빨리 빠져나와 마치 예열을 시작한 오븐처럼 나의 몸을 달궈낸다. 거기에 이렇게 기지개를 켜면 삐걱거리는 근육도 풀어진다. 예전에 아이돌 활동을 하던 시절에도 이런 동작을 하면 피로가 가시는 것을 느꼈다. 물론 최고는 체내에 밀가루를 보충하는 거지만. 아마 나의 몸을 분석하면 오로지 밀가루와 탄수화물로만 이뤄져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음... 다시 생각해보니 그런 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어? 오늘은 일찍 일어났네?"

 거실로 내려가자 엄마가 앞치마를 벗으며 나를 맞이해주었다. 사람들은 우릴 보면 서로 너무 닮았다고 얘기하는 때가 자주 있어서 오해를 당하기도 한다.

 "네, 오늘은 어디 좀 가야 해서요."

 "모처럼의 휴일인데 바쁘네."

 "본의는 아니지만요."

 나는 그렇게 대답하고 자리에 앉아 잼이 발라진 토스트를 한 입 물었다. 잘 구워진 식빵의 바삭함과 딸기잼의 달콤함이 나의 원기를 회복해주는 걸 만끽하면서 어젯밤에 있었던 일을 회상했다.

 사토 씨가 말한 건 아주 간단한 말이었다. 사람 한 명을 찾아주세요. 그것이 그녀의 부탁이었다. 물론 말이야 쉬운 이야기다. 하지만 나는 탐정도 아니고 누굴 찾아줄 만한 기가 막힌 기술을 가진 것도 아니다. 그것은 사토루 오빠도 마찬가지고. 원래라면 단칼에 거절하는 게 정상이다. 번지수를 잘못 찾았다고 말해야 할 판이었다. 그럼에도 굳이 그런 일로 우리를 찾은 이유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적어도 그녀는 장난삼아 그런 얘기를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건 어느 정도 직감하고 있었으니까. 그걸 우리가 해결해 줄 수 있을지는 둘째 치더라도.

 "그이는 틈만 나면 항상 이런 얘기를 했어요. 그때 그 사람이 만든 빵을 한 번 더 맛보고 싶다고... 이제는 존재할 수 없는 그 맛을 다시 느끼고 싶다고요... 오와라 군이 제빵에 몰두하게 된 이유도 그 맛을 재현하기 위해서고요. 제가 봤을 땐 전부 괜찮았지만 이게 아니라면서 다시 도전하는 그를 보고 있으면 굉장하기도 하면서 동시에 불안함을 느꼈었어요... 뭐가 그를 그렇게까지 몰아붙이는지 전혀 몰랐거든요... 하지만 지금은 더는 그걸 재현하기가 힘들어졌죠. 그렇게까지 노력했는데도 도달하지 못한 경지를... 저는 오와라 군에게 다시 맛보게 하고 싶어요. 그게 그이의 마지막 소원이기도 하고요."

 생각보다 길게, 그리고 거침없이 쏟아낸 발언을 끝내고 사토 씨는 우리에게 다시 한번 고개를 깊게 숙여 부탁해왔다.

 "부탁입니다. 부디 오와라 군이 말했던 그 사람을 찾아주세요."

 마치 우리밖에 없다는 듯이 간곡하게, 그리고 어깨를 떨며 불안함을 보이면서 말이다. 그녀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지는 않는 것 같았다. 어쩌면 그녀에게 있어서 이건 도박일지도 모른다. 그것도 단 한 번에 모든 승부가 결정 나는. 그리고 그녀는 궁지에 몰린 상태이고. 그러나 몇 번을 생각해봐도 도저히 우리가 해결해 줄 수 있는 것 같이 보이지는 않았다. 우리는 한낱 밀가루를 만지는 사람들이고, 저런 부탁은 우리 같은 사람에게 하는 게 아니다. 단서가 얼마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원래 같으면 거절해야 마땅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거절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마지막 소원이라던가 경지라는 건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욱 확실한 건 사토 씨가 그걸 굳이 우리에게 부탁해왔다는 것과 무엇보다도 그렇게까지 맛보고 싶은 빵을 직접 보고 먹어봤으면 하는 생각이 나를 지배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렇게나 대단하게 묘사하는 것이라면 분명히 최상의 맛을 내게 선사해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어쩌면 나 오오하라 미치루의 인생 중 최고의 빵이 될지도?

 "저..."

 "좋아요! 찾아드릴게요!"

 오빠가 뭔가 말을 하려던 것 같지만 타이밍 좋게 내가 맞받아쳤다. 당황해하는 그의 얼굴을 보니 아마 거절할 심산이었겠지.

 "야, 그런 무책임하게..."

 "할 수 있어요. 그것도 그럴게 오와라 씨와 사토 씨가 그렇게나 찾던 빵이라고요? 한번 맛보고 싶지 않아요?"

 "일단 흥분을 가라앉혀봐. 물론 나도 궁금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런 단서도 없는데 어떻게 찾으려고?"

 "가능해요. 도와주실 거죠 사토 씨?"

 "네! 제가 가능한 일이라면 뭐든지!"

 사토 씨는 나의 말에 지금까지 보았던 그녀의 표정 중에서 가장 밝은 표정으로 답해왔다. 물론 사토루 오빠 말대로 근거는 없다. 진짜로 찾을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고. 하지만 이미 내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다. 그 정도는 각오했다.

 "하아..."

 사토루 오빠는 우리의 의기투합을 보고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군. 미치루가 돕겠다고 했으니 저도 힘이 닿는 데까지는 해보겠습니다. 다만 장담은 드리지 못해요."

 "괜찮습니다... 이게 무리인 부탁인 건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여러분밖에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서..."

 "그렇군요. 일단 단서가 될 만 한 건 있나요?"

 "단서인가요...? 확실하지는 않지만... 전에 오와라 군이 쓰던 필기 노트나 레시피라면 괜찮나요?"

 "일단은 그거면 될 것 같군요. 시간은 내일 오전에 괜찮으신가요?"

 "네."

 이것으로 우리는 사토 씨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한 조사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게 그 노트들이에요..."

 이슬 내음이 사라지고 사람들이 주말을 한껏 만끽하거나 한창 준비를 끝마치고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하는 오전 10시. 사토 씨와 사토루 오빠, 그리고 나는 역 앞에 있는 한 카페의 테이블에 모였다. 정확히는 먼저 와서 자리를 잡고 있었던 사토 씨의 자리에 우리가 합류한 형태였다. 카페에는 벌써 사람들이 많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바람에 사토 씨가 얻어낸 자리는 약간 구석진 곳에 있는 4인 테이블이었다. 일단은 사람들이 많이 다니지 않는 공간이라 특별한 일은 생기지 않을 거라 생각된다. 테이블 위에는 갓 내린 아메리카노 한 잔과 노트 몇 권이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나는 먼저 자리에 앉았고 오빠는 커피를 주문하러 계산대로 갔다. 아, 베이글도 가지러.

 "호오..."

 노트 중 하나를 꺼내 읽어보니 레시피를 정성 들여 적어낸 게 딱 눈에 들어왔다. 만들면서 적었는지 군데군데 밀가루 같은 게 묻어있고 정석을 써내려가면서도 다른 맛을 낼 수 있는 바리에이션을 찾는 등 연구의 흔적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손재주가 별로라는 사람이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솔직히 이 중 몇 개는 당장 먹어보고 싶을 정도로 궁금한 것들이 있을 정도다.

 "어떤가요?"

 "엄청 맛있어 보여요."

 "네?"

 "여기 있는 레시피들 전부 맛있어 보여요. 지금까지 이것들을 먹어보지 못했다는 게 너무 아까워요."

 

 나의 감추지 못하는 흥분에 사토 씨는 약간 놀란 것 같았지만 이내 웃음기를 보이며 노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오와라 군의 레시피는 자신의 연구를 기록하는 것도 있지만 책을 내기 위한 기록이기도 했어요."

 "책이요?"

 "오와라 군은 자신의 이름을 건 베이커리를 차리는 게 목적이었지만 동시에 레시피 북도 내고 싶어 했어요. 자신의 손으로 탄생시킨 그 빵들을 다른 사람들도 알게 되면 좋겠다고 하면서요. 그래서 뭔가를 새로 만들 때는 항상 저 노트를 옆에 두고 있었어요."

 "엄청난 열정이네요."

 우리 집에도 저런 식으로 쓴 노트가 몇 권 있기는 하지만 이렇게까지 세세하거나 하진 않다. 계속해서 읽어 내려가도 어딘가 지친 기색도 없고 단조로움도 없다. 이 정도면 감동받지 않고는 못 배긴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다.

 "뭐야, 나 빼고 벌써 조사 중이야?"

 목소리가 나는 곳으로 시선을 돌려보니 사토루 오빠가 커피 두 잔과 베이글이 놓여있는 쟁반을 들고 나타났다.

 "어? 왔네요."

 "그래 왔다. 뭘 보고 있었어?"

 "오가사와라 씨가 적은 레시피요."

 나의 대답에 그는 흥미로워하는 표정을 지으며 노트 하나를 펼쳐 읽기 시작했다. 눈동자를 계속 굴리며 읽어가면서 고개를 끄덕이거나 흐응 하는 소리를 내거나 하는 걸 보면 적혀있는 내용이 마음에 든 모양이다.

 "재미있네요. 이런 조합이 있을 줄은 몰랐거든요."

 그 한마디에 모든 감상을 들려주고 노트를 사토 씨에게 돌려주었다.

 "하지만 단서가 될 만한 건 글쎄요..."

 맞는 말이다. 레시피 자체는 상당히 흥미롭지만 이게 사토 씨가 찾으려고 하는 사람에 대한 단서가 될지 안 될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아무런 연관도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직 단념하기에는 이르다.

 "아직 남아있으니까 더 찾아보면 뭐라도 나올 것 같아요."

 나는 곧바로 다른 노트를 펴내었다. 여전히 레시피가 적혀있는 것이지만 뭔가 힌트가 있을 거라는 직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가사와라 씨는 누군가가 만든 빵을 다시 재현하기 위해 제빵을 시작했다고 했다. 그렇다면 힌트는 이 노트들 안에 있을 수밖에 없다. 여기에 적혀있는 온갖 바리에이션은 아마 그 맛을 찾기 위해 만든 길목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개중에는 아까처럼 먹어보고 싶은 걸작도 있지만 몇몇은 정말로 시험 삼아 만들어봤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는 것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직접 만들어보지 않고서는 확신할 수 없지만 말이다.

 "음?"

 페이지를 계속 넘기다가 뭔가 이상한 걸 발견했다. 빵 레시피 위에 삐뚤빼뚤한 글씨로 숫자가 쓰여 있었다.

 "왜 그래?"

 사토루 오빠가 낌새를 눈치챘는지 내 쪽으로 다가왔다.

 "이거..."

 나는 그에게 그 숫자들을 보여주었다. 그러자 잠시 생각하는 듯 이마에 주름이 생겼다가 가라앉았다. 해석에 실패한 모양이다.

 "뭐지? 단서를 찾긴 찾았는데 이게 뭔지 모르겠네. 사토 씨, 이 숫자에 대해 알고 있습니까?"

 "네? 죄송해요... 저도 잘..."

 사토 씨마저 모른다면... 우리가 알 방도는 없다.

 "그런데 여기서 이런 식으로 적어버리다니... 오와라 군 답지 않네요."

 "그렇습니까. 일단 이건 확인해둘 필요가 있겠군요."

 오빠는 그렇게 말하며 수첩에 그 숫자들을 기록했다. 뭔지 모를 단서 하나 획득.

 "후우... 근데 그 노트를 다 뒤져도 나온 건 이 숫자뿐이네."

 "맛있어 보이는 레시피도요."

 "아아, 그것도 포함해서."

 모든 노트를 다 뒤져본 결과 내가 예상한 대로 단서는 나왔다. 하지만 그 형태는 내 생각과 다를 뿐.

 "죄송해요... 여기서는 별다른 소득이 없었네요..."

 "아닙니다, 사토 씨. 아예 없는 것보다는 낫죠. 처음부터 쉬울 거로 생각하지는 않았고요."

 "그래도..."

 "괜찮습니다. 근데 혹시 괜찮다면 저 노트들을 잠시 빌릴 수 있습니까?"

 "네, 그러세요."

 "고맙습니다. 미치루, 네가 갖고 있어."

 "예이~"

 이걸로 안에 들어있는 레시피를 시험해볼 수 있게 되었다! 사심 가득한 생각이긴 하지만 이 유혹 앞에서는 저항할 방법이 없다.

 "그럼 전 먼저 일어나보겠습니다."

 "아, 어제 그거군요..."

 "네."

 어제 그거라는 건 모임 같은 것이다. 우리가 있는 지역에서 어느 정도 이름 있는 연구가나 파티시에 모여 친목을 다지는 자리라는데 이번에 사토루 오빠가 우리 부모님을 통해 거기에 초대받았다. 자리는 좀 나중에 있지만 가기 전에 여러 가지 준비해야 하므로 먼저 자리를 떠야한다. 우리가 모인 시간은 짧아져서 양해를 구했지만 사토 씨는 전혀 개의치 않았었다.

 "미치루, 아직 너는 같이 있을 거지? 단서가 될 만한 게 있으면 모아놔."

 그런 부탁을 뒤로하고 그는 먼저 자리를 나섰다. 그리고 가게에서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인파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아마 내일쯤에나 다시 볼 수 있겠지.

 "자, 그럼 우리도 가볼까요?"

 노트도 얻었고 단서도 하나 얻었겠다, 이제 머리를 식힐 차례다.

 "네...? 어디로..."

 "당연히 거기죠!"

 우리가 가야 할 곳은 이미 정해져 있다. 거기로 가기 위해 나는 사토 씨의 손목을 잡고 앞으로 나아갔다.

 "오오하라 씨는 팔심이 세네요..."

 "미치루면 되요. 솔직히 헷갈리잖아요? 그리고 연상이시니 반말 써도 돼요."

 "아, 네... 아니, 응..."

 조금 헷갈렸는지 말이 오락가락했지만 그런 건 지금 중요하지 않다. 빨리 가지 않으면 물량이 떨어져 버리니까.

 

 우리가 도착한 곳은 바로 어제 카나코 씨와 얘기했던 빵집이다. 영국식 저택과 비슷한 형태로 외부를 꾸민 이 빵집의 이름은 베이커 스트리트로 모티브는 당연히 셜록 홈즈라는 이름의 추리소설에 나오는 지명이다. 카나코 씨에게는 미처 얘기하지 못했지만 사실 그곳의 점장하고 조금은 얘기하는 사이다. 경쟁상대라고 해서 주방까진 보지 못했지만, 빵에 대한 것이나 여러 잡담을 한 적이 있다. 점장이 자신은 셜로키언이고 가게이름을 직역하면 제빵사의 거리라고도 부를 수 있으니 꽤 괜찮은 네이밍 센스라고 자부한 적이 기억난다. 그리고 역시나 사람들이 조금씩 몰리기 시작했다.

 "여기니?"

 "네. 이곳의 샌드위치와 슈크림 빵은 최고라고요! 아마 맛보면 감탄만 나올 거에요."

 나의 말에 아직 확신을 가지지 못한 것 같지만 곧 달라질 것이다.

 "어서 오세요."

 가게 문을 열자 맑게 울리는 벨 소리와 함께 점원이 인사를 보냈다. 도착해보니 아직 가게에는 그리 많은 사람이 몰리지 않았다. 점심시간이 시작되기 직전이라 그런 것일 수도 있겠지만 일단은 북적거리지 않으니 다행이다. 너무 많아지면 천천히 구경하기가 힘들어진다.

 "하지만 먼저 이걸 챙겨야지."

 나는 고른 빵을 놓기 위해 준비된 쟁반 하나를 챙기고 곧장 샌드위치 매대로 가 두 개를 챙겼다. 겉보기엔 아직 꽤 남아있지만 곧 동날 것이다. 그만큼 인기가 있는 메뉴니까.

 "여! 오랜만이구나, 미치루 짱."

 주방 쪽에서 굵직하고 중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잘 정돈된 짧은 머리에 턱수염이 인상적인 남자로 바로 이곳의 점장이다.

 "안녕하세요! 요새 잘 지내시나요?"

 "항상 바쁘지 뭐. 이따가 모임에 가야 하는데 준비할 짬이 나지 않네. 너희 부모님도 거기 가 계시니?"

 "아빠가 가셨어요. 엄마는 가게를 보고 있고요."

 "그렇구나. 그나저나 너도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아서 다행이구나. 사토루가 운영을 꽤 잘하는 것 같군."

 아직 사토루 오빠가 우리에게 오기 전에 그를 가르쳤던 사람이 바로 이 분이다. 오빠는 뭔가 부담스러워서인지 그때는 별로 얘기하고 싶지 않다고 하면서 그다지 회상하고 싶어 하지 않지만, 이따금 공식 자리에서 얼굴은 보고 있는 것 같다.

 "덕분에요. 그러고 보니 어제 촬영했었다고 들었는데요."

 "그거 말인가? 꽤 의외였어, 설마 제과에 대해 그렇게까지 자세한 아이돌이 있을 줄은 몰랐거든. 그쪽 일을 하지만 않았어도 당장 직원으로 쓰고 싶었다고."

 완전히 카나코 씨에게 필이 꽂힌 것 같다. 나중에 좀 더 자세하게 이야기를 들려줘볼까?

 "그런데 들고 있는 그 노트들은 뭐야? 네가 빵 말고 다른 걸 들고 있는 건 처음 보는데."

 "이거요? 빵 레시피요. 제건 아니고 같이 온 여자분의 애인 거예요."

 나는 그렇게 말하며 점장에게 사토 씨를 소개시켜주었다. 그녀는 점장에게 간단하게 목례를 하고 노트를 볼 수 있냐는 그의 물음에 작은 목소리로 허락해주었다.

 "그럼 실례..."

 점장은 그렇게 말하며 내게서 노트를 받아들고 곧장 읽기 시작했다. 표정의 변화는 딱히 보이지 않았지만 하나하나 천천히 읽어 내려가는 걸 보니 마음에는 든 모양이다. 자신의 분야와 관련된 면에서 꽤 엄격하신 분이어서, 한번 훑어보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면 바로 버려버리는 사람이다. 그런 그가 저렇게 집중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큰 수확이라고 본다.

 "음?"

 갑자기 표정이 의문을 가졌다는 것을 보여주며 눈과 손가락이 멈췄다. 노트의 색과 페이지를 보아하니 바로 그곳인 것 같다.

 "이 숫자는 뭐지?"

 "아, 그건..."

 추리를 해줄 거라는 기대는 했지만 역시 사토 씨의 허락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괜찮아요."

 내 눈빛을 읽었는지 그녀는 흔쾌히 허락해줬다. 나는 감사하다는 인사를 보내며 점장에게 사정을 설명했다. 정확히는 내가 지금까지 들은 이야기를 하고 사토 씨가 조금 덧붙이는 형태였지만 점장에게는 그것만으로 충분한 듯이 모든 맥락을 이해해줬다. 하지만 역시 어려운지 이마에 주름이 생겨버렸다.

 "이것만 가지고는 뭐라고 말하기가 힘들군. 증거가 부족해."

 "그렇군요..."

 아무리 추리를 좋아하고 잘한다고 하더라도 단서가 없다면 무용지물이다. 그것이 점장의 의견이었다.

 "다만 역시 이 숫자는 신경 쓰여. 어디선가 본 것 같기도 하고... 어쩌면 이걸 밝혀내면 그 즉시 모든 게 풀릴지도 몰라. 혹시 뭐라도 알아내면 연락해주마."

 "네."

 "그리고 레시피 잘 읽었습니다. 몇 개는 이상한 게 있었지만 꽤 흥미로운 것도 있었고 편견 없이 연구한 모습이 보기 좋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점장의 칭찬에 사토 씨는 고개를 숙여 감사의 인사를 올렸다. 살며시 미소 지은 걸 보니 애인의 연구가 인정받은 것에 대해 기쁜 것 같다.

 "그런데 이 모든 연구가 그 환상의 빵이라는 걸 찾기 위해서라니... 어지간한 집념이 아닌걸?"

 점장은 우리가 찾는 빵에 그런 이름을 붙였다. 뭐, 맞는 말이긴 하지만.

 "도움이 못 되어 미안하다. 하지만 오가사와라 씨의 소원은 꼭 이뤄질 거라 믿는다."

 점장은 노트를 내게 돌려주며 그런 말을 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그야, 그 소원을 이루기 위해 너와 사토 씨가 발 벗고 나서고 있으니까. 적어도 나는 노력은 거짓말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단다."

 그 말을 뒤로하고 모임에 출발할 준비를 하러 가야 한다며 점장은 주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은근히 저 뒷모습이 멋있다고 생각한 건 기분 탓이려나? 아니면 멋있는 대사 한 마디를 날리고 가서 그런가... 어찌 되었든 숫자에 대해선 도와주겠다고 했으니 동료가 한 명 더 늘어난 셈이다. 거기에 어디선가 본 듯하다는 말을 들으니 더욱 희망이 생긴다.

 "이거, 점장님께서 서비스라고 하십니다."

 계산할 때 같이 건네진 종류별로 담긴 빵이 큼지막한 봉투에 들어있는 걸 보고서 나는 순간 점장 주위에 후광이 비치는 것 같았다.

 

 "왠지 미안하네. 도움을 주겠다고 했는데 정작 아무것도 못 하고..."

 사토 씨가 나직이 내게 말을 건넸다.

 "아니에요. 수확은 적을지언정 우리 둘 다 포기하지 않았잖아요?"

 "그런 거로 될까..."

 "자자, 일단은 배부터 채워요. 배고프면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다고요?"

 그녀는 내 말에 잠시 망설였지만 이내 건네준 샌드위치를 받아들었다.

 "꽤 긍정적이네. 왠지 부러워..."

 옅은 미소를 띠며 말하면서.

 근처 강가 둔치의 바람은 물 내와 희미한 벚꽃 향기를 머금고서 우리 주위를 감싸 안았다. 티비에서나 볼법한 꽃놀이를 할 정도까진 아니지만 이곳 주위에는 벚나무가 많이 심겨 있어서 이맘쯤 되면 그 향기를 머금은 바람이 이 공간을 감싸 안는다. 겨우내 꽁꽁 얼었던 생명이 우린 살아남았다는 듯이 그 색을 피우기 시작했고, 해가 뜨는 시간이 길어지며 봄기운이 완연해지면서 차가운 대지가 달궈지고 바람도 생각보다 따뜻해진다. 계단식으로 된 둔치의 아래쪽에선 가족들이 피크닉을 왔고 애들이 삼삼오오 모여 노는 모습도 보인다. 한 편의 영화나 애니메이션에서 볼법한 풍경은 생각보다 우리 가까이에 있다. 가끔 이렇게 나와 근처 벤치에 앉아 한쪽에 빵을 쌓아놓고 먹으며 그 경치를 감상하고 있으면 몸이 나른해지면서 고소하고 달콤한 기분이 내 안에 차오른다. 기분이 좋을 땐 더욱 좋아지고, 안 좋을 땐 씻어 내리고, 복잡할 땐 잠시 내려놓는다. 아이돌 활동을 해오면서 생긴 요령이랄까... 나름의 비법이다.

 "미치루는 예전에 아이돌을 했었지?"

 문득 사토 씨가 내게 질문을 던져왔다. 시선은 나와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네, 지금은 쉬고 있지만요."

 "사실, 너를 찾아온 건 우연이 아니야."

 "무슨 말이죠?"

 "오와라 군은 말이야, 너의 광팬이었거든."

 "그런가요?"

 "응, 그이의 말로는 마치 맛있는 빵 같다고 했었지. 단순히 빵이라는 키워드가 맞았기 때문인지, 어딘가 끌리는 점이 있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지간한 팬보다 더했지. 조금 질투심을 가져버릴 정도로."

 말은 그렇게 하지만 말투는 좋은 추억을 읊는 것 같았다.

 "네가 항상 하는 그 크루아상 모양의 머리를 재현한 빵을 즉석에서 만들기도 했고, 네가 방송에 나와 먹은 것들을 재현해서 바리에이션도 탄생시켰었어. 아마 그 노트 중에 1/3은 그 과정을 통해 만들어졌을 거야."

 "몰랐어요..."

 "누가 얘기하지도 않았고 너도 오와라 군을 직접 만나본 적이 없으니 당연할 수밖에. 게다가 팬 사인회 같은 곳은 잘 안 갔거든. 괜히 쑥스럽다면서 말이야. 그 덩치에서 그런 말이 나오니까 얼마나 황당하고 웃겼던지..."

 이건 솔직히 웃을 수밖에 없다. 입에서 새어 나오는 피식거리는 웃음은 어떻게든 빠져나오려는 듯 나의 몸을 들썩이게 했다. 사토 씨도 약간 소리 내서 웃었지만 아마 내 모습 보고 그러는 거겠지.

 "생각보다 재미있는 사람이네요."

 겨우겨우 웃음을 참고 그런 감상을 사토 씨에게 남겼다.

 "괜히 노비타급 왕바보 오가사와라가 아니거든... 뭐 어쨌든 그이는 그만큼 너의 팬이었어. 엄청 쑥스러워하는 주제에 언젠가 널 직접 만나보고 싶다고 했고. 그래서 갑작스레 네가 활동 중단을 선언했을 때는 진심으로 걱정했었고."

 "역시 그렇겠죠."

 그 사건에서 충격받은 건 오가사와라 씨도 예외는 아니었겠지.

 "통하는 면이 있으니까 그렇게까지 팬심을 보여주고 설레었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했어. 그래서 일부러 네가 일하는 가게를 찾아간 거고. 너라면 이 일을 해결해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그런 김에 네가 평소에 생활하는 모습이나 생각을 듣고 싶었고."

 "결과는 어땠나요?"

 "지금 네 옆에 내가 있는 게 결과지. 너랑 계속 얘기하고 있으면 오와라 군이 널 왜 그렇게 좋아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아... 어쩌면 나로선 부족했던 걸지도..."

 "그런가요? 전 왠지 알 것 같은데. 오가사와라 씨가 왜 사토 씨를 골랐는가."

 "응?"

 맞받아친 말이 의외였는지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물론 전 아이돌로서 팬들의 기대에 부응해야 하고 우상이라는 뜻에 맞게 행동해야 하거든요. 어쩌면 어쩔 수 없이 연기해야만 하는 존재 일지도요. 동경 받지 않으면 안 되거든요 이쪽 세계는. 하지만 사토 씨는 그런 것에서 자유롭잖아요. 항상 곁에 있을 수 있고 함께 얘기하고, 감정을 나눌 수 있죠. 아마 오가사와라 씨는 그 진실 된 모습을 보고서 사토 씨를 선택한 걸 거에요. 가감 없이 솔직히 표현하는 그 모습을요. 그러니 오가사와라 씨도 마음 놓고 사토 씨에게 자신의 모든 걸 얘기할 수 있는 거고요."

 아이돌은 숭배받는 존재다. 팬들이 원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인기를 끌어올리고 공감받는다. 나는 그런 연기 같은 건 잘 못 해서 나의 본모습을 가감 없이 표현했었지만, 모두가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었다. 그리고 행복감에 젖어 들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볼 때마다 나의 목표에 점점 가까워지고 있음을 느꼈고 앞으로의 길도 순탄할 줄 알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팬들의 눈과 요구치는 높아져만 갔다. 사람들은 언제나 새로운 걸 원하고 정체되어있으면 언젠가는 잊혀진다. 그렇게 되기 싫으면 어쩔 수 없이 내가 아닌 다른 것을 연기해야만 한다. 처음에는 딱히 거부감 같은 건 없었다. 뭘 하든 나는 나고 팬들도 그걸 받아들인다고 생각했으니까. 내가 항상 나로 있는 한 나를 따라와 줄 거라고. 그러나 그게 착각이었다는 걸 깨달았을 때, 나는 더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내가... 정말로 그 역할에 걸맞았던 걸까?"

 "그럼요."

 "그러면 좋겠네..."

 살며시 미소를 보이며 말하는 그녀였지만 왠지 눈이 처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그 모습을 눈에 담고 옆에 놓아두었던 노트를 펼쳤다. 사토 씨가 했던 말을 되새기며 다시금 읽어보니 정말로 내가 로케장소나 평소에 먹었던 빵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똑같이 만든 것도 있었지만 바리에이션도 눈에 띄었다. 특히 바게트 쪽은 들어간 종류가 다양했다. 산딸기를 넣은 크림부터 시작해서 온갖 치즈의 조합과 샌드위치까지 할 수 있는 것은 전부 시도해본 듯한 흔적이 보였다. 그리고 그 조합들은 대부분 내가 이런 게 나왔으면 좋겠다고 넌지시 말한 것들이었다. 처음 읽었을 때도 왠지 종류가 많다고 생각했지만, 진실을 알고 보니 이건 나의 위시리스트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한번 만나서 얘기해보고 싶네요. 오가사와라 씨."

 어쩐지 오가사와라 씨를 직접 보고 싶다는 마음이 강해졌다. 이렇게까지 정리하고 모아놓은 주인을 한번 만나보고 싶어졌다. 그 손끝에서 뭐가 탄생할지 직접 두 눈으로 지켜보고 싶은 욕심이 계속 솟아올랐다. 아마 이 노트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거 좋은 생각이네. 오와라 군도 기뻐할 거야. 이번 일이 일단락되면 한번 같이 만나러 가보자."

 사토 씨도 기뻐하면서 내 말에 긍정해주었다. 만약 사토루 오빠의 말이 맞는다고 하더라도 결코 헛걸음은 아닐 것이다. 한 사람이 있었던 자리에는 많은 것이 남아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으니까. 그리고 내가 방문하는 거로 사토 씨가 다시금 밝아질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하다.

 "그러고 보니..."

 사토 씨가 뭔가 말을 꺼내려 할 때 갑자기 전화기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울기 시작했다. 바로 내 전화기다. 이 시간대에 전화할 사람은 없을 텐데...

 "죄송해요, 잠시만요."

 나는 그녀에게 잠시 양해를 구하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오오하라 입니다."

 "미치루, 지금 잠깐 시간 되냐?"

 "사토루 오빠? 모임에 간 거 아니었어?"

 "지금 모여서 한창 진행 중이야. 그것보다 너 혹시 베이커 스트리트에 갔었냐?"

 "응, 거기서 점장도 만났어."

 그런데 그런 건 왜 물어보는 거지?

 "아까 그 사람이 내게 연락을 줬어. 그 숫자가 뭔지 알아냈다나 봐."

 "정말로?!"

 "정말인데."

 뜻밖의 소식이다. 아니, 생각보다 일이 너무 잘 흘러가 버렸다. 갑작스러운 급전개에 나는 잠시 당황해서 머리가 멍해졌지만 이내 다시금 가다듬고 재차 질문을 이어갔다.

 "그래서, 그 숫자는 뭔데?"

 "주소야. 그것도 그 점장이 가본 적이 있는 곳."

그래서 어디선가 본 숫자라고 한 건가? 주소의 뒷자리는 숫자가 적혀있으니까.

 "주소라고? 어딘데?"

 "나는 지금 여기 일 때문에 못 나가. 사토 씨랑 같이 있지? 그럼 지도를 찍어 줄 테니까 둘이서 같이 찾아가 봐. 아마 이걸로 전부 해결될 거야."

 "아, 응..."

 내 대답과 동시에 오빠는 바로 전화를 끊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지도 하나를 메일로 보내주었다. 여기서 전철로 1시간 반 정도의 거리에 있는 한 건물이었다. 건물의 이름은...

 "...요양원?"

 그 숫자의 정체가 바로 이 요양원이라는 말인가? 왜 이곳이 나오는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아..."

 사토 씨가 옆에서 지도를 보더니 갑자기 깨달았다는 듯이 입을 가렸다. 가린 손은 왠지 모르게 떨고 있었고.

 "왜 그러세요?"

 "여기... 알고 있어."

 "네?"

 나의 물음에 호응한 답은 뭔가 복잡한 심경이 섞인 목소리와 함께 찾아왔다.

 "오와라 군의... 어머니가 계신 곳이야."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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