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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라떼-어느 프로듀서의 타치바나 아리스 섭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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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8-01, 2017 01:02에 작성됨.

나는 Z됐다.
심사숙고는 안 했지만, 그것이 내가 내린 결론이다.
나는 Z됐다.

담당 없는 프로듀서는 사실상 사무원이다. 이 프로젝트 공연 스케줄 복사해서 전달해주랴, 저 아이돌 촬영장에 데려다주랴, 바쁘다는 한 마디로 표현 불가능한 바쁨 THE 바쁨 그 자체의 생활이 이어진다.
미시로 프로덕션이 대기업이라지만 대기업에 걸맞는 봉급을 주며 수용 가능한 직원에는 한계가 있고 그 한계는 아이돌들을 여유있게 지탱하기엔 모자라다. 물론 아이돌 부서가 확장된다면 얘기가 다르지만 대형 프로젝트라곤 신데렐라 프로젝트 하나뿐인 지금은 머나먼 이야기다. 즉 나의 운명은 브론즈가 잡은 다크소울의 플레이어 캐릭터와 유사성을 보임이 증명될 것이다. 젠장.
점심은 우동으로 간단히 때웠다. 사무소에서 전화가 오기 전에 끝낼 수 있어서 다행이다. 분명 립스의 프로듀서일 것이다.
"여보세요, P입니다."
[어, 접니다. 지금 여유가 되면 아까 말씀드린 기획서 좀 복사해서 상부에 돌려주실 수 있습니까?]
"예, 마침 점심 다 먹었습니다. 지금 갑니ㄷ..."
둔탁한 감각이 달리던 다리에 느껴진다.
"...죄송합니다, 끊습니다."

감각의 근원은 내가 생각한 최악의 상황. 꼬마아이다. 열둘은 되었을까, 얼굴을 감싸고 있으니 무릎에 맞은 거겠지. 금방이라도 울면서 엄마를 찾아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일단 무릎을 낮추고, 손을 앞으로 뻗어 손바닥을 보인다. 사과의 자세다.
"꼬마야, 괜찮아?"
괜찮아요, 라는 대답을 들을 기대는 하지 않고 말을 걸어본다.
꼬마가 일어난다. 얼굴을 문지르더니,
"...괜찮아요. 죄송해요, 마구 뛰다가."
어?
"어,그래...미안하다. 나도 뛰고 있었고."
이래서야 중학생을 상대하는 느낌인데. 특이한 아이지만 별 탈 없이 넘어간 셈이니 일단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그 때, 꼬마의 시선이 어딘가에 멈췄다가 무너졌다. 표현이 이상하지만, 그 눈은 무너졌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절망에 찬 얼굴이었다. 나도 꼬마의 시선이 멈춘 곳을 보았고, 그곳엔 엎어진 초호화 딸기라떼가 있었다.

나는 Z됐다.
심사숙고는 안 했지만, 그것이 내가 내린 결론이다.
나는 Z됐다.

눈물이 차오른다. 입술은 꽉 다물었고 손은 부들부들 떨린다. 물론 내가 아니라 꼬마 쪽이지만, 이제 저 꼬마 부모라도 오면 내 멘탈이 저렇게 될지도 모르겠다.
"꼬마야?"
불안감을 억누르며 꼬마의 반응을 유도해본다. 아, 이쪽에 반응하지 않는다. 완전히 정신이 저 무너진 딸기라떼로 넘어가 버렸다. 그 마음은 이미 뭉개진 딸기와 하나가 되어 그것과 같은 고통을 겪고 있으리라. 문학의 무슨 표현법이더라, 기억 안 난다. 쓸모없는 국어교육 같으니라고.
"제 거에요,그...흐으...신경쓰실...끄윽...필요...."
있단다 꼬맹아. 네 미각의 즐거움이 아니라 내 사회적 지위를 위해서 난 너를 이 길거리 한복판에서 울리지 않고 상황을 종결시킬 필요가 있어.
그리고 나는 심리학 전공도 아니고 육아 전문가도 아니야. 그러니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 정도뿐이니까, 제발 이 말을 듣고 멈춰줘. 부탁이니까. 나 궁서체야. 진지해.
"어, 그러니까...어디서 샀니? 내가 사줄 테니까..."

지금이야 업무관계로 수많은 여자들과 안면을 트게 됐지만, 고약한 취미(이대로 가면...라이더 혼고 타케시는 개조인간이다!)를 가진 사람의 아우라 때문인지 누군가와 카페를 온 적은 거의 없다. 그래서 난 이 괴랄한(그래, 괴랄하다. 도저히 괴랄 말고 이걸 묘사할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딸기라떼의 괴랄한 가격이 맘에 들지 않았다. 내 앞의 꼬마는 5분 전에 울먹이던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행복해 보이지만. 미소를 그렇게 찾는 CP의 프로듀서에게 찍어서 보여주고 싶을 정도다.
"따사로운 햇살 아래, 차임벨이 울려퍼지네-"
얼씨구, 노래도 부른다. 이미 나는 보이지 않고, 딸기라떼와 꼬맹이만의 세계로 떠나버렸다. 다시 불러왔을 때 표정이 궁금해진다.
어, 잠깐. 꽤 잘 부른다. 좀 더 들어봐야 한다.

"이어져 나가, 네게, 닿기를-"
짝짝짝짝. 박수가 나올 정도다. 1분 가까이 듣고만 있었다. 보컬 트레이닝도 필요없이, 케어만 좀 받으면 바로 아이돌을 해도 될 정도다. 본인은 그냥 부끄러운 모양이지만.
"노래, 좋아하나 봐?"
"므으...음악에 흥미가 있을 뿐이에요!"
오호.
"음악이라면, 구체적으로 어디일려나?"
"일일이 묻지 말아주세요! 아직 그런 건 못 정했고..."
진로 불확실. 재능 있음. 그렇다면 답은 나와있다.
"미안, 꼬마야. 내가 이런 사람이라서. 일일이 물어볼 수밖에 없거든."
꼬마는 내가 건넨 명함을 찬찬히 바라보더니, 가방에서 타블렛을 꺼내서 내 이름을 읽는 법을 찾아본 뒤 마치 '진짜? 대단한데?'와 '너 따위가?'가 뒤섞인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래요, 아이돌 부서랍니다. 꼬마야, 이게 작은 일도 아니니까, 가족들이랑 상의해 본 뒤에 거기 적힌 곳으로 와서 날 찾는다고 얘기해봐도 돼."
"타치바나에요. 내일까지 확답을 드릴 테니까, 잊지 말고 계세요."
잠깐 멍했다. 사회 풍파 다 겪은 사무원마냥 대답이 빨랐으니까. 어느새 비즈니스 모드로 돌아온 모양이다.
"그래,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타치바나 양."


.
.
.
"...그랬었던 거, 기억나요?"
"응? 잠깐, 잘 못 들었는데."
"므으, 사람이 말할 땐 들어달라고요!"
하여간 6년이 지났는데도 아리스다. 여전히 귀여워서 손을 뻗으려다 흠칫했다. 이렇게 커버린 아이를 그때처럼 쓰다듬으려 들면 백 퍼센트 수갑 찬다.
"그래서, 언제 얘기였지?"
"처음 만났을 때요. 부딪히고,딸기라떼 엎어지고,노래 흥얼거리는 거 맘대로 듣고 박수치면서 능글댄 거."
"아...그랬었지. 하하. 그때가 네 생일이었었나."
예상대로. 아리스가 당황한 표정을 짓는다. 바빠서 기억 못 한다고 생각했겠지.
"알고...계셨네요?"
"세상에 자기 첫 담당 생일 기억 못 하는 사람이 어딨냐. 아니면 나 그렇게 못미더운 프로듀서야?"
"아니, 그, 못미더운 건 맞는데, 그것 때문은 아니고, 그..."
슬픈 대답이 날아온다. 다만 그 당황한 표정 덕분에 독기는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6년의 아이돌 생활 동안 수많은 일들, 수많은 사람들을 겪으며 그녀는 변했다. 얼핏 본 어른의 이미지 속에서 배운 차가움은 녹았고, 뭉개진 딸기라도 보지 않은 이상 변화가 적던 그 눈에는 수많은 감정이 모여 있다.
그녀는 내가 명함을 주지 않았다면 그럴 순 없었다고 얘기한다. 하지만 내가 지켜본 그녀는, 언젠가 스스로 그런 일을 해낼 수 있었고, 자신의 선택으로 나와 함께하는 아이돌이 되어 자신의 선택으로 성장했다. 그녀에게는 오늘의 생일 선물을 받을 만큼의 인생이 있다. 그녀가 만들어간 인생이. 그리고 그 상당수에 내가 함께한다는 사실은 나에게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이다.

"생일 축하해, 아리스. 나도 알고 네가 더 잘 아는 카페가 있는데, 거기서 딸기라떼라도 사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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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 생일인 걸 알고 글이란 걸 급히 휘갈겨 봤습니다.

다음번엔 가면라이더 프로듀서와 전대 후미카의 공적 경쟁 분투기라도 써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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