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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 나이트 3 - 마트료시카Матрёшка : 혼다 미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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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7-27, 2017 21:02에 작성됨.

 빗줄기가 창문을 때렸다. 타닥타닥, 부딪히는 소리가 시원하면서도 묘하게 타자치는 소리 같아 현재 내 직업이 무엇인지 실감케 했다. 반가웠다. 비는 나의 것이 아니지만 여름은 갈수록 더웠으니까. 적당한 때에 내려서 세상을 식혀준다는 느낌이었다. 더위를 머금은 습기도 없고, 차창으로 흘러내리는 비의 모습은 재앙 같으면서도 운치가 있었다. 갑자기 내린 비가 가져온 교통체증은 싫었지만.

 더 들어가면 복잡할 것 같아 길가에 차를 세웠다. 문을 열고 우산을 피는 사이 시트가 조금 젖었지만 머리는 그렇지 않았다. 아나스타샤가 선물해준 모자 덕이었다. 가벼운데다 햇빛도 가려주고 고른 사람과 쓰는 사람 양쪽의 센스를 돋보이게 하는 좋은 물건이었다. 저주스러운 태양빛이 온 세상을 잠식하더라도 항상 그늘 아래 있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건 아나스타샤가 준 물건이니까 언제 어디서라도 특유의 한기가 느껴졌다.

 이 모자를 쓰고 눈을 맞는다면 러시아에 있는 기분이 들지 않을까.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미지의 설원을 상상하며 찰박이는 빗물을 밟았다. 학교 앞에 도착했을 때 모자챙을 살짝 올려 외관을 확인했다.

 아나스타샤가 다니는 학교. 직접 와보는 건 처음이었다. 꽤나 들어오기 어려운 학교라고 했지. 본관 건물은 어디에서나 볼법한데 전에 봤던 교복과는 매칭 되는군. 여러모로 내가 다닌 고등학교와는 달랐다. 거긴 진짜 똥통 중에 똥통이었으니까. 대문 넘어 운동장을 봤더니 그 시절의 망상이 추적추적 올라왔다.

 초등학교부터 중학교 때까지는 무늬만 학생이었으니 고등학교부터는 마음잡고 살려했었다. 그런데 눈을 안 깔았다, 누구 허락 받고 교복 단추를 풀었느냐, 걷는 폼이 껄렁하다 등등, 별 트집을 다 잡으며 잡배들이 싸움을 걸어왔다. 한 놈씩 때려잡았더니 그 다음부터는 일진회에서 조직적으로 싸움을 걸어오기를 반복. 참다못해 오늘처럼 비 오는 날 학교 안 일진들을 전부 잡아 운동장에 꿇려놓았었다.

 이젠 다 추억이지, ‘이런 곳’과는 전혀 안 어울리는 추억, 내가 대학 못간 건 다 그 놈들 때문이야. 이런 식의 쓰잘머리 없는 생각을 하며 발을 딛는 순간, 경비가 나를 불러 세웠다. 혹시 내 불온한 머릿속을 읽은 건가 싶었는데, 당연히 아니었다. 불온한 것은 나 자체였다. 이곳에 온 뒤로 야쿠자 혹은 위험한 야쿠자로 오해받은 적이 여러 번인지라 다음 패턴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경비가 나에게 누구냐, 무슨 일로 왔냐고 물어보면, 나는 ‘이 안에 아는 학생이 있는데 우산을 가져다주러 왔다’고 답해야 한다. 아직 일본어가 서툰 나는 우물거리며 답을 못 하고, 경비는 나를 더욱 수상히 여기겠지. 직후 생각한 것과 토씨 하나 다르지 않은 대화가 이어졌지만 패턴을 아는 것과 공략은 별개의 문제였다.

 내가 변명 아닌 변명을 늘어놓고 있을 때, 무언가 반짝이는 것이 다가옴을 직감이 잡아냈다. 우산 없이 후드를 눌러쓴 학생이 뛰어오고 있었다. 빗속에서도 시각이 학생의 얼굴을 확인했다. 알고 있지만 모르는 소녀였다. 저기, 잠깐. 우산을 씌워주며 소녀를 잡았다. 수상한 행동에 경비가 내 팔을 잡아끌고 소녀는 어리둥절해 했다.

 “아나스타샤, 알죠?”

 다급히 말하자 소녀의 눈이 커졌다. 잠깐만요! 끌려가는 나를 소녀가 잡았다. 혹시 그, 프로듀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저씨, 잡아가지 마요! 이 사람 아는 사람이에요!”

 

 우산 하나를 건네주고 나는 허리 숙여 감사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정말로. 소녀는 신기하다는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웃음을 터뜨리며 감탄했다.

 “진짜 들은 대로네. 아냐의 프로듀서 씨. 말 안 해도 알아맞히고, 키 크고 정장에 모자, 공손하고, 그리고…….”

 “무섭게, 생겼다고요.”

 “아. 아냐가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어요. 진짜로요. 기분 나쁘시면 죄송해요. 정말로. 사과할게요.”

 소녀는 난처한 웃음을 지었다. 실수를 해도 넘어가는 게 아니라 잘못을 자각할 줄 알아. 남을 불편하게 하지 않고 분위기를 밝게 만들지. 그리고 좀 전에 느꼈던 이미지로 인해 이 아이가 ‘어떤 아이’인지 알 수 있었다.

 나는 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 내 눈치를 보는 소녀에게 건넸다.

 “혼다 씨. 아이돌, 해보시겠습니까?”

 

 *

 

 동료들에게 간단한 인사만 하고 업계를 나온 나는 예전 의뢰인에게 전화 걸어 혹시 새 직장을 구할 수 없겠냐고 부탁했다. 의뢰인은 놀랐지만 이유를 묻지 않고 일을 구해주었다. 전부터 나에게 불순한 관심을 보내와서인지 꽤나 기뻐하는 것 같았다. 얼마 안 지나서 성장성 높고 대우도 좋은 직장을 찾았다며 내게 일본행 비행기 티켓을 보냈다.

 일본이라니. 기막혀 하면서도 나는 운전면허를 따고 속성으로 일본어 수강을 신청했다. 이왕 청산할 거라면 확실히 하는 게 좋겠지,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처음부터 시작하는 거야. 이런 식으로 내 나름의 각오가 담긴 생각을 한 것이다. 그리고 당시에 내가 가지고 있던 문제는 이 만큼 확실하게 매듭지어야 할 만큼 지독한 문제였기에…… 나는 순순히 비행기에 올랐다. 결과적으로 그 때 했던 각오는 지키지 못 했지만.

 타지 생활은 예상 이상으로 적응하기 힘들었다. 맞물리지 않는 톱니바퀴를 억지로 끼워놓은 것처럼 당연하게, 또한 생각지 못한 곳에서 삐걱거림이 멈추지 않았다. 그나마 직장 문제는 좋은 사람들이 도와주고, 나도 악착같이 달려들면서 조금씩 나아졌지만 집 문제는 답이 없었다.

 층간소음과 말 안 통하는 입주민, 여진에도 흔들리는 건물은 양반이었다. 정말 심각한 문제는 집주변. 맨션으로 가는 거리는 쓰레기와 역겨운 싸구려 전단으로 가득해 누가 봐도 관리를 포기했음을 알 수 있었다. 뭘 먹을 만한 가게도 없고 편의점은 필요가 아닌 형식적인 이유로 존재했다.

 그나마 창문 바깥에 벚나무 가득한 풍경이 그럭저럭 볼만했는데 어디까지나 봄 한정이었다. 아니, 봄이 다 지나기도 전에 벚꽃은 사라지고 습한 더위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환기라도 시키려고 창문을 열면 망할 피자 가게 놈들이 타지도 않는 오토바이 시동 소리로 내 귀를 유린했는데, 일본어로 따질 자신이 없어 창문을 닫았다. 방 한 구석 차지하는 냉장고에 머리를 처박고 나는 가게에 불을 질러야 할지, 이사를 가야할지 진지하게 고민했다.

 계좌에 돈은 많았다. 전 직장에서 나는 업계 스페셜리스트였으니까. 하지만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곳에서 돈을 펑펑 쓰고 다닐 수는 없었다. 그리고 생각보다 회사가 생활하기 편했다. 직원용 샤워실과 푹신한 사무실 소파, 걷는 것만으로 유쾌한 기분이 들 만큼 잘 꾸며진 상가거리.

 집에서 회사까지 거리가 있으니 왔다 갔다 하는 것보다 이게 편했다. 갈아입을 옷만 챙겨 오면 하룻밤 아니라 며칠을 새는 것도 나쁘지 않았고. 남들에게, 특히 가끔씩 일찍 회사에 오는 아나스타샤에게 들키지 않으면 됐다. 분명 열악한 환경에서 일한다며 걱정하겠지. 이런 건 익숙한데. 예전 직장에서도 집보다는 사무소에서 잤으니까. 그 때는 정말 열악했지만.

 기상해서 찬물로 샤워를 하고 상쾌한 기분으로 업무계획을 짜는 것이 근래에 정해진 일과였다. 오늘도 컴퓨터를 키던 중 바깥의 구름이 심상치 않음을 알았다. 무슨 일이에요? 마침 출근한 치히로가 물었다.

 “날씨가, 어둡네요.”

 “내일부터 비가 온댔어요. 그래서 오늘은 하루 종일 어두울 거라던데요.”

 “비, 오후부터 올 겁니다.”

 우산 없으시면, 미리 준비하셔야 합니다. 나는 일정을 조정했다. 오후에 예정되었던 잡다한 것들을 전부 지금 당장 처리하는 것으로 변경했다. 외근도 앞당길 필요가 있겠군. 이왕 이렇게 된 거 일정을 좀 더 빡빡하게 조이는 것도 괜찮겠어. 그럼 아나스타샤에게는 기다리라고 문자를……. 내가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 치히로는 폰으로 일기예보를 확인했다. 오늘 비 안 온다는데요? 백스페이스를 누르며 답했다. 저도, 그랬으면 좋겠지만.

 저녁 시간부터 일정이 텅 비어버렸다.

 

 *

 

 ☆Mio’s Weekly Schedule☆

 

월요일 – 합창부 ~ 16:40, 치어리더부 17:00 ~ 19:00

화요일 – 농구부 ~ 17:00

수요일 – 배드민턴부 ~ 18:40 (연습 대결까지 D-7!!)

목요일 – 합창부 ~ 16:00, 야구부 매니저 헬퍼 16:30 ~ 19:00

금요일 – 육상부 ~ 17:00

토요일 – 럭비부 매니저 헬퍼 10:00 ~ 13:00, 배드민턴부 15:00 ~ 17:00

일요일 – 육상부 10:00 ~ 12:30, 자격증 시험 15:00

 

 *

 

 아나스타샤는 교사 정문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계절은 분명한 여름인데도 아나스타샤에게는 여전히 차갑고 신비로운 기운이 감돌았다. 그 공간만 잘라다 떼어놓은 것처럼. 이질적이었지만 학생들은 그것을 인식 못한 것인지 친근하게 인사를 주고받았다. 나와 달리 주변에 잘 적응하고 있는 것 같아 안심이 들었다.

 “프로듀……서?”

 나를 발견한 아나스타샤가 반짝, 빛나듯이 반겨줬다. 그리고 내 옆의 일행을 보고 의아해 했다. 우리는 우산을 접고 안으로 들어갔다.

 “미오? Как(어떻게) 프로듀서랑?”

 “그러니까, 음. 비가 와서 뛰어가고 있었는데 프로듀서 씨가 경비아저씨한테 잡혀있어서…….”

 “что(뭐라고요)?”

 “그러고 있으면, 감기 걸립니다.”

 “아, 네. 잠깐만 기다려, 아냐.”

 미오는 가방에서 수건을 꺼내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 사이 나는 좀 더 상세한 정황을 설명해주었다. 오해가 좀 있었는데 미오 덕분에 해결했다고. 그리고 명함을 줬다고 하자 아나스타샤는 내가 본 것 중에서 가장 기쁜 표정을 지었다.

 홋카이도에서 이곳으로 전학 왔을 때 처음으로 사귄 친구라고 했다. 스포츠 만능에 성적은 상위권, 학기가 시작한지 얼마 안 됐는데도 반을 넘어 학교 전체의 인기 스타. 친화력도 높아서 먼저 말을 걸어온 아이. 미오도 별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자신도 적극적으로 말을 걸었다고. 겉보기에 정반대의 성향을 가진 두 사람이 금방 친해질 수 있었던 이유였다. 아나스타샤는 학교 이야기를 할 때마다 미오에 대한 이야기가 빼먹지 않았다. 함께 찍은 사진도 여럿 있었다.

 반대로 아나스타샤가 미오에게 나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한 덕분에 미오도 나를 알아봤다. 언젠가 꼭 인사를 하고 싶었는데 이렇게 만날 줄이야. 처음 만났음에도 여러모로 고마운 점이 많았다.

 “고마워요, 프로듀서. 저, 미오와도 더 잔뜩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그런 이유로, 권한 건 아닌데.”

 “Да(네). 그래도 프로듀서가 하는 일이니까, ве́рить, 믿어요. 사실 저, 처음에는 미오를 오해했어요. 예쁘다고 말을 거는 사람들, 전부터 많았으니까. 하지만 미오는 달랐어요. Звезда(별)처럼 반짝반짝, 다른 사람들과 친해지도록 이끌어줬어요. 프로듀서처럼. 좋은 친구예요. 그래서…….”

 아나스타샤의 목소리가 조금 가라앉았다. 혹시라도 누가 들을까봐 조심히 말했다.

 “미오. 얼마 전에 힘든 일, 있었나 봐요. 표정이 어두워보였어요. 무슨 일인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Страшно, 무서워서 그러지 못 했어요. 그래서 저, 미오랑 더 친해지고 싶어요. 미오가 저를 도와준 것처럼, 저도 미오를 도와주고 싶어요.”

 “…….”

 나는 모자챙을 쓸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게 나을 것 같아 비 오는 풍경으로 괜히 시선을 돌렸다.

 머릿속으로 비어있는 일정을 채우고 있을 때 미오가 왔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 무슨 얘기 하고 있었어?”

 “미오 씨의, 아이돌 활동에 대해서요.”

 우산을 피고 밖으로 나갔다. 원래 큰 우산과 작은 우산을 하나씩 가져왔는데 사람이 하나 늘어서 두 사람이 한 우산을 써야 됐다. 당연히 두 소녀에게 큰 우산을 주려고 했으나, 아나스타샤가 내 우산 속으로 들어왔다. 나는 당황했지만 아나스타샤는 이상함을 알아채지 못 했다. 거절하기도 뭐하군. 티 나지 않게 우산을 아나스타샤 쪽으로 기울였다. 어깨로 떨어지는 빗물이 축축하면서도 차가워서 그리 나쁘지 만은 않았다.

 저기 있잖아요. 미오가 뒤따라왔다. 이렇게 갑자기 시작해도 되는 거예요?

 “싫으십니까?”

 “아뇨. 좋아요. 사실 아냐한테 자주 들어서 아이돌에 관심이 많았거든요. 예전에 대형 프로덕션 라이브를 본 적도 있는데, 말로는 다 표현 못 하겠지만 굉장하다고 할까. 어쨌든 그랬어요. 그런데 갑자기 스카우트를 받으니까 얼떨떨해서.”

 “저는, 미오 씨에게서, 아름다운 무언가를 느꼈습니다. 그걸, 프로듀스 하고 싶어요. 방금 말하셨던 굉장한 무대, 미오 씨가 해낼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Да. 저도 미오라면 분명 мочь, 할 수 있다고 믿어요.”

 “그렇다는 군요.”

 “아니, 그래도…….”

 “압니다. 갑작스러운 권유, 당황스럽겠죠. 당장 받아들일 필요, 없습니다. 천천히, 신중하게 생각하고, 결정을 내리세요. 그 때까지 제가, 얼마든지 돕겠습니다. 한 번 체험을 해보는 건, 어떻습니까? 오늘 하루, 아나스타샤와 같이. 레슨도 받아보고, 아이돌의 일을 체험하는 겁니다. 부담 갖지 말고, 그냥 논다고 생각하고.”

 미오가 고민하는 동안 아나스타샤는 기대를 숨기지 않았다. 은색머리칼 안에서 얼마나 Yes라는 답을 기다리고 있을까. 상상하고 있으려니 나까지 기대가 전염될 것 같았다.

 “네. 마침 오늘은 비 때문에 일정도 취소됐고. 아냐랑 같이 시간도 보내고 싶으니까. 그렇게 할게요.”

 시원시원한 답에 아나스타샤가 크게 기뻐했다. 이러다 발작이라도 하면 어쩌나, 그런 걱정이 들 정도로. 집이 어디십니까? 우산을 조금 더 아나스타샤쪽으로 기울였다. 끝나고, 바래다 드리겠습니다.

 “역까지만 데려다 주면 돼요. 조금 멀거든요, 치바. 그런데 계속 존댓말 쓰지 않아도 돼요.”

 “……그럴까. 그럼 미오도, 편히 말해.”

 

 차문을 열어 두 사람을 뒷자리에 태웠다.

 운전석에 앉는데 가방을 머리에 이고 뛰어가는 학생들이 보였다. 뒤늦게 자식을 데리러온 부모들과 차들도. 나는 조심히 차를 몰아 혼잡한 학교 앞을 빠져나왔다. 달리는 폼이 예사롭지 않은 몇 명이 차 옆을 스쳐지나가자 미오가 아, 하고 반응했다.

 “아는 애들?”

 “응. 육상부인데 연습이 취소 됐나봐. 사실 오늘 도와주기로 했었거든.”

 “미오, 자주 부활동을 도와줘요. 운동부나, 합창부.”

 들은 적이 있었다. 가입한 동아리는 없지만 도와주는 곳은 많고, 어떤 활동이든 대회에서 상을 탈 만큼 잘 한다고. 내가 궁금해 하자 미오가 수첩을 꺼내 보여주었다. 여고생스러운 느낌이 물씬 풍기는 글씨로 잘 정리된 일정표가 있었다. 색색의 볼펜으로 알록달록하게 꾸민 하드한 일정이 놀라웠다.

 일주일 내내 비는 날이 없었다. 수업이 끝나는 시간은 15:10. 종치자마자 부활동을 돕고, 부활동 하나가 끝나면 또 다른 부활동을 도왔다. 주말에는 아침 일찍부터. 그 와중에 개인적인 자격증 시험까지.

 스카우트 제의에 고민할 만도 했다. 아이돌 활동을 하려면 이걸 다 취소해야 하니까.

 “힘들지 않아?”

 “괜찮아. 끝나고 난 뒤에 애들이랑 놀러 다니면서 휴식도 취하니까. 이제 익숙해 졌어.”

 “집이 치바라고, 했는데. 전철로 1시간 거리. 굳이, 여길 다닐 필요가 있나?”

 “꼭 그럴 필요는 없지만…… 그냥 좀 궁금해서. 도쿄의 학교는 어떤지. 내가 얼마나 통할지. 뭐, 그런 거.”

 “전에 학교에서도, 그랬어?”

 “예전에는…… 아니.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어. 고등학교 올라오면서 좀 더 열심히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거든.”

 사기 캐릭터군. 수첩을 돌려주고 액셀을 밟으며 생각했다. 인기도 많고 스포츠 만능에 성적은 상위권. 합창부와 치어리더부를 도와준다는 건 노래와 춤 실력도 괜찮다는 거겠지. 생각 이상으로 정말 뛰어난 아이야.

 “늦게 들어가면, 가족들이 걱정하지 않아?”

 “괜찮아. 부모님은 바빠서 저녁까지 해결하고 오라고 하시거든. 동생이랑 오빠도 있지만 다들 알아서 밥 먹고 들어와. 동생도 벌써 중학생이고, 오빠는 얼마 전에 직장 들어가서 나보다도 늦게 들어오고.”

 빗줄기가 약해지자 창문을 때리는 소리도 옅어졌다. 좀 조용해지나 싶었는데 뒷자리에서 재잘대는 소녀들의 소리가 들렸다. 아냐는 SNS하는 구나. Нет(아뇨), 계정만 만들었어요, 어려워서. 그렇게 어렵지는 않아, 그냥 하고 싶은 말, 보여주고 싶은 사진 올리면 돼, 이렇게. прекрасно(대단해요), 미오.

 “미오도 SNS 하나요?”

 “아, 음. 뭐, 그냥 남들 하는 것만 봤지.”

 듣고 있으려니 축 늘어지면서도 안정되는 기분이 들었다. 이대로 돌아가면 일이 손에 안 잡히겠어. 음악을 틀고 볼륨을 높였다. 내가 음악에 귀를 기울이는 동안에도 뒷자리의 이야기는 멈추지 않았다.

 학교 숙제나 수업, 지금 친구들, 아이돌 활동과 러시아 등. 다양한 주제가 오고 갔다.

 

 *

 

 “있잖아, 프로듀서의 별명 지을까?”

 “별명? ‘아냐’같은 거 말인가요?”

 “응. 편히 말하라고 했으니까 별명을 지으면 좋을 것 같아서. 그냥 프로듀서라고 부르는 건 딱딱한 것 같고.”

 “프로듀서의 별명. 좋을 것 같아요.”

 “그치? 어떤 게 좋을까?”

 “프로듀서의 이름은 백야니까…… Белые ночи.”

 “어? 그거 어떻게 발음하는 거야?”

 “비엘레이 노치, 라고 해요.”

 “어려운데.”

 “사실 러시아에서는 Белые ночи(백야)보다 Полярный день(극의 낮)이라고 말해요.”

 “으음. 꼭 이름을 바꾸는 것보다는…… 아! 겨울P!”

 “P? 프로듀서인가요?”

 “맞아. 분위기가 겨울 같으니까 겨울, 프로듀서니까 P. 어때?”

 “귀여워요. 어때요? 프로듀서.”

 “아무래도, 상관없어.”

 

 *

 

 기획서에 마침표를 찍자 빗방울이 옅어졌다. 다행히 하늘은 여전히 구름으로 가득해서 적어도 오늘 하루는 무더위를 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예전부터 이런 날이 좋은 날이었지. 강이를 따라다니며 머리 쓰는 법을 배우던 시절이 떠올렸다. 비 많이 내리고 천둥이 대기를 찢는 그런 날은 일이 많아졌다. 어쩌다 사람 실종되기 딱 좋았으니까. 갑작스러운 의뢰가 빗발치면 강이는 한몫 단단히 벌 기회라며 즐거워했다. 세상이 혼란스러울 때가 우리 같은 놈들이 쓸모 있을 때라면서.

 의자에 몸을 기대고 생각했다. 이제 나는, 빗소리에서 사무실을 떠올리는 나는, 혼란스러운 세상을 바라서는 안 되겠지. 조금씩 이쪽 사람이 되어가는 거야. 그 증거로 형님들과 동생들에게 연락 한 번을 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야. 털어버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마지막 일정은 레슨 확인. 레슨실에서는 두 여고생이 춤을 추고 있었다. 처음 하는 아이돌 댄스에도 미오는 제법 잘 따라왔다. 아나스타샤의 표정도 전에 없이 진지했다. 나는 잠깐 트레이너를 불러 얘기를 나눴다.

 “어떻습니까?”

 “혼다는 기초체력 만큼은 어지간한 연습생들보다 나아요. 잘 하는 사람이 옆에 있으니까 아냐도 더 열심히 하고요. 지금까지 좀 부족했던 승부욕이 생겼다고 할까.”

 “다행이네요.”

 “알고 있었다는 듯이 말하시네요. 뭔가 생각 중인 거라도 있나요?”

 “아직은, 기획 단계입니다.”

 두 소녀는 쉬는 시간에도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차 안에 이어서 인터넷 문화에 대해 알려주는 듯 했다. 괜찮다면 오늘은 같이 저녁을 먹자고 했더니 아나스타샤가 또 기뻐했다. 그 부담감을 이기지 못 하고 미오도 찬성했다.

 아나스타샤가 먼저 샤워실로 가자 미오가 안도의 숨을 쉬었다.

 “고마워, 겨울P. 조금 위험했을 때였어.”

 “뭘, 보여줬던 거야?”

 “아이돌 관련 정보를 알려주는 사이트에 들어갔었거든. 그런데 거기에 안티 스레도 있지 뭐야. 이런 걸 보여줄 수는 없잖아. 아, 저기, 겨울P?”

 미오가 물었다. 갑자기 조용해진 나에게서 불안감을 느낀 것이다. 사실 나는 이미 그 안티 스레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아나스타샤에게 인터넷을 알려주기 싫었다. 팬들과의 소통창구로도 쓰일 수 있겠지만 역기능이 더 클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쩔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불쾌했다.

 “너무 화내지 마. 물론 안 좋은 말을 하는 안티들은 나쁘지만 겨울P가 너무 화내면 안 된다고 생각해. 아냐는 그런 거 걱정하거든.”

 “…… 그래.”

 난감해 하던 미오의 얼굴이 풀어졌다가 다시 어두워졌다. 미안, 내가 괜한 걸 보여줘서. 화면을 아래로 넘기며 중얼거렸다.

 “아냐는 이런 걸로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어. 오늘 같이 연습해 보니까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학교에서는 마냥 예쁘고 착하고 순수한 애인 줄로만 알았는데, 아이돌로서의 아냐는 정말 쿨하고 멋져보였어. 완전 압도될 뻔했다니까! 그래서 그걸 보고…… 나도 저렇게 되고 싶어졌어. 될 수 있을까?”

 “물론, 될 수 있어.”

 “너무 쉽게 대답하는 거 아니야?”

 “확신이지. 내, 안목에 대한. 그런데 말이지. 이런 걸로, 사과할 필요 없어. 네 잘못, 아니니까.”

 “어? 아니, 이건 그냥.”

 “너무 쉽게, 사과하지 마.”

 힘주어 강조했다.

 미오의 눈이 조금 떨리듯이 나를 마주봤다. 그러더니 크게 웃어보였다.

 “뭐야, 갑자기. 진지하게. 그렇게 말하니까 너무 부담스럽잖아. 좀 무서울 뻔했어.”

 나도 씻고 올게. 장난스러운 태도를 유지하며 미오가 밖으로 나갔다. 나는 끝까지 그 모습을 응시하다 모자를 눌러썼다.

 

 저녁은 근처의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해결했다. 메뉴판의 음식을 죄다 시키고 싶었지만 잔소리 쏟아질게 뻔해서 그만뒀다. 그러고 보니까 내 신세가 노예 혹은 애완동물이 맞는 것 같았다. 주인 허락 없으면 밥도 마음대로 못 먹는다니.

 나와 아나스타샤는 햄버그 스테이크, 미오는 치킨 샐러드 세트를 주문했다. 말만 샐러드지 사실상 후라이드 치킨에 가까운 무언가가 나왔다. 아이돌을 시작하면 그런 건 많이 못 먹는다고 말해줬더니 발을 빼려는 것을 자비 없이 붙잡았다.

 “난 그런 말 못 들었어!”

 “그걸 꼭, 말해야 아나.”

 “미오, 이미 늦었어요.”

 이른 저녁을 먹고 나왔더니 여전히 시간이 남았다. 이대로 헤어지면 애들이 아쉬워하지 않을까 했는데 마침 미오가 근처의 게임센터를 가리켰다.

 요즘 청소년들의 유흥공간은 음침한 아저씨들이 가던 허름한 오락실과는 차원이 달랐다. 보글보글하자고 말하면 아재 취급 받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그래서 한국인은 게임 잘하지 않느냐는 미오의 질문에 편견이라고 말해줬다. 저 사이에 끼어서 같이 우후후, 꺄하하 하고 놀았다가는 빼도 박도 못 하고 원조교제로 오해받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멀찌감치 떨어져 구경만 하던 중 나는 세상 여고생은 두 가지 분류로 나눌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놀 줄 아는 여고생과 그렇지 못한 여고생.

 당연히 아나스타샤가 후자였다.

 “поражение……. 또 져버렸네요.”

 “괜찮아. 아! 다음엔 저거 한 번 해보자!”

 게임을 바꿔가며 여러 가지 도전한 덕에 아나스타샤도 조금씩 흥미를 가졌다. 하지만 마지막까지도 인형 뽑기 기계에서 상품 하나를 따내지 못해 다시 시무룩해졌다. 미오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자연히 두 여고생의 눈길이 내게로 향했다.

 “프로듀서라면 가능할 것 같아요!”

 “겨울P! 한 번 도전해 봐!”

 “…….”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이런 식의 도박 게임에 흥미가 없었다. 도박단 잡겠다고 전국의 하우스를 이 잡듯이 뒤지고 판을 엎어버리고 손모가지 자른 적이 한두 번이 아닌 탓이었다. 그 와중에 타짜들을 상대로 타짜 짓을 하는 강이에게 질린 것도 있었다.

 말이 좋아 인형 뽑기지 이것도 결국은 확률조작이 들어간 함정인데 순순히 걸려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피해를 입은 청소년들의 억울함은 달래줘야겠지.

 나는 게임센터를 돌아다니다 발견한 다트 게임으로 여고생들의 관심을 돌렸다.

 “다트 할 줄 알아? 겨울P?”

 “보기나 해.”

 던질 기회는 다섯 번. 잡다한 규칙들이 있었지만, 중앙에 다섯 번 다 맞췄을 때 기분 풀어주기 좋은 상품을 얻는다는 것에만 신경 쓰기로 했다. 모자를 살짝 올려 시야를 확보하고 핀 하나를 가볍게 쥐었다. 생각보다 재질이 좋은 물건이었다.

 내가 쥐는 자세를 보고 점원이 고개를 갸웃했다. 초짜라는 것을 알았나 보다.

 중앙을 불스 아이라고 했던가. 다트에 꽂혔던 둘째 형님이 설명해준 게 기억났다. 나한테 10점차로 지고 요령을 물었었지. 자세도 엉망이면서 어떻게 한 번도 안 흔들리느냐고. 간단했다. 맞추고 싶은 지점, 지금은 불스 아이를 황소 눈깔이 아니라 사람 미간으로 생각하라고.

 손목의 스냅과 함께 핀이 중앙에 꽂혔다. 여고생들과 점원이 놀랐지만, 전에 썼던 것과 무게중심이 달라서인지 조금 아슬아슬했다. 요령을 파악하고 핀을 연달아 던졌다. 마지막 다섯 번째가 정중앙에 꽂히자 박수가 터졌다.

 

 *

 

 “오늘 정말 즐거웠어. 앞으로 아이돌 활동도 열심히 할게!”

 “До свидания(잘 가요), 미오!”

 작별인사를 마치고 우리는 차에 올랐다. 비는 이미 그쳤지만 해도 같이 지면서 아직도 시원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아나스타샤는 여전히 상품인 ‘마트료시카’에 마음을 뺏긴 채였다. 러시아를 생각나게 해서인지 정말로 마음에 드는 물건이라고 했다. 게임센터 경품 치고는 제대로 된 물건이라 더욱 그런 것 같았다.

 “Спасибо(고마워요), 프로듀서. 오늘 정말로, 정말로 즐거웠어요. 그래서 이거, 프로듀서에게 подарок, 선물로 주고 싶어요.”

 룸미러에 비친 마트료시카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핸들을 꺾으며 물었다.

 “괜찮은데. 그건…….”

 “프로듀서의 책상에 뒀으면 좋겠어요. 사무실로 갈 때마다 저도, 미오도 오늘의 추억을 떠올리도록.”

 또 거절하기 뭐한 상황이었다. 겨울 저걸로 모자 선물과 퉁친다던가, 그럴 생각은 아니었지만 뭔가 묘했다. 기껏 따준 경품을 돌려받다니. 그래도 기분 풀어주는 목적은 달성한데다 본인이 그걸 원하고 있으니 감사히 받기로 했다.

 “미오. 내일도 오기로 했죠?”

 “어. 부활동 도우미, 전부 끝내고. 저녁 전에, 오라고 했어.”

 “바로 아이돌, 시작하는 건가요?”

 “아니. 내일 할 일은, 따로 있어.”

 네가 열심히 해야 해. 차 안이 조용해졌다. 엔진 소리에 물 튀기는 소리가 겹쳤지만 그 외에는 정적이었다. 아나스타샤가 의문을 품었다. 단순한 의문이 아니라 갑자기 변한 분위기에 대한 기시감이 섞여있었다.

 조금 미안해졌다. 오늘 하루는 정말로 즐겁게 놔두고 싶었는데. 하지만 앞으로의 원만한 관계를 위해서는 필수적인 일이었다.

 “아까, 말했었지. 미오에게, 힘든 일이 있는 것 같다고. 그거에 대해서야.”

 학교에서의 대화를 떠올리고 아나스타샤가 고개를 끄덕였다.

 차를 멈춰 세웠다. 이건, 네가 말해줘야 해.

 “현재처럼 사는 것이, 별로 이롭지 않다고.”

 

 *

 

 편의점에 들러 물을 샀다. 할 말이 많은데 아무리 시원한 날씨라지만 여름인 건 변치 않은 까닭이었다.

 아나스타샤에게는 음료수를 사줬지만 전혀 흥미가 없어 보였다.

 내가 물 한 모금을 넘기자 물어왔다.

 “프로듀서. 미오에게 무슨 일, 있는 건가요? 어떻게 알아요?”

 감으로. 이게 사실이지만 정말로 이렇게 말하면 이해하기 어렵겠지.

 목을 축이고 입을 열었다.

 “일정표가 이상해.”

 일주일 내내 쉬는 시간이 없었다. 체계적이고 매우 빡빡하게. 학교 끝나자마자 부활동, 끝나면 다시 부활동. 주말에는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 또 도우미. 사람을 혹사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스케줄 표나 다름없었고 실제로 미오는 혹사당하고 있었다.

 바로 자기 자신에게.

 “몇 시간씩 체육 활동을 하고, 친구들과 놀러 다니다, 밤늦게 귀가. 성적은 상위권, 교우관계 원만. 이런 게 과연 가능할까?”

 “안 되는 건가요?”

 “체력이 안 따라줘. 여고생이거든. 학교와 아이돌, 병행하는 것만으로도 힘든 거, 너도 알잖아. 그런데, 미오는 그 몇 배의 스케줄을, 휴식 없이 해내고 있어. 전철로 1시간 거리를, 통학까지 하면서. 만화 속에서나 나올 일이지. 불가능 해.”

 그런 불가능한 일을 해낼 만큼 미오의 재능은 뛰어났다. 그리고 불가능을 유지하는 부담 또한 온몸으로 받고 있을 게 뻔했다. 부활동 도우미를 유지하려면 대회에서 입상할 정도의 실력을 떨어뜨려서는 안 된다. 교우관계를 유지하려면 체력이 바닥난 상태에서도 남들과 어울려야 하고. 그렇게 밤늦게 집에 돌아오면 성적 유지를 위해 공부까지.

 미오가 힘들어 보였던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다.

 “정말로, 힘들었던 거지.”

 텁텁해진 입 안을 물로 적셨다.

 아나스타샤가 이해가 안 된다는 투로 말했다.

 “프로듀서 말 대로면, 이상해요. 그렇게 해야 할 이유가….”

 “인기 있고 싶으니까.”

 잔잔히 남은 비내음이 바람에 실려 왔다. 땅은 축축하고 하늘에는 낮게 깔린 구름이 슬슬 걷히는 중이었다. 산책하기 좋을 때야. 잠시 걷기로 하고 세워둔 차와 반대방향으로 움직였다. 편의점 간판에 맺힌 빗방울이 모자 위로 톡, 떨어졌다.

 “미오는 인기 많아요.”

 “그래서 더, 불안한 거야. 애들의 마음이 바뀔까봐.”

 “무슨 소리예요?”

 “왕따였거든. 미오는.”

 아나스타샤의 표정이 굳었다.

 단어 선택이 너무 직설적이었나 싶어 수정했다. 집단따돌림의 피해자, 라고 할까. 은따, 전따, 집단괴롭힘. 일본에서는 이지메라고도 하는 그것. 어쨌든 간에 미오는 그 중에 하나였다. 아마 중학교 시절까지.

 “도쿄까지 통학하는 것도, 그래서야. 괴롭힘을 피하고, 새로 시작하려고. 이곳에는, 자신의 안 좋은 과거를 아는 사람이, 없으니까.”

 나와 처음 만났을 때, 혹시라도 나를 기분 나쁘게 했을까봐 사과하는 모습에서 직감적으로 알아챘다. 이 아이는 그런 아이라는 것을.

 분쟁을 극도로 꺼리고 타인이 자신을 미워하는 것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작은 일이라도 상대가 불편해하면 사과하고, 그 후에 분위기를 바꾸는데도 능숙했다. 그게 설령 자기 잘못이 아니더라도. 항상 남들의 눈치를 보는 것이다.

 그리고 안티 스레 사이트. ‘아냐는 이런 걸로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어.’라고 했지. 자신도 비슷하게 당해본 경험이 있어서 걱정한 것이었다.

 “SNS는 왜 안 할까. 교우관계도 좋은 애가.”

 아나스타샤처럼 인터넷 문화를 모르는 것도 아닐 텐데. 오히려 아주 잘 알고 있었지. 사진 찍고 놀러 다니기 좋아하고 애들 사이에서 인기 있는 친구가 SNS를 해본 적이 없다, 그런데 남들 하는 것만 보고도 어떻게 하는지는 잘 알고 있다?

 그런 게 아니라.

 “SNS를 하다, 우연히 본 거겠지. 친구라고 생각한 애들이, 자신을 욕하는 글들을.”

 미오는 과거에 대해 말하는 것 자체를 꺼렸다.

 집이 치바인데 왜 여기까지 오느냐, 전에 학교에서는 어땠느냐, SNS를 해본 적이 있느냐. 과거와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면 대답이 늦어지고 화제를 바꾸려했다. 아나스타샤와 이야기를 나눌 때도 주로 지금 어떻게 지내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고. 과거 이야기는 최대한 꺼내지 않았다.

 주말에도 시간을 비우지 않고 아침 일찍부터 도쿄에 있다는 건 치바에서는 친구들을 만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애초에 친구라고 할 만한 족속들도 아니지만.

 “어째서…….”

 아나스타샤의 목소리가 조금 떨리고 있었다. 친구에 대한 강한 억울함이었다.

 “미오가, ошибка, 뭘 잘못하기라도 한 건가요? 대체 왜…….”

 “왜, 괴롭혔을까.”

 한적한 주택가를 돌아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남은 물을 단숨에 들이켜고 물통을 구겼다.

 따라오던 아나스타샤가 웅덩이를 밟을 뻔해서 내 쪽으로 끌어당겼다. 조금 망설였지만 다행히 항상 손에 가득하던 피의 망상이 비에 씻겨 나가 있었다. 그런데 떨어진 음료수 캔에서 내용물이 웅덩이에 섞여들었다.

 나는 아까워하며 말했다.

 “그냥.”

 “네?”

 “이유는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어.”

 공부도 운동도 잘 하는 애니까 질투가 났을 수도, 활발한 성격이 나대는 것처럼 보였을 수 있다. 아니면 정말 별 거 아닌 것. 헤어스타일이나 얼굴이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도 가능하다. 학교에 군림하는 녀석이 힘을 과시하기 위해, 혹은 재미로 찍었을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간에 가해자들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이유는 허울에 불과해. 그냥 싫어하기 때문에, 싫어하는 거야.”

 일단 밉다고 마음먹으면 그 대상이 하는 모든 행동은 밉게 보인다. 그게 내가 아는, 내가 겪은 학교폭력이라는 것이었다.

 “프로듀서, 저…….”

 다음 말을 잇지 못 하고 아나스타샤의 말이 끊겼다. 괴로워했다. 어렸을 때부터 남들 눈에 쉽게 띄었던 기억, 그로 인해 소극적으로 행동했던 경험이 떠오른 것이다. 공감이자 죄책감. 친근하게 다가오는 미오를 남들과 같다고 오해했던 죄책감.

 “저, 미오를…….”

 “네 잘못이 아니야.”

 손을 잡고 강조해서 말했다. 미안해하는 건 상관없지만 가질 필요 없는 죄책감은 서로에게 좋지 않았다.

 이건 이미 벌어진 일이고,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

 “네가, 미오를 도와줘야 해. 그래서, 미리 말해주는 거야. 미오에겐, 도와줄 사람이 없어.”

 만약 도움을 받았다면 혼자 끙끙 앓으면서 멀리 떨어진 학교에 다닐 리가 없었다. 가족들이 알았다면 아예 이사를 갔을 테니. 가족 이야기를 꺼리지 않는 걸로 보아 사이가 나쁜 건 아니지만 서로에게 소홀해. 1시간 떨어진 거리에서 여고생 혼자 밤늦게 전철을 타고 다니는데도 무신경하지. 부모님은 맞벌이 중이고 위아래로는 남자형제들 밖에 없으니까. 한창 사춘기인 남동생과 사회초년생이라 정신없을 오빠라면 더더욱 그렇겠지.

 이런 상황에서 도움 청할 곳은 학교나 경찰 밖에 없는데, 그런 곳에서는 일을 크게 만들기 싫어하고, 진상 파악조차 안 하는 경우가 많아. 오히려 피해자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경우도 있지. 왜 좀 더 잘 대처하지 못 했냐면서.

 그것이 미오에게 하나의 강박으로 남았다.

 떨어진 자존감에 스스로를 연민하고, 어설픈 위로를 하다 다시 스스로를 불쌍히 여기는 과정의 반복. 전부 자기 탓으로 돌리다 도착한 결과가 남들에게 미움 받지 않고 무리해서라도 호감을 사려는 행동들이었다.

 예전 직장에서도 비슷한 일들을 많이 봤다. 학교의 허술한 일처리에 답답해진 피해자 가족들이 해결을 의뢰한 것이다. 절대 좋은 방법이 아니지만 돈 때문에 원하는 대로 해줬다.

 하지만 이번 일 만큼은 ‘제대로’ 해결해야 했다.

 “내일 미오가 오면, 네가 말해줘. 네 잘못이 아니라고.”

 “제가…… 하는 건가요?”

 “친구니까.”

 짧은 산책을 마치고 다시 차에 탔다. 비는 그쳤음에도, 어쩌면 비가 그쳤기 때문에 우울한 적막만이 감돌았다.

 복잡한 감정의 소용돌이를 안은 아나스타샤가 마트료시카를 바라봤다. 무의식적으로 미오를 비춰보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나 하나씩은 가면을 쓰고 있다. 남들의 시선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미오는 그 이상의 것을 필요로 했다. 그래서 몇 겹이나 되는 갑옷을 두르다 그 안에 갇혀버린 것이다. 숨도 쉬지 못할 만큼 답답한 공간에서 무엇이 진짜 자신인지도 모른 채.

 이젠 꺼내줘야겠지. 걱정은 없었다. 아나스타샤라면 분명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잘 알고 행동할 것이다. 내 생각 이상으로 강하고 착한 아이니까.

 그러도록 도와주는 것 또한 내가 프로듀서로서 해야 될 일일 것이다.

 

 *

 

 응접실 문 앞에서 아나스타샤가 망설였다. 무대와는 다른 긴장과 떨림이 내게도 느껴졌다. 문고리를 잡으려는 손을 제지하자 나를 쳐다봤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네가 그러면, 미오에게도 불안이 전가돼. 너무 걱정 마. 잘 할 수 있어. 레슨도 쉬고, 하루 종일 연습했잖아.”

 “……Да.”

 아나스타샤가 호흡을 가다듬었다. 차갑고 포근한 눈이 살포시 내려앉는 듯 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 미오를 마주할 때도 흔들림이 없었다. 마주 앉은 친구의 신비로운 분위기에 미오는 조금 위화감을 느꼈다.

 어색하게 입을 열었다.

 “저기, 오늘은 무슨 일이야? 레슨은 안 하는 거야?”

 “오늘은 쉬었어. 따로 일이 있어서. 미오도, 좀 전까지 부활동 돕다 왔잖아.”

 “이 정도는 괜찮아. 앞으로는 이것보다 더 열심히 해야 할 텐데.”

 “미오.”

 아나스타샤와는 또 다르게 차가운 분위기에 미오의 웃음이 멈췄다. 나는 차분히 입을 열어 상황을 설명했다.

 “어제, 아나스타샤에게 들었어. 미오가 힘들어하는 것 같다, 고민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내 나름대로, 생각을 좀 해봤어.”

 아나스타샤에게 이미 설명했던 것을 한 번 더 얘기했다. 분위기를 살피며 최대한 상처받지 않도록. 어떤 일을 겪었는지 알고 있다, 그로 인해 얼마나 힘든 시기를 겪고 있는지도.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그럴 필요 없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모두 너를 좋아하니까.

 하나씩 사실을 밝힐 때마다 미오에게 자괴가 몰아쳤다. 기분 나쁘다고 화를 낼 법도 한데, 그러지도 못 하는 것이 안쓰러웠다. 지금도 분명 자기를 탓 하고 있겠지.

 “미안해. 내가, 그러니까…… 두 사람을 불편하게 한 것 같아. 그러면 안 되는데, 티 났나봐. 정말로 미안…….”

 “Нет(아뇨).”

 아나스타샤가 미오의 손을 잡았다.

 “전혀 불편하지 않아요. 괜찮아요. 그야, 미오의 잘못이 아니니까.”

 시야에 망상이 스쳤다.

 하얀 손길이 조심히 상자를 열자 안에서 마트료시카 인형이 나왔다.

 “힘들었던 거, 알아요. 저도 그랬어요. 그래서 미오에게 Большое Спасибо, 정말 고마워요. 저에게 먼저 다가와준 친구니까.”

 한 마디, 한 글자씩 말할 때마다 작아지는 인형을 하나씩 열어갔다.

 “이번에는 제가 미오를 돕고 싶어요. 미오가 그랬던 것처럼.”

 마지막 인형이 열리고 ‘진짜’가 드러났을 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이 다음부터는 내가 끼어들 일이 아니야.

 “수고하셨습니다. 프로듀서님.”

 치히로가 에너지 드링크를 건넸다.

 

 *

 

 “궁금한 게 있어요.”

 두 사람을 바래다주고 야근으로 돌아왔을 때 치히로가 물었다. 아나스타샤 외에 이 일에 대해 알려준 유일한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일기 예보가 틀려서 오늘은 비가 안 왔지만 다행히 날씨는 시원했다. 뭐죠?

 “미오는 왜 아이돌을 한다고 했을까요? 예정되어있던 일정들을 전부 취소해야 하잖아요.”

 나는 창문을 열면서 대답했다.

 “아나스타샤 때문입니다. 아이돌을 하면서, 학교에서 주목받기 시작했으니까. 자신도 그렇게 되고 싶다, 그런 생각이죠.”

 “질투인가요?”

 “전혀요. 동경, 그리고 갈망이죠. 비슷하지만, 이 경우에는 전혀 다릅니다. 그게 바로, 미오의 가장 안쓰러운 점이에요.”

 미오가 받은 괴롭힘의 수위는 나로서는 알 수 없었다. 단지 심각한 수준은 아닐 거라고 바랄 뿐. 안 좋은 일을 겪고도 밝은 성격을 유지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지 않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하드한 스케줄을, 어기지 않았죠. 학교에서도 신임 받고. 눈치 빠르고, 책임감도 강한 아이에요. 그리고 그 책임감이, 스스로를 옥죄고 있었습니다.”

 “손해 보는 성격이네요.”

 “네. 안 좋은 것은 자신에게, 좋은 것은 남들에게. 양보하며 산다고 할까. 이용당하기 좋아요. 이것도, 괴롭힘의 이유였을 겁니다.”

 “예전부터 이런 성격이었다는 건가요?”

 “아마도요. 놀아보니까 알겠더군요.”

 인터넷 문화에 빠삭하고 게임센터 등 오락에도 능숙했다. 분위기를 이끌어나가는 것도. 이런 건 급조해서 꾸며낸다고 되는 게 아니야. 원래부터 이런 성격이었으나 더 철저하게 바꾼 것이지. 밝은 성격이라도 항상 밝은 건 아닌데 미오는 항상 밝게 행동했다. 그러면서 ‘웃고 있으니까 나는 즐거운 거야’라고 스스로를 속여 온 것이다.

 “그래서 더, 혼란이 왔을 겁니다. 내가 입은 갑옷이, 진짜 나인지, 꾸며낸 나인지. 자괴감은 더욱 커지죠.”

 “아냐에게 이 일을 설명한 건 어째서인가요?”

 “상처를 치유하려면, 그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니까요.”

 내가 제일 걱정하고 있는 것은 미오가 유명세를 타게 됐을 때의 일이었다. 미오를 괴롭혔던 놈들이 미오가 아이돌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경우. 인터넷을 통해 괴상한 소문이 퍼질게 뻔히 보였다. 그런 놈들은 호되게 당하기 전까지는 반성을 안 하고, 애초에 자기 행동이 잘못이라는 것도 모르니까.

 “남의 안티 스레에도, 자기가 상처받는 애예요. 또 비슷한 일이 생기거나, 비슷하지 않더라도 큰 충격을 받게 되면, 무너지겠죠. 그럴 때 가장 필요한 건, 친구입니다. 사람에게 받은 상처는, 사람에게 치유 받아야죠. 그런데, 어제 처음 만난, 인상 험악한 아저씨는, 그런 걸 못 합니다. 아나스타샤가 해줘야 하는데, 그 전에 준비가 필요했어요. 두 사람은 서로가 서로를, 동경하니까.”

 “동경은 이해나 공감과는 가장 동떨어진 말이니까요.”

 “맞습니다. 그런데 다행인지 아닌지, 두 사람은, 서로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빗속에서 미오가 스쳐지나갈 때 직감으로 느낀 반짝이는 것. 그것은 ‘별’이었다. 아나스타샤에게서 본 것처럼 아름답게 빛나는 별. 그래서 미오라면 분명 아이돌이 될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다만 미오의 별은 넓은 하늘에 있지 못 했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별이 빛나는 이유는 어둠이 짙어서가 아니라, 어둠이 싫어서가 아닐까. 좁고 답답한 마트료시카 안이 싫어서 그리도 필사적으로 빛을 내는 것일까.

 “그러니까, 말해줘야 했어요. 그건 네 잘못이 아니다. 거긴 네 무대가 아니다.”

 구름이 걷힌 덕인지 도시에서도 오늘은 별이 보였다. 겨우 두 개, 초라한 숫자였지만 함께 있어서 보기 좋았다.

 오늘 밤은 작지만 별이 빛나는 밤. 그러니 너의 무대를 찾을 수 있기를. 기도하는 나의 눈에 별들의 첫 만남이 망상으로 떠올랐다.

 

 *

 

 안녕, 아나스타샤!

 что(네)? 어, 미오…… 인가요?

 맞아. 혼다 미오! 오늘부터 같은 반 됐으니까 인사하러 왔어.

 그렇군요. Привет(반가워요), 미오. 저는 아냐라고 불러줘요.

 아냐가 별명이구나. 귀엽다. 근데 그거 어느 나라 말이야?

 러시아어예요. 하지만 저, 러시아 사람은 아니에요. 일본 사람입니다.

 그래? 혼혈인건가?

 Да(네). 아, 맞아요.

 그렇구나. 신기하다. 이렇게 예쁜 사람 처음 봤어. 피부도 하얗고 눈도 맑고. 어, 혹시 내가 무슨 실수했어?

 …… Нет(아뇨). 그런 건, 아니에요. 그런데 저, 그런 말은 자주 들었어요. 예쁘다, 남들과 다르다.

 그렇구나. 미안해. 그럴 줄은 몰랐는데. 내가 실수한 거 맞았네. 다른 뜻은 아니었어. 정말로 순수하게 아냐가 예뻐 가지고.

 Да. 알아요. 칭찬인 거. 기분 나쁘지 않아요.

 다행이다. 그런데 뭐 보고 있었어? 천문학? 굉장하다!

 미오도 Звезда…… 별, 좋아하나요?

 응. 하늘에서 반짝반짝 거리는 게 엄청 멋지잖아. 부럽다. 이런 것도 잘 알고. 별이 러시아어로 뭐라고?

 Звезда. 즈베즈다, 예요. 이 책, 빌려드릴까요?

 진짜? 그럼 고맙지! 벌써 아냐한테 신세지고 말았네. 우와, 근데 이거 엄청 어려운 내용이네. 시간 너무 오래 걸릴 거 같은데. 그냥 같이 읽을까? 아냐가 가르쳐줘.

 Да. 얼마든지요.

 별자리 이야기도 있구나. 난 사수자리인데. 아냐는 무슨 자리야?

 처녀자리요. 사수자리 이야기는 여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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