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카테고리.

  1. 전체목록

  2. 그림

  3. 미디어



...in the name of... what?

댓글: 2 / 조회: 613 / 추천: 4


관련링크


본문 - 07-21, 2017 11:51에 작성됨.

그것은 선명하지만 색바랜, 오래된 사진같습니다. 그 때의 감정, 분위기, 상황을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지만 정확한 풍경만큼은 기억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순간들을 가끔 떠올리면 혼란스러워집니다. 자신의 기억에 대해 의심이 듭니다. 풍경이 기억나지 않는다면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는 감정들은 지어낸 것이 아닐까요. 예전의 기억을 멋대로 해석하고 입맛대로 감정을 덧붙인 것이 아닐까요. 오래된 기억이란 그렇습니다. 꺼내보면 아련하지만, 그와 동시에 불안한 것입니다.
저에게도 오래된 기억들이 몇 장 있습니다. 기억의 사진첩을 열어 볼 때마다 바닥에 떨어지는 사진 몇 장은, 빛이 바래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진첩 페이지 사이에 끼워져 있습니다. 저는 떨어진 사진들을 하나하나 살펴 보고는 다시 사진첩 사이에 끼워둡니다. 예전의 저는 이유가 있어 그 기억들을 페이지 사이에 끼워 둔 것이겠지요. 기억은 볼 수록 흐려진다지만 다음 번에도 맨 번저 볼 수 있도록, 그 기억들을 다른 기억의 페이지 사이에 끼워둡니다.
페이지 사이의 기억들은 꽤나 다양한 시간대의 것들이 있습니다. 너무 예전의 일이라 거의 다 바래버린 것부터, 불과 며칠 전의 색감 풍부한 기억까지. 기억의 사진 한 장을 집을 때마다 빛바랜 그날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풍경, 냄새, 소리, 맛, 두근거림, 머리아픔, 감정들. 확실한 것인지 의심이 든다 해도 전부 소중한 기억들입니다. 하지만 페이지 사이의 수많은 기억들 중 단 하나, 정말로 확신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10년 전, 혹은 그보다 조금 더 오래 된 기억입니다. 저는 병원에 있었고, 제 앞에는 저 또래의 여자아이가 침상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 아이는 저에게서 고개를 돌린 채, 제가 하는 말에 무감정하게 대꾸했습니다. 기운 넘치는 어린아이였던 저는 연신 그 아이에게 말을 걸었고, 그 아이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자신의 의사를 밝혔습니다.
"돌아가."
석양이 지는 늦은 오후였습니다. 창문으로 들어온 노란 노을빛이 병실을 따스하게 감싸주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고개를 돌린 그 아이의 얼굴만큼은 빛을 받지 못하고 그늘져 있었습니다. 태양빛도 매정합니다, 그늘진 표정에 그늘진 얼굴이라니. 저는 그 아이를 보며 더 이상은 말 할 수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돌아가라는 말은 일방적인 대화의 끝을 알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무런 말에 아무런 대꾸도 않던 그 아이에게 마지막 한 마디를 건넸습니다.
"나는 네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았으면 좋겠어."
무례한 한 마디였습니다. 그 아이가 어떤 이유로 병실에 앉아있는지도, 어떤 이유로 대화를 거부했는지도 모르면서 이런 말을 해버렸습니다. 너무 어렸던 저는 그런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어떤 말에도 감정을 보이지 않던 그 아이가 안쓰러워 보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런 말을 했을 것입니다.
그 때의 만남은 정말 짧았습니다. 이후로 다시 만난 일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 짧은 만남에서 어렸던 저는 '거리를 둔다는 것'에 대해 처음으로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것에서 알 수 없는 끌림을 느꼈습니다. 그 뒤로 연습과 질문을 거친 끝에 저는 포커 페이스가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친한 이들에게는 조금의 재미를 주고 어색한 이들을 관찰하기에 좋은 방법. 시간이 지난 지금의 저에게 있어서 포커 페이스는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되었습니다. 마카베 미즈키의 정체성같은 것이랄까요.
이 기억은 소중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빛이 바랜 부분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너무 오래, 너무 많이 꺼내 본 탓일까요. 분명 선명했을 터인 기억은 점점 희미해졌습니다. 그 날의 색, 따스함, 차가움, 말, 냄새....... 이제는 그 아이의 얼굴도 기억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그 때의 감정이 희미해지고 있었습니다. 안쓰러웠던 생각을 넘어 그 아이에게 느꼈던, 어려서 미처 눈치채지 못했던 감정들이 이제는 흐릿합니다. 조금 나이가 들었을 때 만났더라면 알 수 있었을까요. 당시에 지나쳐버린 감정들은 그 뿌리조차 찾기 힘들어졌습니다. 바래버린 기억의 한 장면은 하나의 퍼즐이 되었습니다. 저는 그 때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그 아이는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저는 어째서 그런 무례한 말을 했던 걸까요. 풀 수 없는 십자말풀이의 해답을 찾아 수 년간 헤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조각 중 하나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아무 목적 없이 거리를 걷던 어느 날, 수많은 사람들의 파도 사이에서 문득 그리운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어린 시절 들었던 그 아이의 목소리였습니다. 수십, 수백의 목소리들사이에서 아주 잠깐이지만 선명하게 들렸던 그 목소리는, 눈치챈 순간 도시의 소음 속으로 파묻히고 말았습니다. 수없이 고개를 돌리고 귀를 기울여도 찾지 못했던 그리운 목소리는 저를 조롱하듯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습니다.
혼자의 힘으로 다시 만나는 건 지나친 기적일까 생각하고 포기하려던 순간 깨달았습니다. 그 아이의 목소리는 화음을 이루며 나오고 있었다는 것을. 요컨대 제가 들은 목소리는 노랫소리였던 것입니다.
그 아이의 이름이 호죠 카렌이라는 것을 아는 것은 어렵지 않았습니다. 한낮의 도심에서 노래를 틀어 줄 정도로 유명한 사람이었습니다. 호죠 카렌. 빛 바랜 기억 속의 그 모습에 어울리는 이름이었습니다. 첫 만남으로부터 약 10년이 지나서야 그 아이에 관한 것을 처음으로 알았습니다. 드디어 퍼즐의 첫 조각이 맞춰진 것입니다. 빛이 바랬던 기억의 사진에 처음으로 빛이 돌아왔습니다. 잃어버린 색이 돌아왔고, 흐릿해진 감정들이 하나로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먼 옛날 잃어버린 것을 다시 찾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가 들었습니다.
하지만 기대는 기대일 뿐, 그 이상으로 호죠 카렌에 대해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었습니다. 옛날의 일을 아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했고,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했습니다. 그녀는 10년 사이 제가 쉽사리 쳐다볼 수도 없는 곳까지 도달했으니까요.
여기에서 포기할 수는 없었습니다. 겨우 찾게 된 그 아이의 단서를, 색바린 기억을 되살릴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습니다. 지금 차이가 난다고 해도 그 차이는 좁히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 마카베 미즈키는 결심했습니다......


".....아이돌이 되기로 말이지."
프로듀서씨는 더벅머리를 긁적이며 블랙 커피를 한 모금 마셨습니다. 저도 따라서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셨습니다. 아, 쓰네요. 설탕을 한 티스푼 더 넣었습니다.
"그 때에는 꽤 놀랐어. 사무실 문을 박차고 들어오더니 '호죠 카렌과 만나고 싶습니다. 아이돌이 되게 해주세요.' 라고 했으니 말이지."
이번에는 제가 머리를 긁적였습니다. 확실히 그 때의 저는 당돌했습니다. 호죠 카렌과 만나야만 한다는 생각에 가득 차 있었으니까요. 다른 무언가에 비교한다면 폭주기관차와 가장 어울렸습니다. 호죠 카렌이 아이돌이 아니라 스포츠 스타였다면 저도 운동을 하지 않았을까요.
프로듀서씨는 잔을 내려놓았습니다. 컵을 거의 채우고 있던 블랙 커피는 다 떨어져 바닥조차 메우지 못했습니다. 제 잔은 아직 한 모금 마신 것에서 변하지 않았습니다. 아메리카노도 충분히 쓴데, 프로듀서씨는 쓰디 쓴 블랙 커피가 맛있다고 합니다. 아직 모르겠습니다. 쓴 맛이 어떻게 맛있다는 걸까요.
"저는 진지했으니까요."
"그리고 그 진지함을 증명했지. 한 명의 아이돌이 되었으니."
프로듀서씨는 커피를 새로 따랐습니다. 그 말대로 저, 마카베 미즈키는 시어터의 일원으로 완전히 거듭났습니다. 숨겨져 있던 재능이 싹을 틔운 것인지, 저는 1년만에 상승가도를 탈 정도의 아이돌이 되었습니다. 날이 다르게 저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을 느꼈습니다. 호죠 카렌에게 한 걸음씩 다가갈 수 있는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이돌로서 빛날 수 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습니다. 한 순간의 인기가 가시고 나면 이름도 행적도 찾기 어려운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급해졌습니다. 1년간 마카베 미즈키는 크게 발전했지만, 호죠 카렌을 만나기에는 너무 느렸습니다. 그래서 저는 한 가지 수를 내기로 했습니다. 호죠 카렌을 만날 방법에 대해, 프로듀서씨와 상의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고 싶은 이야기는 역시 그거지?"
"네. 호죠 카렌과 만나고 싶습니다."
"원하는 건 그것 뿐?"
"네."
"어떻게 만나고 싶은 거야?"
"어떻게든 만나고 싶습니다."
765 프로덕션의 사무실 안, 서로를 마주보는 소파에 마주앉아 저희는 서로를 마주보았습니다. 사무실에는 저와 프로듀서씨를 제외하면 아무도 없었습니다. 오늘의 이야기를 위해서 아무도 없을 때에 사무실을 차지했습니다. 프로듀서씨는 저를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커피를 들이켰습니다. 단 한 입만에 삼분지 일 만큼의 커피가 사라졌습니다. 찡그린 표정. 커피가 쓰기보다는 생각이 쓰기 때문이겠지요. 최고 주가를 달리는 아이돌을 만나게 해달라는, 이제야 이름이 조금 난 아이돌. 누가 봐도 곤란한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프로듀서씨라면 답을 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최고의 답을 내는 것이 저의 프로듀서씨, 세키 히카루 씨였으니까요.
"어떻게든 만나고 싶다면 가능한 경우의 수가 너무 많잖아. 그래도 너라면 이상한 방식은 좋아하지 않을 테니, 좀 정상적인 것들로 추려보자."
프로듀서씨는 오른손을 완전히 폈습니다.
"첫 번째. 일대일 면담 신청."
잠시 뒤, 프로듀서씨는 엄지를 접었습니다. 가능한 방법의 수를 세는 것이었습니다.
"기각. 346 프로덕션 견학."
첫 번째보다도 더 빨리 검지가 접혔습니다.
"기각. 업무 상 미팅, 기각."
중지가 접혔습니다. 남은 손가락은 두 개, 프로듀서씨가 생각하는 방법이란 무엇일까요.
"개인 연락망 파악....."
수상해보이는 말이 나왔습니다. 프로듀서씨는 이 부분에서 고민했습니다. 하지만 이것도 얼마 지나지 않아 약지가 접혔습니다.
"기각."
이제 남아있는 건 새끼손가락 뿐이었습니다. 짧은 순간 동안 프로듀서씨는 다섯 개의 계획을 세우고, 네 개의 계획을 기각했습니다. 호죠 카렌과 만날 수 있는 마지막의 정상적인 수단, 과연 무엇일까요.
"우연의 가장, 가능."
"우와, 완전히 예상 밖의 가능성."
실수로 말이 나와버렸습니다. 하지만 정말로 상상을 넘어선 이야기였습니다. 다른 계획들을 전부 기각하고 남은 것이 우연을 가장한 만남이라니, 저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기각했던 계획들이 더 평범하지 않았을까요.
지긋이 프로듀서씨를 쳐다보았습니다. 종종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할 때, 너무 앞서나간 말을 할 때 이렇게 쳐다보면 프로듀서씨는 무표정의 응시가 당황스럽다며 자세히 설명해 주었습니다. 무표정이 아니라 포커 페이스라고 불러주면 좋을텐데요. 예의 그 표정으로 쳐다보니 프로듀서씨도 알았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습니다. 이제 설명을 들어볼까요.
"이번에도 혼자 너무 나갔나. 천천히 풀어내볼게. 우선 앞의 계획들이 기각된 이유부터. 첫 번째, 일대일 면담 신청. 가장 정통적이긴 하지만 명분이 없어. 호죠 카렌과 너 사이는 고사하고, 당장 765 시어터와 346 프로덕션은 공식적인 연결고리가 거의 없으니까.
두 번째, 프로덕션 견학. 운이 좋으면 지나가는 호죠 카렌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운이 나쁘면? 게다가 운 좋게 만난다고 해도, 그곳에서는 주변 사람들의 이목이 끌릴텐데. 사적이고 오래된 인연을 괜히 주변에 알릴 필요는 없잖아."
프로듀서씨는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설명을 끝내고는 커피를 들이켰습니다. 문득 한 가지 기묘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프로듀서씨는 블랙 커피를 연료로 돌아가는 생체기계가 아닐까요.
"세 번째, 업무 상 미팅. 이것도 어려워. 업무 미팅에 관련된 아이돌이 전부 들어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미팅 자리에서 만난다고 해도 서로 말 할 기회가 없잖아. 너무 공식적이어서 어려운 거야.
네 번째, 개인 연락망 파악. 불가능 한 건 아니지만....... 어쩌면 이게 최악의 방법이 아닐까. 기억도 잘 안 나는 수상한 사람이 갑자기 자기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었다고 생각해봐. 신고감이지, 음."
프로듀서씨는 또다시 커피를 들이켰습니다. 일리가 있는 말이었습니다. 기각된 계획들은 성사 가능성이 떨어지거나 일이 잘못 될 가능성이 있어서 기각되었다고 납득되었습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남은 계획, 우연을 가장한 만남이 잘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습니다. 최소한 저에게는 그랬습니다. 프로듀서씨는 어떤 방법을 생각하신 걸까요.
"마지막 방법, 우연을 가장한 만남. 우연한 만남이 아닌, 우연을 '가장한' 만남이야. 어떻게든 우연히만 만나면 성립된다는 거지. 상황을 어떻게 꾸미든 보이는 결과가 우연이기만 한다면 너와 호죠 카렌이 처음 만났던 그 때처럼, 아무 문제 없어. 우리는 그저 호죠 카렌의 행동 루트와 우리의 행동 루트를 겹치기만 하면 되는 거야. 단 한 점 뿐이라도."
프로듀서씨는 커피잔을 들었지만 잔은 비어 있었습니다. 커피 포트에도 남은 커피는 없었습니다. 프로듀서씨는 입맛을 다셨습니다. 안타깝겠네요.
"자, 질문?"
"마카베 미즈키, 질문이 있습니다. 호죠 카렌의 행동 루트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손을 번쩍 들며 질문했습니다. 아무리 프로듀서씨가 대단한 사람이라도 이것까지는 알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호죠 카렌의 사생팬이라도 톱 아이돌의 온전한 행동 루트는 알 수 없지 않을까요.
충분히 곤란할 만한 질문이라고 생각했지만, 프로듀서씨는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답했습니다.
"좋은 질문이야. 그건 지금부터 생각해야지."
"아."
잠깐 정신이 멍해졌습니다. 잘 나가다가 이런 곳에서 제동이 걸리네요. 프로듀서씨는 머리를 긁적였습니다.
"어, 음. 뭐, 이럴 수도 있지. 같이 생각해보자."
저와 프로듀서씨는 같이 생각에 잠겼습니다. 우연히 만나는 것처럼 상황을 가장하는 것입니다. 그리 간단하게 생각날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스케줄이 없는 날 길을 가다가 서로 마주친다면 어떨까요."
"오프 때 호죠 카렌이 어디를 갈지는 알 수 없잖아."
"학교에 찾아가는 것은 어떨까요."
"학교에 들이닥쳐서 톱 아이돌을 찾는 다른 아이돌, 이건 기삿감 아닐까?"
"346 프로덕션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다면......"
"사생팬들도 실패하는 방법을 써보겠다면 말리지는 않을게."
역시 프로듀서씨처럼 바로 답을 내는 것은 무리였습니다. 계속 방법을 생각해 보았지만 더 이상 좋은 생각이 나지 않았습니다.
"잘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해야 좋을까요."
"나도 잘은 모르겠지만 접근 방법이 잘못 된게 아닐까?"
프로듀서씨는 반문했습니다. 접근 방법이 잘못 되었다는 건, 생각의 방향이 잘못 되었다는 뜻이겠지요. 제가 말했던 방법들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스케줄이 없는 날 마주치기, 학교로 찾아가기, 프로덕션 앞에서 기다리기. 아, 너무 무모한 생각들이었습니다. 이 세 계획에서 공통점을 찾아본다면......
"제가 다가가는 것만 생각하고 있었네요."
그렇습니다. 저의 방법은 제가 호죠 카렌을 직접 찾아나서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었습니다. 프로듀서씨의 말처럼 반대로 생각한다면 호죠 카렌이 이쪽으로 오게 하면 되었습니다. 하지만 큰 명성도 정보도 없는 제가 어떻게 호죠 카렌을 오도록 만들 수 있을까요? 생각은 다시 미궁으로 빠졌습니다.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시고 생각에 전념했습니다. 쓴 맛이 머리를 깨웠습니다. 어떻게 해야 호죠 카렌을 오게 할 수 있을까.
"우리가 다가가는게 불가능하다면 저쪽을 오게 하면 되는 거겠지?"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요, 프로듀서씨가 입을 열었습니다. 처음 생각할 때의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볼을 주먹에 괴고 있는 자세. 프로듀서씨는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볼에 주먹 모양으로 자국이 남아 있었습니다.
"좋아, 이걸로 가볼까."
프로듀서씨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화이트보드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습니다. 보드에 적혀 있는 수많은 문장들 중 자신의 것만 지우고는 힘차게 무언가를 적었습니다. 문장을 다 쓰고 보드마커를 내려놓자 보드 위에 남아있던 마커들이 사방으로 튀었습니다.
"<765 & 346 합동 공연>......?"
"그 말대로."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갑자기 공연의 이야기는 왜 나오는 것일까요. 저희는 호죠 카렌을 만나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을 뿐인데. 하지만 의문은 포커 페이스에 막혀 얼굴에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프로듀서씨는 말을 이었습니다.
"마침 시기도 적절하고 명분도 괜찮은 계획이지. 765와 346이 공식적으로는 연결고리가 거의 없어도, 사사로운 연관성이 있다는 거는 알고 있지? 개인적인 부분 말이야.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받은 것들도 있고, 그런 부분들에 관해서 팬들도 의문을 던지고 있고. 346도 그걸 모를 리가 없어. 이런 부분들을 잘 찌르면서 설득하는 거야. 사사롭게만 남기지 말고 공식적으로 같이 나아가 보자. 346은 넘어올 수밖에 없어. 손해 보는게 없으니까."
프로듀서씨는 남은 빈 공간들에 몇 개의 단어를 더 적었습니다. 홍보, 콜라보레이션, 파트너, 이미지 등등. 화이트보드는 다시 빈 칸 없이 채워졌습니다.
"합동 공연은 모든 면에서 양쪽이 손해보지 않는 장사야. 그리고 이 공연 기획에 내가 참가한다면 많은 걸 직접 손 볼 수 있겠지. 너와 호죠 카렌을 둘 다 공연에 참가시킨다면? 그리고 둘의 스케줄까지 서로 만날 수 있게 조정할 수 있다면?
완벽한 명분을 세워서 완벽한 기회를 만드는 거야. 이 이상으로 호죠 카렌의 행동 루트를 우리 맘대로 제한하는 건 불가능해. 가장 효과적이고, 가장 눈에 띄지 않고, 가장 정상적인 우연의 가장."
"으음."
"자, 질문?"
너무 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호죠 카렌을 만나는 계획을 짜는 것 뿐이었는데 어쩌다가 이렇게 된 것일까요. 두 인기 프로덕션의 합동 공연이라니, 스케일이 너무 커졌습니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지만 무엇인가 마음 속에서 계속 걸렸습니다.
"너무 스케일이 큰게 아닐까요."
"이게 가장 효율적이고 정상적인 방법이야."
"다른 작은 방법들도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까 많이 생각해봤잖아. 이것만큼 괜찮은 건 찾기 어려울 걸."
프로듀서씨는 확신에 차 있었습니다. 평소처럼 프로듀서씨의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지만, 시선의 강렬함에 눈길을 피하고 싶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습니다. 그만큼 자신의 생각에 자신이 있다는 뜻이겠지요. 하지만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저의 개인적인 만남 하나를 성사시키기 위해서 이렇게까지 큰 계획을 세워야만 하는 걸까요. 저는 분명 호죠 카렌을 만나고 싶습니다. 하지만 이런 방법을 통해서만 만날 수 있는 것일까요. 이 만남을 통해 바라고 있던 것 전부를 이룰 수 있을까요.
"성공 여부에 관해서는 걱정하지 마. 이 세키 히카루, 이름을 걸고 반드시 성사시킬테니. 너도 알잖아, 내가 맡은 일은 전부 해낸다는 걸."
프로듀서씨는 제 고민을 알아챈 것인지 믿음직스러운 말을 건넸습니다. 분명 표정에는 아무 것도 내보이지 않았을 텐데 말입니다. 어쩌면 걱정이 살짝 스쳐갔던 것일까요. 저는 계속 프로듀서씨를 똑바로 쳐다보았습니다. 프로듀서씨 역시 저를 쳐다보았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말없이 응시하던 중, 프로듀서씨는 조금 전 바닥에 흩뿌려버린 보드마커를 눈치채고는 하나하나 줍기 시작했습니다. 아아, 서럽네요.
하지만 그 뒤에 이어진 프로듀서씨의 한 마디가 저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게 있잖아. 호죠 카렌이 만들어 준 네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거. 너의 포커 페이스부터, 호죠 카렌을 만나기 위해서 같은 아이돌이 된 네 모습까지."
이 말에서 저는 놓치고 있던 부분을 찾았습니다. 지금의 저를 만들어 준 사람에게, 그 사람과 같은 길을 가게 된 제 모습을 보여주는 것. 그것이 제가 바라던 것들 중 하나였습니다. 그제서야 조금은 알 것 같았습니다. 예전의 기억을 되살리는 것을 넘어, 제가 어떤 마음으로 호죠 카렌을 찾고 있었는지. 프로듀서씨는 저조차도 눈치채지 못한 저의 바람을 이루어 줄 방법을 제안해 주셨습니다.
"네, 그렇네요. 그 방법으로 부탁드리겠습니다, 프로듀서씨."
프로듀서씨에게 고개를 숙였습니다. 프로듀서씨는 마커를 줍던 중 잠깐 미소를 지어 보였습니다. 폼은 나지 않지만 그 뜻은 이해했습니다. 맡겨만 달라, 라는 뜻이겠지요.
이것으로 정해졌습니다. 저, 마카베 미즈키는 같은 무대에서든, 무대에 뒷편에서든 호죠 카렌을 만날 것입니다. 그 무대와 호죠 카렌의 이름에 누가 되지 않도록 말입니다. 완전히 맞먹지는 못해도, 조금이라도 견줄 수 있는 이름을 가질 수 있도록.
자, 나아갈 길은 명확합니다. 프로듀서씨가 세부적인 공연 기획을 완성하기 전까지 제 자리에서 최선을 다 하는 것, 그리고 프로듀서씨를 믿는 것만 남았습니다. 계획의 실현까지 앞으로 얼마나 더 걸릴지는 알 수 없지만 괜찮습니다. 분명히 만날 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으니까요.


진부한 표현이지만, 눈치채지 못한 사이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갔습니다. 765와 346의 합동 공연 계획을 내놓은 프로듀서씨는 단 사흘만에 정말로 공연 프로젝트를 성사시켰습니다. 프로듀서씨의 능력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정말로 놀랐습니다. 보통 규모가 아닌 프로젝트를 며칠 만에 현실로 만드는 건 누구라도 힘든 일이니까요.
계획은 빠르게 진행되었습니다. 공연의 컨셉, 이미지, 구성, 출연진, 세트 리스트 등, 규모가 큰 공연인 만큼 정해야 할 것들은 많았지만 모든 사안들은 다른 공연 기획들에 비해 이례적일 정도로 빠르게 결정되었습니다. 프로듀서씨가 말 그대로 전력을 다해서 기획에 참여해주신 덕분이겠지요. 공연의 이미지가 가장 먼저 결정되었고, 그 다음으로 결정된 것은 출연진이었습니다. 그 중에는 물론 저와 호죠 카렌이 있었습니다. 덕분에 저는 걱정을 덜고 연습에만 매진할 수 있었습니다. 계획이 준비되는 동안 호죠 카렌에게 조금이라도 가까워지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재능이 아직 다하지 않았던 것일까요, 저는 호죠 카렌의 명성에 이전보다도 가까이 다다를 수 있었습니다. 행인 세 명 중 한 명이 알 정도는 되었습니다.
그 동안 달력의 페이지는 빠르게 넘어갔습니다. 반팔의 셔츠만으로는 추위를 견딜 수 없어 긴 팔의 양복과 코트를 껴입게 되었습니다. 사람들도 자신의 외투를 꺼내어 입었습니다. 하지만 추워지는 날씨와 정반대로 사람들이 열광하게 되는 소식이 하나 있었습니다. 765 프로덕션과 346 프로덕션의 합동 공연 날짜가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돌연 발표된 두 인기 프로덕션의 합동 공연 소식은 몇달 전부터 많은 팬들을 들뜨게 만들었습니다. 저 또한, 내보이지는 않아도 시간이 가까워 올 수록 기분이 들떠왔습니다. 아이돌로서도, 한 명의 팬으로서도.
공연에 관한 대부분의 사항들이 정해진 때부터, 저와 프로듀서씨는 저희들만의 계획을 짜기 시작했습니다. [어떻게 해야 호죠 카렌을 만날 수 있을 것인가?] 저희는 한 가지 전제를 두고 생각을 이어나갔습니다. '관계자가 아닌 사람의 눈에 뜨이지 않을 것.' 호죠 카렌과 저의 만남은 지극히 사적인 것이 되어야만 했습니다. 그 발단부터가 어릴 적의 우연한 만남 한 번 때문이고, 저와 호죠 카렌은 이름이 알려진 아이돌이었습니다. 둘이 만나는 것이 누구에게 보이기라도 한다면 큰 기삿거리가 될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런 상황만은 피하고 싶었습니다.
계획을 짜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프로듀서씨는 어디에선가 공연장이 될 건물의 설계도를 가져왔습니다. 저희는 바닥부터 설계도를 읽는 법을 익히고, 모든 사람들의 스케줄을 기반으로 저희의 이동경로를 만들었습니다. 중간에 다른 사람들의 스케줄이 바뀔 때마다 이전의 이동경로는 완전히 폐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공연이 사흘 남았을 때에야 우리는 겨우 계획를 확정지을 수 있었습니다. 몇 번이고 확인했습니다. 아무런 이변이 없다면 우리는 그 누구도 마주치지 않고 이동해서 호죠 카렌, 그리고 그녀의 프로듀서만이 있는 곳에서 마주칠 수 있었습니다.
순식간에 공연의 날이 되었습니다. 아침 내내 쉴 틈 없이 공연의 준비를 하고 나서야 저와 프로듀서씨는 한 숨 돌릴 틈을 얻었습니다. 저희는 사람 없는 복도의 창가로 갔습니다. 창문 너머로는 공연장 앞을 가득 메운 사람들이 보였습니다. 오늘의 공연을 보러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넓은 공터에 가득한 사람들을 보니 알 수 없는 기분이 머리를 어지럽혔습니다. 호죠 카렌과 만나기 위해서 아이돌을 시작했습니다. 아무 계획도 없이 무작정 시작한 일이지만 어느 새 이 정도까지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그녀를 만나고 저는 새 정체성을 얻었습니다. 그녀를 만나기 위해서 저는 성장했습니다. 저에게 있어서 호죠 카렌이란 어떤 사람일까요. 단 한 번 만나봤을 뿐이지만 이제 호죠 카렌은 작은 의미로 넘겨버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미즈키, 어때?"
옆에서 같이 창밖을 내다보던 프로듀서씨가 질문했습니다. 어떠냐고 묻는다면 글쎄요, 역시 잘 모르겠습니다. 알 수 없는 낱말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습니다. 10년을 넘게 기다린 순간이 당장 수십 분 앞으로 다가왔지만 아직도 무엇을 해야 할지 결정하지 못했습니다. 당신을 10년 넘게 기다렸다고 말 할까요? 어릴 적 저의 모습을 보여 줄 수 있도록 손목을 붙잡고 얼굴을 바라볼까요? 어떤 방식으로 저를 알려야 좋을지 알 수 없었습니다. 호죠 카렌이 저를 기억할지도 확신할 수 없었습니다. 애초에 그런 점은 고려하지 않고 만나겠다는 일념 하나로 이 계획에 매진했던 것이니까요. 여기까지 오는 중에는 여정의 끝에 무엇인가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길의 끝에 도달한 지금은 아무 것도 알 수 없었습니다.
"잘 모르겠습니다."
두 손을 모아 가슴 앞에 대었습니다. 두근, 두근, 두근. 공연 복장 너머로 심장박동이 전해져 왔습니다. 평상시보다는 빠른, 긴장할 때보다는 느린, 알 수 없는 고동이었습니다. 기대일까요, 감동일까요, 공포일까요, 후회일까요. 호죠 카렌을 처음 만나고 생긴 감정의 십자말풀이는 아직도 공백 투성이였습니다. 오늘 이 빈칸들을 전부 채울 수 있을까요.
"확신할 수 없는 기분입니다. 가슴 속이 막힌 것처럼 답답하네요."
프로듀서씨는 저에게 무엇인가 건넸습니다. 커피 젤리였습니다. 아메리카노 맛, 설탕 첨가. 받자마자 바로 먹었습니다. 쓰지만 달콤한 맛이 흐린 생각을 밝혔습니다. 조금은 안정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프로듀서씨."
"뭘 이런 걸 다."
프로듀서씨는 창밖과 시계를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호죠 카렌을 만나기 위해 움직일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오늘이 오기 전 몇 번이고 복습한 계획을 떠올렸습니다. 뒤돌아 전진, 왼쪽 복도, 한 층 위로, 기타 등등. 복잡한 경로가 이어졌습니다. 완벽하게 기억한다는 확신이 들 때까지 복기하고는 프로듀서씨를 쳐다봤습니다. 출발할 준비는 되었습니다.
"얼마나 남았나요."
"8, 7, 6, 5, 4."
프로듀서씨는 갑자기 숫자를 셌습니다. 설마 4초 후에 출발한다는 건가요. 이 정도로 시간이 남지 않았을 줄은.....
"3, 2, 1. 가자, 미즈키."
계획한 대로 프로듀서씨는 뒷편의 복도로 걸어갔습니다. 저도 급하게 그 뒤를 따랐습니다. 뒤돌아 전진, 왼쪽 복도, 한 층 위로. 여기까지 움직인 뒤에야 프로듀서씨와 보조를 맞출 수 있었습니다.
"네, 프로듀서씨."
계획한 경로가 복잡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경로를 실제로 따라 걷는 느낌은 색달랐습니다. 왼쪽으로 바로 가면 될 길을 일부러 P자를 그리며 가기도 하고, 층을 올라갔다 내려가며 복도 하나를 건너뛰기도 했습니다. 몇 번이고 검토한 만큼 계획에는 틈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움직이는 동안 그 누구와도 마주치지 않았습니다. 몇 번 다른 스태프분들과 마주칠 뻔하기도 했지만 그 쪽에서 눈치채기 전에 간신히 모퉁이를 돌았습니다.
공연장에는 무대의 노랫소리가 울리고 있었습니다. 경로를 나아갈 수록 노래는 조금씩 커져왔습니다. 기타와 전자음이 또렷해졌고 베이스와 드럼의 진동이 몸을 울려왔습니다. 제 발걸음은 노래의 박자를 따라갔습니다. 하나, 둘, 셋, 넷. 처음에는 희미하게 느껴지던 스피커의 진동은 걸음을 나아갈 수록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올라왔습니다. 진동이 심장까지 올라온 즈음, 저의 심장 고동도 노랫소리에 따라 울리기 시작했습니다. 베이스와 발걸음의 박자에 맞추어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미처 준비가 되지 않은 마음이 울림을 따라 술렁였습니다.
"다 왔다."
우리는 T자의 갈림길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갈림길에 붙은 표지판은 왼쪽이 백 스테이지임을 알려주었습니다. 왼쪽 길은 불이 제대로 켜지지 않아, 그 어두움이 갈림길의 중심까지 살짝 뻗어 나왔습니다. 노랫소리는 멎은지 오래였습니다. 방금 전에 리허설 하나가 끝났다는 뜻이겠지요. 그리고 저는 계획된 동선의 끝, 백 스테이지의 입구에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방금 리허설을 끝낸 사람은 호죠 카렌-
"아."
살짝 균형을 잃었습니다. 베이스와 발걸음이 사라진 자리를 심장고동이 채웠습니다. 귓가로 들려오는 심장소리가 모든 감각을 흐리게 만들었습니다. 갈림길도, 소리도, 복도의 냄새도, 공연복장의 느낌도, 전부 사라졌습니다. 정말로 이 한 모퉁이만 돌면 호죠 카렌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아무 것도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호죠 카렌을 만나러 올 생각 뿐, 만난 뒤에는 무엇을 할지 아무 것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네, 마카베 미즈키는 핀치에 몰렸습니다. 저의 포커 페이스도 지금은 깨져 있었을 것이 분명했습니다. 마음 속에 열이 차올랐습니다. 처음 느끼는 감정이 가슴 속 모든 벽을 박차고 지나가 뜨거워졌습니다. 뭐라고 해야 할까요, 지금의 이 감정을. 이것이 10년 전 호죠 카렌을 만났을 때 느낀 그 감정일까요. 아무 것도, 그 무엇도 알 수가 없었습니다. 감정의 미궁에 갇힌 것만 같았습니다.
".....즈키, 미즈키."
몸을 흔드는 손길이 느껴졌습니다. 아, 프로듀서씨의 손이네요. 다시 감각이 돌아왔습니다. 흐릿했던 시야가 돌아오자마자 저를 바라보는 프로듀서씨의 얼굴이 보였습니다. 다른 의미로 열이 차올랐습니다. 분명 조금 전의 핀치 상태가 전부 보였을텐데.....
"마카베 미즈키, 내 말 잘 들어."
하지만 프로듀서씨는 그런 것은 신경 쓰지 않는 듯, 지금까지 보았던 어떤 순간보다도 진지한 표정이었습니다. 프로듀서씨는 저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을 이었습니다.
"리허설이 끝난 직후야. 시간 내에 왔어. 앞으로 잠깐, 아주 잠시 뒤에 호죠 카렌이 자신의 프로듀서와 함께 백 스테이지로 나올거야. 네가 쓸 수 있는 시간은 단 3분, 알고 있지? 그 안에 호죠 카렌을 설득해야 해. 설득? 감동? 어쨌든, 뭐라도 해야 해. 준비가 됐든 안 됐든 이제 바로야. 저쪽이 곧 나올테니까, 자, 가자."
우리가 사전에 이야기했던 것들이었습니다. 혼란에 빠졌을 때 잊고 말았던 것들이 상기되었습니다. 얼마 없는 시간, 그 안에 무엇이라도 해야 한다. 아무 것도 준비하지 못했지만 어쩔 수 없었습니다. 프로듀서씨의 말대로 때는 지금이었으니까요. 무심코 입술을 깨물었습니다. 고통이 정신을 잡아주었습니다. 이제서야 앞을 똑바로 볼 수 있었습니다. 제 표정이 원래대로 돌아온 것일까요, 프로듀서씨는 저에게서 시선을 떼고 다시 앞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고개를 제 쪽으로 돌려, 익숙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자, 질문?"
작게 웃어버릴 뻔 했습니다. 익숙해도 너무 익숙한 대사. 달아오른 머리가 조금은 식었습니다.
"없습니다."
"그럼 가보자."
프로듀서씨는 왼쪽의 복도로 나아갔습니다. 저 또한 보조를 맞추어 뒤따랐습니다.
백 스테이지는 지금까지 왔던 길처럼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차이점이 두 가지 있었습니다. 첫 번째로, 다른 복도보다도 어두웠습니다. 무대에서 새어나오는 빛으로 겨우 앞을 분간할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두 번째로, 복도의 반대편 끝에 두 사람의 인영이 보였습니다. 키가 큰 남자 한 명, 보통 키의 드레스를 입은 여자 한 명. 분명히 호죠 카렌과 그 프로듀서였습니다. 리허설이 끝나고 내려온 것이겠지요. 두 사람은 이 쪽을 향해 걸어왔습니다. 저와 프로듀서씨도 저 쪽을 향해 걸어갔습니다. 한 번에 두 걸음 씩 우리는 가까워졌습니다.
한 걸음, 한 걸음. 구두와 힐의 발소리가 머리를 울렸습니다. 두 사람의 윤곽은 뚜렷했지만 머릿속은 무엇 하나 명확한 것이 없었습니다. 머리가 울릴 때마다 저쪽의 모습이 조금씩 드러났습니다. 남자의 단정한 양복, 구두, 넥타이. 호죠 카렌의 공연 복장, 치맛자락, 색채, 장신구, 얼굴형, 눈동자. 가까워질 수록 호죠 카렌이 더욱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습니다. 열 걸음 앞, 희미한 빛줄기에 호죠 카렌의 모든 모습이 빛났습니다. 자신의 프로듀서와 즐거운 듯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여덟 걸음 앞,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어릴 적 들었던 그 목소리는 리허설의 이야기와 기대를 담고 있었습니다. 다섯 걸음 앞, 은은한 박하 향이 코를 간지럽혔습니다.
서로를 완전히 알아볼 수 있는 거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호죠 카렌은 여전히 자신의 프로듀서 쪽만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다시 거리가 멀어지기 전 이 쪽으로 시선을 돌려야만 하는데, 머리가 비어있는 그대로였습니다. 해야 할 말이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미즈키."
"아."
프로듀서씨가 갑자기 등을 떠밀었습니다. 깜짝 놀라 탄성을 뱉어버리자 호죠 카렌이 발걸음을 멈추었습니다. 두 걸음 앞. 저도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호죠 카렌은 저를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제 목소리를 알아들은 걸까요? 제 얼굴을 기억하는 걸까요? 호죠 카렌의 표정에는 수많은 감정들이 떠올라 있었습니다. 당혹, 의문, 놀람, 긴장, 하나로 단정지을 수 없는 얼굴이 이쪽을 향했습니다. 저도 호죠 카렌을 똑바로 바라보았습니다.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서로를 쳐다보았습니다. 짙어진 박하 향이 코를 찔렀습니다. 숨을 열 번 들이마실 시간이 지나고, 호죠 카렌은 돌연 시선을 돌리고는 다시 걸어갔습니다.
"무슨 일이야, 카렌?"
"그냥. 잠깐 착각했나봐."
남아있는 거리, 두 걸음을 지나쳐 호죠 카렌은 저의 등 뒤로 걸어갔습니다. 실패했습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증명하는 것도, 하다못해 말 한 마디를 걸어보는 것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저에게 남아있던 시간은 순식간에 사라졌습니다. 10년을 넘게 기다렸던 순간이었는데, 어째서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았던 걸까요. 무심코 얼굴을 더듬었습니다. 저는 포커 페이스를 띄우고 있었습니다. 이것 때문이었습니다. 어린 마카베 미즈키와의 가장 큰 차이점이 장애물이 되었습니다. 이 자리에 저를 있게 해준 것이 결국에는 자신을 증명할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호죠 카렌을 만나기 위해 아이돌이 되었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했습니다.
하지만, 어린 시절의 말을 빌릴 수만 있다면-
"하고 싶은 일을 찾으신 건가요."
생각이 들자마자 무심코 나온 말, 그 한 마디에 호죠 카렌은 발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그녀의 표정에는 당혹감만이 쓰여져 있었습니다. 네, 드디어 우리는 만났습니다. 12년 전, 감정을 내비치지 않던 병실의 소녀와 당돌하게 말을 건네던 소녀는, 최정상의 아이돌과 그 뒤를 쫓아온 아이돌이 되어 다시 만났습니다. 다시 벌려진 간격 다섯 걸음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었습니다.
"저, 마카베 미즈키. 당신을 찾아 이 곳에 왔습니다."
서로가 거의 맞닿을 정도까지 우리의 거리는 좁혀졌습니다. 그리고 저는 12년 전 내밀지 못했던 손을 내밀었습니다.
"드디어 찾았네요, 호죠 카렌."
호죠 카렌은 여전히 당혹한 표정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입과 눈은 웃고 있었습니다. 아, 기억해 주는 것이었네요.
"다시 만나서 반가워, 마카베 미즈키."
그녀는 제 손을 맞잡아 주었습니다. 전기가 튀는 것처럼 온 몸에 충격이 퍼졌습니다. 실패한 줄 알았지만 결국 성공했습니다. 분명 기억해주고 있었습니다. 호죠 카렌은 곧, 어느 매체에서도 볼 수 없었던 환한 미소로 저를 맞이해 주었습니다. 저 또한, 포커 페이스를 벗어버리고 어릴 적의 미소로 답해 주었습니다.
시선이 느껴졌습니다. 당황한 호죠 카렌의 프로듀서와 미소짓는 제 프로듀서씨의 모습이 시야 가장자리에 어른거렸습니다. 주변의 시선에 상관없이 우리는 계속 손을 맞잡고 있었습니다. 오늘의 만남이 앞으로 어떻게 이어질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 자리에서 만난 것만으로도 우리는 족했습니다. 이 순간을 끝내지 않고 싶다는 생각으로 우리는 서로를 계속 마주보았습니다. 계획된 3분이 지나, 사람들이 모여들고 자리를 피할 때까지.


그렇게 저는 호죠 카렌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병실에서, 나중에는 무대의 뒷편에서 그녀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첫 번째 만남에서 거리를 두는 법을 배웠고, 두 번째 만남에서 첫 만남의 감정을 되살렸습니다. 그 날 처음 생겼던 감정의 십자말풀이는 빠른 속도로 빈칸을 채울 수 있었습니다. 긴 시간동안 이어온 질문에 답을 할 수 있었습니다. 빛바랜 기억에는 색이, 흐릿한 감정에는 모양이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단 한 가지, 아직도 확신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십자말풀이의 마지막 빈칸으로 남아있는 그것은 여전히 가슴에 남아, 생각을 어지럽히고 있습니다. 달콤하고도 쓴, 커피젤리와도 같은 감정. 두근거림이 멈추지 않고, 가슴이 따뜻해집니다. 기쁘면서도 슬퍼져서 애달파지지만, 그와 동시에 행복해집니다.
이 모든 것, 저의 망상일까요. 아니면.......


 

 



완성은 세 달 전이지만, 간만에 생각나서 올려보는 글입니다.

친구가 줬던 소재에 강하게 꽂혀버려서 쓰게 된 이야기에요.

보시다시피 마카베 미즈키와 호죠 카렌의 이야기입니다. 부디 즐기셨기를.

4 여길 눌러 추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