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카테고리.

  1. 전체목록

  2. 그림

  3. 미디어



[퍼스널리티P 시리즈] 결말을 알고 있기에 할 수 있는 것(下)

댓글: 6 / 조회: 1064 / 추천: 5


관련링크


본문 - 07-12, 2017 03:08에 작성됨.

<결말을 알고 있기에 할 수 있는 것(上)> 에서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연말을 하루 앞둔 어느 날, 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

 

 

나는 병원의 로비에서 한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사람이 이곳에 들어왔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이 병원은, 나에게도 어느 정도 인연이 있는 곳이었으니까.

 

“흐음~안 나오네. 슬슬 끝났을 때가 됐을 텐데.”

 

벤치에 앉아 다리를 앞뒤로 흔들던 나는 고개를 돌려 로비 안을 한번 바라보았다.

푸른 줄무늬가 그려진 환자복을 입고 있는 사람들과 사복을 입은 사람들이 앉아 자신들의 진료를 기다리고 있었고, 복도에는 간호사들이 분주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투명한 유리창으로 들어오는 한낮의 햇빛이 점점 따갑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슬슬 안으로 들어가는 게 좋으려나?’하는 생각이 들었을 때, 복도를 통해 로비로 나오는 한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안경을 쓰고, 야구모자를 깊게 눌러 쓴 그 남자는 바로 내가 찾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가 내가 앉아 있는 의자를 지나쳐 병원의 정문을 막 나서려고 할 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향해 다가갔다. 눈부신 햇빛을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리던 남자는 내 기척을 느낀 것인지 나를 돌아보았다.

 

“안녕!”

“또 뵙네요. 여긴 언제 오셨습니까?”

“오늘 아침에. 그보다도, 잠깐 나랑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 오래는 안 잡을게.”

“그 전에 통성명부터 하시죠. 당신은 저를 아는데, 저는 당신을 모른다는 건 불공정하잖아요?”

“그런가……너는 기억 못하는구나……뭐, 아무렴 어때? 내가 당신을 기억하는걸.”

 

곧바로 알아볼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뜻밖에도 그는 나를 한번에 알아보지는 못했다.

이거 섭섭한걸. 뭐, 성장기의 미소녀니까, 한 눈에 못 알아보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지만.

 

“나는 시키. 이치노세 시키야.”

“시키……?”

 

내 이름을 들은 그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 모습은 마치 머릿속에 떠오른 어떤 이미지를 눈 앞의 것과 대조하는 듯 보였다. 내 생각이 맞았던 것인지, 그는 말아 쥔 오른손으로 왼손바닥을 가볍게 두드리고는 나를 가리켰다.

 

“아아, 이치노세 박사님의?”

“맞아! 아예 잊어버린 건 아니구나!”

 

 

****

 

 

유학과 더불어 영재 테스트를 통과하고, 그 기세에 힘입어 월반을 거듭하여 막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열 살 무렵, 나는 학교를 마치면 곧장 아버지의 연구실로 향하곤 했다.

아버지의 연구실에서 나를 반기는 것은 고등학교의 수준을 아득하게 넘어선, 진정한 ‘학문’이라고 할 수 있는 지식들 뿐. 하지만, 그 정도로도 충분했다. 그 때의 나는 왕성한 식욕만큼이나 학구열 또한 높았으니까.

하지만 그것도 잠시 뿐. 아버지의 연구실에서 철 지난 논문이 바닥나자 나는 아버지의 연구실을 나와 대학교의 드넓은 캠퍼스를 누비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연구동 근처의 작은 공원에서 시작하여 점점 영역을 넓히기 시작한 내 활동범위는 어느새 대학교 구석에 위치한 자그마한 공터에까지 이를 정도로 광범위해지기 시작했다.

그 곳에서, 나는 그를 처음으로 만났다.

아니, 사실 처음 만난 것은 아니었다. 아버지의 연구실에서 아버지와 친근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그의 모습을 자주 본 적이 있고, 정식으로 인사를 나눈 적도 있으니까. 하지만, 그 때의 나는 그를 필사적으로 피해 다녔다. 무서웠기 때문이다.

 

냄새가 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이.

 

선수 시절의 그에게서는 아무런 냄새도 느껴지지 않았다. 감정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풍기는 냄새가 그에게서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 사실이, 그 때의 나는 무척이나 두려웠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 때의 그가 고작해야 열 살 짜리 어린애한테 간파당할 정도로 가벼운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지만, 유감스럽게도 어린 시절의 나는 거기까지는 생각이 닿지 않았다. 그저, 장 바티스트 그르누이(주: 소설 ‘향수’의 주인공. 아무런 냄새를 풍기지 않는 체질을 가지고 있다.)처럼 아무런 냄새를 풍기지 않는 그 사람이 무섭고 혐오스러웠을 뿐이었다.

 

“이제야 내 눈을 봐 주는구나. 아가씨는 이름이 뭐야?”

 

하지만, 직접 이야기를 나눠 본 그 사람은 전혀 무서운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나와 같은 눈높이에 서서, ‘천재소녀’가 아닌 ‘나’를 바라봐주는 사람이었다.

그래, 그의 옆에서만큼은 나는 이치노세 시키가 아닌 그냥 열 살짜리 여자아이로 남을 수 있었다.

 

  

****

 

 

대학병원과 대학교는 부지를 공유하고 있었기에 우리는 캠퍼스 밖으로 나와 가까운 곳에 위치한 카페로 향했다. 서로 주문한 음료를 들고 우리는 가게 깊숙한 자리에 앉아, 곧바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야, 못 알아봐서 미안하다. 정말 많이 자랐네! 못 알아보겠어.”

“그러는 너는 그대로인걸? 한 눈에 봐도 알아보겠어.”

“뭐, 나야 이젠 변하기 힘든 나이니까. 안 변했다는 게 칭찬이지.”

“아하하, 그렇지, 참.”

 

나는 휘핑크림이 잔뜩 올라가 있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몸은 좀 어때?”

“뭐, 여전하지.”

 

그렇게 말하며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의 몸에 대한 것은 나 역시 알고 있었다. 그의 ‘머리’를 건드린 것이 다름아닌 내 아버지, 뇌신경학의 권위자인 이치노세 박사였으니까.

 

“뭐야, 그런 것 치곤 표정이 좋아 보이는걸?”

“요즘 사는 게 재밌어서 그래.”

“아, 프로듀서를 하고 있다고 했지?”

 

“그래”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람들이랑 있다 보면 하루하루가 정말 즐겁거든.”

“그 정도야? 선수 때보다 더 재밌어?”

“음……노 코멘트.”

 

나는 입가에 웃음을 머금은 채 커피를 홀짝이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말할까, 말하지 말까. 이제 와서 뒤늦게 망설임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뉴욕에서 7년만에 그를 만났을 때, 그리고 LA로 돌아왔을 때, 몇 번이나 고민을 했지만 그래도 결정을 내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좋아, 말하자.

마침내 마음을 가다듬고, 나는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할 말이 있어.”

 

내 태도가 바뀐 것을 눈치챘을까. 그는 찻잔을 내려놓고 나를 바라보았다.

 

“나, 대학교 그만뒀거든.”

“뭐? 왜? 무슨 사고라도 쳤어?”

 

“아니, 그건 아닌데”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실은, 네게 묻고 싶은 게 그거랑 관련이 있어서.”

“……?”

 

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당연하지. 내가 학교 때려친거랑 자기랑 무슨 상관이겠어? 하지만 나에게는 상관이 있는 이야기였다. 그것도 꽤나 밀접하게.

 

“아니, 잠깐만.”

 

비어있는 손을 들어, 곧바로 본론으로 넘어가려던 나를 제지한 그는 커피가 들어 있던 잔을 내려놓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 전에, 내 질문에 먼저 대답해.”

“응.”

 

안경 너머로 그의 진지한 눈빛이 나를 향해 쏟아졌다. 꿀꺽, 침을 삼키고 나는 그의 다음 이야기를 기다렸다.

 

“학교는 왜 그만둔 거야?”

 

그래, 너라면 그걸 먼저 물어볼 거라 생각했지. 예상했던 질문이 돌아왔지만 나는 대답을 망설였다.

‘사실대로 이야기할까? 아니면 거짓말을 할까?’

그의 눈치가 보통이 아니라는 것은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 어정쩡하게 거짓말을 했다간 얻고자 하는 질문의 답변까지 얻지 못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품고 있는 생각을 곧이곧대로 말할 수도 없었다. 이것은……그래, 자존심의 문제였다. ‘이치노세 시키’의 얼마 남지 않은 프라이드의 문제.

 

“……재미가 없었거든.”

“뭐?”

 

나는 ‘거짓말’을 꺼내 들었다. 그에게 들키지 않도록 모든 신경을 곤두세워서, 나는 ‘이치노세 시키’로써, 그리고 ‘학자’로써 거짓말을 했다. 그 댓가로, 황당하다는 듯 되물으며 나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 절로 어깨가 움츠러드는 것을 필사적으로 견뎌내야만 했지만.

 

“정말이야? 어느 날 갑자기, 흥미가 뚝! 하고 떨어져버렸거든. 뭘 하려고 해도 좀처럼 의욕도 안 생기고.”

“그래서, 그냥 그만두고 뛰쳐나왔다고?”

“응.”

“하아…….”

 

그는 한숨을 내쉬며 기가 차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치만, 정말로 따분했단 말이야. 지금까지 놀이터라고 생각했던 곳이 감옥처럼 느껴질 정도로.”

“……그래, 알았다. 그래서, 그 원인은 뭐라고 생각하는데?”

“이해해 버렸다……일까?”

“뭐?”

“봐, 학문이란 건 결국 지적 탐험이잖아? 지금까지 알려진 지식을 지도 삼아 안개 속을 헤치고, 우거진 밀림을 지나가면서 그 앞에 무엇이 나타날지를 조사하는 지적 탐험. 그런데, 어느 날 그게 딱 와버린 거야. ‘왠지 이렇게 가면 이렇게 될 것 같아’라는 느낌이.”

 

그는 진지한 눈빛으로 잠자코 내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지금까지 내가 이야기를 했던 다른 사람들과는 확연히 다른 반응이었다. 이 남자는 이런 사람이었다. 이야기를 하는 맛이 있는.

 

“그게~처음에는 확신이 서지 않았어. 그저 요행으로 얻어 걸린 걸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몇 번인가 반복되고 나니까 확신이 서더라. 적어도 화학이라는 학문에서는, 난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고.”

“나아갈 수 없다?”

“그야, 탐험을 하는 가장 큰 재미가 사라졌잖아? 의욕이 날 리가 있겠어?”

“……그것도 그렇겠네.”

“그러던 와중에, 너를 다시 만난 거야. 뉴욕에서.”

 

드디어 이야기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나는 뉴욕에서 그를 만났을 때부터 머릿속에 품고 있던 물음표를 꺼냈다.

 

“있지, 선수 시절에도, 그리고 지금도. 너는 네 결말을 알고 있지.”

 

나는 손을 뻗어 그가 쓰고 있는 안경을 슬쩍 위로 밀어 올렸다. 새까만 색으로만 보이던 그의 왼쪽 눈은 자신의 앞을 가로막던 작은 렌즈 하나가 사라지자 곧바로 검붉은 색으로 그 모습을 바꾸었다.

그 날,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엎어 버린 작은 공 하나는 그에게서 한 가지를 더 가져갔다.

그것은 바로 그의 시간이었다.

앞으로 길어야 7년.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짧을 수도 있는 시간.

모두가 끝없이 펼쳐진 길을 보며 걸어갈 때, 그는 길이 끊긴 낭떠러지를 바라보며 한 걸음씩을 내딛는다. 하루하루 정해진 결말을 향해 달려간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그만 둬.”

 

눈이 부셨던 것인지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내 손을 떼어냈다. 안경이 제자리로 돌아오고, 검붉은 색으로 반짝이던 그의 눈 역시 다시 새까만 검은색으로 돌아왔다.

 

“가르쳐 줘. 끝이 보이는 삶을 살고 있으면서, 넌 어떻게 식지도 않고 그렇게 뜨겁게 살아있을 수 있는 거야?”

 

 

 


결말을 알고 있기에 할 수 있는 것(下)

 

 

 

일본, 도쿄.

 

 

그의 집으로 향하는 승용차 안에서 나는 조수석에 앉아 두 손으로 명함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반짝거리는 안료로 적혀 있는 ‘신데렐라’라는 글자가 휙휙 지나가는 가로등의 불빛에 반짝거렸다. 명함에 적혀 있는 이름은 내가 알던 그의 이름과는 다른 것이었다.

 

“’윌리’는 안 써?”

“미국에 두고 왔어.”

“두고 왔다……재밌는 표현이네. 그럼, 여기서의 당신은 P라고 부르면 돼?”

“편한 대로 불러. ‘윌리’만 아니면 되니까.”

“응.”

 

내가 입을 다물자 차 안에는 다시 정적이 흘렀다. 때마침 적신호에 자동차가 멈춘 틈을 타 나는 고개를 돌려 운전석을 바라보았다.

 

“……저기.”

“응?”

“그 때……날 보면서 어떤 기분이 들었어?”

“무슨 뜻이야?”

“그러니까, 감상 같은 거라던지? 혹시 있었어?”

“감상이라…….”

 

그는 입을 다물고 눈을 가늘게 떴다. 누가 보더라도 한 눈에 알 수 있을 정도로 알기 쉬운 대답이었다.

 

“아하, 있는 모양이네? 말해줘, 말해줘!”

“싫어.”

“왜에~? 말해줘~! 아, 혹시 로리 시키랑은 비교도 안 되게 성장한 이 몸을 보고 욕정이라도 느낀 거야?”

 

일부러 과장되게 블라우스의 앞섶을 팔랑거리며 그를 향해 몸을 기울이자 그는 찌릿, 하고 나를 쏘아보았다.

 

“내가 그런 소리 함부로 하지 말랬지? 로리는 또 뭐야?”

“냐하핫, 미안미안. 앞으로 안 할게. 그러니까 말해줘, 얼른~!”

 

나는 그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집요하게 되물었다. 미간을 찌푸린 채 정면을 응시하며 내 목소리를 한 귀로 받아넘기던 그는 마침내 백기를 들어올리듯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정말로 듣고 싶어?”

“응! 무지 듣고 싶어.”

“……아쉬웠다, 일까.”

“아쉬워? 뭐가?”

“네가 짓고 있던 표정. 네가 짓고 있던 웃음이.”

“웃음? 내 웃음이 뭐가 어때서?”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적어도, 어릴 적의 너는 그렇게 웃는 아이가 아니었거든.”

 

가슴이 두근, 하고 뛰었다.

신호가 초록색으로 바뀌었다. 부르릉, 하는 소리와 함께 가벼운 가속도가 느껴졌다.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서로에게서 시선을 떼었다. 창 밖을 바라보는 나의 귓가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때도 지금도 너는 애야. 주위에 신경 쓰지 않고 앞만 보고 걸어가야 할 시기지. 그런데, 다시 만난 너는 주위의 시선에 짓눌려버렸더군.”

 

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게 아쉬웠어. 너는 아니라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내 눈에 비친 네 웃음은 분명 그런 것이었으니까.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웃음. 너 스스로를 속이기 위한 웃음.”

 

나는 시선은 여전히 창 밖에 둔 채, 자조 섞인 말투로 대꾸하는 그에게 다시 되물었다.

 

“……책임감 같은 걸 느껴?”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

“냐하핫, 그런 거 안 느껴도 되는데. 나 같은 거에 관심 가져서 뭐 하려고.”

“……그런 소리 함부로 하는 거 아니다.”

 

진지한 목소리로 대답이 돌아왔기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차 안에는 또다시 정적이 흘렀다.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려 운전대를 붙잡고 있는 있는 그를 바라보았다.

 

“저기, 그래서 난 언제부터 아이돌이란 걸 할 수 있어? 내일? 아니면 다음 주?”

“바로는 힘들고……1주일간 시간을 줄게. 아이들이 뭘 하고 있는지 살펴보고, 아이들과 한번씩 이야기도 나눠 보면서 한번 생각을 해 봐.”

“뭐야, 왜 그렇게 빡빡한데? 그냥 시켜주면 안 돼?”

“안 돼.”

“어째서!”

“……우리 사무소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어. 내가 직접 데려온 사람과, 나를 찾아온 사람이지. 그 차이점이 뭔지 알아?”

“글쎄……네가 프로듀서니까, 찾아 온 쪽이 좀 더 목적의식이 강하려나? 모티베이션 같은 거?”

 

“그래.”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난 내가 직접 데려온 사람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붙잡아야 하는 의무가 있어. 그 사람이 급류에 떠밀려가지 않도록 구명끈을 단단히 붙들고 있어야 하지. 하지만, 나를 찾아온 사람은 아니야.”

 

나는 입을 다물고 시선을 명함으로 떨어뜨렸다. 특수 안료로 그려진 ‘신데렐라’라는 문구가 가로등의 불빛에 반짝거렸다.

 

“마음 같아서는 그 사람들에게도 신경을 써 주고 싶지만, 유감스럽게도 난 그렇게 넓은 곳을 커버할 수 있을 정도로 능력 있는 사람이 아니거든.”

“그러니까, 1주일간 나더러 잘 생각해보라는 거지? 내가 널 따라갈 것인지, 아닌지?”

“그래. 나를 따라오기로 결심했다면 그 때부터 네겐 책임이 생기는 거야. 포기하지 않고 이 길을 걸어가야 한다는 책임이. 싫다고 해서 그만둘 수도 없고, 그만두어서도 안 돼.”

“어려운걸~시키는 흥미가 없으면 도저히 열이 안 나는 타입이에요!”

 

일부러 과장되게 소리를 지르자 그는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건 나도 잘 알고 있지. 그래도 그걸 어떻게든 하는 게 내 일이니까.”

“헤에, 너 진지하게 일하고 있었구나. 뜻밖인걸?”

“난 항상 진지했어.”

 

어쩐지 내 가슴을 찌르는 듯한 말이었기에 나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얼핏 바라본 창 밖에는 커다란 맨션의 모습이 보였다. 그 맨션의 입구를 향해, 그는 자동차의 방향을 바꾸었다. 정문을 지나, 주차장의 비어있는 자리에 승용차를 집어 넣고, 그는 시동을 끄면서 나를 바라보았다.

 

”자, 다 왔다. 내려.”

 

그가 시키는 대로, 나는 안전벨트를 풀고 조수석에서 내렸다. 주위를 둘러보면, 우리는 드문드문 불이 켜져 있는 커다란 맨션 앞에 서 있었다.

 

“여긴 어디야?”

“내가 살고 있는 집.”

“오오~굉장한걸! 영화에서 보던 것 같아!”

 

겉보기와 그다지 다를 바 없이, 그가 살고 있는 집은 내부 또한 무척이나 컸다.

현관으로 들어선 나는 신발을 대충 현관에 벗어 던지고 코를 킁킁거리며 곧바로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집안 곳곳에서는 그의 냄새가 느껴졌지만, 그에 못지 않게 희미하게 남아있는 여성의 냄새 또한 함께 느껴졌다. 알코올 냄새와 함께 남아있는 그것은 베르가모트와 자스민……그의 몸에 미세하게 남아 있던 것과 같은 종류의 냄새였다.

 

‘뭐, 저 사람도 남자니까. 여자 하나 둘쯤 끼고 살 수도 있지. 돈도 많고.’

 

현관을 정리하고 들어오는 모양인지, 등 뒤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뒤따라 들어온 그를 돌아보았다.

 

“그래서, 싱싱한 여자애를 자기 집으로 데려온 이유는 뭘까요~? 혹시 응큼한 짓이라도 하려는 거야? 꺄아~변태★”

“……화낸다?”

“냐하하……미아냉♬”

 

“나 참…….”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네 거처가 정해질 때까지는 여기서 머물도록 해. 기숙사면 모를까, 집을 구하려면 적어도 한 달은 필요할 테니.”

“그래도 돼? 내가 무슨 짓을 할 지 모르는데?”

“그러니까 여기서 머물라는 거야. 여기라면 어지간한 사고는 내가 커버할 수 있으니까.”

 

그렇게 말하면서 그는 현관에 설치된 벽장에서 자그마한 책자와 카드를 꺼내 내게 내밀었다.

 

“뭐야, 이건? 팜플렛?”

“마음 같아선 내가 밥이라도 해 주고 싶은데, 난 오늘 약속이 있거든. 오늘 저녁은 이거 보고 먹고 싶은 거 시켜서 먹어. 계산은 이걸로 하고. 네 옷이나 생필품은 내일 사러 가자.”

“으, 응……알았어.”

“전화기는 저기 TV 옆에 있으니까 무슨 일 생기면 내 번호로 전화하고. 너무 늦지 않게 돌아올 테니까 얌전히 있어라?”

“알았어. 아, 저기.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

 

곧바로 다시 나갈 채비를 마친 그는 집을 나서려다 말고 가만히 서서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은 마치 ‘말해 봐’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어째서 나한테 이렇게까지 해 주는 거야?”

“네가 나를 찾아왔으니까. 너라고 특별대접 한 것도 아니고.”

 

그는 다시 몸을 돌려 현관으로 향했다.

 

”늦어도 오늘 안에는 돌아올테니 졸리면 먼저 자고 있어. 필요한 거 있으면 전화하고.”

 

찰칵,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삐빅거리는 전자동 자물쇠의 작동음이 들려왔다. 집 안에 덩그러니 남은 나는 시선을 내려 손에 들린 작은 광고 팜플렛을 바라보았다. 대문짝만하게 걸려 있는 피자 광고가 눈에 띄었다.

하지만 지금은 육체의 허기보다는 지식의 허기를 채워야 할 때. 팜플렛을 대충 소파 위에 집어 던지고, 나는 굳게 문이 닫혀 있는 방을 바라보았다.

 

“겁도 없이 나를 이 곳으로 데려왔다는 건, 이 안에 든 것들을 보여줘도 상관 없다는 뜻이겠지? 자아, 그럼 한번 살펴 볼까!”

 

과학자의 직감이 말하고 있었다. 이 문 너머에 무언가 아주 흥미로운 것이 있을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한 나는 곧바로 머릿속에 떠오른 것을 행동으로 옮겼다.

 

 


 

 

 

늦은 밤, 적막이 장막처럼 내려앉은 주택가의 골목길.

 

 

술자리를 마치고 만취한 일행들을 하나하나 각자의 집으로 데려다 준 프로듀서는 혼자서 어둠이 내린 골목길을 걷고 있었다. 아스팔트로 포장된 길을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뚜벅, 뚜벅, 하는 묵직한 발소리가 골목길을 내달렸다.

 

“후우…….”

 

주택가와 번화가를 연결하는 교차로에 서서 그는 발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술기운 때문인가, 한겨울임에도 이마에 땀이 맺힐 정도로 잔뜩 달아오른 피부를 한겨울의 칼바람이 차갑게 식혔다. 한숨을 내뱉으면, 새하얗게 부서지는 숨결 너머로 얼핏 보이는 희미한 별빛이 금방이라도 불야성의 불빛에 삼켜져 사라질 것만 같았다.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보던 그는 품 속에서 개인용 휴대전화를 꺼냈다. 액정화면에 떠오른 시각은 오후 11시. 캘리포니아는 오전 7시정도 되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딸 이야기를 못 들은 지가 꽤 오래 됐었지.”

 

그는 휴대전화의 메일함을 열었다. 리스트의 가장 위에 있는 메일이 눈에 띄었다. 발신시간이 여섯 시간 전으로 되어 있는 그 메일은 시키와 만난 직후 그녀의 아버지에게 보낸 것이었다. ‘읽음 확인’이라는 표시가 떠올라 있는 것을 보면 이미 내용을 확인했을 터. 그럼에도 답장은커녕 반응조차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어쩐지 최근까지 전혀 딸에 대한 이야기가 없다 싶더라니.’

 

화면이 꺼진 휴대전화를 주머니로 되돌리며 프로듀서는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가 선수 생활의 막바지를 보내던 시절, 그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부녀(父女)는 무척이나 사이가 좋았다. 옆에서 바라보는 자신이 속이 쓰릴 정도였으니, 그야말로 이상적인 부녀지간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언제부터였던가, 그녀의 아버지는 자신의 딸의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게 되었다.

곰곰히 돌이켜보면 언제부턴가 대화의 주제에서 시키의 이야기가 빠져 있었다.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다는 느낌이 노골적으로 느껴지고 있었기에 구태여 그 이야기를 꺼내지는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 이렇게 당사자가 직접 자신을 찾아왔으니 이제는 궁금증이 생길 수밖에 없다.

 

 

****

 

 

“자, 시키. 인사하거라. 존슨 씨란다.”

 

운동생리학자로써 ‘생체역학’의 선구자이자 세계적인 뇌신경학자이기도 한 이치노세 박사.

나는 그녀의 아버지와는 꽤나 오래 안면을 트고 있었지만, 정작 시키와는 그다지 안면이 있는 사이는 아니었다.

내가 기억하는 시키와의 첫 만남은 그녀의 아버지인 이치노세 박사의 연구실에서였다. 그 때 그녀는 먼 발치에서 자신의 아버지와 대화하는 내 모습을 바라보거나, 아니면 아버지의 등 뒤에 숨은 채 고개만 슬쩍 내밀어 나를 바라보곤 했다. 그러다 어쩌다 눈이라도 마주치면, 마치 숨어있던 걸 들킨 새끼고양이처럼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내게서 달아나는 것이었다.

 

“미안하네. 원래 이런 아이가 아닌데…….”

“괜찮습니다. 덩치가 좀 있다 보니 익숙한 일이거든요.”

 

당시 내 팬들 중에서는 어린아이들이 무척 많았다. 그 덕분에 그 시절의 나는 어느 정도 아이들과 소통하는 데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런 내 속내를 비웃기라도 하듯 시키는 마치 무서운 것을 보는 것처럼 노골적으로 나를 피해 다녔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뭐, 솔직히 말하면, 조금은 충격이었다.

 

“이치노세 박사님의 따님요? 아, 걔가 코가 엄청 좋거든요? 혹시 그것 때문인지도 몰라요.”

 

연구실의 조수에게서 그런 이야기를 듣고 난 다음부터는 일부러 연구실에 찾아가는 날에는 고급 향수를 사용해 보기도 하고, 특이한 향이 나는 오일을 써 보기도 했지만, 모조리 헛수고였다. 몇 번을 시도해도 그녀는 좀처럼 내게 가까이 다가오질 않았다.

마치, 자석의 같은 극이 서로를 밀어내는 것처럼.

 

 

****

 

 

“감사합니다!”

“네, 수고하세요.”

 

자동문에 연동되어 울려퍼지는 벨소리를 뒤로 하며 프로듀서는 편의점을 나왔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비닐봉투의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횡단보도를 건너 골목길로 접어들던 그는 우뚝 발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불야성의 불빛이 약해지는 곳이었기 때문일까, 유난히 별빛이 밝아 보였다.

 

-너도 결국 이렇게 되는구나. 응.

 

죽음과의 첫 번째 싸움을 이겨내고, 가까스로 자신의 세상으로 돌아온 그에게 현실을 되새겨주는 한 마디. 그 한 마디를 남기고 돌아서는 모습이 그가 기억하는 그녀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또, 또. 쓸데없는 생각 하네. 하여간 술이 원수지.”

 

고개를 가로저으며 크게 날숨을 토해낸 그는 다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어느덧 시야 저편에 우뚝 솟은 맨션의 실루엣이 나타나고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간 그를 가장 먼저 반긴 것은 코를 자극하는 고소한 치즈 냄새였다.

피자라도 시켜 먹은 것인가. 시간이 꽤 지난 모양인지 냄새 자체는 많이 희석되어 있었지만, 잔류하고 있는 치즈 냄새는 그의 침샘을 자극시키기엔 충분했다.

이미 배는 술과 안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어쩔 수 없이 흐르는 군침을 삼키며 현관을 지나 거실과 연결된 부엌으로 향했다. 식탁 위에 활짝 열려 있는 피자 상자가 눈에 띄었다. 원래는 여섯 조각으로 나누어진 것이었는지, 반쯤 먹다 남은 피자에는 한 눈에 봐도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로 새빨간 양념이 떡칠이 되어 있었다. 그나마 양념이 덜 묻어 있는 조각을 집어 냄새를 맡아 보았다. 코를 찌르는 시큼하면서도 매콤한 냄새가 났다. 타바스코 소스였다.

 

“……취향 참 독특하게 변했네. 어릴 땐 안 이랬는데.”

 

보기만 해도 혀가 얼얼해지는 모습에 혀를 내두르며 피자를 다시 제자리로 되돌려 놓은 그는 상자의 뚜껑을 덮었다. 거실을 둘러보면, 발판을 넓게 펼쳐둔 리클라이너 소파 위에 담요를 덮은 채 잠들어 있는 시키의 모습이 보였다.

소파 위에서, 입가에 새빨간 소스를 덕지덕지 묻힌 채 잠들어 있는 시키의 얼굴을 바라본 그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녀의 부드러운 머리를 쓰다듬었다. 가만히 눈을 감고 있는 그녀의 얼굴 위로 뉴욕에서 그녀를 처음 만났던 날, 몰라보게 성장한 그녀가 짓고 있던 웃음이 겹쳐 보였던 것이다.

다시 만난 그녀가 짓고 있던 웃음.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자기 자신을 통제하기 위한 웃음은……‘타인과 격리된 외로움’에 좀처럼 적응하지 못하던 그녀에게 그가 가르쳐 주었던 것이었으니까.

 

-즐겁게 산다는 건 그리 어려운 게 아니야. 일단 웃어. 웃고 있다 보면 나도 모르게 즐거워지거든. 어때, 간단하지?

 

‘……경솔했군. 말을 아꼈어야 했는데.’

 

티슈에 물을 묻혀 입가에 묻은 새빨간 소스를 닦아낸 뒤, 그는 시키의 어깨와 무릎 아래로 손을 넣어 그녀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레 그녀를 들어 올렸다. 자면서도 코는 살아 있던 것일까, 시키를 안아 올리기가 무섭게 그녀의 코가 움찔거렸다.

공조기가 돌아가고 있던 방 안은 춥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포근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따뜻하지도 않았다. 시키를 자신의 침대로 옮긴 프로듀서가 그녀에게 이불을 덮어주던 바로 그 때, 주머니 속에 들어 있던 그의 휴대전화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주머니에서 꺼낸 휴대전화의 화면에는 메일 수신을 알리는 자그마한 아이콘이 떠올라 있었다.

 

Title: 날세.

Contents: 그 아이에 대해서는 딱히 할 말이 없군. 알아서 잘 지내고 있으니 신경 쓸 것 없네. 자네야말로 몸 조심하게.

 

짤막한 답변을 읽던 프로듀서는 얼굴을 찌푸렸다.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결국 그렇게 된 것이었다.

다시 새까만 화면을 띄우는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프로듀서는 시선을 돌려 곤히 잠들어 있는 시키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 한 소년의 모습이 떠올랐다. 하나밖에 없는 가족에게 외면받고, 다시 가족이 되고자 무던히도 노력했지만, 끝끝내 가족으로 인정받지 못한 한 소년의 모습이었다.

잠들어 있는 시키를 내려다보던 그는 여러가지 감정이 뒤섞인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푹 쉬어라. 피곤할 테니.”

 

그의 혼잣말을 듣기라도 한 것인지, 가만히 누워 있던 시키는 신음소리를 흘리며 그에게서 돌아 누워, 동그랗게 몸을 웅크렸다.

 

 


 

 

 

다음 날.

 

 

“시키, 일어나! 아침이다!”

 

시차에 의한 피로까지 겹쳐 잠에 푹 절어 있던 뇌를 흔들어 깨우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간신히 눈을 뜬 내 흐릿한 의식 너머로 몹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으응……대디……?”

“뭐라는거야? 일어나, 얼른.”

 

볼멘소리와 함께 쭈욱, 뺨을 잡아당기는 손길이 느껴졌다. 그다지 힘을 준 것은 아니었지만, 뺨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잡아당기라고 있는 기관이 아닌 법. 안면을 내달리는 짜릿한 통증이 여전히 멍한 머리에 찬물을 끼얹었다.

 

“냐앗!! 아파앗!!”

 

나는 침대에서 펄쩍 튀어오르듯이 몸을 일으켰다. 마침내 눈이 제대로 뜨였다. 완전히 잠이 깬 것을 확인이라도 하는 듯, 온 집안을 가득 채운 고기 냄새와 구수한 기름 냄새가 코를 찔렀다. 부스스 몸을 일으켜 주위를 둘러보던 나는 내가 처음 와 보는 방에 있다는 것을 뒤늦게 눈치챘다. 한쪽 벽면을 완전히 집어 삼킨 책장에는 각양각색의 책이 꽂혀 있었고, 거실과 연결된 문 옆에는 문구용품을 제외하면 그다지 손을 탄 흔적이 없는 듯한 사무용 책상이 설치되어 있었다.

 

“아침밥 해 놨으니까 일어나서 먹어.”

‘아침밥……?’

 

나를 깨운 장본인은 그 말을 남기고는 터벅터벅 방을 나갔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정장 바지 위에 흰색 셔츠를 걸치고 있는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나는 그제서야 지금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다시 떠올릴 수 있었다.

 

‘아, 맞아. 나 어제 일본으로 왔었지.’

 

방을 나와 부엌과 연결된 거실로 나오자 식탁 위에는 갓 완성된 듯한 아침 식사가 준비되어 있었다. 토스트와 베이컨이 들어간 스크램블 에그, 그리고 간단한 샐러드였다.

적당히 레토르트 식품이나 도시락이 나오는 건 아닐까 생각했던 나는 눈 앞에 펼쳐진 전혀 뜻밖의 메뉴에 잠시 할 말을 잃어버렸다.

 

“……뭐 해? 입맛 없어?”

“어? 아, 응. 아니, 아니야. 그냥 좀……의외라서.”

 

내 생각을 읽은 것일까, 내 몫의 접시 좌우에 식기를 늘어놓은 그는 코웃음을 치며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혼자 산 경력이 네 나이랑 비슷한데 설마 밥도 제대로 못 할까? 앉아, 밥 먹자.”

“냐하핫, 그렇지. 미안해~.”

“됐다. 그런 이야기 자주 들으니까.”

 

그의 맞은편 자리에 앉아서, 나는 황금빛 광택이 흐르는 달걀을 입으로 가져갔다.

뭐야, 맛있잖아.

 

 

“이따가 6시에 택시 타고 회사로 와.”

 

내가 식사를 반쯤 마쳤을 때, 먼저 자신의 그릇을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선 그는 출근 준비를 하면서 내게 말했다.

 

“왜?”

“네 기본적인 역량에 대해서 테스트를 해볼 거야. 보안팀에는 말해 놓을테니 내 명함 보여주면 들여보내줄 거고. 명함 가지고 있지?”

“응.”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빙그레 웃으며 소파에 걸쳐 둔 코트와 정장 상의를 걸쳤다.

 

“그럼 이따 저녁때 보자. 점심은 먹고 싶은 거 시켜 먹어. 아니면 냉장고에 샌드위치 있으니까 그거 먹든지. 그럼 나 간다.”

“네~다녀오세요~♬”

 

나는 접시에 남은 음식들을 마저 먹어 치우고, 굳게 닫혀 있는 그의 방으로 향했다.

 

“테스트라……그럼 미리 예습이라도 좀 해 볼까?”

 

 

****

 

 

그 날 저녁, CG프로덕션의 별관 지하에 위치한 연습실.

 

 

연습생들이 모두 귀가한 연습실에는 베테랑 트레이너와 마스터 트레이너, 그리고 프로듀서가 남아서 시키의 테스트를 진행하고 있었다.

 

“하나, 둘, 빙글, 빙글, 짠, 짠, 짠♬”

 

시키가 마무리 포즈를 취하는 것과 동시에 흘러나오던 음악이 멈추었다.

 

“하아, 하아……이거면 됐어?”

“그래. 잘 했다.”

 

지켜보던 베테랑 트레이너가 고개를 끄덕이자, 거친 숨을 몰아쉬며 서 있던 시키는 뭐라 할 틈도 없이 바닥에 등을 대고 벌러덩 드러누웠다.

 

“아~힘들어! 이제 끝! 시키, 이젠 더는 못 해!”

“그래, 그래. 수고했다. 물 마실래?”

“응!”

 

베테랑 트레이너가 물병을 내밀자, 바닥에 누워 있던 시키는 상체를 벌떡 일으켜 그 물병을 받아 들고는 내용물을 쭉쭉 빨아먹기 시작했다.

 

 

한편, 프로듀서와 마스터 트레이너는 약간 떨어진 곳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떻습니까?”

“재능도 재능이지만 흡수력이 굉장하군. 저걸 정말 어제 하루만에 다 익혔다는 건가?”

“네, 그렇죠. 일단 흥미가 가는 건 스펀지처럼 빨아들이는 아이니까요.”

”굉장하군. 정말 굉장해. 스태미너만 해결된다면 지금 바로 전력으로 쓸 수도 있겠어.”

 

감탄사를 늘어놓던 마스터 트레이너는 차트에서 눈을 떼고 프로듀서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저 아이도 후보로 넣을 셈인가?”

 

”아뇨, 지금은 아닙니다.”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시간……이 좀 더 필요해요.”

“시간?”

“네, 각오를 다질 시간이 말이죠.”

“각오라……하긴, 재능만 있다고 다 되는 게 아니긴 하지.”

“그렇지요. 반대로, 재능이 없다고 해서 안 되는 것도 아닙니다만.”

”그나저나 참 신기하군. 어디서 이런 인재들을 찾아오는 거지?”

 

그녀의 말에 프로듀서는 빙그레,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러게요. 필요할 때가 되어서 그런 걸까요. 이상하게 요즘 들어서 자주 만나게 되는군요.”

“신세 좋은 소리로군. 다른 프로덕션이 들으면 화낼 거다.”

 

마스터 트레이너는 들고 있던 차트로 씨익 웃는 그의 가슴팍을 가볍게 두드렸다.

 

“그럼, 예정대로 1주일간 레슨에 견학시키면 되는 건가?”

“네. 특별한 일이 생기면 제가 별도로 말씀 드리겠습니다. 고생스럽겠지만, 잘 부탁드릴게요.”

“그래, 알았어. 맡겨만 달라고.”

 

 

****

 

 

약 한 시간쯤 지나, 마스터 트레이너와 베테랑 트레이너를 먼저 돌려보낸 프로듀서는 어느 정도 기력이 돌아온 시키와 함께 집 근처에 위치한 대형마트로 향했다. 그녀에게 필요한 물건들을 사기 위함이었다.

조수석에 무릎을 끌어안은 자세로 앉아있던 시키는 고개를 돌려 프로듀서를 바라보았다.

 

“네가 보기엔 어땠어? 마음에 들었어?”

“잘 하던데. 내 방에 있던 자료는 언제 열어본 거야?”

“엑, 들켰어?”

“네가 시연했던 동작들을 그 누구보다도 많이 본 게 누구라고 생각해? 눈치채지 못하는 게 이상한 것이겠지.”

“냐하핫, 역시 그랬구나……”

 

시키는 끌어안고 있던 무릎을 풀고, 손 끝으로 관자놀이를 긁었다.

 

”뭐, 시키도 천재긴 하지만요, 없는 걸 쨘! 하고 만들어 낼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어? 이용할 수 있는 건 최대한 이용해야지.”

“그래, 맞는 말이야.”

“그래도……허락 없이 자료를 뒤진 건 미안해요. 사과할게.”

“칭찬하는 건데 왜 사과를 해? 잘 했다니까.”

“냐하하~너무 띄워주면 곤란한걸~시키냥 둥실둥실 날아가버릴지도?”

 

솔직하게 자신을 향한 칭찬에 시키는 쑥쓰러운 듯 코를 킁킁거렸다.

 

“그럼 난 이제부터 어떻게 되는 거야? 아이돌 할 수 있어?”

“아니. 말했잖아? 시간을 줄 테니까 잘 생각해 보라고.”

“에에, 또? 그렇게 칭찬 받았는데도?”

“그래. 애초에 실력과 마인드는 별개니까.”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운전대를 돌려 대형마트의 간판이 걸려 있는 골목길로 방향을 바꾸었다.

 

“한번 잘 생각해 봐. 네가 정말로 하고 싶은 게 뭔지. 그저 계기를 얻고 싶은 건지, 아니면 네 스스로가 한 걸음 나아가고 싶은 것인지를.”

 

시키는 그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어느 쪽이든 나는 너를 도와줄 거야. 하지만 네가 방향을 정하지 않는다면 나는 아무것도 해 줄 수가 없다. 등대의 불빛이 비로소 의미를 갖는 것은 배가 뱃머리를 확실하게 돌렸을 때뿐이니까.”

 

대답이 없었기에 프로듀서는 곁눈질로 조수석을 슬쩍 바라보았다.

그의 이야기를 듣기는 한 것일까, 조수석에 앉아 있는 시키는 턱을 괸 채 멍하게 차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동안 그 모습을 바라보던 프로듀서는 다시 시선을 앞으로 되돌렸다.

 

‘……이 아이가 무언가를 스스로 하려고 한다는 것 자체가 흥미가 있다는 뜻일 테니……나도 미리 준비를 해 두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군.’

 

 


 

 

 

그 다음날부터 1주일간의 견학이 시작되었다.

말이 좋아 견학이지, 실제로 하는 것이라곤 지정된 시간에 연습실로 나와, 한 켠에 우두커니 앉아 아이돌들이 레슨을 받거나 트레이닝을 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 뿐. 솔직히 말하면, 따분했다.

뭐, 따분하다지만 그의 계획에 불만은 없었다. 내 또래 여자아이들의 냄새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들 중 하나였으니까. 거기다, 그 자체로도 순수하게 좋은 냄새를 뿌리고 다니는 것이 내 또래 아이들이었지만, 그 중에서도 여기에 모여 있는 아이들이 내뿜는 향기는 극상 그 자체였다.

 

‘그 아이들이 그런 냄새를 풍기는 원인은 따로 말 할 필요도 없겠지만 말이야.’

 

나는 늘어져라 하품을 하며 눈 앞에서 연습생들과 함께 안무를 확인하고 있는 남자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저 사람은 자신을 바라보는 그들의 눈빛에 신뢰감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

 

‘뭐, 모르겠지. 그랬으면 지금쯤 여자를 한 트럭은 달고 다녔을 테니.’

 

레슨을 지켜보고, 트레이닝을 따라 해 보고, 그리고 아이들의 냄새를 맡고, 저녁에는 그의 집에서 의미 없는 잡담을 나눈다. 그것이 1주일간 내가 한 일의 전부였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지나, 마침내 내가 연습을 견학하기로 한 마지막 날이 되었다.

 

 

“……아?”

“아, 당신은…….”

 

마지막 참관을 마치고, 별관에 위치한 사무실로 돌아가던 도중 나는 연습생 중 한 사람을 만났다. 은발 쇼트컷에 푸른 눈동자. 그리고 긴 속눈썹이 무척 인상적인 아이였다.

 

안녕!……아, 그러니까, 안녕하세요?”

 

먼 발치에서는 자주 봤지만 이렇게 가까이에서 마주치기는 처음이었다. 새파란 눈을 동그랗게 뜨는 그녀의 입에서 튀어나온 것은, 이 곳에서 들을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언어였다.

그러고보니, 하프가 두 명 있다고 했었지. 얘가 ‘그쪽’ 하프구나.

 

“오오, 너 뭐야? 러시아어 할 줄 알아? 굉장한걸~?”

“아차, ……저는 아나스타샤, 입니다. 아냐, 라고 불러주세요.”

“아, 나 러시아어 할 줄 아니까 편하게 말해도 돼?

 

오랜만에 써 보는 러시아어로 말하자 자신을 ‘아냐’라고 밝힌 은발의 소녀는 무척 환한 미소를 지었다. ‘아름다움’이라는 성분이 있다면 그대로 용출될 것 같은 눈부신 미소였다.

 

정말인가요? 다행입니다. 저, 아직 일본어가 서툴러서요.

 

일본어에 비하면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유창한 러시아어가 튀어나왔다.

 

그래, 그래. 편한 언어로 얘기하자구. 나는 시키. 이치노세 시키야. 그냥 시키라고 불러 줘.

네, 반가워요, 시키.

냐하핫, 하프라더니 진짜 말 잘하잖아. 멀리서 보기만 했는데 이렇게 직접 이야기하는 건 처음이네.

 

 

‘아냐’라고 자신을 소개한 여자아이와 한창 이야기를 나누고 있자니, 등 뒤에서 뚜벅, 뚜벅, 하는 낯익은 발소리가 들려왔다. 무척 낯익은 템포였다.

 

“아, 이치노세. 여기 있었나.”

 

아니나다를까,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자, 그 곳에는 그가 서 있었다.

 

“프로듀서! 안녕!”

“아, 안녕? 아냐도 있었구나.”

 

저 아이를 위해서 일부러 연습한 모양인지, 어눌한 발음으로 아냐에게 러시아식 인사를 한 그는 밝게 웃으며 자신에게 다가오는 그녀와 하이파이브를 나눈 뒤 그녀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오늘은 보컬이었지? 레슨 잘 받았어?”

“네, 이제는 트레이너 씨도, 이마……아니, 이마를 덜 잡게 됐어요!”

“하하하, 그거 다행이네. 다음 일정 얘긴 들었고?”

 

그의 말에 아냐는 고개를 끄덕였다.

 

. 아…...벌써 시간이……그럼 시키, 다음에 또 이야기 해요?

그래, 다음에 또 이야기하자~”

 

발랄하게 손을 흔들며 떠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그는 고개를 돌려 나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시키 너 러시아어도 할 줄 알았네?”

“흐흥~뭐, 이쪽 바닥에선 기본이지. 독일어랑 러시아어, 알아 놓으면 여간 편한 게 아니거든. 어때, 굉장하지?”

“그래, 굉장하다. 비행기 태워 줄까?”

“그건 정~말 어지러우니까 하지 말아 주었으면 좋겠어요.”

”뭐, 그건 그렇고. 둘이서 무슨 얘기 하고 있었어? 즐거워 보이던데.”

“응~? 비밀~♬”

 

나는 검지손가락을 입에 갖다 대고는 히죽 웃었다. 아마 그 아이도 나와 같은 대답을 들려줄 것이다.

소녀를 여자로 만들어 주는 것은 비밀이라고들 하잖아?

 

“……뭐, 별 일 아니지?”

“그럴수도 있고~아닐수도 있지요~? 흐흥, 뚜껑을 열어보기 전까지는 모른답니다~”

“뭐, 그럼 그건 됐고.”

 

‘그건 됐고’라니, 너무한걸.

잠시 말을 멈춘 그는 들고 있던 서류뭉치를 내게 흔들어 보였다.

 

“잠깐 이야기 좀 할까?”

 

가장 위쪽 페이지에 ‘계약서’라고 적혀 있는 서류를 보고, ‘드디어 때가 왔구나’라고 생각하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뒤를 따라 도착한 곳은 사무실이 아닌 회의실이었다.

회의용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계약서를 사이에 두고 나는 고개를 들어 눈 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나보다 머리 두 개 정도 높은 곳에서, 그는 나를 곧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우선, 1주간 견학해본 감상은 어때?”

“감상? 으음……글쎄……아, 맞아!”

 

과장되게 손뼉을 마주치자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어엄~청 좋은 냄새가 났어! 아니, 향기지! 엄~청 좋은 향기!”

 

그렇게 대답하자,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던 그의 눈이 한순간에 가늘어졌다.

 

“……비행기 표 끊어줄까?”

“아앗! 잠깐만! 농담이야, 농담! 아메리칸 조크!”

“그래, 그럼 나도 농담이라고 치고. 이제 제대로 된 대답을 들려줘.”

“응. 그 전에 내가 먼저 뭘 하나 물어봐도 될까?”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그는 내가 무슨 질문을 던질 지 짐작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네가 잘못 짚었어.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은 이미 네가 나에게 보여주었으니까.

 

“너, ‘놓고 온’ 척 했지만 실제로는 아무것도 놓고 오지 않았지? 네 방을 둘러보면서 눈치챘어. 네가 정말로 ‘윌리’를 두고 왔다면, 거기에 있으면 안 되는 물건들이 있었거든.”

 

그의 집에 처음으로 갔던 날, 나는 산더미같이 쌓여 있던 아이돌 관련 자료들 사이에서 발견한 어떤 물건을 떠올렸다. 투명한 아크릴 상자 안에 들어있는 그것은, 그의 선수 시절을, ‘윌리’를 상징하는 물건들이었다.

 

“그렇게 미련이 남아 있으면서, 어째서 돌아가지 않았던 거야?”

 

뜻밖의 질문이었기 때문일까, 가만히 나를 바라보던 그의 눈이 약간 휘둥그래졌다.

당황하는 듯한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상하게 무언가가 벅차오르는 기분이 느껴졌다.

 

“……이거, 생각보다 꽉 찬 직구를 던지는걸. 그게 궁금해진 이유라도 있을까?”

“그 아이들이 내게 가르쳐 줬어. 너에게서 무엇을 받았는지, 네가 무엇을 보여주었는지. 거기서 문득 의문이 생겼지. 너는 어째서 그 아이들에게 그렇게 집착하는 것인지. 네가 그 아이들에게서 무엇을 원하는지.”

“하하, 그런 걸 보라고 견학을 시킨 게 아니다만.”

 

나는 고개를 끄덕이지도 않았고, 대답을 하지도 않았다. 입을 닫고, 눈은 곧게 뜨고, 가만히 쓴웃음을 짓는 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어서 말해’라는 무언의 재촉이었다.

그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 안경을 벗어 나를 바라보았다. 마치 심장처럼 주기적으로 동공의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는, 핏빛으로 번들거리는 그의 왼쪽 눈이 나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그 날, 그의 선수 생활을 완전히 끝장내버린 주먹만한 크기의 공 하나가 그에게 남긴 상처였다.

 

“그래, 네가 말했던 것처럼, 내 앞길은 이미 정해져 있어. 하지만, 그렇기에 할 수 있는 게 있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떻게 끝날 지 알고 있으니까 할 수 있는 게 있다고?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내가 어디로 갈지를 알고 있으니까, 나는 부담 없이, 마음 놓고 뒤를 돌아볼 수 있는 거야. 내 뒤를 따라올 사람들이 제대로 앞을 보고 걷고 있는지,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은 아닌지.”

“뭐야, 그게?”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의 이야기에서는 가장 중요한 것이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 너는? 그 아이들이 네가 서 있는 곳을 지나쳐서, 너보다 더 앞으로 가 버리면? 넌 뭐가 되는 건데?”

 

가만히 나를 바라보던 그는 잠시 후 다시 입을 열었다.

 

“신데렐라, 기억하고 있지? 마법사가 그녀에게 마법을 걸어준 뒤 어떻게 되었는지 알고 있어?”

 

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이려던 나는 움직임을 멈추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나를 바라보던 그와 눈이 마주치자,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게 내 대답이야. 미래가 없는 사람이,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마지막으로 꾸는 꿈. 그들의 길을 열어주고, 그들이 나아가는 것을 보면서 느끼는 대리만족.”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어? 너는? 네 자신은 소중하지 않아? 아깝지 않아?”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깝지. 하지만, 내가 살아왔던 흔적이라면 이미 충분히 남겼어. 더 이상 이룰 것도 없는 수준이고. 그래서 나는 ‘윌리’를 미국에 두고 온 거야. 이 곳에서 이루고 싶은 꿈은, ‘윌리’는 이룰 수 없는 것이니까.”

 

그렇게 말하며 그는 다시 안경을 썼다. 검붉은 색으로 경련하던 그의 왼쪽 눈이 다시 검은색으로 돌아왔다. 미간을 찌푸리며 몇 번인가 눈을 깜박이던 그의 왼쪽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 내렸다. 슬픔의 눈물이 아닌, 통증에 의한 눈물이었다.

그것을 본 순간, 나는 가슴 속에서 무언가 들끓는 것을 느꼈다. 눈 앞의 괴짜와, 그를 이토록 열중하게 만드는 아이돌이라는 존재에 대한 탐구욕이었다.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지금껏 차갑게 식어 있던 가슴이 서서히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재밌어……재밌겠어! 그래, 네가 정 그렇게 나온다면, 내가 네 끝을 관측해 줄게. 과학자의 눈으로, 네가 스스로 일으킬 화학반응의 완결을 내 눈으로 관측해 줄게. 아무도 기억하지 않더라도 내가 널 기억해 주겠어.”

“말은 잘 하네. 힘들다고 주저앉아서 펑펑 울지나 마라?”

“그럼 버리고 갈 거야?”

“천만에. 엉덩이를 걷어차서라도 데려가야지.”

“아앙, 살살 해 줘♡”

“그건 네가 하기 나름이고.”

 

냐하핫, 웃음을 흘리면서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자아, 그럼 앞으로 잘 부탁할게. ‘프로듀서.’”

“그래. 나야말로 잘 부탁한다, ‘이치노세.’”

 

7년만에 맞잡은 그의 손은 내가 알던 것보다는 조금 부드러워져 있었다.

 

 


 

 

“야, 이치노세.”

 

'시키'가 아니라 '이치노세'인가.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그가 나를 불렀다. 창 밖을 바라보던 중에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보자, 운전대를 붙잡은 채 앞을 바라보고 있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

 

“학교를 그만둔 이유, 정말로 질려서 그만둔 게 맞아?”

“응, 맞아. 정~말 재미가 없었더란 말이지!”

“……그래?”

 

차 안에는 정적이 흘렀다. 내가 다시 시선을 창 밖으로 돌리려는 순간,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은 나도 그렇다고 알고 있을게. 언제라도 좋으니까, 네가 괜찮을 때 네 본심을 말해 줘.”

“……응.”

 

멍청이, 내가 그런 걸 너한테 말해줄 리가 없잖아? 학자란 족속들은 자신의 약점을 결코 드러내는 법이 없는 족속인걸.

나는 고개를 돌려 창 밖을 바라보았다. 서서히 검은 장막이 내려오고 있는 도시의 하늘 위로 별들이 하나둘씩 반짝이고 있었다.

 

<끝>

 

5 여길 눌러 추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