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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은 진실함에 있다 - 上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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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7-11, 2017 15:56에 작성됨.

"야, 프로듀스 해볼 생각 없냐?"

"...네?"

정말로 뜬금 없는 이야기여서 놀랐다. 한창 업무 교육을 시키고 있었던 치히로 씨도 놀란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너 전부터 프로듀서 하고 싶은 맘 있는 거 아니었어?"

사정은 상관 없다는 듯 맘대로 쏟아내는 과장의 말에 잠시 넋을 잃고 주변을 바라보았다. 모니터에 잔뜩 띄워진 창, 그 옆으로는 산처럼 쌓여 있는 온갖 서류들이 난잡해 보였다.

잠시 추억에 잠겼다. 입사했을 적엔느 작았던 이 회사가 십수년의 역사 속에서 커가던 장면들이 필름처럼 스쳐지나간다. 동시에 폭증하던 업무량도 떠오른다. 착취나 다름 없던 시절이 몇년이나 이어지며 사람 좀 뽑으라고 사정사정 했던 경험이 촤르륵 흘러갔다.

"사람이 말하고 있는데 뭔 생각하고 있는 거야?"

사정 끝에 치히로 씨를 비롯한 사무원들이 입사하는 장면에서 필름이 끊겼다. 이 인간은 느긋하게 과거 회상에 잠길 틈조차 주지 않는다, 그렇게 당장이라도 넘어올 거 같은 욕을 애써 삼키며 말을 고르느라 대답이 늦어졌다.

"아니아니, 저기 잠깐만요."

"응? 못 알아들었어? 너 프로듀서 할 맘 없냐니까?"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못 알아들은 게 아니라 서론 본론 빼먹고 결론만 말하시면 제가 어떻게 된 상황인지 알고 승락합니까?"

승락하든 거절하든 일단 어떤 상황인지는 알아야 대답을 하지 않겠느냐고 되묻자 과장은 눈썹을 찌푸렸다.

"그래 그래.'

그러곤 뒤를 돌아봐 외쳤다.

"타나카 씨, 아까 왔던 메일 이쪽으로 보내봐."

대답과 함께 회사 메일이 전송되었다고 떴다. 과장의 재촉에 못 이겨 모니터 곳곳에 늘어진 업무창을 대충 정리하고 메일에 첨부된 사진을 열었다.

사진은 이번에 뽑은 아이돌의 신청서 스캔본이었다. 그 정도라면 이 회사에서 수도 없이 본 것이다만 과연, 한눈에 어찌 된 상황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아나스타샤(Анастасия)?"

가타카나와 더불어 그리운 키릴 문자가 쓰여진 문서에는 은발의 소녀 사진이 있었다. 미인들을 자주 보는 업계에 발을 담갔는데도, 깜짝 놀랄 만한 미인이었다. 과연, 하고 탄식을 내뱉었다.

"그래, 무슨 상황인지 대충 이해가 됐지? 그래서 어쩔래? 이 회사에서 러시아어가 되는 사람은 너밖에 없잖아? 위에서 제의가 들어왔거든."

생각했던 그대로다. 옆의 치히로 씨를 잠깐 보고, 전쟁터 같은 사무실의 모습을 본다. 솔직히 이런 치사량에 가까운 업무량에 치이는 삶은 진작에 질린 차였고, 프로듀서로 일하고 싶었던 것은 이 업계에 들어올 때부터 원하던 바였다.

...설마 이런 식으로 오늘에 이르러 그 염원이 이루어질 줄은 30분 전까지만 해도 상상도 못했다만.

"네가 전부터 그쪽으로 가고 싶어하는 거 같길래 사실 내가 힘 좀 써 본거야."

한대 쥐어박아주고 싶은 그 특유의 우쭐거리는 표정도 오늘은 봐줄 만 했다.

"그럼 담당하게 될 얘도 만나봐야겠죠. 언제 만나면 되죠?"

"호오, 튕기는 기색도 없이 바로 덥석 무는 거냐? 나 서운하다."

그런 과장에게 눈을 흘겼다.

"제가 튕기는 기색을 보이기라도 했다간 이 일이 바로 날아갈 게 뻔히 보이거든요?"

말을 듣자 과장의 눈동자가 살짝 떨렸다. 정곡을 찌른 모양이다. 하기사 이렇게 업무에 치이는 상황에서 숙련자를 빼주고 싶을 리가 없었을 것이다. 이해는 한다. 단 그를 이해한다고 살짝이라도 거절하는 모습이 보여서 모처럼 굴러 들어온 이 기회를 포기하고픈 맘은 없었다.

과장은 무안하다는 보여주기라도 하듯 헛기침을 하고 말을 이었다.

"그래, 그래서 그 애는 한시간 후에 예능 2과에서 보면 돼."

그 말을 듣자마자 생각이 바뀌었다. 아무래도 이 회사는 내가 이걸 거절할 거란 생각 자체를 하지 않은 거 같다고.


그후 30분은 광속으로 치히로 씨에게 업무 관련 지식을 주입하고 10분 동안 정리한 다음 달려 나왔다. 상대방은 고작해야 13살 짜리 소녀인 만큼 첫 인상이 더더욱 중요하다. 평소 사무실에서 하는 것처럼 마구잡이로 입어서도 안 될 노릇이므로 화장실 거울 앞에 서서 옷새무비를 정리했다.

"불편하다..."

양복에 넥타이까지 FM대로 입고 옷새무비를 정리하니 나름대로 그럴듯해보이긴 했다만, 이렇게 깔끔하게 정리해서 입는 게 불편하게 느껴질 정도이니 대체 몇년을 그 사무실에서 썩은 것인지 모를 지경이다.

"나원, 이렇게 마구잡이로 일정을 잡는 게 어딨어."

투덜대면서 인쇄해 두었던 아나스타샤의 프로필을 대충 훑어본다. 나이는 13세에 출신지는 홋카이도. 생김새는 백인 중에서도 드문 은발벽안에 이지적인 이미지가 있었다. 러시아-일본의 혼혈이고 10살부터는 일본에서 살았음.

"그런데 3년 전부터 일본에서 살았으면 일본어 충분히 하는 거 아니야?"

아마 그건 맞을 것 같다. 아마 이 일이 자신에게 떨어진 것은 특유의 우쭐대는 표정이 짜증을 부르는 과장이 했던 말대로 일 것이다. 설령 진짜 위에서의 결정이었어도 그가 막으려 들었다면 이 기회가 자신에게 돌아올 일은 없었을 것이다.

"나중에 과장한테 밥이라도 한끼 사야겠네."

역시 솔직히 말하진 않았지만 그에게 충분히 감사하고 있다.

예능 2과, 사실 이 회사에 입사할 때만 해도 아이돌 담당과가 따로 생겨날 정도로 커질 거라곤 생각도 못 해봤다. 그런데 최근에 2과가 따로 생겨날 정도이니 이 회사가 새삼 얼마나 순풍을 타는지 실감했다. 그와 동시에 사무직 인력은 최근에 와서야 늘어나기 시작했다는 걸 떠올리며 얼마나 혹사당했는지도 실감했다.

'아니 아니, 진정하자. 진정...'

새삼 끓어오르는 분노를 달래기 위해 심호흡을 하고 왼쪽 상의 주머니에서 습관대로 목제 파이프 담뱃대를 꺼내 물었다. 의지와 관계 없을 정도로 몸에 익은 오랜 버릇이었다. 정작 담배는 피우지 않게 된지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이 습관은 아직도 남아 있었다.

한숨을 푹 내쉬고는 물고 있었던 담뱃대를 문 채로 신청서를 다시 훑어봤다. 대충 찍은 듯한 사진으로도 예쁘다는 말로는 부족한 듯한 아나스타샤라는 소녀를 맡게 된다는 건 아직도 잘 실감이 나지 않는 현실이었다.

그대로 옮겨 다다른 곳은 예능 2과, 기존의 아이돌 담당 부서로는 이미 충분히 커서 새로 만들었다고 들은 적은 있었지만 설마 자신이 여기에 속하게 될 줄은 오늘 아침만 해도 몰랐다. 들어가자 사무원이 그를 알아봤다.

그녀와의 이야기는 딱히 인상 깊은 것이 없었다. 단지 마지막에 그녀의 말이 기억에 남았다.

"세상 일이란 게 참 알다가도 모르겠네요. 이제부터는 프로듀서님이라고 불러야 하나요?"

프로듀서님이라, 솔직히 꽤나 맘에 들었다. 그녀는 담당 아이돌-이미 확정된 것처럼 말한다- 아나스타샤 양이 안쪽 사무실에서 기다린다는 말을 했다. 과장이 말한 한시간은 아직 경과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진작부터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건 놀라운-동시에 미안한- 일이었다. 그래도 다짜고짜 놀라게 하고 싶진 않았기에 조심스레 문을 두드리고 열었다.

"아"

문을 연 그 자리에서 소녀와 바로 눈을 마주쳤다. 별이 잘 보이는 밤하늘처럼 청명한 벽안이 인상적이었다. 문손잡이를 붙잡고 있는 그 상황에서 잠깐 굳어 있었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던 건 그녀가 다급히 일어났기 때문이다.

"아, 아뇨, 그냥 앉아 있어요."

아나스타샤의 반응에 오히려 놀라 말했다. 자신은 어디까지나 아나스타샤의 보조지 그녀의 상관 같은 게 아니다. 괜시리 상하관계로 만들어 거리를 늘리고 싶지 않았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는 여전히 엉거주춤 앉아 여전히 긴장한 모습이었다. 놀라운 미소녀지만 그래봐야 아직 십대 초반의 소녀다. 갓 들어온 조직에서 전혀 모르는 곳에서 전혀 모르는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은 성인에게도 쉽지 않은 것이다.

모든 만남의 기초는 통성명을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물었던 것이 예기치 않은 실수라는 걸 이내 깨달았다.

"이름은?"

평범한 질문이었는데, 바짝 긴장하고 있었던 그녀의 입에서 반사작용처럼 말이 튀어나왔다.

"Меня зовут..."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는 있는 러시아 말이었지만, 아나스타샤는 거기까지 말하고선 입을 닫았다. 새하얀 얼굴에 붉은 기가 돌더니 이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제 이름은...아나스타샤입니다..."

'10살까지는 러시아에서 살았다'는 특이사항이 문득 기억났다. 그리고 문득 과거 일이 생각나 웃음이 났다. 자신의 부끄러운 실수를 비웃는 것처럼 보였는지 아나스타샤의 표정이 순간 굳어졌다.

"아니아니, 비웃는 게 아니라, 갑자기 옛날 생각이 나서 그랬어요."

황급히 말했다. 나중에 다시 돌이켜 봤을 땐 능글능글하게 말을 돌리는 듯한 느낌이 들긴 했다.

"저도 원래는 미국에서 살다가 일본으로 왔거든요? 일본에 오고서 일본어를 할 줄 아는데도 가끔씩 다급해지면 나도 모르게 영어가 먼저 튀어나왔거든요. 그럴 때마다 주변 사람들이 '일본어로 얘기해'라고 한마디 씩 했죠."

지금이야 유창하게 일본어를 하지만 어디까지나 옛날 얘기라는 것이다.

"뭐, 가끔씩은 그것 때문에 곤란한 때도 있었지만 다들 익숙해지니까 그것도 평범한 일로 받아들이게 되더군요. 문득 그 시절 일이 떠올랐던 거예요. 나쁜 뜻은 없었어요."

그런 시덥잖은 얘기를 꺼내자 아나스타샤도 약간 긴장이 풀어진 것인지 그녀의 얼굴에서도 살짝 미소가 번졌다 . 웃으니 훨씬 예쁘다,라는 말은 삼켰다. 초면부터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건 실례일 것 같았다.

"미리 들었을 지 모르지만 전 이제부터 아나스타샤 씨 담당이 될 거예요. 뭔가 모르거나 궁금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물어봐 주세요."

담당 프로듀서라는 게 그래서 있는 거니까요, 하고 웃으면서 말했다. '담당 프로듀서'라는 말의 울림이 참으로 맘에 들었다.

그렇게 잠깐 뜸을 들이더니 아나스타샤가 입을 열었다.

"그럼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프로듀서."

그리고 밝게 웃는 아나스타샤의 모습을 보고서 잠깐 굳어 있는 동안, 그녀는 계속 말을 이었다.

"그리고 아냐라고 불러주세요. 제 별명입니다."

아냐, 아냐는 보통 '안나'의 애칭이 아닌가? 하고 속으로만 생각했다. 당사자인 그녀는 어머니께서 지어주신 소중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듯 했으니 거기에 찬물을 끼얹을 생각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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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때요 선배님? 첫 미팅은 괜찮았어요?"

퇴근하는 길에 만난 치히로가 평소와 같이 스스럼 없이 말을 걸어왔다. 그녀 입장에서 자신은 선배이고 엄연히 갈구는 사람일텐데 이렇게 스스럼 없이 대하는 것도 -여러 의미로- 대단한 사람이라 생각했다. 앞으로 크게 될 사람이다.

"힘들었어, 무시무시했지."

"그 정도로 말이 안 통하나요?"

눈썹을 八자로 만들고 되묻는 그녀의 모습을 보니 "힘들었다"라는 것의 의미를 다른 쪽으로 이해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내 그녀의 표정이 바뀌었다.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입가엔 미소가 걸렸네요. 사무직에서 빠져나가시니까 그리도 좋으신가요?"

정곡이다.

"뭐 그야, 컴퓨터 앞에서 산더미 같은 서류와 씨름하는 것보다야 아나스타샤 같은 미소녀랑 같이 있는 게 백배천배 낫지."

평소에는 나름대로 선배에 대한 예의를 담고 있던 눈빛이 순간 쓰레기를 보는 듯한 경멸하는 시선으로 바뀐다.

"속물이네요. 그거 성희롱이 될 수도 있는 위험발언이란 거 아시나요?"

하지만 그에 굴할 정도라면 이 회사에서 그 수많은 일들을 지금껏 처리해냈을 리가 없다. 굴하지 않고 당당히 맞선다.

"글쎄다. 치히로 씨가 들어오기 전엔 그 많은 업무량을 과장이랑 단 둘이서 처리했었어. 내가 생각하기에도 인간이길 포기한 미친 짓이었지. 그런 걸 몇년 동안 했는데 이 정도면 나름 정신줄을 잡고 있는 거 같은데?"

치히로 씨, 웰컴 투 헬. 그렇게 은근히 약올리고 싶었지만 치히로 씨의 악의가 담긴 듯한 미소가 직격했다. 같이 있다 보면 알게 되는, 그녀가 화났을 때 짓는 미소였다.

"후후, 뭐 과장님도 선배님을 그냥 보내줄 수는 없다고 하시더라구요. 일단 지금 있는 업무랑 완전히 인수인계가 될 때까지는 이쪽에서 일 시킬 거라고 상부에서도 허락을 받았다 하시던데..."

그리고 은근슬쩍 시선을 하늘로 돌리는 그녀의 말이 가시처럼 날아온다. 그리고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잠깐, 인수인계는 이미 끝난 거 아니었어?"

이미 치히로 씨를 비롯한 신입 사원들이 들어오고 몇주가 지났다. 오늘 그녀를 데리고 있었던 것도 어디까지나 그녀에게 업무 노하우를 가르쳐 주기 위함이지 절대 인수인계는 아니었을 터이지만...

"아니요, 앞으로 1주일 동안은 더 일해주셔야 할 거라고 과장님이 전해드리라더라구요. 1주일 동안은 좀 수고 해주세요 선배님~"

웃는 얼굴로 그리 말하는 치히로 씨의 말에 현실을 깨달았다. 과연 그 과장이 그냥 놓아줄 리가 없다고. 일말이나마 과장에게 감사하다고 생각했던 자신의 어리석음을 새삼 깨닫고 절망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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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써보는 게 거의 몇년 만이라서 썩 만족스럽게 안 써지네요.

 

갑자기 아냐쨩 보고 영감이 솟구쳐서 써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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