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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박 마차(Pumpkin carriage) - 9 죠가사키 미카는 방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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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7-07, 2017 23:01에 작성됨.

-346 프로덕션의 신인 아이돌, 이치노세 시키

-발목 부상 죠가사키 미카를 대신해...

 

투둑. 투두둑. 빗방울이 한두 방울씩 지면을 때리다 싶더니만, 이윽고 빗줄기가 되어 쏟아집니다.

시선을 돌려 화면에 비친 기사를 읽습니다. 얼마 전의 음악 방송에 관련된 이야기가 유난히 눈에 밟히는 건 어쩔 수 없을까요. 연예계 전문 잡지를 갈무리하곤, 레슨실에 들어갑니다.

문을 열자마자 보인 건, 분위기가 잔뜩 가라앉은 베테랑 트레이너 씨였습니다. 평소에도 엄숙하고 사나운 표정을 짓지만, 오늘따라 기분이 안 좋아 보이네요.

“트레이너 씨.”

“...아아, 타카가키 씨.”

베테랑 트레이너 씨가 시선을 슬쩍 돌리며 아는 체를 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표정은 풀어지지 않네요.

“미카는 오늘도 쉬는 건가요?”

“...네, 그런 것 같네요.”

음악 방송이 있던 날에서 3주일이 지났습니다.

3주일 전, 그녀는 가벼운 부상을 입었습니다. 일주일만 푹 쉰다면 완치한다는 것이 불행 중 다행일까요. 그러나 일주일, 이주일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오늘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볼게요.”

“타카가키 씨.”

“...?”

“그 날,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

베테랑 트레이너 씨의 곧은 눈동자를 바라봅니다.

잠시 간의 침묵. 그 고요 속에서 여러 생각이 지나갔습니다. 제가 입을 열어 목소리를 내려고 하자.

“...아니, 괜찮습니다. 실언했군요.”

베테랑 트레이너 씨는 고개를 휙 돌렸습니다. 그리곤 제 대답을 듣기도 전에 레슨실에서 나갔습니다.

“상냥한, 사람이네요.”

호랑이처럼 엄하지만 역시 상냥하신 선생님.

그 뒷모습이 평소와 다르게 왠지 쓸쓸해 보였습니다.

 

*

 

커튼 친 사이로 미세하게 흘러들어오는 빛. 그러나 그 빛을 제외하곤 방은 암흑천지다.

이불을 몸에 둘러 그 미세한 빛까지 차단한 뒤, 휴대전화를 열어 메일함을 확인했다.

 

[미카, 몸은 좀 어때요?]

[무슨 일이 있지 않을까 걱정되네요.]

[프로듀서 씨에게 말하기 힘들다면, 저는 어떤가요? 얼마든지 기다리고 있을게요.]

 

“...”

사무소에 출근하지 않은 지도 어언 3주일. 그리고 나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던 그 날이 있는지도 3주일.

처음에는 발목 부상으로 휴식을 취했다. 그러나—그 다음날. 그다음 날에도 발은 떨어지지 않았다.

마치, 그때의 부상이 아직 다 낫지 않은 것처럼. 어찌 된 영문인지 무대 위로, 사무소로 향할 수 없었다.

미안해요, 카에데 씨.

미안해, 프로듀서.

아직도 눈을 감으면 그 일이 악몽처럼 떠오른다.

대신 출연하게 된 음악 방송. 그 소식을 들었을 때—나는 자신 있게 나서서 맡겨달라고 부탁했다.

황급히 서둘러 방송국의 스튜디오로 향하고, 무대 의상으로 갈아입고 이것저것 준비를 끝냈다.

그리고 30분 남았을 때, 그 일이 벌어졌다.

전선을 밟았는지 발이 미끄러졌는지는 모른다.

천천히 흐르는 시간 속, 내 몸이 넘어진다. 바로 잡으려고 몸을 틀었지만 실패했다. 마치 나무에서 사과가 떨어지는 것처럼, 중력의 법칙에 따라 넘어져 버렸다.

넘어진 것만이라면 괜찮아. 그렇지만 바보 같게도, 멍청하게도, 발목을 삐끗했다. 모든 걸 망쳐버렸다.

맡겨달라고 한 주제에. 그리 자신만만한 주제에.

뭐가 카리스마 갸루야. 말만 앞서니까 이런 꼴이잖아.

프로듀서 품에 안겨,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훌쩍이기만 한 모습을 떠올리며 자기 혐오에 빠진다.

그러나—마치 기적처럼, 한 줄기의 빛이 내리쬔다.

이치노세 시키.

프로듀서에게 찾아가 아이돌이 되겠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한 소녀. 첫날에 준비하겠다며 사라진 아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소녀

동료로 받고 싶지 않았던 아이돌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 소녀에게 구원받았다.

 

, 저기. 혹시 그 유닛 곡의 무대 영상, 촬영한 거 있으면 시키 쨩에게 보여줄래?”

 

그녀는 내 빈자리를 대신하여 무대 위에 올랐다.

—한 번의 연습만으로.

아니, 그건 연습조차도 아니었다. 아직도 머릿속에서 아른거린다. 무대 영상을 한 번 본 것만으로 충분했다.

오로지, 한 번만 보고 그 자리에서 완벽히 재현했다.

춤은 어렵다. 배우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마치 공부처럼 평소에 예습이나 복습을 꾸준히 해야 했다.

노력. 또 노력. 신발에 구멍이 나도록 노력했어.

하지만, 그녀는 마치 그걸 비웃기라도 하듯—완벽하고, 아름답고, 군더더기 없이 해내곤 무대에 올랐다.

‘달라.’

나와는 달라. 바보 같고 형편없는 나와는 다른걸.

무대에 처음으로 오르기 전, 긴장감으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떨리는 마음과 두려움을 떨쳐낼 수 없었다.

도중에 아카네를 만나 용기를 얻었다. 무거운 발걸음을 내디딜 수 있게 됐다. 라이브를 무사히 성공시켰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그러한 두려움은 없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타고난 것처럼 무대 위에 올랐다. 그리고 같은 여자가 반할 정도로의 미소를 짓는다.

아직도 사람들의—팬들의 함성이 고막에 아른거렸다. 열광의 도가니를 만들어낸 소녀에게로 향한다.

‘...처음?’

처음.

모든 것이 처음.

어떠한 과정도 존재하지 않은 시작점.

그렇지만 그 시작점은 숨이 막힐 정도로 높았다.

‘그 아이가 들어온다면, 나는...’

무릎을 감싸 안고 머리를 숙였다.

보이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

 

쏴아아아아

먹구름이 가득한 우중충한 하늘. 비는 그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습도가 올라 피부의 끈적임이 느껴진다.

“청승맞게 여기서 뭐 하고 있어?”

처마 밑에 마련된 벤치. 프로듀서는 방문객을 맞이했다. 바로 옆에 앉은 사람은 낯익은 얼굴의 동기였다.

동기는 어디서 꺼냈는지 모를 캔 커피를 프로듀서에게 건네곤, 대뜸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3주 전의 사건.”

“...”

“상부에서도 칭찬이 자자하더라. 하마터면 골치 아픈 일이 터질 뻔한 걸 막았잖아. 게다가 타사도 아닌 자사의 아이돌이 빈자리를 대신했으니 그 기쁨은 두말할 것도 없고.”

프로듀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시선도 돌리지 않고, 여전히 정면만을 바라보았다.

“상부도 이치노세 시키에게 매료된 모양이야. 소문에 의하면 미국에 있는 상무가 영상을 보자마자 연구생이 아닌 정식 데뷔를 해야 한다고 메일까지 보냈다던데—굉장해. 그런 게 타고난 천재란 걸까.”

연구생, 그것도 레슨조차 받지 않은 연구생이다.

그 충격적인 소식은 346 프로덕션 전체를 강타했다.

대부분 사람이 믿지 않았지만, 신원을 확인해보고 조사해본 결과 거짓이 아닌 진실이라는 걸 입증했다.

“...그리고 신인들의 데뷔나 스카우트도 진행 중이야. 분명, 신인인 이치노세의 활약 덕분이겠지.”

프로젝트 드레스는 조기에 그 목적을 이루었다. 심지어 신인의 성공도 있었으니, 대성공이나 다름없었다.

자신감이 붙게 된 미시로는 더는 두려워하지 않고, 아이돌 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그게 결정된 것이 2주일 전의 일이다.

기쁜 소식인 것은 분명한데 날씨는 그렇지 않았다.

보기만 해도 우울해질 정도로 우중충했다. 비는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동기가 다시 입을 열었다.

“미카가 안 나온다며?”

움찔

프로듀서가 처음으로 반응했다.

“어떻게 된 일인지는 묻지 않을게. 알아봤자 내가 어찌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장본인이 도움을 청하지 않는 이상, 제삼자가 끼어드는 건 오지랖에 불과하다. 그게 싫어 가만히 있었다.

“다만.”

꿀꺽꿀꺽. 캔 안에 든 남은 커피를 목 너머로 넘겼다. 그리곤 주먹을 쥐어 캔을 찌그러뜨렸다.

“혹시나, ‘믿어보자’ 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면 그만두는 게 좋아.”

동기는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대화를 시작한 이후로 프로듀서와 눈을 마주 볼 수 있었다.

“아무리 서로 간의 신뢰가 중요하다 할지라도, 그게 무작정이라면 좋지 않아. 무엇보다, 주변의 상태를 파악하지 못하고 생각만 한다면 큰일이 날거야.”

빈 캔이 쓰레기통 안으로 들어가면서 시끄러운 소리를 냈다.

“그, 뭐냐. 좀 민망한 이야기이긴 한데...신데렐라를 성으로 데려가 주기로 한 건 우리잖아. 마차가 없으면, 제시간에 도착할지도 모른다고?”

“...감사합니다.”

프로듀서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 목소리는 어딘가 모르게 결심으로 차 있는 것 같다고 생각됐다.

“별거 아니야. 그럼 슬슬 사쿠마의 레슨이 끝날 시간이니, 난 가보도록 할게. 힘내라고, 프로듀서 씨.”

 

*

 

“언니~”

미카는 여동생의 목소리에 감았던 눈을 떴다. 화들짝 놀라 침대 위에서 일어나, 문을 잠근 걸 확인하곤 목소리를 가다듬고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언니’가 됐다.

“응~? 무슨 일이야?”

“프로듀서 쨩이 왔어☆”

“...!”

올 것이 왔구나. 그런 생각부터 들었다.

만나고 싶지 않다.

프로듀서를 어떤 얼굴로 봐야 할 지 모르겠어. 그동안 왜 오지 않았냐고 물으면 어찌 답해야 하지. 복잡한 마음을 뒤로한 채, 리카에게 곧 나가겠다고 답하곤 옷을 갈아입었다.

최근 요양이라고 집 안에 틀어박혀 있었지만, 가족에게 걱정 끼치고 싶지 않아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다.

만약, 프로듀서가 내가 연락도 제대로 받지 않는다는 걸 말하기도 할까 두려워 서둘러서 현관문으로 향했다.

“...죠가사키 양.”

오랜만에 봤지만, 전혀 변하지 않은 얼굴. 감정도, 속마음도 전혀 알 수 없는 무표정이었다. 리카에게 잠깐 바깥에 다녀온다고 말하고, 프로듀서를 데리고 집 바깥으로 나선다.

도착한 곳은 한적한 공원. 비가 내려서 그런 걸까 역시 사람 하나 보이지 않았다. 평소에 들리던 아이들의 웃음소리도, 날리던 흙먼지도 비에 젖어 흘러내려 간다.

“무슨...일, 이야?”

차마 눈을 마주칠 수가 없다. 시선만으로도 두려워, 등 뒤를 보인 채로 물었다. 무슨 일이라니. 스스로 물었음에도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발목은...좀, 어떠신가요?”

푸욱. 자상한 목소리가 비수가 되어 가슴을 찌른다.

무관심도 아닌, 진심 어린 걱정. 그 걱정에 감정은 격해졌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몸을 떨기만 했다.

“죠가사키 양, 몸을 떨고 있습니다만 혹시 무리해서 나오신 것이라면...”

“아니야!”

격해지는 목소리. 프로듀서가 흠칫하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거짓말할 수 없잖아.’

말꼬리를 흐릴 수도, 딴청을 지을 수도 없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프로듀서에게만큼은 속일 수 없었다. 그게 싫어서, 만나고 싶지 않아 도망쳤다.

처음에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신뢰해줬다. 억지를 부려도 들어주었다. 자신을 위해서 힘내주었다.

불평을 꺼낼 만도 한데—묵묵하게, 듬직하게, 또 정직하게 함께해줬다. 그렇기에 속이고 싶지 않았다.

“있잖아, 프로듀서.”

쏴아아아아

“나—없어도 상관없지 않을까?”

중요한 때에 모든 걸 망친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다.

다들 괜찮다고 말해줬지만, 전혀 괜찮지 않았다.

“죠가사키 양의 잘못이 아니었습니다.”

프로듀서가 미카의 의중을 눈치채곤 말했다.

“아니, 명백한 내 잘못인걸.”

만약, 시키가 그 자리에 없었다면?

상상도 하고 싶지 않다. 그런 가정이 가끔 꿈으로 찾아올 때마다 깜짝 놀라 잠에서 깨어난다.

“더더욱 화가 나는 건 뭔지 알아?”

“죠가사키 양, 진정...”

“어처구니없었던 실수를 대신 해결해주고, 도와주었던 사람이 마음에 들지 않아 심한 소리를 했던 거야.”

마음 깊숙한 곳에 숨겨두었던 감정을 토해낸다. 질척거리고 이기적이고 기분 나쁜 생각을 전부 꺼냈다.

“그 아이 앞에 서면 나 자신이 작아지는 것 같아...으응, 나는—작은 사람인걸. 나, 정말 나쁜 애지?”

사무소에 나가고 싶지 않은 또 다른 이유. 정말로 사소하고 어처구니없는 수준이라 자기 혐오가 들끓는다.

질투.

감사 인사를 하기는커녕, 시기했다. 그 빛이 너무나도 눈 부시고 커다래서 그림자 속으로 물러났다.

실수에서 시작된 자괴감. ‘재능’이라는 격차. 그리고—도와준 사람을 질시한 속 좁은 마음에 구역질이 났다.

“어떻게...돌아갈 수 있겠어?”

손에 쥔 우산이 힘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프로듀서가 놀라 다가왔지만, 미카가 그를 제지하며 소리쳤다.

“나, 이런 상태라면 방해만 될 거야...!”

물방울이 뺨을 지나 턱선을 타고 흘렀다. 그것이 눈물인지, 아니면 빗방울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니까...”

신데렐라는 마법이 풀렸다. 아니, 마법 이전에—호박 마차를 타고 성에 갈 마음조차 생기지 않았다.

“저는.”

프로듀서가 미카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리고 일보전진. 발걸음을 거침없이 내디뎠다.

호박 마차이자 마법사는 신데렐라에게 다가간다.

왕자는 아니다. 무대 위에 함께 오르지도 않는다.

그 대신, 곁에 서서 우산을 씌운다.

“죠가사키 양을 원합니다.”

“에?”

“확실히 이치노세 양은 매력인 분입니다. 그러나 결코 죠가사카 양을 대신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미카가 눈을 크게 떴다. 그 눈동자에 비친 건 무뚝뚝하고 감정 표현에 서툰, 진지한 표정의 프로듀서였다.

“이치노세 양 뿐만이 아닙니다. 죠가사키 양을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프로듀서...”

시간이 되돌아간다. 비가 멈추고, 날이 밝고, 우산이 사라졌다. 그 대신 서로 마주 본 두 사람이 있었다.

처음에 만났던 일. 야쿠자인가 싶을 정도로 무서운 인상을 한 사람이 다가와 허리를 숙이고 명함을 건넸다.

수상쩍어서 무시했다. 그러나 프로듀서는 끈질기게 따라와 아이돌을 권유했다.

 

부디, 명함만이라도...”

 

눈을 감았다가 뜨자 광경이 다시 바뀐다. 귀가 따가울 정도로의 빗소리가 고막을 때렸다.

그렇지만 앞에 있는 사람만큼은 같았다. 대단히 진지한 표정을 한 사람이 앞에 서서 눈을 마주 보고 있었다.

“죠가사키 양의 그동안의 노력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프로듀서는 거짓 하나 없는 정직함을 내보였다.

그녀를 본 순간, 정신을 차리니 앞에 있었다.

자신감에 찬 그 미소를 보고 반했다고 해야 할까. 이제 막 프로듀서가 된 주제에 곧장 스카우트했다.

미카가 모델이었다는 것도 후에 알았다. 그녀가 미시로 소속 틴 잡지 모델이라 다행이었지, 그게 아니었더라면 프로젝트에 조건이 맞지 않으니 큰 곤욕을 겪었을 터.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정말 막무가내였다.

“확실히 사람마다 재능이란 것은 천치만 별입니다.”

1의 노력을 하면 1의 결과를 내는 사람이 있다.

1의 노력을 하면 10의 결과를 내는 사람이 있다.

세상은 절대 공평하지 않다.

재능이란 건 존재한다.

현실은 동화처럼 달콤하지 않다. 냉정하고 무정하다.

이 차이는 마음만으로 어떻게 채울 수는 없다. 선한 마음을 지녔다고 뭐든지 잘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절대로 무의미하지 않습니다.”

10의 결과보다는 눈에 띄지 않을 수 있다. 무의미하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아무도 모를 수도 있다.

그렇게, 빛 한 줌도 내지 못한 채 그림자 속으로 녹아들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게 사라지는 건 아니다. 그 노력이 무의미한 건 아니다. 확실히—가까운 곳에 있다.

“허무하지 않습니다. 무가치하지 않습니다. 어떠한 형태이건, 그 노력은 그림자에 감춰져 있다 할지라도 별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툭. 투두둑.

억세게 쏟아지던 빗줄기가 그치기 시작한다. 폭포수처럼 쏟아지던 소리는 사라지고, 조금씩 옅어졌다.

“용기를 내고 노력해서 발걸음을 내디뎠습니다. 굳이 물리적인 의미를 이야기하는 건 아닙니다.”

그만둬

“고민하고, 생각하고, 결정을 내리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입니다.”

그만두라니까, 바보.

“한 걸음만으로도 괜찮습니다. 그것만으로도—당신은, 여러분은 전진했습니다.”

이런 거, 치사하잖아.

“그러니까, 다시 한번...죠가사키 양?”

미카가 프로듀서의 품 안으로 달려들었다. 프로듀서가 당황하며 그만 손에서 우산을 놓쳤지만, 다행히도 비는 더는 내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데도 그의 가슴팍은 축축하게 젖기 시작했다.

“웃, 정말...싫어, 정말로...!”

감정을 추스르려 하지만 멈추지 않았다. 그렇지만, 마음이 아프진 않았다. 조각조각 찢어지지는 않았다.

이상하게도—눈물이 이리 쏟아지는데 웃을 수 있었다.

마음은 꾸미지 않고 전했다.

진정한 나를 봐줬으면 한다.

강한 체, 어른스러운 척.

가끔은 내려놓는 것도 어떨까.

응석을 부리니 비로소 마음이 풀렸다.

 

*

 

운동하질 않으니 춤추는 법을 모른다, 는 딱히 거짓말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정말로 안 해봤으니 몰랐다.

하지만 직접 따라 해 보니 의외로 쉽게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평소에 실험에 열중하고 운동을 하지 않은 것은 체력을 통해 밝혀졌다. 처음으로 올랐던 무대 이후도 마찬가지였지만, 레슨을 끝내면 자주 빈혈로 쓰러졌다.

그래도 최근 레슨을 통해서 체력을 기르기는 했지만, 오늘처럼 가끔 쓰러져 소파에 누워 휴식을 취했다.

베테랑 트레이너나 사무원은 사내에 의무실도 있으니 그쪽에서 쉬는 편이 좋다고 말했지만, 그녀는 프로듀서의 집무실이 마음에 편하다며 항상 힘들 때면 이곳에 와서 쉬곤 했다.

“후아아...”

몇 시간이 지났을까. 눈꺼풀이 저절로 떠졌다. 희뿌옇게 일그러진 시야가 시간이 지나자 원래대로 돌아왔다.

맞은편에는 직사각형의 자그마한 탁자와 동일한 소파가 놓여있다.

“...”

“...”

“쿨~”

“다시 자기냐!”

어라. 꿈이 아니었구나.

다시 눈을 떠 확인. 소파에는 낯설지 않은 얼굴의 소녀가 방금 전까지만 해도 긴장된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시키 쨩 피곤한 걸~”

“앗...미안. 혹시 어디 아픈 거야?”

“거짓말이지만—.”

“~~~~!”

소녀가 소리 없는 아우성을 내며 화냈다.

시키는 그 반응을 즐기듯이, 살짝 웃고는 소파에서 일어나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백의가 살짝 흘러내려 어깨의 뽀얀 살결이 아슬아슬하게 보였지만,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저기, 저기. 무슨 볼일이라도 있는 거야? 고민이 있다면 Dr.시키가 들어주도록 할 테니까!”

급격하게 오르는 텐션. 정말 어디에 따라야 할지 몰라 피곤함이 섞인 한숨이 저절로 나온다. 그래도 대화를 할 수 있으니 기다린 보람이 있다고 해야 할까. 소녀는 주먹을 꽉 쥐고, 진지한 표정으로 그녀와 마주 봤다.

“오늘은, 고맙다는 인사 겸 사과하러 왔어.”

“후—응?”

“전에...날 대신해서 무대에 올라준 것, 정말로 고마워. 네가 없었다면 큰일이었을 거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무대. 처음으로 올라간 그 무대는 즐거웠다. 팬들의 반응이 신선하고, 자극적이었다.

“그건 시키 쨩이 해보고 싶었을 뿐인걸? 그렇게 고마워할 필요는 없는데 말이야~”

“아니, 도움을 받은 건 사실이니까. 게다가 그때는 제대로 인사조차 하지 못해서 미안해.”

그 날, 끝나고 어땠는지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무대를 보고, 도망치듯이 빠져나왔다. 프로듀서가 병원으로 데려다준다 했지만, 뒷정리가 바쁠 테니 그럴 필요 없다고 거절하고 택시를 불러 이동했다. 프로듀서나 카에데, 시키를 본 건 그 날이 마지막이었었다.

“그리고—나, 너에게 열등감을 느끼고 질투해버려서...모든 걸 내팽겨치고 도망쳤어. 혹시나 신경이 쓰였다면 그것도 사과하고 싶네.”

시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후응.’ 하고 속내를 전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가만히 있었다.

소녀는 그런 시키의 표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똑바로 마주 본 채 이야기를 계속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야.”

호박 마차에서 내렸다. 마법사의 손길을 내쳤다.

마법사는 포기하지 않았다. 호박 마차는 성으로 가지 않고 방향을 틀었다. 도망간 자신을 쫓아와 주었다.

“더는 질투를 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또 도망치거나 하지는 않을래.”

소녀는, 다시 한번 호박 마차에 오른다.

“네가 1의 노력으로 10의 결과를 낸다면, 나는 10의 노력으로 10의 결과를 낼 거야. 그동안 걸어온 길 그대로—도전하고, 노력해서 톱 아이돌을 노릴 거니까.”

그러니까.

“앞으로도...!?”

“후냐아~♪”

자고 있잖아!

사람을 앞에 두고 잠들다니. 그것도 이런 분위기 속에서 잠을 잘도 청한다는 게 어이가 없었다.

“음—냐, 아아, 미안해. 그나저나 무슨 이야기 하고 있었더라?”

시선을 옆으로 돌리며, 깜빡 잊은 얼굴로 천연덕스럽게 웃는 고양이. 그걸 본 소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됐거든! 진지하게 말한 내가 바보 같잖아!”

소녀, 죠가사키 미카가 한껏 성난 목소리를 남기곤 집무실 문을 닫고 났다. 제법 강했는지 ‘쾅’ 소리가 났다.

혼자 남겨진 시키는 굳게 닫힌 문을 살펴보다가, 제자리에서 일어나 건너편의 소파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몸을 비비적거리기를 몇 번, 남아있는 채취를 확인하듯 킁킁거리더니만—살짝 웃으며 중얼거렸다.

“좋은 냄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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